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 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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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충고/최송연

가을이 그대를 찾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가을 숲 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도 있으니까요

 

비록 저 찬란함이 잠시

보이는 것이긴 하여도
오늘을 위해 그대가

흘린 땀이 얼마던가요

 

길가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도
열매를 위한 몸부림
차디찬 겨울이 오면
그 모습마저도 사라지리니


산을 태우는 붉은빛 
그 화사함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종국엔 떠나야 할 인생임을

기억하세요
이 가을이 다 지나기 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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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최송연

 

아침에 눈을 뜨면

싸르르

코끝을 휘감아도는

그리움 하나

 

날마다

들이키는 산소처럼

너무 강하지도,

너무 진하지도 않았음 좋겠어

 

톡 쏘는 쓴맛보다는

부드러운 향으로

달콤한 맛이면 더 좋겠네

 

그리움은

진하디진한 커피향 같은 것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중독성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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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최송연

당신을 만났을 때
행복은 시작되며

당신 사랑 느낄 때
행복이 자라나고

당신과 함께일 때
그 행복 만개(滿開)하네

 
 
 
 
단어해석 도우미: 당신= 나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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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의 美       
                최송연

 

가을이라 하여
모든 나무가 불태우지 않고

 

겨울이라 하여
나뭇잎 모두 떨어지진 않아

 

무색이라 하여
쓸모없는 색상은 아니려니

 

동일동색 보다
제 색 입을 때 가장 고운 거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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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 / 최송연

 

당신의 명을 따라

내 마음의 등불

세상을 밝히고

 

당신의 사랑 따라

내 마음의 등불

이웃을 깨우며

 

당신을 기다리는

내 마음의 등불

기름을 준비하여

 

욕심과 미움 버린

내 마음의 등불

더 밝기 원하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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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3) 기독교인은 사교춤을 추거나 춤추는 모임에 참가해도 괜찮습니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춤에 대한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적 서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춤을 출 수 있는가 아니면 추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세대를 걸쳐 오면서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교회 지도자들이 언급하기를 꺼려했었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춤을 추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춤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주며 사회적 품위를 얻도록도와준다. (2) 성경은 춤에 대해서 이야기 다. (3) 몇몇 비 오순절적 교회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춤을 주선하고 후원한다. (4) 춤은 친교를 위한 즐거운 활동이다. (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며,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교인들이 발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 네 가지 점과 관련하여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춤’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개인이 춤을 추는 것을 허락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이 타락하며 결국에는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영적 복지에 대하여 위험한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사교춤을 추는 것을받아들이는 교회는 파괴적 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세상의 모양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쇠퇴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 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말이 사용될 때의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춤에 대해서 24 번 정도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성경은 그 어느 하나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교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춤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것은 (예배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다윗과 같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영웅에 대하여 즐겁고 넘쳐흐르는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산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무슨 종류의 춤이 추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백성들의 부적절한 축하와 술 마시고 떠드는 것에 대해서 노(怒)를 발하였었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19). 우리는 또한 마가복음 6:22-29 의 내용으로부터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그와 함께 한 술에 취한 사람들 앞에서 추었던 춤이 매우 강렬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었거나 감각적인 것이어서 왕이 적절한 판단을 못하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 그 명령은 그가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사교춤을지지해주는 성경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삼가해야 하는 악과 죄악스러운 행위의 목록에 춤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춤이 초대 신약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로부터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니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남여 사이에 어떤 육체적 접촉을 함으로 생기는 감정과 정욕에 대한 주의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유혹, 특별히 정욕과 성적 유혹을 피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8; 디모데전서 6:9-11; 디모데후서 2:22).
 
비록 사교춤을 추는 많은 부부들이 결코 부도덕적인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22 은 우리들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악에 물들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중석에서 행하는 사교춤이 외딴 곳에서 애무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남녀들의 행위보다는 훨씬 더 좋은 대안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교춤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 친밀함을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성회는 사교춤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과 죄악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교춤을 추는것을 반대해 왔습니 다.
 
그러나 춤을 사절하는 것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마음이 어떤 잘못된 것에 머문다면 어떠한 주의나 법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 단순히 춤이 제공하는 우정과 교제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일에 참여하는 것이 모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의 사회 –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세상 –  의 상태는 중요한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도덕적 표준과 순결과 거룩함에 대한 확신이 옛것이 되어버렸으며, 이제는 사람들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사회는 음행, 단절된 관계, 이혼, 혼외 임신, 성병,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도덕적 표준에 대한 이러한 방탕한 태도에 대하여 지금 무거운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낮아진 도덕적 표준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직면하여서, 교회는 그의 백성이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비추어, 자신과 자녀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을 절제할 것을 모든 기독교 성인과 부모들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8; 디도서 2:11-14; 디모데전서 2:21-22).

 

관심사: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독교 청년들이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청년들을 “진실된 사랑은 기다린다”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모들의 일부는 또한 사교춤이 자녀들의 발달에 똑같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모순되는 일입니다. 춤에 참가함을 통하여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성적 순결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도덕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때문에 단 한 생명이라도 영원히 상실된다면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 부모, 혹은 교회라도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교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도 모르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춤을 추는 곳 대부분의 환경이 유혹적이고 꾀는 분위기인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음악, 부적절한 노래 가사, 희미한 불빛, 그곳에 참석하는 어떤 사람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들을 더 큰 유혹으로 이끄는 육체의 접촉의 밀도를 증가시켜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립학교의 춤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지만, 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귐은, 나중에 기독교인의 생활 형태에 전적으로 위협을 주는,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행동이 허용되는, 그러한 환경을 통하여 춤에 휩쓸려 들도록 발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흔히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죄악된 환경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에, 춤추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춤 클럽”을 조직합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춤이 흔히 다른 죄악과 연결된다는 바로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도덕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주는 그러한 활동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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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나무/최송연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빗물처럼 흐르는 가을 들녘 ...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서걱거리며 흐느끼는 억새 소리
      먼 길을 걸어온 생의 탄식이런가...

      그대,
      봄, 여름, 가을,
      그렇게...
      온 몸의 진액 긁어모아
      알알이 영근 열매
      생명으로 나누어 주었건만

      이제는
      나뭇잎조차
      지탱하기 힘 들어
      모두 떠나 보내야만 합니까

      그대여,
      오늘 떨어지는 낙엽을
      슬퍼하며 울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는
      화사한 마음 되어
      앙상한 팔이나마
      위를 향해 힘껏 뻗어보세요,
      하늘은 언제나 거기 있답니다.

      하늘과 함께 춤추며
      서릿발 모진 된서리를 견뎌 낼
      준비라도 착실히 하며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노라면,

      잎새 모두 떠나버린 가을이라 하여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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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예루살렘 성지가 될 것 같습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지를 순례하며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져 지난 며칠간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는 숭고한 길,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 이상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칸”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에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칸’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옷을 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 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  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입니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합니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최송연/사모

 

사진:나일강


카이로를 향하다
우리 지역, 같은 교단에 소속한 목사님, 사모님들 16명이 지난 1년간 계획하던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꿈이 이루어져 지난 2월23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가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성지순례는 처음에 계획하던 이스라엘행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이집트행 비행기를 타고 먼저 이집트로 가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그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카이로까지는 비행시간만 해도 장장 22시간이 걸렸다. 중간 대기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26시간, 날짜로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뉴욕과 이집트의 시간 차이가 7시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카이로와의 시간은 꼭 12시간, 그러니까 지구의 반 바퀴를 횡단한 셈이다. 나는 매우 지치고 많이 피곤했지만, 그래도 내가 평소에 그렇게도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 카이로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창에 코를 박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막 한 가운데로 나일강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띠처럼 둘러쳐 있고, 카이로 시내가 모래먼지와 공장에서 나는 매연 때문인지 잿빛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비행기가 카이로 상공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먼지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목을 심하게 자극하면서 콧물을 동반한 재채기가 쉴새없이 터져 나왔다. 먼지 알레르기가 심한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중나온 현지인 안내원'장동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지 듯이 뚫고 들어가던 비행기가 요란한 진동과 함께 멎자, 여행객들은 저마다 먼저 내려야한다는 듯, 서로가 앞을 다투어 내릴 준비를 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들고가야 할 짐들을 주섬주섬챙겨 손에 들고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행기가 멎자 나는 그들과 함께 섞여 비행기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 카이로 공항도 역시 모든 제삼국이 그러하듯, 많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나는 무척 즐거웠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성지 순례의 서막이 열렸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우리를 안내해 줄 젊고 싹싹한 한국 안내원이 현지인 젊은 청년 안내원 한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더니 우리 일행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모두 공항 출입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숙소로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안내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카이로의 사전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카이로시내에서는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재한 여러 전자회사 직원들 그리고 자동차회사 직원들 상사원들이 그곳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로의 젊은이들은 한국사람들을 자신들의 평생 반려자로 맞아들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사람도 꽤 많이 있다고도 했다. 그 한 예로 우리를 마중 나온 젊은 현지인 안내원의 이름이 "장동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들이 "왜 하필이면 장동건이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옛 애인이 한국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장동건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자기를 향해 장동건이를 많이 닮아서 좋다고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까 그는 키도 크고 눈이 서글서글한 것이 탈랜트 장동건을 많이 닮긴 닮은 것도 같았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 나와서 신실하게 자기의 맡은 일을 잘 감당해 내어서 이집트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또 이집트인들에게 자국을 선망의 대상국가로 인식시킬 수 있을만큼 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여준 조국의 모든 근로자들, 자동차회사 직원들, 전자회사 직원들, 해외 공사원들,주재원 등, 그리고 수출산업에 앞장선 모든 분이, 같은 해외 동포로써 무척이나 자랑스러웠고 마음 흐뭇했다.
나일강과 고센땅그 옛날 이집트 막강한 파라호의 포악한 학정에 견디다 못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아기 모세를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밭 사이에 놓아 둔다. 때마침, 강물에서 목욕을 하던 파라호의 딸인 공주가 갈대밭 사이에 놓인 역청이 발린 갈대상자를 보고 꺼집어내는데 그 속에서 한 탐스럽고 준수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아들로 삼아 기른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2장1절이하)에 나온다. 역청으로 칠한 갈대상자에 누여서 울고 있던 모세를 건진 그 강물의 이름이 바로 아름다운 나일강이다. 나일강, 6천 6백여km로 세계 제2의 큰 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아프리카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애굽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여러 줄기로 나뉘어지며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들고, 나일 삼각주라는 비옥한 땅으로 세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비옥한 땅 곡창지대에 고센지역이 있다. 이 고센지역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대흉년기에 자기를 찾아온 아버지 야곱과 그의 열 한 형제들에게 이집트의 왕 파라호에게 구하라고 한 곳으로써 고센 땅이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숙소로 가는 길에 나일강변에 있는 한 이집트인 식당에서 그들의 요리로 점심을 했다. 기름기는 좀 많았지만, 생각보다는 깨끗했고 맛도 괜찮았다. 허기야, 어제서부터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무엇인들 맛이 없었을까? 우리는 삼삼오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나일강을 바라보면서 처음 대하는 진귀한 이집트식 뷔페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나는 점심을 먹는 내내 음식보다는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 아름다운 공주의 웃음소리, 모세의 성장기, 모세의 장년기, 그리고 모세의 출애굽과정이 마치 어제 일인양, 영화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아름다운 성경그림을 바라보며 꿈꾸듯 넋을 놓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일강의 특이한 점은 강물이 시내 한가운데까지 흘러 들어와 식당 벽에 찰랑거리며 햇볕에 반짝거리는 것이 참으로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무사히 성지 순례를 마치고돌아왔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성지순례 기행문과현지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올릴 예정입니다.많이 사랑해 주세요.  최송연 드림 ^^*

 

                     

음악: Ito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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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

 

이집트인이 운영하는 나일 강가의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끝내고, 우리는 카이로 중심가, 올드시티에 있는 박물관과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 그리고 모세 기념교회를 방문했다. 나일 강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낸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는 모세 기념회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와서 머물렀다고 추정되는 장소에 ‘예수 피난기념교회’가 있었다. ‘예수 피난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는 모두 성지 곳곳에 세워진 다른 회당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도 겉모양은 사원과 같았고 내부는 요란하게 치장되어진 전통 유대교 회당이었다. 마침 우리가 들어간 시각은 유대교인들의 예배시간이라 회당 지하실 깊이까지는 내려가 보지 못했고, 내부는 사진 찍기마저 금지되어 있어서 조용히 내부와 바깥을 둘러보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콥틱 그리스도인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집트 내에도 소수의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을 일컬어 ‘콥틱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집트 내에,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전성시대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이집트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한다.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각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이때 이집트에도 복음이 들어왔으며, 콥틱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집트 안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마찬가지, 모슬렘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했다. 역사에 박식한 한국 안내원이 들려준 콥틱 그리스도인들 삶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슬람의 모슬렘이 이집트의 주도권을 잡은 지난 천이백 여년 동안, 사회의 모든 지도권,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슬렘이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는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선뜻 좋은 직장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일정 수입근원을 지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정부로부터 보조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지목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은 시내에서 살지도 못하고 외각지, 그것도 지난 날, 쓰레기수거 지로 쓰이던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 땅굴 같은 것을 파고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물 공급도 잘 안되니 깨끗이 씻을 수도 없다. 그 동네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대대로 그 신앙을 전수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물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의 팔목에다 십자가표식의 문신을 새겨넣어 준다. “너는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때마침, 우리 일행 앞에는 팔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은 한 초라한 할머니가 자신의 팔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인가 열심히 전하려 했지만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바싹 마른 그녀의 손바닥에 1딸러 지페 한 장을 쥐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님,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치 못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저들을 축복하소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뒤돌아 서 나오는데, 주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날 콥틱 그리스도인들과 그 앞에서 초라한 내 모습이 영안으로 보이는 듯, 육신적으로 초라한 그들 앞에서 내 영혼은 심히 부끄러워 몸 둘바를 몰랐다.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다음은 이집트 관광 최대로 꼽을 수 있고 이집트인의 긍지로 삼는 거대한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안내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그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피라밋은 고대 파라호, 그러니까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자기들의 무덤을 저렇게 큰 피라밋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내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 침대며 집기며, 심지어는 자기가 부리던 신하들까지 죽여서 같이 묻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파라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거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도 한다. 스핑크스를 쌓아 올린 재로는 흔한 일반 돌이 아니고 천연 화강암이었다.

 

스핑크스에는 매우 흥미로운 전설이 담겨져 있다. 스핑크스란 ‘교살 자’라는 의미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괴물이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지녔고 몸은 사자이며 등에는 날개를 달고 있다. 스핑크스는 테베 시민을 징벌하기 위하여 헤라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스핑크스는 테베 근처의 피키온 산으로 갔으며, 거기에 있는 벼랑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두 개의 수수께끼를 던져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스핑크스는 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방식으로 지혜의 신이라고도 불렸고 악마라고도 불리면서 테베 시민을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서 그 수수께끼를 풀자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슬피 울며 자살하고 만다. 이 일로 테베 시민은 오이디푸스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아들이고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한다는 이야기이다. 수수께끼의 정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었다.’ 아기 때는 기어다니니까 네 발로 걷는다는 것이고 장성해서는 두 발, 늙어서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으니 세 발로 걷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는 오래전에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피라밋을 보니, 만리장성의 규모와 정교함도 놀랍지만 피라밋과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피라밋은 모두 돌들로 쌓여 있는데 돌 하나가 작은 것은 1.5톤에서 2, 보통은 3-4, 큰 것은 20-30톤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4500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일까?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아직 철기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때에, 도대체 어떤 연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규모다. 참으로 인간 속에 잠재한 능력과 지혜가 무궁무진하고 끝없음을 보면서 창세기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끝은 어디쯤일까? 하나님을 닮은 그 엄청난 지혜와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할 것인가? 신의 형상을 닮은 그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단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던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던지 그 선택은 자유일 것이다. 지혜는 있으되 지혜 주신 분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요,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1:7절 상반절)이란 말씀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14: 1절 상)”하시는 말씀이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리에서 뱅뱅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음악: Ito상님 방에서

다음에 계속 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기대해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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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야의 싯딤나무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우리는 피라밋이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는 한 호텔에서 첫날밤 여장을 풀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카이로시내를 벗어나 광야로 향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카이로시내를 벗어나자 곧 메마른 광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3월의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태양빛에 눈이 부셔,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가도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이 쌓인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 같은 것이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화성에 온 것일까? 지구 안에도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황량함이 보는 이의 마음마저 메마르게 한다.

 

사막 여기저기에 듬성듬성한 가시덤불 같은 것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재치있는 젊은 안내원이 입을 연다. “지금부터 광야가 시작됩니다, 홍해까지 버스로는 두 시간 반을 더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화장실은 없습니다. 혹시 급하신 분들이 있으시면 여자분들은 무조건 얼굴만 가리시고 남자분들은 돌아서서 볼일을 보십시오, 여자분들은 그런 때에 대개 저 작은 가시나무 떨기 사이로 가서 숨으시는데, 그곳에는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곳이 바로 광야에서 서식하는 전갈과 불 뱀들의 서식처입니다. 그곳에 앉아서 볼일을 보시면 큰일이 나죠.” 우리는 그의 익살스런 말에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민수기 21 4절 이하에 잘 나온다. 광야의 불 뱀들이 모두 몰려나와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한 그 무시무시한 불 뱀과 전갈들이 이 불볕더위를 피해 숨을 곳이 있다면 바로 저런 가시나무 떨기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무서운 전갈과 불 뱀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며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는 듯, 끔찍한 환상에 전율했다.

 

나는 한때,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그렇게 많이 체험하고도 수시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이라고 비웃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실상에서 체험하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현실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그리도 쉽게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등을 돌려야만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야의 실체를 눈앞에 보면서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 그 상황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게 됐다. “목마르다, 배고프다. 우리를 애굽에서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어찌하여 우리를 이 메마른 광야로 끌어내어 죽게 하느냐? 심하게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만약 그때 그들과 함께했다면, 나는 분명히 그들보다 몇 배나 더 심하게 하나님도 모세도 원망했을 것이다. 나는 현대 온갖 최첨단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살면서도 작은 어려움 앞에서, 들어내어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입술 밖으로 내어 뱉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수시로 내 감정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며, 그럴 때마다 힘들어하던 내가 아니던가? 몸이 조금 불편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마저 저울질하는 쪽으로 문득문득 떠 올리기도 한 나다. 이렇게 나약한 내가, 만일 그들과 함께 이 메마른 광야에서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이 40년간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더라면…, 불을 보듯 뻔한 나 자신이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영역 외에는 잘 알 수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셨고, 그들을 희생시켜서 오늘 우리에게 거울로 삼게 하셨구나…,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헤매다가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원망하다가 멸망당한 그들, 선택된 민족, 히브리사람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이의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정죄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광야의 유목민 베두윈 족

 

사막지대를 달리는 차 속에서 내어다 보니, 다 낡은 천막 같기도 하고 움막 같기도 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바로 저 유명한 광야의 유목민 배두윈 족의 집이다. 광야의 베두윈 족에게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야의 배두윈이 집을 떠나 먼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다음 5가지의 필수품을 지니고 가야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물, 낙타, , 소금, 그리고 고양이라고 했다. 젊은 안내원의 재미있는 퀴즈가 시작된 것이다.

 

사막에서 꼭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대답은 여러 갈래로 엇갈렸지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역시 소금이란다. 그다음에 고양이, , , 그리고 낙타가 남았는데 어떤 것을 버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가 소금 다음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고양이일 것이란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정작 답은 우리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사막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소금, 다음은 물,그리고 그다음이 돈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소금이야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인 데, 그리고 돈이 있어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을 텐데..., 광야에서건 어디서건 음식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음식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할 비상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돈’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길든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은 돈보다 낙타라고 한다. 낙타만 있으면 먼 길을 갈 수가 있으니 낙타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이제 낙타와 고양이가 남았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낙타와 고양이 중 어느 것이겠느냐? 이것이 그날 퀴즈의 클레이맥스였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고 고양이라고 했다. ~~? 고양이라니…” 나는 하찮은 고양이를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동물 중에서 고양이는 아주 영민한 동물이라고 한다. 사막에서 잠을 잘 때, 무서운 불 뱀과 전갈의 접근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고양이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광야에는 불 뱀과 전갈이 그만큼 많으며,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붙어 있고서야 돈도 필요한 것이지, 사람이 생명을 잃고서야 돈이 무엇이 소용이겠느냐 하는 부연 설명이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새롭게 인식한 좋은 기회였다.

 

홍해를 건너다

 

카이로를 떠난 지 2시간 30, 끝없이 펼쳐진 넓은 광야를 가로질러 새로 닦아 놓은 듯한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서 우리가 홍해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난 오후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홍해의 수위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홍해는 여전히 넓디넓은 바다였다. 그 옛날, 저 넓은 홍해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졌고, 바다 속에 뚫린 대로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을 것이다(14: 1-4). 짙은 녹색으로 춤추듯 일렁이는 홍해 물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우리 일행은 카이로시내에서부터 쭉 타고오던 버스에 그대로 앉은 채, 이집트가 돈을 투자했고 중국에서 이루어 놓았다는 바다 속에 뚫린 길로 홍해를 건너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큰소리치는 현대문명의 실상을 보는 듯, 신기한 한 편,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고 수에즈운하 끝자리, 작은 호수가 있는 갈대밭 사이, 육지로 건넜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판 구약성서 지도를 보면 성경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바다가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유난히도 홍해바다의 길, 그리고 그 주위의 길에 흥미가 있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성경 일부분은 삭제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 점일 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전제로 할 때, 지도대로 성경을 찢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대로 지도가 그려져야만 하는가? 내 믿음은 지도가 성경대로 그려져야지, 지도대로 성경을 찢어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려면, 먼저 내 눈으로 그 지형을 확실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 성경에서 말씀한 지형들이 눈으로 확인될 때마다 눈물이 흐를 만큼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글/최송연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최송연

                   
서걱서걱
갈대의 부딪는 소리
섶을 이루며 쌓여가고

스산한 갈바람
가야 할 길 재촉하니
한세상 미련 없다 했건만

모든 진액
아낌없이 쏟아붓다
이제 열매에 자리 내어준 채
떠나야 하는 것이 힘든 걸까

못다 한 사랑
뒤로해야 하기에
저토록 흔들리고 있는 걸까

그래,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너무 흔들지 마라...

 

 

 

 

 

 

단어 해석 도우미:

낙엽(의인화) = 황혼기 인생을 그린 것임
바람= 환란(이풍진 세상.^^)
 
세상의 모든 은퇴 목사님, 은퇴를 앞둔 사역자님들, 그 사랑의 수고를 기억하면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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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우리 아멘넷의 기사로 올려진 "시드선교회 직원70만불 횡령"이란 제목하에, 거액의 선교부 재산을 횡령당하여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둔 상태라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그 아래 남긴 저의 댓글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재정부 상태는 어떠한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 또한 아직도 잘못된 시스텀으로 교회재정을 운영하고 계시는 교회가 있으면, 이런 것을 계기삼아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 젊은 사역자님들, 개척교회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행여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퍼다 놓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돈을, 재무 혼자서 관리하게 했는지요, 담임(책임자)목사님외 다른 진실한 두 사람을 더 넣어 세 사람이 authorized signers가 되어야 하고, 그 중 두 사람이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교회 재무 집사(혹은 장로)가 단체의 돈을 혼자서 횡령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미국 내의 business checking account system입니다. (아, 물론 목사님이시건 다른 성도님이건 교회 일을 위해서 급하게 작은 돈을 사용해야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먼저 쓰고 후에 영수증을 첨부하여 되돌려 받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reimbursement system이라고 하여, 미국 선교부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는 물론, nonprofit organization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교회들이 이 방법을 택하면 이런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관계도 부부를 넣거나, 너무 친한 사람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는 개척교회라고 목사 부부가 'co-signers'가 되는 데, 이것도 권장할 일이 못됩니다. 아니, 목사 부부가 재정부에 함께 'co-signers'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목사님을 비롯한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종들일 뿐(청지기 의식)이란 것을 알게되면, 사모는 재직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재정을 개척 당시부터 이런 시스템으로 구축을 해 두면, 설사 그중 한명이 시험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대치해 두면 되고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담임 목사님과 그 남은 사람이 함께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하도록 되니까,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혹여 삯꾼 목자가 있어, 주님께 드려진 헌물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재정부 시스텀을 성도들이 알게되면, 신뢰감이 생겨 더욱 좋은 교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교회의 일일수록, 반드시 성도들 중에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여 일을 맡기되 담임 목사님의 통제하에 행정이 잘 관리되도록 해야합니다.

하물며, 이런 큰 단체에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켜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책임 목사님이 누구신지, 능력부족이란 지탄의 소리를 면치못할 것입니다.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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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행복이란.../ 최송연

 

내게 행복이란 

당신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이 길

가끔 화창한 날

만나기도 하나

비바람 몰아치는 날

심히 많아

 

결코 쉬운 길이라

말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난 행복합니다

내게 행복이란 당신이니까요

 

늘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

진홍빛 그 사랑이 있기에

이 순간에 고백합니다

마음 다해...

 

내 영혼을

흑암에서 건져

구원하신 당신

당신만이 내게 전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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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2) 왜 기독교인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일입니까?

 

 
비록 “너는 도박을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십계명 중의 한 가지가 아닐지라도, 도박을 하는 것은 성경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경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것도 지켜야 합니다. 청지기의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기독교인은 부(富)를 포함한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또한 그들의 소유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쓰여 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4:1; 마태복음 25:14-20). 도박은 우리들의 자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청지기 직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노동과 생산적인 일을 존중하는 성경의 원리는 도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닌 방법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에 위배됩니다 (잠언 12:11, 28:19-20; 데살로니가후서 3:10).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22:39), 우리는 이웃의 손실을 통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박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도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언제 혹은 어떻게 자기의 삶이 끝날지 모른다고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어느 때라도 대참사와 병마는 일생의 계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그토록 모험인데, 왜 교회는 복권과 도박을 반대하느냐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차이 --- 하나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승마투표(경마) 도박은 정상적인 삶의 환경에서 부딪치는 위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위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박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가치 있는 무엇을 넘겨주기로 한 것이며, 그것의 결과로 한 쪽에게는 상당한 이득을 주고 다른 쪽에게는 상대적인 손실을 주도록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근거하여서, 우리들은 모든 형태의 도박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계획하신대로 사람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락이나 유흥으로서의 도박과, 도박으로부터 얻어진 수익을 정부가 사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갖습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목적(즉,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직접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도박의 유익한 점에 대해 선전하는 것은 환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의도하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사실이고 비극입니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에 대해서는 선전을 하지만,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 도박에서 돈을 따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은 큰 유혹에 빠쳐서, 결국에 가서는 흔히 “패자”가 되어 버립니다.

 

관심사: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증권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의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에 투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과 결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이나 정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험이 포함된 사업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청지기직분에 관한 자기의 양심과 서약이 안내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은퇴 프로그램이 현명한 투자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운영되는 반면에, 적절한 준비와 배경지식이 없는 개인의 투자는 그 투자를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며, 그것은 거의 도박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소중한 청지기직분을 통해 맡기신 것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아주 필수적인 것 이상의 자원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일에 대한 정직한 윤리를 축복하실 때, 그것은 번영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얼마만큼의 부를 더 저축하거나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예상되는 십일조 이외에 얼마나 더 주님의 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어보는 것은 충성스런 성경적 청지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3 년도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표방한 “도박에 대한 성서적 고찰” (1983)에 기록되어 있다.

 

 
역자 주: 승마투표(경마) 도박 (paramutual betting)은 경마에서 경주를 관전하는 관객들이 우승이 예상되는 출전마를 선택하여 돈을 거는 행위로서, 이긴 말에게 건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제하고 건 돈의 남은 돈 전부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하는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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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호수
             최송연

 

 

넓은 저 하늘 닮고 싶어
산이 외롭다면 산을 품고
별이 투정하면 별을 품고

 

돌이 날아들면 그 돌마저 품으니
누가 가시채를 던진다 한들
되갚아 줄 리 없는 깊은 수심,

보드랍기가 천사의 치마 폭 같아라

 

때때로
불어치는 모진 광풍에
할퀸 생채기 아파 눈물 흘릴 때면
달빛 내려앉아 쓰다듬어 주니
은가루를 뿌린 듯
밤 깊을 제면 

되려 더 반짝이네

 

이제 곧 폭설 내려치는
무서운 겨울이 닥칠 것이나
그때도 달빛이 함께 할 것을 믿으니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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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나 된 것 
                       -최송연
주님,
지금 나에게 
한 톨 소망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지나간 시간
돌이켜 보니
소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게
내 자아를 지배했으니까요

주님,
오늘 나에게
사랑 열매 소담하게 맺혔다면
그 또한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지나간 세월
돌이켜 보니
이해보다는 미움이 더 빨리
내 영혼을 파고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젠
절망이 변하여 소망 되고
미움은 변하여 사랑 되니...

주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5395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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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The most fearful thing in the world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when the night is the darkest black
for the morning's sun will come soon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In the midst of the winter storm
one can patiently sit and wait
for the springtime's warm rainbow
 
그러나
그대 맘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But
If you stack up desperation 
in your heart
Who can move that mountain for you?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So
to be feared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is world
is your despairing heart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 1)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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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神이 파송한 천사

 
                             최송연 

바람이 세다고 불평 마라
그 바람 때문에 
나무가 강해지느니

바다의 폭풍을 탓하지 말라
폭풍이 지나간 후
고기가 많아지느니

고난을 불평 말고 환영하라 
고난은 그대를 바로 세우라고
神이 파송한 천사이니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5497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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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적응력이
아주 뛰어난 것 같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거나 우리 민족은 모두
있는 그곳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열심히 그리고 아주 부지런히 살아들
가고 있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네들이 어디를 가건, 결코 버리지 못하고 적응을 하지
못하는게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끼리니까
살짝 알려 드릴게요, ㅎㅎㅎ) 그것은 하루에 한 끼라도 반드시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어야만 겨우 밥을 먹은 것 같은 음식습관이랍니다.

스테이크가 아무리 맛있다곤 해도 두 끼만 연거푸 먹으면 코에서 냄새가
난다니깐요, 후훗….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젊었을 때부터 선교사로 외국의 이곳저곳을 수없이 돌아다닌지가 벌써 20년이 넘어가고 있건만, 우리는 여전히 하루에 한 끼라도 꼭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어야만 겨우 밥을 먹은 것만 같으니….그런 우리를 가리켜서 남편 친구인 백인 선교사 한 사람이 “야, 너희들의 배는 김치 탱크구나…내 배는 "슬라피조" 탱크인데…(음식 위에 올려서 먹는 양파와 고기를 섞은 서양요리의 일종)” 하면서 크게 웃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그리운 것이 김치와 된장찌개이건만 러시아에 온 후, 거의 1년이 넘도록 김치와 된장찌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재료들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몸이 튼튼하여 입맛도 좋은 남편에 비해, 저는 몸도 약한 편이라 그런지 아무거나 썩썩 먹지를 못하는 골골이거든요. 얼마나 힘이 들던지요…훌쩍~

된장찌개는 그런대로 안 먹고도 견디겠는데…이놈의 김치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니…난 아무래도 순종(?) 김치
탱크인가 봅니다.

그런 내가 근 일 년 동안 김치를 먹지 못하고 살려니까, 거의 미칠(죄송^^*)지경이었습니다. 자나깨나 김치, 김치생각뿐이었고 꿈에도 김치를 먹는 꿈을 다 꾸게 되더라니까요.

그렇게 고심하는 우리를 본 어떤 중국 조선족 상인이 배추가 있는 곳을 아르켜 주겠다고 해서 우리는 선뜻 따라나섰다가 어느 늦가을의 노오란 배추밭을 보게 되었고, 그곳 들판에 흐드러진 배추가 새빨간 고추잠자리 떼들과 함께 어우러져 벙글거리고 있는 것을 본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던지요…(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다 글썽거린다니깐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배추를 끌어 담았는데요, 글쎄, 대책도 없이 30여 포기나 끌어 담았지 뭐예요.

이렇게 어렵게시리 배추를 구해다 놓긴 했는데…아뿔싸, 이 김치를 또 어디에다 담근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김치를 담글 마땅한 통이 어디 있어야지요,때 마침, 우리는 학교 (언어 연수생으로서 극동대학에 다녔음)에 갔다 오던 길에 어느 술집 옆을 지나오게 되었는데, 그 술집 뒷마당에 나무로 된 큰 술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빈 술통 속에다 비닐로 된 쓰레기봉지를 집어넣으면 훌륭한 김치통이 될 수가 있겠다는 아주 기발(?) 한 아이디어가 내게 떠 올랐고…남편을 졸라 거금? 을 지불하고 그것을 욕심껏 아예 두 통이나 사긴 샀는데…그 큰 술통을 집으로 가지고 갈 길이 또 막연했습니다.

“자, 이걸 어떻게 집으로 가지고 간담?” 아무리 둘러보아도 묘책이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길가에 그 빈 통을 세워놓은 채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며 손을 흔들어댄 지가 벌써 몇 시간이 지났건만… 그 누구도 차를 세워 주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하늘의 해는 유난히도 짧은지, 주위는 어느새, 어두컴컴해 오고 있는데…초겨울의 얼어붙은 땅 위에서 추위를 이겨보려고 우리 부부는 발을 동동 굴러보았지만 여전히 뼈가 쑤시듯 차가운 바람에 한기마저 느끼며 몸은 오들오들 떨려 오고... 배에선 쪼르륵 소리마저 들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커피 한잔과 빵 한 조각 먹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곧 시베리아의 무서운 밤이 닥칠 텐데…이 일을 어쩐다? 이 술통만 없다면야 ‘뜨람바이’(전차의 일종)를 태워 주겠지만, 그래도 김치통에 대한 미련만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술통만은 꼭 가지고 가서 김치를 담구어야 러시아의 긴긴 겨울을 속이 니글거리는 눈물의 밥을 먹지 않을 테니깐요.

다급해진 우리는 “오, 하나님, 우린 꼭 김치를 먹어야만 해요. 우리는 한국사람이요, 김치 탱크인 것도 주님이 다 아시잖아요. 제발 이 술통을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속히 천사라도 좀 보내어 주세요.” 우리 부부는 그곳에 서서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했고…나는 거의 필사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도를 막 끝내고 눈을 들어보니 이상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아주 낡고 큼직한 군인용 지프차 한대가 우리 앞에 오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젊은 러시아인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으로 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프차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 한 지가 1년이 넘도록 이런 군인 지프차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혹시 마피아단 중의 한 명이나 아닌가...해서였지요.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그때 당시의 러시아는 70년의 사회주의를 막 끝내고 개방된 직후라 문자 그대로 마피아단의 천국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마피아단이 들끓었고,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은 몸에 달러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그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고, 선교사들의 피해사례가 만발하던 그런 때였던 만큼 두려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답니다.

우리는 머뭇거리며 얼른 차에 오르지를 못하고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가? 의심의 눈으로 차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뒷좌석을 보니 그곳에 한 대여섯 살이나 먹었을까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아이가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의자 위에 쭈-욱 늘어놓곤 그것을 가지고 혼자서 놀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착하게 생긴 어린아이를 보는 순간, 우리는 마음이 놓였고, 그 차에 올라탈 수 있는 용기도 생겼지요. 우리를 태운 그 지프차의 운전사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웃는 얼굴로 앞만 보면서 달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낯익은 동리가 보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 지프차는 우리가 머물고 있던 선교부의 아파트 앞마당에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아파트에 사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지? 우린 그저 아직도 익숙지 못한 짧은 발음으로 우리가 사는 동네의 이름만 겨우 버벅거리는 러시아어로 말했을 뿐인데…”그저 정신이 다 몽-롱하기만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스빠시바, 스콜까 스토엣?” (감사합니다.얼마입니까?) 하고 묻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또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우리는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한사코 돈을 쥐여주려고 했지만 끝내 거절한 채 그는 어느새 차를 돌려 부르릉 힘찬 기어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운전석에 앉은 사람도, 그 어린애도 우리가 타고 내리는 동안, 정말이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당신의 자녀가 너무 다급하다고 졸라대니...아직 인간의 언어를 채 배우지 않은 천사들을 급하게 파송하신 것인지...ㅎㅎㅎ.)

“아, 주님. 당신은 김치 탱크들의 고통도 아시고 김치를 담아 먹으라고 천사를 보내어 주셨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종들이 김치를 먹어야만 살 수가 있는 김치 탱크임도 아시고 천사를 보내어서 김치통을 실어다 나르게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시커먼 지프차를 보면 우리가 두려워서 타지를 못할까봐 사랑스런 어린아이까지 대동시켜서 말입니다! (^^*)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런 멋진 배려에 코끝이 찡~해 옴을 느끼며 낡은 지프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랫동안 넋을 읽고 서 있었습니다. 와, 정말 멋있는 나의 주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생명 다하도록….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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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천사들의 이름도 다양하다고 하던데...글쎄요, 저는 제 수호천사의 이름도 모르네요.(ㅋㅋㅋ)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천사의 이름 이외에는 알 필요도 없고, 또 알아서도 안 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말씀에 의거한 영분별을 하지 않고 무조건 모든 천사들을 다 받아들이려 하다가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죽음의 천사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똥별/최송연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나님 손에 맡겨진 인생


저는 아주 젊은 나이에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습니다. 남편은 작은 개척교회를 맡아서 담임했고 저는 남편의 목회를 도우면서 두 자녀를 기르고 틈틈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교회를 섬긴 결과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을 해 주셔서 교회가 지역에서는 제법 큰 교회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들도 열심히 공부를 잘해 주어서 명문 사립학교에 풀 아카데믹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 저도 학교를 마치고 미국인 은행에 취직이 되었고 이제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될 즈음이었습니다. 그때 구소련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새 과도정부가 들어 섰습니다. 이것을 본 남편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공산정권에 압제당하고 있던 우리 고려인들에게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해만 한다는 것이었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란 것입니다!

나는 겨우 누리게 된 행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가 좋사오니…고집할 수만은 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지요…좋은 환경과 직장, 그리고 건강을 주신 분이 그분이니까요. 저희가 섬기고 있던 교회를 부목사님에게 맡기고 선교사를 지원한 남편을 따라서 아직도 어린 두 자녀를 떼어놓고 어렵게시리 구한 좋은 직장마저 포기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구소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3년을 잘 마치고 선교부에서 안식년을 주어서 집으로 돌아왔지요… 지친 몸과 육신을 재정비해서 다시 선교지로 나가려고요. 그런데,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돌아오는 즉시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었는데 그때 x-선 촬영결과가 이상하게 나온 것입니다. 허파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이 무서운 것은 ‘암일지도 모른다. 조직검사를 하기엔 너무 위험한 부위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하고 담담히 말하는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내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의사는 참 간단하고도 쉽게 말하더군요. 그렇게밖에 또 뭐라고 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섭섭하고...)

그날 저녁부터 저는 사탄의 극심한 공격 속에 들어갔구요…‘네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가 이것이냐?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모든 좋은 것, 그리고 네 생명보다 귀한 자녀까지 포기하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 어려운 곳까지 가서 헌신하고 돌아온 네게 왜 이런 무서운 병을 주시느냐? 사람들이 너를 도데체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아직도 젊은데 지금 쓰러진다면 주님의 영광이 가려 질 텐데…하나님께 병 낫기를 간구 해 봐라. 성경에도 병 나은 예가 얼마든지 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부터 저의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서 주님께 울부짖었지요. "살려 달라고, 지금 내가 쓰러지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운다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긴 것 주님이 다 아시지 않느냐고…" 그런데 병은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기침이 심하게 나오고 낮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입안은 하얗게 백태가 끼어서 밥맛은 딱 떨어지고 암 초기에나 발생한다는 설사는 하루에 대 여섯 번씩… 화장실에 가고 또 가고…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매일 그랬으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곤고한지요…

그냥 목구멍까지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젊은 나이에 쓰러져야만 하느냐?’ 하고 원망하고 싶어졌고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몇 개월을 그렇게 심하게 앓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니 죽음의 그림자가 시커멓게 씌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죽음의 실체로구나.” 싶었지요.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까 의사가 또 하는 말이라곤 “ 피가 나오는지, 가래를 잘 조사해 보아라 약은 없다. 암이 진행될 때까지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탄의 극심한 격동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두렵고 괴로워진 저는 하루에도 몆 번씩 자살 충동마저 생기더군요. 침대 위에 힘없이 배를 깔고 누워서 엉, 엉, 소리를 내어 울고 또 울었지요…

그러든 어느 날,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을 두드리시는 음성이 들렸어요. ‘사랑하는 딸아,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죽으면 천국이 아니냐?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네 한사람 죽는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될게 무엇이냐? 주께서 오라시면 갈 것 뿐인 것이 인생이 아니냐…너는 강하고 담대 하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죽으면 죽으리라!’ 생명을 포기하고 불평 대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기로 작정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내가 나의 최선을 다 해서 선한 싸움을 싸운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이제 족하오니 죽든지 살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도 괴롭고 복잡하고 무섭던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편 친구 목사님이 찾아오더니 한국에서 새로 온 한의사 한 분을 추천하면서 그를 한번 만나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한의사가 병을 낳게 하지는 못해도 우선 식사라도 할 수 있어야 병과 싸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서 우리 부부는 그 한의사를 찾았고 상담을 한 후 치료에 들어갔지요. 그때부터 겨우 식사를 조금씩 하게 되었고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다시 담당 폐 전문의를 찾았을 때 그는 “아직 혹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허파에 혹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두렵지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이 시험이 들었을 때에 그 시험 자체의 두려움보다 사탄의 격동함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가야 할 인생, 너무 미련 두지 않겠다. 이래도 저래도 우리 주님은 선하시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라는 참 믿음의 고백을 고백했을 때, 그때, 사탄은 물러나고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체험 간증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절)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과 내가 영혼과 육체의 모든 질병이 고침받고 건강한 삶을 사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마음과 생으로 자신을 드리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이란 고백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되어 질 때, 주께서 그 믿음의 고백을 흠향하시고 피묻은 손으로 안수하여 주시며 치료의 광선을 비쳐 주신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Q 11) 성경은 연장신용장과 같은 개인의 재정 관리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또한 기독교인은 개인의 빚을 갚는 것에 대하여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비록 성경이 오늘날 우리들과 매우 다른 문화와 사회에서 씌어졌지만 그것의 원칙은 영원한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지침과 진리 중에서 어떤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 재정 및 사업 거래에 적용됩니다.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 수입을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도전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특별히 새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들은 인플레의 위협, 빌리는 돈에 대한 금리, 경제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불안전한 주식 시장,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직업의 유지, 가족에 대한의무,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기대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시간과 돈에 대하여 고려해야만 합니다.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항목들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항은 소 비를 수입 이내로 통제하는 것 뿐입니다 – 실상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수입의 90%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항목의 끝에 있는 관심사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복잡한 일들과 예상 밖으로 생기는 비용들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우리들이 훌륭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명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 이상은 쓰지 않는 것과 같이 간단할 수도 있고, 미래의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매주 그리고 매달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45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8)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입니까? 그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은 빚에 대하여 적용할 수 있는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설명을 해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재정적인 빚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구입했을 때, 혹은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무엇을 구입했을 때, 그 계약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지불을 하는 한 구매자에게는 아무 빚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약속한 시간에 지불을 하지 않는다면, 구매자는 빚을 지게 되며, 그러한 경우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바울의 훈계를 위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래의 계약 기간을 지킬 수 없다면, 기독교인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은 채권자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새로운 계약 체결을 요청하기 위해 그에게 연락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지불해야할 의무를 가진 그 구매자는 빚쟁이가 됩니다.

 

할부 구입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치품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기 위해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약에 따라 돈을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신용으로 필수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년간 월세를 지불하는 것은 물을 땅에 부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집을 구입하기 위한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만 행해져야 합니다. 만일 일이나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차가 필요하다면, 그것 역시도 적절한 신용 구입이 됩니다. 만일 신용카드로 불필요한 것을 구입한다면, 매달 구매한 것에 대한 모든 금액을 갚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좋은 평판이 있거나 “칭찬 듣는” (사도행전 6:3) 사람이어서, 그가 진 정당한 빚을 갚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을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시편37:21). 연장신용장에 의한 중요한 구매는 흔히 담보물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매자가 지불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빚을 없애는 대신에 대금업자가 그 구입한 물건을 다시 가져 갑니다. 계약에 따라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갖는 것은 기독교인의 정직성에 위반되는 것이며, 그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빌리는 것을 허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5:41; 누가복음 6:35). 그러나 신자는 신용대부(크레딧)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예산을 가지고 정기적인 지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잠언 저자의 지혜로운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잠언 23:4, 표준새번역) 그리고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 28:20). 돈과 소유물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관심사:

 

우리들은 도덕과 윤리가 추락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의무를 피하는 수단으로 파산과 파산법 절차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는 방법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인도 그러한 방법을 따라야만 하는 아무런 이유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보다 높은 규범을 따라서 살아야만 합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재정, 신용, 빚, 그리고 기독교 가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치품으로 생각되곤 하던 것을 생활 필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정은 그들이 필요로 느끼는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일을 해야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의 영적 성장은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 있지 못하는 대신에 사 주는 더 크고, 더 좋은 장난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합의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복지는 모든 가정이 필요한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만 하는 사항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편 127:3). 돈이나 소유물이 자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관심사는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형편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재정적으로 형편이 허락할 때에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드리려고 계획을 합니다. 또한 그들은 신약성경 어디에서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려야만 한다고 요구하는가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십일조에 대해서 계속해서 명하심과 함께 그는 또한 그들이 더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마태복음23:23)에 대한 것을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보다 드리지 않을 때가 재정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산을 세우고 지출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돈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역자 첨부: 연장신용장 (extended credit) - 수출업자의 자금조달편의를 위하여 신용장개설 의뢰인의 요청으로 상품을 선적하기 전에 수익자가 신용장개설 은행 앞으로 무담보어음을 발행하면 이것을 통지은행이 매입하고 무담보어음이 발행된 후 일정 기간 내에 해당상품에 대한 일체의 선적서류를 어음매입은행에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한 신용장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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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1),

위험한 결단

 

 

간밤에 심하게 몰아친 진눈깨비에 심술이 난 걸까? 시계는 벌써 열 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잔뜩 찌푸린 하늘… 금세라도 다시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12월의 매서운 바람은 윙! 윙! 소리를 지르면서 다 낡은 선교부의 창문을 오늘만은 꼭 부서뜨려놓고야 말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부딪히며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아니, 운전사 ‘싸샤’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지…”반쯤 마시다 만 커피잔을 손에 든 남편이 연신 바깥을 내다보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네, 운전사 ‘싸샤가 안 온다면 오늘만은 어쩔 수가 없겠네…, 그래, 어쩌면 오늘은 포장도 안 된 러시아의 저- 지긋지긋한 얼음길을 왕복 여섯 시간이나 흔들리면서 달려가지 않아도 될런지 몰라…아, 신난다. 무엇을 한다? 옳지,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서 집에 남아 있는 어린 딸에게 편지라도 한 장 써야지…," 나는 집에 남아 있는 어린 딸을 생각만 하여도 코끝이 찡- 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왔습니다.

매 주일 아침 7시가 되면 우리는 선교부에서 얻어준 집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우수리스크’로 갑니다. 그곳에는 중국 조선족들이 많이 몰려나와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러시안교회의 방 하나를 시간대로 빌려서 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가 벌써 반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인 기사 ‘사쌰’아저씨가 어젯밤에 내린 폭설 때문에 하얗게 얼어붙은 길을 보고 운전이 불가능하다고 혼자서 판단을 했던지 10시가 다 되도록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집에는 전화도 없으니 알아볼 재간도 없습니다.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며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남편이 걱정하는 말에, 솔직히 걱정보다는 오히려 오늘 하루를 좀 편하게 쉴 수가 있겠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남편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성경찬송과 성경공부 교재들을 가방에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내가 “아니 여보, 지금 당신 무엇을 하세요? 운전사도 오지 않고 날씨도 이런데, 설마…, 당신 오늘 ‘우수리스크’에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응, 여보, 우리 기차로 한번 가 봅시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 추운 날씨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소. 그들은 아직 주님을 잘 알지를 못하지 않소. 그러니 그들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를 먼저 바라보거든…” 남편의 결심은 이미 굳게 서 있는 모양인지 담담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 기차로요? 여보, 우리는 러시아 어도 잘 알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기차를…, 그건 말도 안 돼요. 하루쯤 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야단치실 것도 아니니 우리 그러지 마요, 네? 그리고 요즈음같이 마피아단들이 외국인을 많이 노리는 때에…저는 싫어요. 꼭 가시고 싶으면 당신 혼자서나 가세요!” 마른행주로 젖은 손을 닦으면서 단호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지만, 나는 이미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 일이 무슨 일이 되었든지 또 어떤 일이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세워졌다면 아무도 못 말리는 왕 고집쟁이 내 남편…, 때문에 이민교회로서는 제법 큰 교회 측에 들던 우리 교회와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간 아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반인 어린 딸을 버려두고 이곳에 오게 되었고 남편을 아끼는 그의 친구들은 그런 그를 ‘우직하다고’ 나무라지 않았는가…, 그런 남편이니, 혹시나가 역시나였습니다. 그는 오늘도 아내의 현명한? 조언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어느새 두꺼운 외출용 점퍼를 걸치고 털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습니다.

 

언어도 모르고 길도 낯선 그곳을 굳이 가야겠다고 우기는 것은 참으로 괘씸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붙여 주셨으니 나도 나의 사명을 감당해야지 어찌 남편 혼자만 사지로 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털모자가 달린 내 따뜻한 외투를 꺼내어 입고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깥에 나오니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대고 그놈의 시베리아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영하 40도라던가… 코가 얼어서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쥐고 두 눈만 겨우 내어 놓은 채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기를 한 시간 이상, 다 낡은 승용차 한 대를 어렵게시리 잡아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극동대학에서 육 개월째 언어연수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이도 있고 하여 이제 겨우 숫자나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형편없는 러시안 실력…, “기차역으로 갑시다.”하고 점잖게 말하고 싶은데 가엾게도 입에서는 버, 버, 거리면서 말보다는 손발이 더 먼저 나가는 것을 어찌하랴….

다행히 그 러시아인이 우리의 끙끙대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하라쇼!(좋다!)" 하고 흔쾌히 대답하며 우리를 차에 타라고 고갯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운전사가 우리를 기차역으로 제대로 데려다 줄 수가 있을까? 아니면 딴 길로…? 위장된 마피아단…? 소심한 나는 온갖 걱정으로 마음에 심한 갈등을 느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쩌랴… 마지못해 남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진 나는 차 안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슴도치 모양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주님, 제발 이 운전사가 우리를 무사히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게 도와주세요.”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옆에 앉은 남편을 흘낏 바라보니 그도 역시 은근히 걱정되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서 애꿎은 창밖만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갔을까? 저-건너편에 종탑이 우뚝 솟은 기차역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안심이 되든지… “쓰바씨바!(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우리는 그 운전사에게 루불(러시아화)을 듬뿍 쥐여주고는 도망치듯 뛰어내렸습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2),

천사를 파송하신 주님

 

기차역에 도착해서 벽을 바라보니 벽에 붙은 낡은 시계가 어느덧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지금 곧바로 기차를 탄다고 해도 '우수리스크’에 갔다가 당일로 되돌아오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안내판에 보니까 오후 세시에 가서야 우수리스크행 기차가 있다고 적혀 있지를 않은가? 나는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거의 애원하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남편의 표정에는 조금도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창구로 걸어가더니 기차표를 두 장 사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오, 주님 우리는 과연 우수리스크에 가는 기차를 제대로 탈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제대로 그곳에 내릴 수가 있을는지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무모한 짓이 분명한 남편의 행위이지만 이 일이 분명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는 못할 터…, 내가 너무 강한 반대를 한다면 마귀가 좋아할 테고… 그냥 따라가자니 너무나 무섭고… 나는 속수무책이 된 기분으로 말없이 창가에 기대어 서서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역 안에 설치된 마이크로폰에서는 계속해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수리스크행 기차를 바로 타지요?” 시간은 거의 세시가 다 되어가는 데, 안내원도 없으니 어디로 가야만 '우수리스크'로 가는 기차를 바로 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혹독한 추위와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거의 새파랗게 질린 채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소.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요.” 두려워서 떠는 나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서 위로하는 남편의 말이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남편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까부터 저쪽 맞은편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던 한 포근한 인상의 러시안 중년부인이 웃으면서 우리에게로 다가오더니 “저-혹시 당신네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아니냐?” 하고 정확한 영어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서 있는 우리를 향해서 그녀는 “내가 우수리스크 러시안교회에서 당신들을 보았다. 당신네들 지금 우수리스크로 가려고 하느냐? 그러면 나와 함께 가자. 나도 지금 '우수리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 주면서 동행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친절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 있는 다른 어떤 대안이 우리에게 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두 번 다시 생각해 볼 겨를도, 또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 되어서  “그렇다. 같이 가 준다면 고맙겠다.” 선뜻 대답을 하고 그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 무조건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는 우리가 타자마자 곧 눈이 하얗게 쌓인 러시아의 넓은 들판을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을 했고,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간 후,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겨울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였습니다. 음산한 시골 역에 도착한 우리는 또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왔던 그 여인이 능숙한 러시아 어로 지나가는 택시를 한 대 잡아서 세우더니 “타세요. 제가 당신들이 가려고 하는 교회까지 안내해 드릴게요.”하면서 상냥하게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한 상태에서 “Thank you.”를 연발하고는 그 여인이 세운 택시에 올라탔고, 잠시 후, 그 차는 우리의 눈에 익어 반가운 그 러시안교회 앞에 정확하게 도착을 했습니다.“여기가 당신들이 오려고 하던 곳이 맞지요?” 따뜻하게 묻는 그 부인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방글방글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 담뿍 배어 있었습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곳이예요!” 너무나 기뻐서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는 우리를 그곳에 내려 주라고 택시 운전사에게 말을 한 후, “Take care.(조심하세요.)" 하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그 여인은 우리가 내미는 택시비도 거절한 채, 함께 타고 왔던 그 차에 그대로 앉아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이 든 나는 "여보, 당신 저 사람을 러시안교회에서 본적이 있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니, 나는 모르겠는데…? 음, 당신도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사실,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의 면 소재지 정도의 아주 작은 중소도시입니다. 러시안교회의 성도 수라고 해봐야 겨우 30-40명 안팎입니다. 우리가 매주 그 곳에 가서 그들의 예배에도 참석했으며, 구소련 시절에 땅굴 속에 숨어 있던 성도들이라 미국에서 간 선교사들인 우리를 극진히 아껴주었고 또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들의 얼굴을 모두 다 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육 개월이 지나는 동안, 남편도 나도 그 여인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보, 그분은 우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틀림이 없어요. 정말 당신이 말 한 대로 신실하신 목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에요. 그렇지요?” "그래, 정말 그런 것 같소…" “오, 아버지 고맙습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선한 목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고백하는 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 뜨거운 감사의 가슴을 안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그렇게 서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마저 하나님의 따뜻하신 숨결처럼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생명 다하도록…”

선한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과도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해 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인생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다음에 계속됩니다!^^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3),

시베리아의 겨울밤

 

 

우리가 탄 육중한 기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낡고 웅장한 플랫폼을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곧이어 눈으로 하얗게 덮인 러시아의 넓은 들판이 오후 햇살을 받아 은빛 물결처럼 반짝거리며 끝도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무도 집도 모두 하얗습니다.

옛날 후고구려를 세운 대조영이 이끄던 기마병들의 환호소리, 일제시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진 독립투사들의 본거지, 그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저기 보이는 저 넓은 들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쁘리모스키 클라이'라고도 하고 '해삼도'라고도 불리우는 곳입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앉아서 차창밖을 내다 보며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우리가 우수리스크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 해는 서산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북쪽 하늘의 해는 유난히도 짧은 듯, 방금 해가 서산에 기울어 음산한 회색빛 건물들이 을씨년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폴싹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선교 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함께 기차를 타고와서 이곳 러시안 교회까지 안내해준 그 친절한 여인을 태운 차도 벌써 저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성경공부반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벌써 네댓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삐걱거리는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가 보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 우리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중국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은 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모두 숙소로 돌아 가버린 듯 캄캄한 교회당 안은 텅 빈 채 썰렁한 냉기만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은 중국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입니다. 그들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온갖 잡동사니를 이고 지고 가까운 국경, 지금 막 무너져 내린 사회주의를 벗어던지고 새롭게 등장하는 민주주의에로 발돋움하는 과도기 중, 허술해진 국경 수비대의 눈을 피해 떼를 지어 몰래 국경을 드나들기를 서생원이 쌀가마 속을 들락거리 듯 들락거렸습니다. 때로는 국경 수비대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 중소도시 규모의 작은 도시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 들어 살 만한 집도 없습니다.

마땅한 셋집을 구하지 못한 그들은 창고를 개조하여 칸막이를 치고 남녀가 함께 여럿이 혼숙을 하며 살다가 러시안 마피아단에 의해서 돈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없이 모여듭니다. 낮에는 마른 땅바닥에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그 위에 중국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쭉 진열해 놓고 팔다가 밤이면 합숙소에 들어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먹고 자고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들은 비록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액센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편입니다. 그들의 눈에 미국에서 선교사로 나왔다는 우리들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지 우리가 전해 주는 성경책도 넙죽넙죽 잘 받고, 또 주일 오후 세 시경에 예배드리며 가르치는 성경공부반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주의 사랑으로 교제하고 또 전해주는 복음의 메세지를 놓칠새라 눈을 반짝거리며 아주 흥미있게 잘 받아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장사꾼들보다 적어도 한 두 시간 더 일찍 장사를 접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열심들을 내며 모이는 숫자가 점점 늘어가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기는 저 역시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이 실망할 것이고, 먼저 믿는 자로서의 우리가 신의를 저버리면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배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먼저 믿는 우리를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번 약속한 것은 지켜 낸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지론입니다. 옳은 말이이지요. 하지만, 그 신의란 것도 목숨이 붙어있고서야 있는 것이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기까지 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모두 휴대전화가 있으니 전화 한 통이면 끝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0여년 전, 처음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새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 그때 당시만 하여도  그곳 사람들은 그 누구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일것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운전사 '싸샤'(선교 본부에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채용허락 하여준 러시안) 아저씨도 없는데 그것도 다 늦은 오후 시간대 기차를 타고서라도 꼭 내려가 보아야만 하겠다고 고집하던 남편, 그런 대책없는 남편 때문에 가족들은 언제나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남편이 많이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원망해 보아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생각에 입을 꼭 다물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계속될 예정입니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4),

이브코브 목사

 

한참을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러시안 교회 뒷마당 사택에서 사시는 담임 ‘이브코브(가명)’목사님을 찾아가 상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상의를 해보면 그분은 로칼 러시안이니 무언가 좋은 대책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브코브 목사님의 사택을 찾았습니다. 이브코브 목사님 댁 방에서는 따뜻하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불빛만 보아도 얼마나 반갑던지요. “탕, 탕, 탕!” 세차게 문을 두들겼습니다. “크또 땀?(거기 누구요?)"하는 소리와 함께 깡마른 40대 초반의 ‘이브코브’ 목사님이 문을 조금 열고 그 틈새로 얼굴만 빠끔히 내어다 보셨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습니다.

“쯔드라스 위쩨, 빠스뜨로 이브코브(안녕하세요, 이브코브 목사님.)" 반갑게 인사를 하는 우리를 향해서 “쯔드라스 위쩨, 브라더 이 시스트라, 노, 아니 브쇼 쁘리하질리.”(안녕하세요, 형제님 그리고 자매님, 그러나 그들은 (성경공부 반) 모두 돌아갔소."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목사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분은 우리를 언제나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구소련 지하 교회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형제.자매로 통함). 직분보다는 더욱 친근하게 들리긴 하지요. “므이 저나욤 또제, 딱칵(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면 된 것 아니냐?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시더니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손으로 잡고 있던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 저~~… … ….”

이 시간까지 그들(우리 성경공부반)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몰라서 당신의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은 아닐텐데…. 우리는 그 교회를 시간대로 빌려 쓰고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인도 우리의 선교대상이라는 마음으로 어려운 그 교회에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을 드리고 있었기에, 그리고 평소에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 생각에는 적어도 잠시 안으로 불러들여 차근차근 이야기라도 해보자라고 하시던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라도, 어떻게 이렇게 늦었느냐, 오늘 밤에 어디서 쉬겠느냐, 무슨 대책은 있느냐? 하고 물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이럴 수가….순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이들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무언가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입이 얼어붙어 버렸는지, 머릿속이 새카매지면서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육칠 개월 동안 극동대학 언어연수과를 다니며 매일 갈고 닦은 러시아 어, 실력이야 좀 부족하기는 해도 이런 때에 실력 발휘도 해볼 겸 무언가 한마디쯤 더 해볼만도 하건만…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미 굳게 닫혀진 문을 다시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공산주의 [共産主義]가 만들어 낸 인격이나 신앙 인격의 변이를 잠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란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함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요어근인 '콤무네'(commune)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공동체의 재산을 증폭시켜서 일하는 능력대로 나누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은 부르주아사상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신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제거해 버린 사상 속에서는 인간의  사상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훌륭해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지켜내며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선하지가 않다는 것이 나의 체험적 견해입니다.  

이런 허망한 사상 속에서 70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결국 그들은 “내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념이 자리하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국가의 것은 무조건 내 집으로 가지고 가고 본다는 것이고 내 것은 귀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생활습관 역시 부자의 것은 다 불의한 것, 우리가 가져도 가하다라는 형태로 알게 모르게 굳어져 있는 듯했습니다.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에게서 지원받는 모든 것은 당연하고 형제.자매들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나누는 것 역시 당연하기에 베푸는 자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던 것 같았습니다.

좋게 생각하자면, 날씨도 춥고 바람마저 모질게도 차가웠으니 방 안에 식구를 생각하면 문을 너무 오래 열어 둘 수만은 없었겠지요, 또 그 목사님에게는 어린 자녀가 올망졸망 여덟인가 아홉이나 되었고 방은 몇 개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도 별로 크지 않은 판잣집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보아야 잠자리로 내어줄 장소가 없으니 난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참고로, 러시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주시는 대로 모두 받아야 한다는 교리 때문에 산아제한은 금지된 교회 법이라고 했음.)

그리고 우리는 주일마다 비록 낡은 고물 자동차이긴 해도 자동차도 있었고, 보디가드겸 비상시 언어소통을 할 수 있도록 선교본부에서 배려해 준 러시아인 운전사를 대동하고 다녔으니, 이번에도 운전사와 함께 왔겠거니 생각을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왔다는 선교사들이 설마 이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그 먼 길을 그것도 밤중에 찾아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소심한 성격인 나는 지레 겁을먹고 새파래져 덜덜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길도 낯설고 언어도 딸리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러기에 처음부터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구운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아침 식사로 때운 것이 고작입니다. 유난히도 몸이 약한 편인 나는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속을 비워둔 탓인지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윙, 윙, 불어대는 매서운 바람이 면도칼처럼 살갗을 깊숙히 뚫고 뼛속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와 텅 빈 배에서 쪼르륵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뚫고 천둥소리처럼 고막을 때리며  들렸습니다. 나는 갑자기 심한 허기를 느꼈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베리아의 혹한,  캄캄한 겨울밤에 낯선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될 예정입니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5) - 마지막회
“눈밭에서의 기도”


기대하고 찾아갔던 이브코브 목사님의 냉담함에 상한 마음이 되어 사택을 돌아 나왔으나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니 파랗게 쪽빛을 내뿜는 초승달이 시커먼 구름 속에 가려 보일 듯 말듯 걸렸고 너무 추운 탓인지 몇 개 떠 있는 별들마저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 밤에 또 모진 폭설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여간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젠 어쩐다? 뒷일은 생각지 않고 일을 저질러 논 자신을 질책이라도 하는 것일까…… 할 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남편이 그날처럼 야속하게 느껴진 때는 다시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씀드렸듯 ‘우수리스크’란 곳은 한국으로 치자면 작은 면 소재지 정도의 후진 도시입니다. 그것은 상태가 면 소재지 정도로 후지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땅이 넓은 탓에 모든 것이 가깝게 올망졸망 붙어 있는 것은 또 아닙니다. 역 근처에 호텔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교회 근처에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여인숙이라도 있어서 나그네가 하룻밤 쉬었다 갈만한 곳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선교지를 옮기기 전 ’우수리스크’에서 지내면서 약 6개월 정도 사역을 했기에 그 지역의 실상을 조금은 알고 있던 우리로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차갑고 캄캄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한국의 도시들처럼 길가에 가로등이 있어서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그곳에는 택시도 없었고 일반 승용차가 용돈을 벌기 위해서 가끔 사람을 태워주는 정도였으나 그것도 낮시간 동안이지 워낙 추운 곳이라 그런지 캄캄해지기 무섭게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기차역이 가깝다거나 어디로 가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혹시 역 구내에서 하룻밤 지새우기라도 하겠지만, 동서남북 천지를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낯선 지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주여, 우리를 살려주소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십시오.” 남편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핑~ 고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곧, 놀랍게도 번개처럼 반짝! 하고 어떤 생각 하나가 나의 머리에 주입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여기 길거리에 이러고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저 멀리 산 너머 동네 어딘가에 한국에서 온 처녀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다고 하였지? 그곳을 찾아가 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 선교사님들이란 다름 아닌 한국 감리교 교단에서 파송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보다 2년 정도 먼저 그곳에 미리 와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는 처녀들로, 우리가 “우수리스크”에 처음 갔을 때 만난 여자 선교사님들입니다.

비록 파송 받은 교단은 다르지만 이제 갓 30대 남짓 된 처녀들이 고국을 떠나 이 열악한 곳에 와서 청년들을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녀들이 ‘우수리스크’ 장터에 나오는 때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따끈하게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커피도 끓여 주면서 그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잠시나마 가정과 같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한 다음 돌려보내곤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선교지를 옮긴 후에도, 그들은 외로웠던지 우리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두서너 번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러시아에서는 흔하게 먹을 수 없는 소고기, 우리가 먹기에는 아까워서 얼음 통에 감추어두었던 것을 꺼내어 달달 볶고 감자와 양파 그리고 당근을 송송 썰어 넣고 미국에서 성도들이 보내어준 카레를 풀고 따끈한 카레밥을 지어줄라치면 두 아가씨 선교사님들은 너무도 맛있다고 어린애들처럼 좋아하면서 즐겁게 먹고 이런저런 선교지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허심탄회 모두 털어놓고 깔깔대며 웃기도 하다가 때론 눈물 짖기도 하다가 편안한 마음이 되면 사역지로 되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몇 번 사귐이 있던 그 처녀선교사님들을 찾는다! 아이디어는 기발한 것 같은데…그녀들이 사역하는 곳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갖고 있지를 않은 것이 또 문제였습니다. 이건 차라리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산너머 동네란 곳을 찾아갈 수 있는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얼어붙은 길에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또 없는 터라 우리는 무작정 산 너머에 있다는 동네를 찾아 나서기로 하고 발길을 산쪽으로 돌려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눈이 발목까지 쌓인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터벅터벅, 걷는다기보다는 힘겹게 허우적거리며 움직인다고 해야 옳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대신 불행 중 다행으로 길 양편으로 하얗게 수북이 쌓인 눈 위로 쏟아져내리는 달빛의 반사작용으로 희미하게나마 겨우 우리가 걷는 곳이 길이란 것을 어림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서너 시간 가량 산으로 계속 올라갔을까? 몸에서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저만치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것을 보니까 산너머 있다는 동네가 어쩌면 저곳인지도 모릅니다. 저 동네가 우리가 찾는 그 처녀 선교사님들의 동네이기를 바라면서….

동네에 들어서자 기진하여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아파트 (아파트라고 해야 다 낡은 창고 같은 것이지만)의 대문을 무작정 밀고 들어갔습니다. 제대로 치우지 않은 탓에 지린내가 확! 덮쳐오지만 가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캄캄한 아파트 층계를 더듬어 올라가니까 철문이 하나 보이고 그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옵니다. 그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강도가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무서운 마피아가 기다리고 있을지….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밖에서 얼어서 죽으나 강도에게 잡혀서 죽으나 매한가지란 생각에 무조건 제일 먼저 만난 집의 문을 쾅쾅! 두들겼습니다.

“크토, 땀?(거 누구요?)” 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눈 하나. 그들도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탓에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상식입니다. 하물며 이토록 늦은 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안에서 잠시 망설임 없이 덜커덩! 문빗장 따는 소리와 함께 파랗고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노란 금발의 러시안 중년부인이 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무슨 일이냐? 하고 묻습니다.  

시계를 보니 밤이 깊어 자정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런 시각에 사람이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요. 들어가면서도 혹시나?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선교부에서 보내어 온 1년 치 생활비, 미화 약 $5, 6,000불 정도의 거액을 집에다 둘 수가 없어서 하얀 천을 만들어 그 띠에 돈을 돌돌 말아 허리에 늘 차고 다녔기에 더욱더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돈이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애물단지임을 배웠습니다.

여인의 눈이 착하게 보이긴 하지만 들어오란다고 무조건 따라 들어갔다가 자칫 돈만 빼앗기고 밤거리에 쫓겨날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에는 많은 중국 조선족들이 당한 것처럼 소리도 없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의 숨도 쉴 수 없이 질린 채, 더듬거리면서 “혹시 한국에서 온 처녀선교사님들이 이 동네에 살고 있느냐?” 영어 반 러시아어 반, 손짖 반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내 아들이 그 처녀 선교사들의 교회에 다닌다. 내 아들이 조금 전 교회에서 돌아와 지금 씻는 중이다. 추울 텐데 따끈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조금만 기다려라. 아들이 나오면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방안을 힐끗 드려다 보니, 한쪽 구석 난로 위에서는 늦게 온 아들을 위한 것인 듯, 노랗고 큰 양은 주전자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스바씨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죽을 땐 죽더라도….하면서 얼른 따라들어갔습니다. 추워서 덜덜 떨던 몸이라 한 잔의 따끈한 차는 마치 사막에서 생수를 마신 듯 행복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머니를 닮은 듯, 파란 색의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20대 젊은 청년이 욕실에서 나오더니 깜짝 놀라며 경계하는 얼굴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후, 흔쾌히 “하라쇼!”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바뀝니다. 그 청년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이미 새벽이 가까운 듯, 더욱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가더니 허름한 아파트 앞에서 “즈데시(이곳이다.)” 합니다. “오, 주님!” 이곳이 정말 이 밤에 찾지 못하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그 처녀선교사님의 숙소엘 무사히 찾아온 것일까요? 가슴이 다 두근두근 두근거립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비비며 "크토 땀?(누구세요?)" 하면서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처녀선교사님들입니다! 연락도 없이 그것도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우리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여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어머나! 어머나!" 소리를 연신 지르며 와락 껴안기도 하고… 너무 기쁘다며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죽었던 가족이 살아서 돌아온 듯,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며 환대해주었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은 그 밤에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어나 따끈한 밥을 짓고 한국에서 가져온 별미라면서 신라면을 보글보글 국 대신 끓이고…. …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우리에게 밥을 먹게 한 뒤, 싫다고 사양하는데도 굳이 자신들의 침대 방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자신들은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자는 등… 얼마나 반가워들 하는지요…진심으로 기뻐하며 환대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주의 사랑으로 맺어진 형제 자매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주소를 가지고도 잘 찾을 수 없는 낯선 지역,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가야할 곳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기이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이한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 전해드립니다!^^

 

 

 

글/최 송연

 

 

 

 

 

 

 

 

 

힘들고 지친 당신을 위한 기도/ 최송연

 

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을 아끼는 내 마음

하얀 새털깃 되어

당신의 아픔들을

모두 감싸줄 수 있기를…

 

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내 마음

갈바람 되어

당신의 고통들을

모두 거두어 갈 수 있기를…

 

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

흐르는    되어

당신의 슬픔들을

모두 씻어 줄 수 있기를…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당신에게

세상 모든 것을 주고 싶습니다

 

내가 별이라면 당신에게

소망으로 길을 밝혀주고

내가 꽃이라면 당신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드리겠습니다

 

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당신만은 고통 없는

한 세상을 살게 해 달라고…

 

 

 

출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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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기/ 최송연

 

하늘에 별은

낙심된 자에게 소망을 주는 것

 

꽃이 봄에 피는 것은

가을의 열매를 위한 것

 

인생 그 존재 가치는

창조주께 기쁨이기 위한 것

 

내 영혼아 향기를 발하여라

주께 기쁨이 될만한

참사랑의 그윽한 향기를...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9276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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