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IWPG 대표와 미소… ‘반기문 신천지 영상’ 논란


입력 :  2016-12-29 08:29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집단인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관련 단체의 홍보 영상에 등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유튜브 캡처
 논란이 된 영상은 지난 10일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IWPG(세계여성평화그룹) 홍보 영상이다. IWPG는 신천지 관련 단체로 알려져 있다. 6분 11초짜리 영상에서 반기문 총장은 2분 9초쯤 김남희 IWPG 대표와 함께 서서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홍보 영상에는 ‘IWPG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전쟁 종식과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됐다’면서 ‘UN과 IWPG가 평화의 손을 잡았다. IWPG 김남희 대표가 UN본부 초청으로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고 돼있다.

 인터넷에서는 이 영상이 퍼지자 ‘반기문 신천지’를 연관지어 비판하는 글이 쇄도했다.

국민일보DB
 

하지만 홍보 영상에는 반기문 총장 외에도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다수 등장해 반기문 총장이 신천지와 밀접한 관계라는 점을 증명한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국민일보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38~40)


며칠 전 한양대 전철역에서 한 사람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직거래를 하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대라서 생각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성경이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것과 오히려 과학이 성경을 입증해 주는 내용들이 가득하다는 말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이전에 들은 과학복음 내용도 생각나서 나사 미 항공우주국의 과학자들 중에 대부분이 크리스천이며 연구프로젝트에 돌입하기 전에 자신들의 무능함과 한계를 인정하며 창조주께서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연구한다는 내용도 이야기하며 이것저것 성경이 무척 과학적인 책이라는 걸 입증할만한 몇가지 사례들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과학적이라는 증거도 있으나 비과학적인 증거도 많다면서 반론을 펼치려 했습니다.


전도 눈치백단이라 더이상의 이야기전개는 끊없는 평행선을 그릴 것을 감지하고 변론을 멈추고 마음 속 깊이 감추어둔 '히든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카드였습니다.


성경이 과학적이고 명백한 진리라는 증거들을 아무리 많이 사례를 들어 얘기해줘도... 결국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구미에 당기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인지라 더 이상의 변론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카드를 꺼내들며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초월하는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만약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한번 조사해 보세요. 모든 사람은 죽음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천하를 호령한 알렉산더 대왕도... 아이폰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티브잡스도... 나폴레옹,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도... 죽음앞에 다 굴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입증하셨습니다.


제가 전혀 처음 만난 당신에게 이 예수님을 전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초월할 수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앞에 서게 됩니다. 그 두려운 순간에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죽음을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신 부활의 주 예수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부활카드를 내밀어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더니 그 학생이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온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수긍하며 복음을 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며,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수많은 기적들을 베푸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천명을 그 자리에서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습니다.


이 정도면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만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그렇게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3년동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조차도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동안의 모든 의혹을 한순간에 싹 정리하시고 명백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였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하나님의 승부수인 부활의 히든카드 하나만 있으면 전도할 때 확신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충분합니다. 모든 높아진 생각과 가치관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부활.. 오늘도 이 부활의 카드를 손에 쥐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카드는 '그리스도로 사는 카드'입니다. 이 카드를 마음껏 긁으며 결제할 수 있도록 해주신 만능카드입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지 이 카드 하나면 다 해결됩니다.


크고 작은 모든 상황들 속에서 무한반복 이 카드를 긁어대며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 내 삶 속에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도록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오늘도 시작합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알아볼 수 있도록 부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왠만해선 잘 안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이토록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주셨나이다. 그리고 더 확실히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중으로 인을 치셨나이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나 여기있다. 니 맘 속에 있는 거 알지?"하시면서 확인시켜 주시는 부활의 주님! 자꾸 들려주시옵소서.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제 안에 내주하심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그렇게 친밀히 주와 함께 손잡고 걸어가다보면 그 마지막은 영생이요 천국임을 믿습니다.


이 단순하고 확실한 복음을 붙잡고 만땅으로 누리고 원없이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 안에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 곰팅이

 

 

왕의 재림!

- 마이클 블락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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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장) 관원장들의 꿈, 바로의 꿈

  여러 해 전 작고한 대통령께서 그런 말을 했다 하여 말이 많았지만 사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대부분 한창 젊은 나이에 군대에 가서 3년 동안(지금은 단축되었지만) 시쳇말로 ‘썩다가’ 옵니다. 저도 3년 썩고 왔습니다. 한창나이에 3년 군대생활이 얼마나 큰 희생과 손실을 요구하는지요. 그 3년 군생활이 인생을 뒤집어놓고 바꾸어 버립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다가 감옥에 갇혀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무려 13년 오랜 세월을 “푹 썩은” 것입니다. 젊은 피가 끓는 한창나이를 몽땅 그렇게 보내었으니 얼마나 분하고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절대로 좋게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이끄셨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모든 살림과 재정을 맡았고 감옥에서도 전의가 감옥의 모든 잡다한 업무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셉을 종살이로, 감옥살이로 연단하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애굽총리가 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알게 하심을 따라 해몽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꿈 해석을 한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여 바로에게 잔을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머리가 잘리고 나무에 매달려 새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이 석방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탁을 넣었습니다. 요셉이 아직도 사람을 의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만일 요셉의 부탁을 받은 술관원장이 힘을 써서 요셉을 그 감옥에서 꺼내 주었더라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방인과 불신자에게도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답은 ‘하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강퍅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고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풀을 먹게 하셨고, 고레스를 들어 나라들을 굴복케 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자카리아스라는 분은 힌두교인이었지만 기이한 환상 가운데서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교인들이 꿈이나 환상 가운데, 혹은 이상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역사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꿈은 일곱 살찐 소와 일곱 흉악한 소, 일곱 충실한 이삭과 일곱 마른 이삭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다가올 일곱 해의 풍년과 일곱 해의 흉년의 예고였습니다. 또 그것은 심판의 날, 환난의 날, 7년 환난을 예표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예고는,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난을 피할 수 있는 길, 면할 수 있는 길을 또한 예비하고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애굽과 온 천지에 내리실 일곱 해 풍년과 일곱 해 흉년, 그 재앙으로부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꾼 꿈을 듣고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해내었습니다. 관원장의 말을 듣고 바로는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옥에서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요셉으로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 요셉을 총리로 세워 7년 흉년을 대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온갖 고난을 받고 지하의 감옥에까지 내려갔다가 애굽에서 가장 높은 총리의 자리에 올라 만인을 구하는 요셉의 이야기는 이 땅에 오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관원장들에게와 바로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것이 그들을 살게 하려 하심이듯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하신 것은 모든 죄인들을 살리려 하심입니다. 만일 살리려 하지 않으셨다면 꿈으로 미리 알리시거나 계시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그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옥으로부터 이끌어 내십시오. 그를 높이 세우십시오. 그에게서 들으시고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 발 아래 엎드리십시오.

성도들이 죄를 회개한다 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고자 나름 죄를 끊기 위해 노력한다 하면서도 죄를 끊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거나 혹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완전히 끊고 죄를 안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단정지어버리고서 말로만 회개한다 하고 또 돌아서서 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아래의 성경구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살전 5:22-23)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새번역]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새번역]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죄를 아무리 지어도 대충 회개만 하면 무조건 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 10:26-27)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도 짐짓 죄를 짓는다면 다시는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없고 다만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죄를 회개한다 하면서도 죄를 끊는 것을 어려워하고 죄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증거 한 내용을 올려보고자 하니 이 글을 꼭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이라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어둠의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로는 아담과 함께 만물이 저주를 받았지요. 이후로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합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도 보면 사단이 예수님께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지요. 누군가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범죄 하면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에 속한 죄의 종이요 원수 마귀 사단에게 매인 것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주인은 종에게 “동쪽으로 가라” 하고 다른 주인은 종에게 “서쪽으로 가라” 하면 종이 어떻게 두 주인에게 다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의의 종이 되거나, 세상을 사랑하여 죄의 종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마음에 소중히 간직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립니다. 그러지 않고 세상을 계속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과는 멀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육은 육을 끌어당기는 속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을 취하기 시작하면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취하기를 원하지요. ‘이 정도면 세상 것은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는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자’ 이렇게 금방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쉽게 단순한 비유를 하나 들어 보지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도회 시간 전에 저녁 내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기도하러 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지만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고 있지요. 지금까지 여러 시간 보았으니 ‘이제 족하다’ 하고 마음을 정리하여 쉽게 집을 나설 수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보던 내용이 아직 안 끝났으니 미련이 남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철야 시간에 지각하기 십상입니다. 다 끝나고 늦게나마 기도하러 왔다 해도, 기도 중에 계속 드라마 내용이 떠오르지요. 다음 스토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까 본 내용이 연상되기도 하여 중심으로 기도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다음 날도 이어지는 내용을 보기 위해 어찌하든 시간 맞춰서 텔레비전 앞에 앉지요. 이렇게 하다 보면 기도 시간에도 자꾸 지각하고 기도만 아니라 예배 시간까지 방해를 받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점점 충만함이 사라지고 은혜가 식어집니다. 기도나 예배에 대한 사모함도 없어지고 미지근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 해도 세상을 멀리 하지 않고 계속 취해나가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오지를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지혜와 목숨을 다해 ‘어찌하면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어찌하면 더 성화되고 충성할까?’ 이런 것에 생활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쉬운 비유로 드라마를 들어 설명했지만 결국 세상에 속한 것은 다 마찬가지이지요. ‘세상’은 이성이든, 돈이든, 명예나 권세든,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해당됩니다. 혹시 자신의 마음에 은혜가 전보다 덜하고 성령 충만함이 식어버렸다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집중하고 있는가?’ 또 ‘죄를 버리고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매일매일 온 힘을 다하고 있는가?’ 자신을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 무엇이 내 생활 속에 틈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 갔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여기서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상이라 했지요. 이런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의 사람들도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해서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다 벗어 버린 것은 아니지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다시 말해 육을 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벗어 버리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집니다.

 

반면에, 육을 버리고자 노력하지 않고 세상을 계속 취해 나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식어지지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빠져나가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이 소멸되고 구원과도 멀어지는 무서운 결과를 낳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속히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기 전에 자기 안에 채워진 육의 내용물을 부지런히 뽑아 버려야 하지요. 벗어 버려야 할 육의 내용물들을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했지요. 지금부터 이 세 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은, 육신을 좇아 범죄 하려고 하는 속성입니다. ‘육신’은 사람의 몸과 죄 성이 결합된 것입니다. 여기서 ‘몸’이란 아담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영의 지식이 빠져나간 뒤에 남겨진 사람의 몸을 의미하지요. 사람에게 있는 죄 성이 겉으로 표출되려고 하는 욕구, 곧 범죄하고 싶은 욕구가 ‘육신의 정욕’입니다. 간음하고 싶고, 혈기 내고 싶고, 도적질하고 싶은 욕구, 미워하고 싶은 욕구 이렇게 죄를 짓고 싶은 욕구가 다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죄 성들이 있으면 그 속성대로 행하고 싶어집니다. 시기가 있는 사람은 그 시기, 질투를 발하고 남을 깎아내려야만 속이 시원하지요. 판단 정죄라는 죄 성을 갖고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고 말하며 판단하는 것이 입에 달고 재미있습니다. 혈기가 있는 사람은 분이 나는 일이 있을 때 분을 발해야만 통쾌하고 편안합니다. 잠잠히 참으려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속이 너무 불편하지요. 이렇게 육신의 정욕이 동하고 발해지는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죄 성이 있으면, 그 죄 성을 근거로 비 진리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곧, 마음에 육이 있는 만큼 생각할 때도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육신의 정욕이 발동을 합니다.

 

‘시기’라는 죄 성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지요. 어떤 사람의 마음에 시기가 있습니다. 자기 동료가 윗분에게 칭찬받는 것을 보자 ‘시기’라는 육의 속성에서 육신의 생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뭘 그렇게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지? 남보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닌데 윗분이 번번이 저 사람만 드러내서 칭찬하시네. 저렇게 자꾸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시면 남들도 저가 정말 뛰어나다고 잘못 생각할 텐데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지요.

 

이렇게 육신의 생각이 진행되면 이내 육신의 정욕이 발동하여 ‘시기’라는 육신의 일이 겉으로 나오게 됩니다. 속이 불편하고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지요. 상대를 대할 때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험담과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육신의 정욕이 동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육신의 생각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동료가 칭찬받을 때 ‘왜 저 사람이 칭찬받지? 그리 잘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불편하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 생각을 딱 차단해 버려야 하지요. 육신의 생각을 안 하려고 애를 써도 자꾸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억지로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선한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생각만 아니라 느낌도 바꿔 나가야 하지요. 상대가 칭찬받을 때 불편하고 속상한 느낌을 행복하고 좋은 느낌으로 바꿔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칭찬받으니 감사하고 좋다, 윗분이 사랑해 주시고 힘을 주시니 좋다” 이렇게 선한 생각과 느낌으로 돌려나갑니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동시에 해야 하는 더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 성 자체를 마음에서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죄 성을 마음에서 뽑아 버리려면 자기가 시기하는 순간의 마음과 느낌을 명심하여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시기하는 느낌과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날마다 불같이 기도해야 하지요. 이렇게 죄 성을 뽑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원래 시기, 질투가 강한 사람도 있고 시기하는 마음이 별로 강하지 않아서 쉽게 뽑아 버리는 사람도 있지요. 또 살아가면서 자기가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할 때, 그때마다 마음에 슬픔과 서운함을 쌓아가서 시기 질투의 속성이 강해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힘든 상황을 겪는다 해도 늘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선하게 생각한다면 시기라는 죄 성을 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이 못 가진다 해서 서러워하고 남이 더 가진 것을 보고 속상해하며 상대에게 불편함과 감정을 품는 등, 이렇게 악한 생각과 느낌을 자기 안에 계속 받아들일수록 시기의 죄 성이 강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스스로 결단하여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 나가면 그 죄 성을 버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마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깨닫는 것이지요.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시기라는 죄 성이 자신을 얼마나 해롭게 하는지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만큼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릴 것이고 선한 마음, 선한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되지요. 그 노력과 간절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 성이 버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또 죄 성들을 하나씩 버려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한지 체험하게 되면 성결 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이렇게 육을 버려 나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육을 버리고자 한다면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육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곧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경험하면서 ‘좋다’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담아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에 그 경험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고 들을 때 좋았던 그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빨간 사과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음에 빨간 사과의 사진을 보면 전에 먹었던 기억과 느낌이 되살아나지요. 달고 시원한 맛, 아삭아삭하게 씹히던 촉감, 이런 것이 연상되면서 ‘맛있겠다, 먹고 싶다,’ 하는 욕구가 생기지요. 그 욕구가 강해지면 실제로 사과를 먹으려고 하고요. 반면 사과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사과의 사진을 본다 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안목의 정욕도 이와 같습니다. 예전에 좋은 느낌으로 세상을 취했던 사람이 그 느낌을 되살릴 만한 것을 접하게 되면 다시 세상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욕구를 좇아 육을 취하게 되지요. 이런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 것을 떠올리게 하는 요인을 자신의 주변에서 차단해야 합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령 술을 끊으려는 사람이 술집에 가서 남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술 냄새를 맡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 냄새 좋다, 맛있겠다, 나도 딱 한 잔만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몰려오지요. 애써 눌러 놓았던 술에 대한 욕구가 평소보다 훨씬 간절해지지요. 그러니 술을 끊고 싶은 사람은 아예 술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학생들이 오락을 끊고 싶다면 먼저는 오락기나 컴퓨터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치워야 합니다. 혈기를 버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폭력적인 내용의 것들을 멀리해야 할 것이고, 간음을 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음란한 것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지요.

 

종종 어떤 충격적인 범죄에 대해 영화나 뉴스에서 자세히 다루고 나면 그 후에 모방 범죄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도로 방송한 것인데 오히려 비슷한 범죄가 늘어나는 것이지요. 그 전에는 죄를 지을 욕구가 있어도 차마 구체적으로 행동은 못한 사람이, 언론을 통해 범죄 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게 되니 쉽게 따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큰 범죄를 따라하는 경우는 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지요.

 

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이 독특한 말투를 쓰거나 욕을 많이 하는 영화를 한참 동안 보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주인공의 말투나 욕을 따라 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게 되지요. 그러니 성결을 사모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살펴서 근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육의 것을 보고 듣고 가까이 하면 그 육을 쉽게 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술을 끊으려는 사람이 술자리에 가서 남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냄새를 맡으면 술을 마시고 싶어지지요.

 

(잠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아예 보지도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을 받아들이면 원래 있던 죄 성이 발동될 뿐 아니라 그 죄 성이 힘을 얻어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비유를 들어, 여러분이 한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중이라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력을 다해 성을 공격하기는 하는데 포위망의 한 쪽이 뚫려 있어서 성안으로 계속 지원군이 들어옵니다. 적군이 군사와 식량, 무기 등을 계속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안의 적군은 힘을 얻어 계속 저항할 수 있고 그 싸움이 빨리 끝날 수가 없지요. 포위하고 있는 성을 빨리 함락시키려면 공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급로를 차단하여 지원군을 막아야 합니다. 이때 성안의 적군이 마음 안의 죄 성이라면 안목의 정욕은 지원군의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결 되려고 해도 안목의 정욕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으면 죄 성이 버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 죄 성을 뽑아 버리는 노력과 함께 육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더러운 물이 담겨 있는 그릇 안에 계속 깨끗한 물을 부어 넣으면 결국 그릇 안에는 깨끗한 물만 남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깨끗한 물을 부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더러운 물을 함께 부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릇의 물은 더럽지요. 더러운 물을 더 이상 붓지 않아야 그릇 안의 물이 깨끗한 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그릇 안의 죄 성을 뽑아버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 성을 뽑아 버리는 노력과 함께 육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만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지요.

 

안목의 정욕을 차단한다고 해서 무조건 안 듣고 안 보고 세상을 피해 다니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세상 것을 접하면 무조건 안목의 정욕이 들어와서 범죄 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세상 것을 좋게 여겨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을 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들이 세상을 취하고 즐기는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때도 있지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선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해야 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도 중요한 것은 정신을 차리고 세상 것이 자기 안에 틈타지 않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적군을 진멸하고 어떤 물건도 취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듣고도 아간이라는 사람은 값비싼 보물을 보자 탐심이 동하여서 외투와 금, 은 등의 물건을 몰래 숨겼습니다. 결국 이것이 발각되어 아간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전투를 하다 보면 당연히 적군이 가진 보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간이 “나는 안목의 정욕이 틈타면 범죄 하게 되니까 무조건 보물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아예 싸우러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보다는 아무리 값진 보물을 보았다고 해도 탐심이 동하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지켰어야 합니다. “저것을 갖고 싶다, 몰래 숨길까?”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보물로 인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보물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누가 손에 쥐어 줘도 멀리 던져 버렸겠지요.

 

여러분이 세상과 육을 대할 때도 이런 마음을 다져 나가면 됩니다. 억지로 눌러 참으면서 계속 피하고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의 열매가 결국 사망인 줄을 깨달아서 마음에서부터 싫어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같이 기도하여 마음 근본에 있는 죄 성들을 뽑아 버려야 하지요.

 

        아련한 추억 속에 최송연 아련한 추억 속에... 그리움만으로 남아 있는 내 친구야 우린 그때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보고도
        허릴 잡고 까르르 웃어댔었지... 봄이면 산나물을 캔답시고 바구니를 옆에 끼고 어른들 꽁무니를 졸졸 따라나섰다가 길가에 꽈리를 틀고 앉은 뱀을 보고는 들고 있던 바구니마저 팽개쳐버리고 자지러지듯 울면서 도망쳤었고... 여름이면 앞산의 산자락을 돌아 후미진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며 내려가며 가재도 잡고 올챙이도 잡으며 깔깔대었네 가을이면 너와 함께 뒷산에 올라 도토리도 주웠었고 겨울이면 썰매를 탄답시고 송판때기 한 장에 냉큼 올라앉아 코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도록 앞뜰의 웅덩이를 따라 돌며 뱅글거렸지... 달 밝은 밤이면 동구 밖 빈 공터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술래잡기를 했고... 그때 넌 어쩌면 그렇게 꼭꼭 잘도 숨었든지... 난 너를 찾으려고 창수네 뒷간으로 갔다가 으스럼 달빛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고 너무 무서워서 슬그머니 집으로 도망쳐 버린 기억들... 그리운 내 친구야, 내 기억 속에 너의 얼굴은 여전히 동그란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이건만... 나 어디로 가 버렸는가... 거울 속에는 눈가에 잔주름이 짜르르 낯설기만 한 어느 중년 부인이 여전히 큰 눈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네 내 그리운 친구야, 새해라고 별것이 있겠느냐 어찌 보면 육신이 나날이 후패해지는 아픔일 수도 있을 테지..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야 내 어찌하리 세월의 끝자락을 잡고 계신 그분을 친구삼아 한 걸음 두 걸음 진실하게 걸어가노라면 언젠가는 하이얀 백발의 면류관을 쓰고 속 사람이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노년기를 맞을 수가 있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절 말씀)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깨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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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과 설교-

성경해석의 힘을 기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금광을 발견하면 채굴할 도구가 있어야 하듯이, 성경의 진리를 알려면 해석의 틀(interpretation frame-work)이 필요합니다.

성경속의 진리를 밝히 드러낼 수 있는 해석의 도구(tools)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성경해석의 일반적인 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봅니다.

1. 먼저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정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고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문법에 맞게 자연스런 의미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이 속한 책(예: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기록 목적)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경 전체의 맥락에 비춰봐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통전적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1. 다음으로는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주어졌는지,
처음 그 글을 대하는 자들의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 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인 하나님의 종들을 영감하셔서 성경을 기록케 하실 때, 허공에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말씀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1. 신학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말씀이 점진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의 발전과정을 따라가는 신경신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성경신학적 안목 없이 조직신학적인 접근만으로는 풍성한 진리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글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것이지요.

다른 차원의 말씀(하늘의 언어)이 인간의 글로서 옷입고 나타나셨기에 영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학적 맥락이라 함은 곧, 영적인 맥락인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맥락을 파악해서 통전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일차 독자에게 주어진 당시의 의미가 이차 독자인 지금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이 성경해석입니다.

그 의미를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성경해석의 최종 목표인 것이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과 함께 좋은 책(신학 서적)을 부단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원저자이신 성령만큼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분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바른 해석, 다시 말해서 성령의 조명과 하나님의 인치심(결재)를 받은 해석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날을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과 세상의 헛된 사상과 죄에 찌든 심령을 고치기 위해서는
인간의 아름다운 말과 듣기 좋은 소리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해석된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작성하여
주께서 친히 역사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성령을 의지하여 선포할 때 듣는 자의 심령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야 바른 열심, 자신을 위한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 아닌 잡음같은 소리가 알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기복적이고 신비적인 목소리에 교인들이 솔깃해 합니다.

성경적인 바른 설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참된 말씀에 갈급해 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풍성한 진리가 선포되기를 바라는 심령들이 정말 많습니다.

바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하면 주님은 그런 자를 들어쓰실 것입니다.

시대를 변혁시키는 그런 설교자가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잠든 자들이 깨어나서 회개하고 각성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각성한 자들이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구원받는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글: 구자준 목사

       

       

      성탄의 주/ 최송연

      흑암 속에 길 잃고 헤매이던 자 사망의 저주 아래 묶여 두려워 떨던 인생
      차마 버리지 못하시고 태초부터 품으신 그 핏빛 사랑 한 줄기 소망의 빛이어라
      성육의 귀하신 몸 더럽다, 냄새난다 탓함 없이 말구유에 누이신 그 겸손하심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의 왕이 되시네

      예수,
      그는 우리의 구원자시라
      내 영혼아, 하늘의 천군과 함께 손뼉치며 찬양하라 그 이름을!!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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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태복음 10장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메,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여담입니다만 필자는 40년 전, 군대에 있을 때 삼국지(박종화 역)를 접했습니다. 작업하다가 다쳐서 야전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그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읽었지요.

도원의 결의를 통해서 유비와 관우(관운장), 장비는 삼국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위 나라 오 나라 그리고 변방으로 밀려난 촉 나라의 삼분지계를 다룬 삼국지에서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역사의 주인공이란 중원을 차지한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비록 중원을 차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의명분에 충실한 자를 역사가 인정해 줄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된다면, 역사로부터 바르게 배우게 될 것이란 말이지요.

역사란 미화한다고 해서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된 역사기록은 자손대대로 해악을 끼칠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적에 후대가 역사로부터 바른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바른 역사서술이란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사기를 진작시키고 또한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서 각자가 역사의 일원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 좋은 역사기록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잘난 자, 있는 자, 많이 배운 자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않으셨습니다.

12사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태복음 10장을 시작합니다.

(이제사 겨우 8장부터 시작해서 10장에 왔군요. 세월은 흐르는데 필자의 붓끝은 느리기만 합니다. 힘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진 신학(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걸 '신학'이라 합니다)적 의미가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구원역사의 연속선 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열둘(제자)은 만수(꽉 찬 수)입니다. 만민에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성을 지니는 숫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띤 숫자이지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12와 12의 배수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4:4절 이하, 7:4, 14:1, 21:12-17, 21, 22:2)

7장 4절에 각 지파에서 인맞은 144,000을 풀어보면, 12×12=144 ×1,000(10×10×10) =144,000이 되지요. 10의 세 제곱인 1,000은 충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이는 환란에서 나오는 큰 무리를 말합니다.

인맞은 자(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믿음으로 화합한 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계7장 9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매우 적다고 말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안위를 놓치고 있는 자들이 대개 그렇게 주장합니다만, 그렇다면 그들 자신도 구원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습니다


말씀을 한꺼번에 다 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 차근 풀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글을 계속 읽는 분들에게 복음의 안위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성경을 읽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 곧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품기까지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지치고 욕먹고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살펴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지간으로서 어부지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어부 출신입니다. 품꾼을 부리는 것으로 봐서는 꽤 규모가 있는 어업을 영위한 것같습니다.(마가복음 1장 19-20절)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의 경우도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았지요.

빌립과 바돌로메- 역시 갈릴리 인근 출신입니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더라.

신약의 기록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제자들의 면면을(일부만) 살펴보자면,

안드레와 빌립은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헬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안드레는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면을 보입니다. 반면에 빌립은 상당히 치밀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요한복음의 그들에 대한 기록이 그렇더군요, 필자가 보기에는.)

가나나인 시몬은-열심당원입니다. '가나나'는 아람어식 표현이고요, 히브리어로는 제롯(당)입니다. 유대 독립을 위해 활동한
과격한(무력도 불사한) 당파에 속한
자였습니다.

가룟이란 지명을 따라서 불리운 유다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자로서 직분을 감당치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해서 바벨탑을 쌓았던 창세기 11장의 기록은 복음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많이 모여서 높고 큰 건물을 건축하여 이름(목사를 중심한)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면 살 수(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혹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들이 이름을 남기고자 했습니까. 아니면 어디 큰 교회를 이루고자 했습니까.

온 세상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었지요. 온 지면에 흩어져서 복음으로 생육번성하여 새로운 인류가 많아지게 했던 인물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인 wcc를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도들 간에 다름을 인정하면서 믿는 자로서 상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낮아져서 서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임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면면이나 성품, 그리고 삶의 정황은 각기 달랐을지라도 부름받은 자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였습니다.(요한복음 17:21-22)

하나님 나라는 가루 서말 속에 퍼지는 누룩과도 같습니다.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이나 일터에서 보냅니다.)

듣는(읽는) 말씀이 삶 속에서 체화되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1세기의 세속역사로 보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지만, 지난 이 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첫 물줄기를 형성한 자들이었습니다. 생명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원(시작의 원천)으로 해서 말입니다.

글/구자준 목사

미국을 회복시키는 사람들!


좋은 소식 1:
백악관에 있던 반기독교적인 “전문 로비스트들”을 제거하다.

지난 11월15일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마이크 펜스부통령을 새 대통령 인수위원회(transition) 팀 총책임자로 뽑았다.



마이크 펜스는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인디애나의 주지사로서, 오바마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들로 인해 크리스천들에 대한 역차별이 계속 늘어날 때, 신앙의 자유를 위해 주정부 법안을 만들어 시민들을 보호한 사람이며,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의 신뢰를 받는 리더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마이크 펜스부통령은 인수위원회팀 총책임자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오바마 정부에 의해 백악관 팀에 고용되어 있던 모든 “전문 로비스트” 들을 공식적인 역할에서 배제했다.



전문 로비스트들은 주로 동성애운동단체, 낙태단체, 이슬람단체, 또는 사회주의/공산당가치관을 동경하는 특정 압력단체들의 대표자들로서 이런 로비스트들은 자기 단체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책이나 입법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정책 입안자나 정당 의원을 상대로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CBS와 보수언론들은, 마이크 펜스가 로비스트들을 제거한 것은 워싱턴에서 “drain the swamp / 고질적으로 나쁜 정치적 관행을 철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곧바로 지키는 것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좋은 소식 2:

75주년 ‘국가 성경의 주(Bible Week)’ 기념으로 하원 의원들이 성경구절을 나누다.



지난주 11월13일-19일에 75주년 ‘국가 성경의 주’ 기념으로 여러 하원 의원들이 모여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나눈다고 한다.


미시간 공화당 하원 의원인 Tim Walberg는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를 읽었고...


이 이벤트를 후원한 콜로라도 공화당 하원의원인 Doug Lamborn은 미국이 전체 역사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경외했는지 나누며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성경말씀에 대해 ‘이 위대한 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라고 하셨다.”라고 인사말을 대신했으며...


Doug Lamborn


조지아 공화당 하원 의원 Jody Hice는 “이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해줍니다”라고 했고, 성경 읽는 시간을 시작하기 전에 국립 성경 협회 회장인 Richard Glickstein은 말하기를...


▲ 십계명 액자 앞에 서있는 Jody Hice


“아마 3분의 1 정도의 미국인만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을 것이다. 우리가 잠깐 멈추어 서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구소련 기독교인은 성경이 없었다.


숲에서 또는 비밀 모임에서만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라면서 성경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미국인들에게 상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지니아 공화당 하원 의원 Virginia Foxx는 성경은 “긴박한 상황에서 소망을 주고 힘의 원천이 된다”고 자신이 가장 즐기는 말씀을 나눴다.


▲ Virginia Foxx


이 이벤트의 주최자 및 참가자들에게는 국가 성경의 주가 단순한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었다. 지난 8년간(오바마 정부) 미국 안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거부했던 것을 회개하며, 성경말씀의 중요성과 말씀만이 미국의 앞날을 바꿀 수 있다고 전국에 알리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담은 행사라고도 할 수 있기에 너무 소중한 행사였다.


거짓과 혼란의 소리가 만연한 이때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미국에 회복되기 원한다.



좋은 소식 3:

미국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Betsy DeVos의 가치관을 알아본다.


▲Betsy DeVos


이번에 트럼프대통령당선 팀이 임명한 Betsy DeVos 교육부장관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DeVos는 아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자녀들과 그 동안 무너진 교육시스템을 고쳐나갈 수 있는 여성이기에 감사한 일이다.


DeVos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먼저 저소득 가족이 그들이 선택한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원(vouchers) 프로그램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지만, 공립학교 시스템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녀를 싫어하는 대표단체 중 하나가 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 (NEA)인데, NEA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사 연합회이며 일부 선생님들도 가르치기 꺼려하는 문란한 성교육 내용뿐 아니라, 친 동성애, 친 이슬람, 반 기독교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커먼코어(Common Core) 와 성교육 표준(Sex Education Standards)을 지원하는 단체들이다.



이 단체들은 유치원부터 시작하는 공립학교에서 동성결혼과 성전환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만 가르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들로써, 홈 스쿨을 불법화하기 위해 매년 노력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이런 단체들이 커먼코어를 반대하는 DeVos를 반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며, 보수주의 시민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 출처:

http://74.208.68.191/christ/?mid=col_desk&document_srl=57257

별들의 속삭임


하루 해가 서산에 걸치면
붉게 물든 황혼빛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삶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아무 생각없이 우리들이 하루를 보낼 때
지구는 부지런히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돌 뿐 아니라 아주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군상(群像)들을 싣고
그 군상들의 수많은 애환을 싣고
그 군상들의 세월을 엮어가면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있습니다.

1년 365일 동안 태양을 한바퀴 도는 거리가
9억 4천2백50만 km라 합니다.
1초 동안에 약 30km...
와우!
똑딱 하는 순간에 30km라니...

그렇게 태양을 80여번 돌고나면
우리는 어느새 꼬부랑 늙은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멀리 있는 천왕성은
태양을 한바퀴 도는 데 84년 정도...
천왕성이 태양을 한바퀴 돌고나면
80 우리네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2장 달력을 찢어내는데서
인생의 무상함을 보기도 합니다
저는 저 멀리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인생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밤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게 하시고
약속하시던 그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어 봅니다.

별과 별들의 그 회전속에는
어떤 신비함이 숨어 있나 봅니다
저들이 한바퀴 돌면서
긴 별 그림자를 그릴 때
인생이 그렇게 익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돌고 돌던 지구가
벌써 62번이나 돌았습니다
그 도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도...

얼마나 더 돌지 모릅니다.
얼마나 더 많은 별들의 속삭임이 있을 지 모릅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더 늙어갈 지도...

인생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은
아마 지구가 부지런히 돌고 달리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쌓아놓을 수가 없는거겠지요.
아니, 미련스럽게
그 무엇을 쌓아두지 말라는 가르침인지도 모릅니다.

문득 이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후에 내가 저 별들 중 어느 한 별이 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또 나처럼 노래할 것입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그러면 나는,
저 별들과 함께 달리고 달리며
꿈과 희망의 메세지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약속을
저들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밤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며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보라"고 말입니다.

-해처럼달처럼


(창세기 40장) 나를 생각하소서

  형제들에게 배신당하여 노예로 팔려 애굽땅에 끌려가 종살이 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곳에서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까지 갇혔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영어(囹圄)의 몸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하고 암담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기를 이 험악한 곳에서 건져주시지 않으시는지, 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지 의심과 원망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사람의 보기에 좋은 길이라 할지라도 좋지 않은 길일 수 있고 사람의 보기에 좋지 않은 길일지라도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험한 길일지라도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누명이 없고 옥에 갇히지 않고 보디발의 신임을 받으며 계속 형통하였다면 요셉이 언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애굽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인도하심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왕에게 죄를 범하고 요셉이 갇혀있는 보디발 집의 옥에 투옥됩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하도록 하였고 요셉은 그들을 섬겼습니다. 바로 왕에게 지은 죄가 아무것도 없는 요셉이 바로 왕에게 범죄하여 진노를 산 죄인들을 섬기는 셈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0:28/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꿈이니 그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술 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의 꿈이었습니다.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술 관원장은 그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손에 드렸습니다. 이 꿈에 대하여 요셉은 세 가지는 사흘이라, 사흘 안에 바로가 술관원장의 전직을 회복하여 전과 같이 바로의 잔을 받드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은 흰 떡 세 광주리가 머리 위에 있고 그 윗 광주리에는 바로를 위하여 만든 여러 가지 요리가 있는데 새들이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꿈이 사흘 안에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의 목을 베고 나무에 달 것이며 새들이 그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꿈은 요셉이 해석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을 이루어가시면서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포도나무는 주님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돋아나는 연한 순은 주님의 모습 같습니다. 포도를 따서 즙을 내는 것은 주님의 몸이 깨어지고 피와 물을 쏟으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싶습니다. 오직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나아가는 자만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떡은 세상의 물질이요 각종 요리는 자기의 공로, 자기의 의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요셉은 굴 관원장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우편 강도가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눅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우편강도가 주님께 한 그 부탁을 요셉이 술관원장에게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값비싼 성탄 추리를 사지않고

화가이신 우리 교회 권사님을 선두로

몇 명이 둘러앉아서 직접 만들어 주일학교 방 벽을 꾸민

성탄 추리와 눈사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있는데...

사진 기술이 영 엉망임다. ㅎㅎ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서 더욱 따스하고 정겹네요.

다음 성탄 절에 모두 한 번 시도해 보셔요.^^


재료는 주일학교에서 쓰다 남은 색종이,

솜 두 봉지, 그리고 장을 볼 때 담아주는 종이봉지 등입니다,

 

 


종이로 만든 추리

 

 

 

                                                                 솜 만든 눈사람.^^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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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 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이 글은 한국 창원극동방송

                             '새벽산책'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 기도문으로써,
                             지난 해 베풀어 주신 사랑,

                             뜨거운 성원에 감사를 드리며,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풍성하게 넘치기를 기도드려요!^^*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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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 나용화 교수 -



정부가 범죄를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했으나, 불의하고 악한자들은 여전히 폭력을 자행하며 피흘리는데 민첩하다. 팔순의 할머니들과 여섯 살의 귀여운 여자 아이를 생매장하여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을 비롯하여 십대 청소년들이 한 선배를 칼로 50여 군대를 찔러 죽인 일 등은 이 사회가 너무나 살벌함을 느끼게 한다. 이같이 난폭하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시대에 탐욕과 향락에 도취하여 포악해져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 빛을 발하며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신 것과도 같다(참조, 사 56:1; 60:1).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심에 있어서 먼저 의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온전히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덧입어야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이 베푸신 의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될 때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약속하심 말씀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의이심을 소개한바 있고(렘 23:5-6; 33:14-18)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후에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바 우리의 의이심을 증거했다(고전 1:30).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간 것이 바로 의라고 말씀하셨다(요 16:10).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시다.


하나님의 의인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되고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그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들었을 뿐만 아니라(갈 3:8, 16) 그를 미리서 보았다(요 8:56).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신 의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그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셨다(창 22:12-19; 약 2:21-24).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성취해 놓으셨고 그 성취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족을 얻으셨기 때문이다(롬 3:20-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는 인자와 긍휼을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인자’(히브리어, ‘헤세드’)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잘되길 즉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되기를(롬 8:29-30)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쏟아 부어주는 ‘내리사랑’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인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그의 독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요 3:16)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사건에서 잘 나타났다(롬 5:8). ‘긍휼’(히브리어, ‘체다카’)이라는 용어는 한편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 담당하는 ‘안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 긍휼은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신 사건(사 53:4-6; 마 8:17)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 대한 비유(마 18:27, 33)에 잘 나타나있다. 이같이 하나님이 백성이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그가 그들을 위해 독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저주와 형벌을 당하여 죽게 하신바 그의 인자(내리사랑)와 긍휼(안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바 이 의를 가르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밖에서 오는 처음의 피동적 의’(the alien, primary, passive righteousness from God through faith)라고 한다. 이 의가 선행에 앞서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의 경우처럼 선행이 의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도가 선행을 행하여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 예컨대 수도사가 되어 폐쇄된 수도원에 들어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공로를 쌓아야 의롭게 된다고 로마교회가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 곧 선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으며(롬 3:20)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살아계셔 역사하실 때(갈 2:20) 그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생각을 품으며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빌 2:13).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시어 활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는 자 곧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얻은 자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의가 선행에 앞선다’고 주장하여 로마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우리를 위하여 의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후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하여 “너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사 56:1)고 촉구하시는가 하면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가 베푸신 의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반대 개념과 비교하면 또한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의의 반대되는 개념은 우상숭배이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리인데 반하여 우상은 거짓이요 불의이기 때문이다(롬 1:16-17, 23) 이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이신 여호와를 업신여겨 멀리하고 물러가(사 1:4) 우상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었다(사 2:8). 이방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종교이다. 이 바알종교의 특색은 경제적 풍요를 최대의 축복으로 여기는 까닭은 부동산 곧 땅과 집을 맗이 갖는 것이었다(사 5:8; 미 2:2; 6:16). 그래서 바알 종교가 성행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가 심해져 가난한 자들의 땅을 권력자와 부자들이 탐내여 착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이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 산을 세멜에게서 산 사건(왕상 16:24)과 그의 아들 아합이 이세벨의 도움을 받아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이다(왕상 21장). 이두 왕들은 바알종교와 그것의 불의한 경제제도를 끌어들여와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다(왕상 16:26, 33). 그러기에 우상숭배는 전형적인 불의 곧 탐욕과 거짓이다(참조, 골 3:5).


이 같이 불의하고 이기적인 탐욕의 우상숭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의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의도 사실상 한마다로 사랑(내리사랑과 안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께서 자기가 베푸신 의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본래의 실천적 의”(the proper, practical righteousness active in love before God)라고 부른다. 이 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이이도 하다(갈 5: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대신에 그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므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레 18:1-5)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라고 명하셨다(레 19:18).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율법중에 가장 큰 계명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에 대하여 물었을 때 위의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하나로 묶어서 대답하신 것(마 22:34-40)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잘 요약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10)고 하고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갈 5:14)고 하며 예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행하여 사랑과 절제 등의 열매를 맺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갈 5:16-24). 우리의 이웃 곧 혈연, 지연, 학연 등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도록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을 베풀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 성격상 공동체적이다. 자기 아닌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의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기만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사실상 믿음도 없고,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들이기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도록(고전 12:26) 되어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각각의 직분을 따라 서로를 섬기되 서로 먼저 그리고 열심히 하여 하는 것이다(롬 12:3-13).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경우에는 그 결과로서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엡 5:18-21), 아내와 남편 사이(엡 5:22-33), 자녀와 부모 사이(엡 6:1-4),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엡 6:5-9) 온전한 사랑의 질서가 있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 교회가 서로 교제하기를 힘쓰면서 재산과 소유를 서로 함께 쓰거나 각 사람의 필요대로 나눠준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행 2:42-45). 이렇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인바 이 사랑은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며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성장하여 영화롭게 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허물과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짊어지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이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체험하는 데서 사실상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의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어떤 것인지를 살핌에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성령을 부으시고 복음을 가난한 자들과 흉악한 멍에의 줄로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전파하여 자유와 생명을 베풀도록 하신 점(사 56:6; 61:1-2; 눅 4:17-21)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 우리의 이웃으로는 농어민, 도시의 영세민 근로자, 고등학생들과 10대 소녀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당국의 농업정책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어민들이나 도시 저소득층도 마찬가지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잘산다’는 개념이 물질적 풍요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빈곤하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좌절감을 갖는 것이 문제이다.


대학입학시험을 목전에 둔 고등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인생의 행복의 열쇠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입시공부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들의 삶의 목표가 오직 대학입학 뿐인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공부라고 하는 흉악한 멍에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탈선한 10대 소녀들이 윤락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가 무엇인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의의 사람들이기에 변혁의 역군(change agent)들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일꾼들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상대적 빈곤감이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적어도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은 미덕이 아니므로 가난한 채로 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다(딤전 5:8).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생활향상을 위한 정책수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정책적으로 뒷받침하여 농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농수산물의 생산, 가공, 판매등을 총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보호되고 도시의 영세민의 생활향상까지 도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레 25:23) 개인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하고 땅을 경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와 적어도 소작농들의 생산의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소작료가 강력하게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의 경우는 건물 임대료와 전세값이 규제되어 마땅하다. 청소년들의 겨우 입시의 멍에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더라도 저녁식사만큼은 귀가하여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하고 공휴일 즉 주일에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어야 한다. 지금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탐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성공의 개념에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비 인간화 시키고 있다. 부모들은 성경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자녀들과 함께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훈련을 함께 해야 한다. 성경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교육해 주어야 한다. 이 교육의 책임은 특별히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참조, 딤전 2:11-12)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정부의 정책수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책이 빈곤한 정치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기독교강요』에서 권세자들에 대하여 때로는 비판적으로 불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2권 8장 38항과; 4권 20장 32항).


그러한 한편 우리는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곧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 이웃에게 덕을 세워야 하고 이로써 환경오염도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고(마 6: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마 6:33).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불신자들의 탐욕적 생활을 함께 경계하면서 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으로 구제를(마 6:3)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경외심 및 믿음을 연단하는 방법으로 기도를(마 6:5)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으로 금식을(마 6:16) 말씀하셨고,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할 것(마 6:20)을 말씀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세속적인 정욕과 탐욕을 버리고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근신하여 이웃을 사랑함으로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딛 2:12).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의롭게 살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을 통해서 파괴되고 황폐해진 땅의 기초를 수축하신다(사 58:12). 다시 말해서 거짓된 바알종교의 불의한 부동산 투기와 그것과 결부된 폭력과 착취로 말미암아 황폐된 땅을 치료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변혁의 역군들로서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출처: 안산 회복의 교회 /전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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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1S5JQR56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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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 / 리챠드 개핀

 

바울신학의 중심에 우리의 요약을 통하여,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는 그 연합이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문제로 꼽힐 수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간략한 윤곽을 제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엇보다 더 바울이 언약신학자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 자신을 자기 백성의 "분깃"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가장 명쾌한 신학이다.(시73:26; 119:57; 렘10:16). 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분깃"이라는 언급도 나타난다(신32:9).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 53장 12절에 나타나 있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종에 대한 것이다.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5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가 "우리의 불법을 대신하여 상함을 입으셨고,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여 부서지신"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님께서 "내가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깃을 할당할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이 언약적인 연합과 유사한 실현, 즉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교회 사이의 순환적인 소유가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심에로 귀착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바울에게서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핵심으로서 구원론적인 현실, 즉 구원의 중심적인 진리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표현은 바울이나, 혹은 신약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여러 곳에서 표현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 실재는 "함께"라는 전치사를 포함하여, 약간 다른 변화와 함께 "주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구의 용례에서 두드러진다. 그 의미에 대한 학문적인 토론은 "안에"라는 전치사구의 힘에 집중되었으며, 장소나 혹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순전히 도구적인 이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심지어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라는 생각까지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상, 바울의 용례는 다양하고, 이 표현의 전반적인 의미의 폭은 아담과 둘째 혹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를 통하여 형성된다(롬5:12-19; 고전15:21-22, 45, 47). 각자가 행한 것은 결정적인 것이어서, 사실상 그들의 대표로서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나, 그리고 그들의 죄가 마땅히 초래하는 정당한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로서 그들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각각 죽음과 삶의 결정을 가져오는 것이다(롬3:25-26). 이와 관련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그와 함께"와 같은 표현은 상호 연관된 것이며,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 것이다. 전자는 단지 후자가 언급하는 연합 안에서만 기능한다.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여"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이 연합 안에는 되돌릴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의 "바울이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통하여 두드러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연합 혹은 연대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사실상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를 확장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미래의 영광에 걸쳐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연합의 의미를 토론할 때, 이것은 본문의 낯선 것을 억지로 끼어 넣는 것이거나, 혹은 불필요한 조직화의 산물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삼중의 범주적인 구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① 예정(엡1:4)과도 관계되며, ②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단번에 성취된 구속사적인 사건으로서 과거적인 연합과도 관계되고, 혹은 ③ 현재적인 일로서 구원의 현재적인 소유 내지는 적용과 연관된 연합으로서 실존적인 차원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러한 구별들은 서로 다른 연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일한 연합의 서로 다른 측면과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차원들 각각을 인식하되 그들 중의 하나를 거절하거나, 혹은 그들 사이의 구별을 거절함으로써 그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동의어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와 같은 구별을 위한 필요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인 현실적인 연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훈적인 예들로 인하여 잘 묘사될 수 있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나에 앞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혹은 "내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자서전적으로,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후를 예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교훈의 전반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로 알고 있으며(엡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때에 "그분과 함께" 있었던 자로서 자신을 묵상하고 있다(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기간 동안 그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가 있었고, 따라서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복수형으로 인격화되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진노의 자녀"였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질문, 곧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질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진노에서부터 은혜에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진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로 넘어서는 이 전이(轉移)는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사로잡을 것이다.

 

이제 특히 현재적 연합, 구원의 현실적인 적용 혹은 적용 안에서의 연합, 그리고 그 연합의 구원 서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게 될 때, 여러 가지 국면이 지적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예정과 관련한, 구속사적인 연합과 관련한, 그리고 대표적이며 법률적인 연합과 관련한 것만큼 이것은 또한 신비적인 연합인 것이다. 바울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유비를 사용하여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처럼, 이것은 "큰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엡5:32). 이 유비는 확실히 깊고 친밀한 연합을 지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한 생각을 분명하게 견지한다. 그런 친밀함이 공상한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인격적인 구별을 제거하거나, 혹은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인격적인 정체성은 유지된다. "신비적"인 연합은 인격적인 본래모습(integrity)을 지워버리거나 혹은 경감시키지 않는다. 현재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대표자로서 그리고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유지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가장 괄목할 만한 증거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롬8:34)의 현재적 중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연합, 즉 칭의와 성화 사이의 차이가 애매하게 적당히 처리되어서는 안 되고,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타협되고 만다는 이해할 만하고 또한 적절한 그런 관점은 바울의 윤곽이 보여주는 통합적인 연합을 상실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분리할 수는 없는 따라서 법적이고 갱신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단지 하나의 연합만이 있다.

 

현재적 연합은 또한 영적이다. 이것이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내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연합과 관련한 독특성이다. 이것이 이 연합과 관련한 신비적인 면을 가능하게 하며, 이 연합을 다른 종류의 연합과 혼동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즉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인 현실로서 이 연합은 삼위일체의 연합과 같은 존재론적인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과 같은 위격적인 연합도 아니며, 인간의 인격 내의 육체와 영혼의 상관적 관계를 상정하는 심인적인 연합도 아니며,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육체적인 연합도 아니며, 열정과 목적 및 이해와 관련된 지적이고 도덕적인 연합도 아닌 것이다.

 

영적인 연합은 "그리스도"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셔서 이 연합의 배후에 계신 "성령"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바울의 근본적인 생각이며, 이것이 무엇을 함의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또 생각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사실만을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형되었으며, 현재 성령을 완전하게 소유하심으로써 "생명-주시는 성령이 되셨고", 그 결과로서 현재 "주 곧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고전15:45; 고후3:17). 위격적인 구별을 지워버리지 않는 기능적인 동일시로서 부활의 생명을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전15) 그리고 종말론적인 자유를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후3) 성령과 그리스도가 하나임을 보여주며, 그 결과로서 교회의 삶과 신자들의 내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사실상 분리 불가한 하나인 것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9절과 10절에서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 "성령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여러분 혹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여러분,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하나의 연합을 묘사하는 분리할 수 없는 국면인 것이다. 비슷하게, 에베소서 3장 16절과 17절에도 "여러분의 속사람에 그의 영을 가진" 자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영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성령의 행동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며, 비성경적인 관념론이나 비물질적인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영적인 연합으로서 이 현재적인 연합은 순환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환언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또한 교회를 위한 "영광의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1:27). 그러므로 그런 연합은 본질상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 그 자체이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여러분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습니다"(골3:4).

 

마지막으로 현재적인 연합은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신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의도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서 도달하게 될 종말론적인 완성에서 반드시 성취된다(롬8:17; 고전15:20, 23).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과 현재 그의 죽으심과 부활 덕택에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연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을 차지한다.

 

 

리챠드 개핀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서, 69-77p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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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다시 바라보면
히브리인들의 시간의 개념은
성경에서 시간의 개념은
‘사건’으로 한 사건, 사건이 시간의 개념임으로
시간을 사건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성경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개인의 한 사건에 대해서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헤아림의 분별로 바라보면
초급함을 초월하고 더 하여 그리스도인의 본분(本分)을 자각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도리로서 슬픔과 고통에서 평안을 주시며 감사의 충만으로
새롭게 힘을 얻고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면 공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
불공평한 세상이 공평하게 보이고 공정한 마음이 됨은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함께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이, 복음을 받아드린 자의 삶이 신앙의 길이며
그 길이 소망의 길이라 참된 소망은 인내로 연단된 소망이라
자신을 연단하고 범사에 경건을 잃지 않는 자로 평강의 열매를 맺는 자의
‘사건’ 이 복음의 사건이며 이 사건은 이미 창세기에서 시작된 사건이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첫날의 사건은 빛과 어둠을 이라 부르신 사건에 이어
인간의 삶인 땅에 보시기에 좋은 환경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심히 좋아하셨다.
특히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고 그 날에 안식을 하시는
사건이 있었기에 그 후에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그 안식일을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사건이 있었으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8]
그 후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7-28]
이 말씀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걸어가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을 탓하기에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이라
율법의 의를 잃어버리고 종교화한 자신들이 만든 올무에 자신이 걸린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겉치레를 비판하시고 지적하시는 반면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으며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심을 밝히신다.
안식이 무엇인가.
이미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이 복되고 거룩함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만 누리는 안식이며
영원히 누릴 안식, 이 안식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셨으며
모세를 만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라 하신 말씀은 이다.
여기에 거룩한 백성 =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 = holy nation 이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은 같은 뜻이며
‘안식’ 은 ‘안식일’ 은,
영원한 안식을 향한 하늘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향하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을 때, 그 시간,
그 시간 개념의 사건,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 사건
이 사건의 발로(發露)는 우리의 ‘안식’ 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며    
육신이 되시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거룩한 백성 =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 = holy nation을 보여주신 놀라운 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안식을 체험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을 ‘교회’ 라는 공동체에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러한가?
안식,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는 개인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를 부르는
의미의 말이, 절대 절대로, 아니고, 아니며
공동체를 부르는 의미라
‘나’에서 ‘우리’ 로 발전하고 성장한 믿음의 참된 의미 라
각 개인이 하나의 몸의 지체로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교회이며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 되지못하면
교회는,
교회는 지체인 생명을 외면하고 종교 조직화 하여
교회를 건물이라 하고
그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하면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화된 바리새인들의 공동체일 뿐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교회인가?
교회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뾰족한 지붕 그 위의 십자가 그리고 엄숙한 건물과 십자가?
그것은 건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생명인가 조직인가?
왜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되었고
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는가?
이 시대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 수 없는가?
그 물음과 답은
믿음의 분량만큼의 물음이며 답이다.

시대마다 시대의 흐름의 경향이 사상과 의식이 되었고 이를 쉽게 따르는 버릇과
관습(慣習)으로 전통화 된 믿음은 종교화 하였고
종교화된 굳은 마음의 사상은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시대를 분별할 줄 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의 불순물이 된
시대의 사상을 되짚어 보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아직도 영향에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신앙의 역사를 조명하여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고자는 의도로
글이 다시 시작된다.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상고(相考)하면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That ye put off concerning the former conversation the old man,
which is corrupt according to the deceitful lusts;
And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And that ye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에베소서 4:22-24]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사
그 사랑으로 오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랑의 사건이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우리 주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의와 진리가 되어
일상이 되고 매일 매일이 새로운 신앙의 사건이 되어
...put on the new man,
낮아진 그리스도 우리 주님 때문에 평안하시고 그 평안을 끼치는 나날이 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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