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교회 앞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메추라기를 생으로 팔기도 하고 요리해서 술안주로 팔면서 술도 판다고 했다. 교회 앞에 술집이라니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오죽했으면 인구도 적고 그렇다고 관광지도 아닌 시골에 포장마차를 열었을까 싶어 동정의 마음도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마을 뒤 산 아래에서 메추라기 농장을 시작했단다. 메추라기의 알을 내서 팔았는데 곧 퇴기가 와서 굉장히 많은 폐메추라기를 처분을 해야 했다. 숫자가 엄청 많아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어 알 생산량이 떨어지는 순서대로 메추라기를 잡아 생으로 팔기도 하고 포장마차를 열어 잡은 메추라기를 소비시키고자 한다고 했다. 한 마리당 500원씩에 팔았다. 그 얘기를 직장에 가서 했더니 의외로 메추라기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직장 동료들의 심부름으로 생 메추라기를 배달했다.

 

    어느 날 동네 사람으로부터 포장마차 주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포장마차 주인인 남자는 이 동네 사람으로서 어려서 우리 교회에 잘 다녔다고 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갔다. 이런 일 저런 일 안 해본 일 없이 다 했다. 신앙의 열정은 식었을망정 교회도 가끔 나갔다. 그리하여 직분명은 집사였다.

 

  그는 하는 일마다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했다. 그의 삶은 각박했다. 어찌어찌하다가 이혼도 했다. 아이들이 둘 있는데 고등학생들이었다. 아버지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우리 동네에서 모래 채취 사업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래 채취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그마저도 그는 실패하여 부도가 났다. 이어서 메추라기 농장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혼한 후 어떤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메추라기 농장은 그가 운영하고 포장마차는 여자가 운영했다.

 

  포장마차를 몇 번 들른 이후 어느 날에 우리 부부는 남자와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목사님이 그에게 권면했다.

“옛날에 주일학교, 중고등부에 열심히 다녔다던데, 이젠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다음 주일부터 남자는 교회를 나왔다. 마침 메추라기 농장에서 메추라기 잡는 일을 하는 조선족 가족 3명도 교회를 나왔다. 왜 부인은 함께 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남자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녀에게 전도하려고 몇 번 시도했다. 그녀는 전도를 할 때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 여자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동네 사람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때가 왔구나, 했다. 남편이 “병원으로 찾아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합시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파있을 때, 교통사고 등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음이 약해져서 복음을 전하면 마음을 여는 일이 흔히 있다.

 

   어느 날 그녀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우리가 병원에 갔더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다지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고, 어찌 보면 생면부지의 관계인데, 메추라기를 몇 번 팔고 산 것 뿐인데 병문안까지 오다니, 그녀는 처음에 감동을 해서 말문을 열지 못했다.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다. 다 듣고 난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어 말했다.

 

“목사님,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저인데 병문안까지 찾아와 주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주셔서 저로서는 참 고맙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이젠 제가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는 제 몸에 어른을 모시고 산답니다.”

우리 부부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몸속에 모신 어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른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 몸속에는 제 주인인 어른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교회를 나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제 몸속에는 어른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다. 오래 전부터 언니나 친구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자고 권했다. 하도 권해서 어느 날 교회를 나갔다. 처음이라 뒷자리에 앉았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자기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주일에는 좀 더 앞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설교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점점 더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멘, 아멘’하는데 왜 그럴까, 무슨 말을 듣고 저렇게 감동을 하는가, 궁금하기도 해서 자기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었다.

 

 

 

    나중에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자기 귀에는 설교 말씀이 하나도 안 들렸다. 교회를 갔다 오면 반나절은 꿍꿍 앓았다. 온 몸이 몸살이 나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결국 교회를 더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자기 몸속에 어떤 존재가 들어앉아 있었다. 자기는 그분을 어른이라고 부른단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뒷머리가 쭈뼛했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나는 가끔 전도를 하면서 복음을 전해주어도 전혀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가 있고, 이름도 없는 어른을 모신 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편 128편 1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또한 5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했다.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즉 교회를 말한다. 사람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 아멘’ 할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겠는가?

 

   그 후에 그 여자는 전주에 가서 무당집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사와 무당의 동거라니, 그 남자의 멍에가 허망해 보였다. ‘사랑은 나랏님도 못 말린다’는 속담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열왕기상 18장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엘리야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여 말했다.“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글/ 양애옥 사모님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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