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의 신학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

오 창 록(개신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I. 들어가는 말

구원론적 측면에서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면, 존 오웬(John Owen, 1616-83)을 비롯한 청교들에게로 옮겨가면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란 주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한다.

오웬은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Of Communion with God)」라는 별도의 저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사실 그의 저술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는 자리에서 동 주제는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오웬의 ‘하나님과의 교제의 신학’을 다루되, 특별히 보다 실천적 측면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하는 점, 즉 그 교제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근본적 성격은 ‘봄(beholding)’에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봄의 교제(communion of beholding)’가 핵심적 성격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주제가 차지하는 위치를 간단히 살펴보고, 다음으로 오웬의 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그 교제의 성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II. 청교도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간 간의 교제

위에서 언급했듯 청교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과 더불어 그와의 교제(communion)가 또한 빠트릴 수 없는 논의의 주제가 되어 있다. 원종천 교수는 이 ‘연합’과 ‘교제’라는 두 주제를 놓고 칼빈과 청교도를 비교하는 가운데, 사실상 청교도, 특히 후기 청교도들에게 이르면 이제는 아예 주된 관심이 전자(union)에서 후자(communion)로 옮겨온 느낌이라고 결론짓는다.1)

패커(J. I. Packer)는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수단의 목적이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란 신학과 설교가 언제나 지향해야 하는 목표이며 참된 종교의 진수이다. 그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정의이다.2)

사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창조와 구속이라는 수단의 목적’이 되어 있다는 패커의 이 표현은 매우 강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선 다른 어떤 목적보다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 그를 창조하셨고, 타락 후 이 교제가 불가능해 진 후, 구속의 전 과정은 다시 이를 회복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을 보내사, 이 깨어진 교제의 회복에 가장 큰 장애인 죄를 제거하셨다는 말이 된다.

청교도에게 있어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라는 주제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종교 개혁자들이 중시한 연합(union)의 주제와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경우 union에 집중한 나머지 communion의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거나, 혹은 오웬과 같은 청교도들의 경우 communion에 관심을 갖는 나머지 union을 소홀히 한다는 결론은 성급한 것이다. 칼빈의 시선이 union에 머물러 있음은 사실이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의 개념이 그의 저술 곳곳에 배어 있다.3) 또한 오웬의 신학 안에서 union은 communion 못지않은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communion만을 단독으로 말할 때에도 그 속에는 union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제되어 있다고 해야 옳다.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것처럼 오웬의 communion 속에는 union의 개념이 “포함되어(subsumed)” 있다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communion을 중시하는 청교도들의 신학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5)

III. 오웬의 신학에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

가. '봄'의 교제

오웬에게 있어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함은 실제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쉽게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실천적 성격은 ‘봄을 통한 교제’ 혹은 ‘봄의 교제(communion of beholding)’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웬 자신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따로이 정의내린 문구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래서인지 이 측면은 오웬 연구에 있어서 충분히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같은 성격은 오웬의 저작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다. 오웬이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Of Communion with God)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외에도 그의 여러 저술들에서 그가 동 주제를 언급할 때 '본다’라는 용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그 한 증거이다. 오웬은 ‘behold, see, eye, look' 등 다양한 표현들을 동원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동일하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봄’의 대상

오웬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룰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봄’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영광’이란 무엇인가? 이 영광이란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그 분의 모든 아름다우신 성품과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6)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서 ‘봄’의 대상은 하나님의 영광 자체라기 보다는, 이렇게 영광스럽게 계시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체로서의 한 신자의 교제의 대상 또한 인격(위격)이신 하나님 그 분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덧붙여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다. 오웬이 신자의 교제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제시할 때 그 분을 그리스도 혹은 복음과 분리시키고 있지 않음은 매우 중요한 일면이다.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히 계시되신다. 고린도후서 4:16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취는 것이다.7) 여기서 오웬의 인식론, 즉 신지식(神知識)에 대한 그의 기독론적 접근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그 그리스도는 추상적 그리스도가 아닌 복음 속에 계시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다.8) 오웬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논할 때 끊임없이 구속의 역사(historia salutis)로 돌아가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복음에 계시된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을, 믿음의 내적인 시선으로 주목함으로써 그 분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다. 고린도후서 3:18을 통해 본 ‘봄의 교제’

오웬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논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후서 3:18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기술하고 있는 동 구절은 사실상 오웬의 ‘봄의 교제론’에 있어 핵심 요절이 되어 있다.

오웬은 이 구절을 미래의 부활과 함께 일어날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경험으로 해석한다. 이 구절이 놓인 문맥이 이를 입증한다. 즉 바울은 여기서 현재와 미래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적 상황(아직 수건을 벗지 못한)과 신약적 상황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9) 반면 유사하게 ‘봄’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3:1210)과 같은 구절에서 사도는, 현재적 봄과 미래적 봄을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1)

고린도후서 3:18은, 우리가 수건(veil)을 벗은 얼굴로, 즉 훨씬 더 밝고 선명하게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한다. 오웬에게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과 갖는 교제의 특성이 된다. 여기서 ‘본다’ 함은 막연한 응시가 아닌, 그 대상을 향한 영혼의 내적 주시를 가리키며, 이것이 (그 대상과의) 교제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보는’ 가운데 그 분과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라. 봄의 교제를 통한 성화12)

오웬은 이와 같은 봄의 교제는 신자의 성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한 지속적 주시는 그 대상과의 ‘닮아감’을 산출해 낸다. 위의 고린도후서 3:18에서 ‘주의 영광을 보매 주와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고 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화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형상(image)으로 변화됨(transformed)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웬에 따르면, ‘봄’의 교제는 닮아감의 힘(assimilating power)을 가지고 있다.13)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면, 이 가운데 그 분을 향한 사랑, 찬미, 감사 등 여러 은혜들이 왕성히 작동하게 되고,14) 이는 우리를 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단단히 붙어(cleave) 그 분과 하나가 되게 하며,15) 이런 가운데 그 분을 닮게하는 힘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봄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영혼의 눈을 구원의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만들어내지도, 또한 그분을 닮아감, 곧 성화의 효과를 산출해 낼 수도 없다.16)

2. ‘봄’의 성격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웬이 말하는 바 ‘봄’이라는 것의 성격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오웬이 ‘본다’ 혹은 ‘봄의 교제를 갖는다’고 할 때 그 ‘봄’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행동이다. 둘째, 이 가운데 지성의 역할이 강조된다. 셋째, 그것은 또한 영적인 봄이다.

가. 믿음의 행동

오웬이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 때, 일차적으로 그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봄’ 혹은 ‘믿음으로 묵상(생각)함’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믿음’과 ‘봄’의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오웬은 몇몇 성경 구절들을 가져온다. 성경에서 “우리의 믿음은 종종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표현된다.”17) 이와 관련 그는 광야에서 있었던 모세의 놋뱀 사건을 놓치지 않는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곧 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던 사람들이었다.18) 이 경우 봄은 곧 믿음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은 하나의 믿음의 행동, 곧 “믿음의 봄”인 것이다.19)

‘봄’의 근본적 성격이 ‘믿음’이라면 오웬은 왜 ‘믿는다’ 혹은 ‘믿음으로 묵상한다’고만 하지 않고 굳이 ‘본다’는 표현을 선호하는가? 오웬에게 있어 봄은 곧 믿음의 행동임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봄’은 보다 지속성의 뉘앙스를 띤다. 즉 단회적 믿음의 행동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 믿음 안에서 대상에 눈을 고정시켜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이 ‘봄’인 것이다. 오웬 자신의 표현을 옮겨 보면, “봄은 눈의 고정이다. 믿음은 영혼의 눈이요,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묵상 속에서 믿음을 고정시키는 행위이다.”20)

오웬은 이 ‘봄’을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사건과도 연계시킨다. 제자들이 말했듯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어 예수님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진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은 그 여인 단 한 명뿐이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만짐’을 의미한다. 여인이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여인은 자신의 전 믿음을 발휘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봄’도 믿음의 행동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소극적 믿음이 아니라, 혈루증 여인이 특별한 믿음을 발휘해 예수님의 옷을 붙들었듯이, 그렇게 강하고 지속적인 믿음의 눈으로 대상을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1)

나. 칼빈이 말하는 ‘봄(beholding)’

여기서 잠깐 ‘봄’에 대한 오웬의 이런 개념과 유사한 설명이 칼빈에게서도 발견됨을 관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구절들을 칼빈이 어떻게 주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시편의 두 구절만을 예로 들어보자. 칼빈은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다고 하는 시편 25:1에 대해, 이는 기도 속에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킴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특히 다윗이 ‘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의 전 틀, 즉 마음의 모든 정서(affections)가 하나님께 집중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2)

또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하는 시편 63:2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빈은 이 구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봄(spiritual views of God),” “믿음의 눈을 주님께로 향함,” 혹은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한다. 특히 그는 ‘주를 본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그 봄의 대상에의 집중의 열심 혹은 진정성, 즉 마음의 전 묵상이 이쪽을 향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해하고 있다.23)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칼빈이 이와 관련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간의 연합(union)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연합(union)은 중생시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적 연합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더 단단해지고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경험적 연합을 가리킨다.24) 그리고 칼빈의 경우 이러한 의미에서의 ‘연합(union)’은 사실상 ‘교제(communion)’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오웬이 설명하는 ‘봄의 교제’와 유사한 개념이 칼빈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오웬만큼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거나 강조하고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

다. 지성의 역할

오웬은, 하나님과의 ‘봄의 교제’ 속에서 지적인 기능의 역할을 중시한다.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한다고 할 때, 이는 신비주의적인 의미에서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본다 함이 아니다.25) 이러한 직관적(intuitive) 봄에서는 생각하는 기능으로서의 마음(mind)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되는데, 이는 적어도 이 땅 위에서의 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웬은, 이사야(6장)나 밧모섬에서의 요한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직접적인 봄은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26) 우리의 구조는 이러한 강력한 봄을 견딜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27)

현세의 지상적 봄에서는 지성이 활발한 역할을 하게 되어있다. 앞에서 ‘봄’이란 믿음의 행동으로 제시되었는데, 믿음이란 언제나 지적인 기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막연한 자기 상상이 아닌 말씀 속에 묘사된 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즉 복음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워 알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분을 깊이 묵상(생각)하는 가운데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웬의 다음과 같은 기술은 ‘봄의 교제’에 있어서 지성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작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고 했을 때, 우리는 말하자면 성경 속에 있는 [진리의] 여러 조각들과 단편들을 하나씩 모으고 그것들을 우리 마음(minds) 속에서 비교해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들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현세적 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대상들을 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28)

라. 영적인 봄

오웬이 말하는 ‘봄’이, 지성의 역할이 축소되는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봄은 아님일진대, 그렇다면 이 봄을 간단히 규정지어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표현이 있을까? 아마 ‘영적인 봄(spiritual vision)’이라는 표현이 가장 가까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29)

오웬이 ‘영적인 봄’이라고 했을 때는 먼저 이것이 ‘육적인 봄,’ 즉 신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외적인 눈이 아닌 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 ‘봄’이 순전히 영적인 점을 놓치고서, 이를 겉으로의 외적인 봄으로 대치시켜 버린 문제가 있다고 오웬은 지적한다. 그들은 봄의 주 대상을 십자가 모양 혹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그림들로 제시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영적이 아닌 “육적인 정서(natural affections)”가 고양된 측면이 있다.30)

영적인 봄이 일차적으로 외적인 봄과 대조됨은 사실이지만, 오웬이 이를 가르칠 때 그 속에는 사실 더 깊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영적인 봄이라 함은, 봄의 교제가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3:18에서도 이 점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의 형상으로 변해가되 이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봄’에 있어서 지성의 역할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단지 지적인(intellectual) 봄이 아니다. 성령에 의한 영적인 봄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및 그 분과 관련된 모든 영적 대상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묵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내적 빛 (a glorious internal light)”31)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생생히 볼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여기서 오웬은 강조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이러한 영적 대상들에 관한 “진리나 교리” 뿐만이 아니고, 바로 그 대상들의 “실체(reality)”이다. ‘봄의 교제’ 속에서 바로 이렇게 대상들의 “실체와 능력과 효력”이 우리에게 드러날 때 우리 영혼은 이 대상들에게 끌려 강력히 밀착하게 되고, 이로부터 변화시키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32)

오웬은 영적인 봄의 강도(强度)가 신체적 눈을 통한 봄보다 덜 선명하다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반대이다. 성령을 통한 빛은 언제나 자연적 빛보다 더 밝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이 육체 가운데 계셨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보다 더 밝히 그 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33)

때문에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봄의 교제’의 중요성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이러한 봄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최고의 특권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이요, 또한 가장 중요한 의무를 방기하는 커다란 악(惡)이다.34)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않는 자는 누구나 그를 알지 못하는 자요, 그는 불가피하게 그 분을 멸시하는 자가 된다.35) 그리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배교(apostasy)에 이르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곤 하는 것이다.36)

IV. 맺는 말

이제까지 살펴본 봐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을 지나 청교도에게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란 주제와 더불어 이제는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가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된다. 패커가 지적했듯이,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특히 복음적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창조(creation)와 재창조(re-creation)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목표(goal)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특히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이 무엇인가에 집중하였다. 오웬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 속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일차적으로 이 봄은 믿음의 행동이다. 즉 우리는 믿음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 속에서 영혼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직관적 혹은 신비적 봄과는 달리 이 속에서는 지성이 활발히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지적인 봄 혹은 윤리적 묵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영적인 봄이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 영혼의 내적 눈이 밝아져 봄의 대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실체를 뚜렷이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봄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 작용하게 된다. 그 결과는 닮아감이다. 즉 성경이 가르치듯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화의 효과가 산출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이 ‘봄의 교제’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의무(duty)이다. 이를 소홀히 함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도 없는 악(惡)이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특권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이다.


1) Jonathan Jong-Chun Won, "Communion with Christ: An Exposition and Comparison of the Doctrine of Union and Communion with Christ in Calvin and the English Puritans" (Ph.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89). 특히 p. 352와, 또한 오웬의 경우에 대해서는 p. 290을 보라.

2) J. I. Packer, "The Puritan Idea of Communion with God," in Puritan Papers, eds. D. Martyn Lloyd-Jones and J. I. Packer, vol. 2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1), 104.

3) 예를 들어 아래 pp. 7-8에 소개되어 있는 칼빈의 시편 주석을 보라. 또 우리는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깊은 정서(affection)를 칼빈이 종종 ‘달콤함(sweetness, dulcedo)’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고하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3.2.15; 3.2.23; 3.2.41; 3.20.28.

4) 오웬의 신학 속에서 union과 communion의 관계에 대해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status)을 제공해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신분의 열매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이 둘 모두가 교제(communion)라는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고, 바로 이것이 오웬이 보통 이 표현[communion]을 사용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Sinclair B. Ferguson, John Owen on the Christian Life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7), 75.

5) 참고로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에 대한 칼빈과 오웬의 개념을 조금 더 비교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용어상으로 칼빈의 경우 union과 communion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구분이 되지 않고 있다. 그가 “communion, fellowship, intercourse” 등 교제를 가리키는 듯한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의미상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별반 차이가 없는 용어들이다 (Institutes, 3.2.24; 3.2.25; 4.16.17; Calvin’s Commentaries, 2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56; reprint, Grand Rapids: Baker, 1979], Eph 5:29, 31, 32; 또한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90, 112 참조). 반면 오웬에게 이르면 두 용어는 뚜렷이 구분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가 내린 일종의 communion의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communion은 union에 “기초하고” 있으며 전자는 후자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Johnstone & Hunter, 1850-53;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65-68, 1991], 2:8-9. Goold가 원래 편집한 24권은 Banner of Truth사에서 재판 시 라틴어 부분을 빼고 23권으로 조정 출판되었는데, 이하에서는 이 재판된 23권으로부터 인용하며, 또한 인용 시 간단히 ‘3:122’와 같은 식으로 권수와 페이지 번호만을 표기하기로 한다). 즉 칼빈에게서는 communion은 대부분 union과 동의 혹은 유사적 개념으로 쓰이는 반면, 오웬에게서는 union과 더불어 communion도 그 독자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칼빈의 경우 union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즉 중생시 단번에 사실적으로 이루어진 연합의 측면이 있는 동시에, 또한 계속해서 진행되고 완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연합이란 개념도 함께 있는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를 이루실 그 때까지 점점 더 한 몸이 되어가신다” (Institutes, 3.2.24; 또한 2.15.5; 3.6.5; 3.25.2를 보라). 그렇다면 바로 이 후자, 즉 신자의 일생을 통해 더욱 공고해지고 완성되는 union의 개념 속에는 communion의 개념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union은 일회적인 반면, communion은 지속적 성격을 띤다. 간혹 그가 칼빈처럼 점차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으로서의 union을 논할 경우, 이때는 union을 완성시켜가는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communion이라고 할 수 있다 (Owen, 2:57; 11:337 참조). 이럴 경우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 union은 communion을 통해 실현되고(realized) 경험된다(experienced)’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7:337 참조.

7) 1:222.

8) Ibid., 392, 2:287; 또한 2:290, 303, 309 참조.

9) 고후 3:18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청교도들에게 있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칼빈도 이 구절을 현재적 봄으로 설명하고 있다. Calvin, Commentaries, 2 Cor 3:18.

10)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

11) 1:375; 6:65. 그리고 오웬은 현재의 지상적 봄과 미래의 천상적 봄의 관계,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 상세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Beholding the Glory of God in Christ: Communion with God in the Theology of John Owen (1616-83)" (Ph.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06), 160-75를 참조하라.

12) ‘봄’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이 봄의 교제를 통한 하나님을 닮아감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친밀한 주제였다. 예를 들면 리챠드 십스(Richard Sibbes)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묵상(contemplation) 중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만큼 달콤하고 능력있는 묵상은 없다, . .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봄은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이건 있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묵상이다. 우리는 이 변화가 봄(beholding)에 의해 이루어짐을 안다.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이것은 능력있는 봄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말하기를 ‘우리는 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Works of Richard Sibbes, ed. Alexander B. Grosart [Edinburgh: James Nichol, 1862-64;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3-83], 4:269). 또한 챠르녹(Stephen Charnock)은 봄에 의한 이 변화를 두 종류의 봄에 의해 설명한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는 일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반면 나중에 있을 봄은 영광 안에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The Complete Works of Stephen Charnock [Edinburgh: James Nichol, 1864-66;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5-97], 3:139).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The Works of Thomas Goodwin, ed. John C. Miller (Edinburgh: James Nichol, 1861-67; reprint, Eureka, CA: Tanski Publications, 1996), 5:548; 7:420; The Works of John Howe (London: Religious Tract Society, 1862-63), 1:75-9; 6:78.

13) 3:584-5; 또한 ibid., 511-3도 참조.

14) 1:460-1; 7:341.

15) 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면, 중생시 사실적으로 이루어졌던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러한 봄의 교제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성취되며 발전,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위 p. 3 각주 5 참조.

16) 6:292-3.

17) 9:592. 오웬은 사 45:22, 65:1; 슥 12:10 등을 예로 든다 (9: 592-3).

18) 오웬 자신이 이 점을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과 관련한 신약과 구약의 본문을 대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 주님은 요 3:14-5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민수기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 21:9). 신구약의 이 두 구절에서 현 논의와 관련되는 부분만을 뽑아 대비시켜 보면 이렇다. 즉 신약에서는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데, 구약에서는 ‘쳐다본 자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한 쪽에서는 ‘믿음’으로, 다른 한 쪽에서는 ‘봄’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봄’과 ‘믿음’의 두 주제가 연계되고 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19) 9:592.

20) Ibid., 558.

21) 3:562.

22) Calvin, Commentaries, Ps 25:1.

23) Calvin, Commentaries, Ps 63:2.

24) 이 측면은 위 p. 3 각주 5에서, 칼빈과 오웬에 있어서의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언급하였다.

25) 이러한 점에서 오웬이 말하는 ‘봄’은, 기도 혹은 묵상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와 다르다. 관상 기도에서의 ‘관상(觀想, contemplation)’에 ‘본다’는 개념이 포함되어있음은 사실이지만, 이는 오웬이 말하는 ‘봄’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용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관상’과 관련하여 오웬의 저작을 읽을 때는 용어적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 보자면, 오웬이 ‘contemplation’이란 명사를 사용할 경우 이는 일반적 ‘묵상’의 의미로서 ‘meditation’과 차이가 없으며 그는 이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러나 ‘contemplative’와 같은 형용사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다르다. 특히 오웬이 이 형용사를 ‘prayer(기도)’ 혹은 ‘vision(봄)’ 등의 명사 앞에 붙여 사용할 때, 그는 이를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그 당시 천주교 쪽에서 보다 깊고 발전된 기도의 형태로서 추천되고 있었던 ‘관상 기도 (mental or contemplative prayer)’에 대해 오웬은 대체로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 기도의 긍정적 측면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동 기도가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 그리스도의 중보를 떠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고 즐김을 추구한다는 점(위 p. 4 참조), 그리고 특히 이 기도 속에서는 지성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되는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관상 기도에 대한 오웬의 상세한 견해에 대하여는 그의 전집 4:328-50을 보라.

26) 1:408.

27) Ibid. 그러나 나중 하늘에서의 봄에서는 달라진다. 이 천상적 봄(heavenly vision)은 성격상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것이며 (1:378), 우리의 봄의 기능 혹은 능력은 변화되어 완전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380-2).

28) 1:408.

29) 참고로, 앞서 칼빈도 그의 시편 주해에서 영적인 봄(spiritual views)이란 용어를 사용했음을 기억하라 (위 p. 7).

30) 1:393-4.

31) 오웬이 여기서 말하는 ‘영광스러운 내적 빛’은 퀘이커 교도들이 강조한 소위 ‘내적인 빛 (the inner ligh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오웬 자신이 퀘이커들의 이 주장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 중요 이유는 이들이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소홀히 하고 성령의 내적 빛에 의한 인도하심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오웬은, 말씀 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 양자를 모두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패커가 평가한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예: 대요리문답 4문)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라: John Owen, Biblical Theology: The History of Theology from Adam to Christ, trans. Stephen P. Westcott (Pittsburgh: Soli Deo Gloria, 1994), 772, 839-54; Michael Haykin, "John Owen and the Challenge of the Quakers," in John Owen: The Man and His Theology, ed. Robert W. Olive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2), 141-9; J. I. Packer, "John Owen on Communication from God," in Puritan Papers, eds. D. Martyn Lloyd-Jones and J. I. Packer, vol. 4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1), 136.

32) 7:447.

33) 1:381.

34) 오웬은 심지어 이 교제 자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좀 방법이 서투르고 치우쳤더라도 열심히 추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천주교적인 육적 봄의 추구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비웃으면서 자기들은 그러한 오류에 빠지는 것을 피한다는 핑계 하에 아예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는데, 이는 천주교의 경우보다 더 잘못된 상태라는 것이다. 1:393-4.

35) 2:52.

36) 7:105,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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