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곡

         최송연

 

산천은 저리도
곱게 물들고  들에는

오곡백과 무르익어

농부의 마음을 즐겁게 하건만...


이 가을의 향기 따라

농부되신 주님이

날 찾아 오신다면


난 어쩔까
내어드릴 열매가 
너무 없으니...


성령님,

저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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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늘 말하는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물어본다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로 답하겠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다음 4가지 구조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잘 기억하셨다가 전도할 때 적용하시면 좋을 것같습니다.

1. 하나님. 2. 인간 3. 예수님.
4. 믿음의 단계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십니다.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너무나 사랑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죄를 간과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다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두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의 값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지옥형벌입니다.

세째로,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 하시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참인간, 참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상에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그 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이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 의 과정에 이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다루시면서 우리가 구원을 완성해 나가도록 성령님께서 견인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4가지의 구조,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죄는 미워하십니다. 인간인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 스스로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지옥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신데 참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만 잘 전하시면 좋을 것같습니다. 아멘.

 

테힐라 님의 말씀 / 정리 :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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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성령님.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내려 주옵소서. 기도의 강력한 영적무기인 방언의 은사를 풀어 주시옵소서. 성령님,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우리 군사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따라, 주님의 아름다운 뜻에 합당하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군사 한 분 한 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풀어 주옵소서. 

아버지, 기도 군사의 처소에 신령한 은사를 풀어 주세요. 오!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직 방언은사를 받지 못한 군사들에게 기도의 언어, 기도의 영적무기인 방언의 은사를 이 시간 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우리 기도의 군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까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기도군사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 시간이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시고 우리 문제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정결하고 성결케 하여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우리 기도 군사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겸손하게 마음문을 활짝 열어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세요.  

아버지 하나님이여, 선 줄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낮고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나보다 남을 다 낫게 여기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시며 아버지여, 친절하고 사랑하며 배려하게 하옵소서. 주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그렇게 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하게 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사람의 관계에서 그것이 부부이던, 자녀와 부모의 사이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게 하시고 악이 있더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직 화평을 심는 자들이 되게 해주세요.

내 자아를 죽여주시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 사랑을 우리도 나누어 주며 베풀며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평을 심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세요. 사랑으로 소금치듯 베풀게 하여 주시고 배려하게 하시고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테힐라 님의 말씀 / 정리 :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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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절기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의 중보기도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사탄은 이 시대의 어두운 세상 모든 문화와 미디어를 장악하고, 불신자를 비롯해서
 믿는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떠나 배도케 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최후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사탄의 진영과 권세를 깨트리고 믿는 자들을 문서사역으로 무장시켜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우뚝 세우고자 세상 문화를 이길 믿음의 양식인 책 2권을 출간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선교 활동 중 죽음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파송하신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인 구출을 받은 생생한 간증과, 신앙 에세이집인 
1권: 여호와는 나의 목자(제목)
또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노래하듯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틈틈히 지은 

2권: 내 영혼의 노래(제목)
이 두권을 지난 2월에 출간했습니다.
구입처는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에 올려져 있습니다.

-교보문고에서는 반응이 좋아 2권이 동시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은퇴 선교사인 제가
주님나라에 갈 때까지 문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 부탁드리고 도서도 구입해 주셔서 
자녀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영의 양식으로 나눠주시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여기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최송연 드림

작가 정보 보기 = 최송연.com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한국전력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종사하던 제가 나이 만 마흔일곱 살 한창나이에 IMF 한시퇴직 하고 미국에 와서 신학공부와 개척교회를 하다 은퇴하였으니 수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재산도 없고 한국의 연금도 없고, 얼마 되지 않는 미국의 사회보장연금(SSI)만으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교회나 교단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없고 미국정부에서 저소득아파트 같은 극빈자 혜택프로그램을 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겨우 식품보조 프로그램(Food Stamp) 혜택을 받아 생활에 보탬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태 굶주리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앉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을 때를 생각하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아파트 렌트비도 낼 수 없던 그 때의 아슬아슬했던 상황과, 그 때마다 기가 막히게 도움을 보내오신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과 방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참으로 우리 가족은 그 때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회를 접고 은퇴 아닌 은퇴를 한 뒤 2020년에 본격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을 때가 또한 저희에게 닥친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10년마다 하는 미국 인구센서스가 마침 그 해 2020년에도 있었고 약 3개월 정도 소요되는 센서스 기간 중 일을 할 인구센서스 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있어 저도 응모하여 인구센서스 요원이 되었습니다. 3개월이라도 일을 해야 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센서스 요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창궐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센서스요원 교육과 센서스가 한 동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정부에서 코로나로 인한 실업수당 지금 프로그램이 시행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자격은 희한하게도 제가 센서스 요원으로 응모한 직후 시점을 기준으로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시점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덕분에 한 주에 몇 백 달러씩 주는 코로나 실업수당을 1년 반 동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팬데믹 실업수당을 받지 못 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습니다.

 

 

작년 2022년 가을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실업수당지급도 중단된 다음부터는 승용차로 한인마트 빵배달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아름 마켓의 식품배달 일도 몇 달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어대시, 우버이트 딜리버리, 그리고 우버엑스 드라이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달려 젊은 사람들처럼 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건강하고 운전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사나흘 정도 일을 합니다.

 

 

이젠 편안한 은퇴후 생활을 누려야 할 나이에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싶고 내가 왜 이런 가난과 궁핍의 길을 걸어왔는지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부르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싶은 때도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저희와 지금의 저희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과 홍해를 건넌 백성이 같을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가마솥 고깃국과 마늘과 부추를 먹으면서 편안하게 애굽 종살이 하는 것과 만나를 먹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가나안을 향하여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걷는 것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도 드라이버 일을 나갑니다. 어두운 밤 뉴저지의 열악한 도로를 달리는 밤길운전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렇게 운전을 할 수 있는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다 가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쓰임 받도록 부르심 받은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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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동안 1부. 기도시간에 찬양을 많이 올려드렸으나 오늘은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정결하게 되므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귀한 시간 되게 해달라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또 여러분 각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 한 지 5년 10년이 되었지만  나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많은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성경책을 들고 교회 문지방을 왔다갔다 하는, 그런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닌지 이 기도시간을 통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테힐라는 이전에도 간증을 했지만 "주님, 저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런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하니까 그냥 왔다갔다 하는 그런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정말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삶, 그런 주님과의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훌륭한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귀한 말씀을 듣지만 그러나 테힐라 기도의 방송에 들어오셔서 테힐라가 말씀을 나누는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이 말씀을 깊이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한 분 한 분 개인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을 진심으로 간절히 구하며 기도하고 "아버지, 저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제발 가르쳐 주옵소서."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이 테힐라 기도회를 통하여 그러한 영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축복의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네, 많은 분들, 제 주위에도 있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 가서 예배생활, 헌금생활을 하고 또 봉사하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구원의 확신이 있고, 내가 진정 거듭났고,  내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한 번 깊이 돌아보십시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에 대해서 예수님께 들었습니다. 들었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사람이 어떻게 두 번이나 어머니 배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영적인 거듬남을 말했는데 육적인  대답을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말씀의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거듭났습니까? 이 시간, 오늘 저녁에 목숨, 숨을 거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구원에 확신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오늘 이 시간 한 번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진중하게  주님과의 만남, 인격적인 만남,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지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고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주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더욱더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기를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얼굴을 구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구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그냥 형식에 치우쳐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서 주님과 대화하고 내 삶을 통해서 동행하며 동역하는, 임마누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와 소통하고 나와 대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 한 순간도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내가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까지도 성령님의 간섭과 성령님의 통제를 받는 그런 임재의 연습을 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우리 기도 군사님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성경에는 아들을 잃고 애통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아들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 이야기입니다. 꿈 이야기를 했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은 야곱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양떼를 치는 형들을 찾아갔다가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고들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은 이십을 받고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은 요셉의 아름다운 자색 옷을 찢어서 염소를 죽인 피에 적셔서 아버지에게 보입니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에 이 옷을 발견하였는데 혹 당신의 아들의 옷이 맞는지 보세요.” 그렇게 아버지를 속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속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못 된 짐승에게 잡혀 먹힌 줄 알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합니다. 그 모든 위로를 받지 아니하고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목 놓아 슬피 울고 또 울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무엘하 18장과 19장에 나오는 다윗왕이 악한 아들 압살롬을 잃은 다음 대성통곡하는 장면입니다. 악한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다윗은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을 궁궐 지붕 위에서 범하는 극악무도한 패륜까지 저지릅니다. 결국은 다윗의 부하들과의 전투 끝에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이 반했다는 아름다운 그 머리카락이 휘날려 상수리나무에 휘감겨 버린 겁니다. 다윗은 전투에 나가는 부하들에게 비록 패역한 아들이지만 압살롬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군대장관 요압은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찌르고 그 10명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쳐 죽여 버립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압살롬을 쳐부순 백성들과 부하들이 오히려 민망해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을 예표(豫表)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열 명의 아들들이 피 묻은 요셉의 자색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집, 천국에 돌아갑니다.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창으로 심장을 찔려 죽었는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로마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야곱과 다윗은 그렇게 슬피 울었는데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울부짖을 때 하늘에서 통곡하지 않으셨을까요? 제 육시부터 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시고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갈라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그 슬픔을 숨기시려고 어두움으로 가리셨고 애통을 참으시며 땅을 치지 않으셨겠습니까? 아, 하나님, 이 죄인을 구하시려고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셨단 말입니까? 벌레보다 못 한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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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인지 넋두리인지를 하고자 합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기술담당부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미국에서 제작하는 기자재의 기술지원을 위하여 기계담당, 전기담당 부장이 파견되어 나와서 저를 도와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했던 한기 부장님 세 분이 다 일찍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 남았습니다. (설명: 한전기술(주: 한기, KOPEC)는 한전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을 담당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1970년대에 한국원자력엔지니어링(주: KNE)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지금까지 한국전력과 한수원(원자력)의 기술과 설계를 담당, 지원해 오고 있는 회사입니다.)

 

 

그 세 분 부장님 가운데 가장 먼저 최H 부장님은 저와 함께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1997년엔가 아직 40대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남겨놓고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저와 참 친하게 지냈던 조W 부장님은 뉴욕사무소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여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에서도 잠시 저와 함께 일했는데 그 두어 해 뒤 아직 50대 초반 한창나이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을 남겨놓고 혈액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H 부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최 H 부장님의 후임으로 뉴욕사무소에 부임하였던 조H 부장님은 퇴직후 귀국하지 않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아오셨는데 당뇨병과 공황장애, 그리고 파킨슨병 등 등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저 지난 주에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직 71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조H 부장님이 투병중이던 때에 가끔씩 방문하여 왔는데 지난 7월 8일 오후, 제가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 제가 도착하기 불과 십 분 전에 운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조H 부장님이 25년 넘게 다녔던 교회에서 치러진 천국환송예배와 장지(葬地)에서 치러진 하관예배에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조 집사님을 기리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조 부장님은 세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내었고(아들은 목사요 아프리카 선교사, 큰딸은 전도사) 손주도 다섯이나 보고 71세에 돌아가셨으니 앞서 돌아가신 두 분에 비하면 훨씬 복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일했던 한기 부장님들 세 분을 모두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부터 의문스럽고 원망스럽고 슬펐습니다. 저의 기억 속에는 함께 일할 때와 함께 골프를 치던 때의 그 세 분의 모습과 음성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세 분 부장님들이 모두 이른 나이에 뜻하지 않은 병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였지만 그렇다고 저는 저만 그런 고통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뜻하지 않았던 퇴직을 당하고 미국으로 와 뒤늦은 신학공부와 목회자의 길, 가난과 궁핍의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저와 우리 가족의 고난의 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고난의 고통과 슬픔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경 시편 90편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수고와 슬픔 속에 살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좀 일찍 죽었다고 불행이 아니고 좀 더 살았다고 복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들이 줄을 이어 수고의 산과 슬픔의 골짜기를 넘으며 신속히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세상을 뜨고 있으며 우리 모두 그 줄에 서서 마지막을 향하여 떼밀려 나아갑니다. 내가 그 줄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내 앞에 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언제 내 차례가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 줄에서 빠질 수도 없고 비켜설 수도 없고 멈춰 설 수도 없습니다. 확실히 아는 것은 언젠가 내 차례가 오고 나도 떠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한 것은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그 세 분 부장님들을 믿음 안에서 만났고 또 하나님의 품안에서 다시 영원히 만날 것입니다. 그 세 분은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윗분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우회를 이끌 때 신우회 모임에 동참하여 저를 도와주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업무에 있어서도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마음을 함께 하여 일하였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분은 이제 저보다 앞서 주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뒤에 남겨두고 간 그 분들을 “죽음이나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그 곳에서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도 그 곳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웠던 그 때처럼, 함께 일하고 함께 골프를 치던 그 때처럼 천국에서 다시 함께 할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가 소멸될 존재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도 신앙도 헛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을 자들에게서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려 아들을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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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의지하는 기도/최송연

 

 

주님. .
나로 하여금 날이면 날마다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사모하는 영혼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님의 뜻 가운데서 

생명수 샘터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의 보좌 앞에서  쉬임없이 퐁퐁 솟아나는 생명수, 

사람을 살리는 그 귀한 생수를 퍼올려

목마른 내 영혼도  적셔 새롭게 하시고

나만 마실게 아니라 새롭게 된 영혼의 그릇에

생수를 가득히 담아서 목마른 영혼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기까지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하소서


놀라운 우리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아 

주님과 하나되는 영혼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의식에 길들어져

성전 마당만 밟는 헛된 발걸음이 되지 않고

더 깊은 지성소로 나아갈  있도록

성령님이여 나를 이끌어 주소서.


어떤 풍파와 태풍이 휘몰아쳐 내 생을 덮친다고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주님은 나의 방패요,

나의 기업이 되심을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 이 때

영적인 잠에 취할까 두렵아오니 성령님이여,

불의 혀같이, 비둘기 같이 바람같이 불로불로

내 영혼을 덮어주소서.

 

그리하여 기도의 영이 회복되고,

회개의 영이 회복되고,

사랑의 영이 회복 되어 

기름 준비를 잘 할 수 있게 도우시사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듣는

아름다운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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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苦痛)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을 피하건 줄일 재주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고통이 그렇게 싫은데도 왜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는지 그 모순성을 설명하지 못 합니다.

생각해보면 고통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산고(産苦)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1969년에 제이거와 에반스(Zager and Evans)가 부른 유명한 노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에는 먼 미래에 인류는 출산의 고통 없이 기다란 유리관 아래에서 아들과 딸을 집어올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있는데, 글쎄요, 고통 없이 공장의 시험관으로 만들어 데려오는 자녀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울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모성애는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하셨습니다. 흔히 이 잉태하는 고통을 저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정작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잃은 것도 고통이지만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아담과 하와의 배반과 이로 인한 잉태의 극심한 고통과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더욱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인류를 재창조(再創造), 다시 낳으시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를 “하나님이 낳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어 아무런 고통 없이 탄생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과연 얼마나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배반과 잃음, 사랑과 증오, 희생과 고통, 눈물과 피흘림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자식, 죽었던 자식을 다시 얻었을 때의 기쁨과 진정한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눈물로 찬송합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울면서 찬양합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나,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송축합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서 살고 있을지라도 더욱 큰 고통을 통하여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영원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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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1)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이 구절은 기도 응답에 관한 약속들 가운데서 가장 친밀하며 가장 놀라운 성경 구절인 동시에 또한 일반적으로 가장 오해를 받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기도하면 그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시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본문을 조심스럽게 읽어 보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성경 구절은 평범하고 단순하며 적극적이면서도 매우 귀중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생기를 돋게 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기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리들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익하고 좋은 일을 한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한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응답받을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한 것만큼 좋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기도에 대한 교리에 어떤 진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종종 우리가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 자체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부주의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성급하고 더 나아가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 바로 그것은 응답받지 못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그것이 더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어떤 의미에서 진리이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도에 관한 교리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도에 관한 교훈은 바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그들이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응답받고 때로는 그들이 기도한 것과는 다르게 응답받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바로 '그들이 기도한 그것을 응답받는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바로 그것을' 내가 시행하리라."

이 기도에 대한 약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응답받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해당되는 약속인가에 대한 사실이고 둘째로, 사람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응답받기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실이다.


1.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되는가

우선 첫째로 과연 기도에 대한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성경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약속을, 성경이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이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도의 약속을 그들에게 적용시켜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현재 공부하고 있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이 구절의 앞과 뒤의 문맥을 깊이 상고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시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본문의 앞절과 뒷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1. 요한복음 14:12을 주의 깊게 읽어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런데 이 본문에서 "너희가"라는 말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첫째로 기도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고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전하면서도 정확하게 믿을 수 있으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전혀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의심없이, 완전히, 올바르게 믿고 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귀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전히 정통하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인격적으로 확실히 믿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그를 모셔들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죄를 몸으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치하도록 위임하게 하기 위해 그를 우리의 주인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요한복음 1:12에서 찾을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들의 삶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며 그와 연합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한 곳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않으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가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는다. 그분은 내가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나의 기도를 몇 가지 들으셨지만 시행하리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을 옛 신학자들은 "계약되지 않은 하나님의 자비"라고 묘하게 말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가장 확실히, 가장 적극적으로 약속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는 결코 약속하시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질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라고 불평할 이유와 자격이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여러 번 시도해 보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결과 중의 하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기초가 되며, 우리가 필요한 모든 시간에 언제든지 하나님께 가서 우리의 필요를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응답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는 백만장자 록펠러의 엄청난 재산을 갖는 것보다 기도의 기초 위에 서 있기를 바라며, 내가 기도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 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의 친구들이 우리를 도울 수 없을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대한 재물로 우리를 돕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구원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대한 질문이 우리에게, 아니 당신에게 닥쳐 왔다. "나는 과연 정말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당신은 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정말로 그를 믿고 거듭났는가? 만일 당신이 그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않았다면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 예수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머리로만 믿는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정보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놓은 사실을 믿고 그를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영접하라. 그리고 당신의 삶 전체를 지금 주님께 드리고 그로 하여금 당신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라.

2.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의 자격에 대한 진술이 본문 다음 구절인 15 절에 나와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 계명들을 잘 알아야 하며, 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계시해 놓은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날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들의 행위와 언어와 생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항상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미 요한일서 3:22을 통해서 배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은 없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대한다면 우선 그분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그분의 말씀에 충족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여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항상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의 기초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겠다. "성경이 요구하는 어떤 특정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를 사랑하며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우리의 기도생활에 중요한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이것은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다 요구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편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믿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시작하고 그를 사랑함으로 끝난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19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분이 우리 사랑의 무한한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무한하신 분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만 그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이 아니다.

췌닝(Channing)과 그 당시 거대한 지적인 지도자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던 유니테리언(Unitarians)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또 결코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악하고 무가치한 죄인들을 놀랍도록 사랑하신 것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러한 노력 없이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신뢰의 필연적인 결과다.

영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마크 거이(Mark Guy)가 어느 날 런던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어떤 소녀가 호기심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크 거이 목사에게 와서 말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원했지만 사랑하게 되지 않아요.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유명한 복음 전도자는 열심으로 간청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네가 오늘 집에 돌아가거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네 자신에게 말해 봐라. 그런 후 다음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일요일 소녀는 그에게와 다시 왔다. 소녀는 행복한 눈과 빛나는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목사님 저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요. 저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지난 주일날 제가 집으로 돌아가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저 자신에게 했어요. 그 뒤 저는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어떻게 저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저의 차디찬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 충만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 같은 사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 그리고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마음속 깊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상함을 입었는가, 그가 어떻게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는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음을 입었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의 위대한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사랑하므로 믿음의 끝을 맺는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구체적인 행위는 그의 말씀을 날마다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우리 삶에 대한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 적용시키고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할 수 있는 기초 위에 서 있게 된다.

몇 년 전, 스코틀랜드에 어떤 유명한 성경교사가 노스휠드(Northfirld)에서 사랑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하느냐 아니면 믿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랑이 없는 믿음보다 믿음이 없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설교가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그런 결론은 잘못된 가정과 오해 위에서 내려진 것이다. 그는 우리가 믿음 없이도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믿음이 없는 사랑을 갖는 것이 더 좋으냐에 대한 토의는 마치 뿌리는 좋지만 열매가 없는 사과나무가 좋으냐, 아니면 뿌리는 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가 좋으냐에 대한 토의와 같다.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말할 것도 없이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박지 않으면 사랑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고 그 사랑의 결과로 오는 순종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깊이 상고하고 있는 약속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믿음을 갖고 순종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R.A. 토레이의 '기도와 영력' 중에서(131-14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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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우리는 사도행전 12:5을 통해 기도하는 방법과 응답 받는 비결을 배울 수 있다. 다시 한번 5절을 읽어 보자.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의 응답의 비결을 다음의 4가지 중요한 단어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그 4가지 단어는 첫째로 "하나님께," 둘째는 "간절히" 혹은 "쉬지 않고," 세째는 "교회는," 그리고 네째는 "그를 위하여"이다.

이 4가지 중요한 단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하나님께"

이 네 가지 단어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께"라는 단어다.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가?" 아니다. 많은 기도 가운데서 오직 극소수의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어떤 때는 100가지 중에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때도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은 "아,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소. 즉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들이 우상이나 거짓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군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말하는 기도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0가지 기도 중에서 한 가지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 당신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한다는 의미군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기도하는 사람들이란 소위 개신교 신자들을 의미한다. 나는 개신교 신자들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이제 나의 확신과 견해를 설명하겠다.

잠시동안 멈추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일어나서 공중기도를 할 때, 혹은 무릎을 꿇고 개인기도를 할 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며,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그렇게 기도하는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도에 어쩔 수 없이 응답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과 그의 무한한 지식과 사랑을 체험으로 알고 신뢰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며, 그들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입술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정치 않고 있다. 입술로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당신은 당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가?

우리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와 대화해야 한다. 우리가 공중기도를 하거나 개인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 정말로 깊은 교제가 되기까지는 결코 한 마디도 기도할 수 없다. 아니 기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라는 단어를 당신의 마음속 깊이 명심하기 바란다. 당신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임재 속에 들어가 그분께 말씀드리기 전까지는 결코 한 마디도 기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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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히브리서 10:19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우리는 이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온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자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오직이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방법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들이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천사들도 그 앞에서 그들의 얼굴과 발을 가리고 있어야만 했다(사 6: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를 위해 완전한 속죄물이 되셨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과 나의 흉악한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죄의 값을 치르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우리 대신 하나님 앞에 희생물이 되셨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속에 영접하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은 순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사람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과 그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존전에 나아갈 때 우리의 얼굴과 발을 가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히 "그의 사랑하시는 자"(엡 1:6)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즉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 모든 의로움을 포기하고 내가 가장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속죄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곳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이 땅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인간은 자기의 선행으로는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이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을 응답 받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 이것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다.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에베소서 2:18에 잘 제시되어 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또 한 분은 바로 성령님이다. 우리는 첫번째 진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기도할 때,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며 그분께 우리를 소개하고 대면시키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신다. 본문에서 "나아감"이라는 말의 희랍어 원어는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인도하다" 혹은 "대면시키다" 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해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기도할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마치 아무도 없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가? 기도하기 싫다고 해서, 혹은 기도가 잘 안된다고 해서 기도를 중단해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기도가 안 되고 기도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말하라. "하나님, 저는 지금 기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솔직히 말할 때 벌써 그 자체가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성령님을 보내사 나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난 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기다려라. 그때 성령님은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역사하실 것이다.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 내가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했고, 성령님을 보내 주시사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로 내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드디어 성령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셨다. 그분은 내 기도를 힘있게 도와주시며 내 영혼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셨다. 나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로 영적인 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며, 그 임재 속에 들어갔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고, 둘째로는 성령의 역사다.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 문제와 병행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특히 우리의 기도생활에 대단히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상당히 추상적이며, 비실제적인 교리이고 또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모든 영적인 생활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의 기도생활 가운데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바르게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R.A. 토레이의 '기도와 영력' 중에서(78-89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응답 받는 그리스도인-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앞장에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고 함께 연구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찰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주신 기도 응답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의 기도도 응답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너무나 도 동떨어진 생각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정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가운데서 응답의 대상은 무제한이 아니라 한정적이라고 하신다. 당신은 나의 말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하시겠다는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조건을 갖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 말을 할 때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망하게 되며 기도의 응답에 대한 회의와 불안과 갈등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가"에 대한 해답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아주 평이한 말로 가르쳐 주신다.

이것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요한일서 3:22에 제시되어 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거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당신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놀라운 말씀을 눈여겨 보았는가? 그리고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가? 그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응답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내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가"라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모두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 중에서 '많은 부분'은 응답 받는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한 것 중에서 '몇 가지만' 응답 받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한 것 중 하나라도 응답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을 수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당신은 영어 성경에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 그리고 "그러므로"라는 단어들을 발견할 때마다 이 단어들이 어떤 사실에 대한 이유를 지적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하시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본문은 "우리가"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 속에는 사도 요한이나 당신이나 혹은 내가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원인과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기도의 응답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 말은 "날마다 그의 말씀을 읽고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의 뜻을 항상 행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상호관계를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으면 그도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아주 예민한 귀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간구에 아주 예민한 귀를 갖고 들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간구에 대해서 귀가 둔하여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실천한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기도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이 모든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원한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항상'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특별한 목적을 아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또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서도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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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경 전체에서 찾아 보면 요한일서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성경 구절 중의 하나는 바로 요한복음 14:13-14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부분만 생각하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주신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구절에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 구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제 15-17절까지를 읽어보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명령을 지키면(그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공부하며 그의 계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항상 실천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성령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인도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될 때 그들(그의 명령을 지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가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아주 중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 더 열거해 보자.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5:7에 나와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이 말씀을 그저 이렇게 읽는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빠져 있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본문을 읽어 보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 안에 필연적으로 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했을 때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주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이 거하지 않고, 그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며 머물러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9절과 10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당신이 요한복음 15장을 계속해서 더 읽어 내려가면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항상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음으로 인해 신앙의 큰 혼란을 겪고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 약속에는 이상이 없다. 그의 약속은 사실이며, 진리이며, 불가사의한 신비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대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깊이 공부하지 않고 그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것을 날마다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2. 하나님은 그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
~~~~~

R.A. 토레이의 '기도와 영력' 중에서(101-111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방언통변을 여기 적어봅니다. 
 

병낫기를 구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말씀

"사랑하는 딸아,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내가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저들이 내 앞에 나아오나 내가 저들을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죄와 동거하기를 원하니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저들에게 고하여라.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으리라.
내게로 나오려거든 "죄" 를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여라. "
 
그리고 후에 주신 말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최송연

[주님에 의해,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 또 하나 있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 공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몇 년 전, 신장결석으로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신장결석을 앓아 본 사람이라면 재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은 성탄절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보니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교회의 예배 실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설교자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절 본문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본문이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그 본문을 듣는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지금 나는 구세주가 필요해." 영혼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신장 결석의 고통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하나님이 신장결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실제로 나를 신장결석의 고통에서 구해준 것은 의사들이었다. 그러나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세주뿐이다. 궁극적인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구원이 주님에게 오는 것일 뿐 아니라,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신장결석, 허리케인,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산을 가리켜 "내 위에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나를 가려다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신다. 예수 그리스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노아가 살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온 세상이 홍수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는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 날은 빛이 없는 어둠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어둠이 없는 빛의 날이다.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쏟아져 내릴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재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단언컨대,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8-31p) / 출처: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이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 서기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예수님을 전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의미 있고, 그 때문에 삶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당신이나 잘 믿으세요. 나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말이 과연 옳을까? 마치 집에 불이 나지 않았는데 왜 소방수가 필요하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심판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구세주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라는 논리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장차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믿는다면, 아마도 복음전도의 열정이 지금보다 세 배는 강렬해질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 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날은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난과 고통, 황폐화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 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5-28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구원의 시제]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구원하다"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는 영어보다 동사의 시제가 다양한데 "구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시제로 사용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되었다고 가르친다(엡 1:4).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인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지혜로 우리가 영원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예수께서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말하는 때가 올 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었다"라는 과거 미완료시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준비되고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는다"라는 현재시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이며,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또한 성경은 "구원하다"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 미완료시제로도 사용한다. 구원이란 단순히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화의 과정도 구원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시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중이며, 장차 온전히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다양한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혼동을 겪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와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2-2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그대 작은 뜨락에   

                  최송연 

지난 겨울 그토록 모진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

 싱그러운 봄비가 보슬거리고 있네요

어제 밤 그토록 사나운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들판에도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네요

오늘 그대 작은 뜨락에

 모진 역경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나요 

그렇다고 하여도 그대여,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모진 폭풍 거친 눈보라

휘몰아치듯 고통스러움이

그대를 뒤흔들거든 

그런 때엔 자신을 곧추세워 

오르려고 하지 마세요 

줄기가 부러질 수 있어요

온 누리가 하얗게 얼어붙은 듯

겨운 때를 그대 만나거든 

차라리 머리를 숙이고 

땅속으로 깊이 더 깊이 내려가세요

꽃은  엄동설한 지나는 동안

꺾이지 않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生의 영화, 

모질고 긴 겨울을 견뎌낸 줄기에서만 

피울 수 있는 인고(忍苦)의 숨결, 

그대에게 내리는 神의 미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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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시나요 / 최송연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눈이 감기기 전

임의 성상 뵈올 수 있다면...

 

날 위해 훌훌

하늘 보좌 버리신 이여,

그 사랑 날마다

내겐 애틋한 그리움입니다

 

언제 오시나요,

나 너무 늙고 둔해져

그리던 임 알아뵙지 못할까

맘 졸이며 키운 사랑

이토록 절절히 농익어가는데...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9459?category=151296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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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영의 절대적인 필요성

사랑의 영은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 사랑의 영이 가득할 때 비로소 선하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할 수 있다. 사랑의 영은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잘못과 허상, 불순과 부패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선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정결하고 거룩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오직 선을 바라시는 분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하나 되어 일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영이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이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영을 대신하고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갖가지 거룩한 계획과 경건한 신앙의 모습은 무의미하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모든 예배와 신앙의 완전한 속성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과 함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일할 때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며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과 뜻 안에서만 기뻐하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선은 오직 그 안에 있으며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뜻과 영을 좇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바라는 마음을 저버린다. 그 결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 그래서 사랑의 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거나 거룩함을 거스르며 행동하실 수 없는 분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예외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먼저 사랑의 영과 선이 살아 역사하며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바로 그 영이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기꺼이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선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이 믿음을 단념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본성에 맞선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이 정결하며 온전하지 않다면 그 영혼에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정결하고 온전해질 수 없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결하며 온전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축복이다. 사랑 가운데 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부도덕, 고통, 무질서를 바라보라. 이것은 본질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이기주의와 아집으로 바꿔놓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오직 사랑이 그 모든 죄악을 치유할 수 있다. 순수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거룩한 영 가운데 자유롭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분노, 시기, 욕심, 교만이라는 이름으로 악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각각의 개념을 구분하며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쉽게 악의 본성과 능력, 마음속의 온갖 만행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 부르고 얼마나 정확히 구분하느냐는 상관없다.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위선적인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들의 행동은 같았다. 모두 똑같이 행동하면서 표면적인 이름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즉 악행은 하나같이 동일한 일을 행한다.

교만, 분노, 욕심, 시기는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스도를 죽이고 못 박았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이 가진 능력과 본질이 진정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한 번 못 박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 교만, 시기, 욕심을 부리려 할 때마다 거룩한 임마누엘이며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못 박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8).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에는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거룩한 임마누엘이 살아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감정과 성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마이며 도살자이다. 그래서 교만, 시기, 증오가 방치되어 활개를 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옛날 바라바를 살리고 그리스도를 죽였던 일이 같게 나타난다(마 27:20-21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로 끌고 갔던 유대인들에 의해 처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가 그리스도를 죽였던 진짜 첫 번째 살인마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던 날, 그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거룩한 생명이 죽어버렸다.

사랑의 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본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생명이며 온전함과 영광이셨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를 회복하고자 결코 두 번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속죄물이며 화목제물이시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실 때 인간은 그분을 통해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또한 태초에 인류 최초의 아버지인 아담과 함께하셨듯이 다시 한번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처럼 아담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역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더러운 본성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고 구원자의 속죄가 필요한 분노의 자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 사랑하는 아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히 드러낼 수 없다면 주님은 그 누구와도 기쁨으로 연합하실 수 없다. 이것은 타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타락한 자는 오직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만 타락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시며 지어진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의 경우 마음속에 내재하며 살아계신 주님을 통해 그 모든 선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 역시 그 선함과 거룩함이 바로 주님에게서 온다. 타락한 인류의 구속자시며 평화와 의가 되시는 주님은 천국의 모든 보좌와 천사를 보호하며 그들의 힘이요 영광과 생명이 되신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일컫는 이름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단 하나, 오직 주님만이 빛과 생명이며 거룩하시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국이든 세상이든 거룩한 모든 피조물의 빛과 생명과 거룩함이 되실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중 분노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분노는 그 자체가 본성이 되어 엄청나게 자학하고 공허와 끊임없는 불화를 느끼게 한다. 분노는 유일하게 사탄에게서 시작되며, 우리 안에 온갖 저주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나 사랑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즉 분노는 원래 사탄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잃지 않았다면 분노가 우리 안에 시작될 수도,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분노와 증오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제멋대로 화내거나 증오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그 옛날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했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오직 순결한 사랑의 영으로 계셨고, 반드시 그러실 수밖에 없다.

허영, 분노, 고통, 악의 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지적으로 돌아선 결과일 뿐 다른 이유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비참한 고통과 악한 마음에 다른 근거나 이유는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과 마음속에 반드시 주님의 행복과 온전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 당시와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면에 지옥, 죽음, 저주, 고통이 제거되고 끝날 수 있다. 또한 오직 선을 바라는 사랑의 영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타락한 피조물은 하나같이 탄식하며 고통 속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마음속에 거룩한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랑의 영이 정결하게 할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녀는 누구든지 자기 모습과 소유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 된 순결한 처음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모든 반대와 불순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연합했던 처음의 모습에 이르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정결함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 이를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우선 정욕과 분노가 가득하고, 음란하며 이기적이고, 불완전하며 제멋대로인 모든 성향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성향이 죽었을 때 비로소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 가운데 살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불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결해져야 한다. 그 결과 이들에게서 떨어져 구별되기 전에는 정결해질 수 없다. 정결함과 온전함은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거룩한 본성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한때 인간은 주님 가운데 살며 축복받던 그분의 자녀였다. 따라서 정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또한 불순하고 불완전한 생각과 행동으로는 하나님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

사랑의 영에 정결함과 온전함을 운운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그 거룩한 소산물인 인간의 마음이 함께 일하기를 바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정결함과 온전함 가운데 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주님을 적대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떠한 삶이나 행복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사랑의 영만이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일한다. 다른 것은 그 안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 한 가지 목적으로 모든 속성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 역사하는 그 깊이와 높이가 한없고 영원하다. 또한 속성상 열심히 힘쓰고 일할 때 그 본질과 기초가 마련되고 생명력을 얻는다. 그 결과 사랑의 영이 나타나고 그 축복된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힘과 능력을 타고난 인간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

사랑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존재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반면 편파적인 성향은 보편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능력과 영이 사라진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은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야” 하는 식의 태도로 천국에 갈 수 없다. 또한 천국을 잃으면 다른 어떤 곳에도 존재할 수 없다. 항간에 순결하며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너무 고귀하게 생각한다는 주장이 있다. 말하자면 정결하고 온전한 사랑의 거룩한 속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높고 낮은 정도의 차이란 없다. 사랑의 영은 오직 절대적으로 정결하며 순수할 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15-24p)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CHAPTER 02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정확히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때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에 다시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제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와 고통은 그 자체가 본성으로 남아 각자 그 일을 나누어 갈망하고 분노하며 대립한다. 따라서 본래 세상적인 인간은 갈망, 분노, 대립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오직 자신을 부인하고 죽으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반면 지혜롭고 거룩한 인간이 지닌 모든 선함, 온전함, 행복, 영광, 기쁨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삶 속에서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시는 주님의 빛과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사랑과 즐거움이 가득한 삶의 모든 특성을 채우고 축복하며 그들과 연합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복음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천국의 행복과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즉 하나님과 본성이 연합하고 인간이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으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며 그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없이 우리의 삶은 결코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거룩한 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요 1:14),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온갖 악의, 죄, 고통은 틀림없이 각자의 특성대로 본성을 거스르며 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분명 잃어버린 사랑의 영을 바라고 구하며 열망한다. 따라서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일하고 거하시는 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리를 따르라

어쩌면 당신은 순결하고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얻지 못해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을 머리로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이 즐겁고 적절하다는 이성적인 확신에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뚜렷한 생각이 있다고 해서 곧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이성이 흔들리고 사랑이 한낱 상상과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간 스스로가 범하는 오류일 뿐이다. 마치 본성을 거스르며 손과 발의 일을 눈이 대신하도록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의 영은 자연과 생명의 영이다. 자연과 생명의 모든 작용은 그 활동하는 힘에 따라 각각의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성장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발생하지 않으며 모든 일이 같은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불, 공기, 빛은 어느 때는 이곳에서, 또 어느 때는 저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늘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같게 작용하는 자연의 특성을 따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같은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진정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육체의 힘이나 건강이 실제로 존재할까? 혹은 정말 튼튼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심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육체의 힘이나 건강은 머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결하고 온전한 사랑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은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날 수 없으며, 육체적인 생명과 속성은 물론 영적인 생명과 속성조차 변화시킬 수 없다. 악한 영과 사탄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온전하고 순결한 사랑뿐이다. 그 사랑만이 거센 폭풍우에게 “잠잠하라”(막 4:39)고 말하며,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마 8:3)고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 중의 하나이다. 반면 이성은 키를 단 1cm라도 자라게 하거나 영적인 삶을 변화시키거나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 온전한 삶은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아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겪는 수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엄밀히 말해 온전한 마음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선 실제로 삶의 모든 특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함께 자라야 한다. 온전함이란 오직 뿌린 씨앗을 통해 피어날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씨앗이 변하여 뿌리를 내리듯 우리 마음 역시 더 고차원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은 마치 꽃을 피우는 씨앗처럼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고 생명에 이르러 하늘의 영, 불, 빛으로 축복받게 될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불, 빛, 대기의 축복으로 죽음을 뚫고 생명을 얻어 향긋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완성된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꽃을 피우는 그날까지 처음의 모습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되어 나갈 때 인간의 마음은 온전해진다.


거룩한 사랑의 탄생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실한 진리를 알고 있다. 선은 위로부터 오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 영혼 가운데 들어오셔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선 본성의 상태가 적합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탄생 과정이 시작되며 빛이 생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영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따라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즐거운 상태여야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롭게 태어나며 필요한 모든 본성을 공급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기쁨이나 사랑의 영의 역사를 맛볼 수 없다. 우리가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그 마음속에 존재하실 수 없다. 오직 갈망, 욕구, 대립만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소위 지혜, 명예, 정직, 신앙과 같은 거룩함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본성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 교만, 야망, 이기주의, 시기, 복수와 같은 상처를 종종 입힌다. 한편 지혜와 신앙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야망과 이기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속성이나 그와 같은 분위기와 성향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나을 수 없으며, 어떤 영적인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와야 올바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원칙이 바뀌면 성직자와 공직자 모두를 비난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 전가는 너무 성급한 처사이다. 지금껏 누구도 위로부터 오는 도움 없이 원칙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럴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옛사람’(롬 6:6)이라고 불리는 본성적인 인간은 그 행동에 수없이 다양한 이름을 붙인다 해도 늘 똑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교회나 국가가 움직이는 방법과 행동에 상관없이 자아는 오직 이기적인 동기만을 갖는다. 분명 교육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기적이다. 따라서 거룩한 생명이 그 안에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이성적인 작용과 본성의 힘으로는 결코 사랑의 영과 거룩한 선을 소유할 수 없다. 사실 이들을 소유할 수 있는 적합한 때와 장소는 따로 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태어나 인간의 본성을 압도할 때 그때와 장소가 마련될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분명한 진리가 드러났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이 되어 타락한 본성 가운데 태어나 그들과 연합하고 생명이 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갈급, 고통, 대립, 자학이 가득한 지옥에 영원히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며 분명히 나타나셔야 한다. 그전까지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모습에 불과하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이 사랑의 영에 필요한 반응이다. 십자가나 자기를 죽이는 것은 선행을 위한 하나의 도덕적인 원칙이다. 그럼 이번에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도덕적인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수많은 규칙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어떤 작용도 할 수 없다. 그 안에 여전히 인간의 본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스스로 내면의 죄악을 숨기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도와줄 뿐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규칙이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본성은 스스로 활동하며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수밖에 없고, 타고난 것보다 더 나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 어둠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듯이 본성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없다. 진정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가르침뿐이다. 마음속에 영적인 능력이 임함으로써 거룩한 선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빛을 밝힐 수 있도록 본성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삶은 단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즉 하나는 본성적인 삶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 하나님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삶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과 하나님 중 하나가 살아 역사하도록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인생은 계속되며 어떤 식으로든 늘 현실로 나타난다. 선은 일종의 울림이다. 또한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랑의 영으로 호흡하기까지 강렬한 본성과 맞서 투쟁하는 힘에 불과하다. 사랑은 오직 축복과 선이며 하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인 사랑의 영이 마음속에 살아 역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실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25-32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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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
도대체 사랑의 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내 글 속에 사랑의 영만큼 생동감 있고 영향력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저 사랑의 능력과 생명, 혹은 그에 대한 믿음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랑이 순수하고 보편적이라는 가르침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고상하다는 반대의견도 종종 나타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좋아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한다. 또한 본성적으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지켜낼 수 없는 것, 바로 사랑의 찬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반대의견이란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즉시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사랑의 영도 마찬가지다. 축복으로 가득한 사랑의 영의 본질과 능력, 그 필요성을 뒷받침할 진정한 근거가 드러날 때 사랑에 대한 반대의견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

사랑의 영은 오직 선을 바라는 하나님의 영에서 시작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통해, 또한 그분으로부터 창조되었던 창세 이전부터 끊임없이 선을 바라보셨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또한 본래 선하고 모든 선이 그에게서 시작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 이외의 다른 것을 전혀 바라지 않으신다.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하여 무언가 더해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을 바라셨고, 그 마음은 항상 동일하게 변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분명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시고, 오직 은혜와 선, 행복만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밖에 주실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축복과 선이 아닌 다른 것을 행하고 드러내며 존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오히려 태양이 어둠을 발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오직 선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의 영이 존재할 수 있는 토대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선을 바랄 때 비로소 사랑의 영을 소유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랑을 수없이 실천한다. 특별히 불편하거나 형편과 환경이나 분위기가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기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사랑이 살아 있는 영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롭고 의지적이며 보편적으로 활동할 때 사랑의 영이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모든 영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화내기 위해 화를 명령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살아 있는 영으로 존재할 때 다른 영과 같이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일할 것이다. 사랑은 특별한 환경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랑 안에 거하며 일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영은 어느 곳이든,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이든 오직 사랑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은 어두운 밤이든 환한 낮이든 간에 오직 위를 향해 날아간다. 사랑의 영도 마찬가지다. 그 경로가 항상 같으며, 시간, 장소,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원래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행한다. 베풀고 용서하든, 고통받거나 고통을 피하든 간에 어떤 경우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사랑의 영은 어디서나 그 자체로 축복이며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실한 하나님의 모습이고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영은 어디서나 어떤 경우이든 삶의 기쁨과 선이다.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에 대해 알고 싶은가?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여 온갖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의 고통과 아픔, 즉 모든 독선의 뿌리가 제거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모든 욕구가 만족하고 인간 본성의 무질서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삶은 더는 무거운 짐이 아니며 매일매일 평화로운 생활로 이어진다. 보고 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요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나는 것마다 모두 유익하다.

사랑은 그 자체가 풍성할 뿐 어떤 숨은 동기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랑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기름과 같다. 사랑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하며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자연스럽게 돕기 때문이다. 또한 보상을 바라거나 영광과 높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직 스스로 전파되어 사랑이 부족한 모든 이의 행복과 축복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랑의 영은 분노, 죄악, 증오, 대립에 부딪힐 때 어둠을 마주한 빛과 같다. 그래서 스스로 축복이 되어 어떠한 반대라도 반드시 극복하려고 한다.

화나 악의를 품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하는 등 다른 마음을 갖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마음속에 오직 선을 바라는 바람뿐이라면 만나는 사람마다 기꺼이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 원수의 분노, 친구의 배반, 그 밖의 모든 죄악은 사랑의 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 결과 사랑의 영은 더 높은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며 스스로가 가진 축복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온전함이든 행복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한없이 온전하신 기쁨의 하나님이 오직 선을 바라는 변하지 않는 의지,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외의 다른 마음에 이끌리는 한 타락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의 영의 근거와 속성, 그 온전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11-1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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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최송연

 

입춘이면

봄이 오신다기에

작은 꽃신 꺼내 신고

들길에 나서보니

 

오시겠단

임은 보이질 않고

버들개지 핀 들녘에

안개만 자욱하네

  

 

 
 

 

 

 

 

 

 

 

 

 

단어해석 도우미: '봄' = 자신의 소원, 나의 예수님.

                       '안개' = 각종 어려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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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향기 /
                      최송연

자고 하지 말거라
아직은 설익어
샛파란 너

찜통 불볕더위
후끈거리는 여름,
모진 시간 지나는 동안

한없이 흘린 

방울이,

고달픔이,

눈물이...


알알이 영글어

그윽한 향기 흩날릴 제면
그제야 참 진가(眞價) 드러나리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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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아내가 죽었다!>

 

 

“마침내 아내가 죽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일본에서 아내와 사별한 66세 홀아비가 부엌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6분짜리 짧은 동영상이 누적조회수 8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함께 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잔소리 들을까 봐 그동안 못 갔던 동창들 술자리부터 가야겠다. 도쿄 가부키쵸 캬바쿠라(고급 술집)의 아미씨 문자도 이젠 지우지 않아도 되겠지. 밤에도 당당히 아미씨한테 LINE(메신저)할 수 있겠네. 연애도 실컷 해서 김정은처럼 기쁨조도 만들어 봐야지......”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혼자 살게 되면 이렇게 자유를 만끽할 줄 알았는데 내 현실은 정반대다....... ”,

“아내가 떠난 지 5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LINE 메시지로 만나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고 여전히 혼자 식당에 가서 밥 먹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애인을 만드는 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수십 년 인생을 같이 보내온 배우자와 사별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만약 아직 배우자가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이 동영상에는 ‘인생말년 부부에게 닥칠 일을 리얼하게 알려줘서 감사드린다.’, ‘중반부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제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는데 얼른 화해해야겠다.’,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상실감, 나도 아내를 잃고 지옥에 떨어진 듯했다’는 등 공감과 감사댓글 4천 개가 넘게 달렸다고 합니다. 이 동영상과 댓글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싶습니다. 시쳇말로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결혼을 거룩하게 여기고 아내와 남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것입니다. 

 

 

결혼(結婚)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알콩달콩 백년해로를 하고 나서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듣고 보니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 결혼이고, 언젠가는 죽음이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는 운명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 싶습니다. 결혼이라고 다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을 했지만 도저히 합쳐지지 않는 부부도 있고 평생을 원수처럼 싸우는 부부도 있고 처음부터 잘못 된 결혼도 있습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도 전에 이미 불화와 결별과 이혼으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부부도 많고 요즘엔 졸혼(卒婚)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인생의 황혼무렵에 갈라서는 부부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내는 혼자가 되어도 잘 버티는데 아내를 잃은 남편은 챙겨먹지 못 해서 곧 쇠약해지고 병들게 되니 남편들은 미리 요리하는 법, 빨래하는 법을 배워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우습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 죄 많은 인생, 아니 불완전한 인간에게 온전한 일심동체(一心同體)의 결혼, 영원히 갈라지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결혼이란 아예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완전한 결혼은 주님과의 혼인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완전하게 씻으시고,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원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살과 피를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요, 성령(聖靈), 곧 그리스도의 영을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과 한 영, 한 마음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신부, 곧 아내로 삼으셨으니 죽음도 헤어짐도 없이 영원히 함께 하는 완전한 결혼인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천국신혼잔치에 참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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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상기(上記)한 말씀은 하나님의 논리 중 한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결론이다. 그 전제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논리를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여기 이러한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이와 같은 논리는 너무나도 확실하여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온다.

성경 말씀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말할 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우리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이다. 큰 것을 주셨으면 작은 것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ㅡ아더 핑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서ㅡ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차례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
1. 성령은 인격이시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이시다
4.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제 2장 성령과 창조
1. 창조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역사
2.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
3. 재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제 3장 성령과 보편 은혜
1. 문제
2. 해결

제 4장 성령과 계시
1. 지식의 문제
2. 특별 계시
3. 특별 계시에 있어서의 성령

제 5장 성령과 조명
1. 인간의 암매
2. 성령의 조명

제 6장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1. 그리스도의 수육
2. 성령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
3. 그리스도의 성장
4.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5.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
6. 그리스도의 죽으심
7. 그의 부활하심
8. 그의 영화

제 7장 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2. 그 방법
3. 그 결과

제 8장 성령과 성화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 능동적)의 결합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제 9장 성령과 인도하심
1. 성경의 인도
2. 범하기 쉬운 잘못들

제 10장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 됨
1.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
2. 창조에 의해 아들 됨
3. 신자의 아들 됨

제 11장 성령과 기도
1. 성령 안에서의 기도
2. 성령에 의한 기도
3. 성령께 하는 기도
4. 성령받기 위한 기도

제 12장 성령과 교회
1. 성령이 교회를 세우신다
2. 성령은 교회를 통일하신다
3. 성령은 교회를 장비시키신다
4. 성령이 교회를 통치하신다
5. 성령이 교회를 인도하신다

제 13장 성령과 그 상징
1. 물
2. 바람
3. 호흡
4. 불
5. 기름
6. 비둘기
7. 열매 맺는 나무

제 14장 성령과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
1.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아닌 것
2. 사함 받지 못할 죄
3. 심판

제 15장 성령과 인간의 책임
1. 인간의 책임이 없는 곳
2. 인간의 책임이 있는 곳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2. 성령에 의한 기도

성령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성령에 의한 기도도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 8:26-27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연약함 곧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약함이 있음을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나"라고 번역될 것이 아니라 현재대로(위와 같이) 해야 한다. 신자는 자신의 필요를 알지 못하므로 빌 바를 알지 못한다.

성령은 우리가 본 대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여 주셔서 우리 자신이 정당한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 이상의 것을 하신다. 특별한 방법으로 또한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하여 비신다. 본문이 말하듯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 간구는 그리스도의 간구와 혼동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간구는 하늘에서, 성령의 간구는 땅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것은 우리 마음 밖에서이고 성령의 것은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알만한 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가 모를 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 간구에 대한 개념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흔들어서 너무 깊어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소원을 발하게 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우리를 통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마음에 거하는 성령께서는 우리와 따로 홀로 간구하신다고 한다. 그는 우리 위해 기도하시나 우리 안에 거하실지라도 우리를 통해서 하지 않으시며, 성령이 하시는 기도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보면 실제적인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결과는 꼭 같은데 곧 성령께서 놀라운 길로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면서도 빌 바를 알지 못하였을 때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

이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우리는 때로 우리 앞에 있는 위험을 모르며 어느 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두 다른 직업에 종사할 소원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어느 처녀와 결혼해야 할지 모른다. 두 가지 매력있는 대학 교육과 과정이 다 우리 마음에 맞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우리 생애를 현저히 다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느냐, 교회 시무 장로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이런 모든 경우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그래도 성령은 무엇이 빌 바인지 잘 알아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신다.

성령이 간구하시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한 이유는 바울이 암시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이 무엇을 비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성령께서 간구하실 때 우리와 따로든지 우리를 통하여서든지) 또한 성령과 하나이신 그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더욱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 이는 우리 기도의 응답에 필수 조건이니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한 가지 이유가 바로 흔히 그릇된 것,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이기적으로 기도한다. 혹은 무지로 하기도 한다.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성령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그는 삼위일체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지 아신다. 그러므로 본문이 밝히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라."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맞기 때문에 항상 응답을 받는 기도이다. 생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효과적인 간구를 하시는 제삼위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랴! 이것이 성령에 의한 기도이다.

3. 성령께 하는 기도

이제는 성령께 하는 기도를 살펴보자. 때로 "성령께만 기도함이 옳은가" 하고 묻는 일이 있다. 이 질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할까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아버지 곧 삼위일체의 제일위에게 기도하는가, 하나님 전체로서의 아버지에게인가, 삼위일체 각 위에게 각각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전체로써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없다. 있다면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한다는 암시가 있다. 아버지란 명칭은 현저히 그분의 칭호다. 더구나 신자들이 믿고 기도하러 갈 아버지께 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아버지는 분명히 삼위일체의 제일위임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실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을 아버지라는 그 말에서 제외하였다. 또 예수께서 부활 후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셨을 때 그 잇닿은 평행구로 보아 마리아의 아버지는 예수의 아버지요, 삼위일체의 제일위 외에 아무도 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작별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되 아버지께 기도하라(요 15:16) 권고하신 것을 주목하자. 예수께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위해 성령 자신에게 기도하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보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요 14:16)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증거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곧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거의 국한하여 기도함으로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 하나님께 주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성경적 근거에서 하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삼위일체의 각 위에게 기도하는 것이 정당하며 더 좋기까지 한 때도 있다. 각 위가 우리에게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를 위해 특별한 사역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각각에게 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과 보호를 원할 때 우리는 아버지께 가야 한다. 우리가 우리 죄의 사유와 씻음 받기를 원할 때는 그리스도께 기도하여야 좋을 것이다. 그는 죄책과 죄의 오염(汚染)을 제거키 위해 죽으셨다.

이와 같이 성령께 기도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누가 친족을 잃었다면 특별히 성령께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혜사 [곧 안위자(安慰者)-역자 주]로 보내어진 분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주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안위하는 것을 임무로 하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혹은 우리가 자신 속에 성결의 결핍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계속하여 거룩케 하시도록 성령께 기도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생명 안에서 하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게 따로이 기도할 수 있듯이 우리가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다. 성령께 올린 훌륭한 기도의 예들을 보려면, 많은 찬송가집에서 성령께 드린 수많은 찬송가들의 가사를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4. 성령 받기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께 기도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장(前章)들에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았으며, 아직도 그분에 대한 공부를 끝맺지 않았다. 성령께 관하여는 축도에 포함된 것 이상 말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말할 것이 많음을 보았다. 그의 일은 다양하다. 그는 객관의 세계에서 곧 창조와 보편 은혜와 하나님의 두 말씀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또한 주관의 영역에서 놀라운 일을 수행하셨다.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증거 하시고, 우리의 기업을 인 치시고, 우리의 기도 생활의 원천이시다. 그의 일은 다양하고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분명히 이 다양한 성령의 일을 위해 기도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우리의 의무다.

기도는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성령을 더욱 받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자. 만일 우리가 성령을 더욱더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 만일 우리가 그를 더욱 온전히 받지 않는다면 이 책은 목적을 달성치 못할 것이다 -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구함으로 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죄와 부딪친다면 그것에 대해 이김을 주는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우리가 생의 결단을 지으려 하니 어쩔 줄 모를 때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이 필요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이것은 또한 기도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무디고 단조롭다면, 기도가 짐이 되고 즐겁지 않다면, 우리 기도가 상달치 못하는 듯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것 같고,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가 우리 생활의 능력의 방도가 되어 있지 않으면 - 그러할 때 우리는 간구의 성령 자신께 나가 우리 생명에 더 충만히 임하사 이런 언약 중에 있는 우리를 도우시도록 구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대망(待望) 중 이렇게 하면 그가 들어오사 우리의 기도 생활을 혁신시킬 것이다. 그가 모든 거룩한 생활의 비결임과 꼭 같이 기도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나 그분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변화되어 영적으로 풍부하고 다채롭고, 능동적이며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성령에게,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성령은 그대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기도' 중에서(231-237p) 

출처: 생명무 쉼터 = 한아름 발췌

 

 

 

 

 

 

 

벚꽃 필 제면/  최송연

 


모진 겨울

다 지나고 벚꽃 필 제면
내  영혼 속엔 당신을 향한
사랑도 함께 피어납니다
저 벚꽃처럼 화사하게...

 

온 누리에
벚꽃 향기 진동할 제면
내 가슴 속엔 당신을 향한
그리움도 함께 흐릅니다
저 벚꽃 향처럼 진하게...

 

벚꽃은
저리도 곱게 피었고
그 향기 흐드러졌건만
내 사랑 당신은
언제쯤이면 오시려는지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 :12)

 

마라나 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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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心 / 최송연

 

좋은 말도 나쁜 말도

귀 기울일 것 없는 세상

가슴으로 남기는 여운

흐르는 물속에 잠기듯

 

그리 먼 곳도 아닌데

아련히 느껴지는 숨결들…

나 그대들 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생명

 

있는 듯, 없는 듯하나

나 여기 있었노라 바람결에라도

그대들에게 전해지기를

작은 향기 소복소복 모두어

갇힌 벽 모서리에 쌓아두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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