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도 사도.선지자가 존재하는가?

이단경계 2009. 3. 18. 07:12
오늘날도 사도·선지자가 존재하는가?
[심층기획]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④ / <목사와 예언자> 서평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승구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Wagner, Peter. et al. Pastors & Prophets (Colorado Springs, CO; Wagner Publications, 2000. 임종원 옮김. <목사와 예언자> 서울: 도서 출판 진흥, 2004. Pp. 141)

   
교회 성장학파의 대변자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피터 와그너(Perter Wagner)와 그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를 따르는 몇몇 저자들이 목사와 예언자의 건강한 관계를 규정하고
제시하려는 몇 편의 글을 담은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에도 사도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있다는 전제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전제 가운데서 이들 예언자들과 목회자들은 과연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답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와그너의 <사도들과
예언자들>1) 의 자매편으로 그 책과 성격을 같이 하며 와그너 교수의 그 동안의 관심과
노력의 방향을 잘 표현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와그너 등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이 “예언자들과 예언 사역을 위한 영적인
규약(protocol)을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이며 “이 일을 멋지게 완수하여
예언을 믿는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 규약이 폭넓게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25). 그래서 와그너 등은 이 책에 ‘건강한 교회를 위한 규약’이라고
하였다. 와그너 교수와 이 일단의 저자들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먼저
그들의 주장 가운데서 그래도 성경적으로 지지할 만 하며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을 언급하고 후에 그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와그너와 이 저자들의 주장 가운데서 성경적으로 긍정적인 점들

와그너 등이 건강한 교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모든 이들과 함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의 내용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 체계는 결국 성경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9)는 와그너의 첫 말에는 모든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할
 것이다(그러나 후에 드러나겠지만 와그너가 말하는 성경적 형태와 우리가 말하는
성경적 형태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더구나 에베소서 4장에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직분 체제와 운영 체제를 계획하시고 적절히 세워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9).

또한 교회가 오랫동안 이 “이상적인 직분 체제와는 훨씬 동떨어진 모습으로 운영되었다”
(9)는 말에도 모든 개신교도들은 동의할 것이다(그러나 와그너는 1600년이라는 말에
 종교 개혁시대와 우리 시대까지의 교회의 직분 체제를 다 넣어 말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가 의도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또 하번 다른 것임을 유의하면서
그의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목사와 교사의 관계를 상호 밀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다(12). 그리고 사제(priest)라는 비성경적 직분을
대체한 목사는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로 제자리를 되찾았다”(13)는 점을 지적한 것도
옳은 것이다.

또한 스테판 만스필드(Stephen Mansfield)와 마이크 비클(Mike Bickle), 그리고 톰 하몬
(Tom S. Hamon)이 교회 안의 여러 은사를 지닌 이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72~74, 82f., 98f., 136) 바르고 건전한 것이다.
또한 킹슬리 플레쳐(Kingsley A. Fletcher) 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포된 말씀이다.
이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이다”(109)고 말하는 것도
매우 옳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말씀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매우 옳다. 문제는 이 말을 하는 그를 비롯하여 이 저자들이 이 원리에 끝까지 충실한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의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시작 부분에서 성경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순간부터는 그들의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그렇게 되는
원인을 그들의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함께 제시해 보기로 하자.

와그너와 이 저자들의 주장의 문제점

1. 일반적 문제점들

기본적으로 와그너는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의도에 맡도록 적절히
변경하면서 논의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와그너는 신약 시대를
율법 시대와는 다른 ‘은혜의 시대’라고 언급하면서 그런 상황에서 예언자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다(19).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두 종류의 대적자를 얻게 된다고
생각된다. 하나의 대적자들은 그의 세대주의적 해석에 반대하는 언약 신학적 대적자들
이다. 또 하나는 그의 수정에 반대하는 세대주의적 대적자들이다.

와그너와 이 저자들의 좀더 심각한 일반적 문제는 “성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이 말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그들 나름의 독특한 함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 때까지는 선뜻 동의할 수 없게끔 하는 논술을 그들이 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
그 의미를 일일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상한 주장과 논의를 제시하는 이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이들에 대해서 이단자들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 느끼는 불안을
가지도록 생각하고 논술하는 것일까?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그들의 성경 주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를 노출시켜 주는
것이다. 주해를 이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주해의
내용을 가지고 따지면 결국 성경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베소서 4:11 이하에 근거해서 교회의 직분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 본문과 상관없는
것들을 때때로 삽입하는 것들에서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와그너는 ‘전도자’를 언급하면서 “약 150년 전에 챨스 피니(Charles Finney)
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폭넓게 주목받지 못했었다”고 말한다(13).
와그너에게는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이 관심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도자들이 관심인
것이다. 더 심한 것은 그 본문이나 다른 성경 구절에 있지도 않은 ‘중보자’(intercessors)
라는 직분을 그가 삽입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독특한 직분으로
이를 언급하면서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직분이다”고
말하고 있다(13).

그는 이런 것이 에베소서 4:11에 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러나 중보자는 촉매제처럼,
예언자와 사도들의 길을 예비하는 지극히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는 주목할만한 직분이기
때문에 꼭 언급하고 싶다”(14)고 말하면서 이를 목사, 교사, 예언자, 사도와 함께 교회의
5대 직분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와그너가 말하는 교회의 5대 직분이(10~14,
29, 37) 엄밀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임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와그너뿐만 아니라 이 책에 기고한 다른 이들도 이와 같은 다섯 직분에
대한 같은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57~59, 73, 107, 126). 그들은 이런 이해를
와그너로부터 배워 같이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는 이런 용어를
사용 할 때 그들이 성경의 본래적 의미보다는 오늘날 그들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고, 교회사적 전통에 근거하지도 않은
개념들을 일정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
양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숙고해 보라.

톰 해몬(Tom Hamon)은 오늘날 예언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면서 에베소서 1:17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123f.). 이 본문이 말하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과연 소위 제한된
의미의 예언자들에게 있는 것이라는 의도로 바울이 말하는 것인가?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도록 해야
할 것을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본문을 주로
목회자와 소위 예언자들에게 이를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은(124, 136) 이들이 가진 성경
주해의 자의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근원적인 문제

이들의 근원적인 문제는 역시 오늘날에 예언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와그너 등의 목소리는 오늘날 가장 세련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직통 계시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와그너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왔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특정한 구성원들에게 허락하시는 특별한 능력으로,
거룩하게 기름 부으신 선포를 통하여 그 분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2) 그리고 와그너에 의하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것은 예언자가 받은 은사”라는 것이다(50). 와그너는 이런 예언이 오늘날에도 있다고
생각하며 1999년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2,500명의 소위 예언자들과 예비
예언자들을 모아 전국 예언자 학교(the National School of the Prophets)를 개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41).

그는 여러 형태의 계시가 더 더해질 것이라고 제시한다. 특히 현재로서는 자신이
전도자의 은사와 직분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지만 “하나님께서 가까운 장래엡 전도자들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통찰을 계시하실 것이라는 잠재된 예감이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31). 그리고 그는 “교회에 예언자들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하다”고 단언한다(49).

톰 해몬(Tom S. Hamon) 역시도 같은 견해를 표 한다: “…예언이 없다면 [교회가]
마땅히 드러나야 할 건강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132). 와그너는 또한 오늘날에도
있는 이 예언자들과 (후에 언급될)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49). 와그너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가 지속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스필드는 이렇게 까지도 말 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예언하는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신다. …지혜로운 목회자들의 사역은 진정한 예언적
교회가 이 세대에 일어나리라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다”(74f.).
캔사스 시의 국제 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대표로 있는 마이크
비클(Mike Bickle)은 자신이 목회하는 메트로 교회(Metro Christian Fellowship)에는
예언적인 꿈, 이상, 그리고 환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79). 한국
교회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유념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이런 생각은 그 동안
장로교 신학(개혁 신학)과 정통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해 온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과 이런
주장들을 비교해 보라.3)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4) 이런 문제에 대한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의 강한 입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자들과
방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성경의
위대한 종교 개혁적 원리를 버려 버린 것이다.”5) 그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신약 선지자들의 영감은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으로 편입되어졌다”고 한다.6)

한마디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온 것이다.7) 물론 오순절파에서는 오늘날도 예언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속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의 주장은 정통파 교회,
적어도 장로 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척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신학(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 책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다 어떤 계시의 내용을 더하려고 하는 이런 주장은 그런
식의 잘못을 범하는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와그너 등은 그들이 말하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시대에는 예언의 양상이 변했다는 점을 말한다(21).8) (구약의 참 선지자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 시대에는 참 선지자의 예언도 꼭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논의에 선뜻 동의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또한
와그너는 Y2K에 대한 예언자들의 예언이 전대미문의 가장 성공적인 예언이었다는 세속
학자인 테드 다니엘스(Ted Daniels)의 말을 인용하면서 결론 내리기를 “예언은 조건적”
이라고 주장한다(47). 이 말은 와그너가 테드 다니엘스의 비유적인 말을 과연 바르게
이해하고 하는 말인지를 묻게 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조의 말로 들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와그너가 다니엘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다니엘스가 하는
말인 “우리는 엄청나게 쏟아 부었는데 (즉, Y2K를 위해 대비했는데),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고 살아남았다는 겁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과연
 Y2K에 예견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미리 잘 준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와그너 자신이 잘 말하듯이 그들은 “핑계를 댄다”는 반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47). 또한 예언이 조건적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선포한 말씀을 바꾸신다고 표현하는 것(47)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데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변함이 없으심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서 구약에 선포하도록 하신 말씀 안에 회개하면 주께서 돌이키실
것이라고 신인동성론적 표현이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더 옳지 아니한가?9)

사실 이 저자들은 소위 예언을 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 믿기 이전에도 일종의 영적 감지력을 지닌 사람들일 경우가 많음을 스테판
만스필드(Stephen L. Mansfield)는 이 책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59f.). 또한 이들은 흑백논리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61). 더구나 이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자신들에게 떠오르는 모든 것을 예언의 말씀으로 쏟아낼
수 있지만, 자기 삶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들을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63). 마이크 비클도 이런 이들의 많은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92). 그렇다면 모든 이들이 이런 이들에게 “너 자신이나 고치라”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또한 마이크 비클은 소위 예언하는 이들의 말에 거짓말이 많다는 것과 회중 가운데
상당한 사람들이 이들에게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데 지쳐 있다는 것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다(85). 그러므로 이들은 소위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과
부딪히는 많은 경험을 하였고 또 지금도 그런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88). 사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가 바로 그런 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 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 자체가 이런 직통 예언파의 내재적 문제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마이크 비클의 다음 말을 생각해 보라: “…예언하는 사람들이 교회
사역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역도 마찬가지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90). 이외에도 이 저자들은 소위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이 나타내는
수많은 문제를 잘 알고 있다(111). 톰 해몬(Tom S. Hamon)도 소위 “(오늘날에 있다고
하는) 예언은 …동시에 교회에서 가장 커다란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21)고 하며, 또한 소위 예언된 것들 가운데서는 “거짓 말씀이나 해로운 말씀이
있었다고”(133)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12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잘
알면서도 이런 이들을 예언자라고 하면서 그들이 교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집단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교회의 오랜
성경적 전통을 벗어나 이와 같이 나아가려고 하는 이들의 문제점은 조금이라도 성경과
성령의 가르침에 민감한 이들은 다 잘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잘 읽으면 우리는 소위 예언한다는 이들을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알게 된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잘 증언하고 있듯이 소위 예언한다고 하는 이들은 문제가
많으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문제를 일으키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이런 헛된 추구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섬기도록 할 것인가 하는 목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예언
사역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목회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도록 하는 목회적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3. 좀더 심각한 문제

그러나 와그너 등의 주장은 이전의 직통 계시파보다 그런 입장의 전제에 좀더 철저한
면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1990년대 이후를 ‘신사도적 종교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 시대’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25).10) 바로 이런 입장에서 와그너는
“사도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교회에서 활동하는 공식 직분으로서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14, 17쪽도 보라). 또한 앞부분에서도 “우리가 수백
 년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성경적 직분 체제를 다시 한번 주목하고 있다”(10)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의아함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와그너 등이 말하는 ‘사도’라는 말은 좀더 새로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와그너
등의 주장의 좀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직통 계시파는 1세기의 사도들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면서 예언 사역이
지속된다고 주장해 왔는데 비해, 이제 와그너 등은 그럴 뿐만 이 아니라, 그 예언 사역과
건강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오늘날의 사도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예언자들을 ‘실라’로 규정하고 그와 바울 같은 관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와그너는 자신에 대해 척 피어스
(Chuck Pierce)가 예언자로 있고, 자신은 그와 바울-실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33). 그리고 자신을 “사도이자 교사”라고 말한다(39).

또한 와그너는 자신의 이런 입장에 근거하여 1999년부터 최소한 일년에 두 번씩
“예언하는 장로들의 사도 협의회”(The Apostolic Council of Prophetic Elders) 모임을
개최하고, 자신이 이 집단의 사도로서 의장직을 감당한다고 말한다(33f.). 물론 와그너는
자신의 사도직이 수평적 사도직(horizontal apostolic)이며, 이 사람들의 모임을 제외하면
어떤 개별적인 예언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수직적’ 혹은 지속적인 사도 직분을 감당하지
않는다고 밝힌다(34). 그렇다면 구태여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와그너 등은 사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피하려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는 주장을 와그너 등은 하는 것이다.

결론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일단의 사람들이 ‘사도 협의회’
라는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에 대해 1세기의 사도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 사도들을 불러서 위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게 느끼듯이 이런 식으로 지속하는 것은 결국
사도와 종교적 천재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 민감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그것에 반대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좀더 유의해야 하고 기도에 힘써서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주께서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과 내주 하시는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1세기의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 또 다른 사도들이 주어질 것이라는 시사를 성경은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 오히려 1세기의 사도와 선지자의 터 외의 다른 터를 닦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강한 경고가 성경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1세기의 사도들이 우리들의 사도들이며, 그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해 교회와
성도들이 세워져 있음을 강조해야만 한다. 성경적 사도적 가르침에 다른 것을 더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바울의 선포(갈 1장)가 두렵지 아니한가?

성경에 있는 사도들 외에 사도가 있다고 말하며, 어떤 식으로라도 자신을 사도인
것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이 무시무시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도들과
선자지들의 사역이 그쳐진 후에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아니한 이들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 시대에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서 이렇게 현저하게 벗어난 가르침들이
난무하며,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영적인 어두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 중의 하나도 소위 예언을 한다는 이들 사이의 혼란이 너무 심각하여
그들을 위한 일종의 영적 규약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25), 이런 예언이
지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런 책 등이 그런 영적 혼란을 더 부추길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오늘날의 혼란을 막고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성경이 말하는 사도적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면, 성경의 가르침에 무엇이라도
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도적 가르침에 자신들을 겸손히 복속시키는 일이다. 와그너와
이 책의 저자들에게, 또한 이런 책의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이런 비성경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굳건히 서 있기를
강하게 요청한다. 그것이 성경을 영감하여 주신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길이며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복속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부디 바라기는 한국
교회와 세게 교회가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에 참으로 순복하여 주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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