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려내어야 한다면

대장쟁이

[에스라 10:1-3]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 일행은 겨우 1,700명 남짓 되는 숫자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1차 귀환 때의 약 5만명에 비하여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들이 운반해 온 금, 은 기명, 하나님의 전에 드릴 금은보화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스룹바벨 때에 비하여 가치로 따져 6~7 배나, 많았습니다. 따라서 수개월이 걸리는 노정에서 그들이 가진 금은보화를 노리는 도적과 대적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능히 그들을 지켜주실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의 손을 두고 사왕에게 그러한 요청을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겸비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노중에서 도적들과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토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금은보화를 하나님의 전 제사장들에게 인계하고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난 다음 심각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유대 땅의 이방족속의 풍습을 따르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가 저녁제사 드릴 때가 되어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고 기도하며, 또 엎드려 울며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무리가 이 모습을 보고 함께 통곡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놓고 단순히 에스라와 백성들이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했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것은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따르고 혼합하여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통째로 혼합되었습니다. 이방여인과 혼합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패는 하나님의 버리심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되면 아무 방법이 없고 더 이상 긍휼도 자비도 소망도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스가냐가 일어나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오히려’라는 번역이 좀 이상합니다. ‘오히려’가 아니라 ‘아직’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에게 살아날 길이 남아있다. 그것은 지금이라도 이방여인 아내와 소생을 다 내보내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는 것이다.” 살아날 방법은 전체가 썩기 전에 부패부위를 과감히 도려내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것처럼, 범죄한 한쪽 눈과 한쪽 발을 뽑고 찍어버리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의 단절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몇 달 동안 조사를 하고 112명에 달하는 이방여인과 혼인한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모든 이방여인들과 그 소생을 내보내는 결단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에스라서에 기록된 이방여인들을 쫓아내는 기사는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이요 무책임한 가족방기행위입니다. 특히 여성권익운동가들이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서운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만으로 확고한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와 엎드려 울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해도 그 믿음이 혼합되고 부패하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혹 우리에게는 과감히 도려내어야 할 죄악과 혼합과 타협의 부패부위는 없을까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에게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려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미혹과 혼합과 타협과 불순종이 소용돌이치는 어둡고 악한 세대입니다. 부패하면 안 됩니다! 부패하면 죽음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도려내어야 할 것은 도려내어야 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