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신.천.지'와 '북한'의 놀라운 싱크로율!!

- 박성업 선교사님 (왕국의 역습 18화) -



예수와 하나가 되라!
“저는 주님밖에 바라볼 데가 없어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려는데도 다시 죄에 무너지는 일이 있습니다.

다 죽은 것 같은 혈기를 부리고, 음란한 유혹에 무너지고, 거짓과 탐욕의 죄에 무너집니다. 이때의 죄책감과 좌절감은 엄청납니다.

‘결국 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주님을 바라보아도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죄를 이기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데도 다시 은밀한 죄에 무너지는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세상을 기웃거리며 마귀에게 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세상에 한눈 파는 것이 우리가 죄에 무너지는 시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정말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한눈팔지 말라”는 권면을 받으면 한숨을 내쉽니다. 너무 힘들다고 탄식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탄식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생각,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죄에 무너지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한눈팔지 말라는 것을 힘쓰고 애써서 지켜야 하는 율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직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을 정말 믿으면 세상에 한눈팔아지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눈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눈팔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한눈팔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단 단체에서 돈 100억 원을 주고 오라고 하면 그 제안이 유혹이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이단으로 갈까?” 하면서 이단에 한눈파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아야지’가 아닙니다. 한눈팔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신 것을 믿으면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왕이신 주님과 친밀해지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이 유혹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은밀한 죄에서 이기는 길은 결단이나 회개나 금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육신의 일이니 너무 상심 말고 스스로 학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믿으면 결국 주님이 이기게 해주실 거라고 쿨하게 넘겨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왕이신 주님이 마음에 오신 것이 황홀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날마다 왕이신 주님과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흥분이 되고 감격이 될 때 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은 금욕생활과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왕이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평생을 투자해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왕이신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 왕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눈에 보이듯이 믿어지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말 믿으면 세상에 한눈팔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어도 세상에 한눈팔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였기에 세상에 한눈팔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 주님이 임하신 것이 실재라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세상을 저울질하고 산 것입니다. 주님은 막연하고 세상은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자격이 안 되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정말 믿는 것뿐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답입니다.

아직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분명히 모르겠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막연하다면 안타까워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동안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깨닫게 하셨는데도 순종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즉각 회개하고 순종해가면 됩니다. 오늘도 황홀한 날입니다. 왕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category/theme/b_theme)

성경엔 왜 공룡이 안 나오나요? ? 과학이 심어놓은 관념과 성경의 대결

무신론자 중에는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장에 동요를 하며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지 질문하십니다.

솔직히 저는 왜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성경이 가짜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호랑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코끼리도 등장하지 않죠. 역사속에 존재했던 특정한 동물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왜 성경을 가짜로 만드는 것이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을 설명하는 책이지 백과 사전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듯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것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글을 통해서 여러분이 아! 성경에 공룡이 있구나 그러므로 성경은 믿을만한 책이야! 라는 결론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관점과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며 사람들과 공존했다는 여러가지 객관적인 증거들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를 드려도 어줍잖은 진화론적 고정 관념에 막혀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은 항상 계시지만 부디 관념을 버리시고 증거를 바라보며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은 이 세상에 실존했던 동물입니까? 아니면 전설속의 동물 입니까?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공룡의 존재를 찾기 전에 성경을 신뢰하지 못하는 분들이 어떤 함정에 빠지게 될수 있는지를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을 신뢰하는 많은 분들이 과학과 상충되는 성경 구절들을 신화나 신학적 메세지를 담은 상징으로만 치부합니다. 심지어는 일부 성경 번역본 마저도 현대 과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단어들을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욥기 30:29를 보시겠습니다.

난 이리 떼의 친구, 타조의 벗이로구나. (쉬운 성경)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개역 개정)

나는 용들의 형제요, 올빼미들의 벗이로다. (킹제임스 흠정역)

각 번역본에서 이리 혹은 용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의 원어는 탄닌(?????????) 입니다. 그리고 탄닌이란 단어의 의미는 괴물, 뱀, 용 입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용이 실존했던 동물이 아니라 전설속의 동물이라는 관념을 갖고 이 단어를 이리(혹은 영어로 Jackal)로 번역합니다. 탄닌의 경우에는 탄닌이란 동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 할만한 다른 동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지만 우리가 과학적으로 존재할수 없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동물 역시 등장한다는 것 입니다.

온 블레셋이여! 너를 친 자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고 그의 열매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되리라. <이사야 14:29>

…. 젊은 사자와 늙은 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나오는 땅 곧 고난과 고통의 땅으로 들어가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백성에게로 가리라. <이사야 30:6>

여기에서 불뱀이란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 사라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뱀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불뱀, 그래서 장대에 매달은 불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낫게되는 불뱀과 같은 단어 입니다. 여러분은 날아 다니는 불뱀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화석으로 발견된 적이 있나요? 과학자들에게 뱀이 날아 다녔다고 주장해 보십시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비웃을 것 입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날아다니는 뱀

하지만 저에게는 날아다니는 뱀이 실존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날아 다니는 뱀을 봤던 사람들의 역사 기록 입니다.

첫번째 역사학자 - 헤로도토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사람들은 헤로도토스를 인류 최초의 역사학자로이자 역사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에 집필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내가 방문한 부토라는 도시 가까이에 있는 아라비아에 날개가 달린 커다란 뱀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설명이 불가능 할 만큼 엄청난 양의 뱀의 뼈와 척추를 보았다. 뱀의 형태는 물뱀과 같았고, 다만 깃털이 없는 아마도 박쥐의 것과 비슷한 날개가 있었다. 1  2

그리고 고고학자 R.W.Hutchinson은 헤로도토스의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상하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을 비판하는 논문을 씁니다.3

저는 그의 지적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은 헤로도토스만 남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역과 시대를 넘어서서 다수의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  4  5  6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래서 현대 과학이 날아다니는 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기지만 날아다니는 뱀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날아다니는 뱀을 목격하거나 목격자의 증언을 역사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날아다니는 뱀을 부정하는 과학을 더 신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 기록을 더 신뢰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의 이유로 성경에 기록된 용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독교인들…

성경에는 용에 대한 기록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상징적인 의미 혹은 비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지만 어떤 경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존했던 동물에 대한 묘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들짐승 곧 용들과 올빼미들도 나를 존경하리라. 이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내고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들에게 마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이사야 43:20, 킹제임스 흠정역>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용들 역시 탄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용을 전설 속의 동물로 생각한 번역자들이 원어 그대로를 사용하지 않고 이를 이리나 승냥이 같은 다른 들짐승들로 번역해 버렸습니다.

성경에서 탄닌은 들짐승이기도하고 바다에 살기도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탄닌이 승냥이나 이리 같은 동물이 될 수 없는 결정적 증거는 같은 단어가 바다에 사는 용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리나 승냥이는 바다에 살지 않습니다.

그 날에 주께서 자신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꿰뚫는 뱀 리워야단 곧 구부러진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이사야 27:1 , 킹제임스 흠정역>

그 날이 오면, 여호와께서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큰 칼로 행동이 재빠르고 구불구불한 모양의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실 것이다. (쉬운 성경)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개정 개역)

여기에서 모든 번역본이 용이라고 번역한 단어의 어원 역시 탄닌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여러분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성경은 날아다니는 뱀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용이 실존했던 동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창세기처럼 용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라고 얘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탄닌은 구약에 27번 나옵니다. 왜 전설속의 동물을 구약 성경에만 27번이나 등장시킬까요?  성경 구절속에서 탄닌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들은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동물들과 함께 등장 합니다. 부엉이, 사자 등등…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왜 전설속의 동물들을 실존했던 동물들과 함께 설명하실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용이 실존 했음을 지지하는 역사 기록

그렇다면 성경 외에 용을 묘사한 다른 기록은 없을까요? 놀라울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용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한 글을 링크 합니다.  참고해주시고, 오늘의 글에서는 대표적인 역사 기록 몇 부분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라코렉스 공룡이 용과 얼마나 비슷한가

전설속의 용의 상상도와 화석을 통해 드라코렉스 공룡을 복원한 그림 비교

아일리아누스는 동물의 본성(De Natura Animalium)이란 책에 아래의 기록을 남깁니다. 동물의 본성은 오늘 날로 얘기하면 동물 백과사전 같은 책이며 거의 대부분을 구전이 아닌 직접 관찰한 내용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글 입니다. 꾸며낸 이야기나 재미를 위한 글이 아닌 것이죠.

알렉산더가 인도의 일부 지역에 혼란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을 차지 했을 때, 그는 동굴에 살면서 인도 인들에 성스럽게 여겨지며 커다란 신적 경외를 받는 거대한 뱀들과 마주 쳤다. 이에 따라 인도인들은 아무도 그 거대한 뱀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청원했으며, 알렉산더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군대가 동굴을 지나가며 소리를 내자, 그 거대한 뱀이 감지했고. (그 동물은 동물들 중에서 가장 예민한 귀와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쉭쉭 소리를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자 모두 겁에 질리고 당황했다. 보고에 따르면 몸 전체가 보이지도 않고 머리만 내밀었는데도 32 m 가량 되었고, 그것의 눈은 커다랗고 둥근 마케도니아 방패의 크기 였다. 7 

여러분의 지식 내에서 지구 상에 존재했던 동물 중에 머리가 32m 가량 되고 눈이 커다란 방패 크기였던 동물이 무엇입니까? 아일리아누스는 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룡이 이 설명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탄닌이란 히브리어를 공룡으로 해석해도 모든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리나 승냥이는 바다에 살지 않지만 공룡은 바다에 사는 수룡도 있고 하늘에 날아 다니는 익룡도 있기 때문입니다. 탄닌은 들짐승이기도하고 바다에 살기도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뱀에 다리가 있었나요? 우주에 시작이 있었나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의 다리를 없애셔서 배로 기어다니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있나요? 네! 2015년 4개의 다리를 가진 뱀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8  그렇다면 여러분은 뱀에 다리가 있는 화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믿지 않고 여러분의 눈으로 증거를 보아야만 성경을 신뢰하시겠습니까?

중세시대 이후 인간의 지성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에 충만해 또 다른 지식의 바벨탑을 짓기 시작했고, 그 바벨탑은 지금도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든 성경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지식주의에 기독교인들이 동조하며 성경 대신 인간의 지식과 자기의 이해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실수 밖에 없다는 증거들을 찾고, 성경이 정확하다는 증거들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에 시작이 없이 영원하다고 했지만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모두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지만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고 했지만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널리고 널리고 널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공룡

성경에는 공룡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룡을 묘사하는 장면은 나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만들 때에 함께 만든 베헤못을 보라.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느니라.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의 배꼽에 있느니라. 그가 자기 꼬리를 백향목같이 움직이며 그의 돌들의 힘줄은 서로 얽혀 있고 그의 뼈들은 강한 놋 덩이 같으며 그의 뼈들은 쇠막대기 같으니라.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거니와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욥기 40:15~19>

베헤못은 과연 어떤 동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칼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공룡이 사람과 같이 살지 않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베헤못을 하마나 코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마나 코끼리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큼 웅장한 백향목 같은 꼬리를 갖고 있나요? 아닙니다. 진화론적인 모든 관념을 버리고 베헤못의 묘사를 읽어보면, 이 동물은 브라키오사우르스 같은 초식 공룡과 가장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진화론자들이 이를 부정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공룡이 사람과 함께 살지 않았다는 진화론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미 인간이 목격한 용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거의 20개 이상 읽어 보셨습니다. 이는 시대와 인종과 장소를 떠나 일관성을 가진 독립적인 기록들 입니다. 그리고 공룡이 멸종한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들은 역사적 기록에만 있지 않습니다.

2억년 전 공룡 단백질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공룡의 연부 조직 - 젊은 지구의 증거

과학적으로 100만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야 하는 연부 조직이 공룡 화석에서 발견됩니다. 과학적으로 이 공룡 화석은 만들어진지 100만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과학과 객관적인 증거를 추종하는 분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결과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갖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연구와 실험 등의 객관적인 데이터에 따라 판단해야하지 관념을 가지고 해서는 안됩니다.

최근 논문에서 과학자들은 2억년 된 공룡의 화석에서 단백질을 검출했음을 발표 9  합니다. 지난 2008년 매리 슈바이쳐 박사가 공룡 화석에서 단백질과 일부 아미노산 서열을 발견했을때에도 과학자들은 단백질이 100만년 이상 보존 될 수 없는데 수천만년 이상 남아 있을수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10 그런데 그 보다 2.5배가 더 긴 2억년 동안 단백질이 남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고 경계하는 알루미늄 캔이나 비닐도 100만년이면 분해가 됩니다. 그런데 단백질이 그 보다 200배 이상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과학적이지 않음을 넘어 비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실제로 어떠한 과학적 연구 결과도 단백질이 100만년 이상 보존 될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명백한 관찰 결과가 있지만 그 어떤 진화론자도 공룡의 멸종이 100만년 이상 되지 않았을거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증거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때문에 신뢰할만 하다는 그들의 ‘과학’이라는 학문이 실제로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관념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이라는 관념에 치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기까지 이릅니다.

성경에는 왜 공룡이 나오지 않나요?

성경에 왜 공룡이 나오지 않느냐는 질문은 무지에 의한 잘못된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아도 성경을 부정하지 않으며, 두번째로 성경에 공룡은 등장합니다. 제가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날아다니는 불뱀이 있었다고 믿으십니까? 수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답을 망설이시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거북선이 실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거북선을 본적이 없으며 거북선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거북선의 실존했다고 여기는 유일한 증거는 역사 기록입니다.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도 있고 일반 역사기록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선의 실존 여부보다 날아다니는 뱀의 실존 여부가 훨씬 더 확실한 것 아닌가요?

여러분들이 날아다니는 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그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다리가 달린 뱀의 존재가 2015년에야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2014년까지는 다리 달린 뱀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2015년에 뿅 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다리 달린 뱀은 이 땅에 존재했었는데 인간이 무지해서 그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던 것 입니다.

교과서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주입되는  ‘역사 과학’, ‘진화론’,  ‘오랜 연대’ 등은 자세히 파고들면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거니와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과학이 아닌 진화론자들의 신앙일뿐입니다. 진리대신 진리가 아닌것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공룡과 성경의 관계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질문은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는데 왜 여러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http://fingerofthomas.org/%EC%84%B1%EA%B2%BD%EC%97%90%EB%8A%94-%EC%99%9C-%EA%B3%B5%EB%A3%A1%EC%9D%B4-%EC%95%88-%EB%82%98%EC%98%A4%EB%82%98%EC%9A%94/

서울 교대 여학생의 호소!

“더이상 그들의 외침을 모른 척해선...”





2012년 8월 15일.
이 날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북한 동포들의 해방을 다짐하며,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들의
자유와 인권과 생명을 보존할 것을
결의한 날이다.




그리고 5년 후
3.1절 '다시, 독립정신' 집회에서
한 친구가 북한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고
북한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고 싶다며

나에게 찾아왔다.

그렇게 하나님의 같은 비전 아래 우리는 동료가 되었고
예수님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매주 함께 기도하며 삶을 나누고 있다.

2017년 4월 21일, 정부서울청사 앞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이 친구가
교회와 민족을 향한 하늘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쏟아냈다.

교회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쏟아내는 통계 속에서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시는 비밀병기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비전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며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글쓴이: 정우민 전도사님

동성애 반대는 차별이 아니다

ae7003e241cb7d48a540f6fc61c153ab_1496834020_16.jpg매년 이맘때쯤이면 소위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 퀴어(queer)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때 지칭하는 표현으로, 퀴어문화축제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자는 캠페인이다. 지난 17년간 계속되어온 이 행사는 올해 7월에도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될 예정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에서 터부시 되던 동성애가 각종 미디어와 SNS 등의 영향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졌고, 현 시대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조차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는 왜 동성애를 적극 반대해야 하는지, 동성애의 폐단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 동성애는 기독교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반(反)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 둘이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창 2:24).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동성 간에도 성관계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동성 간의 결혼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며, 분명한 죄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이러한 죄의 결과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롯에 집에 방문한 두 천사와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그 땅에 심판을 내리셨다(창 19장).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동성애에 대해 경계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서도 동성애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다. 성관계는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표현 방식이며, 인간이 자신의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성스러운 행위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즐길 거리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동성 간에도 성관계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동성 간의 성관계이다. 이 행사에서 동성애자들은 반라의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성행위를 묘사하는듯한 퍼포먼스를 시행하기도 했다. 성관계를 하나의 즐길 거리로 전락시키는 문화는 결코 옳지 않다. 이는 정상적인 가정을 깨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며, 특히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인간의 출산을 가로막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보존을 위해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다.

 

셋째,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인간의 건강 및 보건에 치명적인 일이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HIV(AIDS의 원인이 되는 균) 감염인의 98%가 성관계를 통해 감염이 되었으며, 또한 2015년 기준으로 전체 감염인 중 약 92.7%가 남성이라고 한다. 유럽과 미국 등전 세계적으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주된 원인임을 밝혔는데, 우리나라 역시 동성애가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HIV 감염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다. 2015년 한 해 동안 신규 HIV 감염 환자가 1,152명이 늘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라도 동성 간의 성관계와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여러 기독교 단체와 시민 단체들의 반대로 인해 아직까지 퀴어문화축제의 장소 사용이 승인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더욱 커져가는 동성애 합법화 요구에 있어서 한국교회 역시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 반대는 차별이 아니며, 기독교 진리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건전하고 올바른 성 정체성 및 성 의식이 자리 잡을 때까지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정죄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긍휼과 관용의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성경적이며 정상적인 관계 회복이 일어나며, 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상식적이고 용인될 수 있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영적인 일들은 오직 영적인 눈으로 바라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일을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답이 없다는 결론만 나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반도의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남한교회의 회개와 복음의 빛이 다시 한번 회복되는 것 뿐이다. 다른 길을 찾으면 안 된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시다. 남북관계에 애초에 없는 답을 찾으려고 하니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세상은 결단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의 실상은 영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한반도의 분단은 애초부터 영적인 것이었다.

초대 제헌국회 때부터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며 기도로 건국을 진행했던 나라와, 하나님이 계셔야 할 모든 자리에 김일성을 앉혀버린 이단집단의 나라의 건국사를 이해해야 한다. 주체사상은 종교이며, 기독교를 대적하는 최강의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바로 알리고 전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들이 이런 한반도의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고 남북 문제를 어떠한 정치적 움직임 가운데, 그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니 답이 안 나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허공을 치는 기도제목만이 돌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은 남한과 북한의 영적인 주인이 각각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건국사를 제대로 알아야 기도의 방향이 명확히 설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며 건국했던 대한민국 체제와, 김일성을 우상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세웠던 북한의 독재체제는 본질적으로 공존이라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통일은, 남한체제가 망하든지, 북한 주체사상 체제가 망하든지 둘 중 하나가 망해야만 가능한 영적인 원리이다. 남한교회가 회개하고 복음의 빛이 회복되면 북한의 우상정권 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게 된다. 오직 그것만이 통일의 열쇠다. 오직 예수만이 그 길이며, 그 진리며, 그 생명이다. 다른 길을 찾지 말라.




출처: 이신일님 페이스북

누가 나를 정의할 수 있나?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갈 5:17)


성경은 창조로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으로 정의하였고, ‘남성’과 ‘여성’으로 정의하였고,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 정의하였다.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정의가 아니다. 오직 창조자의 계획과 예정과 구속 안에서 작정된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와 소통하며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나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사단의 유혹이라 할지라도 그 결정은 스스로가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죄인으로 정의되었고 이 정의는 하늘의 천사도, 인간 스스로도 바꿀 수 없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여 "나는 게이다." "나는 젠더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의 정의는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작정된 틀 안에서 스스로 자기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정의한다고 하나님의 정의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내린 정의에 대한 책임은 갖게 된다.


다시 말하여 누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는 ‘탈동성애자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그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보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최근 들어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향에 대하여 말한다. ‘내 아들은 아버지의 성향을 많이 닮았다. 나는 게이 성향으로 태어났다’라는 말을 한다.


성향이란 언어적 정의는 ‘새로운 상황에 나타나는 자신의 태도와 판단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향이란 어떤 상황에 적응되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나는 사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나는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나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라는 말은 동성애 유혹과 경험에 적응되었고 선택적 결정을 하였다는 말이다.


만약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김정은 체제에서 태어나 선택의 여지없이 주체사상에 적응되어 북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 상황이 싫어서 남한으로 탈북하였다면 그는 한국의 헌법과 생활관습과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적응은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민이 가져야할 많은 것들을 배우고 공유하여 적응해 나가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 술과 마약, 도박, 동성애에 경험이 있어 그 매력에 동의하고 습관에 빠져 그 생활이 적응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벗어나오기 쉽지 않다. 이미 죄인으로 정의된 정체성에 스스로 성경에 정죄된 인간의 쾌락을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의 정의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의인으로 정의되었다면 그는 그가 선택한 의인의 정의가 추구하는 의인의 삶에 새롭게 적응하여야 한다. 그가 설혹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았다 해도 그는 옛생활에 적응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활로의 적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성의 역사 속에서 옛삶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을 진리의 영이 하는 것이다. 이 때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의 의지로는 죄인의 육체의 속성 속에 역사하는 죄의 유혹들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건한 의지적 믿음이 필요하며, 이 믿음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진리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논한다. 정체성(identity)이란 사전적 정의는 [사물 본디의 형체가 갖고 있는 성격을 말한다. 여기서 ‘identity’란 단어가 ‘확인하다(identify)’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정체성이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한 확인과 증명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라고 기술 되었다.


그러면 누가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 뿐이다. 그러므로 성향이나 정체성은 사람이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미 창조자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정의되고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남녀 동성애자들을 정의하여‘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이라’기록하였다(롬 1:26,27).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난 새 사람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 이요나 목사

아담과 하와의 타락 <61>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1: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들이 범한 그 죄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실 목적을 가지시고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기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들

본 항의 교훈은 우리의 시조들이 범죄한 사실과 그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것으로 크게 네 가지 내용들이 관찰이 됩니다.

우선 첫 번째와 관련한 것으로 (1)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먹도록 허용이 되지 않은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것이며, (2) 사탄이 이들을 유혹하여 먹도록 하였다는 것이고, (3) 그 결과 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두 번째 사실과 관련한 것으로 (4)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허용이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항은 두 문장으로 된 간단한 진술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들을 시작케 한 이유들과 그 일들의 성질 그리고 장래의 결국을 설명하는 매우 심오한 성경 계시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부터 차례로 네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다 먹도록 허락을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유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명령을 하셨을까요?(2:17) 이 질문의 답은 우리의 시조들이 임의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확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잊은 듯이 살아갑니다. 마치 자신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행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금할 어떤 권위도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금지된 열매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합니다. 바로 여기서 피조물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떠한 권위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금지된 열매는 사람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기며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발은 오히려 금지된 열매를 주신 까닭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한 것임을 뚜렷이 드러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자신의 욕망의 성취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일치하는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자유와 권한을 주시면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아야 함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2. 사탄의 유혹에 빠진 하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 지는 본 항의 두 번째 내용인 사탄의 유혹의 과정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사탄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을 사용하여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하와와 대화를 열어가면서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시험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을 합니다.

사탄 곧 마귀는 용 또는 뱀(20:2)이라 불리며, “온 천하를 꾀는 자이며(12:9), 또한 거짓의 아비이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8:44). 이 마귀의 존재가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여 진리를 거슬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죄케 하여 저와 더불어 영원한 불못의 죽음으로 치달아 가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자라는 사실입니다(20:10).

마귀가 하와에게 다가와 시험한 유혹의 속삭임은 이러하였습니다. 먼저 간교한 의심을 불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이 질문은 순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며, 그 의도는 결코 선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나?”

하와는 이러한 마귀의 수작에 넘어가 과연 묘한 불만을 드러내게 됩니다. “...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3). 하나님께서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을 뿐인데, 여기에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 자신이 이미 최소한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의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바로 불만과 저항의 심리로 이어져 갈 수 있는 징검돌이 놓인 셈입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금지된 명령과 관련하여 의문의 심리를 불어 넣은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진실성과 선하심을 의심케 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유혹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

마귀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와는 마귀의 말이 진실한 것인지 아니면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미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된 하와는 마귀의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거짓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셨을까? 마귀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은근히 이끌어 갑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3. 하나님께 범죄한 인류

결국 하와는 아담과 더불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 항이 교훈하는 세 번째 내용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명하신 까닭이 결국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마귀의 말을 믿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며, 또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거짓된 위협을 더하신 것이므로, 더 이상 금지 명령 때문에 억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짓에 기초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마귀의 속임수였으며 간교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녕 죽음에 이르는 심판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며, 또한 선악을 스스로 분별할 권리를 주장하는 인본주의는 피조물의 본분을 넘어서 방종의 삶을 살아 결국 멸망케 되는 불순종을 낳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되므로 이를 금하신 하나님은 실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마귀의 간교한 시험은 하와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하였으며 결국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지 않았다면 시험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인간이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험을 받는 일도,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금지의 열매를 둔 것 자체에 대하여 반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며,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러한 반발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존재 자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의 증상의 반영일 뿐입니다. 금지의 열매를 따먹는 마음과 의지 그리고 행위는 결국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것과 금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의지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할 죄악입니다.

4. 은혜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끝으로 본 항은 이러한 우리의 시조의 범죄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쁘게 허용하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순전하게 창조된 부패한 본성이 없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주어지는 답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며 또한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강요하여 행하여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불순종을 강요하였다면 불순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따라 스스로 원하여 불순종을 선택한 것이기에 모든 불순종에 대한 죄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관련하여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할 일은 없습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순전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하고 죄 아래에 놓이게 될 줄을 아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던 본래의 상태는 순전하다 할지라도, 이들의 상태는 유한한 존재의 가변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전한 원시 상태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부으심으로 이들의 가변성으로 인한 죄의 발생을 막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의 계획 가운데 이들의 불순종의 사건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의 성질을 드러내시고 죄의 책임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시고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자비로 사는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마침내 이루어질 때, 이 모든 일들은 합력하여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고, 의인에게는 긍휼의 구원으로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여 선택한 의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으셔서 아무도 다시는 죄의 상태로 변화되어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는 영광의 상태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8:30, 22:14-15).

 
http://rpress.or.kr/xe/352354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1%만 다르다?


실제로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는 얼마나 비슷할까?


주로 인용되는 숫자인 염기서열의 99%가 유사하고

나머지 1%만 다르다고 알려졌다.


이것을 근거로 공통조상이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다.

전체를 비교대상으로 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편향적이고 부분적인 데이터를 뽑아낸 것이다.


우선 침팬지의 유전체(genome)

사람의 것보다 12%가 더 크기 때문에 12% 차이가 난다.


침팬지는 48개의 염색체(chromosomes),

그리고 사람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인간 유전체를 모형(template)으로 사용하여 남는 부분이나

비정렬 DNA나 결손(DNA GAP), 크기들은 삭제하고 일부분만 비교한 것이다.  


유전체의 많은 영역에서 주된 DNA 서열의 재배열이 있으며

이것은 10-20%의 불일치성을 가져온다.


전체를 고려하면 유사성은 비교 기준에 따라

81%, 88% 다양한 결과가 나온다.


실제는 12%에서 19%까지 다르다는 결과이며

이는 30억 염기서열 중 3.6억개에서 5.7억개까지 다른 것이다.


이런 차이는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유사하다 하거나 

공통조상을 가졌다거나 사촌지간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유사성 비율에 관계없이 아래 비교표를 보면

인간과 침팬지는 너무 다른 생물체다.


구분 

 인간

침팬지 

 유사성

 DNA의 유사성

염색체 46개

염색체 48개

81~88%

 보행

직립보행 

네발 보행 

×

 인두의 구조

음식과 공기의 통로가 한 개

 음식의 통로와 공기의 통로가 분리

×

 IQ

120 

70 

△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으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말을 하지 못함 

×

 후두의 구조

후두 하강으로 다양한 소리 가능

해부학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구조 

×

 팔과 다리의 길이 비율

손과 발의 길이가 균형적임

 짧은 다리와 긴 팔

×

 골반의 크기

좌우로 넓고 위아래로 짧은 구조

 좌우로 좁고 위아래로 긴 구조

×

 대퇴골

(고관절~무릎관절)

안쪽으로 각이 형성

(뒤뚱뒤뚱 걷지 않게 해준다)

 바깥쪽으로 각이 형성

× 

 척추중립, 요추전만

척추가 휘어진 상태

 네발동물에서는 불필요

×

 보행의 효율성

발목관절

고관절

사람보다 3/4 효율성이 떨어짐

×

 도덕성

도덕성이 내재되어 있다 

동물에게는 도덕성이 없다 

×

 피부

털이 없다 

털이 있다 

×

 문명

생물중 유일하게 문명을 만들었다 

없다 

×



인간의 염색체는 합성되었나?


인간의 염색체는 23쌍이고 침팬지의 염색체는 24쌍이다.

혹자는 인간의 2번 염색체와 침팬지의 12번,13번 염색체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공통조상의 12,13번 염색체가 2번으로 합쳐졌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합쳐진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염색체 끝에 있는 텔로미어가 결합을 했다는 증거라는데

오히려 텔로미어의 역할은 마치 골무처럼 결합을 방지하는 것이다.


모든 염색체에는 한개의 센트로미어를 가지고 있는데

두 개의 염색체가 결합되었다면 텔로미어가 2개이고  센트로미어도 2개가 있다.


문제는 2개의 텔로미어와 2개의 센트로미어는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퇴화되었다고 주장하며

비활성화된 것을 찾아보지만 이것도 발견하기 어렵다.


하나의 거짓말을 위해 두번째 거짓말도 해야 한다.


실상이 이렇지만,

아직도 인간과 침팬지의 DNA 유사성이 99%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윈의 진화론에 평생 회의론자였다.


그는 생물의 다양성에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항상 다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의 진화이론은 이 모든 다양한 종들을 설명할 수 없으며

독립적인 종으로 생물의 다양성을 진화할 수 없다 

마침내 그들은 진화가 출산 과정을 통해

갑자기 다양한 종들이 튀어 나왔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http://blog.naver.com/acoloje/220789207449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8개교단 “목사의 동성애 옹호, 이단문제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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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개교단 이대위가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조사에 공조하기로 했다.     © 뉴스파워 범영수 

 

8개교단 이대위가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의 동성애 옹호 활동 관련 이단성 조사에 협력하기로 했다.

 

한국교회 8개교단 이단대책위원장 연석회의(기감, 기성, 기침, 대신, 통합, 합동, 합신, 고신)는 27일 대신총회회관 회의실에서 모임을 갖고 임보라 목사의 동성애 옹호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유하고 이단성 연구에 공조하기로 했다.

 

최근 임보라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진용식 목사)로부터 이단성 조사 공문을 받은 바 있다.

 

임보라 목사는 퀴어축제에 참가하는 등 동성애 옹호 활동을 펼친 바 있으며, 최근에는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개교단 이대위 측은 “어디 소속이든 우리 교단의 성도, 목회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단성 연구를 하는 것”이라며 “목사가 교리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진행해 나가는 상황이기에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은 이단문제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예장합동 이대위원장 진용식 목사는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 뿐 아니라 임보라 목사가 그동안 동성애 옹호 활동을 해온 것 자체가 개신교 목사로서 이단문제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진 목사는 “임보라 목사가 조사에 응하지 않더라도 그의 동성애 옹호 활동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며 이단성 조사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8개교단 이대위는 단사상대책위원회 위원장 허태선 목사가 단월드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오는 7월 3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 8개 교단 이대위 회의는 7월 중 열릴 예정이다.

 

범영수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 종교다원론자 변선환에 대하여 ◈◈◈ 대 전 신 학 대 학 교 선교학개론 김주덕 교수님

3학년 200812027 서성범. 4학년 200711015 송찬섭

 

 

◆변선환의 신학적 노선=============================================

변선환을 이야기 할 때 자유주의 신학자이며, 종교다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한 세기가 지났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동안 불교, 유교, 전통종교 등과 자주 갈등을 빚어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간 이 갈등의 와중에서 특히 1980년대에 신학자들 간에 보수와 진보 혹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갈라져 신학적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그 중 변선환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 했던 인물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범주 속에 종교다원주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구원은 교회 밖에서도 가능하다." 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이론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을 쉽게 하고자 천주교 원로인 정양모 신부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 '오직 예수' 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너무 존경스러워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옆을 잠깐만 돌아보면 공자님도, 부처님도, 마호메트도 있다. 하느님의 신비나, 불교의 공이나 진여는 걷잡을 수 없는 세계 아니겠는가.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많다. 부처님 코스, 공자님 코스, 무하마드 코스가 있다. 나는 예수 코스를 따르고 있다. 다른 코스를 모르다 보니 예수 코스만 너무너무 좋다. 각자 자기 코스 밖에 안보이니까 오직 예수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선 그렇게 하기가 아주 좋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불자들도 만나고, 유생들도 만나야 하니 생각이 넓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참삶, 하느님이고 진여이고, 공이다. 참삶에 이르는 길은 예수다. 그게 예수 코스다."

종교다원주의는 상생과 공존을 주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하여 변선환은 1980년대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가 아닌 신 중심",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부인한 것으로 당시 감신대 학장으로 재직 중인 신학자인 그에 주장은 기독교 뿐 아니라 종교계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변선환의 이 같은 주장으로 기독교계의 반응=============================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해 기독교의 본질을 부인 했다."며 당시 감신대 학장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형을 내렸습니다. 이는 중세의 '파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인의 자격을 빼앗고 당사자를 감리교단 밖으로 내보내는 형벌이었습니다.

보수주의 목사들이 주도한, 감리교단의 '한국형 종교 재판'은 한국개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재판 결과에 반발하는 학생들과 상당수 목사들로 감신대는 장기간 분규에 휩싸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변선환 학장은 최후진술에서 "흑백논리만이 횡행하는 감리교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교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감리교의 세계적 추세"라고 역설을 하였습니다. 또한 "타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논리를 한국 감리교는 그를 '사탄의 종'이라며 파면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변선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주장====================================

변선환 사후 10년이 지나서 그에 제자들은 추모 논문집[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대한기독교서회-에서 그를 복원시키려 애를 씁니다. 그 제자들은 스승을 이렇게 옹호 합니다.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는 '적'이 필요했다." 라고 말입니다.

'다름이 곧 틀림이 되는 차이'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는 모든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 또한 '적'이 필요했다. 또한 '우리'와 '저들'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자 역시 '사탄'이 되어야 했다. 변선환은 그렇게 '사탄'이 되고 말았다.

당시 금란 교회 김홍도 목사는 매주 발행하는 (불기둥)이라는 팸플릿에서 "한때 수천 명씩 모이던 구라파 교회들이 관광 장소로 전락한 것은 수십 년 전부터 있었던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사탄 때문" 이라며 합리주의, 사회복음 운동, 실존주의 철학, 행동주의 신학, 과학적 방법 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공산주의자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가면 좋으련만 가지 않고 국가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나 기독교의 탈을 쓴 무신론자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파괴하려고 드는 것은 사탄의 간계"라며 이들이 교회 밖으로 나간다면 학문의 자유를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든 개의치 않는다"라고 했다. 그의 논리 안에서 교인의 숫자는 사탄의 득세와 반비례하며, 교회 밖의 '적'은 오히려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교회 안의 이질적 목소리는 용납 못한다는 폐쇄성과 극단적인 이분법이 가득했다. 그러나 변선환의 제자들은 "복종보다 합리적 사고를, 개인 구원보다는 사회복음을, 내면적 초월성보다 사회참여를 중시한다면 보수교회들은 이를 여지없이 교회를 파괴시키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으로 딱지붙이며 대중을 훈련시켰다"며 "변선환을 정확히 대립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해소하려고 했다"라고 설명하며 옹호합니다. 또한 "다른 종교에도 진리는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2000년간 배타적 선교 정책을 고수해 온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과제였을 것이며, 더욱이 "교회 안에서만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독점중계권을 쥐고 있었던 근본주의 목사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라고 변선환의 신학적 논리를 옹호합니다.

 

 

◆변선환이 신학을 하게 된 동기와 누구의 영향으로 신학적 논리를 정립하였는가? 그는 1928년 진남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사인 할아버지 밑에서 서당식 공부를 하였으며, 그 배움을 통하여 동양적 심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시절에 동서 4대 성인의 인물전을 보고 인간 삶의 생애의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것은 18세 때 신석구 목사님을 만나서 부터라고 합니다. 신석구 목사는 보수적 신앙인으로 불교인들과의 대화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분으로 이후 변선환에게는 토착화 신학에로의 여정, 종교해방신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학문적 자유를 지켜 내려는 일관된 삶의 태도 등의 논리를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948년 평양성화신학교에 입학하고, 후에 6.25발발로 단신으로 남하하여 1951년 부산 감리교회를 다시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을 졸업한 뒤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을 입학하여 바르트 신학을 전공한 박봉랑교수와 틸리히를 강의하는 서남동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변선환은 "계시신학이 간과하고 있는 종교와 문화로부터의 계시신학 그 자체가 도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선환의 문제의식은 실존주의 신학사조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깊이가 있게 되고 후일 웨슬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단초가 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미국 뜨루대학 유학길에 오르며, 바르트 신학과 결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볼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론적 신학을 칼 마이켈슨 교수로부터 배우게

되고, 신의 초월성을 신학의 절대지평으로 삼았던 바르트의 계시 신학과는 달리 그리고 또한 존재자체에 큰 비중을 둔 틸리히의 상징론이 그리스도 계시를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역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학의 재구성을 시도하는 마이켈슨의 작업에 매료되어 빠지게 됩니다.

 

◆변선환의 신학 사상==============================================

?[실존적 기독론] 변선환에 신학은 토착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 토착화 신학에서는 신학적 관점이 서구적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즉, 동양의 세계를 존재 신비주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인간의 자아개념이 함몰된 역사망각의 실체로 규정하고 그것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 속에 서구적 신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낫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이 다른 종교들 속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있다는 신중심주의 신학 내지는 종교다원주의에로의 획기적인 전환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신학의 과제를 제시 합니다. 첫째, 한국적 신학은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으로부터 벗어야 한다. 둘째, 한국적 신학이 타파해야 할 우상을 교회중심주의라고 보았다. 셋째, 난공불락으로 알았던 기독교의 절대성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유학자 유승국 교수,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 강원용. 김홍도 목사, 카톨릭 토착화 신학자 심상태 신부 등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성과 민중성(가난)을 놓치면 아시아의 신학일 수 없다면서 아시아인의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토착화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변선환의 웨슬리 이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는 우선적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변선환은 웨슬리 신학을 이해합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이전에 살던 사람들조차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 밖으로 내 버려진 사람이 없다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주목을 합니다. 선행은총론이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롭고도 현실적인 가능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 양심, 이성 등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란 무엇인지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로 행할 수 있습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다는 웨슬리의 보편적 인간론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휴머니스트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들과의 열려진 대화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변선환의 기독론, 구원론] 변선환은 기독론과 구원론을 현실에서 다루려 합니다. 종교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선교의 이상은 철저하게 각 개인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실존적 자각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가 바라보는 전통적인 선교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즉, 선교가 개종으로 일어나서는 안되며 사실 개종을 통해서 인류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뭉치게 된다는 이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변선환은 기독론을 상징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의 기독론의 전개 방법은 기존의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론을 그 시대와 역사의 한계로 '상황화'시키고 정통 기독론을 상대화 시키는 것을 통하여 한국 고유의 기독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론이 형성되어 왔을 때 가졌던 문화의 숨어있는 해석학적 기능과 같은 동양적 기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변선환은 기독론의 특성은 현재 역사적 기독교의 중심인 전통 기독론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양적 기독론을 문학작품으로 여기려는 그의 미학적 태도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변선환의 신학적 뿌리인 종교다원주의]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예수를 주장하기보다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힌두교의 신학화를 꾀한 파니카는 힌두교의 이쉬바라를 절대자 브라만의 계시자로 보는 동시에 이를 힌두교안의 감추어진 무명의 그리스도로 봅니다. 힌두교의 이쉬바라가 보편적 로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선환은 이러한 종교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파니카가 힌두교가 기독교의 예비적 단계로 보고 힌두교가 기독교에서 완성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을 비판하였습니다. 변선환은 기독교 신학 내에 부정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듯이 힌두교 자체에도 부정적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선환을 보는 나의 견해==========================================

변선환의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토착화 신학은 이단 사상이라고 하여 종교 재판에서 기소를 받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 같은 결과를 반박하며, 자신의 신학이 지닌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이나 독일 철학을 사용하여 만든 서구 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동양 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이유를 본인은 전혀 알 길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을 아시아의 심성에 울림 하는 아시아 종교나 아시아 혁명의 새 언어를 가지고 설명하는 우리 아시아 신학을 개발할 때, 아시아 교회는 독립 신학의 바벨론 포수에서 벗어나서 비서구화 된 아시아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찾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초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선환은 서구 신학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점차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갔습니다. 국내 신학교에서 서구 신학을 소개받은 그는 미국, 스위스 등으로 유학하면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시아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와의 대화에 주력하다가 1980년대 이르러 다른 종교와의 개방과 대화를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구원은 뒤로한 채 마지막 한사람까지 지옥에 내보낸 뒤 가장 마지막에 지옥문을 나서겠다는 불교의 지장보살의 서원을 들어 자신과 타자, 기독교와 타 종교, 선과 악 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다른 쪽을 지옥으로 내쳐버리는 기독교의 한계에 절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선환은 당시의 기독교의 모난 부분의 현실을 보고, 잘못 된 부분을 종교다원주의와 토속화 신학으로 해결 방법으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변선환에 문제를 바로 보고 시정하여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잘못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변선환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한 주장으로 18살 때부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유명한 미국의 신학교를 유학한 사람으로 말씀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없던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때는 많은 어려움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에 근본을 잃어버리고 포교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현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 또한 이 같은 과제를 앉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고 하였습니다. 보통 지혜롭지 않고서는 우리가 복음에 근본을 잃어버리고 사탄에 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하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근본을 버리는 그런 신학과 전도, 예배, 기도 등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불기둥(Pillar of Fire)
|
글쓴이 : 신선| 원글보기

하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랑’이 된다!

나서지 말고 그분이 쓰시는 대로 다 맡기고 기다려라!


주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간증하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의 간증이 되는 삶, 얼마나 멋진 삶인가!

목소리를 거의 잃어버린 불굴의 예배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당신과 함께 해오셨다.

심지어 당신이 메마른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당신의 인생이라는 연대표를 이용해

매력적인 이야기를 쓰시면서 늘 함께 해오셨다.

동성애자 퍼레이드와 교회, 그리고 예수님






신촌거리에서 동성애자들이 퍼레이드를 했다.


그분들을 반대하는 보수기독교인들에 맞서

그분들이 내건 구호를 보았다.


"예수님은 누구나 사랑하신다.

동성애를 싫어하는 자들마저 사랑하신다."

(Jesus loves everyone, even homophobes.)


"사랑은 미움을 정복한다."

(love conquers hate)


정말, 예수님은 동성애자들도 사랑하시는가?


물론이다.

예수님은 동성애자들도 사랑하신다.


살인자였던 바울도 사랑하셨고,

거짓말쟁이였던 베드로도 사랑하셨고,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도,

그리고 나 같은 썩은 죄인도 사랑하신다.


동성애자인 당신도 사랑하신다.

그렇다.

주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신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하지만, 그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거리로 나올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살인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살인 축제를 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거짓말 하는 자, 간음한 자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거짓말 잘하기 대회나,

간음 축제를 벌이는 경우를 보았는가?


그것은 괴악한 일이다.


"사랑은 미움을 정복한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랑도,

그 어떤 미움도 정복하는가?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이든, 동성애자가 아니든,

똑같이 깨달아야 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인지,

무엇에 대한 미움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또 반드시 미워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폐암에 걸린 사람이, 술 담배를 사랑하고,

그런 사랑이 암을 미워하는 그의 미움을 정복한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무조건

'어떤 사랑이든 어떤 미움도 정복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말이다.


내가 암을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암이 정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동성애를 왜곡된 사랑, 뒤바뀐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의사이신 하나님을 앎으로,

그분에게 고침받기를 그분이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동성애를 치유하시기 원하신다.


그렇다.

그분의 사랑은,

옳은 것을 싫어하는 당신의 미움을 정복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 치유되기를,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교회는 이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때이다.


교회는 과연 주님처럼, 동성애자들을 사랑하고,

동성애를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으로 '잘못된 미움'을 정복할 수 있을까?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인 예수님...


이제 이 땅의 교회는

얼마나 이런 예수님을 얼마나 닮을 수 있을지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출처: 채영삼 목사님 페이스북

'뉴스앤조이' 기독교 소멸이 목표?



아직까지도 뉴스앤조이를 위시한 교회파괴 야합세력이 진짜 교회개혁세력이라고 철저히 미혹 당해 계십니까? 스스로 찾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1. 관세음보살 성령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설파


뉴스앤조이는 지금까지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다루면서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보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동성애에 호의적인 토론회가 열릴 경우 현장의 소식들을 생중계하듯이 빠짐없이 전했고, 기사 중에는 제목 자체도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축복할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찬성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시각전환을 꾀했다.
    
특히 동성애와 관련한 기사 중에는 대표적인 동성애 반대 성경구절인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로마서 1:27(바울의 권면) 등에 대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동성애’에 대해 반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들을 일방적으로 다루면서, 결국 “동성애를 죄라고 표현한 구절은 성경에 없다”는 주장을 대부분 기사의 결론부에 내놓고 있다.
    
    

- [인터뷰] 진정한 소수자로 살고 싶다. 최초 레즈비언 후보의 소수자 향한 외침
 
-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무조건 축복할 일"
 
- 소돔이 멸망한 진짜 이유
 
정죄 일변도의 동성애 논의는 소돔의 죄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어
 
- 현경 교수 '기독교 안의 동성애' 공개강연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입을 떼다'

    
    
뉴스앤조이의 기사 중에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관용적인 입장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 인터뷰나 그들의 위기를 적극 변호하고 나서는 보도들에서 이러한 자세들을 볼 수 있다.
    
<‘창조적 신학자’와 ‘마녀’ 사이에서>라는 기사에서는 유니온 신학대 현경 교수와의 인터뷰를 길게 보도하면서 기독교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싣기도 했다.
    
그는 아시아 여성이 보는 성령의 얼굴로 ‘관세음보살’을 그리기도 했고, 한번은 한국 무속의 모티브를 빌려 무당처럼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무슬림, 정신대에 끌려가 죽은 할머니,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군인 등 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을 부른 다음 해원을 시켜주는 ‘초혼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 뉴스앤조이는 불상에 절하고, 종교다원주의 교육을 해서 강남대에서 해직됐던 이찬수 교수 사건과 관련, ‘부당해직’이라고 강조하면서 연일 이찬수 교수를 우호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밖에도 타종교에 대해 다루는 기사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용적 자세를 넘어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보인 사례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다음은 뉴스앤조이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옹호기사 목록의 일부.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1)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2)
 
- 북한의 주체사상과 붉은기 사상(3)
 
- 마르크스의 '자본'에 살아있는 '복음'
 
- 종교화한 주체사상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 핵을 가진 북한이 두려우십니까?
 
- 북한을 대할 땐 연애하듯
 
- 김병로 교수, "북한인권 주장은 현 정권 비판 위한 것"
 
- 북한 봉수교회는 가짜교회 아닌 '이질적인' 교회
 
- 북한인권, 인권 운동인가 정치적 도구인가
 
- 북한 교회도 여중생 죽인 미국 규탄
 
- 김정일 위원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
 
- "우리가 아무렴 동족한테 핵 쏘갔어"
 
- 평양에서 한반도기 함께 흔들며
 
-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
 
-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
 
- 북한교회 진위 논쟁 '우리 몫 아니다'
 
- <극동방송> '극우 시국토론회' 파문(3)

    

2. 공산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반기독교 성향


뉴스앤조이는 소위 진보임을 자처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기사들을 무수히 쏟아냈던 곳이다.
    
주목되는 점은 평소 ‘개혁’을 부르짖는 동시에 교회파괴적인 기사들도 많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볼 때 뉴스앤조이가 친북NGO로 안착하는 것은 친북미디어로서의 교회공격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계산이 나온다.
    
유물론적 사관의 가장 큰 적은 유신론적 사관이며 이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핍박하는데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교회를 핍박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안티기독교는 ‘반교회’라는 코드가 서로 통한다.
    
뉴스앤조이는 공교롭게도 교회의 치부들이 드러날 때마다 선정적인 비판으로 문제를 확대하고, 자연스레 안티기독교들이 활동할 명분과 기본소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의 분쟁 소식은 뉴스앤조이를 통해 매우 신속하게 보도된다.
    
지금까지 뉴스앤조이에 보도된 교회분쟁 소식은 수백여 건에 달할 정도다. 이런 분쟁소식은 안티기독교들에게 매우 요긴한 정보와 활동의 근간이 된다.
    
반공설교 비판과 중계에 가까운 교회분쟁 기사들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들이 있었다.
    

3. 목표는 기독교 소멸

뉴스앤조이 사장 방인성 목사는, 창립자가 ‘기독교 소멸’ 소신을 갖고 만든 것으로 알려진 시민단체 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공동대표 홍세화 등, 이하 종추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방인성 목사와 김동호 목사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의 출간 기념 북토크에 참여하고 있다.

 
종추련 창립멤버인 이드 씨는 “제 자신의 신념은 기독교 교리와 바이블 그리고 예수의 소멸”이라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종교비판의 자유가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시민운동을 하겠다”고 밝힌 안티기독교계의 대표적 인사다.
   

▶종추련(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창립멤버이자 사무처장 이드:


결국 방인성 목사는 기독교소멸론자가 그 소멸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종교비판에 오히려 힘을 보탠 모양새가 됐다.
    
어떻게 이러한 대표적인 안티기독교인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뉴스앤조이는 종추련이란 단체에 대한 비판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이들의 활동을 오히려 홍보해주는 보도행태도 보여 왔다.
    

4. 기독학생 홍위병 양성소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3각 구도의 연합은 한국의 미래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뉴스앤조이가 과연 스스로 밝혔듯이 ‘하나누리’라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적사업에 부합하는 기관지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의중이 주목된다.
    
동시에 친북, 종북적인 편향된 사고로 한국교회의 기독청년들을 교육하고 양산해, 한국교회가 주체사상을 또 다른 신앙으로 받아들여 섬기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의중은 아닌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시점에서 뉴스앤조이를 하나누리로 안착시키겠다는 이승균 편집장의 선언은 매우 큰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5.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

    
▲본지가 입수한 기독청년아카데미 ‘한국근대사 강의’ 자료에는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해 “식민지 해방보다는 전후 처리라는 비즈니스”라며 “미군은 환영식에 참가한 군중에 총격을 가했으며 남한이 좌익과 중도좌파에 의해 장악돼 있어 미국의 의도대로 남한을 장악할 수 없게 되자 파괴공작을 벌였다”고 공산주의 이념과의 투쟁 역사를 ‘장악’이란 개념으로 폄훼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인민공화국은 80%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소련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정치위원회 등 민중의 자치조직을 통합해 좌우익을 망라한 조직을 구성하고 행정권을 줬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육자료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소련의 세력확대 정책과 김일성의 적화통일 정책이 전쟁의 원인이지만 수정주의 입장에서는 미국에 의한 한국의 단독정부수립 자체가 민족국가 수립을 방해한 것이라고 부연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자체를 북한과 하나된 민족국가 수립의 방해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교육자료는 전시에 발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국군과 미군에 의해 1백만, 인민군과 빨치산에 의해 13만이 학살됐다”면서 “88.5%의 절대 다수가 국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 가운데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지켜왔던 거시적인 역사 안목은 전혀 도외시한 채 정확한 집계가 어려운 왜곡된 자료로 이념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북한의 이해’ 강의 자료는 북한의 선군정치에 대해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고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이것은 군부독재와는 다른 것”이라고 추켜세우는 부분까지 발견된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선군정치에 대해 “김정일이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당의 독재로부터 군사독재로 이행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태동배경에 대해서는 “혹심한 경제 위기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인민들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해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강의와 소감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청년아카데미는 공존이 불가능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을 말하고, 북한에 대해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가치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한국교회 청년들에게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장해야할 ‘인권의 문제’와 ‘신앙의 자유’를 도외시한 채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고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http://blog.naver.com/dreamteller/220977249510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서 첫 개신교 기도회 열려

독립 100주년 맞아 50개국 전·현직 기독 의원 참석… 한인 선교사 제안으로 시작


세계 각국 인사들이 지난 7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국회에서 열린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정홍기 선교사 제공


“저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습니다. 크리스천인 여러분은 그의 재림을 믿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그가 오시길 원하고 있는 거군요.”


이스라엘 국회 산하 기독교동맹위원회의 조슈 라인슈타인 이사가 지난 7일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 행사에서 전한 인사말이다. 행사는 이스라엘이 ‘국제 예루살렘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는 이날 예루살렘 크네세트(국회의사당)의 한 회의장에서 열렸다.


라인슈타인 이사의 축사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인 자리임을 적절히 감안한 내용이었다.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이스라엘 국회와 예루살렘 일대에서 열린 기도회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이스라엘이 1917년 무슬림 치하에서 독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개신교 형식의 기도회였기 때문이다.


미주와 유럽, 아시아 등 50여개국에서 전·현직 크리스천 의원과 목회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도회와 더불어 음악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도 함께 진행됐다.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은 현지를 방문한 세계 각국의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공관에 초청했다.


이번 행사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도회 개최가 한국인 선교사의 아이디어에서 구체화됐다는 점이다. 수년 전, 이스라엘 출신의 기독교계 인사 A씨가 정홍기(63) 루마니아 선교사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1992년부터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정 선교사는 현지 국회의원과 관료 등을 중심으로 한 조찬기도회 등을 섬겨왔다. 틈틈이 인근 국가나 타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조찬기도회 선교’ 노하우도 전수했다.


예루살렘 기도회 개최와 관련, 행사 준비와 운영 방식 등에 있어서 A씨는 정 선교사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지난 3월에는 한국의 국가·국회 조찬기도회를 견학하기 위해 방한했다.


정 선교사는 13일 “많은 분들의 기도로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쳤다”면서 “첫 번째 예루살렘 기도회를 통해 역사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느끼는 감격을 맛봤다”고 전했다. 예루살렘 기도회에는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과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 채의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등이 한국 대표로 초청 받아 참석했다.



출처: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64786&code=23111117&sid1=chr)


바빙크, 벌코프 그리고 박형룡
이상웅 | 조회 76 | 05.12.31 16:45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53
 
 

헤르만 바빙크(1854-1920),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레이든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잠시 목회를 하고 나서 깜뻔 신학교에서 교의학 교수로 20여년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20여년 교의학을 가르치다. 그의 주저는 1906년-1911년 사이에 간행된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 제2판, 전4권(Kampen:Kok)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1873-1957)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이민가서 귀화하다. 그랜드 래피즈에 소재한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다. 그는 명예박사학위 조차도 받은 적이 없다. 목회를 하다가 모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벌코프는 초기에는 신약학을 가르쳤고, 후기는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입었다. 1941년에 증보된 [조직신학]과 [신학서론]이 그의 주저이다.

 

박형룡(1897-1978)은 압록강변에서 대주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평양 숭실전문 졸업후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변증학 교수가 되다. 평양에서 학위논문을 마쳤고 Ph.D.학위를 취득하였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1972년 총신대학교를 은퇴하기까지 30여년 동안 교의신학 7권을 비롯하여 조직신학의 제분야에 대해서 가르쳤고 저작전집 20권을 남겼다.

 

이상은 세 사람의 간략한 프로필 소개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 사람의 신학적인 관계가 무엇일까요? 벌코프는 프린스턴을 방문한 헤르만 바빙크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못읽어봤습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1954년에 미국 방문시 만년의 벌코프 교수를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한 자리에 만난 적이 없지만 주저를 통해서 바빙크는 벌코프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고, 벌코프는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틀을 만들고 살을 채우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후에 바빙크의 저술들 중 영역본으로 간행된 Our Reasonable Faith이나 The Doctrine of God 을 직접 읽었습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바빙크를 단순히 요약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미국의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하지 부자와 워필드,보스)이나 남장로교 신학자들(쉐드, 댑니)의 글들을 소화하여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서를 저술했습니다. 물론 벌코프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화란어라는 아주 제한된 언어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액면 그대로 영어권에 소개하고 싶은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후세대에 이르러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영어로 번역은 끝난 상태로 있고, 출판은 1,2년 내에 완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바빙크의 주저 보다는 읽기에 간편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래도 바빙크의 책은 유럽피언 스타일이다 보니 간편하다기 보다는 심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읽고 고민해야 하는 책이지요.

 

박형룡 박사 역시도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근간으로 해서 교의신학 7권을 썼지만 벌코프를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박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는 구 프린스턴신학도 벌코프를 통한 화란 개혁주의 신학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의 근본적 기초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전하여준 선교사들의 신학, 자신의 용어로 하자면 청교도 개혁신학이었습니다. 이 기초 위에서 그는 구프린스턴신학도 읽었고, 어거스트 스트롱의 침례교 신학도 읽었으며, 벌코프의 조직신학서도 수용했던 것입니다.

 

바빙크나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를 대중들에게 읽기 쉽도록 대중화하는 일을 하였지만 박형룡 박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바빙크와 벌코프의 책은 그럭저럭 인기를 잃지 아니하고 읽히는 반면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은 별로 인기가 없는 이유중 하나일 것입니다.

  -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을 대중적인 필치로 간결하게 쓴 [하나님의 큰 일]을 1909년에 출판한 후에, 보다 더 간결한 형태의 개요서인 Handleiding bij het on derwijs in den Christelijken Godsdienst를 1913년에 출간했습니다.  

 -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을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신학개론)를 1933년에 출판하고,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줄여서 고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를 1938년에 출판하였습니다. 19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이상의 벌코프의 저서들(원서들)은 총 25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 박형룡 박사의 경우 난해한 중국어 용어들이 많은데다가 방대하기 때문에 신학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읽기를 꺼려합니다. 만일 현대화시켜서 그의 신학을 쉽게 요약해서 소개하는 입문서를 출간해 주었더라면 그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이상은 저물어가는 2005년 세모에 생각나는대로 술술술 써보았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회당에 모여 있는 가짜 예배자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주일이 되면 루이 14세가 가족들,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나오곤 했습니다. 절대 권력자가 교회에 나오니 그 앞에서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몰려들었는데 넓은 교회당이 모여든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의 대주교는 프넬론인데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을 보며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라고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배가 목적이고 예수님이 목적이라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다른 목적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넬론 대주교는 사람들의 본심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일에 광고하면서 다음 주에는 왕께서 못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일 루이 14세가 왕족들을 거느리고 교회에 갔을 때 교회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썰렁한 상태였습니다. 깜짝 놀란 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대주교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왕을 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사람들처럼 지금도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교회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당이라면 그것은 결코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어찌 부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이 되면 큰 교회마다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입니다. 어떤 후보자들은 방문만이 아니라 아예 교회에 등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등록을 했다고 해서 꾸준히 예배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목적은 예배가 아니라 큰 교회 안에 모여 있는 교인들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보자들이 찾아와 준 것에 감지덕지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높여주고 대접해준다면 그것은 비참한 일일 것이고요.


교인들의 표가 아니라 교인들의 돈 혹은 교회의 돈을 겨냥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숫자가 많을 경우 교회에서 무언가를 제작하거나 구입하면 그 비용이 상당합니다. 그것을 노리고 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교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 연감을 만드는데 교인 수가 워낙 많다보니 연감 만드는 액수도 막대하다고 합니다. 연감 제작에 따르는 이권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기반으로 노회나 지방회 정치에 끼어들고, 또 그것을 발판삼아 교단 정치에 뛰어들어 이익을 챙기는 정치장로들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접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도 아니고 예수님을 닮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예배도 아니고요. 다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간섭하고 그런 과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런 정치장로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정치 목사들입니다. 목사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밟아버리는 것이지요. 그들 역시 교회당에 머물고 있지만 예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긴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예배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제사장들을 향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장 10절)


우리는 말라기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당 문을 닫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모든 것이 다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체면도, 돈도, 지위도, 습관도 아닌 오직 예수님 한 분 때문에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릴 예배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들이 가득할 때 교회가 비로소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 안희환 목사님 / 한국 예수비젼성결교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인생"이기에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래 "세가지"에 있어서 <한국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분명한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이해를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세가지는 정치적 이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로 그치는 것도 아니라) '영적인 이슈'로 나라와 후대 가운데 큰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는 요인들인 것입니다.


이에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리더 되시는 교계 어른들은 이 세가지에 있어 더욱 분명한 견해를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민감하고 이해관계>가 얽히 섥힌 주제들이란 것을 알지만, "십자가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다!"라고 분명한 진리를 외쳐 주셨기에 마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세가지 중요 사안에 있어 분명한 소리를 내주심으로 듣고 따르는 성도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 위치에 계신 분으로써 맞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원하셨던 "진정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북한정권>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취해 주셔야 합니다.

아래의 사진들만 봐도 북한 정권은 이해할 수도, 함께 해서도 안되는 집단입니다.



북한 전역에는 무려 3만 8천여 개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김일성, 김정일 시체를 보관하기 위해 금수산기념 궁전이란 것을 지었는데, 무려 8억 9천만 달러라는 큰 돈을 썼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 굶어죽은 북한 주민들이 3백만 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이 돈으로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샀었더라면 많은 북한의 주민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돈입니다.


둘째로 <동성애에 대한 입장>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품자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동성애에서 벗어나 치유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동성애 확산을 막음으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답게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복음을 말하는 분들이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는데 어떻게 '동성애'에 있어 성경의 입장과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한국교회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기독 언론 일부는 지속적으로 친동성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적 오보>는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게 하는 것을 넘어 왜곡, 변질까지 시키는 것입니다.


13. 셋째로, WCC/종교통합에 있어 분명한 마음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함께 섬기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니 "인정치도 말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진리가 이러한데도, 얽혀도 너무 얽혀진 것인지 적잖은 리더십들이 WCC를 옹호하며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강건너 불 난 것 구경하듯 내 일이 아니듯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무슨 올림픽처럼 좋고 감동 있는 전 세계의 종교적 축제의 하나로 여기며 WCC 개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다!"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서는 침묵하며 가만히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당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복음을 외쳐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세워주셨기에 선 자들이 더 분명히 설 수 있도록 교회당 밖, 선교지가 아닌 한국 땅 한복판에서 분명히 외칠 수 있도록 높이 올린 깃발처럼 외쳐 주었으면 합니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해도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 동성애, WCC>가 결국 "하나의 문제, 한 뿌리, 하나의 영"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생명책>에 기록될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영>,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 마라나타!



출처: 김영표 목사님 페이스북

"가나안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신앙이 있지만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교회에서 상처를 입었거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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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이 미국의 리서치 그룹 '바나 리서치'가 진행한 가나안 성도 관련 보고서를 공개했다.ⓒ데일리굿뉴스 

 

美 가나안 성도 증가 추세…전통적 신앙관은 유지

 

최근 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이하 문선연)은 바나 리서치의 보고서를 소개했다.

 

바나 리서치는 보고서에서 가나안 성도를 "예수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지난 6개월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2004년에는 4%에 불과했던 가나안 성도가 최근에는 10%로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남성보단 여성이, X세대와 베이비 붐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전통적 신앙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 93%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답했고, 응답자 94%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주이며, 전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데 동의했다.

 

특이한 점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데 동의하는 비중이 높았다.

 

"가나안 성도, 교회 사역 이해하는 중요 요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예수님은 사랑하면서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걸까. 문선연은 이 부분에 대해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상처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영적 성장에 교회의 행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떠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제도적인 교회를 찾았다면, 지금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진리를 탐색하고 외부에서 확인을 얻는 방식의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의 이런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가나안 성도들과의 소통 문제,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은, 그들은 신학과 공동체, 제자도,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런 개념들에 대한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와 경험을 쌓는 효과적인 공간으로 더 이상 기존의 교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바나 리서치 로세나 스톤 편집장은 "가나안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사역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해지고 있고,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무엇일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내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1]

 

저자: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 전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고경태. 색을 첨삭함

 

지난 한 해 (1986년) 동안 칼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20세기 신학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수많은 기념행사가 열렸고 찬사가 쏟아졌으며 기사가 쓰였다. 필자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싶지만, 약간은 낮은 어조로 하고 싶다. 필자는 바르트가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 중 한 명이라 인정하지만, 그를 루돌프 불트만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거나 혹은 ? 만일 칸트 이후 신학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경우 ?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진다. 그리고 필자는 확실히 바르트의 더 소란스러운 추종자들 중 몇 명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는 판단, 즉 그 위대한 바젤 출신 교수가 아타나시우스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는 식의 평가는 삼가하고 싶다. 이 주장이 아마 에딘버그 시에서는, 혹은 그 시에 있는 성지인 T&T Clark 출판사의 도보거리 내에서는 수용될 수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든 지리적으로든 뭔가 다른 시각에서는 이 주장이 지나치다. 바르트는 아타나시우스와 매우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고, 이와 관련해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과도 매우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다. 거의 이들과 견줄만큼 뛰어나지만, 극히 소수의 참으로 위대한 이 사상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본질적으로 비규범적인 신학을 양산한 신학자로서의 바르트는 오리겐, 죤 스코투스 에리제나, 그리고 (필자가 추가하고 싶은) 슐라이어마허와의 조합에 위치한다. (멀러는 아타나시우스와 견줄 것이 아니라, 오리겐, 존 스코두스, 에리제나, 그리고 슐라이어마허로 조합시켰다. 좋은 의견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바르트가 성공적으로 필자 세대의 많은 신학자들을 성경으로, 교회의 위대한 전통으로, 특히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의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바르트 자신의 사상의 유용하고 통찰력 있는 요소들 대부분은 확실히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유래한다. 필자 자신의 신학 훈련 초창기에, 필자의 교수들이 필자에게 불트만, 노트(독일의 구약학자), 슐라이어마허, 매퀴리, 화이트헤드, 그리고 당연히 바르트로 구성된 꽤 고정된 규정식을 먹였을 때,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그 밖의 다른 곳에서 필자의 신학적 토대들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제 필자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해 보겠다.

 

첫째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신학함’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는 그 누구도 바르트로부터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정독하면서, 필자는 과도하게 많은 군말과 종결 짓기를 거부하는 관념들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 두뇌가 날카로운 지성이 개념들을 갖고 놀고 그 개념들을 모든 인식가능한 각도에서 혹독하게 검증받게 하는 것은 흥미롭고 때로는 심지어 유익하다. 하지만 인간의 말로 신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그 주장 자체의 불가능한 공식화들을 부정하고 재진술하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방법은 신학적 주장의 두 극단 사이의 공식화가 갖는 문제점을 단지 쉽게 그리고 더 교훈적으로만 주장할 수 있었다 ? 그런 다음 다른 이슈로 옮겨 가서, 마침내 독자에게 서 너 권 분량으로 된 완성된 교의학을 내용의 손실없이 제공했다. 바르트가 그들의 작품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읽었던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들의 명료함과 간결함에 관한 주목할 만한 관용 표현들로, 모든 인간의 신학은 틀림없이 모형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계시의 은혜에 의해서만 신적 원형을 성공적으로 반영하는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하고 유한한 진술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바르트는 필자에게 신학적 공식화에 대한 그런 법칙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필자는 그 법칙 자체를 바르트로부터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멀러는 바르트에 대해서 유익은 없었다고 제시하면서, 바르트의 신학이 계시, 신적 원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멀러는 개혁신학의 계시와 바르트의 계시 이해의 차이에 대해서 제시하지 않았다. 고경태는 바르트의 계시와 개혁신학의 계시 이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바르트의 계시는 발생되는 자연적(판단에 의해서 신적인 것이 됨)이고 연속적이고, 개혁신학의 계시는 신적이고 종결되었다)

 

둘째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성경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필자가 공부했던 바르트의 첫 소논문은 『로마서 주석』이었다. 신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필자는 거기서 시작했는데 이는 필자가 바르트를 읽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필자는 『교회 교의학』을 필자의 서재를 위한 도서 예산의 한도를 능가하는 완전한 통일체로서의 전집 작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으로부터 그 당시 성경해석의 차갑고 역사비평적이며 본질적으로 비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필자의 이제 막 시작된 반감들이 어느정도 타당한 반감들이었음을 배웠다. 그리고 바르트의 서문이 필자를 종교개혁자들의 주석적이고 해석학적인 접근 방법들로 안내했을 때, 필자는 오늘날 교회의 삶을 위한 성경본문의 신학적 의미로의 진입로를 발견했다. 하지만 필자가 바르트 자신의 주석을 더욱 읽어감에 따라, 그 주석의 급진적으로 실존주의적 접근법이 바르트의 사상에 바울의 영향보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 더 컸다는 것을 필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로마서 본문과의 참된 접촉은 바르트의 논문에서 극미하다.

 

이와 유사하게, 필자가 마침내 『교회 교의학』을 공부하고 거기서 다양한 성경 본문들에서 유추한 바르트 신학의 기독론적 원리를 목격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빈번히 어떻게 그 본문 자체가 바르트에 의해 그 원리를 위해 선택된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보느라 당황스러웠다.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 대한 바르트의 독해는 한 가지 좋은 예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본문들(마 27:1-10과 행 1:16-20)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유죄판결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그 본문은 저주 시편의 예리한 인용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선택되고 유일하게 유기된 인간이라는 자신의 교리적 가정에 입각해서, 유다의 운명에 어떤 희망을 찾는다. 이 경우의 성경해석적 우둔함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그 자체로서는 분명한 관련성이 없는 본문들을 열기 위한 발견학습적(heuristic) 열쇠로서 그의 지배적인 기독론적 원리를 빈번히 사용한다. 그 결과는, 그런 해석이 “기독론적”이고 “신학적”이라는 모호한 주장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임의적이고 교리적인 성경해석이다.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성경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멀러는 로마서 주석에서 바울보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더 받았다고 제시했다. 멀러는 바르트의 유기와 선택에 대해서 언급했고, 가룟 유다를 희망으로 말하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분명한 맹점은 제시하지 않았다. 바르트에게서 어떤 유익을 받지 않았다고 제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바르트 신학의 맹점까지 지적해야 학생들이 평가하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셋째로, 그리고 결론적으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기독교 전통의 통찰들을 오늘날 사용하기 위해 어떻게 적합화시키는 지를 배우지 못했다. 『교회 교의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 교리사에서 유래한 자료들의 금광이다 ? 하지만 바르트는 아주 빈번하게, 이 수집된 자료들의 토대위에서 실제적으로 건축한다기 보다는, 그 자신의 공식화를 위한 포장으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그 자료들 자체의 의미나 방향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 문제의 한 예로서, 필자는 바르트의 가장 통찰력 있는 역사적 논점에 관한 해설들 중 실제적인 것 하나를 지적하고 싶은데, 그것은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논의이다 (『교회 교의학』(영문판), II/2권, 60-88, 106-115쪽). 그 체계 속에서는 모든 교리가 어쨌든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추론되는 예정론적 체계를 개혁주의 정통 신학자들이 결코 제시하지 않았음을 바르트도 인정하고 필자도 옳게 믿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작정 교리에 대한 상당히 경직된 표현이 ‘완전히 부재(不在)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바르트는 아만두스 폴라누스 (Amandus Polanus)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자신의 해결책의 단서를 발견한다: 선택이 세 위격 모두에 해당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성부로서가 아닌 하나님으로서 선택하시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선택하시면서도 성취하신다. 이 단서로부터, 바르트는 “선택하고 선택받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그 자신의 교리를 통해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아간다. 바르트가 주목하지 않은 점은 본질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위로서의 작정의 개념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의 선택의 정의와 더불어, 16세기와 17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전의 신학에서 우리는 어디서도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만나지 않는다. 더욱이, 선택하고 선택받은 중보자는 또한 유일하게 택함받고 유일하게 버림받은 인간이라고 하기 위한, 그리스도에로의 선택 (election into Christ) 사상에서의 바르트의 (교리적) 붕괴는 그가 논평했고 자신이 제시했던 교리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의 단서를 그것으로부터 취하는 그 신학적 자료와는 어떠한 실제적 관계성도 가지지 않는다.

 

필자는 선택교리에 대한 예전 개혁신학의 개념들에 관한 바르트의 고찰 가운데서 어떤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단지 역사적 가정을 제공할 수 있다.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의 문제는 그 예전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 자신의 사상의 칸트-철학적 배경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초월적이고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noumenon)로서, 현상의 질서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현상의 질서에 그분의 위치가 어떻게든 정해질 수 없는 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혹은 인식할 수 없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바르트에게 이 위치를 제공하고,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들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초점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선택에 바르트가 초점을 맞춤은, 슐라이어마허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의존성을 지속적으로 일관성있게 의식하는 단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 교리와 관련된 칸트-철학적 장애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개혁주의 전통에 관한 고찰에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역사적 자료들이 그것들 자체의 목소리를 발하도록 하기 보다, 오히려 그 자료들을 자신의 해설을 위한 포장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논거 방식은 『교회 교의학』의 다른 많은 곳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 ? 예를 들어, 『교회 교의학』의 첫 두 권 반에 걸쳐 나오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서론에 대한 바르트의 여러 해설들에서. (멀러는 바르트의 선택론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신학에 선택론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 고경태는 바르트는 개혁신학의 예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선택론으로 전향했다. 예정은 개혁신학(네델란드)에서 구속협약(pactum salutis)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등을 예비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자기 신학을 바른 신학(Dogma)로 제시한다. 비록 선택론이 그리스도 중심(유기와 선택)으로 몰고가지만, 개혁신학의 그리스도 이해와 전혀 같지 않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유기와 선택의 중심이 아니라, 선택의 주체라고 한다. 멀러는 바르트의 선택에 대해서 거부하지만, 개혁신학과 명료하게 다름까지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방법론과 성경해석과 역사 사용에서, 바르트는 그의 독자들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씨름들을 넘어서는 곳으로 향하게 하는데 있어 일관성 있게 실패한다. 그의 주장들은 자주 눈부시다. 그것들은 바르트 자신이 나왔던 자유주의 신학의 많은 소중한 개념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의 주장들은 또한, “종교학”의 상대화시키는 접근법이 자주 신학적 견해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지배하려고 으르대는 시대에, 기독교의 고유성에 대해 우리에게 강하게 상기시킨다. 바르트의 신학의 대단한 가치는 그것이 우리 자신들의 신학의 뿌리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대단히 역설적인 점은 일단 한 번 그것이 우리를 성경과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나면, 그것은 현재를 위해 성경과 전통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작은 도움만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을 공부하면서, 필자는 이들 각 저자는 성경과 전통을 묵상할 의무뿐만 아니라 성경과 전통 둘 다를 그들 자신의 시대에 그리고 교회의 다음 세대에 전달할 의무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지속적으로 깨닫는다. 이 저자들은 항상 그들 자신의 작품을 넘어 더 위대한 교회의 과업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1) 모방될 수 있는 방법들을 채택함으로, (2) 성경을 현재적으로 여는 성경해석적 논거들을 제시함으로, (3) 성경본문을 존중하고 그 본문을 어떤 지배적인 발견학습적 원리들에 부합되게 하려고 굴복시키지 않으므로, (4) 그들 자신의 견해들을 위한 포장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이슈의 의미를 분별하는데 있어 통로와 안내서로서 과거의 신학적 고찰의 전통을 다룸으로, 그렇게 한다. 필자는 칼 바르트로부터 이러한 접근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가리켜준 것에 대해 필자는 항상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르트를 비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문을 엉킨 실타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몽철학과 현대철학에 자유주의와 고대신학까지 묶었다. 자기 나름으로 묶어 타인이 볼 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원리(Dogma)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자유로운 선한 행동이다" 이다. 이 세 원리에서 모든 것을 묶었다. 개혁신학에서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선한 존재이다"이다. 원리에 입각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바르트의 신학은 해부할 수 없다. 자기 신학 원리가 없는 학도는 결코 바르트의 미로에서 나올 수 없다.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 말하는 자.. 자기 신학 원리를 말해야 한다. 멀러가 바르트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유익이 있지만, 명료하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1] The Reformed Journal 37호(1987년)에 “What I Haven’t Learned from Barth”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The Reformed Journal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Muller: What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By Richard A. Muller Reformed Journal 37 (1987): 16?18.

During the past year numerous celebrations were held, testimonials given, and articles written?all for the sake of celeb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Karl Barth and recognizing his contribution to theology in the 20th century. I would like to do the same thing, but in somewhat muted tones. While I recognize Barth as on e of the most eminent theologians of the age, I hesi­tate to proclaim him more important than Rudolf Butlmann or?if the whole sweep of post-Kantian theology is examined?than Friedrich Schleiermacher. And I cer­tainly would refrain from the judgment pressed upon us by some of Barth’s more vociferous followers that the great Basel professor is the most seminal thinker since Athanasius. That claim may be acceptable in Edin­burgh, within walking distance of the sacred precincts of T. & T. Clark, but from any other perspective either theological or geographical, it is excessive. Quite in con­trast to Athanasius and, for that matter, quite in contrast to Augustine, Aquinas, Luther, and Calvin, Barth stands in the company of Origen, John Scotus Erigena, and, I would add, Schleiermacher, as a theologian almost as brilliant as those of the first rank but who, in contrast to those few truly great thinkers, produced an essen­tially non-normative theology.

Barth did?and I think successfully?direct many theologians of my generation back toward the Scripture and toward the great tradition of the church, specifically toward the tradition of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Protestant theology. Indeed, most of the useful and insightful elements of Barth’s own thought derive from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Protestantism. Dur­ing the formative years of my own theological training, when my professors fed me a rather steady diet of Bultmann, Noth, Schleiermacher, Macquarrie, Whitehead, and of course Barth, I learned from Barth himself to look elsewhere for the foundations of my theology. Let me comment, then, on what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In the first place, I haven’t learned how to “do theology” from Karl Barth?and I would hazard the guess that no on e else has either. As I peruse the Church Dogmatics, I have the consistent experience of excessive verbiage and of ideas that refuse to achieve closure. It is inter­esting and sometimes even instructive to watch a bril­liant mind play with concepts and subject them to intense scrutiny from every conceivable angle But Barth’s dialectical method, which assumes the impos­sibility of stating divine truth in human words and therefore continually negates and restates its own im­possible formulations, could easily and more instruc­tively have simply stated the problem of formulation between two poles of theological statement?and then passed on to another issue, finally providing the reader with a finished dogmatics in no more than three or four volumes, with no loss of content. The Protestant scho­lastics, whose works Barth read with respect, recog­nized in formulae remarkable for their clarity and brevity that all human theology must be ectypal, an imperfect, finite statement about God that successfully reflects the divine archetype on ly by the grace of God’s gift of rev­elation. Barth taught me where to find that rule for theo­logical formulation, but I cannot say that I learned the rule itself from Barth.

In the second place, I haven’t learned how to do exegesis from Karl Barth. The first essay by Barth that I studied was the Epistle to the Romans. I began there, back in my seminary days, because I believed that I had to read Barth, but I viewed the Church Dogmatics as a monolith beyond the limits of my library acquisitions budget. I did learn from Barth’s Romans that my own inchoate objections to the cold, historical-critical and essentially non-theological content of contemporary ex­egesis were objections that had some validity. And when Barth’s preface pointed me toward the exegetical and hermeneutical approaches of the Reformers, I found a way of access to the theological meaning of the text for the present life of the church. But as I read further in Barth’s own commentary, I found that its radically ex­istential approach taught me more about the impact of Kierkegaard than the impact of Paul on Barth’s thought. Genuine contact with the text of Romans is minimal in Barth’s essay.

Similarly, when I eventually began to work on the Church Dogmatics and to see there the christological principles of Barth’s theology brought to bear on various texts of Scripture, I was frequently at a loss to see how the text itself pointed in the direction chosen for it by Barth. Barth’s reading of the story of Judas is a good example. Most commentators see in these texts (Matt. 27:1?10 and Acts 1:16?20) unremitting condemnation: in Acts, the text concludes with a pointed citation of an imprecatory Psalm. Barth, however, in view of his doc­trinal assumption that Christ is the on ly elect and on ly reprobate man, finds some hope in the fate of Judas. Nor is this moment of exegetical folly an exception: Barth frequently uses his overarching christological principle as a heuristic key to unlocking texts that have, m and of themselves, no clear relation to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The result is an incredibly arbitrary and dogmatic exegesis, justified on ly by the vague conten­tion that it is both “christological” and “theological.” I haven’t learned how to do exegesis from Karl Barth.

In the third place, and by way of conclusion,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how to appropriate the insights of the Christian tradition for use m the present. The Church Dogmatics is doubtless a gold mine of ma­terials from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but all too frequently, rather than actually building on the foun­dation of these gathered materials, Barth uses them as a foil for his own formulations and fails to convey either the meaning or the direction of the materials them­selves. As an example of this problem, I would point to what is actually on e of Barth’s most insightful histor­ical excursuses: the discussion of predestination (Church Dogmatics II/2, pp. 60?88, 106?115). Barth recognizes, and I believe correctly, that the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never proposed a predestinarian system in which all doctrine was deduced somehow from the divine de­crees. Barth notes, however, that the rather stark pre­sentation of the doctrine of the decrees poses the problem of a Deus nudus absconditus, an utterly absent or hidden God. Barth finds a clue to his solution in the argument of Amandus Polanus that God the Father elects not as Father but as God inasmuch as election is the common work of the Trinity in all three persons: thus God the Son both elects and effects our election. From this clue, Barth moves on to overcome the problem of the Deus nudus absconditus in his own doctrine of “Jesus Christ electing and elected.” What Barth does not note is that the concept of the decree as an essential and therefore trinitarian act of the Godhead, together with the defi­nition of election as occurring “in Christ,” is typical of Reformed theology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No­where in this older theology do we encounter the prob­lem of the Deus nudus absconditus?certainly not as Barth defines it. Nor, in addition, does Barth’s collapsing of election into Christ, so that the electing and elected Mediator is also the on ly elect and on ly reprobate man, stand in any real relation to the theological material on which he has commented and from which he takes the clue to his solution to the doctrinal problem that he has posed.

I can on ly provide a historical hypothesis as to what has actually occurred in Barth’s meditation on older Re­formed concepts of election. The problem of the utterly absent or hidden God is not a problem of the older theology but rather a problem caused for Barth by the Kantian background of his own thought: the God who stands behind the phenomenal order as a transcendent and unreachable noumenon is not accessible or knowable unless he can be located in some way in the phe­nomenal order. Christ provides Barth with this location and, therefore, with his sole focus of knowledge about God and God’s acts. Barth’s focusing of election on Christ, like Schleiermacher’s identification of Jesus as the on e man continuously and consistently conscious of his ut­ter dependence on God, deals with the Kantian barrier to a doctrine of divine election?but it does not arise out of a meditation on the Reformed tradition. Rather than let the materials of history speak for themselves, Barth used them as a foil for his own exposition. This pattern of argument can be documented in many other places in the Church Dogmatics?as, for example, in Barth’s several excursuses on the Protestant orthodox theological prolegomena in the first two half-volumes of the Dogmatics.

In his method, in his exegesis, and in his use of history Barth consistently fails to point his readers beyond his own individual theological wrestlings. His arguments are frequently brilliant. They succeed in undercutting many of the cherished notions of the liberal theology out of which Barth himself came. They also remind us strongly of the uniqueness of Christianity in an age when the relativizing approach of the “history-of-religions” school has often threatened to dominate scholarly discussion of theological ideas. The great value of Barth’s theology is that it points us toward our own theological roots. The great irony of Barth’s theology is that, on ce it has directed us back toward Scripture and the tradi­tion, it gives us very little help in interpreting them for the present. When I study Augustine, Aquinas, Luther, and Calvin, I am constantly aware that each of these writers was conscious of a duty not on ly to meditate on Scripture and tradition but to mediate both Scripture and tradition to their own time and to the next gener­ation of the church. These writers always point beyond their own work to a greater churchly task?and they do so by adopting methods that can be emulated, by pro­posing exegetical arguments that open Scripture to the present by respecting the text and not bending it to agreement with any overarching heuristic principles, and by dealing with the tradition of earlier theological meditation not as a foil for their own opinions but as a pathway and guide in discerning the meaning of a theological issue. I haven’t learned this approach from Karl Barth?but I will always be grateful to him for pointing me to the place where I could learn it.

Thanks to Traever Guingrich for the electronic text.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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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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