저는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대뜸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영어성경은 'born agai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이 번역한‘거듭’은 중복의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 것을 그냥 둔 채 또다시 거듭하여 더 하는 것입니다. 거듭 나면 목숨이 두 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다시 나지 않으면’, 또는 ‘네가 새로 나지 않으면‘입니다. 처음 것은 없애고, 무효로 하고, 다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아니라 ’다시 남‘, ’새로 남‘입니다.

니고데모가 놀라서 되묻습니다. “제가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납니까? 어머니의 태에 도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은 땅에 속하고 영은 하늘에 속하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이어야 하고, 그래서 너는 영으로 다시 나야 한다.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바람이 불어도 눈에 보이지 않듯이 영으로 다시 나는 것도 그렇단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너도 알듯이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어가던 사람이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듯이 멸망하는 사람이 십자가 위의 독생자를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광야의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죽어가던 죄인들이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영적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거듭남, 아니 ‘다시 남’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시 남’은 바람이 보이지 않듯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성령과 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다시 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과 결심으로, 혹은 노력으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로'는 죄를 씻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성령과 물로 다시 나는 것은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듭, 아니 다시 나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그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을 영으로 다시 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거듭'이 아니고 '다시' 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니고 영의 생명으로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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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는 그 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한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
사람들은 이 굉장한 사람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예수님은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이 산에서 돌아오시지 않자 기다리던 제자들은 밤에 배를 저어 갈릴리바다를 건너려다 풍랑을 만나 고생하였고 그 때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다음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굉장한 사람인 예수님을 찾아다니다 바다 이 편 건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다시 놀란다. “아니. 언제 바다를 건너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먹고 배때기가 부르니 나를 찾는구나.” 하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다 함이 없는 하늘의 떡,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자기 살을 먹으라고? 어렵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여럿이 이해하지 못 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해하지 못 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붙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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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 존중이 오만함과 죄악 선을 는가?

 

  번째 질문 -------------------------------------------

 

 

교만은 심지어  이전에 늘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 문에  번째 라고 어집니다 (두로  교만을 하는 것으로 하여 에스겔 28:14-17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 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함으로 번역  리어와 그리 단어는 마음의 못된 ,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16:18

  말의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 봉이요 만한 마음은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정적인  아니라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도 명합니다. 우리들은 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하여  말을 사용할  있습니다.  단어의 정적인 의미와 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 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모들이 그러한 말을 들에게 사용하지 도록  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있습니다. 

 

적절한 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조물에게 두신  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은사에 대해 감사할 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쟁적인 것으로 변질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에서 그는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대로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 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에는 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무나도 하게, 주의하지  람을 사로는데, 냐하면 그것은 타락  육체의 본질이기 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하시는 하나님의 정당  하는 생각이 자리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사람은 그로 하여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 해결할  있다고 생각하도록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는데, 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취되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가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그로 하여, 다른 사람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니다 (시편 10:2-4; 모데전서 1:12, 13). 사회에

  소수의 문화권 에서, 총체적 교만은  차별,  차별, 그리고 편견을   있습니다.

 

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는 교만을 하는 것은 도움이 니다. 다른 사람의  에서  사람을 헐뜯 (시편 101:5), 교만한  (잠언 6:17),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복음 20:25, 26),   찬을 받아들(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심이나 영심 (빌립보서 2:3, 4),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하기를 (베소서 5:21) --- 랄프 해리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감시를  하지 으면, 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속으 기어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하기  교만이 겉으로 란스 나지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전히 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가뜨니다. 때때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소서. 내게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사되습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있는 능력 인가 하는  완전히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을 습니다. 그러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어주신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능합니다.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해서 교만함을 져서는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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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아들이 있었으나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만이 진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주 대놓고 요셉을 편애하여 요셉에게만 멋진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은 또 꿈 이야기를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멀리 가서 양을 치는 아들들이 무사한지 궁금하여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보냅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지나가는 이스마엘 족속 무역상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종이 되어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나중에 맏형 르우벤이 돌아와 보니 구덩이에 요셉이 없습니다. “아이가 없다, 아이가 없어졌다. 어이할꼬?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큰일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야곱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은 꾀를 내었습니다. 염소를 때려죽이고 요셉의 채색옷을 찢어서 그 염소피를 묻혀서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길에서 이 옷을 주웠는데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닌가 보소서.”
야곱이 대성통곡을 합니다. “아이고, 내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혔구나. 요셉아, 요셉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식음을 전폐하고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들을 따라 죽겠다고, 흰 머리를 날리며 음부에 내려가리라고 몇날며칠 밤낮을 새우며 슬피 애곡합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그렇습니다.
아들의 피와 아들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야곱은 까맣게 모르고 속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다 아시면서 속아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통곡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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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
가슴을 찢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십자가에 몸을 찢으신 주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어느 누가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누가 이런 희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제쳐두고 산타클로스 선물에 검댕 묻은 사람들아.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선물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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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은  훈련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는가?

 

 번째 질문 -------------------------------------------

 

우리들은 훈련 절제의 중요성을  가지 면에서 직면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것을 합니다. 둘째로는,  가능하며, 자유분방하고,  이기주의적인 우리 사회의 본질은 바로   것을 부르짖 있는데, 그것은 오직 개인의 훈련 절제를 하여서만이   있는 것입니다.

 보도 , 기독교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영화, 그리고 하게 도덕을 타락하도록  텔레비전의 연속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세상이  어가고 있는가? 라고    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세상이 게 어가고 있는지, 특별 우리들이  있는  세상의 마지  있을 도덕적인 현상에

대해서  일이 일어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은 결국 내면의 훈련  때문에 일어나는 통제할   회로 결됩니다. 디모데후서 3:1-5   이것을 . 말세에  하는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사랑하며, 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모를 하며, 감사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하며, 자고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하는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게 항목들을 하게 스쳐 지나다면, 아마도 당신은 절제하지 못하며 라는 말을 을런지도 릅니다. 

 

 항목 가운데 있는 다른 모든  행동들은 절제함의 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하고 있는 그러한 ()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게 있어야만 합니다. 수님께서는 너희 서로 사랑하면 이로 모든 사람이 너희 제자인줄 리라.” 라고 말씀하습니다 (요한복음 13:35).

물론, 사랑은  가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번째 열매입니다 (아서 5:22, 23). 절제는  항목에서 마지입니다. 그러나 절제는  있는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  덕을 통제합니다. 제함이  사랑은 정이 니다. 과도한 희락 박한 것입니다. 자제함이   함이 됩니다. 균형   참음은 담함이 니다.

자비는 약점이 되며, 양선은 이기적인 것이 니다. 아무런 이유  충성은 맹목적인 미신과 습니다. 단적인 온유는 겁쟁이가 됩니다. 세상은 사랑과 희락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어두워진 마음은 경건한 삶의  자를  있을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할   세상 에서, 절제에 대한 본을 보여주어야만 

니다.

 

타락하고  세상에서는, 절제는 신앙심이  에서부터 완전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 성령의 열매   바로  육체의 일로 기록한 것들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 숭배와 술수와 수를  것과 분쟁 시기와 분냄  것과 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함과 방탕함과  그와  것들 (라디아서 5:19-21) --– , 주님 앞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성령께서 순화하시도록 함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배제어야 합니다.

 

훈련 절제는 성품을 표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사람들에게는 여가와 쾌락 높은 목표를 하는  필요하다는 것을 니다. 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기도, 성경공, 그리고  것들에 대한 명상과 함께 갖어야만 하는 식과 그들이 사하는  사이에 얼마나  균형있는 삶을 져야만 ?

자제는, 편리하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다른 덕에  품목 아닙니다. 그것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인을 확인시주는 표시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지  운데 열하였으며, 그것을 보다도 믿음에 포함시켰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이 것이 너희에게 있어 족한즉 너희 우리   그리도를 알기에 게으  

  자가   하려니와 이런 것이  자는 소경이라  못하고 그의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후서 1:8, 9).

 

 

관심사: 자제심은 훌륭 지도 위한 근본적인 자질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제심에 대해 본이 되어야   아니라, 또한 자제심을 배우고  하도록 은이들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회자가 자제심에 대해 본이 어야할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와  또한 그들이 영적  야하는 사람들에게 자제심을 취시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엄청난 자의 20  이하 은이들은 그들의 리가 들려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본질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인 험을 해서나  성령님의 역사를 해서  자제심을 개발하지 습니다.  느 보다도 늘날 자제심에 대해 본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정적인  주기 위해서는 자제심의 본은 그것을 르치 사람의 생활과 일관 어야만 합니다.  들면, 명히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절제하는  대해 호소를 한다면  과는 상당히 절감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욕설  것이라고 르친다면 그다지 효력  것입니다.

자제심이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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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 구원자가 올 때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길을 열어두셨지요. 그것이 제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오실 때까지는 애꿎은 짐승을 잡아, 그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의 효력으로 잠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지요.

짐승의 희생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참혹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인간은,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나아갔지요.
그것은 인간의 죄는 참혹한 죽음의 대가 지불 없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대속자(代贖者)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듯 하는 참혹한 고통을 당하며 죽으심으로 그 대속자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역사상 인간이 고안해낸 최악의 형틀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려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하시며 죄인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를 믿는 모든 자는, 그 십자가 아래 엎드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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