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8 >  
글쓴이 : 관리자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37.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요한계시록 18:4 ‘거기서’가 아님)  

전대미문의 로마의 잔인성으로 인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를 로마로 부르지 못하고 ‘바벨론’으로 불렀다. 요한계시록 14~18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이 바벨론의 비밀에 대한 무지가 실은 엄청난 위력의 재앙을 교회와 국가로 불러들이고 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 경제 세력 확장을 꾸준히 이루어온, 인류역사상 가장 스캔들 거리인 이 조직체에 대한 어두움이 온 세상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독일의 튀빙겐대학의 로마카톨릭 신학부의 실천신학 교수 글라이나헤르(Gleinacher)가 마가복음 10:24~44을 인용,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1991, #50)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우리의 인간사회에 남아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배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초대교부들의 신약의 바벨론을 로마로 보았고 2)개혁자들이 또한 그러하였고 3)성경사전들이 그렇게 단정하고 있으며 4)로마교황이 공인한 천주교의 공인 성경으로서 현재 시중에서 구입이 가능한 The Official Catholic Bible (ISBN 0-529-06811-7)이나, Catholic Study Bible (Oxford Univ. Press)의 계시록 14~18장에 언급된 바벨론에 대한 각주해석이 모두 『로마』임을 저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1986년 로마교황청은 성『프란시스』의 고향 이태리의 아씨씨에서 12개 종교의 대표들을 초청 ‘평화의 이름안에서’(단 8:25 참조) 첫 모임을, 1992년에 두 번째, 2002년 1월에 세 번째로 모였다(New York Times, Jan. 25, 2002). 살후 2장에 언급된 배도의 주역 저 “죄의 사람”(살후 2:3 kjv)은 뉴에이지 운동을 주도, 종교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UR)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UN 산하의 종교통합 기구인 우르(UR-United Religions)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시며, 이 적그리스도의 체제는 ‘새 세계’질서(NWO)아래, 즉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로 세상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짐승 위에 탄 여자』- 로마카톨릭교회와 종말 -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타난 이 여인은 도데체 누구인가? / Dave Hunt 저 정태윤 역 420pp / $40 / 품절된 책이나 역자에게 조금 남아있어 새생명말씀사 604-936-0691나 아래 빅토리아 주소에서 9월말까지 1차 주문 접수 중, 책은 미국에서 직송예정)

0038. 그리스도냐? 벨리알이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사람들이나 무슨 ‘4인방’인가 하는 사람들이 실은 ‘신복음주의자’들이다. 배도의 지름길에 들어서서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지도 못하고 온갖 조무래기 이단들을 다 나열하면서도 ‘가장 거대한 이단’ 천주교는 늘 이단 목록에서 빼 놓음으로써 양(羊)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정통으로 보게끔 오도하는 이적(利敵, ‘적을 이롭게 하는’)행위를 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 39개 종교강령에 1년에 네 차례 로마교황의 수장권(Supremacy)을 논박하는 설교를 하도록 규정한 교회법 제1조를 목회자들이 스스로 어김으로써 직무유기죄를 짓고 있으며, 향(向)로마 지도자들인 John Stott / J. I. Packer 같은 지도자들 아래서 1200여명의 성공회 사제들이 집단으로 천주교로 넘어가는 배도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에큐메니즘』이란 깃발 아래 로마카톨릭교회라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가이사의 정치세력을 구축해온 두 얼굴의 집단, ‘로마 교황청’이란 ‘초대형 이단’ 집단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객관적으로 인정된’ 유명한(?) 소경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좁은 길, 고난의 길을 멸시하며, 낮아진 소수의 무리와 고독한 길을 비웃으면서, 넓은 길, ‘부흥이란 이름의 배도’의 가도를 달린다. 이‘가련한 잡종’같은‘나이브’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5번이나 “어찌?”(고후6.14-16)로 경고하고 두 번이나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장).

0039.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고후 5:15)

시사주간지 타임이 이 세대를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저주받은 세대’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는 항상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기를 섬기며 자기를 위해 살기 위해 자가발전에 동력원이 되는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맘몬(돈)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게 된다. 누가15:11~32의 ‘두 탕자’처럼 자기애(自己愛)와 자기의(自己義)로 가득한 의지는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추구하는데 목숨을 건다. 이 얼마나 서글프고 역겨운 현실인가. ‘너는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고 주님 물으신다. 스펄젼 목사님이 “영국국교회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로 평한 라일(J.C. Ryle, 1816~1900)주교의 권고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신앙에서 열심이란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려는 불타는 열망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자연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신자들이 회심할 때 각 신자들의 마음에 불어넣으시는 열망이다. ……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보며, 한 가지 일만 신경쓰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살고, 한 가지 일만 받아들인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든지 화나게 하든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든지 어리석다고 생각되든지,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영광을 얻든지 수치를 당하든지, 이 열심 있는 사람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일만을 위해 열심을 내는데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열심으로 인해 소진되어 버린다 할지라도 그는 괘념치 않고 만족한다. 그는 등잔과도 같이 자신이 타 버리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다 소진된다 해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일을 수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신앙의 ’열심’이다”

못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찬송가147/주 달려 죽은 십자가③)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진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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