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없더라도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예언하는 은사로 비밀과 지식을 아는 능력도 있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능력의 비밀과, 지식과 믿음의 존재 가치의 무의미함을 가리킨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그 당시처럼 구제의 제물로 자기 몸을 불살라 우상에게 내 줄지라도
이제 자기의 의로, 또는 정의의 동기로 든 이념이든 자기 생명을 내 줄지라도
'charity'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희생은 아무 유익이 없다.
그래서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6]
거룩은 히브리어의 ‘분리’를 뜻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분리를
뜻하였지만 예수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여
죄로 인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분리’를 허무시고 중보자가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켰고
성령님은 이 거룩을 증거하시고 거룩으로 우리를 인도 하신다.
그래서 이제 거룩이란, 예수님의 사랑(charity)으로 죄에서 분리된 새로운 피조물로,
이제 성도로 불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을 우리는 ‘복음’ 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 졌기에 하나님의 ‘의’ 라
하고 이 의를 ‘공의의 하나님(righteousness of God)’라 한다.
로마서를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로마서 1:17 절]
하나님의 뜻하시는 봐,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가 공의이기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은,
기록된 성경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온전한 믿음은,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 임하도록,
빛으로 오신 분을 본받아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인도 하는 빛으로,
세상의 정신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되어 세상문화를 정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인데,
썩은 소금이 되어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차이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는 이미 자체 정화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리 저리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방향을 잃고 난파된 이유는
복음의 참된 가치관,
삶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상투 적으로, 쉽게, 말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목사의 사당(祠堂)화가 되어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평신도’로 신분을 분리하는 교회는, 그런 교회는
이미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지, 성도라는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성도라는 생명의 존재가치는 교회 유지의 조직이고
재원의 충당 조직일 뿐이다.
보라, 예수님 이전의 성전, 이후 교회의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해 지면
헐리어 사라졌지 이제 까지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지 보라.
이제 화려한 건물로 이 모양 저 모양의 하늘을 찌르는 교회의 건물은
현대판 바벨탑이다.

(온갖 교회부흥을 위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순종’ 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순종으로 시작하였든, 처음부터 오류의 프로그램이었든
어찌되었든, 프로그램이 변질되어 교회의 목사를 위한 순종으로 변절됨을 보면서
통탄해 오다, 한 친구로부터 어느 목사의 자랑을 듣고 그 분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 분의 개혁적인 교육에 대하여 듣고, 그분을 알기 전 한국의 다른 모임에서 일찍
'제자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라 그 같은 훈련을 존중했기에, 목사님의 주장된 프로그램
‘제자 훈련’ 의 소식을 듣고 카세트 테임을 구입하여 설교를 들으며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겼지만 제자훈련이 변절되어 감을,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카세트 테임 구입도 끊었고 그 후 기억에서 멀어 후, 후임 목사와 의  분란소식과
이제는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교회의 건축을 한다 는 소식에 일말의 안타까움 마저 버렸다.)

바벨(Balbel)은 히브리어의 ‘혼란’을 의미하나 ‘꼭대기(top)’이나 ‘우두머리’ 라는 뜻으로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께 대적한 반역의 대명사 이다.
이제 건물의 꼭대기에서 우두머리의 상징으로 화려한 가운을 걸친
현대판 바리새인이여.
예수님, 사도들, 그 누군가 종교의식으로 왕같이 제사장같이 화려한 가운을 걸쳤는가,
그것도 세상적인 재판관과 박사의 표시로.
개혁을 주장하면서 가톨릭 신부의 로만 칼라를 화장한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바울도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탄식했고
바리새인와 헤롯당들도 예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 이다  마가복음 12:14]
한국교회의 ‘혼란’이 어디서 왔는가?
예수님은 왜 성전의 꼭대기에서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바벨탑을 지은 인간을 언어로 분리시켜 혼란케 하셨는가?
오늘날도 여전하고, 여전히
높아지려고 건물을 높이고 존재를 가치를 높이려고 신분의 분리를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여,
낮고 낮아져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했다면
낮아진 만큼 성도가 서로 교통했을 것이고
낮아진 만큼 교회와 교회가 교통했을 텐데...
성도라는 아름다운 명칭도 겹다 못해 불의의 삯을 탐하고, 스스로 소명 받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되어 성도 앞에 성경의 잘못된 해석으로 올무를 놓고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자신의 욕심을 일삼는 음행의 발람의 길로 간 사람도 있고,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여
망령되고 헛된 말로 믿음이 파선되어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들의 말이
악성 종기처럼 퍼져 나감은 [디모데후서 2:14-17]
오늘날도 여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분별력이 파탄 나서 열심은 있으나 유익이 없고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지라도 그리스도의 도(道)를 빙자한, 사유(私有)한
그리스도의 도(道) 아무 상관없는 자신의 도(道)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벨리알의 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갈라디아서를 루터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 말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charity’ 로 사는 삶,
그런 삶인가...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도 들 수 없고,
그렇지 못한 생활이 한스럽고 고통스러워, 그 사랑이 내 마음의 중심을 흔들고
요동(搖動)하여 가슴에 박혔고 또 박히고...
그 사랑을 어찌 말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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