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를 헤쳐 나가는 리더십

마음의 소리 2009. 2. 10. 12:00

급류를 헤쳐 나가는 리더십

 

예수님은 거친 시대에는 이렇게 사역하라고 가르치셨다

고든 맥도날드  Gordon MacDonald December 27, 2008 이지혜 옮김

 

 

 

아내 앤과 나는 14 피트짜리 카약 두 대를 갖고 있다. 카약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 것도 화려하고 매끈하고 간편하다. 제조사윌더니스 시스템스(Wilderness Systems)―가 호수나 잔잔한 강이런 곳을 카약 타기에서는 정수(flat-water, 淨水)라고 부른다에서 타기 좋게 설계한 것들이다.

우리는 정수(淨水) 카약 타기를 즐긴다. 메인이나 뉴햄프셔 주에서 나란히 노를 저으면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 가끔 강둑에서 말코손바닥사슴이나 사슴, 물새 같은 야생동물을 목격하기도 한다. 카약을 타면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기름 값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우린 자주 카약 예찬론을 펼친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물론,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살에 바위와 소용돌이와 암붕(岩棚)이 도사리고 있는 급류에서 타도록 설계된 카약은 따로 있다. 이런 곳에서는 배가 뒤집히기 십상이다. 급류 타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미친 짓에 가깝다.

급류에서 카약을 탈 때는 이야기를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거나 야생동물 사진을 찍거나 하는 일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카약이 뒤집히지 않고 제대로 전진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잔잔한 호수에서 오후 한 나절 아내와 함께 카약을 타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러나 카약을 타고 급류를 헤쳐 나온 사람들은 온몸이 쫄딱 젖고 기진맥진한 채 배에서 기어 나온다. 그 사람들은 다들 재밌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는 정수 같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아 물론, 변화와 혁신도 있었다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정도였고, 적응할 수 없을 만큼 심하지도 않았다.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 5년간 나는 잔잔한 호수에서 유유자적 노를 젓는 것 같은 목회를 했다. 소소한 변화는 있었지만 큰 무리는 없었다.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 시설을 들여 놓은 것이 큰 사건이라면 큰 사건이었다. 성가대 감독과 오르간 연주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꽤 큰 결정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주일 아침 교회 지하실에서 커피를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 발상에 놀란 교인들이 여럿 있었고, 몇 사람은 이 일 때문에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나는 신학 교육도 정수 같은 세계에서 받았다. 그렇게 말들은 안했지만 이런 생각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라, 특정 신학 체계(그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를 섭렵하라, 그리고 개인 경건 생활을 유지하라말하자면, 정수 타기 목회(flat-water pastoring)를 교육받은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정수 시대에 맞게 설계된 목회 리더십이 작동을 멈췄다. 세상은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모든 것들조직, 사상, 제품, 심지어 지도자까지이 갈수록 단명했다. 곳곳에서 바위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거시적 차원에서, 1960년대는 격변기였다. 끔찍한 암살 사건, 과학 기술 혁신, 도덕성 혼란, 국제 동맹 재편, 부정 축재와 빈곤의 심화가 이 시대를 장식했다.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폰, 아이팟 같은 실생활에서 중요한 기기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목회자는 상담자, 매니저, 기술자, 마케터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우리는 한 세대 만에 정수에서 급류로 들어갔다. 여기서 한 굽이 더 돌면 나이아가라 폭포가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내 말의 요점은, 급류가 걱정된다면, 지금이야말로 강가로 노를 저어 나가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당분간은 급류가 이어질 테니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 본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신학이나 영성, 방법론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급류는 기독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삶의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지고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시대가 전에도 있긴 했다. 그때도 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찾아내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예를 들어 보자.

루터. 루터의 시대는 활판 인쇄 기술 덕택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가 널리 확산된 시대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을 개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제도들은 부패했고, 그래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루터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새로운 현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인했다. 하지만 루터는 달랐다. 그는 기독교 세계를 자극하여 신학과 교회에 신선한 혁신, 곧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급류 속에서 오히려 성공했다. 그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사상과 영성을 발전시켰다.

웨슬리.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산업혁명과 촌락에서 공업 도시로 인구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하지 못했지만, 웨슬리는 그 변화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말을 달려 사람들이 일하는 탄광과 시장, 항만 같은 곳으로 찾아가 그들에게 맞게 복음을 전했다. 그를 통해 회심한 민중들을 기성 교회가 받아주기를 거부하자, 웨슬리는 그 사람들을 모아 속회(band)와 반회(class)라는 조직을 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웨슬리의 혁신적인 소그룹 사역은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현재의 인물로는 하이벨스가 있다. 내 친구 빌은 루터나 웨슬리와 나란히 소개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빌 하이벨스는 교회가구도자들”(seekers)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한 우리 시대 새로운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나는 하이벨스와 그의 젊은 동역자들이 정수 교회(flat-water church)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규칙들을 하나하나 깨나가면서 기성 교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을 수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끈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루터와 웨슬리와 하이벨스는 때로 배가 뒤집히는 것도 개의치 않으면서 급류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그 시대에 적절한 비전과 계획을 품은 새로운 사역이 일어났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급류 시대에 들어맞는 참신한 신학적 통찰과 새로운 영성이 탄생한 것이다.

책 좀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 역사는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례를 통해 용기를 얻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 받은 모든 이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용기를 설교하고 가르치며 몸소 본을 보여야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a맥클라렌(Brian McLaren)이 그의 책 제목을 「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Everything Must Change!)로 붙인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저 새로운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인 지도자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고 적응할 것인지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예수님이 맞닥뜨린 급류
우리의 근본적인 문서성경는 급류 시대의 삶과 사역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도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이라는 것을 성서 시대의 사람들도 느꼈을까?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시기 전 감람산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과 같은 급류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세계 유대교 본부에서 행정가들과 종교 호사가들(administrators and religious dilettantes, 서기관과 바리새인/편주)과 한판 붙으셨다.

예수님이 그들과 정면충돌하신 사건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될 판이었다. 감람산 세미나가 있던 날, 결국 사달이 났다. 반대자들의 편협한 형식주의에 넌더리가 난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성전 문을 박차고 나가셨다. 마태복음 23장 마지막 부분(37-39/편주)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별사를 읽어보면, 이런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표현해 보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당신들의 영적인 민감성에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나는 이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당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교회를 걸어 나가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예루살렘 도성에 계신 그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는 잘 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도 그러신다면, 그 까닭은 뭘까?

예수님이 그렇게 성전 문을 나서시자, 깜짝 놀란 제자들은 뒤따르며 이렇게 여쭈었다. “이 건물들이 보이십니까?”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선생님 편으로 포섭해야 할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셨다고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우습게 보셨단 말씀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뒤돌아 제자들을 보시고는 성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것들이 보이느냐? 내가 말하노니,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리라!” 예수님의 말씀 몇 마디에, 성전과 그것이 상징하는 종교 체제는 성전에서 건물로, ‘이것들로’, 돌들로 전락해 버렸다.

전율이 느껴지는 전락이다.

이런 격렬한 대화가 오간 후에 급류 시대를 대비한 세미나가 이어졌다. 거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속속들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성전을 이 세상의 중심, 곧 이 땅에 마련해 두신 하나님의 본부로 여기며 살아 왔다.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성전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이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고작 이런 질문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 이 일이 일어난단 말씀입니까? 이것이 주님의 승천(이나 재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질문들은 자기네 스승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느라, 뜻도 모르고 한 말인 것 같다. 제자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성전이 망한다면, 도대체 안 망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마태복음은 계속해서 전쟁과 인류 멸망, 자연재해, 판치는 불의, 속임수, 사회 분열을 언급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할 것만 같은 세계 체제가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는 그림을 그리신다. 역사의 시대마다 나타났던 수많은 급류들을 묘사하신 것이다. 어떤 지역을 보나 세계 전체를 보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내 생각에, 예수님은 무시무시한 급류 시대에 대비하여 글로벌 비전을 갖추도록 지금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신다. 예수님은 구세주시니 적당한 선에서 경고나 몇 말씀 하시고 낙관적인 역사관을 내비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제발 부탁드려요. 이 갈릴리 촌뜨기들을 보내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을 성취하려 하신다면, 이런 식으로 겁주시면 안 되죠! 그랬다가는 다 줄행랑을 치고 말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의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세상은 지진해일과 국제 분쟁, 경제 불안이 난무한 오늘날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틀림없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지독하게 운 나쁘고 엉망으로 꼬이기만 하는 날에(나는 이 표현을 주디스 바이올스트(Judith Viorst)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이 동화 책은 「난 지구 반대편 나라로 가 버릴 테야!(고슴도치)로 역간됐다/편주),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과 청지기로 신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다음 내용은 급류 시대를 헤쳐 나가는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변함없는 원칙들이다. 각 항목은 이 지구 위 어떤 문화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역사의 어떤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 이것들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서 뽑은 것들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정리했다.

내가 가르친 나라는 제도나 권력과는 상관이 없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황금 건물이나 석조 건물도 아니다. 이 나라는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하늘의 진리가 동력이다. 천지 만물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가르친 진리는 망하지 않고 건재할 것이다. 이 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 진리를 기억하고 소화하여 실천하라.

급류처럼 힘겨운 시기를 예상하라. 어려움이 닥칠 때를 대비하라. 삶이 쾌청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거친 환경이 찾아올 것이다. 고난을 겪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 가운데 순종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나를 따르려면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 아무런 고난도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왕의 왕이 다시 와서 역사를 마무리하시는 그 날을 대비하라. 그때에는 기이하고 전에 없던 일들이 있을 것이다. 신실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갈라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너희는 날마다 내가 다시 올 날을 예상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약속하는 재림이 있기에 너희는 소망 있는 백성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소명을 온전하고 신실하게 실천하라. 내가 너희에게 믿고 맡긴 것들(과 사람들)을 지혜롭게 관리하여 책임감 있는 청지기로 살라. 너희 행동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을 명심해야 한다. 너희가 이끄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너희는 충성했는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너희 생명과 자원을 투자했는가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굶주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수들)을 소홀히 하지 마라. 그들이야말로 너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는 날, 연약한 형제자매들에게 한 너희 행동을 보고 하나님은 판단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략을 분명히 말씀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회심시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제자들)의 공동체로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리더십에서 인상적인 점은 바로 그 단순심오함이었다. 예수님의 원칙은 그 어떤 사역 환경에도 적용 가능하지만, 급류 시대에는 더욱 적절하다. 때로 돈과 건물과 조직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필수는 아니다.

이 제자/사도들이 예수님의 계획을 적용하여 아주 훌륭하게 실행해 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실수, 지연, 반대 세력? 물론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굳건하게 나아갔고, 주님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제자들의 전략은 무자본과 풍부한 인력이었다.

이 문화에서 저 문화로 옮겨 다니면서 맞닥뜨린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제자들은사역 계획을 조정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훈련시켜 자신들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준비시키셨다. 급류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염려와 나의 기대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급류에 적응하면서, 과학기술과 프로그램 개발, 조직적인 전략 같은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험한 환경을 돌파하도록 우리를 안내해 줄 신학과 영성을 개발하는 일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내가 낙관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소위 남방 개발도상국(Global South)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점점 더 많이 배울 것이다. 그들은 북방 선진국(Global North)에 사는 우리보다 감람산 세미나의 내용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당분간은 계속해서 급류가 밀려올 것이다. 경제 상황, 국제 관계 재조정, 민족 이동 같은 것들이 우리 생각과 감정을 극한으로 몰고 갈 것이다.

빈부 격차 심화,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 결혼 제도의 붕괴, 에너지 고비용 같은(말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현실적인 문제가 신자 공동체를 시험할 것이다. 그중에는 이런 시험을 견뎌 내지 못하는 공동체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잘 극복하는 공동체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감람산 세미나에서 하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결과로 말이다. 온몸이 물에 쫄딱 젖고 지쳐 나가떨어질 지경이라도 급류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영적 리더십의 훌륭한 모델이 될 것이다.

 

 

출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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