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 글은 마지막 때에 관한 글입니다.


지난 번에 올렸었는데
사진이 있다보니 조심스러워
며칠 후에 그냥 내렸었어요.

간증은 늘 조심스럽지만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은
저만 아는 것보다
각자가 받은 신호를 나눔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서 용기내서 올리게 되었고
혹시 못 읽으신 분도 있으실 것 같아
다시 올립니다.



ㅡ 간증 ㅡ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44세)이고
장로교 고신 소속이며
증조부님이 교회를 세우신
믿음의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제 삶 속에서 체험들 중
마지막 때와 관련한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2012~2013 어느 날이었어요.

아침에 잠에서 깬 상태에서 눈을 뜨는데
ㅡ그 짧은 1초 순간ㅡ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는 영상이
보였습니다.

매우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그냥 타는 거예요.

돈도, 토큰도, 카드도 없이요.
자동으로 계산되요.

영상과 동시에
경고의 메시지가 세 문장이 강하게 들렸어요.

1. 앞으로 현금이 없어진다!
2. 이렇게 된다.
3. 주의하라.

저는 너무 놀랐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황당하기까지 했어요.

눈 뜨는 순간은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순간이예요.

영상과 메시지(명령?)에
이거 뭐지? 생각하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말세의 징조???

돈이 없어지고...
짐승의 표를 받는다...
말세징조가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얼른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읽어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말세의 징조는 현재 다 일어나는 것이어서
더 놀랐습니다.

설마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관심이 없다시피했는데
그 날 저는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매매의 장소가
왜 하필 버스였을까?
버스 안 탄지도 오랜데....
15년 이상 안 탔으니...

주위에 흔히 계산하는 마트 장면을 두고 왜 하필 버스였을까?

진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게 맞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그때 쯤이었어요.
브라질 축구선수 카카의 믿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페이스북도 안 하던 제가
카카의 페이스북에 인사말(칭찬)을 남기려고
페이스북 가입을 어렵게하고 들어가봤더니...

포르투갈어 천지인거예요.

그래서
포르투갈 인사말을 검색해보았어요.

근데
첫 창 제일 위에
'포르투갈 성경 짐승의 표 ...'
가 눈에 띄었어요

이건 뭐지?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엄청 길더라구요.

온갖 포르투갈어 옛날 성경책이 나오고요.

그 중 한 부분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말로는 '표'인데
포어로는 sinal이래요.

sinal 아래 줄이 쳐 있고,
영어로 뜻을 15개 쯤인가 적어놓았더라구요.

근데 sinal의 뜻
동그라미 1번이
바로..
token이었어요!

token하면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저는 버스가 떠오르는 세대거든요.

제가 본 영상이 떠오르는 거예요.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자동으로 계산된 것은
표(sinal)를 받았다는 것이고,

sinal=token 역할...

'왜 버스 장면이었을까?'
열흘 정도 궁금했던 것이 해결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로도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변화하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어요.

학생들에게 복음을
못 전하게 되어 있는데도
놀라운 방법으로 전하게 하셨어요.

수많은 졸업한 학생들도
제게 보내주셨어요
약 200명 정도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도 깨알같이 체험했습니다.



2년 넘게 복음을 전하던 2015년 어느 날이었어요.

"하나님 제가 바르게 알고 있는 거 맞나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나요?"

왜냐면 그동안 몰랐던 것들이 영의 눈을 뜨면서 알게 되니

잘못 아는 것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잘못 알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기도하며 고요히 간절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어요.

잠시 후 너무나 놀라운 응답을 주셨어요.

눈을 감고 응답을 기다리는 제게
갑자기 마태복음25장이 나타났어요.
마치 캄캄한 영화관에서 장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요.

하여튼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비유로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는데
제 폰에 저장된 사진 중 한 장이예요.

너무 빨리 지나갔지만
마지막 학생의 파란색 옷의 잔상이 남아서
찾을 수 있었어요.

그 사진은...

저희 반 아이들이
아침마다 밖에 나와서 저를 기다리는데
하지말라고 해도 안되요ㅜㅜ

귀여워서
가끔 사진을 찍었는데 그 중 한 장이예요.

해마다 학생들 찍느라 저장된
5천장이 넘는 사진 중에서 그 사진을 찾으며
'혹시 여학생 5명?'기대하며 찾았어요

정확히 5명의 여학생들이었어요ㅡ감동ㅜㅜ

4명이나 6명이 찍힌 사진도 있고
남학생들이 찍힌 사진도 있는데...
정확히 여학생 5명...




교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 아이들은
아마도 선생님이 좋아서겠지요...

제 차의 시동이 꺼지면
문 열어주고
가방 들어주고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주고
서로 선생님 손잡으려고 아웅다웅ㅜㅜ

저는 너무 놀라웠어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여쭈었을때 아무 말씀없이 보여주신
딱 두 개의 사진.

신랑을 기다리는
5명의 신부
선생님을 기다리는
5명의 여학생...

공통점은
기다림!

ㅡ제가 어떻게 할까요?
ㅡ사랑하며 기다려라

놀라운 응답의 내용도

또한
우리의 머리털도
다 세신다는 하나님

제 폰에 있는 수 천 장의 사진도 다 아시고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얼마인지 모르나
기다리라는 건 곧 오신다는 말씀이잖아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녀들에게든 친구들에게든

기다리라고 말할 땐 곧 간다는 뜻이잖아요.

기쁨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며
신랑 예수님을
함께 기다립시다!

강물을 역류하여
본향을 향하는 연어떼처럼
우리도 세상을 따르지 않고
천국을 향해 날마다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직 예수! ♡♡♡



이웃블로그 / 우리예수님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마음을 심어 주신 것일까. 스스로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키가 작은 것도 단점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혹시 저 사람이 잘 먹고 고생을 좀 덜하면 키도 더 크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이미 선을 여러 번 봤었는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배우자라는 감동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김태훈 씨를 만나고 나서도 그 사람이 정해진 배우자라는 큰 감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신앙적인 열정이 뜨겁게 느껴졌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이면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다. 며칠 후 그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다니는 교회에 주일 날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는 교우들에게 그를 선보인 후 저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다녀간 후 목사님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좀더 시간을 두고 더 잘 알게 된 후에 모든 것을 결정하라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더욱이 웃겼던 것은 처음에 우리의 중매를 주선했던 여자 집사님조차도 뭐가 자신이 없었던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아이까지 딸려 있는 사람이니까 후회할 일들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니까 내 주위의 사람들은 중매를 섰던 아줌마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그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혼 문제를 두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는데 "결혼은 절대로 동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배필이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올 때 결혼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서두르지 말라고 몇 번을 권유하셨다.

그런데 그를 만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자기가 기도를 해 보니 우리 둘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이라는 확신이 왔다고 하면서 기왕에 결혼할 것이라면 빨리 서둘러 결혼하자고 다그쳐왔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만나기 전에 생각했던 생각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단지 그가 하는 말들만이 마음속에 남았다. 상담 목사님의 말도, 교회 식구들의 권유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귀한 주의 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의 입으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주의 종으로 쓰임받는 것이 남은 여생의 소원이라고…. 나는 더 이상 바라고 싶은 것이 없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맨해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또한 앞으로의 결혼생활과 가정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에게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함께 기도를 드리는데 성령의 뜨거운 불이 임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을 기뻐해 주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또다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시계를 보니까 어느덧 새벽 2시였다. 배가 많이 고팠다. 우리는 그 시간에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플러싱에 있는 24시간 오픈 설렁탕집에서 국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이번 결혼이 호적상 네 번째 결혼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을 초청해서 정식으로 결혼 예식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혼식을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 결혼만큼은 하 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절대로 깨지지 않게 하겠다고….

 

아내와 지난 18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결코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정을 지키고 결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나 나나 결혼하면서 마음판에 새겼던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이혼만은 할 수 없다는 오기에 가까운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김경애 사모의 간증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편으로는 결혼 서약을 하기 전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 달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목사님 앞에 서서 결혼 예식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꿈 속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해지기도 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는데 어느덧 주례 목사님이 혼인서약을 물어오셨다. 

 "신부 김경애 양은 신랑 김태훈 군을 하나님 앞과 모든 증인 앞에서 그대의 남편으로 삼아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위로하고 순복하여 진실한 아내로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십니까?"

 "예."

 아,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섰구나. 하나님 앞에 혼인 서약까지 했으니 이제와서 무슨 말을 더 하리. 나는 이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정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림돌처럼 박혀 있었지만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자.'

 

결혼식 전에 신혼여행에 대해서 물었더니 애까지 딸린 사람이 무슨 신혼여행을 따로 가겠냐면서 출근도 계속해야 되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다. 물론 좀 섭섭한 생각도 있었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기도원에 올라갈 줄은 몰랐다.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혼식 날 만큼은 평생에 기억될만큼 좀 낭만적인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결혼식 뒤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그렇게 천둥소리처럼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통성기도를 어떻게 그렇게 우렁차게 하는지 옆에 앉아서 함께 기도하면서 나는 귀가 다 얼얼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버거 킹에서 우리는 햄버거 하나와 음료수를 시 켜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중에 음식을 먹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빈 테이블에 앉아 있자니 눈치가 보일 것 같았고 그래도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면 왠지 말이 술술 풀릴 것 같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김태훈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김경애입니다."
 

아내는 검은색 티셔츠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봉제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급도 많이 받지 못하고, 뭐 그저 벌이는 신통치 않지만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어서… 1985년도에 이민 와서 첫 직장으로 일을 시작해서 벌써 만 1년이 넘었습니다. 미국에 오니까 한국보다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아파트 안에서 아는 손님들의 미용 손질을 해드 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를 중매했던 동료 집사님도 아내가 하는 미장원의 단골 손님이 었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먼저 인 1977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용 기술을 배워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미용 관련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저는 앞으로 평신도든 교역자로든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는 것이 평생 꿈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서라도 써주시기만 한다면 목숨을 내놓고 일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표정에서 약간의 동요가 보였다. 내가 혹시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얼른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데, 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가장 큰 복은 주님의 선택을 받아서 주의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훈 씨가 만일 주의 종이 된다면 당신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잠깐 사이였지만 아내의 눈망울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한 시간 정도 우리는 버거킹에 마주 앉아 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물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성민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그 런 사실에 개의치 않는 듯한 눈치였다.
 

버거킹을 나와 얼마 동안 맨해튼 길을 걸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날씨가 그렇게 춥지도 않고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다소곳이 쫓아오던 아내에게 대뜸 우리 아들 성민이를 한 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좀 당황하더니 금방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플러싱의 단칸짜리 아파트로 갔다.
 

원 베드름 아파트에는 성민이를 봐주기 위해서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기거하며 지내고 있었고, 그나마 방 하나는 아파트 렌트비를 줄이기 위해서 셋방을 내주고 있어서, 결국 우리 식구들은 거실 쪽에서 그냥 뭉개면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전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일 이 여자가 나의 남은 여생을 함께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운명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부터 다 보여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러고 나서도 싫다고 하지 않으면 그때 나도 결혼할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계산을 마음 속에서 하고 있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다.
 

"아니,함께 오신 아가씨는 누군가?"
 

"오늘 처음 만난 김경애 씬데, 성민이를 한 번 보러 왔습니다."
 

성민이는 거실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비가 눈짓을 하자 성민이는 하던 숙제를 잠시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지금 몇 학년이니?"
 

"4학년입니다."
 

"학교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아?"
 

아내는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그리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성민이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혹시 정말 저 여자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진정한 배필일까'
 

마음 가운데 확신이 서는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첫 번째 만남에서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갖고 헤어진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나중에 아내는 그날 우리집에 왔다가 성민이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연필로 노트에 쓴 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 또 이런 사람과 아이라면 함께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 김경애 사모의 간증>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크고 둥근 보름달은 꿈에서라도 처음 봤다. 보름달 빛이 옥토밭으로 바닷물 쏟아지듯 흘러들었다. 평생을 기도하면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옆에 서 계셨다.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달이 계속 나눠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처음에 하나였던 보름달이 어느덧 12개로 나눠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엔가 12번째 달이 쿵 소리와 함께 옥토밭으로 떨어졌다. 밭 옆에 조그마한 교회 건물이 있었는데 언제 나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와 옥토밭에 떨어진 달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났다. 옆에 묵묵히 계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너 도 가서 한 번 잡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내심 마음 가운데 나도 한 번 잡아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쏜살같이 옥토밭으로 뛰어들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잡으려고 할 때는 잡힐 듯하다가도 다시 멀어지곤 했던 보름달이 내가 옥토밭에 발을 대는 순간 내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 했다.

짐짓 놀라 뒷발걸음질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보름 달이 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을 뻗어 보름달을 만지는 순간, 그 보름달은 황금 깃털을 가진 거대한 비둘기로 변했다. 앗! 너무나도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김태훈 씨를 만나고 난 후 왠지 모르게 그에게 호감이 갔다. 키도 작고 깡마른 체구가 겉으로 보기는 참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참 많이 사랑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왔다. 사실 나도 이제 나이 30이 넘었는데 무슨 조건을 그렇게 까다롭게 찾을 때도 아닌 것 같 고…. 아들에게 성경을 노트에 적게 하며 말씀을 배우게 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평소  생각했던 이상형 배우자 조건과는 하나도 일치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전직 스트리퍼가 예수님을 찾다!! 모든 스트리퍼가 다 구원받아야 할 보물입니다!

 

 

하모니 더스트 - 제 2부

 

'북한군 출신' 백요셉 형제의 파란만장 탈북스토리!

- KSB 왕국의 역습 -

 

 

 

 

    나는 나사로 보다 낫다

     

     


    어제 주일은 이슬비내린 날씨에 아직 겨울 흔적 때문에
    여러교인들이 빠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 불편으로 3주 빠진 경 집사님이 오셨습니다 (96세)
    지난주 전동차가 굴러 몸 불편 중에도 오신 손 집사님(85세)
    양지교회 개척부터 지금까지 술담배와 몸 향기 마셔도
    청정공기와 하늘산소로 이김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농사짓는 야콘은 11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 늘 일합니다 


    대략 1년에 약 5~7톤을 손으로 분리작업 하여 물로 씻고 얇게 칼작업 
    여러공정 거쳐서 야콘원액 100% 된 포장작업후에 전국에 보급합니다

    10년 동안 보통 4월 중순경에 작업이 끝납니다만
    올해는 2월말에 마무리되어 너무 기뻐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하나님 앞에 착한 목사가 좀 되고 싶어서 토요일
    하루종일 말씀 묵상하였을 때에 설교말씀 오랜만에 제대로 준비한 느낌입니다
    여기서 잠깐 어디좀 글을 외출시키고 오겠습니다 .....

     

    항상 주일 오전 9시쯤에 교인들 모시러가서 동네에서 태울 때에
    차에 잘 오르도록 궁둥이에 손을 받쳐 밀쳐주어야 합니다 (어르신) 
    그 순간에 얼굴은 그 몸에 가까워지면서 도시교인들에게 없는 향기를 마십니다
    구름낀 날씨에는 그 향기가 더욱 진동하는데 어제 주일이 그 날입니다


    향기에 취하여 ....머리아프고  비실비실한 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 말씀을 심부름하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 교인들 바라보면서 오늘따라 불쌍하고
    슬픈 목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귀 안들리고 글자 모르고 눈어둡고 향기 진동시키고 ....

    이런 생각을 하니 비젼들도 캄캄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한 편의 시각 속에도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때입니다


    주님 음성이 제게 들리는데 저는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주님은 제게 설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냄새 맡을 코와 보이는 눈과 건강한 입이 있지만
    눈도 귀도 입도 건강하지 못한 저들이 나사로니라  나사로보다 낫다 "" 
    그 순간에 교인들을 바라보니 교인들이 나사로로 보였고
    예수님으로 보여졌습니다

     

    나사로는 차도 리어카도 전동차도 없고 걸을수도 없는 불편한 몸입니다
    동냥하러 다닐 자유도 없고 가난하여 약국도 병원도 못갑니다 
    그래서 부자의 대문곁에 누워 있어야할 처지입니다

     

    나사로의 땅바닥은 방이며 나사로의 이불은 하늘입니다
    그가 영양실조 걸려 겨우 목숨 연명하니 개들조차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개들이 그 헌데를 훔쳐갈때에 빤히 보고도 그 도둑들을 막을수 없는
    힘없는 우리 이웃의 고난과 똑 같습니다


    상처가 보였으니 옷도 다 떨어진 누더기입니다

    나사로는 부자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로 살아가기 때문에 
    맛없다 더럽다 짜다 싱겁다 맵다는 음식투정
    불평불만 할 처지는 1%도 없습니다


    만약 그 음식 부스러기와  찌꺼러기 없는 날에는 하루종일 굶어야합니다
    부자인 당신들은  배고프다고 표시 오기 전에 간식먹었지만
    나사로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 곳이 3디직장이며 도시속의 개척교회요 농어촌교회이며 북한동포입니다
    그런 깊은 곳을 찾아 그물을 내리면 153마리의 은혜를 건져보시길 바랍니다 

    나그네길 잠깐동안의 고난나라는  좁은문 좁은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천국같고 나사로는 지옥같아 보였지만
    끝에는 나사로가 웃었습니다 

    오늘 부자와 나사로를 보면서 마 5장 3절 말씀이
    다시 한번 묵상되어졌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네...
    우리 교회에서 어제 설교한  내용의 일부에 살을 좀 붙인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말씀안에 비유지만 실제 믿음인물로 보시면 복이 되옵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는 힘드실때마다 이 말씀 가지소서 
    나는 그래도 나사로보다 낫다


     


    2012년 3월6일 머슴 김대원목사올림 (합천양지교회 010ㅡ8512ㅡ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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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만 바라 볼찌라/이경수 색소폰 연주♬

    
    

     

    간증은 어디까지나 간증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고 성도님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달음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되

    다른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서 도전도 받고 삶에서 좋은 점은 본받으시기를....

     

    간증 자들의 신학은 목양연가의 신학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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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은 은혜의 땅 20

    친구 정규는 그날 이후로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다시 시작하면서 가족 초청을 마무리 지 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미국 땅으로 불러 들여 재결합할 수 있었다. 다 깨어졌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가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이었다. 정규의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뉴욕에서 행복하게 살며 교회의 귀한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은혜 가운데 잘 살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때는 동료들과 함께 회식하는 날이었다. 고된 일과에 시달리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 러나 한 달에 한 번 회식을 하는 날이면 음식을 잘 먹고 노는 것 까지는 좋은데, 꼭 술병이 따라 붙기 때문에 나로서는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 가운데는 술 마시기를 거절하고 한 쪽 구석에서 콜라잔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나를 보고 "김 목 사, 그래도 딱 한 잔만 해보지 그래. 예수님도 포도주는 많이 마셨다고 하던데…. 뭐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나는 성령 체험을 하면서 앞으로는 절대로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약속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직장 동료들도 나의 그런 신앙적인 결심을 이해해 주었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술, 담배를 즐기는 교인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정을 해주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술, 담배의 문제는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접대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는 한국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고집 하여 술, 담배를 거부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왕따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숨어가면서, 또 어떤 이 들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이 문제를 피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술, 담배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관점, 또는 개인의 건강 문제 등으로 보고 본인의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지 이를 신앙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 개신교에서 술, 담배를 절대 터부시하는 것은 한국적인 개신교만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영국 등 개신교의 뿌리가 되는 국가에서도 청교도적인 삶을 강조하는 종파에서는 술, 담배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적인 상황과 좀 다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술, 담배 문제는 개인적인 소신, 또는 건강 문제로 개인이 알아서 결정해야 될 사항이지, 종교적인 신념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아직까지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혼자만 마 음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 문제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권면하고 싶다. 사단은 늘 우리 마음 가운데 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너 같은 인간이 무슨 크리스천이 될 수 있겠나'는 식의 참소당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이를 통해 신앙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술, 담배 문제 때문에 늘 좌절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단이 가장 원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끊을 수 있다면 끊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만일 그렇지 못할지라도 술, 담배 문제로 자기 스스로에게 이중인격자,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 등의 참소 딱지를 붙이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란다. 술, 담배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다 보면 술, 담배의 문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받게 된다. 사단은 참으로 영악한 영물이다. 그래서 늘 우리의 생각을 앞서간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우리 의 원수다. 믿음 위에 잠시 선 듯하면 다시 쓰러뜨리려는 존재가 바로 사단이다. 술, 담배의 문제를 개인 의지의 결정 문제로 생각하지 말과 영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시작하면 보다 쉽게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풍성하게 받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척 사모하기는 했으나 그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지만 그 분의 신묘막측한 놀라운 말씀에 어떻게 좀더 체계적으로 다가가야 할지에 대한 이렇다 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나름대로 개발한 방법이 아침 출근 전 라스베이거스식(?) 성경 읽기였다. 라스베이거스식이라고 하니까 말이 좀 그런데, 집을 나서기 전에 나는 성경책을 들고 기도한 후에 아무 페이지나 열리는 대로 말씀을 한 구절 찍어 보고 그 말씀이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기 원하시는 말씀이라고 믿고 그 말씀을 계속 암송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요 행수를 바라는 라스베이거스 심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라스베이거스식 성경 읽기라고 스스로 재미 삼아 이 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런 엉뚱한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은혜를 주셨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는 정말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곤 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해 묘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내 주위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읽는 것은 성경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남들이 뭐라하든 나는 어떤 말씀이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라스베이거스식 매일 성경 읽기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고 많은 말씀을 암기할 수 있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은 봉제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한 여자 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다리를 놓으면서였다. 그때까지 만 해도 나는 다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일에 정말 자신이 없었다. 이미 호적상 세 번 결혼에 실패했고, 아들까지 한 명 딸려 있는 홀아비에게 과연 누가 시집을 오겠냐는 자격지심마저 심해서 다시 결혼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집사님 한 분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신앙심만 좋다면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안 보고 결혼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꼭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예수에 미친 사람끼리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 보고, 또 좋으면 함께 가정을 이뤄서 사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냐며 무조건 중매를 밀어붙였다. 그렇게 떠밀려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맨해튼 봉제 공장 앞 버거킹 햄버거 가게에서 였다. 맞선을 보기에는 분위기도 좀 그렇고 적절한 장소도 아니었지만 우선은 공장에서 가까웠고 무엇보다도 특별히 분위기가 좋은 장소라고는 한 곳도 아는 곳이 없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사막은 은혜의 땅 19

     

    한국에 나가서 돈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고 이민 수속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 명백히 죄를 범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통사정을 했다. 이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지겹고 나도 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가지고 그것을 용납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마음에 고통이 쌓여 갔다. 한국에서는 왜 빨리 이민 수속에 필요한 서류들을 보내지 않느냐고 매일 독촉을 해 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냥 차일피일 핑계를 대면서 마음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이민 서류 보내는 일을 미루기만 했다. 그러면서 수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후에 한국에서 소포 뭉치가 도착했다. 여자 쪽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다른 파트너(?)를 찾았으니 나와는 이혼 수속을 빨리 진행시킬 수 있도록 서류에 도장을 찍어 보내 달라는 편지와 함께 말이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돌려보낸 후에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위장 결혼 문제로 나의 양심을 찍어 누르고 있던 죄의식이 사라지고 이제는 다시 성령과 교통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참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멍청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그때 나는 아직 20대의 나이였는데, 호적상으로는 벌써 세 번이나 이혼한 보기 드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 작은 봉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대상 꽃 봉사 였다. 당시 나는 적은 수입에 아파트비를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 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잠잘 곳이 없어서 노숙자 신세로까지 전락했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해 볼 때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충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작은 정성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고 그렇게 시작한 봉사가 주일 강단 꽃 당번이었다. 작은 개척 교회에서 누구 하나 주일 강단을 꾸미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일을 맡겨 주셔서 기쁨으로 매주일 감당하게 하셨다. 토요일 아침이면 도매시장에 가서 꽃 장식에 사용할 꽃을 구입해서 교회 강단에 장식을 했다. 장식을 마치고 나면 일주일 동안 때 묻고 사회생활에 찌들었던 몸과 영혼이 다 씻김을 받고 꽃처럼 아름답게 변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꽃을 어떻게 장식하는 줄 몰라서 그냥 눈에 좋은 대로 이리 저리 꽂으면서 엉성하게 장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꽃꽂이에도 일가견이 생겨서 주일 꽃 장식을 마치고 나면 여러 성도들이 마치 전문가가 해 놓은 것같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작은 부분으로나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드려서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뻤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느낌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을 그때까지 깨 닫지 못했다. 
      
    직장 동료 가운데 한국에 부인을 두고 먼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왔다가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가로막고 있는 '불륜'이라는 큰 벽이 놓여 있었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었던 그는 해서는 안 되는 외도를 하면서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 가운데 그 친구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강한 감동을 주셨다. 물론 그 사이에도 전도를 위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던 적은 있었지만 그 친구 형편 도 있고 해서 그렇게 강압적으로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 친구에게 또 다른 마음의 큰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너무도 인간적인 발상이었다. 모든 일에 능통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현실에 적응하는 데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편한 느낌 때문에 그 친구를 강권적으로 주님 앞에 인도하는 일을 계속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규야,우리 이제부터라도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같이 한 번 잘 해 보자." 
      
    "또 그 얘기냐. 제발 집어치워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동거 생활은 청산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그 이야기가 나오자 그 친구는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말했다. 
      
    "너는 속사정도 모르면서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하지 마라." 
      
    "절대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이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너를 친구로서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의 영혼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말문을 열어 놓고 나는 곧바로 그 친구의 손을 잡고 큰 목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얼떨결에 잡힌 손을 잡아 빼려고 움츠리기도 했으나 조금 지나자 그대로 손을 내게 맡겨놓은 채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친구 정규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친구의 삶을 형통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비록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다가 가는 아침 이슬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친구 정규를 위해 기도하오니 하나님의 영을 넘치게 부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잘못된 행실이 있었다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시옵고 또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가아 할 것인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밝히 보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은 너무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영혼을 들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얼마 동안을 그렇게 기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정규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마음에 덮여 있던 죄의 흔적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드러나며 성령님께서 씻어주시고 치유하고 계셨던 것 이었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나는 그날 성령님께서 왜 내게 정규를 다시 전도하라는 강한 감동을 주셨는지 그렇게 함께 기도하고 난 다음에 깨달을 수 있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사막은 은혜의 땅 18

    나는 교회생활이 그렇게 기쁘고 재미있는 것인 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 오묘하게 받아들여지며내 영혼을 쪼개고 다스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교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에 온 사람 같았다. 몇 주 동안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하는 가운 데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너는 환난 가운데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 음성을 들으면서 지난날 나의 삶이 슬라이드처럼 스쳐갔다. 한국에서 겪었던 수많은 환난과 고통의 순간들이 가시가 되어서 내 몸 곳곳에 화살처럼 박혀 있는 환상을 보았다. 사랑하는 둘째 누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아픔, 삼청교육대에서 경험한 지옥 훈련의 고통, 그리고 폐병을 앓으면서 거의 매일 한 사발씩 각혈을 토해내던 때의 고통스런 순간들, 자식까지 버리고 나간 아내에 대한 분노, 아이를 구타하는 아내 등등….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있던 아픔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을 떨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 아픔은 한꺼번에 나를 짓눌러 왔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절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씀을 주셨다. 
      
    "너는 환난 가운데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서 모든 고통들을 치유해 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나는 며칠 밤낮을 울면서 뜨겁게 회개의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참된 선과 악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구별하는 영적인 분별의 눈을 갖게 되었다. 내 의식 가운데 선과 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마음 속으로 이제는 더 이상 악의 편에 서지 않아야겠다는 결단을 했다. 
      
    기도할 때마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있었다. 수년 전 폐병 3기에서 치유되던 그날 새벽에 내 코를 통해 뭔가 액체 같은 것이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회개의 기도를 할 때마다 느꼈다. 그것은 환상적인 영적 체험이었다. 성령의 실체가 그렇게 분명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를 잘 믿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매순간 성령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신비하고 뜨거운 경험을 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서 직장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교인의 소개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봉제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뉴욕 맨해튼 8가에 있는 봉제공장은 미국에 이민온 한인이민자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거쳐가는 코스였다. 미국에 와서 잡은 첫 직장에서 나는 주급150달러씩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직장이라고는 했지만 성령의 불을 남달리 강하게 받은 내게 있어서 직장은 또다른 전도와 예배의 장소였다. 전도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내 마음 가운데는 복음을 전하고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영접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 동안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마쳤으며, 집에서 맨해튼으로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노방전 도를 시작했다. 영어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성경책을 들고 지하철 안에서 "Jesus Loves you, Believe in Him. He will give you a happy life!"를 외치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씨앗을 뿌리면 거두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했다. 둘째 누님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먼저 돌아가신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미친 사람처럼 열심을 내서 전도했던 것 같다. 복음을 듣지 못하과 아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다면 물론 그 영혼도 불쌍하다. 그러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 먼저 예수를 믿게 된 자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데 대한 책망을 하나님에게서 듣게 될 것이 공연히 겁나기도 했다. 여러 사람에게 미친 사람 같다는 손가락질도 당했다. 직장에서 전도하다가 램을 맞기도 했다. 
      
    "야, 너나 잘 믿어. 나는 필요 없으니까." 
      
    "아저씨, 그래도 예수 잘 믿으시고 꼭 천당에 가세요. 아저씨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극성스럽게 전도하면서 알게 모르게 전도의 열매들도 많이 얻게 되었다. 이민 초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에 미쳐 돌아가는 나를 보고 형님은 당장 나가서 따로 살라고 고함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형님 집에 함께 있던 어머님도 근심스런 눈으로 "너는 왜 그렇게 요란하게 예수를 믿냐"라고 하시며 좀 조용히 신앙생활을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몇 달 정도 형님 집에 얹혀 살던 더부살이 살림을 청산하고 근근이 모은 월급을 가지고 플러싱 인근에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를 나왔다. 형님이 미국까지 불러 준 것도 고마운데 그 집에서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자립을 하고 싶었다. 아들 성민이는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는데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돌봐 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유치원에 보내기에는 형편이 되질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안정이 될 때까지 한국에 있는 셋째 형 님 집에 아이를 좀 맡겨 놓고, 나는 일하는 시간을 좀더 늘려서 저축을 더 한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이를 형님 집에 맡겨 놓기 위해 한국에 잠깐 나가 있던 동안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큰 형수가 중매를 서겠으니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가라는 것이 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다시 이룬다는 것이 아직도 마음 가운데 큰 부담으로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데도 형수는 상대방 쪽에서 미국 영주권자라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아들이 하나 딸려 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며 한사코 꼭 만나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그 여자 쪽 집안이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말이었다. 
      
    "돈이 많은 부잣집이라고…" 
      
    너무도 세상적이고 얄팍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 당시 여자 집안이 부자라는 말에 혹해서 맞선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어 번 만난 후에 일단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미국에 들어가서 초청 절차를 밟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이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 성민이에게도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열심히 교회생활,  전도 활동을 시작하는 등 한국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가운데 한순간 성령님의 질책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출처: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그(Matthew)가 말하길:

     Moishe(유태인 할아버지)의 꿈은 휴거로 시작 합니다.그리고는 2번째(second coming) 로 오시는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곤 다윗왕 그리고 메시아가 예루살렘을 1000년 동안 다스림 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곧 예루살렘에 일어날 일들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하루도 아닌 몇날을 계속해서 3달 동안 같은 꿈을 꿨으니. 저희들이 모든 것을 Moishe(유태인 할아버지)께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Moishe,Esther(아내) 그리고 다른 3명의 유태인 들에게 곧 다가올 일들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주셨읍니다.그들이 성령이 임하였을때... Matthew 는 아래 더많은, 자세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Tel Aviv 의 정통 유대교파, 반복적인 메시아에 대한 꿈 By Matt Schwartz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찌어다. (시편 96:1) 우리의 성령 충만한 찬양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즐거운 찬양과 춤으로 높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Tel Aviv 의 Diezengorf 거리를 힘차게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인들이 그들의 상점과 가게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에 와서 그들을 지지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아, 너희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써있는 글을 옷깃에 달수 있도록 만든 핀을 모두에게 달아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서 나와 우리를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Moishe 할아버지와 Esther 은 독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정통파 유대인 이였습니다.


    그들은 피난민 배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5월 1948년에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Sterns 라는 보석 가게를 Tel Aviv 에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종업원들도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며 또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날들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노래 하는걸 들었을때, Moishe 할아버지는 그의 가게에서 우릴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난, 당신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걸 믿을 수 없어!" 그가 말했습니다. "이 노래들은 내가 매일 꿈속에서 듣던 노래들과 똑같은 노래야" 저는 이 말에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좋아하는 Hava Nagila 같은 고전적인 노래들만 부른것이 아니라 보통 우리가 부르는 찬양중에 "우리의 하나님은 최고 멋있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노래들, 주로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였기 때문이였습니다.


    Moishe 할아버지는 그가 지난 3달동안이나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꾸는 꿈에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소파 소리와 나팔 소리에 잠을 깼지",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그 소리가 너무나 커서 날 밤중에 깨게 만들었어. 그래서 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앞문으로 달려갔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구름위로 올라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들은 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하늘이 열리고 있었지..하늘이 열리며 가브리엘 천사를 봤으며 하늘의 거대한 군대가 전쟁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는것도 보였어. 그들의 지도자는 하얀 말 위에 타 있었고 그의 눈은 불꽃 같았어. 그 지도자 뒤에서 말을탄 자들은 유대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이였어.


    그리고 그들 뒤에는 신성한 유대 여인들인 미리암, 룻, 사라 그리고 여왕 에스더 였어. 그런다음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봤지.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 와 그의 종 엘리자 를 봤어, 그들은 모두다 살아있어. 그들에게서 부터는 빛이 나고 있었어.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지. 이 주님의 거대한 군대의 수는 셀수없이 거대했었지.


    그들은 하늘에­ 여기 에루살렘의 Mt. of Olives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지. 그들의 지도자는 Hebrew tallit 을 입고 있었지. 거기에는 "만왕의 왕"이라고 써 있었어. 그의 눈에는 불꽃이 있었어,  그냥 느낄수 있었어, 그분이 우리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아 인것을.."


    나는 그분께 물어봤지,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분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해 주셨어."Moishe, 내가 바로 이제까지 선지자 들이 예언해온 그분 이란다. 내가 그분에게 "이름이 무었입니까?"라고 물어보자 그분이 "승리자"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Moishe,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유대인 가족들과 너의 모든 친구들에게 나에대해­ 전하거라. 그들에게 내가 이제 곧 온다고 전해 주거라! 그리고 이제곧 모든 이스라엘에 다윗­의 때와같은 예배와 경배의 때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는 ­ "Moishe, 내가 널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곧 너희를 데리러 올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잠에서­ 깼습니다.

     

     나의 아내인 Esther 이 "Moishe, 우리 랍비(율법선생)에게 가요.그리고 그들에게 꿈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나에게 말했읍니다. 그래?­ 우린 여러 랍비들과 만나 이야기해 봤지만, 그들은 다 다른 의견들을 내놓았습니다.


    어느 랍비는 "하얀 말을 타고 온다고 말하는 메시아는 없습니다.Moishe, 이건 그냥 단지 꿈일뿐 입니다.어떠한 하늘의 군대가 우리 이스라엘인 들을 우리의 적으로 부터 구원하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 자 집에가시고 그 꿈은 그냥 잊어버리세요."


    나와 함께 그곳에 ­ Moishe의 이야기를 함께듣던 나의 찬양팀들, 찬양댄스 팀들 그리고 몇몇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은 모두 우리의 Outreach Ministry 팀이였습니다. Brad 란 이름을 가진 한 목사님이 말씀하시길,"Moishe, 당신말이 맞습니다.


    한 '승리자'가 이스라엘에 올 것입니다. 그분은 하얀 말을 타고 다시 올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요한이 무었을 계시하고 있는지 들어 보세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의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 (계 19:11-12)


    Brad 목사님이 그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여기­ 본 메시아가 당신이 꿈에­ 본 메시아 입니까?"

    그 할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체 대답했습니다.

    "네..그렇습니다.."


    저는 곧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 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믿고있는 같은 메시야를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이름만 모르고 있을 뿐 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입니다. 그분이 처음 이세상에 오셨을땐, 이 모든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땐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실 것 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히브리어 이름인 '예슈아'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 입니다.

     "이제 당신의 주 시며 구원자 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는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아내인 Esther 또한 함께 기도 하길 원했습니다. Dalya, Svetta 그리고 Alona, 3명의 그의 종업원 들도 함께 영접 기도를 하길 원했습니다. 그들 5명은 함께 저와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저는 죄인 입니다. 저의 모든 죄를 회개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희생을 받아 들입니다. 저의 인생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은 나의 주 시며 구원자 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나의 메시아로 받아들입니다."


    그 5명이 갑자기 동시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Dayla 라는 직원은 온 가족이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Matthew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려고 당신들 모두를 우리 이스라엘로 보내셨습니다." 오하요 주 에­ 온 Lorna 라는 나의 춤 찬양을 이끄는 그녀가 말했습니다.


    "Dayla, 하나님은 더욱 많은 것을 당신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 질수 있도록 그들 모두에게 손을 언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 지며 방언이 터지며 성령님 안에서­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영광 스러운 순간 이였습니다. 그 5명 모두가 성령님 안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미국, 러시아, 그리고 온 나라에 곧 일어날 일들이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감탄을 하며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언하길 '주님은 이제 곧 오신다고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나라들의 부흥에 대해서­는 주님이 많은 기적과 놀랄만한 일들로써 복음을 확실히 증거할 거라 합니다. 그리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세상에 곧 다 전파될 거라고 합니다. 그 다음 끝이 올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모든 나라에 뿔뿔히 흩어졌던 모든 유대인 들이 돌아 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 반대 세력들이 증가 할 거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사람들인 이스라엘을 보호하여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 자신이 친히 그분의 많은 자녀들에게 나타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말씀을 많은 기적, 곧 사도행전에­ 일어났었던 일을 확증 시켜 주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 요엘(Joel)의 예언성취의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 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2:28)


    Matt Schwartz President, Founder Intercessors for Israel International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6244392868781886952 이 비디오는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의 삶입니다. 미국 웹사이트입니다.



    : http://all-things-new.net/index.php?showtopic=6562


    나는 둘째 부인과의 결혼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음 가운데 미국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의 결혼 실패 그리고 삼청교육대의 악몽 등으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생이지만 새로운 땅, 기회의 나라인 미국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살기를 원했다. 미국으로 이민가는 공상과 망상 속에 있다가 미국에 있는 둘째 형에게 전화를 해서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런데 둘째 형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온갖 싫은 소리를 하며 나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곤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국제전화를 한 번 하려면 큰 마음을 먹고 해야 할 만큼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우체국에서 국제 전화를 신청해 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어렵게 전화가 연결되곤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힘들게 전화가 연결되면 고작 실컷 욕이나 먹고 일방적으로 전화통화가 끊어지는 것이었다. 낙심이 되면 될수록 마음 가운데는 더욱 강한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나는 꼭 미국에 갈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그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줄로 믿는다." 
      
    나는 미국 이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야말로 올인이었다. 형님이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든 말든 나는 계속해서 돈 이 좀 모아지고 시간이 될 때마다 전화해서 꼭 나를 미국으로 초청해 달라고 애원했다. 형님의 반응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 다. 그래도 나는 계속 편지도 보내고 안부 전화도 정기적으로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찰거머리처럼 형님에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한 끝에 드디어 초청장과 재정보증서를 받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나는 초청장을 받는 순간 이미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처럼 흥분하고 가슴이 뛰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권을 만들고 신체검사를 받은 후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 통지서를 받았다.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아들 성민이에게 옷을 깨끗이 입히고 인터뷰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중간에 길이 막혀 인터뷰 시간에 늦을까봐 하루 전부터 노심초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인터뷰를 한 미국 영사는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백인이었다. 
      
    "미국에는 왜 가려고 합니까?" 
      
    "나는 미국에서 근면, 성실하게 새로운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부인과는 왜 이혼했습니까?" 
      
    나는 솔직한 대답이 가장 효과적인 대답이라고 믿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혼한 아내가 두 번째 부인이고 성민이는 그 전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아내가 아이를 가끔씩 손찌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아이의 얼굴에 퍼런 멍이 들 정도로 구타한 것을 보고 아내와 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은 이혼하게 됐습니다. 저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습니다." 
      
    영사는 아들 성민이의 얼굴과 내 얼굴을 몇 번씩 번갈아 가면서 슬쩍 슬쩍 보더니 미국에 가서 잘 살라고 말하며 여권에 도장을 꽝 찍어 주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사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여 주었다. 함께 앉아 있던 성민이의 손을 꼭 잡고 미국 대사관을 걸어 나왔다. 이제 나는 다른 세상 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제 다 잊어버리자. 빨간 모자의 악몽도, 나를 버리고 도망 간 성민 엄마에 대한 분노도,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개패듯이 무차별 구타하며 반병신을 만들어 놓기를 즐겼던 전두환 군사 정권에 대한 원한도…. 이제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태평양 한가운데 더러운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을 돌이켜 볼 때나는 그 모든 과거를 미국으로 건너오는 비행기 안에서 결코 버리지 못했다. 삼청 교육대의 악몽조차도 나는 지워 버렸다기보다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덮어 두고 살아 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 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덮어 두고 감춰 둔 마음의 상처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악령처럼 마음 한 가운데서 들고 일어나 의식과 무의식중에 나의 생각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대한 비행기 동체가 몸을 부비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어느 사이엔가 마법에 걸린 물건처럼 사뿐하게 땅을 떠난다. 비행기가 대기 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많은 사람을 태우고 육중한 몸으로 사뿐하게 이륙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느낌을 받게 된다. 비행기 창 밖으로 내가 살던 땅, 서울의 모습을 아련하게 내다 보았다. 자동차의 모습, 커다란 건물들 그리고 높은 산 등 모든 것이 콩알만큼 작게 보일 때쯤 내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꿈이 아닌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새출발이다. 미국 땅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보자.' 
      
    미국에 도착해서 둘째 형님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밥을 먹으러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다. 미국에 오기 위해서 오랫동안 긴장했던 것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심한 열병을 앓았던 것이다. 몸에 열이 40도 이상으로 펄펄 끓었고 나는 그 아픈 가운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신비로운 환상들을 보았다. 미국에 도착한 후 줄곧 40일 정도를 그렇게 끙끙 앓면서 지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40일 동안의 아픔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출산의 진통과 같은 것이었다. 아픈 몸을 떨쳐버리고 겨우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이상한 욕구가 생겼다. 교회에 출석해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몸도 가누기 힘들고 살고 있던 곳의 인근 지리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인교회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 교회는 순복음교회였는데, 처음 교회 예배실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 목사님의 말씀은 귀에 쏙쏙 잘 들어왔고, 전에는 잘 이해가 안 되던 성경 말씀도 한눈에 들어오며 뜻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놀라운 변화였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아내는 천성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이 근근이 어렵게 사는 환경은 우리 결혼 생활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나의 부족함과 주변 환경들이 우리를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내는 어느 날 짐을 챙겨서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가장 박대했던 둘째 형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둘째 형님은 경찰 공무원으로 일을 했었고 형수는 독일 간호사로 지원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독일 간호 근로자 테이프를 끊은 분이었다. 1960년대 초 박정희 군사 정권은 서독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국 간호사와 탄광 일꾼을 서독으로 인력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간호사 인력 수출은 현지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과 서독 간호사 수출 관계를 잘 설명한 감동적인 글이 있어서 옮겨 본다.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1960년대의 경제 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달러,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잔고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 등으로 빈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5 .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이듬해인 1961년 가을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 미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박 전대통령은 케네디를 위시해서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차디찬 냉대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4.19혁명 이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빗발친 냉소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풍전등화의 어려운 역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뜻밖에도 서독의 뤄프케 대통령으로부터 공 식 초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살살이 보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1964년 12월 6일 독일로 떠났다. 12월 7일 아침 9시 40분 뤄프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일행은 독일에 도착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통일의 그날까지 경제 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리고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환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19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고,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근무태도를 격찬하고 있었다. 이국 땅 낯선 곳에서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간호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 속에 따스한 정을 주었고 '동양의 프로세안'으로 끝없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미 1960년대 초에 가톨릭 계통의 민간협력 차원에서 취업 알선으로 30명 내외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 정부에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에는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방독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 방독 중이던 박 대통령은 뤄프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광산 도시에 도착해서 수많 은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 앞에 섰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박 대통령을 맞아 국민의례가 행해졌다. 애국가를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간호사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자기 나라 대통령을 보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간호사 여러분,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 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자신도 울고 말았다. 장내는 눈물 바다로 변했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뤄프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끝내 연설은 중단되었고 박 대통령은 밖으로 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각하, 손 한 번만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십니까?" 하고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고속도로의 차 안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뤄프케 대통령은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라고 위로하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 대통령이 40대의 가난한 대통령에게 격려하는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창밖에 비치는 석양의 황혼길에 철광 산업으로 보이는 한 공장굴뚝에서는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간호사 파독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극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I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둘째 형수님이 바로 그 시대에 한국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된 독일 간호사로 자원해서 현지에서 또순이 같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했던 장본인이었다. 둘째 형수님은 서독에서 간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먼저 미국으로 입국한 후 영주권을 받아 둘째 형님과 조카 등 가족 모두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래서 둘째 형님은 1975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가서 정착 한 초기 이민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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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함께 일하던 공장 동료를 통해 아내가 강원도 어디론가 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아이조차 버려두고 그렇게 떠나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민이 엄마를 찾아서 직접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 
      
    삼청교육대에서의 지옥훈련 후유증으로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간 아내에 대한 소문으로 심신이 완전히 지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아내에 대한 악몽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그때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지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었다. 무조건 자기를 잊어달라고, 그리고 이혼증명서에 도장을 찍고 아이는 당신이 알아서 잘 키워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그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그렇게 예뻐했던 아내였는데 뭔가 이상한 것에 홀리기 전에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자의에 의해서 사 라졌던 것도 아니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목숨 부지하고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며칠 밤낮을 술독에 빠져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살았다. 또 다시 자살을 생각했다. 그리고 약국 여러 곳을 돌면서 수면제 50알을 구입해서 밤늦게 소주 한병을 사 들고 집 앞 공터로 나갔다. 죽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성민이는 셋째 형님 집에 다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죽어버리는 거야. 집 나간 아내나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전두환 같은 놈들도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증오도 없고 사랑도 싫고 그저 모든 것을 죽음이라는 구덩이 속에 던져 버리자. 죽음의 위력은 내 삶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니까." 
      
    혀를 지그시 깨물며 소주를 반 병 정도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흘러 들어가는 알콜의 자극이 마치 칼로 살을 후비는 것처 럼 짜릿짜릿하게 전해졌다. 며칠 동안 밥이라고는 먹어 본 기억이 없는데 오늘도 빈속에 깡소주 반 병을 들이부었으니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면제를 입 안으로 털어 넣으려는 순간, 성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의 재롱떠는 모습이 가을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성민아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너무도 고통스 럽다. 이렇게 사느니 정말죽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너를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왔다. 부모 없이 버려진 자식이 되어서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아들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목숨을 끊 을 용기도 없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 자식을 나처럼 구차스럽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내가 낳은 자식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양심의 소리가 나를 향해 질책하고 있었다. 손아귀 안에 쥐고 있던 수면제 50알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도 사람은 다 살기 마련이다. 
      
    삼청교육대의 지옥훈련 가운데서 목숨을 연명했고,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아내 때문에 울화병으로 자살을 여러 차례 생각했던 고통의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시작했다. 시간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4개월,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또다시 몇 개 월을 그렇게 폐인처럼 보낸 후에 나는 아들 성민이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일터를 찾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그런대로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아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버지 생활을 간신히 끌고 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결혼도 일종의 대형 사고였다. 두 번째 아내는 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아가씨였다. 외모도 좋고 성격도 활달해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 주변에서 추파를 던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야무지게 남자들의 콧대를 밟아버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또 재미있었다. 물론 나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의 농담과 장난들을 잘 받아 주었다. 또 내가 아들까지 있는 홀아버지 신세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다. 얼마 동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애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는 살림을 차 렸다. 내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하객도 없이 두 사람만이 서로의 마음에 맹세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다른 것은 못해 주어도 법적인 부부 생활은 확실하게 보장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였던지 나는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만큼은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둘째 부인과의 결혼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혼자의 결정으로 아기를 지우고 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아이를 가질 형편이 아니잖아. 그래서 낙태했으니까 그런 줄 알아. 나중에 형편이 나아질 때 그때 아이를 가져도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이 내게 애를 지울 건지 아닌지 물어는 봐야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을 너 혼자 결정하고, 너 혼자 치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낙태로 인해 생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내가 조그만 일에도 아들 성민이를 심하게 야단치고 손찌검을 자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성민이에게 절대로 손찌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아니,이 여편네가 정말 미쳤나."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벼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치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 빨리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바가지가 그칠 날이 없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태훈아, 그렇게 먹다가 얹혀서 무슨 일 나겠다. 제발 천천 히 먹어라." 
      
    밥그릇을 다 비우고 물을 부어서 설거지 한 국물까지 다 마신 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엄니, 감사합니다." 
      
    밥을 한 끼 건네주면서도 어머니는 내심 혹시라도 형이 돌아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표정이 었다. 
      
    "그래, 태훈아. 이제 나가서 일자리라도 한 번 알아봐라. 그리고 아침에 오면 밥상 준비해 놓고 기다리마." 
      
    그렇게 해서 잠은 노숙을 하고 아침이면 어머니를 몰래 찾아가 간신히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하는 생활이 얼마 동안 계속 되었다. 어렵고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나는 이때처럼 어머님의 사랑이 고맙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 내장이라도 빼내서 자식을 위해 희생해 줄 수 있는 것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어머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은 오직 어머니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형님 집에 늦게까지 머무르며 조카들과 장난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형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는 아연실색을 하면서 나를 방 안 한쪽구석에 있는 벽장으로 떠밀어 넣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형님은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혹시 누가 집에 다녀갔냐고 물었다. 그러자 철없는 조카들이 막내 삼촌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어머니, 태훈이 녀석은 절대로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둘째 형님은 어디서 들고 왔는지 흰 횟가루 같은 소독약을 집 안팎에 돌아가며 뿌리고, 아이들의 손발을 비눗물로 열심히 씻겼다. 
      
    "폐병 환자가 자꾸 집안에 드나들면 아이들에게 병균이 쉽게 옮겨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좋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는 절대로 태훈이 집안에 들여놓지 마세요." 
      
    나는 벽장 안에 숨어서 형님이 하는 말을 들으며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꼭꼭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내가 폐병환자라서 그렇게 박대를 하는구나.' 
      
    물론 그때는 이미 폐병에서 다 치유된 상황이었지만 그런 형님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형님집을 찾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둘째 형님을 생각하면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런 냉대와 설움을 당한 기억은 평생 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둘째 형님과는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서러움과 분노와 실망감과 배신감 등 온갖 느낌들이 혼합된 감정의 칵테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두 치유해 주셨다. 둘째 형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져 있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주셨다. 미움이 깊었던 만큼 둘째 형님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마음의 변화였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이다. 
      
    노숙자 생활을 하며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서울에 무작정 상경했을 때 양복 수선 기술을 좀 배워 두었던 것이 도움이 되어서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우선은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사에게 근면한 충청도 시골 총각이라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직장 생활은 한층 재미있어지고 일이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때쯤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얼마간 연애를 하다가 우리 둘은 곧바로 내 자취방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내 나이 19세였다. 결혼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얼마간 동거를 하다가 둘 사이에 아이까지 덜컥 생겼다. 임신했다는 소식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오빠되는 사람이 자취방을 찾아왔다. 순진한 자기 여동생을 꼬셔서 임신까지 시켜놨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결혼하면 되잖아. 못할 거 뭐가 있나. 그냥 우리끼리 둘이서 결혼식을 치르고 호적에 이름을 올려서 살면 그게 결혼한 거지, 뭐 별다른 것이 있나?' 며칠 후 우리는 물 한 잔 받아 놓고 조상님들에게 이 결혼을 축복해 달라며 세상에서 가장 조출한 결혼식을 치렀다. 주위에 아무런 하객도 친지도 없었지만 그날 나는 맹물 한 잔에 맹세한 결혼식을 통해 죽도록 가정을 소중히 지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에게도 떳떳한 나의 법적인 아내가 된 것이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낳은 후 얼마 동안은 정말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장 일을 마치고 고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귀여운 아들 성민이가 재롱을 어떻게나 예쁘게 부리던지…. 나는 그저 아이와 함께 그렇게 오래 있고만 싶었다. 아내도 첫 아이를 낳은 후 다소 몸이 허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재롱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냥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우리 가정을 덮어 버릴 줄은 누구도 몰랐다. 고향 친구의 집에 병문안 갔다가 동생들과 말다툼 끝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나는 그날 이후 4개월 동안 아내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었다. 나를 강제로 잡아 가둔 경찰은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지옥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가족과의 연락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들 성민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운 목사

    천주교에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영혼의 중간 정거장과 같은 곳으로 예수를 영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영혼들, 또는 일찍 죽은 아기의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가기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도 하고 가끔씩은 특별 헌금도 한다.  
      
    가톨릭교회의 연옥교리가 가장 활성화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는 중세시대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면서면죄부를 대량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 들은 연옥에 가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사들였는지 모른다.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중세 교황들은 이를 교활하게 이용해서 면죄 부 장사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둘째 누나를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나도 어느 사이엔가 면죄부 같은 것이 있다면 얼마의 돈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오,하나님! 저는 연옥의 교리나 면죄부를 통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 하나에 내 생명을 걸고 믿습니다. 하나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르셨던 것처럼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을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던 우리 둘째 누님의 불쌍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 즉 구원의 사역은 우리 인간들의 이해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구원 방법이 영혼의 세계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 누님에 대한 풀 수 없는 회한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사랑하는 둘째 누님,우리 이제 조만간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 누님! 정말 사랑하고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야간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둘째 누님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지난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생활을 했 던 고향집을 떠나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했다. 당시 내 나이 19세였는데 고향에서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폐병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어 이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대도시로 나가서 인생을 새롭게 도전하고 싶었다. 서울까지 올라가는 완행열차가 왜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던지 마음만 바쁘게 움직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밤이 새는 줄 도 모르고 기차 구석에서 이런 저런 공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형님 집을 찾아갔다. 둘째 형님은 그 당시 경찰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과 형수님은 독일 간호사로 나가 일하고 있어서 그나마 생활이 좀 안정된 편이었지만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3명의 자녀와 살림을 거들고 있는 어머니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살림에 나 같은 식솔이 한 명 더 추가된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지간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 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 직장을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형님 집에 얹혀 살아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형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어머니는 2년 전 폐병으로 피를 쏟으며 고향으로 쫓겨 내려갔던 내가 아직 좀 여위긴 했어도 건강을 회복한 모습으로 나 타나자 눈물부터 주르륵 흘리셨다. 
      
    "그래,이제 다 나은 것이여?" 
      
    "예." 
      
    "밥은 잘 먹냐?" 
      
    "예."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 형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인데." 
      
    "시골에서 뭐 할 것이 없어서요. 그냥 취직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 좀 해보렵니다." 
      
    열일곱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둘째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형님의 마음 가운데도 형제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워낙 사는 형편이 힘들 때라 8남매나 되는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째 형이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다시 상경한 것을 알자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나는 당장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오랫동안 경찰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강직하게 훈련된 둘째 형님에게 며칠만이라도 집에서 신세를 좀 지자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노숙자가 되었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노점상이 버리고 간 불씨 옆에서 몸을 녹이면서 별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겨울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때 폐병이 치유되던 날 새벽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갔다.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하던 폐병을 말끔하게 치유해 주셨던 성령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기억났던 것이다. 
      
    '하나님,사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당신이 나를 치유해 주셨을 때 이렇게 노숙자 신세나 되라고 병든 몸을 낫게 해주셨습니까. 차라리 누님과 함께 저승에 가게 두시지 치료는 무슨 치료입니까. 이제 나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 주시옵소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갖 푸념을 하는 동안 어느덧 새벽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밤새 추위에 떨고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허기를 붙잡고 잠깐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형님이 출근하고 난 이후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래, 지난 밤에는 어디서 지냈냐." 
      
    자식을 눈앞에 빤히 두고 노숙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가 찬밥에 간장을 붓고 삶은계란을 하나 들고 들어오셨을 때 나는 그 밥을 불과 몇 초 사이에 다 먹어치웠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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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은 은혜의 땅 12

    김태훈 0 01.17 03:24
    누님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결핵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째가 됐다. 나는 마음 한가운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내가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병으로 고생을 하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산송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아니 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회복해서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한번 잘 살아보자." 
      
    꼭 병에서 낫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나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잠시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들여다보았던 성경책을 찾아서 다시 읽으며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나의 질병을 반드시 치유해 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어렵고 고통스런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자를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병에서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치유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는 데 무엇엔가 이끌려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리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불 속에서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나는 한순간 이불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새벽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고, 먼 동녘 하늘에서는 동이 틀 준비를 하는지 아주 희미한 빛이 밝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상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깊은 심호흡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깊은 심호흡을 하는 순간, 공기와 함께 어떤 액체 같은 것이 내 코로 들어와 폐부 깊은 곳까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 느낌이 드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하던지…. 그렇게 오랫동안 새벽 공기를 즐기며 서성이다가 동이 환하게 틀 무렵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잠깐 아침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 이거 웬일이지, 역시 새벽 공기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나는 누님에게 새벽에 있던 일들을 잠깐 이야기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욕이 엄청나게 생기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특히 아침에는 밥을 한 숟가락도 떠먹기 힘들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벌써 두 공기째 밥그릇을 비우고도 더 먹고 싶을 정도로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태훈아! 이제 네 병이 다 나았나 보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입맛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이 병이 나은 증거라고 하더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지겹도록 싸웠던 폐병이 그렇게 감기 떨어져 나가듯이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몸의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고 그날 이후 누님이 밥을 해대기 힘들 정도로 밥을 많이 먹게 된 것이다. 새벽에 깊은 심호흡을 할 때 성령님의 치유 손길이 내 폐부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사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었다. 아직 신앙이 자라기도 전이었고,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만 새싹처럼 싹트기 시작한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믿음과 마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2년 동안 지겹게 나를 괴롭혔던 폐병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셨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치유의 경험을 한 이후부터 하나님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실존적인 존재였으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 일상생활이 하나님을 향해서 성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셨지만 나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시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도 않았고 성화 과정에 대해서 배울 방법도 없었으며 특별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연히 나의 삶은 다시 옛날의 습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후 서른 살이 넘어 강한 성령 체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아 하는지 깨닫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나의 폐병이 치유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치유의 기적으로 일어난 내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 볼 때 누님의 희생이 없었으면 나는 이미 죽은 송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누님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남동생이 병에서 회복되기를 빌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 리 둘째 누님에게 그런 마음을 불어넣어 주셔서 자신도 병으로 아픈 상황 가운데 동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둘째 누님은 내가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본 얼마 후에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 하나님!" 
      
    둘째 누님이 세상을 떠나던 날 나의 마음은 수백만 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동안 유일하게 내게 사랑을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둘째 누님을 먼저 데려가신 것일까. 하나님은 왜 내 병만 치유해 주시고 우리 둘째 누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을까? 아! 그토록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왔던 둘째 누님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다니…. 싸늘하게 식은 누님의 시신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나는 누님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길고 긴 통곡의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주의 종이 되고 난 후,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둘째 누님의 구원 문제였다. 누님은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다가 병에서 치유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 누님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하나님! 어떻게 우리 누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당신의 구원 계획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둘째 누님도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좀 주실 수 없을까요. 누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쌍한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어머님이 올라와서 함께 지내며 형님들의 자취생활을 거들어 주고 있었지만 방안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형님들은 "너 어쩌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한 거냐.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치곤 했다. 
      
    나는 기술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각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잠겨 있던 농촌 출신 청년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던 시절이 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빵 공장에 들어가서 잠시 기술을 배울 때는 기술자가 얼마나 구타를 하는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정비공장 인근을 얼마 동안 배회하곤 했지만 역시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 기술다운 기술이라고 배운 것이 양복 수선 기술이었는데 조금 배워서 미싱을 돌리고 재단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상경한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한 끼도 제대로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또한 잠은 방의 가장 구석자리에서 두 다리를 쪼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 새우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방안에 온기는 전혀 없었고 잠을 잔다기보다는 그냥 밤새도록 덜덜 떨다가 볼 일 다 보는 그런 상황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서 기침을 하다가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가슴에 바늘을 꽂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순간순간 찾아왔고 기침을 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어머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빨리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 어보라고 하셨다. 하루 종일 보건소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간신히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다음 날 폐병 3기까지 진행이 돼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당시 폐병 3기가 뭔지, 얼마만큼 심각한 질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기침할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 문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 형님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서 요양을 좀 하도록 해라." 
      
    형님들은 거의 반 강제로 나를 기차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보건소에서 폐병 진단을 받은 후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지만 목을 끓고 올라오는 각혈은 계속되었다. 먹을 음식도 없었지만 식욕까지 떨어져서 며칠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집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바로 산송장 신세가 되었구나'라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가족들 가운데 특별히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방안 한구석에서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부잣집에 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누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둘째 누님은 식모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고 폐결핵 증세까지 있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동병 상련이라고 둘째 누님과 나는 그날부터 서로 간병을 하면서 결핵 투병 생활을 했다. 둘째 누님은 얼굴도 몸매도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거기에 마음 씀씀이도 얼굴처럼 고와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분이었다. 누님과 함께 한 투병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은 마를대로 말라서 오랜만에 나를 본 이웃들은 놀라기까지 했다. 누님과 나는 보건소에서 결핵 항생제 약과 주사를 받아오긴 했지만 늘 약이 부족했다. 그래서 항생제 주사약이 부족할 때면 누님은 항상 내게 먼저 주사를 놓아 주고 자기는 나중에 약을 받아와서 맞겠노라며 양보해주곤 했다. 말은 쉽지만 그 당시에 항생제 주사를 양보하는 것은 마치 생명을 양보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누님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은 꼭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부턴가 누님의 다친 허리에 고름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허리에 주사바늘을 꽂아 고름을 뽑아주곤 했는데,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번은 누님이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날 누님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난 후 우리 둘은 같이 손잡고 방바닥에 퍼지고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쳐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죽으면 이런 고통도 다 끝나고 혹시 더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에 대한 강한 충동이 그때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적이 없었다. 결핵에 개고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한 번이라도 누님과 개고기를 먹어볼 수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옆집에서 개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용기를 내서 누님과 함께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 먹어보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들은 결핵균이 옮겨질지도 모른다면서 집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누님과 함께 못내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마음 가운데 '아,저 개고기 한 점만 먹으면 근력을 회복할 것 같은데'라는 서러움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날 저녁 누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딘가를 황급하게 다녀왔다. 그날 저녁 따라 나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사람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혼미한 정신으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누님이 아침 밥상에 고깃국을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고깃국이야?" 
      
    "응,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먹어둬. 몸보신에 좋다고 하더라." 
      
    "그래도 뭔지 알고나 먹자. 이게 뭔 고깃국이고?" 
      
    누님은 한사코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고깃국을 다 먹고 난 후에야 고양이를 삶은 고깃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양이 고기! 나를 생각해주는 누님의 사랑이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쳐 왔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국 땅에 살면서 그것도 40여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마치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동전 한 닢을 찾아내는 것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고향 충청도의 I960년대를 생각하면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지리도 못살았다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고 동네 아이들의 행색은 아마도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몇몇 부잣집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먹을 것, 입을 것을 늘 걱정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한국은 참으로 특별한 나라다. 한 세대(generation)가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했던 국가에서 세계적으로 잘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는 급성장,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 수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나가, 특별히 후진국인 제3세계 국가에서 서방권 선교사들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 40대 이상의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그들의 혈액 속에 빈곤을 이해하고 가난을 경험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국인 선교사들은 빈곤한 국가의 선교사로 헌신한 다른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보다 대체적으로 빠른 시간에 현지 적응을 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까마득한 과거의 일들이 되었지만 막상 과거의 한국처럼 못살고 있는 선교지에 도착해보면 과거의 기억들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그래서 아프리카 또는 남미, 아시아 등 선교지를 방문하는 한국 성도님 또는 목회자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대개의 경우 "어휴, 꼭 30~40년 전 한국 모습을 보는 것 같네!"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가난했던 것도 하나님의 역사였고, 또한 단시간 내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한 나라가 된 것도 하 나님의 강권적인 물질적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지말에 한국 민족을 세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렇게 가난도 겪게 하셨고 그 후에 선교에 필요한 물질도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와 한국에 기독교인이 팽창하던 시기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의 물질적인 복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물질적인 풍요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계 선교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은 물질적인 복을 엉뚱한 곳으로 쏟아붓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받은 물질들의 상당한 부분을 개인의 향락과 사치를 만족시키는 데 소모하고 있다. 한국 민족이 받은 복을 나눠 주는데 인색한 모습을 계속 보이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성령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열심을 내서 봉사해야 할 것이며, 각 선교단체들은 쌀 한 톨이 없어서 굶은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자선과 자비의 깃발을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받은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 썩기 시작한다. 받은 것은 나눠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한국의 1950년대에 8남매(5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나 굶는 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랐다. 위로 형님들이 있었지만 우선 자기 입을 채우기가 바빴고, 부모님들 또한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그 와중에 중풍 증세를 보이셔서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라도 반듯한 것이 보이면 누가 먼저 뽑아 먹을 세라 번갯불처럼 달려가서 풀포기를 뽑아 먼저 제 입에 털어 넣곤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인가 동네 입구에 작은 교회가 하나 세워졌다. 그 당시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교회는 뭐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 생긴 교회에 가면 가끔 맛있는 사탕도 집어주고 때로는 흰쌀밥에 고깃국까지 얻어먹을 수 있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한 달에 몇 번씩 교회 문을 두드렸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 몇 명이서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찬양대를 만들었는데, 한번은 대전 근처 한 신학교 주관으로 교회대항 찬양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등수는 몇 등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회 참가 부상으로 연필 한 자루와 조그마한 공책 한 권을 받았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인솔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함께 간 친구 한 명이 주최 측의 착오로 인해 상품을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니 연필, 공책 두 가지를 다 받은 사람이 한 가지를 나눠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소중하게 한 손에 쥐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그 친구에게 전해줬 다. 선생님이 너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는데 그 친구에게 준 연필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그 연필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친구에게 다시 가서 연필을 돌려 달라고 해야겠다.' 깜깜한 한밤중에 이웃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연필을 다시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그 친구가 연필을 돌려 줄 리는 만무했다. 나는 애원하고 간청하다가 결국 내 성질에 내가 화가 나서 주먹다짐까지 했던 기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연필 한 자루라도 그렇게 귀한 시대를 살아왔다.  
      
    교회와의 첫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도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길고 긴 불신의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16세 때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 당시 큰형님과 둘째 형님이 서울에 올라와 단칸방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지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와 형님들에게 갑작스런 민폐가 됐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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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형의 집에 있던 아들 성민이를 찾아와서 단칸방에 누워 있자니 정말 모든 것이 한심했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고 나온 나는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사회의 어느 부분에도 소속될 수 없었고 오히려 대인 기피증마저 생긴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가운데는 죽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정신적인 공황이 왔다.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고 조바심이 늘 나를 괴롭혔다. 집중을 할 수 없었고 늘 안절부절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사회의 냉대는 물론 친형님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눈초리도 따갑기만 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일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머님조차도 혹독한 대가를 치뤘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정신차리고 잘 살아보라는 말만 하실 뿐이었다.  
      
    아무것도 내 의지와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무기력한 장애자와 같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나를 이렇게 만든 삼청교육대의 조교들과 전두환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삼청교육대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데 나는 2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정신적인, 또는 육체적인 불구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인권 유린으로 점철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된 시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생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지 못하는 인생은 결국 악의 세력으로부터 간섭과 물리적인 통제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영계에서는 한 영혼을 간섭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엡 6:11).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받게 되길 바래서 탄식하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롬 8:26), 선한 길과 악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다.  
      
    일단은 나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는 그 영접의 행위가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근대사 가운데 한국 민족은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생명의 존엄성이 한순간에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예가 바로 삼청교육대 사건이며, 일제시대 일본 군인들에 의한 강제 징용, 정신대, 인체 실험 등의 만행이 그에 속한다. 그리고 구 소련제국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되었던 30여만 명의 재소 한인 동포들의 운명도 결국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당한 대표적인 경우라 말할 수 있다.  
      
    스탈린에 의한 강제 이주의 역사는 한민족의 눈물의 역사다. 일제 치하를 벗어나 만주와 연해주 쪽에 거주하고 있던 30여만 명의 조선 동포들은 1937년 겨울, 단 열흘 만에 살고 있던 지역에서 기차에 실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중앙아시아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지는 비운을 당했다. 본인들의 의견은 온데간데 없었다. 타인의 결정에 의해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누구 한 명 항변조차 할 수 없었고 20여 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앙아시아 철도를 달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소금 사막의 땅에 그야말로 인간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스탈린 정부는 이들의 생존 여부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연해주 쪽 세력 확장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한민족을 그 땅에서 쫓아냄으로써 자기들이 우려했던 일본 비밀 스파이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삼청교육대에서 본인의 의지, 행실에 관계없이 폭력에 의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유린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역사의 폭력에 의해 70여 년 전 중앙아시아 땅에 버려졌던 불쌍한 우리 고려인 후손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소련이 만주, 연해주 한민족 강제 추방이라는 인권 유린의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일본은 한국을 식민통치하면서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젊은 처녀들을 군 위안부인 정신대로 강제 징용해서 한민족의 인권을 가장 처참하게 짓밟았다. 그런가 하면 군사 무기를 개발하면 서 한국사람들을 인체 실험용으로 잔인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몇 세대를 지나와도 일본이라고 하면 먼저 불편한 민족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도 모두 이때 당한 억울한 감정들이 한민족의 핏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 당했다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할린 땅에 남겨진 5만여 명의 한인 동포들은 부조리한 역사의 희생자들이었다. 일제시대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삶도 처절한 것이었다. 주로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탄광 노동자, 또는 나무채벌공 등 육체적으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임금 지급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끼니마다 식사를 제때 공급받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과로로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싸늘한 시체로 죽어갔다. 강제 징용된 사람들에게 인간의 가치, 개인의 의지는 이미 사전에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곳에는 일본군의 끊임 없는 노동력 착취와 개 다루듯 업신여기는 인간적인 모욕만이 넘쳐흘렀다. 한국 민족의 핏속에는 일본에 대한 원한과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반일 민족감정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장종택 목사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16년 많은 집회에 참여하여 취재를 했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몇 개를 꼽으라면 12월 16일(금) 뉴욕어린양교회(박윤선 목사)에서 열렸던 장종택 목사 찬양집회도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장종택 목사는 ‘은혜로다’, ‘다윗처럼’, ‘생명과 바꾼’, ‘내 선한 목자 되신 주’, ‘내 삶 속에 주님 없었다면’ 등 찬양을 만든 찬양 사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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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날 집회는 찬양집회가 아니라 간증집회였다. 2005년 1월 ‘항NMDA수용성뇌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딸 온유가 입원하고 일어났던 고난과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데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리고 말씀집회였다. 믿는다고 하지만 삶속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 세대를 질타했다. 집회는 거의 자정까지 길게 이어졌다. 

     

    1.

     

    온유를 돌보며 중환자실에 죽음과 삶의 현장을 보게 되고 처절한 마음을 가졌다. 그때 깨닫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잘 생각을 안한다. 나도 그랬다. 하나님은 ‘갑’이신 분이시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을’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라 내 이야기만 하고 내 처지와 내 절박함만 이야기했다. 제가 그랬다. 하지만 죽어가는 온유를 보면서 내 찢어지는 가슴에 붙잡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셨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얼마나 작은 별인지 아는가? 지구가 속해있는 은하계인 태양계는 2천억 개의 별이 모여서 조그마한 은하계를 만든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별은 지구를 비교하면 20만 배 크다. 하나님은 그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사는 인간을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계는 2백만 광년이 떨어진 안드로메다인데 2~4천억 개의 별이 있다. 그런 은하계가 수천 개 모이면 은하단이 된다. 그 안에 있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알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에게 주셨고 그냥 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안죽으면 죽이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밑에서 대각선으로 창을 찔러 심장을 관통하게 만든다. 그렇게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시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런 아픔과 예수님의 찢어지는 심장을 통해서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천박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절실히 깨닫았다.

     

    2.

     

    온유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을 보고 미칠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안타까움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지 못하고 눈만 떠 있는 온유가 바로 저였다. 오늘 우리들은 세상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아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짓말과 불법을 저지를 때 하나님께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소리치시는데 그런 하나님을 뒤로하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들통이 나야 형통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 최근 한국에서 1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집회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는 명목아래 그리스도인 것처럼 앉아있는 가짜가 많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에게 살면서 스마트폰 보다 하나님이 덜 귀중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말을 못한다. 그냥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겠지 그렇게 알고 교회를 다닌다. 단지 들통이 안 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교회에 앉아 있는 모습은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에서는 웃으며 섬기지만 진실한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앉은 이 모습이 우리의 진짜 모습인 줄 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말을 안하면 세상도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성경에 보면 열처녀 비유가 나온다. 어리석은 5처녀는 비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열 처녀 모두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어리석은 5처녀들은 준비를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민교회는 믿음보다 다른 목적으로 교회에 많이 온다. 오늘 여러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통이 나야,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 것이 들통이 나야 다시 회심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사망의 잠을 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온유의 모습이 제 모습이었다.

     

     

    ▲어린양교회와 장종택 목사의 찬양

     

    3.

     

    달라스에서 13년을 살았다. 영주권이 나오고 한국에 나갔는데 10여년 만에 한국교회가 뭔가 이상해졌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제가 추구했던 예배와 달랐다. 제가 배운 기독교 신앙은 예배당에서 고백했던 것이 삶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라고 배웠다. 삶의 예배를 배웠다. 그렇게 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10여년 만에 한국에 가니 예배당에서의 삶과 밖의 삶이 다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중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그때 ‘개독교’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목사를 보고 쓰레기에서 딴 ‘목레기’라는 말을 듣고 충격이 컸다. 한국 기독교가 이것이 뭐지 라는 놀라움이 있었다. 큰 캠프를 초청을 받아 갔는데 참가한 사람들이 막 뛰면서 예배했다. 1995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왔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은 찬양할 때 박수치면 순복음교회이었을 정도였다. 고신 합동 통합 등 장로교단들은 모두가 경건하고 조용한 예배를 드렸다. 12년 만에 가니 미국처럼 뛰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그런데 감동이 짧게 끝났다. 열심히 찬양하던 아이들이 찬양이 끝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올라오니 3분의 2가 핸드폰을 꺼내 딴 짓을 하고 놀았다. 예배팀은 나가 안 들어왔다.

     

    그런 것을 보고 미국에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삶의 예배의 부흥이 아니라 어쩌면 종교행위의 부흥 혹은 예배음악의 부흥입니까? 그러면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다. 영주권도 버리고 한국에서 오라는데도 없었지만 친구에게 보증금 3백만 원을 빌려 동두촌에 방을 얻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보냈다. 그때 온유가 태어났다. 곰팡이가 가득한 방에서 아이가 천식에 걸려 어려워했고 불치병도 걸렸다. 너무 하나님께 화가 나 이럴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4.

     

    그때 깨달은 것은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신천지와 다를 바 없다. 신천지는 일주일에 4-5번 교육받으러 가 성경비유를 배운다. 오전오후 공부하며 세뇌 당한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주일에 가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할 때 세뇌 받는 것 아닌가. 암기하는 것 아닌가. 주일학교에서도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암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천지보다 암기를 덜하고 세뇌를 덜 받는다. 열정이 그들과 비교가 안된다. 그런데 달라져야 할 것은 그들의 교주는 이만희이고 죽을 인생인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것이 삶에 드러나야 되는데 안 그러니 신천지와 비교하면 더 못한 것이다. 그냥 암기했던 것이다. 저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가 풍성하시고 좋으신 분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나를 힘들게 하는 하나님으로 다가왔다. 내가 배운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저는 이때까지 내가 만든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다. 암기한 하나님.

     

    5.

     

    그래서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구나.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 닫았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때 음성이 하나 들렸다. “너 이래도 나를 신뢰하느냐?”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쾅 쳤다. 우리 집안은 4대째 예수를 믿은 집안이다. 늘 들었던 말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너 이래도 나를 신뢰하느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온유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 쉽게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이렇게 두렵고 무거운 단어인데 함부로 내뱉은 내가 순간 부끄러워 답하기를 주저했다. 그 다음으로 들려온 음성은 “네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하나님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찬송하며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설교를 들을 때 ‘아멘’으로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처참한 환경에 있는 딸을 보면서 믿음이 안간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었는데도 책임을 안지고 있었던 것이다.

     

     

    ▲장종택 목사의 눈물의 간증 

     

    6.

     

    왜 세상은 우리 보고 개독교라고 하는지 아는가? 왜 목사를 보고 쓰레기라고 하는지 아는가? 세상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안다. 그래서 “너희들은 교회가서 예배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가. 정직해야 한다고 순결하게 산다고 불법을 안 저지른다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것들을 지키니. 왜 그렇게 한 말을 안 지키고 책임을 안지고 사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이 더하고 자기유익을 위해 남을 짓밟는다. 교회에서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 세상이 던진 말이 개독교이다. 아닌가? 예배당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고백한 다음에 예배당 떠나면 어떻게 하는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가? 회계사 사무실 3년을 일하면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고백한 말을 공수표를 던지듯이 던지고 내 마음대로 살지만 입으로는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절대가치로 두고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삶은 다른 절대가치 돈과 성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던 사망의 잠을 잤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다. (중보기도에 대한 정종택 목사의 새로운 시각에 대한 기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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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이 겪은 무기력함과 세상 권력의 부조리하고 잔인한 모습은 삼청교육대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좋은 표본이다. 빨간 모자의 조교들은 삼청교육대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훈련시키다가 죽여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입소자들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신체적 고통을 가했다. 저들은 타인을 학대할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을 더욱 즐기기 위해 고문과 체형의 강도를 날마다 더해갔다. 따라서 고문을 당하다가 기절하거나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 았던 것이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쾌감은 일시적인 것이지만,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당시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은 아래와 같이 하소연한다.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생각했다. 내가 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을까. 하지만 길가던 나를 잡아 가둔 이유를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다. 내 머리카락이 길어서 잡아간 것일까? 이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광주항쟁 때도 힘겹게 살아남았는데 꼭 한 달 만에 아무 이유 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9개월 동안 매일 얻어맞고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했던 그 이후로 열 번 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아직까지 죽지 못한 것이 원통할 따름이다." 
      
    소련 땅에서 벌어졌던 강제 추방이나 일제의 강제 징용, 인체실험 등의 인권 유린 만행은 그래도 다른 민족들에 의해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삼청교육대 훈련 동안 가해진 인권 유린 행위는 같은 민족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편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렇다 할 피해보상이나 명예회복을 위한 정부의 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삼청교육대 인권연합위원회 웹사이트(httpy/www.3chung.or.kr)를 통해 피해자들의 피해 사항을 계속 접수하고 있으며 피해 보상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 글은 삼청교육대 인권연합위원회에서 최근에 발표한 대정부 성명문이다. 
      
    "삼청교육대 훈련은 삼청학살 기획 주모자인 전두환 추종자들, 대한중앙노인회 회장 안필준과 같은 5공 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한국판 아우슈비츠 학살사건이었습니다. 삼청교육대 인권위원회는 여러 인권단체 동지들의 투혼의 열정과 양심에 호소하여 전두환과 안필준에 의하여 자행된 삼청교육대 실종자 1만여 명에 대한 학살 및 소각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삼청민주인권 운동연합은 역사와 진실을 민족 앞에 올바로 세우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억울하게 개처럼 죽어간 삼청 희생자의 원혼을 뒤늦게라도 위로하게 되기 바랍니다. 삼청교육대는 역사의 위선자 그리고 역사의 이단자 전두환의 지시로 1980년 5.18 학살사건 이후 국민에게 위협감과 공갈성을 내세워 열악해진 국정과 여론 등을 무마하기 위하여 1980년 8월부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7~8년간 무고한 시민 범법자로 몰아 세 워 철저히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삼청교육대 학살과 시체 소각사건은 나치의 학살과 만행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삼청교육대 학살과 소각사건 만행의 역사의 현장은 1980년 당시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5사단 의무대 내에 귀속된 한탄강 부근 3,000여 평입니다. 그곳에 삼청학살 사망자 사체소각처리공장을 운영하여 학살된 사체에 대한 소각처리가 이루어졌다고 당시 소위 유경종은 고백하였습니다. 이 삼청학살 사망자 사체소각처리공장에서는 하루에 적게는 30여 명에서 많게는 80여 명까지 학살된 사체를 소각처리하였습니다. 인근 마을 주만들은 소각처리된 사체의 그을린 연기가 하루 종일 전곡읍 한탄강 하늘을 희뿌옇게 물들였고 살 태우는 역겨운 냄새에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민주화 동지 여러분! 우리는 힘을 모아 역사의 단죄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삼청교육대의 학살사건의 소각 피해자 여러 영령들과 영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진실과 정의의 수호 궐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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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병 3기까지 앓았던 나는 가슴을 칼로 후벼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도 이렇게 매 맞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구타하던 소대장은 보이지 않고 주위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 사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네." 
      
    가슴 명치를 졸지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인해 나는 얼마 동안 숨을 쉬지 못하고 그렇게 혼절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영적 싸움이었다. 삼청교육대라는 곳에서 악의 세력과 선한 세력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앱 6:12). 
      
    지옥 훈련이 끝난 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부대에 도착하던 첫날과 같이 400여 명의 훈련원들을 연병장에 도열시켰다. 그리고 나서 중대장이 단위에 서서 훈련을 제대로 마쳐서 사회로 귀환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과 제2차로 훈련을 더 받게 될 사람들의 명단을 호명하였다.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대표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사단장이 수여하는 표창장까지 받으면서 삼청교육대를 떠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고 기뻐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훈련소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100여 명 정도는 2차 훈련소로 보내졌다. 순화교육 기간 동안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곳에서 무엇을 잘하고 잘못한다고 성적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또 구타당하기 싫어서 훈련에 임했을 뿐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고, 또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어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연병장에서 별 3개를 단 사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또 한 번 일장 연설을 해댔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았다. 앞으로 다시는 사회의 질서를 거슬리는 범법행위를 하지 말고 건전한 사회인이 되길 바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크신 은혜가 있어서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오늘을 기해서 사회로 환원하게 되었다. 부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근면, 성실한 삶을 살기 바란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 수군하는 술렁임이 있었다. 아니 전두환이라는 괴물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고생을 했는데, 그 놈의 은혜라니 …. 아무리 권력 앞에 모든 것이 충성을 서약하고 무릎을 꿇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마음 속에서는 무언의 분노가 용솟음쳤다.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는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장소에 우리를 던져 놓았다. 구치소에 도착하자 관리들이 뛰어나와 우리들을 환영(?)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계엄령이 발효되고 있는 시기이니 몸조심하고 다시는 잡혀 오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들은 아직 블랙리스트에 이름들이 올라 있으니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어디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주지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일이 아닌가. 무고한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구치소에 보내고 강제로 사회적응훈련이라는 것을 받게 하고서는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이라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고 "나는 어찌 할 수 없었다"라고 변명을 한다니 도대체 말이 된단 말인가.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함께 훈련을 받던 사람들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는 계속 군 부대에 남아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가운데는 군부대를 거쳐 청송보호감호소까지 만 3년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3년 동안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왔을 때 사회는 오히려 이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소위 말하는 사회적응훈련을 다 마쳤으니까 이제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가기 전보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기 힘들게 되었던 것이 었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정과 사업체가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박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곳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사람들은 비록 가정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삼청교육대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청교육대는 애매한 시민들의 권리와 인권을 완전히 묵살하고 권력의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전두환 정권의 상징이었다.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후유증은 내 인생 전체에서 지난 25년을 사로잡고 있었다. 비록 죽거나 불구자가 되어서 나오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지만 그곳에서 나온 후로 세상이 전과 같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과 그저 혼자만 있고 싶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가장 먼저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웃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알아보니 아내는 아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기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지 도망간 여편네를 찾아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그런 아내가 이해되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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