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예해방은 가장 절박한 국가 과제!


북한의 구원과 해방은 느긋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김일성 왕조의 노예가 돼버린 민족의 해방은 이 시대 가장 절박한 국가적 과제다. 분단 후 70년, 수 없이 많은 영혼이 김조(金朝)가 씌운 멍에를 매고 지옥에 끌려가 죽었다. 지상에 남은 2천4백만 가련한 동족의 구원은 교회에 맡겨진 주님의 명령이다.


양심을 가진 자라면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예수의 심장을 가진 이라면 어찌 눈 감을 수 있는가. 저들의 눈물을 닦고 생명을 구함은 더는 보아 넘길 수 없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1-3)”


교회를 다니는 누구나 성령을 받기 원한다. 무엇 때문인가? 형통과 건강과 축복을 위함인가? 아니다. 말씀은 전한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기름을 부으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함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기 위하이다.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좇는 우리의 세속적 기도에 일갈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않고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않는다(사 58:3)’. 크게 외쳤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6-8)”


아프다. 슬픈 일이다. 한국 교회 다수가 주님이 기뻐할 금식을 버렸다. 나를 향한 치유와 회복만 넘친다. 자기연민의 기도만이 풍요롭다. 북한 동족을 억매는 흉악의 결박을 풀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제 당하는 저들을 자유케 하는 기도를 꺼린다. 북한을 아프리카 선교지 중 하나로 보며 세상 정보 따라 예측하고 분석한다.


거기서 그친다. 이사야는 이 시대 또 다시 소리칠 것이다. 북한의 구원을 위해 금식할 때 주께서 우리 안의 작은 빛을 흑암 중에 발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안의 어두움, 낙심과 낙담, 절망과 우울, 분노와 미움, 이 지긋지긋한 어둠도 낮과 같이 될 것이다! 물 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북한을 살릴 때 한국도 살아나 부흥될 것이다. 한국이 세상의 영에 잡혀 북한구원의 고귀한 가치를 무시해 버리면 70년 한강의 기적은 이대로 끝장나 버릴 것이라고.




-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만 빼면 오케이라고요? 큰일 날 소리!


1. 부룩클린 공립학교 졸업파티에서 음식을 저녁 9시 이후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유는 무슬림들의 라마단 관습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라마단 행사 때문에 주간 금식 후 저녁에만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 관련 기사 : http://bit.ly/2rdWjvr (2017.5.31)


기독교나 유대교적 관습을 공립학교에 적용하는 것은 금지하면서 이슬람적 생활양식을 공립학교에 적용하는 것에 분개하는 기사입니다.



2. 학생인권조례의 모델이 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 만들기 지침서”에도 학생의 종교에 따른 급식 배려가 종교차별을 안하는 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의 모법격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종교,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항목이 이슬람과 관련되어 있는 항목입니다.




3. 프랑스 68폭동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유학생을 동참시키기 위한 외국인 차별금지정책의 논리는 이슬람이 유럽에서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입니다. 여기에 반인권적 윤리의식을 퍼트리는 기독교의 재생산을 금지하는 정책을 병행하면서 2천년 유럽 교회가 사멸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그래서 70년대 이후 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마르크스주의자)이 정립한 인권 개념이 전파되는 곳마다 동성애/쾌락주의/반기독교/이슬람 보호정책도 같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4. 급진페미니즘의 남녀차별금지는 “혼전순결 반대/불륜 합법화/낙태 합법화/성관계 연령 하향/동성애 허용/동성결혼 허용”으로 이어집니다. 차별금지법의 “성별 차별금지”의 정의가 서구에서 기독교 가치관을 붕괴시킨 동력이란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5.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만 빼면 안심이다는 인식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필요성이 인정되는 장애인이나 연령차별금지법은 이미 개별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상태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불필요합니다.




6.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이 레닌식 폭력혁명에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그림시의 헤게모니 전술로 바뀜에 따라, 정신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문화(학교교육/대중문화/언어/언론/법률)를 장악하는 문화 맑시즘(cultural marxism)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그러한 정체성 정치의 이념이 발산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7.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국민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냐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 목회자들과 교회 안에서의 교육도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국민들도 차별금지법의 내용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듣게 되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GMW연합

먼지처럼 주저 앉을 김일성 우상들!


언론을 보라. 방송을 보라. 인터넷을 열어보라. 북한 정권의 ‘무너짐’은 불가능한 상상이다. 트럼프의 북폭만이 구원처럼 느껴진다. 대륙과 초원을 뻗어갈 선교의 나라, 제사장 국가의 사명은 오지 않을 신기루다.


남한사회의 ‘살아남’도 공상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이 아닌 돈과 물질, 육신이 삶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못 견딜 재앙과 혹독한 심판만이 마지막 은혜이다! 두려움이 몰려온다. 믿음은 무너져 버린다. 저주, 저주, 저주만이 판을 친다. 어둠은 기세를 잡았다. 이제 너희의 시대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겔 37:11)”

 

에스겔은 통곡했다. 이 땅 역시 통곡한다. 한국의 뼈들이 말랐고 한국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이 민족이 다 멸절되었다! 전쟁이 아니면 경제적 쇠락의 남미식 몰락이 남았을 뿐이다. 한국은 볼리비아, 에콰도르, 필리핀이 될지도 모른다. 75년 적화된 월남이 될 수도 있는가?

 

북한은 이미 에스겔의 마른 뼈다. 한국이 에스겔의 마른 뼈가 되고 있다. 다음세대 여린뼈도 말라간다. 인간적인 희망이란 좀 더 약삭빠른 능력자가 되는 정도이다. 적자생존 피 말리는 죽기 살기 경쟁이다.


내가 살려면 남을 밟아라. 혼자 할 수 없다면 모여 싸워라. 빨간 띠를 매고 구호를 외쳐라. 투쟁! 투쟁! 재벌을 없애고 부자를 족쳐라. 권력과 탐욕 앞에 촛불을 들어라. 미움, 증오, 분노, 광기가 광장을 메우고 담장을 넘어 교회를 향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정의의 슬로건 아래서 약자의 절규만 커진다. 삐딱한 지식인 집단이 외치는 살 떨린 구호가 섬광처럼 번득일 뿐 퍽퍽한 내 삶은 바뀌지 않는다. 이상한 엘리스 속 토끼가 돼 마른 뼈가 되어 간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生氣)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生氣)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5, 6)”

 

벼랑 끝 사망과 죽음. 마른 뼈 앞에서 유일한 희망은 오직 주님의 생기(生氣)다. 오로지 예수다. 그 분의 사랑이다. 정의로 회칠한 미움과 증오와 판단과 정죄의 광기는 마귀의 밥이다. 주여! 생기로 우리게 임하옵소서. 영혼이 말라 가는 한국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어 주소서.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이천 여 년 전 주가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오셨다. 주님의 생기가 이미 우리 안에 오셨다. 더 강력한 능력으로, 권능으로, 빛으로 임하옵소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속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서 유대의 구원에 나섰다.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주님과 연합할 때 민족의 역사는 반전될 것이다. 마른 뼈는 일어나 살아날 것이다. ‘남과 북의 백성들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기도자의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겔 37:17)’

 

10가지 재앙이 바로(Pharaoh)의 강고한 진을 깨뜨린 것처럼, 한 명의 모세가 나오는 날 백성의 앞날을 막아 온 사탄의 진이 부서질 것이다. 피와 개구리, 이와 파리, 악질과 독종, 우박과 메뚜기, 흑암과 사망이 덮치며 사라질 것이다.


북한의 우상숭배 체제는 무너지고 정치범수용소는 무너지며 수많은 죽음과 살육과 피바람 소리는 그쳐질 것이다. 북한 전역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 3만8천 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주님을 찬양할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형제여. 자매여. 현실에 낙담치 마소서. 낙심치 마소서. 문제를 보지 마소서. 오직 예수를 보소서. 예수 안의 영광과 승리와 성취를 보소서. 빛을 보소서.



-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어느날 백보좌 심판을 보게 되었다!


심판대에 앉아계시는 우리 주님


내가 눈을 들어 공중을 바라보니 마치 공중의 뜬곳에 흰옷 입은 분이 앉아계시고 뒤에도 흰옷 입은 분들이 마치 재판소에 가면 재판장들이 앉아있는 것처럼 끝없이 긴 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사람 같은 물체가 수없이 떠오르며 저 끝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걸어오는게 아니라 마치 날아오는것 같았다. 그리고 이 심판대에 가까이 오자마자 그 순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구별이 되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들어가자마자 순간 광채를 받아서 희게 되어 버렸다.


오른쪽으로 구별되어진 사람들은 희게 되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으나 왼쪽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허공속의 캄캄하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큰 소용돌이로 빨려 내려가는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대부분이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 소용돌이 밑에 내가 본 이루말할 수 없이 큰 규모의 지옥이 그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하나로 내려가지만은 얼마후엔 갈라져서 각자 갈길로 분리되어 빨려가는 듯 했다.


어떤 사람은 심판대까지 온후 왼쪽으로 돌아서면서 주님을 말없이 쳐다보던 그 얼굴을 볼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고 실망에 찬 얼굴이었다. 아! 주님을 믿는다하며 살아왔던 그가 설마 내가 이리로 가게 될지 몰랐다는 그런 눈치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분은 심판대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알고 또 자기가 가게 될 곳이 어딘가 알기 때문에 그토록 처절한 실망의 얼굴이었으리라.


나는 이 상황을 보고 절실히 느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믿고 찾아오기를 바라시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진리되신 예수님을 영접치 않아 때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백보좌 심판대에 좌정하고 계시던 우리 주님은 생각할 수 없이 엄하셨고 정말 냉정하셨다.


그토록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순종치 않던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애타게 주님을 향하여 애걸하며 쳐다보지만 그 순간의 우리 주님은 정말 엄숙하고도 냉정한 주님이셨다. 백보좌 심판대에 앉으신 우리 주님은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늦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에서 그것을 보고 난 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인자와 용서의 주님이시지만 언제까지나 용서하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언제까지나 봐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대에 계신 권세의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행해온 각자의 행위대로 엄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출처: 김웅삼 목사님의 "이 처절한 지옥의 고통"중에서 일부 발췌

문에 있는 사탄 - 당신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정체



사단 마귀는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파괴하고 괴롭히고 속이고 아프게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하게 하여

결국 지옥에 끌고 가는 악한 자이다.

"무릇 마음을 지키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1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번역 & 편집: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사람들

생명•가정•효 컨퍼런스’...25개국 기독 법률가•학자 한자리에 모여 열띤 토론2017.06.02 23:53:37

사회학자이자 <글로벌 성혁명>의 저자인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

▲ 사회학자이자 <글로벌 성혁명>의 저자인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

 

 

세계 첫 반동성애 국제대회인 1회 세계 가정 대회(Seoul Global Family Convention)가 전 세계 25개국 명사들이 모인 가운데 2박 3일의 일정으로 2일(금) 오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시작됐다.


소강석 한동협 대표회장과 이용희 한동협 국제본부장, 조영길 한동협 전문위원장은 첫날 행사인 생명가정효 컨퍼런스’에서 이번 행사의 목적과 소감을 밝히는 축사를 했다. 이어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법률 조직인 크리스천 컨선(Chritian Concern)의 대표로 지난 20여 년간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 온 안드레아 윌리엄스 영국 변호사(Andrea Williams)와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글로벌 성혁명>의 저자인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가 특별 강연을 했다.

 

소강석 한동협 대표회장은 어느 시대나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마지막 보루였다우리는 동성애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전,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소 회장은 생명, 가정, 효는 우리 사회의 골든 링크(Golden Link) 즉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장 약한 부분이라며 만일 우리가 동성애를 보편적인 성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사회도 함께 망가지고 침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영적인 항체요 저항인자가 되어야 한다한국교회가 함께 힘을 모아 기독교 신앙과 건강한 사회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희 한동협 국제본부장은 이번 행사를 개최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이 본부장은 최근 20개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서 한국도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매우 심한 국내외적 압박을 받고 있다한국 혼자서는 이 압박을 견디기 힘들겠지만,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은 전 세계 약 180개 국가들이 힘을 합치면 우리도 살고 세계도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는 반대한다”며 “2017년에는 100개국, 2018년에는 200개국의 명사들을 초대해 세계대회를 개최하고 2020년에는 전 세계 국가들 간의 거룩한 연대 조직을 결성할 것이라고 했다.  

 

조영길 한동협 전문위원장은 동성애 독재의 세계적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전했다. 조 위원장은 한국은 아직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진 않았지만 2007년 이래로 지금까지 바로 이 국회에서 무려 8번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있었다"며 "2001년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시정 권고를 내린는 등 사실상 차별금지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UN 등 국제기구를 통한 압력이 한국에 계속 가해지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부도덕한 동성애 독재 확산에 용기 있고 지혜롭게 맞서 싸우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전문 학자들과 교수, 변호사 운동가들이 함께 협력하고 격려하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했다.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글로벌 성혁명>의 저자인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성혁명의 실체와 유럽과 독일의 상황에 대해 전했다. 쿠비는 성혁명은 소수의 파워 엘리트들에 의해  시작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며 성혁명은 성윤리를 무너뜨리고 결혼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새롭게 함으로써 결혼과 가족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이어 성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상호보완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대신 성정체성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만일 성정체성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의 정체성과 성도덕, 결혼과 가정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쿠비는 미국, 유니세프, EU, 세계은행, 국제가족계획연맹,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페이스북과 같은 다국적 기업들과 록펠러,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주정부와 정당들, 주류 언론들과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같은 세계 권력들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결혼과 가정을 지지하는 가치관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그러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러한 거대한 국제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20175월 현재 전 세계 200개 국가들 가운데 오직 24개국에서만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는 점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라고 했다.

 

쿠비는 서구에서는 1968‘68학생혁명에 의해 성혁명의 거대한 돌파구가 마련됐다그러나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은 현재 둘로 나뉜 상태라고 밝혔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20175월 현재 서유럽 13개국은 동성결혼을 합법화지만 동유럽의 13개 국가들은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간의 결합으로 헌법에 못 박았다.

 

쿠비는 독일에서는 1970년대 이래로 포르노와 낙태, 이혼, 동성애에 대한 법률적 제재가 하나씩 제거되고 포괄적 성교육이 도입됐다“1999년 정권을 잡은 좌익 정부가 공론화 과정이나 국회의 결정 없이 젠더 메인스트리밍(젠더 주류화 교육)을 모든 정치적 행동의 원칙으로 삼기로 결정한 뒤 2001년 독일 국회는 시민 파트너쉽(Civil Partnership, 동성간 혼인관계)’을 합법화했고 이어 2006독일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금지법이 통과됐다고 밝혔다. 쿠비는 독일 평등법은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과학과 연구의 자유, 치료의 자유, 교육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다현재 독일에서는 자신의 경력을 망치고 공직과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기독교의 관점에서 결혼에 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며 특히 동성애를 중대한 죄로 간주하는 성경적 가치관에 대해서 더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쿠비는 이날 강연에서 한국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무지개는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생물 간의 언약의 증거지만 적들은 이 무지개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모독하고 있다빼앗긴 무지개를 되찾아오자"고 도전했다. 이어 "전쟁은 주님께 속했다"며 "어떤 독재 정권도 우리가 더 좋은 삶을 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여러분의 능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려주실 것이다. 원수는 강하지만 진리와 하나님은 더욱 강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한국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아이들의 순수성, 그리고 결혼과 가족이라는 자연발생적 사회제도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공격으로부터 국민들과 다음 세대를 보호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서울에서 열리는 생명가정효 국제대회'가 전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빛이 되고 저항을 일으키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뉴스윈코리아 기자 newswinkorea@a.com

인류는 이전보다 전멸에 더 가까이 근접하고 있다!

(By Sarah Karacs, for CNN, Updated 5:18 AM ET, Thu January 26, 2017)

 

 

얼마나 세계의 종말에 근접했는지에 대한 과제를 부여받은 시카고 과학자 집단은 2016년의 사건들로 하여금 “지구종말시계” 침이 얼마나 움직이기 시작했는지에 관해 목요일에 발표할 예정이다.


상징적인 시계는 현재, 자정이 인류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볼 때, 3분전에 서 있다. 분침은 핵무기 경쟁의 출발년도인 1949년도에 3분전 자정에 서 있었다.


시계의 분침은 미국과 소련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실시된 이후 자정에 1분 더 가까이 근접했다고 - 2016년이 1953년과 동등하게 된 - 예상하고 있다.


이번 주 초에 발표된 진술에서, 원자과학자회보(Bulletin of Atomic Scientists)는 어느 정도 최근의 발전이 고려되었다고 말했다.


“핵무기와 기후협정에 대한 대통령 트럼프의 논평, 음울하게 하는 전세계 안보 전망이 세련된 기술에 의해 증가되는 추세, 그리고 과학적인 전문지식에 대한 점진적인 무시가 불쾌한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상승세“라고 말한다.


원자과학자회보의 노벨 수상자들 팀은 1945년부터 “지구종말시계”를 세우고 조사와 분석을 편집하여 자료를 만들어 왔다. 이 독립적인 비영리단체는 기술세계의 조약 협정, 지정학적 긴장과 발전에 연계된 세계적인 위협에 대한 자료를 사용한다. 


1963년 미국과 소련 지도자들이 모든 대기권 핵실험을 끝내자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에 서명한 이후 분침은 12분 전으로 내려 왔다.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고, 미국이 월남전에 적극 가담한 1968년, 분침은 자정 7분전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 체결됨으로써 긴장이 완화 - 분침이 뒤로 움직였다 - 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1991년 분침이 자정 17분 전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그 후 몇 년 간 분침은 왔다 갔다했다. -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1984년의 분침은 자정 3분전에 도달해 경고음을 울렸다.

  

지정학적 요인들이 올해의 평가에 상당한 특징을 띄게 한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잘못된 사람들의 손에 빠짐으로 생성될 수 있는 어떤 대미지의 신호가 보이고, 그로 인해 제기되는 위험들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잠재적인 생물공학의 오용을 포함하여 인공 지능과 안전 위협의 상승을 포함한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 - 인간들의 상처에 유기적 조직체의 합성을 가능케 하는 - 은 생테러주의자들(bio-terrorists)이 인조 바이러스로부터 무기를 제조하는 위험을 초래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이미 세상의 종말을 위협하는 다양한 축적된 무기류를 확장한 상태이다.



http://www.cnn.com/2017/01/26/world/doomsday-clock-2017/index.html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예수 그리스도의 새 심장을 이식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지옥불못으로 내 영혼을 끌어내리던 죄와 사망의 법은 폐하여지고, 영원한 천국으로 내 영혼을 끌어올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왕이 바뀌었고 정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탄마귀는 쫓겨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합법적으로 내 삶을 장악하던 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죄는 불법이 되었고 내 삶에 조금도 발붙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를 고발하던 죄를... 이제는 거꾸로 내가 죄를 고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정죄하는 사탄마귀의 모든 불법적 도발과 참소와 정죄를, 역으로 내가 하나님께 죄다 일러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사탄마귀가 당신의 자녀된 나를 감히 정죄합니다. 거짓말로 참소하는 저 입을 다물게 하소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정밀하고 세밀하고 완벽하고 설득력 있게 내 안에 이루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구절입니다.

죄로 물든 내 육신을 살리려고 찾아온 율법은 죄악덩어리인 내 영혼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X-레이, CT, MRI가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있어도 치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육신이 연약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 장벽을 육신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죄로 물든 육신은 죄가 없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성을 지닌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도 넉넉히 죄를 다스리고 지배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사망으로 끌고 가던 죄의 숨통을, 부활을 통해 끊어버리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육신을 입고서 완벽하게 죄를 이기신 첫 케이스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내주하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든 거듭난 자들에게도 율법이 요구가 넉넉히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5~8)

사탄마귀의 최후의 발악입니다. 사람들의 혼의 영역인 '생각'속에 자주 들어가 미혹하는 사탄마귀는 끊임없이 연약한 육신을 부추기고 육신의 생각을 주입하고자 발악을 합니다.

"넌, 안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으셔. 너같은 미미한 존재에는 관심도 없으셔. 하나님은 너를 주목하지도 않아. 너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안돼. 넌 여전히 계속 밥먹듯 죄를 짓고 있잖니? 하나님은 너를 버렸어. 너는 거기까지야. 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미달이야.... 넌 안돼... 넌 아니야... 하나님은 널 버릴거야..."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구원받고 거듭난 성도들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가장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생각속에 들려온다면 빨리 주님께 고발하고 일러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즉각 경찰을 보내셔서 그러한 생각들에 수갑을 채우고 체포해 가십니다.

육신의 생각을 공급하는 옛 자아의 생각의 대동맥, 대정맥은 이미 잘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에 부착되어 있는 성령의 대동맥, 대정맥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혈관을 통하여 순종과 감사의 생각들이 줄기차게 흘러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절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매순간 육신의 생각을 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매순간 육신에게 생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성령께서 생각의 주도권을 쥐게 해드릴 수 있을까? 그 열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24시간 내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입니다. 사랑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루종일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생각하고, 음란을 사랑하면 음란을 생각하고, 명예를 사랑하면 명예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온통 주님을 향한 생각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9-10)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은 거듭난 자들은 이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성령)에 속한 자입니다. 구원받고 안 받고의 여부는,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느냐 아니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자들은, 훗날 몸은 죄로 인해 죽고 땅에 묻혀 썩어질 것이나 그 안에 있는 영은 의(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날(주님 공중강림하시는 그날)에 썩지않는 새 몸을 입고 원죄가 없는 영,혼,육의 완전체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육체도 다시 새몸으로 교체해 주시고 영,혼,육의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는 자들은 결코 죄와 적당히 타협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협 자체가 안됩니다. 물론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질 순 있지만 오뚜기처럼 다시 주님과의 일시적 단절을 회복하려는 <회귀본능>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는... 이 회귀본능이 '죄된 몸으로 회귀하려는' 정반대의 회귀본능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이후에는 하나님 품으로 회귀하려는 '정상적인 회귀본능'으로 복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괴로와 견딜 수 없으며 아주 작은 죄에도 마음아파하고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잠이 안오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면, 죄를 짓고도 아픔도 없고 하나님 품으로 회귀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적당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고 떠나려고 하고 아파한다는 것 자체가 명백히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블로그/곰팅이

 

출처: ㅋ리스

진짜뉴스(Good News)에 채널을 맞추세요!

 

(킹정흠 눅 2:10,11) 천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 시니라.

 

지난 해 10월부터 시작된 탄핵 정국과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금까지 8개월간 정말 '이 나라가 어찌될꼬?' 하는 한탄과 함께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번 만큼은 하며 기대를 했지만 기도하고 바라던 것과 정반대의 일들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가?' 하는 하소연도 하십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이후에 아예 TV를 안보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TV만 보면 화가 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TV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거의 TV 중독 수준..) 요즘같이 좋은 소식에 목마른 적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상 살고픈 마음이 없고 형편이 허락한다면 이민이라도 가야하겠다는 분들도 적지가 않고.. 매일 화가 나는 소식에 화병이 나고... 이러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화병으로 저희가 주님께 가게 생겼습니다. ㅠㅠ

 

엊그제 가짜뉴스 감별법이라는 동영상을 찾아 올렸는데 유튜브에 가짜뉴스로 검색을 하면 진짜 가짜뉴스를 생산해내는 바로 그 곳 좌티비시로 불리우는 그곳에서 '가짜뉴스는 이런 것이다! 가짜뉴스를 감별하라!'고 영상을 만들어 올려놓은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저는 다음이나 네이버의 기사를 보지 않고 구글을 통해 뉴스를 봅니다. 구글은 해당 기사외에 다른 언론사 기사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언론사는 많은데 그 중에 그래도 신뢰할 만한 곳을 찾기가 정말 어려울 정도로 왜곡 언론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중 좀 객관적인 곳이 어디일까?' 가 아니고 어느 곳이 덜 왜곡 보도하고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면서 읽습니다.

 

저희가 뉴스를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악하고 거짓으로 가득한가? 몸으로 삶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듣고 봐서는 정말 정말 위험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뉴스 다운 뉴스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를 제대로 보도해 줄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세상이 좋은 뉴스를 전해줄 것이다!' 라는 기대는 져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대신 진정한 뉴스를 우리가 접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출처는 100%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좋은 소식 (Good News)를 자주 접해야지 가짜뉴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세상 뉴스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세상 뉴스는 그냥 참고용으로 보시면 될 듯 싶습니다. 세상 뉴스라고 해봐야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시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로 써야하리라 생각합니다.

 

솔로몬 왕은 이미 이에 대해 오래전에 말하였습니다.

 

(킹정흠 전 1:9) "이미 있던 것 곧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News)이 전혀 없도다."

 

솔로몬 왕의 말을 빌자면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좋은 뉴스는 더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완성하시면서 좋은 소식(Good New)를 발표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삶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은 전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고 믿음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 편에 서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몇날, 몇주, 몇달, 몇년을 더 죄와 사망 권세와 싸워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배도, 성령훼방)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가짜뉴스를 들려주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에게 협박하여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고 포기하여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유발하고자 합니다.

 

탄핵 사태와 부정 선거로 끝난 (적어도 제 생각에는) 19대 대통령 선거로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심하게 흔드셨습니다.

 

(킹정흠 히 12:26) 그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흔들었거니와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한 번 더 흔드노라, 하셨느니라.

(12:27) 또 한 번 더란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 가운데 흔들리는 것들을 제거하심을 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이 환난을 주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쉽게 흔들리고 부서질 수 있는 땅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흔들리기 쉬운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흔드심을 통해 잠자는 성도들이 깨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음녀의 포도주에 많이 취한 성도들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초의 가짜뉴스의 유포자가 누구일까요? . 바로 사탄입니다.

 

(킹정흠 창 3:1) 이때에 뱀은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이르되,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

(3:2) 여자가 뱀에게 이르되, 우리가 동산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3:3)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염려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매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이게 사탄이 처음 인류에게 퍼뜨린 가짜뉴스입니다. 좌티비시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엄청나게 욕합니다.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냐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아담과 하와와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선악과를 두고 있습니다. 짐승의 표는 제 2의 선악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제 2의 선악과를 두고 10,100개를 받아도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엄청난 발언을 합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던 사탄의 가짜뉴스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WCC, 짐승의표, 탄핵 사태 등으로 인해 점점 더 명확하게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평소 우리가 참으로 존경할만하다 했던 목회자들 아니면 성도들의 발언과 행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도데체 누굴 믿어야하나?' 할 정도로 소위 멘붕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예수님 외에 세상의 어떤 교회나 단체, 훌륭한 목사님, 선교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성도님들도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의 의지의 대상입니다. 결국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시지 그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눈이 밝은 줄 알고 따라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그건 예수님 책임이 아니요 우리가 사람을 의지한 책임입니다. '! 이 목사님은 잘 보시고 잘 들으시는 줄 알았는데!' 그냥 시궁창에 빠졌다가 나올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지옥 불구덩이 속에 빠진다면 그건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 뉴스를 무시하면 안되겠지만 세상 뉴스를 많이 보면 하늘 뉴스를 소흘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는 '(Star) 볼 일이 없습니다' 워낙 공해도 심하고 인공 불빛이 많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뉴스가 많으면 하늘 뉴스 Good News를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Good News를 잘 봐지지가 않습니다. 세상 뉴스가 워낙에 인스턴트에다 달짝지근하기 때문에 끊기도 어렵습니다. 세상 가짜뉴스의 전파가 워낙에 세서 진짜뉴스 (Good News)를 듣고자 하면 세상 뉴스를 꺼야합니다.

 

화폐 감별하시는 분들은 가짜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짜를 잘 알면 가짜는 저절로 감별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 뉴스는 좀 덜보고 진짜뉴스를 봐야하겠습니다. 진짜뉴스 (Good News)를 보셔야지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어차피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이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야 합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그 현실이 대한민국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인정하기가 싫고 싸우기가 버거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은 북한 성도들이 당하고 있고 당했던 일들에 비해면 새 발에 피일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적그리스도 체제에 비할 바가 못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전무후무한 환란이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타깝게도 이세상이 잘 될 것이다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라는 막연한 기대나 소망 보다는 이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는지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날이 갈수록 악해지고 음란해지고 세상에 대한 소망이 저절로 사라지고 있지만 이는 역으로 우리의 소망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앞으로 펼치질 천국왕국을 소망케 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을 딪고 살지만 날마다 이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킹정흠 요 16:33)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웃 블로그 / 고다니엘

내 생각에, 지금 대한민국에 온갖 거짓의 영들이 창궐하고 기승을 떨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 주님의 자비가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 김일성 일가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캐나다가 아니라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스럽게 살며 "차라리 죽었으면"이란 생각을 하며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자신을 우파이며 독립 운동가와 6.25 참전용사 후손이라는 어느 기독교 신자가 대한민국이 주님의 자비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는 것에 모욕적인 표현을 써가며 강력히 반발하는 바람에 페친을 끊고 블락한 적도 있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가 미국 국무부 고위 관료였던 소련 간첩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우게 만드신 것이 바로 주님의 엄청난 자비였다.


나는 이러한 주님의 자비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님의 은혜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주님이 이처럼 엄청나게 커다란 은혜를 주셨는데 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전혀 없이 오로지 개인적인 은혜만 더 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거듭하는 이기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어마어마한 거짓과 미혹의 영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진정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거짓의 영들의 기세는 결코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질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해야, 진노 가운데 들어간 이 나라에 그나마 주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출처: William Lee님 페이스북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조엘비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히브리어와 그 파생어들은 ‘친절함, 은총, 인자하심’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선한 뜻, 인자, 은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구속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에 대한 과분한 은총을 의미한다. 은혜란 불행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값을 치르고 수여된 복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모든 역경과 인간적인 불가능을 이기는 강력이다. 은혜는 성경의 핵심이지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다.

은혜는 불행과 지옥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전적 타락)을 구원하는 것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께서 이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고 공헌하신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성령께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그 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구원적 은혜의 대상자들은 틀림없이 구원받고 말 것이다.

도르트 신조 제3,4교리 제11항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택자들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실 때, 또는 그들 안에서 참 회심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외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사 닫힌 것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것을 할례받게 하시고, 지금까지 죽어 있던 의지를 살려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여 악함과 불순종함과 완고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하고 순종하고 온순하고 활기차고 강하게 하여, 마치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1절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단지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가항력적이라는 용어는 의지를 향한 죄인의 변덕스러운 힘이나 폭력을 암시할 수도 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도 즐거우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 조엘 비키, 『칼빈
주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타/한아름

한국에서는 우익과 좌익이 서로 상대 진영의 주장과 정책 때문에 법치가 무너지고 안보가 위태하며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국격이 떨어져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그래서 살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의미로 “헬조선”이니 “이게 나라냐?” 등의 자조(自嘲)의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나 “이게 나라냐?”가 사실이라고 해도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누워서 침 뱉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만들어 내는지, 물리적 폭력보다 언어의 폭력이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런 말을 만들거나 사용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한 말이나 행위로 건전한 사회적 수준을 해치는 자들을 향하여 똑 같이 악한 말과 행위로 비난하거나 대응하는 것은 자기가 비난하는 대상자보다 더 나쁜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언행을 하는 자는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자는 악한 언행이 나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이나 행위가 윤리적이 되려면 특정 상대나 불특정 다수를 충분히 배려해야 합니다. 거짓이나 불의에 대해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합리적 설명을 통해 설득해야 합니다. 물론 거짓이나 불의가 극단적 폭력성을 띨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이나 총을 든 강도가 집안에 침입하여 가족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폭력적 대응도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일반적인 경우인지 극단적인 경우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과 교양과 법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따라야 할 사항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것을 극단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폭력적 언행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수준이 낮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수준이 아니고 인격적 수준을 뜻합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상당히 많은 학자들까지도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문제 삼아 강도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일조를 하는 형국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근 현대사를 이해하는 것도 그렇고, 안보 문제, 국정교과서 문제, 환경문제, 경제문제, 동성결혼 문제, 인권문제까지도 그렇습니다. 강도가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강도와 함께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옳은 일이나 좋은 일을 한다고 설칠 때 매우 사려 깊게 살펴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기독교계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건전한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단에 대처할 때 이단 비슷한 자들이 극성스럽게 앞장서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단의 활동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은 모든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지만 이단 비슷한 이들이 이단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므로 자기들이 마치 교리적으로 건전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폐해가 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와 교계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교활한 사람은 겉으로는 교양 있고 건전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악한 목적을 숨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국가나 한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 질서입니다. 자연 질서는 누구나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돌멩이가 얼굴을 향하여 날아 올 때 피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우선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누구나 잘 지킵니다. 법이나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인위적 질서입니다. 인위적 질서는 지키지 않아도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손해가 되지만 당장 손해가 없고 또한 그 손해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미미하게 느껴져서 인위적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아주 어리석은 태도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능한 인위적 질서를 어기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지혜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미한 악영향들이 누적되면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문화와 사회 모든 부분에까지 가치 질서를 무너지게 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사회적 약속과 보편 가치를 지켜야 할까요? 왜 그런 것이 존중 되어야 할까요? 그런 것을 안 지키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면 무질서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면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지표상으로는 꽤 괜찮은 나라지만 “이게 나라냐?”, “헬조선” 등으로 묘사되는 것은 또 다른 여러 지표들, 이를테면 자살, 이혼, 거짓말, 위증, 사기, 무고 등등..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위적 질서를 지켜지지 않으므로 그 피해가 미세먼지나 안개처럼 미미한 것 같아서 아무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암처럼 되었습니다. 경제적 지표나 교육적 수준으로는 살기 좋아야 할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된 것은 상당한 시간 동안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사회의 모든 부정적 현상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시계의 시침처럼 서서히 진행되어 오늘날의 부끄러운 부정적 각종 지표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윤리학에 공리주의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더 나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선하게 행동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J. Bentham과 J. S. Mill입니다. 공리주의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까 공리주의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공리주의란 인본주의적 행복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이나 윤리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이론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불편한 심기를 느끼게 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도 행복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행복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는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는 선한가 혹은 악한가 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공리주의는 윤리나 도덕적 가치가 아닌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모순인 것은, 윤리나 도덕은 타자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윤리나 도덕의 핵심인데 윤리와 도덕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윤리나 도덕은 처음 전재한 윤리와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거짓과 불의가 지배적이 되는 이유는 수단화해서는 안 되는 윤리와 도덕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인간의 행복에 두게 되는 모든 인본주의적 이론은 이와 같은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도덕 외적 가치를 위해 도덕을 수단화해야 되는 모순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지만 공리주의는 최고의 가치를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고 찾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즉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가?, 불행하면 어떤가? 왜 굳이 행복해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해 J.S. Mill은 설명하기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이론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당위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윤리란 당위적인 행동인데, 당위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면 당위적인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자연주의 오류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여러 사상과 학문과 문화가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그 어떤 이론과 제도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전재하지 않는 그 어떤 대안에 대해서도 성경은 비판합니다. 역사를 통해 그 같은 문제들에 대한 임상실험의 많은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인류는 행복을 기대하며 실험했지만 불행의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대안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또 다른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우리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혼탁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깨어서 기도하는 목사 또는 성도라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사회가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가 영적전쟁에서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패배의 원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목사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사가 중요한 것은 목사의 생각과 영적상태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그것이 악한 영향을 미칠 때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동성결혼을 먼저 합법화시킨 것은 세상이 아니고 바로 교회였다는 사실이 아주 충격적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교회가 없어서도 아니고, 목사가 없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목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펄전 목사님이 오래전에 정학하게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이제 때가 이르면 교회에서는 강단에서 광대가 염소들의 귀를 즐겁게 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말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광대와 같은 목사와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듣기를 좋아하는 염소들이 교회당을 메울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이다.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지 않은가?

딤후 4장 3-4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마지막 시대가 되면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지 않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는 광대들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목사인가, 아니면 광대인가? 물론 나 역시도 목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참 목사라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갖추어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목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알아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


요즘 목회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세상적인 책을 좋아하고, 참고서적은 읽는데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또 목사들이 TV나 미디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세상적이고, 생각하는 것도 세상적이고 목회하는 방식도 세상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고 목회도 성경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목사는 시대적 상황을 깨닫고 깨우쳐 줘야 할 의무가 있다.


목사는 정치적이면 안된다고 정치적인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정치적인 것은 분명히 좋지 않다. 예를 들면 목사가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를 하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목사는 바르지 못한 정치를 바르게 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을 깨닫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시대적으로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듯이 목사라면 정치가들이나 권력자들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성경말씀만 전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목사의 직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신학교 교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 그러나 목사는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직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사명으로 시대적인 지팡이의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악을 행하는데, 악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자신의 목사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시대를 바르게 깨닫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하고 성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한 믿음이 없는 목사들은 시대를 바로 볼 수도 없고 따라서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목사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 외에 시대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 목사라면 다음과 같은 면에서 절대 타협해서는 안된다.


하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용납하거나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념 자체가 기독교와 상반되는 것이다. 잘못된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마치 예수님이 혁명가라는 식으로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때문에 심지어는 목사들이 사회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자는 참 목자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은 혁명가나 사회 개혁주의자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 하나님이시다. 특히 공산주의는 일당 독재를 위해서 결코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가진 자는 바른 목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이념을 용납하는 것은 이단을 용납하는 것만큼 나쁜 것이다. 오직 민주주의 체제안에서만 기독교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 동성결혼과 같은 성경에서 죄로 여기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용납할 때, 이미 그 교회나 목사는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죄로 정한 것을 어느 누가 뒤집을 수 있는가? 우리가 동성애자들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사랑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도 다 죄인이지만, 그 죄를 회개할 때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듯이, 우리 모두는 동성애의 죄는 미워하되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사랑하고 회개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 차별금지법과 같은 반 기독교적인 법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으로 차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성결혼을 반대하거나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회나 목사들은 불이익을 당하거나 벌금을 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와 교회가 역으로 차별을 당해서 핍박을 받게 된다.


차별금지법은 성경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의 악한 수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목사나 교회가 묵인하거나 용납한다면 바른 목회자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넷, WCC와 같은 종교혼합주의나 종교통합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단은 화합과 평화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사용해서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들어 자신이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진정한 평화는 종교가 하나가 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평화는 오직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왜냐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한분 뿐이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다른 신을 허용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노력이나 다른 종교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배교적인 행위이고 아주 큰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를 멀리해야 한다.


특히 일부 큰 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목회다.


목회자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세상 것들을 교회로 끌어 듷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속화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구도자의 예배와 같은 것은 결국 세속적인 문화를 끌어 들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변질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찬양과 예배를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참 목사라면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가 되어야 하고,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는 혼돈의 시대고 어두움의 시대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사단에게 미혹되고 속아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고전 11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단이 악한 마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고 사단의 일군들이 악한 마귀의 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주의 종 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죄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해서 언제든지 미혹당하고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가 마지막 시대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광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듣는 염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즐겨 듣기를 좋아하는 진실된 양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될 때에 이 나라에 참 부흥과 회복이 일어나게 되리라 믿는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면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장 2절)




글쓴이: 애틀랜타 하은교회 정윤영 목사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1647/20170513/마지막시대의-현상-목사와-광대-양과-염소.htm

하나님! 제게 관심 있습니까?

열왕기하 6장 1절 ~ 23절 배경락목사

          

살다 보면 우리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풀리기는 커녕 도리어 엉키고 꼬여서 마음이 괴로울 때도 있다. 전후좌우 사방이 꽉 막혀서 옴짝달싹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쉽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고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성전은 훼파 당하였다.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먼 나라에 끌려가 종이 된 유대인은 하나님께 불평을 넘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실까?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을 사랑하실까?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열왕기서를 기록하는 저자는 그 점에 대한 고민을 엘리사 기적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열왕기하 6장에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벧엘, 여리고, 길갈에 흩어져 있는 선지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학생이 늘어 갔다. 그렇다고 딱히 수업료를 받는 것도 아닌듯하고 선지자의 길이 출셋길도 아닐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지 생도들은 최저 빈곤층이다. 그들은 쇠도끼를 빌려서 요단 강 근처에 집을 짓기로 하였다. 도끼질하다 보면 흔히 그러하듯 도끼 머리가 쑥 빠져서 요단 강에 빠졌다. 2,500여 년 전은 철기 문화가 막 시작하던 때였다. 철은 귀금속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인데 쇠뭉치가 요단 강에 빠졌으니 큰일이 났다. 선지 생도는 울부짖었다.

“아이고, 선생님, 이걸 어쩌지요? 이건 빌려온 도끼입니다.”(왕하 6:5)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때때로 벌어진다. 어찌 보면 흔한 일이고 사소한 일이고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너의 문제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사소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명백히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국가적인 일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큰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수억만 리 먼 나라 종 생활하는 유대인은 잊혀진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누가 나를 기억하랴?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랴? 그러나 열왕기서 저자는 그들에게 말한다.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열왕기서 저자는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를 이어 국가적인 큰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는 듯하다.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왕하6:8)

그 때에’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는다. 아람 왕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왕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더욱이 아람 왕이 진을 친 장소를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다. 장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열왕기 저자는 정확한 사실보다는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 싶은 다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아람 왕은 자신이 진을 치기만 하면,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왕이 대비하는 것을 보고 왕궁에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신하들은 그 일이 간첩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 때문임을 보고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신 말씀까지도 다 알고 낱낱이 이스라엘 왕에게 고해 바치고 있습니다.”(왕하6:12)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도단 성에 군대를 보냈다. 그저 많은 군대라고만 언급하지 몇 명이 갔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성 밖을 보니 아람 군대가 뺑 둘러 진치고 있음을 보았다. 사환은 호들갑을 떨며 뛰어들어와 엘리사에게 보고하였다.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그리고 엘리사는 사환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영적인 눈이 열린 사환이 다시 성 밖을 보니 아람 군대보다 훨씬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오면서 당대 최대 제국이 자랑하는 군사력, 건축, 문화, 사회 기반 시설 등을 똑똑히 보았다. 어마어마하였다. 현실을 보는 상식이 있다면, 판단은 명백하다. 누구도 바빌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던 예루살렘도 다 무너진 마당에 이스라엘의 독립은 물 건너간 것이다. 누구라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엘리사는 영적인 눈을 열어 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엘리사가 다시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가리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 언론이 말하고, 증거가 말하고, 모든 사람이 말해도 그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저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상식도 없고, 판단도 없다. 그 길이 죽을 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 성안에 데려갔다. 그때야 눈을 뜨니 적진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다. 이스라엘 왕은 기뻐 흥분하였다. 그는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여.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그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지금까지 아람 군대가 자신을 해하려고 수도 없이 아무데 아무데 진을 쳤었다. 그런 아람 군대를 생포하였으니 저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세상 사람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의 논리, 칼의 논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 기대한다. 어마어마한 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하면, 한반도에 평화가 보장될 거라 생각한다. 정권을 잡고 상대편을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엄청난 불이익을 주면, 나라가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무력보다는 사랑과 섬김으로 대접하라고 하였다.

“쳐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전장에서 사로잡은 포로도 아닌데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음식과 물을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자기들 상전에게 돌려보내십시오.”(왕하6:23)

그들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낸 후 다시는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싸움을 칼과 창으로 종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국가 간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전쟁이다. 무기다. 공격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평화다. 외교다. 분명 적이고 원수이고, 수도 없이 우리를 공격한 전과가 있지만, 그래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므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건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비둘기파보다는 매파를 선호하고, 칼과 창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법대로 한다면,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 - 싸움, 외교 - 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신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너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인간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역사 앞에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오늘도 대한민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지 구원하실지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것: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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