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교회 사모님이 남편 때문에 아주 힘들다며 내게 카톡을 보내왔다.

하나님과 목회 일에 열심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목회에 뒷전이면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로서는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갈까.

하루 이틀 혼자 기도하며 그 외로움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간혹 성도가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줄 알고 말할 때면 사모님은 속으로 반박하며 비판적인

생각이 왜 아니 들까. 나도 공감이 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로 인해 사모님의

본인 신앙이 맥이 빠지고 남편을 원망하다 하나님까지 원망할 수 있음이다.

사탄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여 부부사이를 갈라놓는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딤전 5:5).

 

  과부가 꼭 육의 남편을 여읜 사람만 일컬을까? 난 위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영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그가 영적으로는 과부라고 생각한다. 불신자 배우자와

같이 사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생활을 한다하지만 육신에 속하여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부부라면 영적인 과부가 아닐까.

 

  과부는 외로움을 승화시켜야 산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해야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통하지 않는 배우자를 향해 자꾸

비판하고, 싸우다 보면 과부마저 쓰러진다. 우울감이 든다. 외로운 과부가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고 그분과 친밀히 지내며 육의 배우자를 살릴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의 생애 전부를 보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한꺼번에 보신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적이다. 어떤 이는 과거만 본다.

만날 과거의 흠을 잡고 늘어진다. 과거에 묶여서 그가 현재 잘한다 해도 신뢰하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나마 과거와 현재를 보는 사람은 그보다는 낫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만 판단하여 자꾸 참견하고 안심을 하지 못한다. 평강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부르심을 받고 눈에 비늘이 덮여있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안수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만

알았다.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엄청 박해한 사실을 주님께 고했다. 마치 주님이

사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정보를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울이 바울 되는 미래를 아시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9:15-16).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만 들춰내어 그를 몹쓸 사람처럼 인식했지만 예수님은

사울을 바울로 보셨다. 주님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할 그릇이라고

보셨다. 나도 남편을 사울로만 보고 주님께 많이 고자질을 했다. 개척초기였는데

한번은 주님이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은 내게 로마서 14장을 보라 하셨다.

첫 구절부터 찔렸는데 결정적으로 내 심장을 강타한 구절이 나왔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14:4).

 

  에고,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 남의 하인을 계속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건만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었다. 그가 서있건 넘어지건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방관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돕는 배필이니 그를 위해 기도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역시 개척교회였을 때 남편이 새벽기도 후에 긴 잠을 자는 모습이 아주 싫었다.

오전에 서재를 지키며 자기계발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비판이 일었다. 하루는 나도 남편 옆에 누워 잠시 눈을 부쳤는데

비몽사몽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나의 영으로부터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얼마나 슬펐던지 나는 환상 속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통곡했다. 남편이 너무나

불쌍했다. 남편이 입은 하얀 내의에 두 개의 작은 얼룩이 보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얼룩을 지우며 울었다. 얼룩은 지워졌다. 곧이어 나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슬픔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현실에서는 남편에게

전혀 슬퍼하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영의 눈을 열어 그의 상처와

아픔을 보게 하심은 내가 그의 흠을 찾아 비판하는 자가 아니라 그의 허물을

지워주는 자로 있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 뒤로도 남편을 자주 비판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눈이 필요하다. 단지 그의 과거와 현재만 보고 불안해하며

내가 나서서 바로 잡으려고 애쓰다 지쳐 넘어지는 게 아니라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미래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될 것을 바라볼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참 과부의 삶을 살아야한다. 진정한 남편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행하심을 믿고 긍휼히 여기며 인내해야 한다.

이 믿음이 있어야 오늘도 남편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식농사  (0) 2016.09.26
좋은 친구가 되려면  (0) 2016.09.12
사랑할 줄 몰라서  (0) 2016.08.17
내게 날개가 있다면...  (3) 2016.08.09
사람팔자 시간 문제라고?  (0) 2016.08.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