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단경계 2010. 9. 11. 15:04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성경이 66권으로 정해져 온 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책이므로(딤후 3:15) 이 중요한 책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정경에 포함시키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훼손하시지도 않을 것이구요. 또 별의별 문서가 난립하여 진리를 흐리려는 악한 상황에서 정경을 확정해야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믿는 자는 정경 채택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감동이 있어 오늘날까지 변개되지 않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로 주심을 믿습니다. 따라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여기고 넘어가면 되지요. 정경만 다 읽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것도 다 모를거면서.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취급하는 문서들을 천주교에서는 정경에 포함시켰습니다. 그 천주교에서도 도마복음은 외경으로 분류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외경도 아닌 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경은 저자가 실제 저자와 다르다거나 해서 진위성이 의심되는 신학 문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 집을 가나 저 집을 가나 찬밥 신세죠. 확실히 짝퉁입니다.

성경은 통일성이 있는데 도마복음은 그것에 현저히 어긋납니다. 성경 구절과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으로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합니다. 짝퉁은 명품 흉내를 내야 팔리죠. 그런데 정경 채택 이전에는 정경도 외경도 없었다고 어떻게든 도마복음을 비호하려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올림픽 공식 종목이 정해지기 전에는 공식/비공식 종목이 없었으니 화투도 껴달라고 할까요?  정경 채택은 화투 채택문제보다 훨씬 엄중한 일인데 말이죠.

도마복음은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 1:8).

1. 도마와 도마복음

도마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은 매우 적습니다. 단지 그가 12 사도 중에 한 명이라는 것과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에는 의심하였다가 후에 직접 부활한 주님을 만나 후 확인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12 사도 중에는 그 직업이 세리, 열혈당원, 어부 등이 있었는데, 도마는 전직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그저 도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마의 헬라식 이름은 아람어 테오마(쌍둥이 중에서 한 사람)에서 음역한 것으로, 헬라어로서는 디뒤모스 (쌍둥이 중에서 한 사람)로 그가 쌍둥이 형제 중에 한 명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도마가 회의가(의심을 품은 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역본에서 볼 수 있듯이 ‘디두모’라는 이름 대신에 ‘바뿌스코스: 두 마음 있는’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확신과 의심의 두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쌍둥이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도마는 전승에 의하면, 페루시아 또는 인도 등 동양권에서 전도하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도마복음은 지난 1945년 12월 이집트에서 농부가 땅을 파던 중 항아리에 담겨진 채 발견되었는데 서두에 도마가 기록한 예수님의 어록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도마가 기록하였다고 믿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이 복음서는 발견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원초적 복음서로 믿어졌으나 지금은 2차 문헌으로 취급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도마복음을 들먹이면서 공관복음의 예수상을 뒤집어 엎으려는 시도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도마복음은 위경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영지주의 기독교 문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원문을 콥트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완전한 콥트어판본이 1945년 나지함마디에서 발견되었으며 이후, 1898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문서 중 일부가 도마 복음서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도마 복음서는 4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지 않고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만을 다루고 있는데, 소위 겨자씨의 비유 등의 일부 내용이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도마 복음서는 비슷한 이름의 문서인 도마행전(The Acts of Thomas), 도마의 유아기 복음(The Infancy gospel of Thomas)과는 다른 것입니다. 도마복음은 1945년 나지 함마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이집트의 고문서성의 소유였습니다.

1956년에 사진 촬영판이 출판되었고, 1959년부터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1975년에 알려졌고 이후 많은 번역이 존재합니다. 도마 복음서의 콥트어 판이 발견된 이후에, 학자들은 이집트의 옥시링크스에서 1898년 발견된 그리스어 문서들 중에 도마 복음서의 그리스어 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흔히 후자를 구별하여 그리스어 도마 복음서라고 부르는데 200년 경에 필사되었다고 추정되며, 콥트어 판은 340년 경의 문서로 추정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콥트어 판이 그리스어 판의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구절은 디디모스 유다 토마/도마가 저자라고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도마가 직접 쓰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그랬듯 도마는 시리아 지역의 믿음의 대표격이었습니다. 따라서 도마 복음은 시리아에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도마 복음서의 저작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어록 복음서의 특성상 4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영지주의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영지주의가 유행했던 1세기 후반 이후의 저작, 또는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도마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대체적으로 서기 150-200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도마복음서는 그 내용이 다른 복음서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외경 또는 위경으로 불리며 배척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고 이단 문서로 정죄되고 가짜 문서로 여겨졌습니다. 이 문서는 초대 기독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레니우스가 《이단에 반대하여》(=《이단반박》)에서 언급한 비슷한 책이 있으나 도마 복음서인지 다른 도마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인지는 불분명합니다.

2. 도마복음과 영지주의

영지(靈知)란 신비스러운 지식, 영적인 깨달음, 영적인 지식, 신비한 지식, 신비한 영역에 대한 지식 따위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는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영지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 영지를 통해 극상의 존재인 가장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과 연합하여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에서는 그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즉, 사람은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란 그노시스 혹은 ‘보다 높은 지식’으로서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했으며 이것은 소수 영적인 지식인에게만 국한된다고 보았으므로 구원이 극소수의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개신교란에도 자기들만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사람( 신사도 예언가)들이 있습니다. 실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 사설을 고집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들에게 구원이란 바로 예수와 같은 빛의 사자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신념 체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를 중시해 내면의 준비 과정과 자아 성찰, 변화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또 육체는 악하다는 신념에 따라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는 예수가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인간이 아니라는 가현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불완전한 육체의 세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그노시스적 앎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예수가 완전한 존재의 화신으로 영지를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 우주론적 신화, 희랍과 동양의 이교적 철학 사상, 기독교의 진리 등이 혼합된 종교를 시도하게 되었는데. 기독교와 공통된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지로는 심히 왜곡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적 사상이 더 우세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유대적 요소, 헬라적 요소, 이런 여러 근원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이용해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하나의 우주적인 종교가 되게 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하였으며, 기독교를 당시의 종교 풍토에 적응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로 영지주의는 짬뽕주의이자 이단/사이비 사상입니다.

도마복음을 근거로 예수님이 인도에서 배운 불교를 전했다는 헛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문서에서 짬뽕주의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가 말씀하신 비밀의 구절들’, ‘나의 비밀을 합당한 자들에게만 보였다’ 등의 구절들과 불교 냄새가 나는 구절들이 많은데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추후 살펴보겠습니다.

정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관성이 있어서 당연히 짬뽕주의가 낄 수 없습니다.  

3. 도마복음과 성경/기독교 비교

이번에는 도마복음으로 기독교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하는 이들의 시도가 매우 부적절한 것임을 어느 비교종교학자이자 기독교인이라는 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 분도 도마복음에 영지주의적인 내용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도마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공관복음에서처럼 ‘나를 따르라, 믿으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깨쳐라, 깨달아라, 하나님(천국)은 너의 가슴에 있다는 것을 알라’는 분이지요.

도마복음 전체 114절가운데 90회 이상 깨침(깨달음)에 대한 언급이 나올 정도입니다. 사실 이런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돕니다.]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불교는 초등학문 수준은 면할 것이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대오각성하여 부처가 된다거나 우화등선의 신선놀음을 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때로부터 말씀하셨고 아들을 보내사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요 8:28), 아들의 가르침을 제자와 사도들이 전한 것으로 신약 성경을 이루었으므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일관된 주제와 사상을 전해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이며 자기의 내적 요소를 탐구하거나 계발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안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주목하고 회복해가는 종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님이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깨달음의 목적도 역시 그리스도화 되는 것에 있습니다.  

교수는 도마복음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별성을 강조한 공관복음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의 동일성을 강조한 밀의적(密意的) 복음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현교적(엑소테릭·exoteric)인 부분과 밀교적(에소테릭·esoteric)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도마복음은 그 가운데 밀의적, 심원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부분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출현은 표피적이고 대중적인 현교적 가르침에만 치우쳐 있었던 기독교에 밀의적 부분도 있었음을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며, 발견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 교수는 “도마복음의 발견으로 기독교는 표피적이고 물질적이고 기복적이며 신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낮은 단계의 신앙에서 보다 높은 단계의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도마복음의 출현에 의미를 부여했다.

교수는 불교에도 현교와 밀교가 있고, 힌두에도 우파니사드와 같은 에소테릭(밀의적)한 가르침이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기독교에도 밀의적 레벨이 본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1600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며, 기독교가 그동안 현교적 종교로 만 내려오며 기독교내에서 신비주의적 전통이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 예수의 가르침에 밀교적/밀의적 가르침이 있다?

기독교의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며 이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흔히 ‘미개인’이라 부르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인'에게도 그들의 언어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기쁜 소식인 동시에 대중적이고 쉬운 소식이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워서는 안되는 거죠. 복음이 부처님 선문답처럼 알쏭달쏭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신비적이고 밀의적인 깨달음을 얻어야만 구원을 받는다하면 값없이 믿음으로 얻는 십자가의 은혜를 대적하는 생각입니다.

영지주의 문서답게 도마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비유 말씀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형태가 좀 다른 것도 있구요.

거기에 밀의적인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만 당시의 비유말씀은 제자들마저도 영적으로 무지했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전이므로 그들이 깨닫기 힘들었던 것일 뿐입니다. 박식한 성경학자마저도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어머니 뱃속으로 어떻게 다시 들어갔다 나올수 있느냐고 물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비유말씀을 자세히 해설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신비한 것이 있다하여 밀교적 가르침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해석하기가 어렵거나 아직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현교적 가르침은 표피적이고 대중적이며 따라서 수준이 낮다?

- 수준 높으신 분들은 밀교적 가르침을 따라 사세요. 신비주의적인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득도하고 공중 부양도 했다가 유체이탈도 했다가...근데 그것이 구원을 해주려나?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도마복음은 하나님과 사람의 동일성을 강조한 밀의적 복음이다? 도마복음의 발견으로 기독교는 표피적이고 물질적이고 기복적이며 신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낮은 단계의 신앙에서 보다 높은 단계의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 확실히 도마복음은 그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불교 냄새가 강합니다.

[예수가 말씀 하셨다. " 누구든 내 입으로 부터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되리니 내가 그가 되겠고 그에게 비밀을 보일 것이다-108절]

마치 깨달음을 얻으면 내가 곧 부처가 된다라는 불교적 가르침과 비슷하죠?
기독교를 ‘표피적이고 물질적이고 기복적이며 신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낮은 단계의 신앙’으로 표현한 것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표피적이고 물질적이지 않고 기복적이며 신과 사람의 차별이 수준 낮다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표피적이고 물질적이다?

- 이것은 현재 기독교인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두고 한 말 같군요. 그건 기독교인이 잘못 하고 있는 것이지 기독교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성경의 가르침은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다가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지 말고 미련도 갖지 말고 흰 옷을 입으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기복적이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방 종교의 수준 낮은 기복신앙처럼 육체의 소욕과 땅의 보물을 구하는데 급급하기에 똑같아 보일 뿐입니다. 본래 성경대로 가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그리하면 모든 필요을 채워주신다고 합니다(마 6:33). 또 평안하게 살고자 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 같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딤전 2:1-2).

기복에 있어서도 하늘의 신령한 복을 구하고(엡 1:3)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합니다(마 6:33). 한마디로 하늘의 복을 구하면 땅의 복은 하나님이 알아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 아버지로서(창 1:28), 자녀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시며(민 6:24) 모든 생명이 내일 해도 볼 수 있도록 만물을 붙드시는 복을 주십니다(히 1:3).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매일 복을 구하여야 합니다. 천박한 기복신앙처럼 땅의 복만을 구하면 문제가 있지만요. 어린이는 사탕을 구하지만 장성하면 유업을 구합니다.

신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낮은 단계의 신앙? 하나님과 사람의 동일성을 강조한 밀의적(密意的) 복음? - 불교에서는 내가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그걸 수준 높은 것이라고 칩시다. 기독교에서는 내가 하나님이 된다고 하면 영생할 정도로 욕을 많이 먹겠죠.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소개되는 분은 성자와 성령님입니다. 성자는 인간이기도 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신 독특한 분이시니까 넘어 가구요.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요10:34절은 신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여겨진

재판관들과(시편)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계시의 말씀을 전달받아 그의 뜻을 대표하여 전하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을 ‘신’이라 불러주신다 하여 피조물이 창조주와 동등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의 ‘구분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다라는 구절(골 1:18)을 예로 살펴봅시다.

머리에는 두뇌와 눈, 코, 귀, 입이 있습니다. 두뇌는 모든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판단하여 모든 기관에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 하달시 즉각적인 (반응)순종을 보여야 건강한 몸입니다. 병들었거나 묶여있거나 하는 것은 비정상적(불순종)인 경우입니다. 눈은 볼 것을 보고 보지 못할 것을 보지 않고, 코는 맡아야 할 것을 맡고 맡지 말아야 할 것을 맡지 않고, 귀는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지 않으며, 입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말하지 말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명령하고 듣고 보고 말하고 냄새 맡는 모든 기관은 머리에 있습니다. 그 머리와 몸을 구분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머리의 역할을 탐하지 말고 온전히 복종하라는 뜻이자 하나님과 사람의 구분됨을 나타냅니다.

사람과 신의 관계를 구분 혹은 동일로 여기는 것은 수준의 고하가 아닌 관점의 차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구분을 말하며 동일은 이단 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구분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동일과는 다른 ‘연합’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사랑으로 맺어진 연합관계에 있는 것처럼 선택받은 사람들끼리 연합하고 그들이 또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연합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길게 얘기하면 피곤하니 넘어갑시다.  

[도마복음은 기독교가 불교 등 깨달음의 종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자 맹목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현대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교수의 판단이다.] No!

[교수는 “원래부터 기독교에는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었고, 이는 현대 기독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즉 신과 나를 차별적인 대상으로 보는 낮은 단계의 신앙을 극복하고 신과 나의 동질적 전통을 되찾을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도마복음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No!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면서 “신비주의의 민주화, 신비주의의 대중화·일상화·생활화가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No!

[어느 종교에서든 깊이 들어가면 종교의 이름이 점차 의미가 없어지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No!

[교수는 한국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것은 ‘나를 믿고 따르라’는 가르침을 배타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초월된 나, 불교의 불성에 비교되는 나 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의 나, 동학의 시천주나 인내천 사상에서의 나를 의미한다는 것을 한국 기독교가 받아들일 때”라고 강조했다.] No!

[분명한 것은 믿음도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맞긴 한데

- 이 주장들에서 묻어나는 것은 짬뽕주의입니다. 본래의 기독교에서 타종교, 이방 사상,

이방 문화와 짬뽕시켜 이방인들이 좋아할만한 종교로 가자하는 말들입니다. 말을 빙빙 돌려봐야 결국 짬뽕이죠. 세상 모두가 짬뽕을 외치고 강압해도 홀로 간짜장 곱빼기를 목숨 걸고 외쳐야 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짬뽕을 주문하셨으며 성경 어디에 짬뽕도 좋다 했습니까?기본적인 독서능력만 있어도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결과 구별됨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성구가 요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요 근본되시고(길) 예수님만이 참되고 진실한 가치이시며(진리) 예수님만이 모든 육적/영적 사망으로부터 건지실 생명이 되십니다(일위일체 얘기 아님;;).

‘오직 예수’란 그런 것입니다. 반드시 사수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이자 모든 것입니다.
이것은 배타성이 아니라 유일성(唯一性)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유일성을 가지기에 배타성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와 철학과 학문, 사상, 문화 어떤 것이든 멀리하고 분별하면서 오직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거룩하게 구별되고 순결한 처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로 짬뽕을 주장하는 누구나 거짓 선생이 됩니다. 미처 분별을 하지 못하여 짬뽕이 된 것과 고의로 짬뽕을 시도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등지고 살면서 도 닦는 종교이냐? 아니죠. 세상 가운데 살면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처럼 사망에 잠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종교인과의 화합’은 가하되 ‘타종교와의 화합’은 불가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이란 정복의 대상일 뿐(창 1:28, 마 10:34) 친구가 되는 순간 간음하는 것입니다(약 4:4).

처음부터 들은 것을 지키고(요일 2:24) 때가 묻지 않도록 늘 두루마기를 빠는 자여야 합니다(계22:14).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는 종’입니다. 종으로서 하나님과 위의 권세에 복종하고 순종하며(롬 13:1) 자유하는 자로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갈 5:13) 의의 종이 되어(롬 6:19)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갈 2:20).

믿음은 성장해야 하나 그것은 세상과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구별되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tv, 인터넷, 영화, 스포츠, 취미, 일, 사역,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보고, 듣고, 맡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머리의 뜻대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독교신앙입니다. 자유하는 종 말입니다.

4. 도마복음에 나타난 짝퉁 구절

글이 너무 길어져서 짧게...

영지주의

- 이 구절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너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해 하는 자가 있기를 바라노라.-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믿을 때에 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귀도 들은 적이 없는, 어느 손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인간의 가슴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을 주겠노라

-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들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시니까요.

모든 것을 아는 자,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는 자, 그는 전혀 무지한 자이니라

-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종교입니다.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는 종교...

선문답?

차라리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너희의 밖에 있느니라. 그 들은 빈 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 가고자 노력 하느니라- 공수래 공수거-

마지막 날을 알고자 함은 너희가 시작 (beginning)을 앎이뇨?. 너희도 알다시피,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반성경적 구절

세 명의 신이 있으면 그들은 신성하다- 삼신론

지나 가는 자 (방관자 또는 나그네?)가 되거라. - 장난?

존재 하기 전에 존재 하게 된 자를 축하 하나니- 사람이 창조전에 존재했다고라고라?

네가 금식 한다면 너희 스스로에게 죄를 불러 올 것이며, 네가 기도 한다면 저주 받을 것이요,

적선을 베풀면 너의 영혼을 손상 시킬 것이다. - 장난이 지나침

네가 네 자신을 알때 너는 천국을 알게 되고 네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이해 할 것이다.

-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됨.

보라 내가 그녀(마리아)를 남성으로 만들어 인도 하겠다. 그래서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 있는 영 (spirit)이 될 수 있게 하리니, 모든 여성 중 그녀 자신을 남성으로 변화 시키는 여성들도 천국에 들어 가리라
- 하나님은 성전환 수술 안 시켜주심.

5. 한줄 결론

‘도마복음’이란 말은 과하고, 짝퉁 ‘도마서’가 합당합니다.

이웃 게시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