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지능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죄가 그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여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의지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이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요 8:34)이기 때문이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대로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서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롬 8:7)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없으니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다. ”구스 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물론 할 수 없다(렘 13:23, 롬 3:10-12). 그것은 물리적으로나 자연 법칙상으로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악에 익숙한“ 그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육에 속한 자)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반드시 그의 생명 안에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만이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고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인간에게 있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새 피조물을 낳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2. 그 방법

이제 방향을 돌려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지, 어떻게 거듭나게 하는지 살피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성령의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조금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일이다. 바울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비하게 신도들과 연합되는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이 연합은 그 형적을 찾아낼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원자의 에너지와 같아서 그의 파괴력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자의 힘의 궁극의 기원은 인간으로선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 놀라우며 뚜렷하게 볼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 안에서의 그의 작용을 정의하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유의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나 성령은 다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들을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의 방법을 설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그의 중생의 역사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다.

(1)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식물의 성장처럼 몇 달이나 몇 해에 거쳐 서서히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거나 그 어느 한쪽이다. 성경적 비유는 흔히 그리스도인은 찰나적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말로써 중생을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조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물건이 존재하든가 아니면 존재치 않든가 이다. 거기 점진적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 한 죽은 사람이 깜짝할 사이에 부활 되며, 그는 죽은 사람이든가 아니면 산 사람인 것이다. 그 중간 단계란 없다. 한 아기는 순간적으로 잉태된다. 생명이 있든가 아니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2) 성령은 사람의 영혼에 와서 무엇인가를 행하신다

그는 다만 그 마음에 기독교의 진리를 제공하기만 하고 그의 선택 여부를 사람에게 내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온갖 논리와 추론으로써 설복하려 드는 한낱 외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속, 그의 영혼, 심령 또는 마음속(다 같은 뜻임)으로 침투한다.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다. 중생 시 성령은 이 모든 행위의 근원 바로 그것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그는 문제의 심장 곧 모든 인간 행동의 중심이고 최저 동기인 사람의 심장, 내심(內心)에 작용한다....

(3) 성령 사역은 무엇을 더하거나 새 기능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어느 새로운 것을 부가하거나 생각하고 믿는 더 많은 영이나 새 기능을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성향을, 죄에 대한 사랑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을 때 그는 새로운 눈이나 귀나 손이 더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이미 있었다. 오직 그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생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다.

비슷한 모양으로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의 영적 생명에 새로운 지성이나 의지나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의 타락에 상관없이 이러한 기능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는 영혼 없는 동물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릇된 것은 이 기능들이 그릇된 목표 – 하나님을 위하는 대신 사단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바는 사람에게 지성이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대신 그를 위하여 쓰이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들의 용도(用途)의 방향을 변경시키신다.

(4) 사람의 중생 시에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성령은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분다“(요 3:8). 아무도 바람을 명하지 못한다. 아무도 서인도 제도의 태풍을 플로리다 주로 부는 대신 바다로 불도록 명할 수 없으며 또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예수의 말씀대로 바람은 임의로 분다. 그와 같이 성령도 임의로 중생시키신다....

만일 중생이 신앙의 선행(先行)치 않고 그 뒤에 오며 그에 의존한다면 구원은 로마서 9:7 말씀과는 정반대로 달음박질하는 자나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사람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행하기 전에 중생이 필요하다. 중생에서 사람은 100퍼센트 수동적이고 성령은 100퍼센트 능동적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지만 이만큼은 우리가 안다. 중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바로 사람의 영혼(심령)에 어떤 일을 행하시고 이것은 또한 마음이나 행위 간에 그의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에게 어느새 실체나 새 기능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가진 영혼을 소성시킨다. 그는 또한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데 반하여 주권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행하신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 전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신비일 따름이다. 우리는 바람을 못 보듯이 성령을 볼 수 없다.

3. 그 결과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으나 그의 결과는 볼 수 있다. 폭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떠밀어 버릴 때 우리는 바람이 발휘하는 능력을 본다. 마찬가지로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령의 작용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시(例示)한 바,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옛 죄는 벗겨지고 새 덕행이 대치될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던 것이 이제는 온통 변했으니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성향과 새 욕망을 심은 때문이다. 쓰디쓴 샘이 달디단 샘으로 변하여 그 흘러나오는 물이 이제는 달다. 가시밭이 포도원으로 변하여 찔레 대신 포도가 자라며(눅 6:43-45), 돌 같은 마음이 생명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다. 한 인간이 출생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어떤 새것이 창조된 것이다. 옛사람은 원칙상 벗겨졌고 새 사람이 입혀졌다. 예수께서 이를 요약하여,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자는 이젠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는 잃어버린 자에 대하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때 역경에 처했을 때 고국에 편지하기를 ”우리는 이곳에 아주 개척하기 어려운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고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망하여 포기할 뻔했습니다.“라고 썼다.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이디오피아 인이 그 피부를 바꾸지 못하나 하나님이 그의 영을 보내시면 그 백성들은 저항할 수 없이 회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활발치 못한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여러 번 아무 결과를 보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나 흔히 그들은 낙망하게 된다. 표면상의 결과가 없으면 그들은 그것이 가치가 있는지 의아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중생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의 책망하는 역사를 인하여 그를 찬양하라! 그 책망은 사람을 몹시 불안하게 하고 그의 양심은 그를 번민케 하여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적대하는 것 같고 그의 죄가 그 앞에 크게 떠오른다. 양심이 그를 괴롭히어 그는 부르짖게 된다. 그는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던 삼천 명과 같이 마음에 찔리어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한 것같이 부르짖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망을 통하여 그는 죄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는 회개하고 믿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책망의 고통을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고 심령의 괴로움을 통하여 평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제지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성령께서 책망하실 때 그가 아무리 잔인하였건, 아무리 괴팍스런 죄인이었건 그의 과거를 불문하고 성령 앞에서 그가 녹아서 눈물 흘리며 그의 마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 가운데 죽은 극히 냉담한 죄인도 성령에 의한 출생을 지극히 작은 규모로도 거역할 수 없다. 그는 믿고야 만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누리려면 또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데 성공하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 안에 오셔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령의 중생시키는 감화력(感化力)을 위하여 기도하라.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29-14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앞 장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중생을 통하여 죽은 사람 곧 싸움터에 한 주일 동안이나 쓰러져 누워 있는 병사의 시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킴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죽은 상태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던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영적 생명을 부여한다. 이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이 영적 생명과 그전에 있은 죽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이 흔히 병약(病弱)하다는 것은 너무도 부인할 수 없는 뻔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짓는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가 너무 죄를 짓기 때문에 새 생명이 그를 완전히 떠나고 그가 다시 죽어 버린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의 연약함은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며 또 불치(不治)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점차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가 정말로 병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생한 자도 범죄한다는 것은, 성경으로 또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마다 너무도 쓰리게 자신의 생활에서 죄악적인 실패를 맛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생애 가운데 죄가 득세해 보이기 때문에 낙담하고 회개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그는 겸손하게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필요를 느낀다. 요한은 만일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을 포함하여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요일 1:8,10) 말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성별되면 그만큼 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죄에 대한 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하다. 그의 현저한 죄가 그를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전에는 외견상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 마음을 괴롭히지 않던 죄들이 이제는 그의 마음에 크게 떠오르게 된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가 그토록 고수준(高水準)의 성화의 단계에 도달해서 죄에 대하여 민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야가 거룩한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唱和)할 그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3,5)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아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성도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중생한 자도 여전히 범죄한다. 그는 생명을 가졌으나 병든 생명이다.

이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 죄에 어떻게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분노, 성냄, 증오, 시기, 음욕 그리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악한 것들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성화의 근원(根源)이시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는 먼저 죄에 대한 이 문제에 항용 주어지는 두 가지 해답을 고찰함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총력을 다해 죄와 싸우라는 요지요,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죄와 싸울 것 없다는 것인데 이 두 해결책은 다 그릇된 것이다.

(1) 자력(自力)에 의하여

첫째 번 해결책은 우리로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도록 명한다. 성화를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긴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라고 한다. 덕행의 유익과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의 합리함을 보여 준다. 죄가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에 현세와 내세에서 미치는 결과를 들며 선함과 거룩함이 무엇임을 알았으니 이제 네 생명을 주장하라고 한다. 모든 악성을 정복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규율, 결의, 자제력들을 발휘하라.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의 모범을 좇으라. 그는 자서전에 기록하기를, 자기의 악습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우리의 이성과 결의를 사용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정복할 수 있다 한다.

(2) 타력에 의하여

둘째 번 해결책은 첫째 번과는 정반대이나 꼭 같이 그릇되다. 첫째 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죄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릇됐다면, 이번엔 우리가 조금도 죄와 싸워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위해 싸우게 하라는 신앙이므로 그릇되다. “전부를 하라,”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는 표어 간의 차이다.

예를 들면, 케즈윅 지도자들은 주장하되 “구원은 (죄에서) 분투나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진지한 결의나 극기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만일 죄를 이기려고 무엇을 한다면 죄가 그를 이길 것이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인격을 붙잡으시도록 그에게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그 인격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하기까지는 할 수 없다.

한나 휘톨 스미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생활의 비결]에서, 신자는 주께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의 생명을 마치 토기장이 손안의 진흙과 같이 창조주의 손안에 맡기고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토기장이가 일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처지를 주의 손에 맡겼으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만약 우리가 스스로 짐을 지면 주께서는 져 주시지 않는다.”

트럼불은 그의 승리의 생활 운동에서 “가만 두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표어를 강조했다. 또한 “쉽지 않으면 좋지 않다.” “무릇 내가 얻기를 노력함으로 얻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 값진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승리를 못 거두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못 거둔다.” 승리가 얻어질 때는 “전투에 의한 승리라기보다 자유에 의할 것이며” 모든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노력 없는 자유”다. “그러므로 노력을 그치라. 그가 모두 하시도록.”

이러한 운동에서는 종종 이차적 축복이 강조된다. 사람이 아무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에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성화 시에 그가 칭의를 받는 믿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믿음의 행위로 재차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칭의 시에 신자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도를 받는 것과 같이 성화에서도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눈 깜박일 새에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차이는 처음엔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으나 둘째 번엔 모든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주(主)로서 받는다. 이것이 소위 이차적 축복에 의한 즉각적인 무죄 – 완전이란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제시된 이 방안은 둘 다 비성경적이다.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이제 우리는 유일하고 성공적인 해결책 곧 성경적 해답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력으로 전심 분투하는 것으로만은 거룩함을 결코 찾지 못한다. 그 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곧 초자연적 도움이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분투함이 없이 초자연적 도움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는 피상적으로 이 둘의 결합인 듯이 보이는 것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며 그럴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거룩의 비결은 두 겹의 활동 곧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길이다.

(1) 성령의 중생의 역사(役事)

우리의 생활에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 우선적으로도 필요한 것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다. 성령께서 우리 생명 안에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거처를 정하신다.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와 연합된 것이다. 이것은 두 친구 간에 있을 수 있는 기억이나 감정 혹은 사랑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안에 오사 거하시며 우리와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에 가지들(요 15장)이나 삼위에 있어 아버지에 아들(요 17:21)이나 몸에 머리의 연합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사실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할 만큼 실제적인 일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중생시키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뤄지면 그때 죄에 대한 승리 곧 점진적이 아닌 즉각적 승리가 따른다. 분명히 지상에 있는 신자 내에 죄의 완전한 근절은 없으나 순간에 얻은 승리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요일 5:4)”라고 쓸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강하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죄는 정복되었다. 죄인이 승리한다. 물론 그가 범죄할 것이나(요일 1:8) 그의 의지에 반(反)하여 그리할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때로는 그가 아무 소망도 없고 죄에 대한 승리자이기보다 패배자인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서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는 자신을 죄에 내맡길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어느 기간 여러 모양으로 승리할는지 모르나 종국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죄를 완전히 멸할 것이다. 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의 운명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싸우며 떨어져 가는 것이다.

그 승리는 1945년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승리는 얻었다. 일본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 조약이 조인되고 일본군의 태반이 항복한 뒤에도 미군이 섬들을 점령하려고 했을 때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군인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한 자의 생명에서 승리는 이미 얻어졌다. 사단과 죄는 패배했다. 그러나 아직도 게릴라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때로는 대규모적으로 일어나나 승리는 조인되어 반항(조)의 마지막 잔재가 청산되기까지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런 성경적인 뜻에서 승리의 생활은 가능하다(요일 5:4).

성령의 성화하는 일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중생과 꼭 같이 신비다. 다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2) 성령의 성화의 역사

성화는 주로 성령의 일이다. 전에 말한 것같이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데서 오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신자 안에 거하신다 하셨으며(요 14:23) 삼위의 역사를 나눌 수 없음을 아는 바이나 성경은 성화가 주로 제삼위의 일이라고 표시한다. 그는 중생시키시는 분이며(요 3장), 새롭게 하며(딛 3:5), 거룩하게 하며(살후 2:13; 벧전 1:2), 인도하며(롬 8:14), 사람 속에 거하며(요 14:17; 롬 8:9; 고전 3:16), 사람의 마음에 편지를 쓰신다(고후 3:3). 그리고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다. 즉, 그의 생명을 나눠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에 거하여 그를 거룩히 하려면 성령을 통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나 성부께서 내재(內在)하여 직접 매개 없이 성화시키지 않고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하신다. 성화는 주로 제삼위의 일이다.

(3)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역사

이 성화의 특성은 중생에서와 꼭 같이 성령께서 사람의 바로 중심 혹은 영혼을 움직인다. 그는 도덕이나 합리적 설복을 사용하고 성화는 사람으로 하든지 말든지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 아니요 그의 기본 성질을 움직여 사람이 협동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잠재의식, 영혼의 깊은 곳에 작용한다. 결과는 선행이 따른다. 나무의 열매는 그 성질에 좌우되며 마음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이다(잠 4:23).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 우리가 저항할 수도 없는 영혼의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항상 저항함으로 우리는 결코 성화되지 못할 뻔하였을 것이다.

(4) 전인적(全人的) 성화의 역사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가 변화받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지만을 거룩케 하여 선행을 결심케 하되 선을 깨닫지 못하거나 선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법이 없다. 사람의 전부 곧 그의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다 거룩하게 한다. 신생(新生)에 있어 완전한 성화를 주시지는 않지만 사람의 전체를 변화시켜서 전 존재로써 거룩한 길을 출발시키는 성화를 주신다. 완전하게 창조된 아기의 출생 및 성정과 유사하다. 아기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마음과 몸의 전 기능을 가졌다. 그의 손톱은 자그마할지 모르나 완전하게 만들어졌다. 손가락, 발가락, 귀, 눈썹, 또 내부 기관이 충분히 발육되지 않았어도 있어야 할 수(數)는 다 갖춘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를 중생시키고 성화시키신다. 겨우 시작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의 각 부분이 변화받는다. 영적 이해력이 의지를 무시하고 자라지도 않고 그의 의지가 감정을 저해하고 발달치도 않는다. 각 부분에서 자란다. 그는 각 부분에서 완전하다. 단지 정도에서 불완전할 뿐이다.

이 성령의 일의 포괄성은 마음이 사람의 전 활동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잠언 4:23이나 예수께서 마음에서 나온다는 모든 악을 마가복음 7:20-23의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심층부 곧 그의 심장 혹은 영혼이 변하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도 역시 변할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의지와 지식과 감정이 각각 거룩해졌다고 말함은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5) 성화의 점진성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일의 특성은 그 과정의 점진성(漸進性)이다. 사람은 결코 땅 위에서 즉각적이며 죄 없는 완전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죄 많음에 맞추어 하나님의 수준을 낮추는 사람만 자기가 완전하다고 그릇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갑자기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싸움 끝에 구원이 온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과정이 느리고 때론 빨라지지만 아무튼 일정한 기간을 요하는 일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였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신자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사단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배드로도 “은혜와 지식으로 뛰어들어 가라.” 하지 않고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성화가 점진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6) 성화의 과정이 완성되는 순간

그러나 이 점진적 과정은 죽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될 것이다. 하늘나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없으며, 죄가 완전히 폐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27). 그러므로 신자가 죽어 바로 하늘나라로 갈 때 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 성화의 과정은 순간에 완성되고 일초도 못되어 죄없이 완전케 된다[눅 23:43; 히 12:23-개혁주의 신행협회 출간, [소교리 문답 강해](184쪽, 제 37문답)와 [불멸의 생명] 참조:편집자 주].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성령의 계속적인 일이 죄에 대한 승리,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으나 그 승리를 위해 불가결의 조건이다. 우리가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필수요 근본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고는 부분적인 승리일지라도 얻을 수 없다. 굳은 결의, 결심, 고통스러운 노력도 성령과 그리스도 없이는 쓸데없다. 그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씨나 작은 사과를 어느 나무에 붙여 놓고 아름답고 붉고 즙 나는 사과를 내려고 하며 그것들이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다. 그런 외부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바른 성질, 사과나무의 성질을 가진 나무를 골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서 적당히 재배하면 그 나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좋은 사과를 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대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그로부터 생명과 생명력을 받아 자라 포도를 맺는 것과 같이 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와 성령으로부터 내적 힘과 생명과 선행을 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절대로 묵고 마르고 죽음 막대기로부터 포도를 낼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 생명을 주지 않으시면 거룩하게 되기는 불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로부터 죄를 이기는 힘, 우리 안에 없는 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외적인 수단 곧 금욕이나 단련이나 도덕적 훈계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반성 목록 등, 성령 없이 자력으로 하는 수단으로 죄를 정복하려고 함은 마치 묘목(苗木)의 껍질을 늘리고, 가지를 잡아당기고, 줄기를 들어 올림으로 큰 나무로 만들려 함과 같다. 그런 외부적 방법으로 강제될 수 없다.

봄철에 나무들을 보면 성경적 방법을 알 수 있다. 죽고 마르고 바삭바삭하며, 갈색이 된 잎사귀들이 아직 가지들에 붙어 있다가도 생명이 내부로부터 발현하자, 그 묵은 잎사귀는 자연히 떨어지고 새롭고 파릇한 새싹이 나타나 시초엔 작으나 점점 완전하게 모양을 갖추어 성숙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주심으로 옛 죄는 하나씩 떨어지고 대신 비록 새싹과 같이 작지만 주님을 닮은 새 덕(德)들이 생겨 점점, 그러나 확실히 자라간다.


이와 같이 성화는 큰 결심이나 의지력으로써 내적 능력의 근원과 별도의 외적 수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신자 아닌 자들이 갖지 못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케 되는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의 비결 곧 성공의 길이 있다.

이제는 범하기 쉬운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승리가 성령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힘써 일하여선 안 된다.” 우리는 “그(성령)로 다 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격을 맡으시게 하고 우리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지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노력 없는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자가 취하여(물론 순전히 성령의 은혜로) 마지막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도울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중요한 방법 셋을 제시하고 싶다.

(1) 기도

자기 생명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생명 가운데 더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손이 우리 몸을 위하여 양식을 취하는 도구이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하셨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 하였고 갈라디아 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며 자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생명을 누린다(갈 2:20)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자. 그러면 받으리라.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충성이나 감사의 표시만이 아니라 능력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한 요구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나가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대답을 원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은 시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닌, 그가 우리 기도를 들으시라고 믿고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히 11:6).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지식과 아울러 신뢰하는 요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주실 수 있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렇게 하시리라고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이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갈  때에 자기의 선하고 거룩한 은사를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을 주심을 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대하여 대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첫째로 긴요한 일이요 중요한 방법이다.

(2) 말씀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묵상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외에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은혜의 방도를 소홀히 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보여 주는 유일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모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해 씌어진 교훈이 밝히 혹은 내포(內包)되어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닮을 것이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와 친숙해져야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성경 매장에 기록된 대로 지키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게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계시를 또 보여 주리라고 바랄 수 없다. 아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성령께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더욱더 성화되게 하신다. 예수께서 분명히 진리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하셨다(요 17:17,19). 베드로는 이것을 확증하여 “순전하고 신령한 젖(말씀)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였다. 그러면 우리로 우리 하냐 남아 있는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둘째 번 구체적인 일은 철저하고 개인적인 말씀의 묵상이다.

(3) 공중 예배 생활 충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신자는 공중 예배에 충실할 것이다. 말씀의 진실한 전파를 통하여 성령은 말하며 죄를 책망하여 거룩함에 인도할 것이다. 성례에서 또한 그의 믿음이 굳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성화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어떤 죄와 싸우고 있던 신도 중 몇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인 선언을 듣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성장이 뒤지게 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공적인 해명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거룩히 되고자 하는 신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부지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따라가면 죄에 대한 승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생활상 어느 죄든지  - 가령 분노, 참지 못함, 미움, 시기, 음욕, 술 취함,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외 어떤 죄든지 이긴다. 성화는 이중(二重)의 역사다. 첫째로 100퍼센트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그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내주를 체험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가 함께하시면 우리는 모두 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화는 사람이 결심하여 꾸준히 추구하는 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이 두 요소-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를 묶으라. 그러면 결과는 죄에 대한 승리다. 분명히 죽음 이편에선 죄는 근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려가면 현저하고 분명한 진보가 있을 것이며 죽음 건너편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더 높은 생활”의 비결이요 이것이 “승리의 생활”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49-17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이와 같이 오늘날 성령에 가장 엄청난 역사의 하나는 버림받은 자들 중에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육에 속한 자는 겉으로는 하나님 법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으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자의 모든 행위는 죄인 것이다....

보편 은혜의 영역에서 성부, 성자의 역사와는 구별되는 성령의 삼중의 역사가 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자를 죄에서 억제하고, 그로 선행하도록 권장하며, 위대한 문화적 성취를 위한 자질을 구비시키신다....

죄인에게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보편 은혜뿐 아니라, 특수 은혜가 필요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독생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성령의 보편 은혜 안에서의 역사에 감사하되 단 한 사람도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줄로 잘못 생각하지 말 일이다. 오직 구원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의 옛 길에서 돌이켜 예수께 구속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자만이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보편 은혜' 출 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성령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과 중생]  (0) 2023.04.17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  (2) 2023.04.17
방언, 흥분, 눈물 그리고 성령의 역사  (0) 2019.03.06
성령 훼방죄(신성모독죄)는 영원한 죄  (0) 2019.01.15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0) 2018.06.28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장 34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개를 흔히 ‘가상칠언’이라고 하며 그 중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맨 먼저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저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준 빌라도와 또 예수님을 처형하는 군병들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고 둘러서서 조롱하며 비방하는 자들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악한 자들만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린 꼴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죄인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저희 죄를 깨닫지 못 하고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제 갈 길로 가는 모든 무리들,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사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저희’ 속에는 저와 또 여러분,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해 온 마지막 완전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피값이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 보다 가치가 못 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께 진노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그 값어치를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어치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가 없었고, 그 제사를 받으시는 이상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으실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또한 죄와 사망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묶어 잡아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과 모든 죄인들, 온 인류의 죄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죽으셨던 인류의 죄가 사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또 그렇습니다. 사함 받은 인류의 죄가 또한 우리를 사망 가운데 묶어둘 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금 논리와 순서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침내 아내가 죽었다!>  (2) 2023.05.22
"애굽으로 돌아가자."  (0) 2023.05.03
일곱 인의 비밀  (1) 2023.04.05
산 자의 하나님  (0) 2022.08.06
주님을 울리시진 않겠지요?  (0) 2022.07.30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상기(上記)한 말씀은 하나님의 논리 중 한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결론이다. 그 전제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논리를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여기 이러한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이와 같은 논리는 너무나도 확실하여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온다.

성경 말씀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말할 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우리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이다. 큰 것을 주셨으면 작은 것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ㅡ아더 핑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서ㅡ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영광의 불꽃
             최송연

태초부터 약속되신 분,
약속대로 성육신 하시어
몸으로 그 약속 성취하셨네

양발 양손에 대못
머리에 가시관
옆구리에 날카로운 창
메마른 입술
'다 이루었다' 선포하시고

삼 일 삼 야,
어둡고 긴 죽음의 터널을 지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주(主 )!

찬란한 부활의 아침
죄의 쇠사슬
끊어내는 승리의 노래
죽었던 영혼 다시 살리셨네

핏빛으로 불타는 주님 사랑
영광의 불꽃 되어
내 가슴 속에 피소서, 영원토록

 

  
출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Happy Easter, friends~!!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블로그 식구님들,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성원과 기도에늘 

감사한 마음 전해드려요, ^^*

 

가정과 개인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풍성한 복으로 함께 하시기를!!

모두 모두 행복하세요. ^^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며 산다는 것  (0) 2023.05.03
눈물보다 귀한 사랑  (2) 2023.04.23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최 송연  (0) 2023.04.05
달맞이 꽃 연정  (0) 2023.03.14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23.02.17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 최송연

 

 

 

캄캄한 하늘이 찢어질 듯

흑암을 갈라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희생제물로 내어준 

사랑하는 외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어라

 

"포기하겠노라."

선언하시면 한순간에라도

그 치욕의 십자가를 박살내고

성자 하나님을 구해 내고파

하늘에서는 열두 영 더 되는

충성스러운 천군과 천사들

눈물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네

 

험한 갈보리산 그 십자가에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벌거벗기운 채

양손과 양발에 박힌 대못이

부드러운 살점을 찢으며

뼈속 깊이 쪼개었는데...

 

상처에서 나온 검붉은 핏덩이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는 괴로움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 23: 39)

 

비루한 행악자들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밷음과 멸시도 

참아내셔야만 하셨네

 

이글거리는 불볕 태양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랫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는데...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메마른 입술에는

쓰디쓴 신 포도주가 물을 대신하였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가시관 사이로 흐르는 선혈은 피눈물 되어

창백한 두 뺨을 적셔흐르는데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 22: 12)

개들이 둘러 진 쳤으며(시 22: 16)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낄낄거리는구나(시 22: 18)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

영혼과 육의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그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그 한 마디는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 버리는 표효,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승리의 노래였으라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

그 눈물의 길을 걸으신 

나의 주여,

 

당신의 그 거룩한 희생을...

당신의 그 아픔을...

당신의 그 수난을...

당신의 그 큰 사랑을..

성령님께서 내 가슴에

깊이 각인시켜주시는 이 밤

나는 울며 통곡하며 ...

온 밤을 눈물로 하얗게 지새웁니다

 

 

 

==========================================================================================

 

후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도록

메시야의 고난 예언, 성취,

성부, 성자 , 성령님의 사역까지..

보이지는 않으나 영의 세계 저 너머

천군천사들의 충성심과 눈물까지...

 

부족하지만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대작을 꿈꾸며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벌레보다 뫃산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람께 일하고 계심을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주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보다 귀한 사랑  (2) 2023.04.23
영광의 불꽃  (2) 2023.04.09
달맞이 꽃 연정  (0) 2023.03.14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23.02.17
새해 아침의 기도  (4) 2023.01.02

만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지셨더라면, 일부라도 감춰 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쓰셨더라면, 예수님의 생애나 십자가의 고통은 한결 가볍고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대속(代贖, Redemption)도 아니고 일종의 쇼였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배고프셨고 힘드셨고 시험을 받으셨고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며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실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만일 연약한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사역에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날에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도 함께 심판하셔야 할까요? 아니면 심판을 포기하고 구원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도 포기하고 사단마귀가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도록 헌납해야 할까요?
“아들을 심판해?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차라리 하나님의 지위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절체절명의 모험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두루마리 책을 일곱 인으로 인봉하셨습니다.
아들이 구원사역에 성공하고 돌아온 다음 그 아들이 인봉을 떼도록 말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어린양만이 그 두루마리 책의 인을 떼도록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사도요한은 크게 소리쳐 울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심판의 두루마리 책의 인봉을 뗄 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두루마리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면 심판은 없을 것이며 사단마귀의 권세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사도요한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이기신 어린양이 떼시리라.”
어린양 예수님이 나아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제 그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재앙이 쏟아지고 무서운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사단 마귀는, 죄와 악은 영원히 징벌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굽으로 돌아가자."  (0) 2023.05.03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  (0) 2023.04.10
산 자의 하나님  (0) 2022.08.06
주님을 울리시진 않겠지요?  (0) 2022.07.30
화내지 마세요, 야단치지 마세요.  (0) 2022.07.20

 

달맞이 꽃 연정/ 최송연

 

어스름 밤이

스르르 깊어갈 제면

가슴에 서린

그리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네

 

긴긴 낮 동안

얼마나 애탔으면

그리운 임과 하나 되고파

달빛으로 샛노랗게 옷 입었나

 

사랑이란 그런 것

사랑하면 하나 되고 싶고

하나가 되려면

同 색으로 바꿔야만 하지

 

고난도 사랑도

모두 같은 색깔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광의 불꽃  (2) 2023.04.09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최 송연  (0) 2023.04.05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23.02.17
새해 아침의 기도  (4) 2023.01.02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0) 2022.12.14

 

 

 

 

봄을 기다리는 마음/최송연

 

 

아직은 살얼음판인 개울을 따라
하이얀 안개구름을 타고 오십시오,

 

나는 한 마리의 꿈꾸는 새가 되어
힘차게 날갯짓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리이다.

 

모질고 가파른 언덕 너머
살랑이는 봄바람이 되어 오십시오,

 

나는 살포시 돋아나는 새싹 되어
찌들은 헌 옷일랑 훌훌 벗어 던지고
당신의 숨결을 따라 힘차게
돋아날 수 있으리이다.

 

얼어붙은 온 누리,
아직도 캄캄한 들녘 사이로
새벽이슬 되어 사르르 내려오십시오,

 

나는 촉촉한 보리밭 이랑 사이로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늘보다 근사한 내일을
일구어 낼 수 있으리이다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최 송연  (0) 2023.04.05
달맞이 꽃 연정  (0) 2023.03.14
새해 아침의 기도  (4) 2023.01.02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0) 2022.12.14
가을의 충고  (4) 2022.10.24

 

♡ 새해 아침의 기도 /최송연

 

주님,

새해에는

주님 뜻보다

내 감정이 먼저 앞서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고난의 폭풍우 앞에서

뒤로 물러가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용기와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더 하시옵소서

 

주님,

새해에는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내 마음속에 결코,

자리잡지 못하게 하시옵고

가난한 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도록 항상 

열려진 마음이게 하시고

 

이웃에게 상처주는 말들은

나의 입술에서 온전히

제거하여 주시며

 

괴로워 우는 자들을 사랑하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할 수있는 참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옵시고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마저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주님 닮은 넓고 큰 가슴,

재창조된 生으로 나를 이끄시옵소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맞이 꽃 연정  (0) 2023.03.14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23.02.17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0) 2022.12.14
가을의 충고  (4) 2022.10.24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0) 2022.10.24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 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23.02.17
새해 아침의 기도  (4) 2023.01.02
가을의 충고  (4) 2022.10.24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0) 2022.10.24
행복  (3) 2022.10.24

 

 

 

 

가을의 충고/최송연

가을이 그대를 찾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가을 숲 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도 있으니까요

 

비록 저 찬란함이 잠시

보이는 것이긴 하여도
오늘을 위해 그대가

흘린 땀이 얼마던가요

 

길가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도
열매를 위한 몸부림
차디찬 겨울이 오면
그 모습마저도 사라지리니


산을 태우는 붉은빛 
그 화사함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종국엔 떠나야 할 인생임을

기억하세요
이 가을이 다 지나기 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아침의 기도  (4) 2023.01.02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0) 2022.12.14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0) 2022.10.24
행복  (3) 2022.10.24
조화의 美  (2) 2022.10.24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최송연

 

아침에 눈을 뜨면

싸르르

코끝을 휘감아도는

그리움 하나

 

날마다

들이키는 산소처럼

너무 강하지도,

너무 진하지도 않았음 좋겠어

 

톡 쏘는 쓴맛보다는

부드러운 향으로

달콤한 맛이면 더 좋겠네

 

그리움은

진하디진한 커피향 같은 것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중독성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0) 2022.12.14
가을의 충고  (4) 2022.10.24
행복  (3) 2022.10.24
조화의 美  (2) 2022.10.24
마음의 등불  (4) 2022.10.24

 

 

행복
           최송연

당신을 만났을 때
행복은 시작되며

당신 사랑 느낄 때
행복이 자라나고

당신과 함께일 때
그 행복 만개(滿開)하네

 
 
 
 
단어해석 도우미: 당신= 나의 예수님.^^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의 충고  (4) 2022.10.24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0) 2022.10.24
조화의 美  (2) 2022.10.24
마음의 등불  (4) 2022.10.24
가을 나무  (0) 2022.10.17

 

조화의 美       
                최송연

 

가을이라 하여
모든 나무가 불태우지 않고

 

겨울이라 하여
나뭇잎 모두 떨어지진 않아

 

무색이라 하여
쓸모없는 색상은 아니려니

 

동일동색 보다
제 색 입을 때 가장 고운 거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은 커피향 같은 것  (0) 2022.10.24
행복  (3) 2022.10.24
마음의 등불  (4) 2022.10.24
가을 나무  (0) 2022.10.17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6) 2022.10.11

 

마음의 등불 / 최송연

 

당신의 명을 따라

내 마음의 등불

세상을 밝히고

 

당신의 사랑 따라

내 마음의 등불

이웃을 깨우며

 

당신을 기다리는

내 마음의 등불

기름을 준비하여

 

욕심과 미움 버린

내 마음의 등불

더 밝기 원하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  (3) 2022.10.24
조화의 美  (2) 2022.10.24
가을 나무  (0) 2022.10.17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6) 2022.10.11
내게 행복이란..  (2) 2022.10.07
(Q 13) 기독교인은 사교춤을 추거나 춤추는 모임에 참가해도 괜찮습니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춤에 대한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적 서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춤을 출 수 있는가 아니면 추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세대를 걸쳐 오면서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교회 지도자들이 언급하기를 꺼려했었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춤을 추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춤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주며 사회적 품위를 얻도록도와준다. (2) 성경은 춤에 대해서 이야기 다. (3) 몇몇 비 오순절적 교회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춤을 주선하고 후원한다. (4) 춤은 친교를 위한 즐거운 활동이다. (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며,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교인들이 발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 네 가지 점과 관련하여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춤’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개인이 춤을 추는 것을 허락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이 타락하며 결국에는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영적 복지에 대하여 위험한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사교춤을 추는 것을받아들이는 교회는 파괴적 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세상의 모양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쇠퇴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 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말이 사용될 때의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춤에 대해서 24 번 정도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성경은 그 어느 하나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교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춤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것은 (예배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다윗과 같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영웅에 대하여 즐겁고 넘쳐흐르는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산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무슨 종류의 춤이 추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백성들의 부적절한 축하와 술 마시고 떠드는 것에 대해서 노(怒)를 발하였었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19). 우리는 또한 마가복음 6:22-29 의 내용으로부터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그와 함께 한 술에 취한 사람들 앞에서 추었던 춤이 매우 강렬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었거나 감각적인 것이어서 왕이 적절한 판단을 못하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 그 명령은 그가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사교춤을지지해주는 성경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삼가해야 하는 악과 죄악스러운 행위의 목록에 춤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춤이 초대 신약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로부터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니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남여 사이에 어떤 육체적 접촉을 함으로 생기는 감정과 정욕에 대한 주의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유혹, 특별히 정욕과 성적 유혹을 피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8; 디모데전서 6:9-11; 디모데후서 2:22).
 
비록 사교춤을 추는 많은 부부들이 결코 부도덕적인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22 은 우리들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악에 물들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중석에서 행하는 사교춤이 외딴 곳에서 애무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남녀들의 행위보다는 훨씬 더 좋은 대안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교춤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 친밀함을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성회는 사교춤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과 죄악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교춤을 추는것을 반대해 왔습니 다.
 
그러나 춤을 사절하는 것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마음이 어떤 잘못된 것에 머문다면 어떠한 주의나 법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 단순히 춤이 제공하는 우정과 교제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일에 참여하는 것이 모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의 사회 –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세상 –  의 상태는 중요한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도덕적 표준과 순결과 거룩함에 대한 확신이 옛것이 되어버렸으며, 이제는 사람들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사회는 음행, 단절된 관계, 이혼, 혼외 임신, 성병,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도덕적 표준에 대한 이러한 방탕한 태도에 대하여 지금 무거운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낮아진 도덕적 표준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직면하여서, 교회는 그의 백성이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비추어, 자신과 자녀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을 절제할 것을 모든 기독교 성인과 부모들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8; 디도서 2:11-14; 디모데전서 2:21-22).

 

관심사: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독교 청년들이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청년들을 “진실된 사랑은 기다린다”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모들의 일부는 또한 사교춤이 자녀들의 발달에 똑같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모순되는 일입니다. 춤에 참가함을 통하여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성적 순결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도덕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때문에 단 한 생명이라도 영원히 상실된다면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 부모, 혹은 교회라도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교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도 모르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춤을 추는 곳 대부분의 환경이 유혹적이고 꾀는 분위기인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음악, 부적절한 노래 가사, 희미한 불빛, 그곳에 참석하는 어떤 사람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들을 더 큰 유혹으로 이끄는 육체의 접촉의 밀도를 증가시켜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립학교의 춤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지만, 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귐은, 나중에 기독교인의 생활 형태에 전적으로 위협을 주는,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행동이 허용되는, 그러한 환경을 통하여 춤에 휩쓸려 들도록 발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흔히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죄악된 환경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에, 춤추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춤 클럽”을 조직합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춤이 흔히 다른 죄악과 연결된다는 바로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도덕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주는 그러한 활동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박  (0) 2022.10.06
재정 관리와 신용  (1) 2022.09.22
유물론  (1) 2022.09.10
일의 윤리  (1) 2022.08.27
구세주의 조건  (0) 2022.08.20

                                       

           가을 나무/최송연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빗물처럼 흐르는 가을 들녘 ...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서걱거리며 흐느끼는 억새 소리
      먼 길을 걸어온 생의 탄식이런가...

      그대,
      봄, 여름, 가을,
      그렇게...
      온 몸의 진액 긁어모아
      알알이 영근 열매
      생명으로 나누어 주었건만

      이제는
      나뭇잎조차
      지탱하기 힘 들어
      모두 떠나 보내야만 합니까

      그대여,
      오늘 떨어지는 낙엽을
      슬퍼하며 울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는
      화사한 마음 되어
      앙상한 팔이나마
      위를 향해 힘껏 뻗어보세요,
      하늘은 언제나 거기 있답니다.

      하늘과 함께 춤추며
      서릿발 모진 된서리를 견뎌 낼
      준비라도 착실히 하며
      그 자리에 굳게 서 있노라면,

      잎새 모두 떠나버린 가을이라 하여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화의 美  (2) 2022.10.24
마음의 등불  (4) 2022.10.24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6) 2022.10.11
내게 행복이란..  (2) 2022.10.07
가을 호수  (7) 2022.10.03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예루살렘 성지가 될 것 같습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지를 순례하며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져 지난 며칠간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는 숭고한 길,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 이상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칸”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에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칸’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옷을 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 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  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입니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합니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최송연/사모

 

사진:나일강


카이로를 향하다
우리 지역, 같은 교단에 소속한 목사님, 사모님들 16명이 지난 1년간 계획하던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꿈이 이루어져 지난 2월23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가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성지순례는 처음에 계획하던 이스라엘행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이집트행 비행기를 타고 먼저 이집트로 가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그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카이로까지는 비행시간만 해도 장장 22시간이 걸렸다. 중간 대기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26시간, 날짜로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뉴욕과 이집트의 시간 차이가 7시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카이로와의 시간은 꼭 12시간, 그러니까 지구의 반 바퀴를 횡단한 셈이다. 나는 매우 지치고 많이 피곤했지만, 그래도 내가 평소에 그렇게도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 카이로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창에 코를 박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막 한 가운데로 나일강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띠처럼 둘러쳐 있고, 카이로 시내가 모래먼지와 공장에서 나는 매연 때문인지 잿빛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비행기가 카이로 상공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먼지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목을 심하게 자극하면서 콧물을 동반한 재채기가 쉴새없이 터져 나왔다. 먼지 알레르기가 심한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중나온 현지인 안내원'장동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지 듯이 뚫고 들어가던 비행기가 요란한 진동과 함께 멎자, 여행객들은 저마다 먼저 내려야한다는 듯, 서로가 앞을 다투어 내릴 준비를 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들고가야 할 짐들을 주섬주섬챙겨 손에 들고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행기가 멎자 나는 그들과 함께 섞여 비행기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 카이로 공항도 역시 모든 제삼국이 그러하듯, 많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나는 무척 즐거웠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성지 순례의 서막이 열렸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우리를 안내해 줄 젊고 싹싹한 한국 안내원이 현지인 젊은 청년 안내원 한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더니 우리 일행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모두 공항 출입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숙소로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안내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카이로의 사전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카이로시내에서는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재한 여러 전자회사 직원들 그리고 자동차회사 직원들 상사원들이 그곳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로의 젊은이들은 한국사람들을 자신들의 평생 반려자로 맞아들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사람도 꽤 많이 있다고도 했다. 그 한 예로 우리를 마중 나온 젊은 현지인 안내원의 이름이 "장동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들이 "왜 하필이면 장동건이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옛 애인이 한국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장동건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자기를 향해 장동건이를 많이 닮아서 좋다고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까 그는 키도 크고 눈이 서글서글한 것이 탈랜트 장동건을 많이 닮긴 닮은 것도 같았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 나와서 신실하게 자기의 맡은 일을 잘 감당해 내어서 이집트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또 이집트인들에게 자국을 선망의 대상국가로 인식시킬 수 있을만큼 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여준 조국의 모든 근로자들, 자동차회사 직원들, 전자회사 직원들, 해외 공사원들,주재원 등, 그리고 수출산업에 앞장선 모든 분이, 같은 해외 동포로써 무척이나 자랑스러웠고 마음 흐뭇했다.
나일강과 고센땅그 옛날 이집트 막강한 파라호의 포악한 학정에 견디다 못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아기 모세를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밭 사이에 놓아 둔다. 때마침, 강물에서 목욕을 하던 파라호의 딸인 공주가 갈대밭 사이에 놓인 역청이 발린 갈대상자를 보고 꺼집어내는데 그 속에서 한 탐스럽고 준수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아들로 삼아 기른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2장1절이하)에 나온다. 역청으로 칠한 갈대상자에 누여서 울고 있던 모세를 건진 그 강물의 이름이 바로 아름다운 나일강이다. 나일강, 6천 6백여km로 세계 제2의 큰 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아프리카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애굽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여러 줄기로 나뉘어지며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들고, 나일 삼각주라는 비옥한 땅으로 세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비옥한 땅 곡창지대에 고센지역이 있다. 이 고센지역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대흉년기에 자기를 찾아온 아버지 야곱과 그의 열 한 형제들에게 이집트의 왕 파라호에게 구하라고 한 곳으로써 고센 땅이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숙소로 가는 길에 나일강변에 있는 한 이집트인 식당에서 그들의 요리로 점심을 했다. 기름기는 좀 많았지만, 생각보다는 깨끗했고 맛도 괜찮았다. 허기야, 어제서부터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무엇인들 맛이 없었을까? 우리는 삼삼오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나일강을 바라보면서 처음 대하는 진귀한 이집트식 뷔페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나는 점심을 먹는 내내 음식보다는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 아름다운 공주의 웃음소리, 모세의 성장기, 모세의 장년기, 그리고 모세의 출애굽과정이 마치 어제 일인양, 영화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아름다운 성경그림을 바라보며 꿈꾸듯 넋을 놓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일강의 특이한 점은 강물이 시내 한가운데까지 흘러 들어와 식당 벽에 찰랑거리며 햇볕에 반짝거리는 것이 참으로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무사히 성지 순례를 마치고돌아왔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성지순례 기행문과현지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올릴 예정입니다.많이 사랑해 주세요.  최송연 드림 ^^*

 

                     

음악: Ito님 방에서

이미지 전체보기 

사진: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

 

이집트인이 운영하는 나일 강가의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끝내고, 우리는 카이로 중심가, 올드시티에 있는 박물관과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 그리고 모세 기념교회를 방문했다. 나일 강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낸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는 모세 기념회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와서 머물렀다고 추정되는 장소에 ‘예수 피난기념교회’가 있었다. ‘예수 피난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는 모두 성지 곳곳에 세워진 다른 회당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도 겉모양은 사원과 같았고 내부는 요란하게 치장되어진 전통 유대교 회당이었다. 마침 우리가 들어간 시각은 유대교인들의 예배시간이라 회당 지하실 깊이까지는 내려가 보지 못했고, 내부는 사진 찍기마저 금지되어 있어서 조용히 내부와 바깥을 둘러보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콥틱 그리스도인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집트 내에도 소수의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을 일컬어 ‘콥틱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집트 내에,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전성시대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이집트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한다.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각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이때 이집트에도 복음이 들어왔으며, 콥틱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집트 안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마찬가지, 모슬렘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했다. 역사에 박식한 한국 안내원이 들려준 콥틱 그리스도인들 삶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슬람의 모슬렘이 이집트의 주도권을 잡은 지난 천이백 여년 동안, 사회의 모든 지도권,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슬렘이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는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선뜻 좋은 직장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일정 수입근원을 지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정부로부터 보조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지목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은 시내에서 살지도 못하고 외각지, 그것도 지난 날, 쓰레기수거 지로 쓰이던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 땅굴 같은 것을 파고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물 공급도 잘 안되니 깨끗이 씻을 수도 없다. 그 동네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대대로 그 신앙을 전수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물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의 팔목에다 십자가표식의 문신을 새겨넣어 준다. “너는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때마침, 우리 일행 앞에는 팔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은 한 초라한 할머니가 자신의 팔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인가 열심히 전하려 했지만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바싹 마른 그녀의 손바닥에 1딸러 지페 한 장을 쥐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님,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치 못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저들을 축복하소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뒤돌아 서 나오는데, 주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날 콥틱 그리스도인들과 그 앞에서 초라한 내 모습이 영안으로 보이는 듯, 육신적으로 초라한 그들 앞에서 내 영혼은 심히 부끄러워 몸 둘바를 몰랐다.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다음은 이집트 관광 최대로 꼽을 수 있고 이집트인의 긍지로 삼는 거대한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안내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그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피라밋은 고대 파라호, 그러니까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자기들의 무덤을 저렇게 큰 피라밋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내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 침대며 집기며, 심지어는 자기가 부리던 신하들까지 죽여서 같이 묻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파라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거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도 한다. 스핑크스를 쌓아 올린 재로는 흔한 일반 돌이 아니고 천연 화강암이었다.

 

스핑크스에는 매우 흥미로운 전설이 담겨져 있다. 스핑크스란 ‘교살 자’라는 의미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괴물이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지녔고 몸은 사자이며 등에는 날개를 달고 있다. 스핑크스는 테베 시민을 징벌하기 위하여 헤라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스핑크스는 테베 근처의 피키온 산으로 갔으며, 거기에 있는 벼랑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두 개의 수수께끼를 던져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스핑크스는 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방식으로 지혜의 신이라고도 불렸고 악마라고도 불리면서 테베 시민을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서 그 수수께끼를 풀자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슬피 울며 자살하고 만다. 이 일로 테베 시민은 오이디푸스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아들이고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한다는 이야기이다. 수수께끼의 정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었다.’ 아기 때는 기어다니니까 네 발로 걷는다는 것이고 장성해서는 두 발, 늙어서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으니 세 발로 걷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는 오래전에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피라밋을 보니, 만리장성의 규모와 정교함도 놀랍지만 피라밋과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피라밋은 모두 돌들로 쌓여 있는데 돌 하나가 작은 것은 1.5톤에서 2, 보통은 3-4, 큰 것은 20-30톤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4500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일까?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아직 철기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때에, 도대체 어떤 연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규모다. 참으로 인간 속에 잠재한 능력과 지혜가 무궁무진하고 끝없음을 보면서 창세기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끝은 어디쯤일까? 하나님을 닮은 그 엄청난 지혜와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할 것인가? 신의 형상을 닮은 그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단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던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던지 그 선택은 자유일 것이다. 지혜는 있으되 지혜 주신 분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요,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1:7절 상반절)이란 말씀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14: 1절 상)”하시는 말씀이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리에서 뱅뱅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음악: Ito상님 방에서

다음에 계속 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기대해 주세여...^^*

이미지 전체보기

사진: 광야의 싯딤나무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우리는 피라밋이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는 한 호텔에서 첫날밤 여장을 풀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카이로시내를 벗어나 광야로 향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카이로시내를 벗어나자 곧 메마른 광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3월의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태양빛에 눈이 부셔,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가도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이 쌓인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 같은 것이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화성에 온 것일까? 지구 안에도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황량함이 보는 이의 마음마저 메마르게 한다.

 

사막 여기저기에 듬성듬성한 가시덤불 같은 것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재치있는 젊은 안내원이 입을 연다. “지금부터 광야가 시작됩니다, 홍해까지 버스로는 두 시간 반을 더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화장실은 없습니다. 혹시 급하신 분들이 있으시면 여자분들은 무조건 얼굴만 가리시고 남자분들은 돌아서서 볼일을 보십시오, 여자분들은 그런 때에 대개 저 작은 가시나무 떨기 사이로 가서 숨으시는데, 그곳에는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곳이 바로 광야에서 서식하는 전갈과 불 뱀들의 서식처입니다. 그곳에 앉아서 볼일을 보시면 큰일이 나죠.” 우리는 그의 익살스런 말에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민수기 21 4절 이하에 잘 나온다. 광야의 불 뱀들이 모두 몰려나와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한 그 무시무시한 불 뱀과 전갈들이 이 불볕더위를 피해 숨을 곳이 있다면 바로 저런 가시나무 떨기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무서운 전갈과 불 뱀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며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는 듯, 끔찍한 환상에 전율했다.

 

나는 한때,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그렇게 많이 체험하고도 수시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이라고 비웃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실상에서 체험하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현실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그리도 쉽게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등을 돌려야만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야의 실체를 눈앞에 보면서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 그 상황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게 됐다. “목마르다, 배고프다. 우리를 애굽에서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어찌하여 우리를 이 메마른 광야로 끌어내어 죽게 하느냐? 심하게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만약 그때 그들과 함께했다면, 나는 분명히 그들보다 몇 배나 더 심하게 하나님도 모세도 원망했을 것이다. 나는 현대 온갖 최첨단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살면서도 작은 어려움 앞에서, 들어내어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입술 밖으로 내어 뱉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수시로 내 감정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며, 그럴 때마다 힘들어하던 내가 아니던가? 몸이 조금 불편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마저 저울질하는 쪽으로 문득문득 떠 올리기도 한 나다. 이렇게 나약한 내가, 만일 그들과 함께 이 메마른 광야에서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이 40년간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더라면…, 불을 보듯 뻔한 나 자신이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영역 외에는 잘 알 수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셨고, 그들을 희생시켜서 오늘 우리에게 거울로 삼게 하셨구나…,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헤매다가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원망하다가 멸망당한 그들, 선택된 민족, 히브리사람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이의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정죄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광야의 유목민 베두윈 족

 

사막지대를 달리는 차 속에서 내어다 보니, 다 낡은 천막 같기도 하고 움막 같기도 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바로 저 유명한 광야의 유목민 배두윈 족의 집이다. 광야의 베두윈 족에게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야의 배두윈이 집을 떠나 먼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다음 5가지의 필수품을 지니고 가야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물, 낙타, , 소금, 그리고 고양이라고 했다. 젊은 안내원의 재미있는 퀴즈가 시작된 것이다.

 

사막에서 꼭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대답은 여러 갈래로 엇갈렸지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역시 소금이란다. 그다음에 고양이, , , 그리고 낙타가 남았는데 어떤 것을 버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가 소금 다음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고양이일 것이란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정작 답은 우리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사막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소금, 다음은 물,그리고 그다음이 돈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소금이야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인 데, 그리고 돈이 있어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을 텐데..., 광야에서건 어디서건 음식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음식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할 비상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돈’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길든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은 돈보다 낙타라고 한다. 낙타만 있으면 먼 길을 갈 수가 있으니 낙타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이제 낙타와 고양이가 남았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낙타와 고양이 중 어느 것이겠느냐? 이것이 그날 퀴즈의 클레이맥스였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고 고양이라고 했다. ~~? 고양이라니…” 나는 하찮은 고양이를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동물 중에서 고양이는 아주 영민한 동물이라고 한다. 사막에서 잠을 잘 때, 무서운 불 뱀과 전갈의 접근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고양이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광야에는 불 뱀과 전갈이 그만큼 많으며,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붙어 있고서야 돈도 필요한 것이지, 사람이 생명을 잃고서야 돈이 무엇이 소용이겠느냐 하는 부연 설명이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새롭게 인식한 좋은 기회였다.

 

홍해를 건너다

 

카이로를 떠난 지 2시간 30, 끝없이 펼쳐진 넓은 광야를 가로질러 새로 닦아 놓은 듯한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서 우리가 홍해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난 오후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홍해의 수위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홍해는 여전히 넓디넓은 바다였다. 그 옛날, 저 넓은 홍해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졌고, 바다 속에 뚫린 대로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을 것이다(14: 1-4). 짙은 녹색으로 춤추듯 일렁이는 홍해 물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우리 일행은 카이로시내에서부터 쭉 타고오던 버스에 그대로 앉은 채, 이집트가 돈을 투자했고 중국에서 이루어 놓았다는 바다 속에 뚫린 길로 홍해를 건너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큰소리치는 현대문명의 실상을 보는 듯, 신기한 한 편,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고 수에즈운하 끝자리, 작은 호수가 있는 갈대밭 사이, 육지로 건넜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판 구약성서 지도를 보면 성경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바다가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유난히도 홍해바다의 길, 그리고 그 주위의 길에 흥미가 있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성경 일부분은 삭제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 점일 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전제로 할 때, 지도대로 성경을 찢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대로 지도가 그려져야만 하는가? 내 믿음은 지도가 성경대로 그려져야지, 지도대로 성경을 찢어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려면, 먼저 내 눈으로 그 지형을 확실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 성경에서 말씀한 지형들이 눈으로 확인될 때마다 눈물이 흐를 만큼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글/최송연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최송연

                   
서걱서걱
갈대의 부딪는 소리
섶을 이루며 쌓여가고

스산한 갈바람
가야 할 길 재촉하니
한세상 미련 없다 했건만

모든 진액
아낌없이 쏟아붓다
이제 열매에 자리 내어준 채
떠나야 하는 것이 힘든 걸까

못다 한 사랑
뒤로해야 하기에
저토록 흔들리고 있는 걸까

그래,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너무 흔들지 마라...

 

 

 

 

 

 

단어 해석 도우미:

낙엽(의인화) = 황혼기 인생을 그린 것임
바람= 환란(이풍진 세상.^^)
 
세상의 모든 은퇴 목사님, 은퇴를 앞둔 사역자님들, 그 사랑의 수고를 기억하면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등불  (4) 2022.10.24
가을 나무  (0) 2022.10.17
내게 행복이란..  (2) 2022.10.07
가을 호수  (7) 2022.10.03
나의 나 된 것  (0) 2022.10.03
 

 

아래는 우리 아멘넷의 기사로 올려진 "시드선교회 직원70만불 횡령"이란 제목하에, 거액의 선교부 재산을 횡령당하여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둔 상태라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그 아래 남긴 저의 댓글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재정부 상태는 어떠한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 또한 아직도 잘못된 시스텀으로 교회재정을 운영하고 계시는 교회가 있으면, 이런 것을 계기삼아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 젊은 사역자님들, 개척교회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행여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퍼다 놓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돈을, 재무 혼자서 관리하게 했는지요, 담임(책임자)목사님외 다른 진실한 두 사람을 더 넣어 세 사람이 authorized signers가 되어야 하고, 그 중 두 사람이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교회 재무 집사(혹은 장로)가 단체의 돈을 혼자서 횡령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미국 내의 business checking account system입니다. (아, 물론 목사님이시건 다른 성도님이건 교회 일을 위해서 급하게 작은 돈을 사용해야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먼저 쓰고 후에 영수증을 첨부하여 되돌려 받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reimbursement system이라고 하여, 미국 선교부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는 물론, nonprofit organization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교회들이 이 방법을 택하면 이런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관계도 부부를 넣거나, 너무 친한 사람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는 개척교회라고 목사 부부가 'co-signers'가 되는 데, 이것도 권장할 일이 못됩니다. 아니, 목사 부부가 재정부에 함께 'co-signers'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목사님을 비롯한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종들일 뿐(청지기 의식)이란 것을 알게되면, 사모는 재직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재정을 개척 당시부터 이런 시스템으로 구축을 해 두면, 설사 그중 한명이 시험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대치해 두면 되고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담임 목사님과 그 남은 사람이 함께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하도록 되니까,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혹여 삯꾼 목자가 있어, 주님께 드려진 헌물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재정부 시스텀을 성도들이 알게되면, 신뢰감이 생겨 더욱 좋은 교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교회의 일일수록, 반드시 성도들 중에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여 일을 맡기되 담임 목사님의 통제하에 행정이 잘 관리되도록 해야합니다.

하물며, 이런 큰 단체에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켜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책임 목사님이 누구신지, 능력부족이란 지탄의 소리를 면치못할 것입니다.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하라 (1)  (2) 2024.01.15
성도여 깨어라  (2) 2023.12.11
최상의 선택  (0) 2022.06.26
건전한 신앙인  (0) 2021.06.21
교회(敎會)의 주인은 누구인가  (0) 2021.06.18

내게 행복이란.../ 최송연

 

내게 행복이란 

당신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이 길

가끔 화창한 날

만나기도 하나

비바람 몰아치는 날

심히 많아

 

결코 쉬운 길이라

말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난 행복합니다

내게 행복이란 당신이니까요

 

늘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

진홍빛 그 사랑이 있기에

이 순간에 고백합니다

마음 다해...

 

내 영혼을

흑암에서 건져

구원하신 당신

당신만이 내게 전부니까요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나무  (0) 2022.10.17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6) 2022.10.11
가을 호수  (7) 2022.10.03
나의 나 된 것  (0) 2022.10.0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0) 2022.09.29
(Q 12) 왜 기독교인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일입니까?

 

 
비록 “너는 도박을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십계명 중의 한 가지가 아닐지라도, 도박을 하는 것은 성경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경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것도 지켜야 합니다. 청지기의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기독교인은 부(富)를 포함한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또한 그들의 소유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쓰여 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4:1; 마태복음 25:14-20). 도박은 우리들의 자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청지기 직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노동과 생산적인 일을 존중하는 성경의 원리는 도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닌 방법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에 위배됩니다 (잠언 12:11, 28:19-20; 데살로니가후서 3:10).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22:39), 우리는 이웃의 손실을 통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박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도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언제 혹은 어떻게 자기의 삶이 끝날지 모른다고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어느 때라도 대참사와 병마는 일생의 계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그토록 모험인데, 왜 교회는 복권과 도박을 반대하느냐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차이 --- 하나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승마투표(경마) 도박은 정상적인 삶의 환경에서 부딪치는 위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위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박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가치 있는 무엇을 넘겨주기로 한 것이며, 그것의 결과로 한 쪽에게는 상당한 이득을 주고 다른 쪽에게는 상대적인 손실을 주도록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근거하여서, 우리들은 모든 형태의 도박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계획하신대로 사람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락이나 유흥으로서의 도박과, 도박으로부터 얻어진 수익을 정부가 사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갖습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목적(즉,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직접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도박의 유익한 점에 대해 선전하는 것은 환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의도하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사실이고 비극입니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에 대해서는 선전을 하지만,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 도박에서 돈을 따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은 큰 유혹에 빠쳐서, 결국에 가서는 흔히 “패자”가 되어 버립니다.

 

관심사: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증권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의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에 투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과 결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이나 정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험이 포함된 사업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청지기직분에 관한 자기의 양심과 서약이 안내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은퇴 프로그램이 현명한 투자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운영되는 반면에, 적절한 준비와 배경지식이 없는 개인의 투자는 그 투자를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며, 그것은 거의 도박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소중한 청지기직분을 통해 맡기신 것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아주 필수적인 것 이상의 자원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일에 대한 정직한 윤리를 축복하실 때, 그것은 번영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얼마만큼의 부를 더 저축하거나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예상되는 십일조 이외에 얼마나 더 주님의 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어보는 것은 충성스런 성경적 청지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3 년도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표방한 “도박에 대한 성서적 고찰” (1983)에 기록되어 있다.

 

 
역자 주: 승마투표(경마) 도박 (paramutual betting)은 경마에서 경주를 관전하는 관객들이 우승이 예상되는 출전마를 선택하여 돈을 거는 행위로서, 이긴 말에게 건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제하고 건 돈의 남은 돈 전부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하는 도박.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교춤  (0) 2022.10.20
재정 관리와 신용  (1) 2022.09.22
유물론  (1) 2022.09.10
일의 윤리  (1) 2022.08.27
구세주의 조건  (0) 2022.08.20

  가을 호수
             최송연

 

 

넓은 저 하늘 닮고 싶어
산이 외롭다면 산을 품고
별이 투정하면 별을 품고

 

돌이 날아들면 그 돌마저 품으니
누가 가시채를 던진다 한들
되갚아 줄 리 없는 깊은 수심,

보드랍기가 천사의 치마 폭 같아라

 

때때로
불어치는 모진 광풍에
할퀸 생채기 아파 눈물 흘릴 때면
달빛 내려앉아 쓰다듬어 주니
은가루를 뿌린 듯
밤 깊을 제면 

되려 더 반짝이네

 

이제 곧 폭설 내려치는
무서운 겨울이 닥칠 것이나
그때도 달빛이 함께 할 것을 믿으니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으리라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6) 2022.10.11
내게 행복이란..  (2) 2022.10.07
나의 나 된 것  (0) 2022.10.0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0) 2022.09.29
고난은 神이 파송한 천사  (0) 2022.09.29
 나의 나 된 것 
                       -최송연
주님,
지금 나에게 
한 톨 소망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지나간 시간
돌이켜 보니
소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게
내 자아를 지배했으니까요

주님,
오늘 나에게
사랑 열매 소담하게 맺혔다면
그 또한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지나간 세월
돌이켜 보니
이해보다는 미움이 더 빨리
내 영혼을 파고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젠
절망이 변하여 소망 되고
미움은 변하여 사랑 되니...

주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당신께로부터입니다.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5395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행복이란..  (2) 2022.10.07
가을 호수  (7) 2022.10.0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0) 2022.09.29
고난은 神이 파송한 천사  (0) 2022.09.29
힘들고 지친 당신을 위한 기도  (0) 2022.09.15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The most fearful thing in the world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when the night is the darkest black
for the morning's sun will come soon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In the midst of the winter storm
one can patiently sit and wait
for the springtime's warm rainbow
 
그러나
그대 맘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But
If you stack up desperation 
in your heart
Who can move that mountain for you?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So
to be feared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is world
is your despairing heart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 1)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호수  (7) 2022.10.03
나의 나 된 것  (0) 2022.10.03
고난은 神이 파송한 천사  (0) 2022.09.29
힘들고 지친 당신을 위한 기도  (0) 2022.09.15
사랑의 향기  (2) 2022.09.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