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지옥이었던 삼청교육대에서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강제입소된 지 10여 일 정도가 지났을 때, 하루는 전체 입소자들 4백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중대장이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있는가?" 하고 공개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예수를 믿지도 않았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손을 번쩍 들고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너 기도할 줄 아나?" 
"예." 
"오늘부터 네가 매일 저녁마다 대표기도를 한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끝나면 모두 아멘을 복창한다. 알겠나!" 
"예." 
"자,그럼 한 번 대표기도해 봐." 
  
그때 첫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마디 짧은 기도를 하는 동안 온몸에 진땀이 얼마나 홀러 내렸던지 입고 있던 군복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날부터 나는 저녁 점호시간에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은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를 마칠 때 유일하게 "아멘"이라고 입을 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삼청교육대 안에서 내가 대표기도 훈련을 받게 되리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비슷한 내용의 대표기도를 계속 반복했다. 주로 회개의 기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참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불신 가운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항상 원망과 불평과 짜증만을 토하며 우리들 멋대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여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우리 400여 명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잘못한 것, 부모에게 잘못한 것, 아내에게 잘못한 것, 사회에서 잘못한 것 모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합니다. 여기 잡혀 온 우리들은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병든 심령을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와의 인연이라고는 어렸을 때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절기 때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동네 주일학교에 나갔던 것이 내 신앙 경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입을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와 치유의 기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기적이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적도 없었지만 대표기도를 하면서 나는 내면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알기 원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아마도 그 중대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다. 자신이 비록 삼청교육대를 지휘하는 장교의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신앙에 비춰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입소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대표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 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조교들이 하나같이 악랄하고 못됐던 것은 아니었다. 조교 가운데는 입소자들에게 인간적으로 동정을 표시하고 절대로 구타를 하지 않는 그런 신사적인 조교들도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잠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건빵 한 봉지와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메모를 읽어보고 나는 누가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훈련받는 것이 많이 힘들겠지만 당신이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요. 조금만 더 인내해서 꼭 건강하게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 메모 내용으로 미뤄 그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고 또한 누구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다른 조교들과는 많이 달랐던 그는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설을 내뱉는 일이 없었고, 내무반 점호시간에도 이 조교가 점호를 하는 날이면 가장 쉽게 넘어갔다. 물론 단체기합이나 구타가 없어서 좋았고 그는 늘 "이제 이곳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곧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불어 넣는 말을 해주곤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 조교의 얼굴을 떠올린다. 황량하고 삭막한, 그리고 공포 분위기만 조성되고 있었던 삼청교육대 안에서 그런 조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저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키울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하는 대표기도를 일주일 정도 했을 때였다. 어느 날 하루는 점심식사를 30초 만에 마치고 모두 다시 훈련장으로 집합했는데 소대장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너희들 중에 매일 대표기도 하는 놈이 누구냐?" 
"예, 접니다." 
"그래,너 이리 나와봐. 이 자식이, 너 여기가 무슨교회나 종교집단인 줄 알아?" 
  
가슴 정중앙으로 돌맹이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가 떨어졌는데,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 이 새끼야. 네가 하나님을 믿는 놈이면 지금 기도 열심히 해서 내가 너를 못 때리도록 한 번 해봐. 이 망할 놈의 예수쟁이야." 
그는 평소에 기독교인들을 무척이나 혐오해왔고 점호시간에 대표기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해서 언젠가 중대장이 없는 틈을 타서 대표기도 하는 놈을 잡아 해코지를 하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자 곧바로 다시 가슴 정곡을 주먹 으로 가격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후에 지옥을 다녀온 사람들의 충격적 증언!  (0) 2017.02.20
사막은 은혜의 땅 7  (0) 2017.02.19
사막은 은혜의 땅 5  (0) 2017.02.15
사막은 은혜의 땅 4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3  (0) 2017.02.13

처음에는 구타를 당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해 보기도 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피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몇 번씩 그런 구타가 반복되고 나면 체념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너희들이 죽이려면 죽여 봐라. 너희가 죽이기 밖에는 더 하겠냐?' 하고 고양이에게 몰린 쥐의 심정으로 독한 앙심이 피어오를 때가 많았다. 
  
구보를 마치면 곧바로 피티체조 유격훈련 등 그야말로 '혼 빼기 훈련'이 계속된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우선 매를 맞는 것이 무서워서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몸부터 움직였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루는 유격훈련을 받다가 조원 한 명이 낙오되었다. 감시하고 있던 조교가 무차별 구타를 가하자 얼떨결에 대응 방어를 한다는 것이 조교의 가슴팍을 쳤다. 조원으로부터 졸지에 가슴 가격(?)을 당한 조교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더니 머리, 허리 가릴 것 없이 개 패듯이 조원을 때리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머리통, 입,다리 등 온몸에서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다른 조교들 이 달라붙어 열받은 조교를 떼어 놓는 틈에 그 사람은 간신히 그 자리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을 모면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로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더니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물론 그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길도 없었다. 
  
미친 듯이 하루 종일 훈련을 받은 후 내무반으로 돌아와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면 '취침 전 내무반 점호'라는 것이 시작된다. 점호 시간은 조원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고, 조교들은 어쩌면 이 시간을 가장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빨간 모자의 조교 중에 유난히 악랄하고 신경질적인 조교가 한 명 있었다. 그 조교가 점호를 하는 날이면 대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기묘한 형태의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악몽을 겪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악랄한 조교가 자신의 더러운 정체를 밝혔다. 기합 도중에 난데없이 모두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에서 몇 사람을 불러 거꾸로 물구 나무서기를 시켰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의 물건에 이상한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는 순진한 여자들을 몇 명이나 울렸냐면서 다짜고짜 몽둥이 구타를 시작했다. 그는 성도착증 환자였다. 우리 소대에는 고등학교에서 불량학생으로 찍혀서 교실에서 수업을 받다가 끌려 온 제일 막내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 학생의 바지 뒤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녁에 약을 좀 발라 주기 위해 바지를 벗겨 보니 항문 주위가 완전히 걸레조각처럼 헤어져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 이었다. 
  
ㅡ이런 지옥 불에 떨어질 더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분노와 서러움이 솟아 올라오는데 그럴 때는 정말 주위에 있는 모든 군인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는 독한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삼청교육대는 현실 세계 속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생지옥이었다. 
  
지옥훈련을 받는 동안 우리는 옆에 있는 조원의 이름이 뭔지, 뭐하다 잡혀 온 사람인지 서로 알지 못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 오던 날부터 우리는 별도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말을 할 수 없도록 함구령이 내려져 있어서 그 흔한 통성명도 할 수 없 었다. 
  
또한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육신적으로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을 둘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들어오면 단 1분이라도 더 자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원들 사이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동료애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 옆에 누워 있는 조원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웃음으로 답해 주곤 했는데 그런 짧은 미소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당시 빨간 모자를 쓰고 조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동안 거리를 지나가다가 스치며 지나간 조교들도 있었으리라. 단지 그들이 과거 삼청 교육대 조교로서 여러 사람들을 가해했던 자신의 과거를 철저 히 감추며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애통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들 중에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지 개인적인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조교 출신들도 있는 줄로 안다.  
  
그렇지만 스스로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바란다.  
  
자신들이 행했던 일들이 과연 단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본인들의 집단 가학적 악의 본성을 드러낸 채 철저하게 인권을 묵살하며 행한 가학적인 행동들이었는지 누구보다도 당시 빨간 모자를 썼던 본인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삼청교육대 조교로 일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양심 선언을 하고 나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휴전선 인근 한탄강변에 임시로 시체 소각장이 세워졌었다고 한다. 거기서 삼청교육대 훈련 중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화장했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 일대에서 화 전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주민들이 시체 태우는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했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삼청교육대 사망자 수는 57명에 불과하다.  
  
과연 언제까지 삼청교육대의 만행이 제도와 권력의 이권 때문에 안개 속에 가려져 있을 지 미지수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냥 지울 수 없는 삼청교육대 인권 유린의 역사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관련자들이 공개 사과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그런 날이 오게 되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은 은혜의 땅 7  (0) 2017.02.19
사막은 은혜의 땅 6  (0) 2017.02.19
사막은 은혜의 땅 4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3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2  (0) 2017.02.13

일장 훈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화교육?" 

군 장성의 연설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막상 순화교육의 실상은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짓밟고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하는 인권유린 그 자체였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사람이 몰래 군용견 개밥을 홈쳐 먹다가 걸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구타를 당했으니 그곳은 분명히 개보다 사람의 가치가 훨씬 못한 곳이었다.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 

"인간 재생" 
"땀으로 그늘진 과거를 씻는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인간교육장" 
  
도대체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일반 시민들에게 전두환 정권은 어용 언론들을 통해 깡패와 전과자, 인신매매범들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을 순화 교육시키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언론의 보도를 보고 들은 국민들은 그 모든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삼청교육대가 사회의 악을 뿌리 뽑고, 사회 분위기를 건전하게 이끌기 위한 긍정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이 잘한 일 중의 하나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던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열린 눈과 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바라보면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군사 정권이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반 시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인권 유린의 치욕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주 동안의 강제 순화교육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군인의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어떻게 사람을 4주 동안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4주 안에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충실하기 위해 훈련 조교들은 '죽이기 아니면 사람 변화시키기'라는 각오로 표현조차 하기 힘든 구타와 지옥 훈련을 거듭했다. 또한 잡혀 온 사람들에 대한 획일적 매도는 어이 없이 끌려 왔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갔을 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두 번째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과 같았다. 군부는 삼청교육대에 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불량배, 깡패, 전과자들인 것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실상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전두환 정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반동분자들(?), 쓰라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던 신문사 기자, 영문과 까닭도 모르고 그저 군경 합동 단속과 머리 숫자 채우기에 걸려든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부녀자와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 자 대상은 무척 다양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보냈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볼 때 그 기간 동안 내 머릿 속을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나가자'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견디기 힘든 구타와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삼켜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밤에 도주를 시도했다가 몇 시간 뒤 잡혀 와서 죽을 때까지 얻어맞는 사람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때의 악몽을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때의 아픔과 고통이 마음 가운데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시의 기억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그 모든 악몽을 묻어 두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지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유가 될 수 있는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프고 치욕적인 상처를 그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기만 한 사람들은 이미 상처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삼청교육대에 관한 한 나는 20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에게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최근에 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했던 일을 고백했을 때 아내는 뒤로 나가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그때의 일들은 되새길수록 더욱 고통이 심해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렇게 그 당시의 모든 일을 아내와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 당시의 일들을 남김 없이 고백하는 동안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절반을 사로잡고 있던 삼청교육대의 악령이 드디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의 기억 은 지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던 악의 실체였다. 
  
빨간 모자의 조교 

나는 아직까지도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곤 한다. 빨간 색깔의 모자는 내게 있어서 가해와 폭력의 상징이다. 삼청교육대에서 빨간 모자를 썼던 조교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은연 중에 쾌감을 느끼는 그런 가학 적인 변태인간들이 많이 있었다. 저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미삼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대방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큰 쾌감과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내심 만족하는 것이었다. 시골 논밭에서 개구리를 잡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재미 있겠지만 잡혀서 놀림을 당하는 개구리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삼청교육대에서 우리는 시골 논밭의 개구리와 같은 심정을 느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대 안에는 5개 소대가 있었는데 나는 제3소대에 속해 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기상시켜서 밤 10시까지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고, 계속 얼차려와 뼁뺑이 돌리는 것이 저들의 일과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연병장을 도는 구보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냥 구보가 아니라 조교의 명령에 따라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빠르게 달렸다가 속도를 늦추곤 했다. 좀 나이가 든 사람은 연병장을 한두 바퀴 돌고 나면 영락 없이 뒤로 처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조교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지 더 이상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다가 뒤로 처지는 사람들은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그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은 은혜의 땅 6  (0) 2017.02.19
사막은 은혜의 땅 5  (0) 2017.02.15
사막은 은혜의 땅 3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2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1  (0) 2017.02.12

"너,조서 만들 때 누가 뭐라고 하든지 조서 내용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너 같은 녀석은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니까 내 말을 꼭 명심해라." 
  
구치소에서 재판을 대기하며 미결수로 기다리고 있던 시간은 참으로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감옥에는 외부로 향한 작은 창문 하나가 벽 높은 곳에 있었다. 가끔씩 그 창문가에 참새들이 날아와서 마음껏 지저귀다가 마음이 내키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새가 너무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자유가 그렇게 크고 고마운 것이라는 사실을 감옥 안에 있으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 일 주일 정도가 지난 후 드디어 호출이 왔다. 

'내가 왜 여기를 들어왔나.'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검사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사복 차림의 형사 그리고 군인 분위기가 물신 풍기는 다른 2명의 건장한 사람이 역시 사복 차림으로 있었다. 

"이름이 김태훈 맞나?" 
"예." 
"얼마 동안이나 선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공갈 협박하는 건달짓을 하면서 살았나?"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미 너를 동네 깡패로 고소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니, 누가 나를 동네 깡패라고 합니까?" 
"글쎄,고소한 사람이 있으니까 네가 구치소까지 들어온 것이 아니겠냐고. 긴 말할 시간 없으니까 조서에 지장이나 찍 어. 순순히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조서 내용을 한 번 읽어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난 후에 지장을 찍겠습니다. 그리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데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습니다." 
"아니,이 새끼가 아직 주둥이만 살아가지고,정식 재판 같은 소리하고 자빠져 있네" 
조서 내용을 직접 보겠다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욕설이 퍼부어지더니 방 안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 새끼가 깡패 건달 주제에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무슨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아. 이 새끼, 정신이 바짝 나게 한 번 맛 좀 보여 줘라." 
  
잽싸게 사복 차림의 형사와 군인이 동시에 팔을 뒤로 잡아채더니 구둣발로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뼈가 쪼개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조서를 들고 팔을 잡아끌어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그 조서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결국 강제로 그 조서 내용에 동의한다는 지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10여 대의 버스가 구치소에 도착했고 완전무장한 계엄군인들에 의해 공포 분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어디론가 강제 이송되고 있었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세상 이 좋아졌지만 1980년대에는 군사 정권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었다. 6시간 정도는 족히 버스가 달려온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여러 차례 내 손으로 여기저기를 심하게 꼬집어보기도 했다. 제발 현실이 아니라 꿈이기를 바랐다. 이런 악몽이라면 정말 빨리 깨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는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정말 간절하게 이 모든 일들이 꿈이기를 바랐는데...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미명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밤새도록 어디론가 달려온 버스는 구치소 수감자들을 군부대 연병장에 쏟아 놓고 마치 청소차가 할 일을 다하고 쓰레기 하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주위에 서 있던 군인들은 말끝마다 욕설이었다. 연병장 중앙에 고장난 로봇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람들에게 군복이 한 벌씩 지급되었다. 옷의 크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지급된 군복 안에 자신의 몸을 맞춰 집어넣어야 했다. 배가 남산만큼 나온 사람이 조그만 군복을 지급받아 배꼽이 볼썽 사납게 불거져 나왔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땅콩처럼 조그마한 사람이 큰 군복을 받아서 완전히 쌀푸대 속에 아이가 들어가 있는것과 같은 그런 웃지못할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에는 일제히 바리깡으로 머리를 삭발시켰다. 긴머리가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그 옆에서 함께 흐느끼던 사람은 남자녀석이 계집애처럼 질질 눈물을 흘린다고 붙잡혀가서 기절할 정도까지 구타를 당했다. 머리를 깎는 바리깡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털을 뽑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난폭하게 바리깡을 밀어대는지 가끔씩 머리 살점이 머리털과 함께 떨어져 나오면서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한 사람 말을 할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 함구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300-400명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머리를 모두 삭발시킨 뒤에는 5개조로 사람들을 나눠서 합판 조각으로 엉성하게 야전 침대를 만들어 놓은 막사 안으로 각각 나눠서 배치를 시켰다. 그리고 아침 해가 제법 높이 올라 왔을 때 쯤 막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연병장으로 집합시키더니 소속군대 고위 장교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올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 연유로 인해서 오늘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정신과 육체를 말끔히 순화하고 사회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도록 집중훈련을 받은 후, 순화교육 평가에 따라 빠르면 4주 이내에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순간도 다른 생각하지 말과 이번 순화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길 바란다. 국가는 여러분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회악이 아니라 앞으로는 사회의 발전과 건설에 앞장서는 건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은 은혜의 땅 5  (0) 2017.02.15
사막은 은혜의 땅 4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2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1  (0) 2017.02.12
죽음에서 살아난 불교 스님, 지옥에서 본 부처  (0) 2017.02.12
개처럼 끌려가던 날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대로 엎드리고 있어." 
"고개 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조금이라도 몸의 움직임이 어눌해 보이면 가차 없이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여기저기서 수박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잔뼈가 굵어온 나였지만 이때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폭력의 연속이었다.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 하는 무저갱의 깊고 어두운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와 절망의 순간들이었다. 

군인들은 팔을 뒤로 해서 북어포처럼 열 명의 사람들을 묶은 뒤 총부리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를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곁눈으로 언뜻 보기에 10대 정도의 버스가 구치소 운동장에 정렬해 있었다. 우리를 구치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같기는 한데 당시 나는 내가 어느 곳으로 이동해서 얼마동안 있게 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단지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비밀스럽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만을 받고 있었다. 
  
버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머리에서는 조금 전에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은 곳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땀방울과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릎 사이에 그대로 고개 처박고 있어."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동작을 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아라." 

버스 안에는 3~4명의 군인들이 나눠 타서 계속 거칠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운전수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심하게 버스를 운전하고만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지만 군인들이 지금 버스 안의 어느 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리를 구부려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자니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이렇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것일까?' 

허리의 통증과 함께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등포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단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공장에서 해고된 뒤 소식도 전혀 없고 해서 정말 큰마음을 먹고 간 길이었다. 밥이나 제대로 먹으면서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초췌한 얼굴의 친구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 남동생 2명이 함께 있었다. 몸이 많이 아팠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걸려는 참에 동생들이 말을 막고 나섰다. 평소에 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사이였는데, 마침 친구의 몸이 아픈 것이 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삿대 질을 하면서 대드는 것이었다. 잠시 옥신각신하면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집 주변을 지나던 경찰 몇 명이 들이닥치면서 다짜고짜 수갑을 채웠다. 
  
그날 저녁 나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당연히 훈방조치를 받을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도대체 죄명이 뭔데 나를 구치소로 이감시키느냐 는 질문에 경사 한 명이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폭력에 공갈 협박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나"라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공갈협박?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치소로 이감되면서 나는 아내와 가족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구치소 감방은 20명이 서로 어깨를 부딪쳐야 겨우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 안에 확실한 서열이 있었다. 감방 한쪽 구석에는 냄새가 지독히 나는 변기통이 있었는데 그 변기통 옆자리는 전과도 없고 죄목도 변변치 않은 그런 시원치 않은(?) 사람이 앉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연히 오늘 새로 들어온 내 차지가 되었다. 가장 중앙에는 전과 19범이라는 고참이 앉아 있었다. 
  
구치소 안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고참 죄수가 재판장이 되어서 모의재판이 열린다. 물론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고참 죄수가 때린 형량이 실제 재판에서도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형무소를 그렇게 자주 드나들고 재판도 여러 번 받다 보면 거의 판사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하며 실소를 지었다. 

내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중앙에 앉혀 놓고 모의재판 심문을 시작했다. 

"전과가 있는가?" 
"없는데요." 
"무슨 죄로 들어왔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잡혀올 때 무슨 일이 있었을 것 아닌가?" 
"친구 집에서 말싸움이 벌어졌는데 지나가던 경찰이 들어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너도 별볼일 없는 놈이구만." 
"여기 잡혀온 놈들 중에 너같이 어리숙한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같은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술 먹고 고성방가 하다가 잡혀 온 사람, 길거리에서 소변보다가 잡혀 온 사람, 장발머리 단속에 걸린 사람, 구멍가게에 외상값이 밀려 주인의 신고로 잡혀 온 사람, 몸에 문신 새긴 사람 등등이 많았다.
 
과거 같았으면 경범죄로 걸려서 각서 정도 쓰게 하고 훈방 조치되었을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두 구치소로 후송되어 정식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과 19범이 되는 사람은 눈을 부릅뜨면서 나에게 한마디 훈계를 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은 은혜의 땅 4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3  (0) 2017.02.13
사막은 은혜의 땅 1  (0) 2017.02.12
죽음에서 살아난 불교 스님, 지옥에서 본 부처  (0) 2017.02.12
김규현 장로-다니엘 기도회  (0) 2017.02.10
25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삼청교육대의 뼈아픈 과거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소연을 하려고 이런 저런 말을 몇 마디 하다 보면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런 일을 당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며 내심 당연하다는 반응마저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속만 더 뒤집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삼청교육대와 관련된 모든 기억은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뒀었다. 그 누구에게도 삼청교육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2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조차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말을 안한다고 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나는 그저 의식세계에서 철저히 부정하며 살아왔다. 
  
1980년 전두환 군사 정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 유린의 범죄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서 국민들에게는 '사회악 제거' '밝은 사회 만들기 운동'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미지 홍보 작전을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당시 어용 주요 일간지와 TV 보도 매체 등은 앞을 다투어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이곳에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폭력배, 인신매매범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로 매도됐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는 경범죄에나 해당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죄목이었는데 시기를 잘못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살아나올 수 있었다. 
  
천신 만고 끝에 지옥훈련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이들은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의식적인 폭력에 또 한 번 희생자가 됐다. 
  
군사 정권이 물러간 후 삼청교육대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면서 밝혀진 실상은 아래와 같다. 
  
삼청교육대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군사 정권 하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 유린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3호를 발표, 삼청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삼청교육대는 삼청계획 5단계, 민중에 대해 가해진 폭력 사건, 혹은 그 사건을 위해 설치된 기관을 가리킨다 
  
이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구 전과자 및 우범불량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진행되었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형사들, 경찰서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되었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무작위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 명을 넘었다. 
  
이후 검거된 사람들은 A, B, C, D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 심사 과정을 거쳤으나, 검거된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 A급 : 조직 폭력배/공갈치기배의 수괴 및 중간간부, 상습폭력, 실형 2범 이상, 흉기소지, 강도 절도 밀수, 마약현행범, 인신매매범一군사재판 
  
* B급 : 조직 폭력배/ 공갈치기배의 행동대원, 기타 경제/정치 폭력배, 상습도박, 사기꾼, 폭력우범자, 강도, 절도, 밀수, 마약, 재범 위험이 있는 전과자-4주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 C급 : 폭력 사실이 경미하고 우발적인 범행자. B급 중 정상이 참작된 자-4주 순화교육 
  
* D급 : 초범, 사안이 경미한 정상적인 학생 및 소년, 직업과 주소지가 일정해 개선 가능성이 뚜렷한 자-훈방 
삼청교육대의 주 대상은 B,C급에 해당되었다. 
  
경찰에서 인계된 39,786명이 군에 인계될 무렵에는 39,742명으로 44명이 이미 명단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이송단계, 또는 초기 기죽이기 단계에서 구타 또는 극심한 기합으로 인해 충격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청교육대는 본래 4주간의 순화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입소 초기에는 장교들과 사단장들이 "4주 후에 보내준다" "훈련 잘 받으면 일찍 간다" 등의 말로 안심시키며, 동시에 '시범케이스'로 무작위로 골라낸 훈련생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약속한 4주가 지나도 훈련생들은 풀려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군부대 내 강제 노역에 다시 배치되었다. 
B급 10,016명은 이후 20여 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 봉사',즉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 근로 봉사는 훈련생들이 지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압에 의해 자원서에 서명하게 된 것이었다. 
1981년 1월 24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그들 중 8천여 명은 1~5년 사이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훈련 도중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1988년 피해 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바에 따르면 군부대 내 사망 112 명, 구타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 397명, 부상, 상해 장애자 2,786명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삼청 교육대에서 당한 피해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므로 이 숫자도 정확한 피해 통계라고는 할 수 없다.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현재까지도 "공소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회가 약속한 삼청교육대 특별법은 계속 결재가 미뤄지며 다음 회기까지 넘어가 자동 폐기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린 소녀의 기도 (아프리카 여자 선교사님의 글)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분만실에서 한 산모를 보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그마한 미숙아와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어대는 두 살짜리 딸을 남겨 두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미숙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는 참으로 힘들 것이 분명했다.

우리 병원에는 인큐베이터도 없었고 아기에게 영양을 공급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구들도 없었다(사실 당시 우리 병원에는 인큐베이터를 가동할 전기도 없었다).

우리는 적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으스스할 때가 많았다. 한 간호학교 학생 산파가 이런 아기들을 위해 준비해 둔 상자와 아기를 쌀 면 수건을 가지러 갔다. 또 다른 산파는 물을 끓이기 위해 불일 피웠다. 잠시 후 그녀는 당혹스런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물을 끓여서 고무 보온병에 넣는 순간 그만 보온병이터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저희에게 있는 마지막 보온병이었습니다!”

열대 기후에서는 고무가 쉽게 상하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서양 속담처럼 이곳 중앙아프리카에서 터진 보온병을 놓고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을 판이었다. 주전자가 나무에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숲을 나가면 약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괜찮아요!”


“아기가 안전할 정도로 가능한 한 불 가까이 눕히세요. 그리고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문과 아기 사이에 누우세요. 당신의 일은 아기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정오쯤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자원하는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러 갔다.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내놓았다. 덧붙여 갓 태어난 작은 아기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보온병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아기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설명했다.

아기의 체온이 내려가면 아기는 쉽게 죽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아이들에게 엄마가 죽어서 울고 있는 두 살짜리 아이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기도 시간에 열 살 된 룻이라는 여자아이가 우리 아프리카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이 무뚝뚝하고 간결하게 기도했다.



룻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보온병을 보내주세요.


하나님 내일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때면 아기가 죽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오늘 오후에 보내주세요.”


나는 그 대담하고 용감한 기도에 가슴이 미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룻은 마지막에 이렇게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님!


보내실 때 저 어린 소녀를 위해 작은 인형도 하나 보내주세요.
하나님이 그 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 수 있게 말이에요. 아셨죠?”

아이들과 함께 기도할 때 자주 그렇듯이 나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정직하게 “아멘”할 수 있었을까?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분이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속엔 상당히 큰 “그러나”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향에서 부친 소화물을 나에게 보내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프리카에 거의 4년을 있으면서 고향에서 소포(소화물)를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누군가 나에게 소화물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누가 거기 보온병을 넣어 보내겠는가? 난 적도에 살고 있는데!



오후가 반쯤 지날 무렵, 나는 간호사 훈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들어와서 내 집 앞에 차가 한 대 와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차는 가고 없고 베란다에 10킬로그램짜리 꾸러미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눈물이 찔끔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혼자서 그 꾸러미를 열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아원 아이들을 데리러 보냈다.

우리는 함께 조심스럽게 끈을 하나하나 풀었다. 우리는 포장지를 함부로 찢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었다. 우리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30-40쌍의 눈동자들이 큰 종이상자에 맞춰졌다. 맨 위 상자에서, 나는 밝은 색 니트 셔츠들을 꺼냈다. 옷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다음 상자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붕대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상자에서는 건포도가 들어 있었다. 주말에 건포도 롤빵을 만들어 먹으면 딱좋을 것 같았다. 그다음 나는 다시 자루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무언가 잡혔다. 정말일까? 나는 그것을 끄집어냈다. 정말이었다. 상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고무 보온병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것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룻은 아이들 맨 앞에 있었다. 룻은 앞으로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

“하나님께서 보온병을 보내셨으면 틀림없이 인형도 보내셨을 거예요!”


룻은 상자 바닥까지 뒤적이다가 작고 예쁜 옷을 입은 인형을 꺼냈다. 룻의 눈빛이 빛났다. 룻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룻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저랑 같이 가서 그 아이에게 이 인형을 전해줄래요? 하나님께서 그 애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애가 알 수 있게 말이에요?”

그 소화물이 배달되는 데는 꼬박 5개월이 걸렸다. 그 짐은 내가 가르쳤던 주일학교 학생들이 보낸 것이었다. 지금 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적도에 보온병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긴급한 명령을 듣고 순종했다. 그리고 그 반 여자아이 하나가 “그날 오후” 인형을 주시리라고 믿고 기도한 10살 소녀의 기도에 응답하여 한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인형도 하나 넣었다.

- 책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중에서 발췌 -

출처: 갓톡


이 글은 "우찌무라 간조"의 아내를 잃고 겪은 고통을 통해 경험한 신앙 체험담입니다. 이 성도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감화와 교훈을 줍니다. 요소요소에 우리 각 영혼에게 필요되는 성령의 음성이 분명히 들려집니다.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서 각자에게 필요한 성령의 음성을 들어시고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아내의 죽음 우리 모두는 죽음이 생명을 가진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생물계가 존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가족중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는 유족들을 위로할 때,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위로를 받지 못하면 나는 그들에게 신앙이 없음을 탄식하고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나무랐습니다. 옛날의 영웅들은 용감한 모습으로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리스도인이라면 종교의 도움이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더욱 더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서서 대장부처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그녀가 잠시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아쉬움을 위로하고 다시 만날 즐거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전송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성경과 과학이 말하는 죽음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비로소 나는 그 깊이, 아픔, 슬픔, 그리고 괴로움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하였을 때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의미가 있었지만 사랑이 내곁을 떠난 지금은 모든 것이 빛을 잃었고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내 고통의 이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데서 오는 고통은 이 세상을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떠나야 할 곳이므로 오늘 잃거나 30년 후에 잃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피를 쏟아 부은 나의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 부은 기도가 저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데서 오는 회의는 나를 악마에게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믿음은 기대고 의지할 토대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에정과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낙담은 없었을 것입니다. 피를 토해낸 내 기도를 외면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의사는 내몸을 걱정하여 안정제와 수면제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내 아픈 영혼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냉정한 이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돌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위로도 친구의 권면도 이제는 식어버린 내 마음의 신앙에 불을 지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성난 곰처럼 " 내 사랑하는 자를 돌려다오! "라고 외치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나는 믿습니다. 나의 구세주는 죽음에서 부활하였던 사실을 믿습니다. 나의 아내 또한 구세주께서 오실 때 다시 부활하여 재회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의 슬픔은 그런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문제는 "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는가? " 입니다 하나님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의 법칙을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요? 우주의 창조주요 왕인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요? 내 기도에 열심과 정성이 부족해서 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기 위하여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내게 내리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내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만 안다면 나의 믿음은 곧 회복되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첫번째 계단 내 양심속에서 한 조그만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실 때에 사용하시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살리실 뜻이 있었다면,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를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불신자는 치료와 회복의 여부를 의약의 효과롤 돌리고 의사의 기술력으로 돌리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뢰합니다 두번째 계단 사탄은 나에게 이러한 생각을 주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따라서 비를 내리시고 눈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데 왜 기도해야 할까요?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자 굴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건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기 어려운 환난을 허락하셨고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까? 도대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내를 잃고 나서 나는 몇달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던 내가, 기도없이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내가, 아내를 잃은 후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 원한으로 밥상을 대하고 눈물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고통 중에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하소연이었습니다. "아! 하나님 나의 이런 말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당신 자녀의 믿음을 꺾고 상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영혼의 아픔때문에 당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께 기도하지 않았다 해서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조? 아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보다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지금 당신은 내게 더 큰 사랑과 위로를 주시겠지요? 내가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때에는 당신의 특별한 은혜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는 때야말로 당신의 돌보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아내를 잃고 우주의 표류자가 된 지금이야말로 제가 극도의 실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리려고 하는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제 뒤를 ?아와서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막으시겠죠?" 그러나 시간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나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께 기도해 왔기에 아내의 죽음 이후에 나는 뜻하지 않은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육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혹시 육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어 기도할 때에는 항상 "만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시면"이라는 말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믿고 둘어주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기도를 그만 둘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오늘 밤부터 전보다 더욱 열심히 당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세번째 계단 이 때 악마가 다시 내게 속삭였습니다. "너는 뜨거운 기도로서 불치의 병자를 낫게 한 예를 모르느냐? 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네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죽인 것은 내 열성의 부족 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내를 죽게한 죄는 내게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입나다. 만일 열심이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심을 가지지 못한 자야 말로 가련한 존재입니다. 죽을 각오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꾸시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산자를 죽이신 단 말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인생들의 최선을 아십니다.그분의 선한 지혜에 따라서 일의 결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는 내 믿음의 부족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는 결국 죽었습니다. 누군가 내 열심이 부족했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내게 있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만일 당신께 대한 나의 신앙이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반드시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이 시련을 능히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의 죽음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부족해서라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저의 열심과 믿음이 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신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나 기쁘게 만듭니다." 네번째 계단 악마는 다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믿는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너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악마에게 응답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게 주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는 어떤 목사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성경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형벌"이 없다. 형벌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낱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형벌은 '어둡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형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옥불도 악인과 의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선과 의를 싫어하는 악인을 영원히 살게 한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살인과 강간과 도박과 미움과 증오속에서 악인들끼리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는가? 지옥불로 악인의 생명을 거두심으로써 우주에서 악이 근절됨으로써 온 우죽 안전하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혜이다. 나는 지옥불에조차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 하나님은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섯번째 계단 악마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혹을 내 마음에 심고자 하였습니다. "네 아내는 왜 그렇게도 단명해야만 하니? 그녀가 순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자기를 잊어버리고 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난과 싸우며 성경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당했다. 왜 그녀는 단 한번의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한 채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가한 분인가?" 참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의혹입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속에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성경은 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15:19)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아내가 이 세상을 즐기지 못한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존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아프리카의 산속에 파 묻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과 팔에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는데 일평생 충성과 희생의 삶을 산 내 아내의 몸에는 다 떨어진 천이 걸쳐져 있을 뿐입니다. 이 땅은 악마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졌단 말입니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시중을 들었던 아내는 단 한 번의 낙도 누리지 못한 채 일찍 가버렸는데 악마의 자식들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정녕 이 지구는 악마와 그 자식들에게 주어졌단 말입니까? 이 심원한 의문에는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현재의 지구보다 나은 세계가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대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고 진리가 없다면 우주를 지탱케 하는 법칙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법칙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우주도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늘과 땅이 내 눈 앞에 존재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대답 속에 나를 만족시키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이후에는 이 지구(땅)위에 의인들만을 위한 새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지구는 의인들의 손에 주어집니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한 주인이 될 의인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의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참으면서 그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과 진실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입니다. 악인들은 페르시아의 진주를 구하고 오를로의 보석을 구하지만 의인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짜인 의의 옷을 구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지구의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금과 은은 얻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지옥 불을 맞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자는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예루살렘의 진주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하늘 도성의 금으로 된 거리를 걷기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진주와 금을 버리는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아름다운 진주와 금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 속 깊은 동기까지 금과 은에 의하여 시험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만이 이 세상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 역시 이 진리의 공식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를 회복시키는 하나님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늘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과 후회가 있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녀의 미소에 불쾌한 얼굴로 대답하였고 그녀의 희생에 충분한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던 사실이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심지어는 그녀가 병자들을 간호하다가 몹시 지쳐서 내게 위로를 청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의 연약함을 나무라면서 거친 말로 대꾸하였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유순하고 충성스러웠지만 나는 이따금 냉정하고 성실치 못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땅에 부끄럽고 하늘에 부끄럽습니다. 보답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용서를 빌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며 가슴을 치며 뉘우쳐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이러한 회한이 밀려오는 밤마다 나를 지옥 불속에서 매질합니다. 어느날, 나는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서 한 송이 꽃을 꽂는데 어디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느냐? 너는 지금도 아내에게 보답할 기회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너를 위하여 충성하였던 것은 어떤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에게 바치는 자신의 희생과 충성을 통하여 네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진보되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진정으로 아내의 희생과 사랑에 보답하고 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 네 이웃과 국민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봉사하라. 집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노파는 네 아내고 또한 나다. 가난에 쫓겨 몸을 치욕과 돈에 파는 소년은 네 아내이고 또한 나다. 네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바로 네 아내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비탄과 후회에 잠겨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빨리 네 집으로 돌아가 네 아내와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라!" 나는 아내의 무덤을 제비꽃이나 장미꽃으로 장식함으로써 내 자신이 위로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무덤에 선하고 진실되며 진리로 거룩하게 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내의 죽음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욱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믿음도 잃었고 하나님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아내의 죽음이후에 진리의 조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 아내와 다시 만나는 그 날이 될 때까지 나는 아내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늘 집을 향한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렵니다! 글: 우찌무라 간조
:38 http://cafe.daum.net/cuigen1964/DdBS/1452 
혼수상태에 빠진 랜든. 유튜브 캡처


끔찍한 사고로 죽었다 살아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천국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두 형을 만났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 엄마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일 페이스북 보도매체 '격'은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거짓말같은 실화를 소개했습니다.

줄리 켐프 유튜브 캡처


 1997년 7월 줄리 켐프는 남편, 아들 랜든(8)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남편은 현장에서 숨지고 아들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들은 두 번이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무사히 회복됐습니다. 

 너무 큰 사고로 차가 심하게 찌그러져 엄마 줄리만 겨우 구조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아이의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하며 잔해 속에서 아이 찾기에 집중했습니다. 겨우 랜든을 발견했지만 아이는 사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고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차. 유튜브 캡처


 노스캐롤라이나의 캐롤리나 메디컬 센터 의료진은 줄리에게 랜든이 살 가망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랜든의 심장은 두 번이나 뛰기를 멈췄고, 의사들은 두 번 모두 심폐 소생술을 통해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가족들은 랜든을 인위적 혼수상태에 두기로 했습니다. 

 2주가 지나자 기적처럼 랜든이 깨어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랜든은 뇌손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랜든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본 사후 세계에 대해 엄마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던 줄리에게 랜든이 먼저 엄마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 천국에서 아빠를 만났어요."

랜든의아빠. 유튜브 캡처


 또 랜든은 약 한 달 전에 먼저 사망했던 아빠의 친구도 봤다고 했습니다.  "우린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곳에 모두가 그냥 그렇게 서 있었어요." 

 이어 랜든이 한 말에 줄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런데 엄마,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저 다른 2명의 형제를 보았어요." 

 외아들인 랜든의 이와 같은 말에 줄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는 랜든이 태어나기 전 겪었던 2번의 유산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랜든에게 이 사실을 알린 적이 없었고, 랜든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된 랜든. 유튜브 캡처


 독실한 기독교 가정인 줄리네 가족은 랜든의 사후 세계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계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랜든 역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늘에서 돌려보내진 것이라 믿습니다. 이들이 다시 얻은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국민일보=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이 간증은 고난의 북한 땅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짧은 믿음의 시간들이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북한을 탈출하게 된 배경


자매님은 어릴 때 양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집에서 살다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에서 살고 있었던 양부모님들에 의해 양녀로 입양되었다.


양아버지는 부지런하셨지만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좋아하시는 관계로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다. 어머니는 자매님을 친딸처럼 너무 사랑해주셨다. 어릴 때부터 머리도 잘 매주시고, 장난감도 사주시고, 좋아하는 음식도 해주시고 참 사랑을 많이 해주셨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집안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자매님은 양부모님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자매님은 14세에 꽃 제비가 되어 북한의 곳곳에 못가본데가 없이 많이 다녀보았다. 여름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추운 겨울 기차역에서도 자고, 남의 집 처마 굴뚝 옆에서도 자고, 공장 보일러 옆에서도 자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남을 것을 훔치다가 매도 맞고, 쫓겨 다니기도 하였다.


 

2. 중국에서의 생


그렇게 1년 가까이 꽃 제비로 살다가 북한 시장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중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중국에 가면 밥도 마음대로 먹고, 따뜻한 집에서도 살 수 있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꼬셨다. 자매는 결국 그 아주머니의 말을 믿고 함경북도 무산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에 넘어와 며칠이 되지 않아 한 중국 사람이 자매를 데리러 왔다. 그 중국 사람을 따라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2일간 달려 어느 산골에 도착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받았다.


15살 난 자매보다 17살이나 더 많은 32살의 중국 남성이 그에게 달려들어 자매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관계를 하였다. 바깥에서는 그 남자의 누나와 부모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 자매는 자기가 돈에 팔려 시집을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매는 성에 대하여 아무 상식도 모르는 어린 15세 나이에 짓밟힌 것이다.


그 말을 내게 해주는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자신을 강제로 짓밟은 남편을 죽이고 싶어하는 그 자매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이었다. 그 자매는 원치 않는 임신하게 되었고 1년 후 딸을 낳았다.


중국에서 원치 않게 팔려가 14년간 살다가 28살 나던 해에 팔려갔던 집에서 딸과 남편을 뒤로 하고 탈출을 하게 되었다. 탈출 이유는 결핵에 걸렸는데 남편과 시댁이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치료가 안 되어서였다. 그는 탈출과정에서 중국 곤명이라는 곳에서 우리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도를 받았다.

 


3. 회심과정


자매는 중국 곤명에서 만난 선교사님의 태도가 따뜻하게 보여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긴 시간동안 하였다. 자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선교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선교사님은 얼마나 힘들었냐?” “내가 어른으로서 너에게 사과한다.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매는 북한을 떠나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선교사님이 자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고 자매님은 복음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믿어볼게요.”라고 하였지만 마음에는 무슨 하나님이 있어? 하나님이 있다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라는 거부감정이 있어 하나님 믿는 것을 거부하였다.


몸에 기력이 부족하였던 자매는 중국-라오스 국경과 라오스-태국 국경을 넘으며 곤명에서 만난 선교사님이 양육한 탈북 자매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태국 이민국 수용소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탈북 자매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랑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매는 생각하기를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 이민국 수용소 안에서 찬양을 배우고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함께 예배드리는 탈북 자매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자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느꼈다.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수속 중에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해본 결과 폐의 3분의 2이상 결핵균에 의해 없어지고, 한국에 입국할 수 없는 건강상태가 나왔다. 너무 힘들어 입원한 태국 병원 5층 입원실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자살하려고 할 때 중국에 있는 딸이 생각나 자살하지 못했다.


자신도 어릴 적 부모를 잃었는데 그 딸이 엄마가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살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 자매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를 살려주세요. 저를 고쳐주세요.”


며칠 후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데 태국 의사들이 고개를 기우뚱 기우뚱 하였는데 나중에 통역을 하는 대사관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강 기준치가 나와 그들이 고개를 기우뚱 하였다는 것이다.


자매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국정원에서 지정한 병원으로 건강검진을 갔는데 함께 간 담당 국정원 선생들이 검사결과를 놓고 또 놀랐다고 한다. 왜냐면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건강인데 태국 병원에서 오진을 해서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자매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다.


2014년 가을 하나원을 퇴소하여 지난해 여름 병원에서 폐결핵이 완치되었다는 확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원 퇴소후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예수제자원에 들어와 생활하며 성경의 맥 잡기를 공부하고, 기독교 영화와 다양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들을 통하여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가 미친 세계역사들에 대하여 알며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새가족 양육을 받고 성경을 계속 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었다. 또한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다녀오면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부활신앙과 예수님의 재림과 그 나라에 대한 사모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4. 성화의 과정


교회와 예제원에서의 성경공부들이 자매님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자매님은 자신밖에 모르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배려해주고 섬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세례문답교육을 받으며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결혼이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임신과 해산을 통한 딸을 낳게 된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신앙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남편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남편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수속을 거쳐 자신의 딸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남편은 자신이 한국에 오면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국에 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5. 회심 후 신앙이 삶에 미친 영향


자매님이 회심한 후 하나님은 그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였고, 교회에서는 봉사자 예배인 1부 예배를 드리고 중국어예배부에서 간사로 열심히 봉사하였다.


북한선교의 비전을 갖고 서울신학교에 들어가 두 학기동안 열심히 신학공부를 하였다. 학교에서도 훌륭한 자매라고 교수님들이 평가를 해주었다. CGN TV에도 출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한 달 전 자매님은 몸살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여러 병원으로 전전하던 결과 자매님의 결핵이 좀 더 심하게 재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치료를 진행하던 중 지난 1028일 금요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 받게 되었다.



자매님의 장례식 기간 수 백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갔고, 그것을 통해 비록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삶은 너무 짧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매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자매님의 변화된 삶이 얼마나 영향력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자매님이 한국에 남겨놓은 15세가 되는 딸이 있다. 우리 선교공동체와 우리 교회가 엄마인 자매님의 소원대로 그 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로 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BOKT/2107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