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어] 대위의 죽음

666 이야기 2013. 9. 25. 10:46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2 >  
글쓴이 : 관리자    

『마이어』대위의 죽음      
프랑스 혁명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법적 제재가 제거되자 프랑스는 유대인들이 거주하기에는 가장 안전한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향하에 있는 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에서 독일인에게 패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1880년대에는 상황이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언론인으로서는 『예수회』(Jesuit)회원인 『드루몽』(Edouard Drumont)은 『프랑스 유대인들』(La France Juive)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전가하기 시작한 그의 책이 호응을 얻어 몇 년 사이에 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자 그는 신문(La Livre Parole)까지 창간, 프랑스 군부 내의 유대계 장교들의 진출을 시기한 군수뇌부 내의 반(反)유대 카톨릭 세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를 항의한 젊고 유능한 유대계 장교 『마이어』(Armand Mayer)대위가 죽임당한다. 그의 장례식과 행렬에는 5만여명이 군중이 운집하였고 『헝가리』계 유대인 법률가로서 프랑스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언론인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도 그 행렬에 있었다.

0057. 『드레퓌스』사건 (L’Affaire Dreyfus, 1894-1906)
1894년 가을, 프랑스 군부 내의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대위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형을 언도받고 무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지휘관을 상징하는 그의 칼은 부러지고 계급장, 모든 장식과 단추까지 제거당한 후 더 이상 군복이 아닌 군복 차림으로 거대한 군연병장에 운집한 인파 앞을 돌게 하였다. “매국노!”, “유대인들을 죽여라!” 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드레퓌스는 “나는 무죄하다!”라고 맞섰고, 신문기자단석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는 무죄하다는 사실을 온 프랑스에 고하라!”라고 절규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아프리카의 프랑스령(領)인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보는 프랑스 지성들의 시각은 달랐다.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글을 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양심의 포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여론은 양분되기 시작하였으며, 군재판부가 『졸라』구속령까지 내리자 그는 영국으로 피신하였고, 군수뇌부 내의 음모자의 자결 등으로 드레퓌스는 유배 5년만에 『악마의 섬』에서 다시 『빠리』로 송치되어 재판은 재심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사면된 후 『드레퓌스』대위는 다시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무려 12년 동안 프랑스의 이성(理性)을 쪼개어 놓았으며, 온 유럽의 양심을 저울질하신 사건이었다.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한다. 오늘 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세례, “『그리스도』를 영접”, 은사경험, 『케리그마』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는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된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은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의 표현 - “과거 카톨릭과 현대의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바티칸』공회의 교황『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과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뭐가 바뀌었던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 성자, 전통숭배가 해제되었단 말인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치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단의 세력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4-28)고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로마카톨릭교의 기원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의 씨가 『로마』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이름은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 『네로』의 사자굴에 던져져도 더욱 뻗어져 갔다. 그러한 박해 중에서도 교회지도자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교권암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로마』는 첫 교회지도자 『리누스』(Linus, A.D. 67-76)로부터 『실베스터』(A.D. 314-335)에 이르는 동안 31명의 지도자를 가졌었는데, 그 중 첫 18명은 아무도 침대에서 죽은 자가 없었으며 모두가 암살, 독살, 길에서 자객에 의해 쓰러졌다. 사단은 세상명예, 탐욕에 찬 이러한 교권지도자들을 다루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콘스탄틴』대제는 종교통합을 추구해왔고, 이때의 교회감독 『실베스터』는 ‘로마의 대로(大路)’, ‘로마의 군력’, ‘로마법(法)’, ‘로마의 권력을 이용’, ‘로마의 평화’(Pax Romana, 무력하의 평화)를 꿈꾸며 기독교 포교를 계획하였다: “로마와 손을 잡고 세력을 펼치리라. 로마의 지배를 따라 뻗어나가면 ‘예수의 세례’는 저절로 ‘로마의 길’을 타고 온 땅의 동서남북 끝에까지 흘러갈 것이며, 로마의 감독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로서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냐? 가이사냐?”  
인간은 명예심과 탐욕심이 많은 동물이며,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는 더욱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단은 전략전술을 바꾸어 『로마』황제 『콘스탄틴』을 자신의 수(首)제자로 택하고, 박해 대신 포용정책을 가지고 『로마』교회지도자 『실베스터』와 만나 협상하게 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권력과 교권의 두 지도자는 흥정에 들어갔다. 거룩한(?) 허영심에 불탄 『실베스터』는 “그리스도냐? 가이사냐?”의 갈림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땅의 군주의 권력을 택하였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유대』인들이 소리지르던 길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대로 처음부터 거짓에 속한 무리였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19-21).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바벨론』종교는 『로마』의 천하통일과 더불어 쉽게 고대 『로마』전역으로 퍼져갔고, 순교와 박해속에서 강해지고 부유해진 『로마』교회는, 당시 『로마』의 정치수반이요 『바벨론』종교의 대 제사장(최고승원장)의 직책을 겸하여 가졌던 『콘스탄틴』대제와 결합함으로써, 사단이 예수를 유혹할 때 던졌던 약속 -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 을 사단으로부터 받고 천하영광을 꿈꾸는 기독교 모조품 종교가 태어난다. 종교통합을 통해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치하려고 시도해온 『콘스탄틴』대제가 받아들인 기독교라는 것은 『시몬』화(化)된 기독교였으며(행8:20), 이 배도의 신앙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온 『유럽』을 넘어다 보기 시작하였다.

사단은 기독교의 모조품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정치권력과 종교와의 결합’은 그날 이후로 로마카톨릭교회를 특정지어 온 단어이다. 사단과의 영적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이 결정의 순간을, ‘회칠당한’기독교회사는‘기독교의 승리’라고 기록해왔다. 복음의 진수를 알지도 못했던 『단테』조차도 그의 『신곡』(神曲)에서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너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악(惡)이 세상에 들어왔던고!”라고 썼다.

A.D. 313년, 『밀라노』칙령이 공고된 후, 『바벨론』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로마』의 이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이교화 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을 때 『로마』 종교는 ‘바벨론의 비밀’의 알을 품기 시작하였다(계17:5).

가이사와 그리스도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改宗)에 대하여는 사가(史家)들 간에도 이견이 있어왔다. 스위스의 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는 그의 유명한 저서 ‘콘스탄틴의 생애’(Leben Konstantins)에서 콘스탄틴의 거짓된 개종에 대하여 엄격히 다루었으며, 이 책은 120여년 동안이나 계속 출판되었다. 그는 과장된 유세비우스(Eusebius, c.260-c.340)의 ‘콘스탄틴의 생애’(Vita Constantini)를 반박하였다. 콘스탄틴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아첨은 지나쳐 ‘신(神)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부르크하르트는 유세비우스를 두고 ‘황제찬미가 중에 가장 역겨운 자, 철저하게 불성실한 최초의 고대사가(古代史家)’로 언급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특히 장래의 황제들을 위한 이상적인 군주의 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리겐을 따랐던 유세비우스는 시편, 이사야(시72:7-8, 사2:4)등에 기록된 메시야에 적용된 구절을 대담하게 콘스탄틴에게 적용시켰다. 심지어 콘스탄틴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였다. 콘스탄틴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대변자’(Holy Speaker of God’s Word)였다. 시편 96:12을 인용, ‘새 노래로...’ 콘스탄틴을 찬양하였다. 아구스도의 평화의 때에 그리스도가 탄생(눅2:1), 구약선지자의 예언성취는 콘스탄틴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한 통치자, 한 제국, 한 하나님’(One Ruler, One Empire, One God)의 선전표어를 등장시켰다.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선택된 제국, 그리스도는 로마시민으로 이 세상에 임하셨다고 믿었다.

0063. 2045년: 인간불멸의 해?  
2045년이 되면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시사주간지 타임(Time, Feb. 21, 2011)의 기사. 영국, 미국, 불어권 시사주간지들이 다투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신의 존재?’, ‘죽음 후의 천국’, ‘인간은 정녕 어디서 왔는가?’등의 기사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정치, 경제 등의 ‘시사성’기사들을 제쳐놓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무엇이 가장 ‘시사성’이 있는 기사인가를 다시 생각케 하신다(“아버지, 그렇군요!”).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이 매일매일 죽음을 지나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사실보다 더 시사성이 강한 사건이 없다고 하신다.

USA 아멘넷 게시판/진설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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