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교회론에 기준을 둔 목회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  

예수님은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앞으로 출생할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었다.  향후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의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다.(행 5:42, 9:22, 17:3, 18:28)

이 믿음은 성령으로 인해 가능할 것이다.(고전 12:3) 이를 위해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한 후 50일 뒤에 온 오순절에 세상에 강림했다.(행 2:1-4) 성령 강림절은 신약 교회가 탄생한 날이었다. (고전 12:13) 이 이후 신약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게 하는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다. 이런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해야 한다는 권면이 성경에 기록된다.(요20:19, 행20:7)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신약의 뿌리가 구약에 있듯이 신약 교회의 뿌리도 당연히 구약에 있다. 구약 성경에 교회론은 이미 설명되어 있다. 선민 이스라엘은 상식적으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신약 성경에서 교회론이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없었다. 구약 시대의 교회 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면 좀 더 성경적인 교회론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구약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신약 교회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만물 창조 후 하나님은 하늘을 제외한 모든 것을 통치시킬 목적으로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 (창 1:26-28) 하나님의 주례 아래 이들은 결혼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창 2:18-25) 이들을 통해 인류가 번성할 것이며 이들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 1:28)은 수행될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통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지상에 건설될 것이다.(창 1:26) 타락 이전 최초의 가정은 인류 최초의 인류 사회로써 가장 작은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학교, 교회와 정부 역할까지 한꺼번에 수행했다. 이 가정에서 가장(家長)은 교사요, 목사요 그리고 왕이었다. 달리 말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가장은 선지자, 제사장과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삼직분은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위한 방법이었다.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이지만(창 1:26) 가정이란 제도에선 질서를 요한다. 이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아담에게만 먼저 명했고(창 2:16-17) 그가 하와를 비롯한 향후 출생할 자녀들에게 가르쳐 행하도록 했다. 이것은 문화사명이 남녀에게 동등하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잘 비교된다.(창 1:28)

가장의 복합적인 역할은 출애굽 사건 발생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때까지 시대를 ‘족장 시대’라 부른다. 출애굽 사건 이후 선민 나라가 형성되며 예전 가장이 소유한 삼직분들은 분리되며 나누어졌다. 아론 지파가 대제사장 직분을 그리고 유다 지파가 왕 직분을 혈통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선지자 직분은 각 지파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면 출애굽 사건 전후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안식일 규례를 지켰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특별한 장소에 모여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를 전혀 명하지 않았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가정에 모여 쉬면서 안식일을 지켰다. 가정에서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했다.

이 때 삼직분의 소유자인 가장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제사나 예배를 주관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단을 쌓을 때 항상 가장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창 8:20, 12:8, 13:18, 22:9, 26:25, 33:20, 35:7)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부터 노아의 홍수 심판을 지나 선민의 마지막 족장인 야곱까지 적어도 2000년 동안 경건한 사람들은 가정에 모여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들에게 가정이 바로 교회 자체였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하나님은 움직이는 성전인 성막을 지어 이스라엘과 함께 행하였다.(출 29:43-46)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따라 행했다.(민 10:33-36) 가나안 땅 정착 후 에브라임 지파의 영내에 위치한 실로라는 지역에 이 성막은 안착했다. (삼상 1:7,24)  그러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이스라엘은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다윗의 등극 이후 유다 지파의 영내에 위치한 예루살렘이 성전 건축 장소로 비로소 지목되었고(대하 3:1)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은 완공되었다. (왕하 6:38)

율법에 의하면 장성한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정도 예루살렘 성전에 삼대 절기에 반드시 참석하여야 했다. (출 23:17) 이들 절기는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유월절, 맥추절이라고도 하는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었다. 이스라엘은 나머지 절기들에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석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모여 자신을 경배해야 한다고 반드시 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막 또는 성전 시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 드렸는가? 삼대 절기나 번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면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사는 곳인 고향의 집에서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했다. 이 당시 회당은 아직도 없었다. 이때도 선민 이스라엘에게 가정이 교회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 교회로 불렸다는 것이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스데반 집사가 지적했다.(행 7:38) 이 지적은 출애굽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구약 시대 교회론도 구원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곧 하나님 나라였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이면서 동시에 교회였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삼대 절기나 개인의 번제물을 요하는 제사를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이지 않았다. 이들은 고향의 집에 머물며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다윗 왕국은 멸망당했고 이 때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선민은 이방 나라들로 흩어져 살았다. 이 때 회당이 생기며 유대인들은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였다. 비로소 이들은 집이 아니라 회당에서 구약을 읽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 방향을 향해 하루에 세 번 절을 하며 기도했다.(단 6:10)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이런 신앙 삶을 계속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방인들을 비롯한 개종한 유대인들은 성도의 가정을 교회로 삼아 모였다. 그것도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모여(행 20:7, 고전16:1-2, 계1:10) 성전 제사나 회당식 예배를 대체시켰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인해 구약의 제사 제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더 이상 율법에 따른 제사는 무용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도들의 가르침이 신약 시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날까지 교회는 신자들이 소재하는 곳에 자발적인 조직으로 출발하며 세워졌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핀 성경의 구속사에 반영된 교회의 모습들이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이 발견된다.

첫째 근본적으로 가정이 중요한 예배 장소였다. 출애굽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즉 족장 시대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안식일 마다 가정에 모여 쉬면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즉 교회라는 구체적인 건물은 전혀 없었다. 타락 이전 삶과 예배가 전혀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 사명(창 1:28)을 수행하는 삶이 하나님께 향한 예배 행위 자체였다.

타락 이후에도 이런 예배 방식은 한 동안 변함이 없었다. 셋의 후손을 비롯한 경건한 무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창1-2장)와 메시아에 대한 약속(창 3:15)에 근거를 두고 삶의 현장에서 계속 신앙 삶을 영위했다. 이 당시에도 교회와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가장이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로서 가정에서 예배를 주관했다.

이 사실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특별히 거룩한 장소라는 교회론이 수정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이런 신비한 교회론은 한국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지적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불교나 무교라는 한국의 전통 종교가 주는 신비주의적인 영향이 한국 기독교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 육체적인 출애굽 사건은 이미 오래 전 발생했지만 영적 그리고 정신적 출애굽 사건은 그 후 오랜 동안 진행되었다. 마찬가지 현상이 한국 교회에 진행되고 있다.

구약 성경의 예배론과 교회론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 교회론은 오늘날 기독교 가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지적한다. 이 점에서 구약의 교회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는 곳인 가정이 교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가장은 가정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한다. 교회의 목회자가 그 역할을 수행해 준다는 식의 사고는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이혼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가장의 역할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시대 구약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가정의 영적 역할은 회복되어야 한다. 남성 교인의 각성이 요구된다.

둘째 신앙 삶의 주 무대는 교회가 아닌 가정이었다. 구약 시대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특정 장소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그냥 가정에 남아 안식일을 준수하였다. 이 당시 신앙 삶의 무대는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삶의 터전 중 하나였던 가정 자체였다. 이 당시 농업과 목축업의 시대였다. 이들에게 집 밖의 밭이나 농장 또는 양들과 함께 목초지를 따라 찾아간 산야 그리고 가내수공업 현장이 바로 삶의 현장이었다. 이들은 특정 장소에 모여 예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선민은 불신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일하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 때 불신자들과 가치관과 삶의 방법에서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기반을 둔 삶을 고집함으로 이들은 여호와가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실천해 보여주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칭찬 받는 인격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즉 수준 높은 인격과 가치관 그리고 그에 따라 사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늘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6일 동안 살다가 제 7일, 식구들이 가정에 모여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구약 성경이 그려주는 신앙 삶은 신약 시대 교회 삶이 신앙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문화 사명(창 1:28)을 잘 수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함에 있었다.(창 1:26) 그러므로 성도들이 타락한 세상이라고 피해가며 한적한 곳에 별도로 사는 것은 창조 기사의 가르침에 반한다. 언젠가 메시아에 의해 성취될 구속을 소망하면서 구약 성도들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성별은 무엇인가? 창조 신학이 주는 가르침과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삶으로 불경건한 무리와 구별되는 것이다. 앞으로 올 메시아를 소망하기에 더더욱 그렇게 살아야 했다. 아브라함은 갈데아우르를 떠났지만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들 가운데 섞여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강대국들과 그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창 14장) 야곱은 하란에서, 요셉은 애굽에서,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에서, 에스라, 에스더, 느헤미야도 세상 제국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그 당시 최고의 권력까지 오른 성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경건한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 됨을 증명해 보였다.

셋째 기독교 교회는 모으는 목회 못지않게 보내는 목회에 더 치중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된 두 가지 사실은 신앙 삶의 현장은 교회가 아닌 성도의 삶이어야 함을 강변하며 그리고 그 삶은 신앙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구약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신약 사도들도 주일을 지킨다. 그러나 이 둘 사이 차이가 생겼다. 이 차이는 당연하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창조 기사에 바탕을 두고 앞으로 올 메시아를 소망하며 신앙 삶을 살았다. 그렇게 이들은 구원의 은총을 선취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신자들은 이미 성취된 구속에 바탕을 두고 신앙 삶을 산다. 이 둘 사이 의미상의 차이는 너무나 중요하여 교사인 목사의 해석과 풀이가 요한다.

신구약 성도들이 읽은 성경 사이에도 량에서 차이를 보인다. 구약 성도들은 모세오경에 근거를 둔 비교적 간단한 신앙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는 66권으로 구성된 신구약 성경에 신앙의 기반을 두어야 한다. 가르침이 더욱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면서 교사인 목사의 역할이 커졌다. 더구나 신약 시대 이방인들이 교회에 편입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대인들은 상식적으로도 성경을 잘 알았지만 이방인 신자들은 성경을 전혀 몰랐다. 이들을 위해 당연히 교사인 목사가 교회에 필요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구약의 교회론에 의한다면 구원받을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교회로 모으고 이들을 잘 양육하여 하나님의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군으로 세워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것이다. 즉 모으는 목회 못지않게 보내는 목회에도 힘써야 한다. 교회가 전도와 양육과 훈련에 힘써야 할 이유다.

양적 성장론은 이 점에서 잘못이다. 모으는 목회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도 개 교회 성장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어선 안 된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구원은 이원론적인 이분법과 달리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만 아니라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참여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를 증거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넷째 교회는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 삶을 잘하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교회 행사 자체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도의 양육을 목표한 목회를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목회자의 사명이 무엇임을 잘 지적한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전1:24절)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따라 살기 쉬운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목회자는 제자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 자신의 가르침이 좋다는 확신이 클수록 더 그렇다. 그렇게 신자들의 믿음까지 주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 목회자가 아닌 부활 주 예수님만이 성도의 믿음을 주관할 수 있다.  인간 목회자는 늘 약점과 불완전함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의 믿음이 잘 자라도록 돕는 자로 그 역할을 한정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대목자장인 예수님이 목회자를 작은 목자로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 목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주인의 어린 양들을 잘 먹이고 성인 양들도 잘 치리하며 또한 잘 먹여야 한다.(요 21:15-17)

이 점에서 그는 유모와 비슷하다.(살전 2:7) 유모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종으로 주인의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돌보는 어머니와 같다. 돕는 자는 도움 받는 자의 인격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  스스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먹이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  맑고 순전한 젖을 먹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벧전 2:2) 이것은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 맑고 깨끗해야 함을 전제한다.(마 5:8)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그리고 유모인 목회자는 구속의 목적이 창조 신학에 있음을 알고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 체계 아래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균형 잡힌 신앙 삶을 살도록 성도를 돕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신학 분야들을 아우르는 통섭(consilience)의 신학으로 잘 무장하여야 한다.

한국 사회의 특징은 매뉴얼이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무슨 일을 할 때 예전 한 일에 대한 평가는 다음 일을 잘하도록 돕는 매뉴얼이 된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아주 훌륭한 매뉴얼이 되며 사회는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매뉴얼은 일의 방법인 길을 알려준다. 일만 중요하지 않고 길도  중요하다. 좋은 매뉴얼은 바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도록 돕는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매뉴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혼란은 가장 완벽한 매뉴얼인 성경을 무시한 결과는 아닌가?  이것은 일만 강조하고 길을 무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종교개혁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언제보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구호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이 무엇임을 먼저 묵상한 후 목회를 하도록 하자.

장창수 / 러시아 선교사·<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 저자
 
출처 :숭사리 교회개혁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 마리안느  /준비: 빈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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