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드리는 기도/ 최송연


이 9월에 나는 소원하네
하늘의 청명함과 넓음을
쏙 빼닮은 내 마음이기를...

메말라가는 나뭇잎 사이로
흐느끼는 바람소리는
온 여름 다 가도록 불러보지 못한
시인의 애잔한 사랑 노래인 듯...

봄, 여름 내내 젊음을 괭이질 하며

땀 흘려 일궈낸 화사한 꽃이여
이제 그 떨어지는 영화에 울지 말고
밤송이 같은 알갱이로 알알이 영글어야지

미움은 사랑보다 아픈 것

아픔은 영혼을 어둡게 하는 것
영혼을 어둡게 하는 아픈 情일랑
흐르는 갈바람에 모두 날려보내야 하리

저 하늘처럼 넓고 청명한 가슴,

착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죄인을 품고 사랑하신 그분처럼
더 많이 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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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화사한 햇살 아니어도 좋네

나의 작은 창가에

부드러운 햇살 한줌 스며들면 족하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실바람 아니어도 좋네

내가 숨 쉴 수 있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불어오면 족하지

 

하루살이 같은 인생

너무 욕심내지 않는다면 

내게 주어진 이 하루가 신의 크나큰 은총인 것을...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장 하) (빌 4: 11절 1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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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Q 10) 유물론과 세속성에 대한 성경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창설 초기부터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하 며, 우리 주님께 사랑의 표현으로 헌신적으로 헌금을 드리고, 또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 보다는 영적 가치에 대한 성경의 주제들에 대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들을 세상으로 이끌며, 영원한 진리와 가치로부터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물질주의 혹은 세상에 속한 소유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받는 가장 강한 유혹 중의 한 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부(富) 그 자체를 견책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선물과 축복으로 인식되며, 특별히 그것을 구하지 않을 때더욱 그렇습니다 (열왕기상 3:13). 그 러나 성경에는 부의 위험과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부는 부 그 자체를 위해서 축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정 또는 탄압을 통해 서 얻어져서도 안 됩니다. 부는 흔히탐욕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 그리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 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에스겔22:29). 관대함은 기독교인이 부를 사용하는 표시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부유함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본적인 음식이나 의복 그리고 거주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은 세상의 대부분 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때 부유합니다. 부와 물질에 대한 유혹은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 니다. 부자들이 가지는 욕심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은 유물론에 대 한 징후입니다. 

 

세속적 사회는 항상 부와 물질의 소유에 높은 가치를 두어왔습니다 (누가복음 16:9, 11 에 기록된 불의의 재물).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야 하는 영 적인 우선권을 물들이고 침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부나 소유물을 축적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은 신 분의 삶을 살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쳤는데,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었 습니다 (마태복음 6:25-34). 


신약 성경이 부자에 대하여 강력한 권고와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물질적 빈곤함이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기독교인 들의 노력을 칭찬했습니다. 어떤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유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부유하면 충분할까요? 유물론은 “조금만 더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 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예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의 중년에 요한 웨슬리는 그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년 얼마가 필요한가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활비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서약했으며, 후에 그보다 많아진 수입은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성회는 모든 회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좋은 청지 기가 될 것을 격려합니다. 


관심사:


현대 사회로부터받는 심한 압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그 들의 성경적 가치와 삶의 우선순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압 력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평가, 성공의 상징으로서 물질의 축적, 상류상회로 진 출하려고 하는 노력, 그리고 당장 만족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공생애 동안에 이 땅위에서 가지셨던예수님의 삶은 오늘날의 여러 문화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자세와 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31-38 의 “복음의 역설”은 생명이 고난과 죽 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사는 제자직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희생은 기독교인 으로서의 삶의 한 부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보여주는 선언문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은 성경적 가르침 을 어떤 은사주의 모임에서 인기 있는 유물론적 “믿음 가르치기 (faith teaching)”와 구분 하는 명확한 선언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자들을 물질과 재정적인 성공으로 축복하셔 서 그들이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필요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성공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부를 내려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 한 것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별로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와 유물론에 관 하여 주의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소유물을 유연하 게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믿고 맡기신 것들에 대해 좋은 청지기가 되는 부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면에,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고 움 켜쥐려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가 지고 있느냐혹은 갖고 있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이 삶에서 우선순위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7-19). 

 


*위에 기술한 선언은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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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움 /최송연


가녀린 햇살이
강둑에 아련히 걸릴 제면
산머루 익어가듯
내 그리움도 익어갑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님
오시지 않고
임 그리는 애잔함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서러운데

가을 그리움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불빛 되어
오늘도 저 산천을
저리도 붉게 물들이고 있나 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마라나 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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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윤리
(Q 9) 왜 개인의 이니셔티브(主導)와 강한 직업윤리가 기독교인과 일반 사회 에 대하여 그처럼 중요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 리신 벌이 일이라고 느낍니다. 아담은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 (창세기 3:19) 수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을 유익하고 생산적 인 것이며 심지어는 창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창조하시고, 지 으시고, 세우시고, 또 심으십니다 (창세기 1:1, 2:7, 19;시편127:1;아모스 9:15).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날에]안식하셨[습니다]” (창세기 2:2). 그리고 그 지으신 모든 것 이 보시기에 심히좋았습니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 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 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데살로니가전 서 5:12, 13). 바울은 여러 번 그들에게 게으르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습니다 (데살로 니가전서 5:14;데살로니가후서 3:6, 11).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일이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된 소중한 활동이라고 기술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일은 타락한 세상의 체계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활동으로 버릇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더많은 여가를 갖기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생 활수준을 갖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은 이러한 점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일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을 회피하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라고 말했습니
39다. 신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대신에 웰페어를 받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대의 일의 모양에 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은 일에 대해서 어떤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들은 그러한 말씀을 참고로 해서 오늘날의 일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 담에게는 동물을 다스리고 에덴동산을 돌보는 특정한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백성 들은 농업과 경작을 통하여 얻은 그들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은 일상생활에서의 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게으름과 도 둑질을 비난하고 유용한 일의 활동을 격려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28).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있을 것을 기대할지라도 계속 일을 하라 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4). 


성경은 일에 대한 어떤귀천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정직한 노동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나 기술직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나 육체적 노동 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눈에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적게 받는 직 업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직업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일꾼은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받은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인 부모는 지시하는 일과 본을 보이는 일을 통하여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자 녀들에게 양심적으로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간단한 “일”을 맡기고 좀더큰 아이들에게는 더 책임감 있는 일을 맡기는 방법은 본을 보이는 일의 아름다운 시작입니 다. 좋은 일에 대하여 적당한 용돈을 지불하는 것도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키우는데 도움 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것이 뇌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 린이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 없이 일하는 것을 배 워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대해서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지불 하는 것은 “일”의 경험에 대한 동기유발과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관심사:

일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최소한의 노 력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필요한 것으로 보는 대신에, 전도서 9:10 에는 일에 대한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릇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 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그리고 기독교인은 그가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것 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은 고귀하고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상 대 명령과 같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는 가장 실증이 나는 일을 부담이 별로 되지 않는 일로 만들 수 있습 니다. 그러한 태도는 그들의 작업환경을 달가워하지 않는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태도에 결코굴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생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그 일이 매우 만족 스럽거나 성취감을 주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감독이나 상사에게 하는 것처럼 일을 하 지 않고 주님께 하는 것처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삶의 모든 곳에서 그 리스도를 모시고 있어야만 하며, 보통 한 주일의 약 25%를 차지하는 일터도 예외가 되어 서는 안 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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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지 못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죄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죄 때문에 용서 못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쌍하고 애처로워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송충이나 구더기나 뱀이나 똥을 끌어안지 못 하고 보기만 해도 진저리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를 절대로, 절대로 용납하지 못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2.
죄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나는 남보다 덜 죄인이니까, 착하니까, 죄 지은 거 없으니까 천국 갈 수 있을까요?
식탁과 똥과 화장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귀한 음식을 차려놓은 식탁에 똥은 못 올라갑니다.
큰 똥이든 작은 똥이든, 똥이 살짝 묻은 화장지든, 똥이 전혀 묻지 않아도 화장지처럼 생기기만 해도 식탁에 못 올라갑니다.
악한 죄인이든 죄를 조금밖에 짓지 않은 사람이든, 죄를 전혀 짓지 않았든,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배반한 아담처럼 생기기만 해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3.
죄의 대가는 사망, 아니 지옥불입니다.
청소할 때, 소독할 때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염병을 제거하고 깨끗이 하는 방법은 박멸과 소각입니다.
전염병자가 입었던 옷이나 쓰던 물건은 소각합니다.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소각이기 때문입니다.
소각할 때는 병균이 있나 없나를 정밀조사하지도 않고 병자가 소유했던 물건은 다 불속에 던져넣습니다.
마지막 날, 우주 대청소날, 심판의 날,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영원히 타는 볼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단 하나의 더러움이나 악도 남겨두지 않고 깨끗이 소각하실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원수, 사단마귀도 거기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안 됐지만 인간들도 더러운 옷처럼 함께 던져 넣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피조세계가 그 때 깨끗함을 입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용서하실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신다면 그것은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이 되며
부당한 특혜를 베풀어 봐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사단마귀가 달려와 왜 저놈은 봐주느냐고, 자기들도 봐 달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을 봐주고 눈감아주는 악신(惡神)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고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5.
죄인이 죄의 대가를 면하고 죽음을 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을 사랑하여 자신이 대신 죽어 죄값을 대신 치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죄 없으며 누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대신 죽어 주겠습니까?

6.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실 구세주에게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와 양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인간 하나를 대신하지 못 합니다.
인간은 인간만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가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 있는 인간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위하여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는 죄 없으면서 그 가치가 온 인류를 합친 것 보다 귀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설혹 죄 없는 사람이 있어 죄 있는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어준다 해도 그 사람은 단 한 사람만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사람......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신 죽어주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7.
구약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 4장 끝까지 구세주의 약속들입니다.
기원전 7세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기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왕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또한 그가 고난을 받아 채찍에 맞고 찔리고 죽임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어 고난 받아 어린양 속죄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밟는 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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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향나무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

모처럼 맞는 휴일 이른 아침
게을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진한 커피 한 잔으로 다잡고
차를 타고 한 이십분 남짓 외곽지로 나가니
거기 등산하기 안성맞춤인 산이 있습니다.

이른 시간에 찾아온 블청객에 놀랐던지
산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나고
하얀 안개가 띠처럼 둘러쳐진 숲 속은
마치 선녀의 치마폭같이 부드럽습니다.

숲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는바람 결을 타고
내 코 끝을 살살 간지럽히며 파고 듭니다.
달콤한 향에 이끌린 나는 향이 날아 오는 곳을 찾아
우거진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라가 봅니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가파른 곳을 지나니
그곳에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떡갈나무들 사이에 여리디 여린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향나무는 덩치 큰 떡갈나무 그늘에 가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
잎이 노랗고 길쭉길쭉 한 것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어린 잎을 하나 똑 따서 코에 대어 봅니다.


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달콤한 향이 코를 톡 쏘며
말초 신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 행복해 집니다.

향나무는 평소에는 그 향이 약하지만,
어떤 물체에 의해 찍혀지거나,
잎을 하나 똑 따서 맡아 보면,
그 향은 배가 되어 아주 강하면서도 달콤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이
정다운 이의 따스한 미소처럼
아찔하도록 온 몸을 휘감아 옵니다...

달콤한 향을 맡을 때 이렇게 행복해지 듯...
나도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억세고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어
향나무가 선 자리는 한 뼘이 채 안 되는 듯 해도
그곳에서도 향나무는 향나무입니다

 

다른 이가 설 자리마저 빼앗는
떡갈나무 같은 사람 되기 보다는
내가 설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고, 찢겨도
불평 대신 향기를 선사하는
향나무 같은 사람 되는 것이 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향기를 따라
숲을 헤치며 먼 곳까지 찾아올 테니까요.

날카로운 창과 대못에 찔린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렇게...,
세기를 거쳐 생명의 향을 전해 주고 있건만... ....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 15-16절)"

 


글: 별똥별/최송연

 


 


 



모래 위의 엉덩 자국 (Buttprints in the Sand)

One night I had a wondrous dream,
어느 날 밤 나는 한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One set of footprints there was seen,
그곳에 발자국 한 세트가 보였는데
The footprints of my precious Lord,
발자국은 나의 소중한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But mine were not along the shore.
그러나 나의 발자국은 해안을 따라 나 있지 않았습니다

But then some stranger prints appeared,
그런데 그때 몇 개의 이상한 자국들이 나타났습니다
And I asked the Lord, "What have we here?"
나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고

Those prints are large and round and neat,
그 자국들은 크고 둥글고 그리고 단정했습니다.
"But Lord they are too big for feet."
”하지만 주님 저것들은
발자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큽니다.”

"My child," He said in somber tones,
“내 아이야,”
그분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For miles I carried you alone.
“수마일 동안을 내가 너를 업고 오면서
I challenged you to walk in faith,
나는 네가 믿음 안에서 걷기를 독려했었지
But you refused and made me wait."
그러나 너는 거절했고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You disobeyed, you would not grow,
너는 불순종 했고,
너는 성장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The walk of faith, you would not know.
믿음으로 걷는 길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어

So I got tired, I got fed up,
그래서 나는 피곤했고, 지쳤단다.
and there I dropped you on your butt."
하여 내가 너를 너의 엉덩이로 매어친 것이다.

"Because in life, there comes a time,
왜냐하면 삶이란, 어느 한 순간이 닥치는데,
when one must fight, and one must climb.
때로는 싸워야만 하고,
그리고 어떤 때는 기어 올라가야만 하고
When one must rise and take a stand,
때로는 서 있어야 하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일어나야만 한단다.
or leave their butt prints in the sand."
그렇지 않으면 모래 사장에
그들의 엉덩 자국만 남길 뿐이지
 

외국 詩
번역:
별똥별/ 최송연



 

   
 
 

<남편이 되신 예수님>

모든 동물에게 암수, 인간에게도 남녀 성별(性別)과 그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성별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는 유일한 동물(?)이 동성애자들일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암수의 역할이 얼마나 명확한지 모릅니다. 새들은 당연히 알은 암컷이 낳지만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고 새끼가 나면 함께 나가 열심히 먹이를 물어와 새끼를 기릅니다. 남극의 펭귄은 암컷이 알을 낳아 남편펭귄에게 품도록 맡겨놓고 자기는 바다에 나가 약 두 달 동안 먹이를 먹고 몸을 불려서 돌아와 남편과 교대합니다. 그 동안 남편펭귄은 아무것도 못 먹어 앙상하게 말라 거의 빈사상태가 됩니다. 가시고기는 암놈이 알을 낳으면 수놈이 알을 지킵니다. 연어는 암컷이든 수컷이든 함께 물길을 거슬러 알을 낳으러 수천 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정액을 뿌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왕자인 사자를 보아도 암수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사냥은 암사자들이 합니다. 무성한 갈기를 가진 수사자는 온종일 빈둥거리며 놀다가 암사자들이 잡아놓은 먹이를 빼앗아 먹습니다. 그러나 수사자의 진가는 다른 곳에서 발휘됩니다. 하이에나들이 암사자들을 공격해오면 암사자들은 하이에나들에게 쩔쩔 맵니다. 사냥한 먹이를 하이에나들에게 빼앗기고 쫓겨나는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사자가 나타나면 하이에나들은 혼비백산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바쁩니다. 암사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사자의 강력한 한 방에 하이에나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기 때문입니다. 수사자가 빈둥거리다가 빼앗아 먹기나 하는 것 같지만 보호자 역할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셈입니다. 

우리 세대가 자라던 시절은 여자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돈벌어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남자 혼자 나가서 벌어 와서 온 가족이 먹고 살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혼자 벌어와 온 가족을 책임지시던 아버지 밑에서 다섯 남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여성상위시대니, 남녀평등이니 하는 시대사조와 더불어 남자 혼자 벌어서 가족 부양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농사는 기계가 짓고, 일은 컴퓨터와 로봇이 하고, 기업은 해외로 나가 공장을 짓고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잘 벌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자가 굳이 시집을 가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혼자도 살기 힘든 세상, 내가 왜 너의 아내가 되어 아이 낳아주고 일하고 벌어 와서 먹여 살리기까지 해야 해?” 능력 있는 여자들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부부가 힘을 합쳐 가정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고 귀한 일이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고, 깨어지는 가정도 많습니다. 경제적인 이유에다 시부모와의 갈등, 혼수를 둘러싼 다툼도 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따로 세우시고 그 역할을 나누어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남편은 공급과 보호, 아내는 생산과 양육이지요.

오늘 말씀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인류최초의 부부싸움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범죄를 하였습니다. 심판주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고 쫓겨나고 죽게 될 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깁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와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않고 아담의 죄만을 지적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고 말합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것, 지키는 것, 구원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책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첫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첫째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하였습니다.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사자처럼 보호해 주지도 못 했습니다. 하이에나같은 뱀에게 물린(?) 하와를 돌봐 주지도 못 했습니다. 더욱더 슬픈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하와를 품어주지 못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 살겠다고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온 인류를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험한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아, 그는 용감한 남편도 온전한 보호자도 못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성도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을 던지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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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담배, 그리고 마약
(Q 8)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 합니까?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 을 매우 존중했 습니다. “너희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 을 알지 못하느냐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들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 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되며, 이것 외에도 완 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 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 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파괴적인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잠언 20:1; 23:19-35; 31:4, 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력을 와해시키며, 무분별 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 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 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인 하여 문제를 갖게 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 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 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만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 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 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 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 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도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워줍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 고 여러 가지 사회의 다른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알려져 있습니다. 술중 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 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담배를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은 흡연의 위험에 대하여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 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교 회는 담배가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 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 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적 및 영적인 복지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높은 절제와 자제심의 표준을 가지고, 그것들 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느 정도 “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 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 전한 증언을 하는 것이 절실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 2)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그 사람을 더넓은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 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 니다. 우리들은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 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촉구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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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이 신기하고 황홀한 광경을 본 제자들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장가 든 맏형이 죽고, 둘째가 죽고, 셋째가 죽고, 결국 같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한 일곱 형제가 다 죽었는데 부할 때에는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느냐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고 모두 천사와 같이 된다 말씀하시고, 또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음을 들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앞에 다 살아있고 일곱 형제가 다 부활하여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죽고 살지 못 한다면,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 하신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은 자들에게, 또 죽을 자들에게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하나님 노릇하는 그런 한심한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그 몸을 찢으사 그 피를, 그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찢어 그 생명을 우리에게 뿌리시고도 우리를 살리지 못 하신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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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를 보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 하여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NIV 영어성경을 보면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너희들이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성자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 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참살되어 피가 바다를 이루는 그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 참혹한 미래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을 그 당시의 예루살렘으로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마음이 예루살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눈이 가리워 알지 못 하면 우리의 영혼도 그 비극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기쁨으로 영접하는데, 어떤 이는 거부하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천국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다스리실 때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모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을 모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도 되지만 이미 주님의 통치하심으로 천국이 된 성도들을 모은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이루셨나요? 혹시 새끼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 앞에 오신 주님이 슬피 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종려주일, 오신 주님을 향하여 찬양하며, 춤추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의 왕이여, 오소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우리 왕, 우리 구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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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삶
(Q 7)

왜 기독교인은 자기 개인의 생각의 삶에 그처럼 중요성을 둡니까? 환상과 상상 그 자체는 죄가 될 수 있습니까? 
언제 그런 생각이 유혹이 되며, 언제 그들이 죄가 됩니까?


성경은 개인의 사적인 생각에 대한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 법은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참고. 잠언 23:7). 믿음과 신앙은 생각의 방법 입니다. 비록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더라도,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할지 아 니면 세상을 향할지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


한 유명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매력과 산만함 속에서 순수하고 도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려운 목표가 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 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 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 4:8) 라고 그들의 기억을 상기시켜야만 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준 바울의 권면은 우리들이 마음속으 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즉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은 타락 한 쾌락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위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들은 생각의 삶에서 그것을 제일 먼저 직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유혹과 죄악


유혹은 생각의 영역을 통하여 인간에게 찾아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죄악된 문화 로부터의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춰지면서 일어납니다. 비록 유혹이 죄악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분변하고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 다. 파괴적인 생각이 싹이 나도록 허락하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첫 번째 죄악을 만듭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 15) 라고 말씀합니다. 


환상은 사람이 마음에 자리를 잡도록 허락하는 총천연색으로 된 생각입니다. 그것 은 무해할 수도 있고 사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성 적인 감각과 낭만적 매력은 정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건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주신 욕망이 성경이 금하고 있는 성적 행위의 생각으로 저하될때에 그것은 정욕 이 됩니다. 그러한 포르노 영상과 성경적 도덕의 표준을 범하는 생각에 거하는 것은 궁극 적으로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침체되도록 만듭니다. 성적 환상은 흔히 자기의 육체적인 더러운 것(자위)에 사로잡히게 되며, 또한 그로 인한 죄의식으로 항상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그로 하여금 마침내 영적인 패배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이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했을 때, 사악한 성적 생각은 감정적이며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남용하는 것과 같은 부정(不貞)한 행동과 때로는 강간, 근친상간, 그리고 어린이 성폭행과 같은 비열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와 세속적인 활동을 통해 풍부하게 심겨진 생각을 통 하여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그토록 엄숙하게 우리들에게 훈계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7).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가복음 14:38) 


관심사: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염려를 해야만 하는지 질문을 합니다. 사실을 말하면, 즉시로 혹은 어떤 미래의 상 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 그 자체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취는 불순한 생각을 통하여 우리들이 유혹 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죄악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그러한 죄악 된 생각을 감싸고 그것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면 우리들은 그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은 재빨리 우리들을 유혹하는 각각의 생각을 분변하고, 그것을 쫓아버리며, 의식적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순결한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심지어 우리들의 생각의 삶까지도 거룩해 질 수 있습 니다.


순결한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영역부터 먼저 보호해야만 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건전하지 못한 잡지, 서적, 음악, 라디 오, 텔레비전, 케이블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컴퓨터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 여 그들의 가정과 주위가 타락된 영향을 받도록 허락합니다. 건전하지 못한 것을 입력하 면 그 사람의 마음도 타락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님이 이러한 분야에서 필요한 변화를 시키는 가운데 그들을 인도하시도록 허락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 6:7, 8). 


세속적인 유혹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순결하고 하나님의 도덕 적 표준과 진실을 반영하는 것들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일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은 죄악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정결케 하며, 또 우리의 행위에 대해 서 성숙한 신자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와 함께금식하는 것이 하나 님이 우리들의 마음과 영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사용하시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성경공부와 기도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기독교 서점이나 카탈로그들은 기독교인 성장을 위한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을 심으 며”걷는 매발자국에서 우리들은 “의로움을 거두게”될 것입니다. 

 

죄악이나 육신의 생각들이 침범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지키는 것은 신 자들이 계속적으로 가져야할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위 하여 인도자와 파숫군으로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으며, 그분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는 덕을 세우며 고귀한 일들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우 리를 끌어내리는 그러한 생각으로부터돌아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 8:6, 12:2).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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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최송연

 

주님,

기도 응답이 지체되는 때

낙심하여 주저앉기  보다는

당신의 선하시고 미쁘심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주님,

기도 응답이 실현되는 때

자고하여 교만하기 보다는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하심을

배우면서 걷는 올곧음을 주소서

 

 

출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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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향 같은 내 사랑

                          최송연

 

 

바람이 세게 불어온다면
좋겠네
커피 향 같은 내 사랑
바람결 타고 오시려나

 

안개비가 흘러내리면
좋겠네
안개비 타고 오시는 님
내 창문 두드리시려나

 

눈만 뜨면 찾게 되는
커피 향은 그리움인가

 

눈을 뜰 때나 꿈속에서나
사모하는 주님은
커피향 같은 내 사랑
온 맘 다해 그리워 하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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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참으로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아끼고 모아 그토록 갖고 싶었던 멋진 페라리 경주용 슈퍼카를 샀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아들이 그 차를 못으로 긁어 놓았습니다. 순간 너무나 화가 난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망치로 아들의 손을 내리쳐 으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쥐고 “아빠,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들이 못으로 긁어놓은 글자는 “Daddy, I love you."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아버지는 방으로 올라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내가 아끼는 물건을 깨뜨리거나 망친 사람에게나 아이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주고 단단히 가르쳐 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수로 커피를 쏟은 점원에게 소리를 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세요. 아이가 화병을 깼다고 소리 지르지 마세요. 새 옷을 입고 나가 뒹굴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고 야단치지 마세요. 아내가 차를 망가뜨렸다고 화를 내고 남편이 실수하여 재산을 잃었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사람이, 아이가, 아내가, 남편이 모든 물건이나 재산 보다 수 천 배 소중하니까요. “괜찮아, 괜찮아, 네가 괜찮으면 됐어. 너는 내게 그런 것들 보다 천 배, 만 배 소중하니까.”라고 말해 주세요. 행여나 그 마음과 그 영혼이 다치지 않게 감싸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를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셈입니다. 우리 같아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죽게 만든 우리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야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꾸지람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잠히 눈물로 우리에게 아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셔서 먹게 하시고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용서,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화를 내고 야단칠 수 있나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그 귀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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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네델란드 처자를 아내로 맞이한 한국인 신랑의 이야기입니다. 네델란드에서 장인과 장모가 사위와 딸을 보려고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우이동 계곡으로 놀러가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그런데 한참 놀다가 네델란드 장인이 갑자기 커다란 돌을 ‘풍덩’ 물에 던져 한국 사위에게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그러고는 깔깔깔 웃었습니다. 졸지에 물을 뒤집어쓰고 옷을 적셔버린 한국인 사위는 어처구니없어 ‘이 양반이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장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한참 깔깔 웃던 장인은 머쓱해서 슬금슬금 피했고 자리는 그만 썰렁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사위가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그러더랍니다. “이 친구야, 그까짓 옷 젖는 게 무슨 대수야? 그럴 때는 더 큰 돌을 주워서 ‘풍덩’ 장인에게 더 큰 물벼락을 안겨주는 거야. 물장난을 하자는 거라구, 그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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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
(Q 6)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 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 점 더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 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그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 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 들의 그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 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 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였습니 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우리는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 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절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 45; 20:7;베드로전서 1:15, 16) 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 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 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 는 그러한 일로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 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 6:12-19;데살로니가전서 4:3, 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함의 표 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를 찬 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 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 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서 가르쳤습니다 (참고. 고린도전서 8:1-13;로마서 14 장).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 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 매들에 대한 사랑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흔히필요한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로마서 14:15;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 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 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 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성회의 조례, 9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결국 남용케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 용, 부적당한 외모;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 (누 가복음 21:34, 35;로마서 8:5-8, 12:1, 2;고린도후서 6:14-18;에베소서 5:11;디모데 전서 2:8-10, 4:12;야고보서 4:4;요한일서 2:15-17;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잘못된 것이며, 그 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어떤 것들 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지침이 주 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 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 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
24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 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 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 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 님보다는 다른어떤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 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 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 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기독교인은 도덕적 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웃고 노는 시 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 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 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즐길 수 있 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이어야만 합니다. 몇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 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 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 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 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 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 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 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 는 그러한 것들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등급을 정하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 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 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 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 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 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볼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 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26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기독교인 –흔히 가족과 함께– 과 그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추가적인 관심 요인을 제공 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 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많은 영향을 미 쳐왔습니다. 심지어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 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 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 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 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프 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 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 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가 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코 그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 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 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 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 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 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 교인들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 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방송 국들은 그러한 채널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봉쇄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 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 까지도 수집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 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 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그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 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
28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 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 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는 모든 곳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 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 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 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만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표준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을 지키지 못 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 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 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 맹렬히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 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을 지니지 못 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 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 음 12:36),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 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 考)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성회 조례, 8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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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를,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니까 더러, 특히 남자분들 마음이 좀 거북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결혼한 사람이, 더구나 남자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냐고요.

그건 그래요.
신부(아내)는 신랑(남편)으로부터 씨, 아니 정액을 받아서 새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몸, 곧 그 살과 피를 받아 새 생명,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여 십자가에 그 몸을 찢어 생명을 주시고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신부, 곧 아내이지요.
신랑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신부, 당신은 빛나는 드레스와 면사포, 면류관을 쓰고 주님을 맞이하실 거예요. 그리고 천국혼인잔치가 열릴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사랑하사 피 흘려 목숨을 주시어 살려 신부로 삼고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어느 누가, 사단 마귀인들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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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유한 부부가 외동딸과 살고 있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저택에 동화나라 같은 침실, 멋진 음식과 예쁜 옷,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들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동딸은 부모에게 예쁜 남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졸랐지만 그게 조른다고 되는 일인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고아원에서 남자아이 하나 데려오는 게 어떻겠니?”
딸은 기뻤습니다. “그래요, 아빠."
딸은 그 날부터 남동생에게 줄 옷이랑, 구두랑, 장남감이랑, 온갖 선물들을 준비하고
아빠가 동생을 데려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데리고 오신 사내아이를 본 순간 딸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들창코에다 주근깨가 얼굴을 덮은 못생긴 아이였습니다. 딸은 사놓았던 선물들도 내팽개치고 제 방에 들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며칠이고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속상한 딸은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빤 어디 가서 저런 못생긴 아이를 데려오셨어요? 도로 갖다 주고 예쁜 아이로 바꾸어 와요, 네?"

그 때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 아빠가 널 사랑하는 걸 믿니?"
딸은 대답했습니다.
“네, 아빠, 믿고말고요.”
아버지는 다시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넌 이 아빠가 좋은 사람이란 것도 믿니? 가슴속에 사랑이 있고, 그래서 또 널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딸은 대답했습니다.
"네, 알아요. 전 아빠가 절 사랑하시는 것도,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란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 저 아인 너무너무 맘에 안 들어요, 아빠."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사람은 백화점의 물건처럼 고르거나, 또 바꿀 수는 더군다나 없는 거란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너, 우리가족 모두가 고르지도 바꾸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니?”
아빠의 이 말씀에 딸은 크게 깨닫고 그 사내아이를 남동생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였답니다.

나는 어떤가요?
나는 이 세상에 골라져서 태어났나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
넉넉하고도 푸르른 하늘과 차별 없이 비추이는 햇빛을 누리면서,
혹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다른 생명들을 싫어하고 미워한 적은 없었는지요?
혹시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소중한 사람을 바꾸거나 무르고 싶어 한 적은 없었나요?
나는 그 사랑을 받으면서 남은 사랑하지 못 하는 속 좁은 사람은 혹 아닌가요?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차별 없이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태복음 5:3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마다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로마서 10:12).
예수님은 택정(擇定)한 사람만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생명은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부요합니다.

성적 순결
(Q 5)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왜 그처럼 중요합니 까?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잘못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헌신하는 것) 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 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 고 믿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 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 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도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 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 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본연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 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 라”(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 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라”(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편지에서 말 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두 번째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앞에서 낮추실까두려워 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두려워하노라”(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 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 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 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 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 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 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린도전서 7:8, 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때, 결혼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
19며, 또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 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 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 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 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 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 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 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 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 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 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 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알고 있었 습니다. 그는 청년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 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이 과거에 심판하 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의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 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을 보 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 혼 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족하게 유익을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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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기 원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하나님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2장 6-7절을 보면 거기에도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나오는데,
희한하게도 새둥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새둥지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며,
새끼는 잡아먹어도 좋은데 어미새는 반드시 놓아주라 하시면서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까지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엔 어미새가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아예 손도 대지 말라 하시든지,
잡아먹으려면 어미새는 먹을 것도 있고 또 살만큼 살았으니까 잡아먹고
애처로운 새끼들은 살려주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낳은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존귀하게 여김 받아야 할 것은 새끼들이 아니라 어미새입니다.
어미새의 수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풀잎, 지푸라기,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짓고 그 안에 알을 낳고 그 알을 품어 새끼가 나게 하고 먹이를 부지런히 잡아와 짹짹 입벌리는 새끼들을 먹이는 그 눈물겨운 싸움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잉태의 고통과 희생, 인내의 아픔을 겪으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길러내는 자는 존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엔 어미가 되지 않고 새끼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혼해 자녀를 낳더라도 최대한 적게 하나만 낳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모세대가 전쟁의 폐허와 가난의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다섯 남매, 일곱 남매씩 주렁주렁 낳아서 길러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미루고 심지어 독신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세대는
개인의 자유와 풍요는 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통로를 막아버림으로써
후손을 단절시켜 부모에 불효하고 민족과 인류의 멸종에 기여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실까요?

또한 새둥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과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합니다.

어떤 신부가 좋은 신부입니까? 순결? 사랑? 순종?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낳는 것’입니다.
출산을 못 하는 석녀(石女)가 어찌 좋은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당연히 복음으로 자녀를 낳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낳으십시오, 많이 나으십시오, 육신의 자녀도, 복음의 자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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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을 만나게 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 하루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닌 것같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한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다시 의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인지 알면서도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이 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자기 목숨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보여주는 최상의 선택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 하나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내 주위에서 내가 만난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장 중요하며,그것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 "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글/별똥별/최송연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6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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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제물>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성경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온 때에”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상한 심령”은 어떤 심령일까요? “상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로는 부패하고 썩어서 상한 것도 “상했다,” 다치고 부서진 것도 “상했다,” 하는데, 여기에서는 다치고 부서져서(broken) 상한 것을 말합니다. 깨끗하고 싱싱한 과일이나 향내 나는 고기를 칼로 자르고 저민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령은 깨끗하고 싱싱하고 향내 나는 “상한 심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부터 빌라도 법정과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고소와 주먹질과 침뱉음과 매질과 집단폭행 등, 말할 수 없는 부당한 학대와 곤욕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한 마디 항변이나 반항도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보면 빌라도가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기들의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인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참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인내라는 것, 참는다는 것은 화나고 속상하고, 복수심과 증오심, 악과 독이 치밀어 오르는데도 꾹 눌러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제물이 되려면 악과 독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사과나 복숭아를 찔러도 “아얏, 왜 찔러!” 독과 악이 아니라 달콤한 사과즙, 복숭아 즙이 나오고, 싱싱한 횟감 물고기를 회칼로 저며 놓아도 향긋한 맛이 나듯이 말입니다.
개나 호랑이 같은 동물이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정결하지 못 한 탓도 있지만, 잡아 보십시오, 반항하고 악을 쓰며 “나를 때려? 나를 죽여? 두고 보자, 지옥에 가서라도 원수를 갚을 거다.”는 듯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 같은 동물은 목을 찌르고 매달아 죽여도 고통으로 버둥거리고 울며 피를 흘릴 뿐 악독과 원망은 아예 할 줄을 모릅니다.

제물은 칼로 상하고 죽임당해야 드려질 수 있습니다.
심령도 상함 받고 죽임당해야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하고 죄인의 심령은 부패하여 상함 받을 때 악과 독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악취의 죄가 풍겨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들의 악한 취급에 마음이 상하였는데도 참으셨다면,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누르고 인내하셨다면,
그런 식으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면,
예수님의 이 속죄제사는 무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을 받으셨을 리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대속물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 심령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만민을 구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어린양 예수님의 심령은 악한 인간들의 배반과 욕설과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못 박음을 당하며 부서지고 찢기고 저며져서 향기로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 없었으며 그 제사를 받고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해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종결되었으며 인류의 모든 죄는 사해졌으며 더 이상 다른 속죄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이 완전한 제사에 참예하십시오.
십자가 앞에 엎드려 당신의 죄를 내어놓고 사함 받으십시오. 구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삶은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제사로 속죄함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를 거룩한 산 제사로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나의 성김과 봉사와 희생이 힘들고 고달프고 아플지라도, 내가 환난 가운데 부서질지라도 주님의 희생과 죽으심 만 하겠습니까? 나의 섬김과 희생과 예배가 결코 억지로 참으며 드리는 것이 아니게 하십시오. 오직 감사와 기쁨과 자원으로 나의 삶과 생명이 주님께 드려지게 하십시오.
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결코 우리의 수고와 섬김과 공로를 앞세우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보혈, 그 향기로운 제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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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고,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금방 혼돈하고 공허하단 말일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1절과 2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긴 시간과 엄청난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간격이론(間隔理論, Gap Theory)" 이라고 부릅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다, 또 루시퍼를 위시한 천사들의 3분의 1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벌어지고,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마귀가 되었으며, 그 전쟁의 결과로 땅이 망가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격이론”은 하나의 설(說)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지 아니한 사실을 억지로 추리해내거나 상상해서 믿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말로 '창세기'로 번역되었지만 창세기는 실상 '세상을 창조한 기록'이 아니라 영어로 Genesis, 내력, 즉 이스라엘 민족의 내력입니다.
이 창세기를 근거로 지구가 6천년 전에 창조되었고 태양과 달과 별이 나흘째 날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간격이론이 맞느냐 틀리냐 보다는 창세기가 창조실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의 말씀)

또한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창세기와 매우 흡사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시요 성자 하나님이시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성령의 깨우치심 없이는 진리의 빛을 깨닫지 못 하고 눈앞에 오신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는 어두움에 갇힌 죄인의 마음 위를 운행하실 성령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아무 가능성 없는 죄인의 절망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 위를 하나님의 신이 안타까이 운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죄인의 어두운 마음을 성령님께서 열어주시지 아니하면 죄인은 결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고 빛을 어두움과 나누시는 모습은 요한복음 1장에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사망으로부터 나누어 내실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의 마음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음성이 들리거든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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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기 전에만 회개하면 되겠지.
언제라도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과연 그럴까요?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패역한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제사 드리러 온 백성의 고기를 빼앗아 가로채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전에 먼저 뺏어먹는 패악을 예사로 저질렀으며
회막에서 수종하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마음이 연약하여 두 아들을 엄히 다스리지 못 하였으며
너무 심하니까 겨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사무엘상 2:24-25)

아버지 엘리 제사장의 말은 그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사람이 중간에 나서서 화해시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도대체 누가 나서서 화해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신도 혹시 언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제멋대로’ 생각입니다.
낮고 더러운 죄인은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다를 수조차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다리 밑의 거지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옷이 순식간에 깨끗하고 화려하게 바뀌고
즉시 구중궁궐 임금님을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지가 임금님을 만나려면 누군가가 중간에서 주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거지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거지와 친한 사람이어야 하고
아울러 임금님께 무슨 부탁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 임금님고 절친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거지도 임금님 앞에 나서기 전에
깨끗하게 씻고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언행의 품격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오직 신(神)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이 중보(中保)가 되어 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죄를 씻어야 하고,
눈보다 흰 예수님의 의(義)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구주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 분만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中保者)이시며,
우리 죄를 씻어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실 분이십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엎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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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났을 때

행복은 시작되며

 

당신 사랑 느낄 때

행복이 자라나고

 

당신과 함께 할 때

그 행복 만개하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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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에덴동산에다 선악과는 왜 만들어 두셨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뱀에게 속아서 그걸 따먹을 것을 진작 아셨을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항의하듯이 한 딱한 질문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아예 나쁜 마음도 먹을 줄 모르고 하나님만 섬기는 착한 인간들로 만들고, 남자와 여자도 한 번 짝을 이루면 원앙새같이 서로 사랑하며 알콩달콩 살도록 만드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세상은 지금도 사랑이 넘치는 에덴동산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지로 짜맞추어 놓은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건 마치 인조인간, 로봇, 컴퓨터로 조작되는 사랑이 아닐까요?
완벽히 조종되고 통제, 관리되는 완전한 세상의 완전한 사랑 말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란 "선택"입니다.
자유의지입니다.
눈물과 고통 속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 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그래서 배반하고 떠나갈 수도 있는 인간들이
아픔과 슬픔을 이기고, 서로를 끌어안고 나누는 사랑일 때
사랑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일 것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조작되고 짜맞추어진 사랑을 원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도록 지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랬더니 뱀에게 속아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당신이 갚아야 할 죄의 빚도 이미 다 갚으셨습니다.
마치 매정하게 떠나간 연인을 애타게, 간절히 부르며 기다리듯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 울면서 돌아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거 참,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에 약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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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뭔데?>

하루살이와 배짱이가 만나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배짱이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오늘 참 즐거웠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
하루살이가 되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배짱이와 개구리가 만나서 여름철 내내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자 개구리가 배짱이에게 말합니다.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배짱이가 묻습니다.
“뭐, 내년? 그게 뭔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너무나 사랑하셔서라고요?
너무나 불쌍해서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러나 정답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인간이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죽어 없어지고 소멸되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어차피 죽어 소멸될 인간을
애써 구원하시겠다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을 리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기로 불어 넣어진 인간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루살이나 배짱이처럼, “천국이 뭔데? 영원이라고?”
그렇게 되묻지 마십시오.
당신은 영원한 시공간 속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나 아침안개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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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 억 인구 중 티끌 같은 나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한 사람, 한 영혼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그만 머리 속에는 온갖 사물의 인식과 기억들이 들어갑니다.
가슴 속에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사랑 등 온갖 감정이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입니다.

광활한 우주에 하나님 홀로 계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한들 하나님을 알아주고 사랑하는 존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드넓은 우주보다 당신의 마음을 더욱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인간, 어느 쪽이 하나님께 더 귀하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라면
당신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소우주(小宇宙)....
하나님께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살리시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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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참말로 계신다면 어디 내 앞에 데리고 와 보세요!!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는 겁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할 때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세상이 이 모양인데 하나님은 뭘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공중에 나타나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나팔을 불게 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다 하나님을 믿을 게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을 뒤집어엎어 버리지 않으시고 조용히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만 부탁하시고 승천하셨나요?!”

글쎄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뱀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배반한 것이며 뱀의 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면
그 뱀이 하나님께 뭐라고 할까요?
“이 뱀의 말은 듣기만 하고도 믿던데, 하나님 말씀은 보기 전엔 못 믿겠다는군요. 후후후.”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뱀에게 져서 조롱당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안 나타나실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까지는.
공중에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고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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