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

예루살렘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고 마음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끝내 주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여년 뒤....., 서기 70년....

여호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다신교 우상숭배를 하는 로마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갈등은 점점 커졌고 기원후 66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로마에 저항한 유대독립운동은 70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항전하던 960여명의 자결로 처절하게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로마의 무자비한 진압의 칼날에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의 함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었습니다. 

유대항쟁 초기에 로마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건진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지형적으로, 또 인공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로마군 티투스 장군은 주후 70년 4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아 둘러막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예루살렘의 극렬 유대인들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식량을 불태우고 온건파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나중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 1만 여개의 투항을 하려 했거나 탈출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을 처형한 십자가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다음 유대인들 중 일부가 금화와 보석을 입에 넣거나 삼키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금은보화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4개월이 넘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로마군의 성벽 파쇄기 공략으로 성전 뒤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전투는 다시 성전에서 계속되고 성전이 함락되고 다시 예루살렘 시내가 로마군에게 함락되면서 무려 110만여 명이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여명에 불과했고 로마군은 성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하였으며 지금도 티투스 개선문에는 그 당시 모습을 그린 벽화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을 죽여 배를 가르자 금화가 나왔고 불에 탄 성전기둥에서 녹아내린 금이 벽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자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깡그리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훼손되고 맙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슬람 황금사원이 버티고 서 있고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벽이 아니라 성전 뜰 한편의 축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앞날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혹한 예루살렘의 비극이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하여 내 아들을 내어 주었다. 그런데 네가 거부하고 내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치고 짓밟아 죽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라는 협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놓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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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어째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이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천 년 전에 죽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걸.”이었습니다.
이 의문들을 어떻게 해결했느냐고요?
사실 이 두 가지의 의문을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 많이 생각했지요, 아무도 안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오늘은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살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면, 그런데 죽으셨던 예수님이 도로 사셨다면 우리가 도로 죽어야 맞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근원적으로 깨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박살났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는 '사단배상설'을 가르치는 이단도 있다고 하더이다만....)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죽여 그 피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만일 그 희생제물에 흠이 있거나 대제사장 자신에게 부정이 있으면 그는 죽임당하고 살아나오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제물인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 제물에 흠이 있거나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 하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예수님의 제물을 받으시고 아담 이래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제물을 기쁘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인류의 지를 사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고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우편보좌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절입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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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를 보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 하여 비극을 당합니다.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NIV 영어성경을 보면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성자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네가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그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래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예루살렘을 그 당시의 예루살렘으로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마음이 예루살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눈이 가리워 알지 못 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의 영혼은 그 비극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기쁨으로 영접하는데, 어떤 이는 거부하고 비웃고 장난으로 여기고 조롱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별 볼 일 없다고,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에 먼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모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을 모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도 되지만 이미 주님의 통치하심으로 천국이 된 성도들을 모은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천국을 이루셨겠지요? 주님이 계시면 야러분의 마음은 천국입니다. 혹시 새끼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 앞에 오신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면서 아, 이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는구나, 내가 들어갈 수가 없구나, 하고 슬피 우시지는 않겠지요?

이 종려주일,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향하여 노래하며 찬양하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의 왕이여, 어서 오소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주시고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우리의 왕,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눈물과 감사와 사랑으로 영접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이 봄날, 이 종려주일,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 봄날 꽃들처럼 기쁨과 향기로 가득한 천국,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의 마음에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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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고선 다시 천국에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작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앞뒤가 안 맞는 말씀 같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여자의 후손, 메시아의 약속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태워드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는 속죄제물 주님을 예표하는 것이고,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도 오실 메시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 주님 오시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의 소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3, 5)

그로부터 700여 년 뒤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소리가 되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다가 자기에게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 베풀 것을 요청하셨고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경이 예언한 구세주에게 세례를 베푼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한 것을 비판하였다가 옥에 갇히게 되고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이 연회에서 춤을 추어 헤롯왕을 기쁘게 하였고 헤롯왕이 상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겠다 하자 헤로디아는 딸에게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달라고 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참 이상하지요. 주님께서는 왜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고서는 금방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 중 메시아를 직접 본 선지자는 세례요한뿐입니다.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 한 요한은 황송하게도 그 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모든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일까요?
당연합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제일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칩시다. 여러분은 가장 친하고 제일 잘 아는 가까운 친구를 옆에 앉힐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얼마나 크냐는 그리스도와 얼마나 잘 아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고 친밀하게 아느냐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 중에서는 최후의 선지자로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며 그 분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따라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루시는 구원사역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온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전혀 알지 못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잡혀서 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고 여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도대체 왜 광야의 소리로 외친 세례요한 자신이 옥에 갇혀 죽게 생겼는데도 구출해내지 못 하시는 건지, 도대체 구세주 그리스도가 맞긴 맞는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끝내 모른 채 그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구에 의하여 헤롯왕에게 목 잘려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으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요한이 듣지 못 한 것, 보지 못 한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신약성경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왜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며 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례요한보다 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보다 작은 세례요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우리 주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나요? 저는 그것이 너무 궁금했는데, 그놈 헤롯이 내 목을 잘라가는 바람에.....“

여러분은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되물을 것입니다. “아니, 왜요? 주님이 왜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세례요한은 왜 예수님이 로마군대를 단숨에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는지, 왜 그렇게 맥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만 했는지, 예수님이 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는지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렸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 밤새 맞고 침뱉음 당하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유월절 아침에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병들은 그 아래에서 주님의 겉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비웃으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 뜨거운 태양 아래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목이 마르다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소리 지르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지진이 났습니다. 성전휘장이 둘로 나뉘어 찢어졌습니다.
로마군병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죽으셨고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과 같이 울면서 그 이야기를 또다시, 또다시 되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세례요한 만날 준비.

* 여러 해 전 미국교회에서 이 내용으로 짧게 영어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준비되었냐고 물었을 때 미국교회 성도님들이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Yes, we are!"
(똑같이 한 목소리로 외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점잖은 한국인 성도님들과는 다르더군요. ^^)

여기 앉아있는 저나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끔찍한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공산치하나 이슬람국가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오지나, 옛날 우리 선조시대,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덕분으로 예수 믿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마음 놓고 예수 믿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면 암만 생각해도 그 끔찍한 박해를 받았던 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이 받을 생명의 면류관이나 상 같은 건 우리에게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평온하게 예수 믿다가 조용히 천국에 가서‘아이고, 미안해라,’한 구석에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난 받을 자신은 도저히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미리 아시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는가 싶어 감사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나 주님의 칭찬이나 상급이 없어도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니 또 공짜로 구원 받는 것이, 다른 이들은 고난을 받는데 혼자 편하게 구원 받는 것이, 또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 뵙는다는 것이 너무 죄송합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로마시대와 같은 무서운 박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와 같은 위협, 공산당이 들이대는 총칼, 전기고문, 물고문, 손톱을 뽑고 눈을 뽑고, 기름가마에 튀기는 그런 박해를 당한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목사인 저도 자신 없습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죽은 다음에야 어찌 되든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없다, 우선 살고 보자고, 그런 무서운 박해를 당한다면 저는 이길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고문과 박해를 당한다 해도, 바로 눈앞에, 발 앞에 한 쪽은 유황불, 그 속에서 울부짖는 끔찍한 지옥이 있고, 한 쪽에는 아름다운 낙원, 주님이 바로 내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하여 오라 하시는 광경이 펼쳐진다면, 내가 만약 주님을 부인한다면 그 끔찍한 고문은 멈추겠지만 바로 그 보다 더 끔찍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고, 만일 내가 그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숨을 거둔다면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고 위로하시고 칭찬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 눈앞에 빤히 보인다면, 그렇다면 무슨 끔찍한 고통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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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별다른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 비교,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에게는 죄가 덜 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단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 계신 여러분도 다 죄인입니다. 찬란한 빛이 비추이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깨끗해 보이는 공기 중에 아침햇살이 비추이면 온갖 먼지들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듯 예수님 앞에 서면 모두가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기세등등하게 그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자신들의 죄를 본 것입니다. 끌고 온 사람들이나 끌려온 사람이나 예수님 앞에 서니까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여자를 심판하셨다면, 거기에서 심판이 이루어졌다면, 그 여자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끌고 나온 사람들도, 구경꾼들도 다 한꺼번에 심판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고소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무슨 고소이겠습니까?

우리가 간음죄 안 짓는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남보다 죄를 덜 지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제 발로 걸어 나왔든 억지로 끌려 나왔든 주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 간음한 여자는 끌려나왔지만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산 것입니다. 자기 죄를 내어놓고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면서 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그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실 것을 예정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지시고 대신 죽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다고 모든 사람이 무조건 다 용서 받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나오지 않는다면,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엎드려 있다면, 죄를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다면, 그 죄악은 자기가 책임지고 지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간음한 여인도 사함 받았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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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1-16절]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좀 길지만 본문을 모두 적었습니다. ^^
‘포도원 비유’로 잘 알려진, 신자라면 대부분 잘 아는, 유명한 성경내용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땀 흘려 수고한 품꾼과 해질녘에 와서 일도 안 한 품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느냐 하는 문제의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불러오는 성경내용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흔히 ‘포도원 비유’, 혹은 ‘포도원 품군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절을 읽어 보십시오. “천국은.......집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무엇과 같다고요? 집주인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포도원도 아니고 포도원 품군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천국이 포도원 주인이란 말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주님입니다. 포도원(천국)을 소유하고 품삯(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포도원이 천국이 아니고 그 분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어디에서 가까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천국입니다. 천국이신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천국 되신 분이 포도원을 열어놓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온 종일 돌아다녔습니다. 생명 없이 헤매는 자들에게 품삯 한 데나리온, 아니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헤매고 찾아다녔습니다.
그 주인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는 채 품군들은 온종일 포도원 안에서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더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해질녘에 아슬아슬 포도원에 들어온 품군부터 한 데나리온씩 품삯, 아니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온종일 일한 품군들이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악한 자로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포도원에서 땀흘려 일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부르심에, 애타게 찾으심에 응답한 대가였던 것입니다.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오는 자에게는 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대목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포도원에 들어온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주님께 귀한 믿음의 순서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이 수고한 대가를 기대하며 더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구원을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해질녘에 아슬아슬 들어와 한 데나리온을 받은 품군은 황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식량이 없어 꼼짝없이 굶어야(죽어야) 하는 자신을 그 늦은 시각에 불러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에게 그는 얼마나 감격해 하고 감사해 할까요? 그 감격과 감사가 포도원 주인에게 귀한 것입니다. 먼저 와 일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품군 보다 나중 와 감격하고 감사하는 품군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다고 주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실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무익한 종이라 여기십시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흘리신 피로 구원 받습니다. 그 감격과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먼저 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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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그 몸을 십자가에서 부수어 나누어주신 생명, 곧 하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 밤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살이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피다.”
세상 끝날까지 이를 기념하며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살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는 자는 주님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은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가졌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세상이 이기지 못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 생명을 받아들였으니 남편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또 그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 받은 생명의 씨앗, 곧 복음으로 전도하여 낳은 복음의 자녀를 말입니다.

-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에 붙은 가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자는 밖에 버리어 말라질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는 풍성한 생명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구원을 얻었다고 좋아라, 제 갈 길로 흩어지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자들은 당연히 다시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성도들은 그 안에서 영양을 보급 받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또 갓 태어난 자와 연약한 자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팔을 먹은 자는 팔이 되고 발을 먹은 자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각자의 은사요 사명입니다. 교회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놓으면 꺼지듯 곧 꺼질 것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큰 비밀입니다. 

(마태복음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에베소서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에베소서 5: 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코로나를 이유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 더러 계신 듯 합니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에 출석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우리와 당신의 예배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 주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에 우리는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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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6)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 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 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 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그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 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 들의 그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 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 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였습니 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우리는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 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절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 45; 20:7; 베드로전서 1:15, 16) 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 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 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 는 그러한 일로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 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 6:12-19; 데살로니가전서 4:3, 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함의 표 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를 찬 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 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 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서 가르쳤습니다 (참고. 고린도전서 8:1-13; 로마서 14 장).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 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 매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흔히 필요한데, 그 23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 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 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 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성회의 조례, 9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 결국 남용케 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 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 용, 부적당한 외모;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 (누 가복음 21:34, 35; 로마서 8:5-8, 12:1, 2; 고린도후서 6:14-18; 에베소서 5:11; 디모데 전서 2:8-10, 4:12; 야고보서 4:4; 요한일서 2:15-17; 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며, 그 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들 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지침이 주 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 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 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 24 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 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 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 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 님보다는 다른 어떤 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 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 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 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 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도덕적 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 웃고 노는 시 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 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 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 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이어야만 합니다. 몇 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 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 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 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 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 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 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 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 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 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 는 그러한 것들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 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 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등급을 정하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 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 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 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 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 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 볼 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 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기독교인 – 흔히 가족과 함께 – 과 그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추가적인 관심 요인을 제공 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 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도 있습 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을 미 쳐왔습니다. 심지어 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 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 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 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 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 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 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 프 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 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 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가 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코 그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 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 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 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 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 교인들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 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 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 방송 국들은 그러한 채널 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 봉쇄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 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 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 까지도 수집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 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 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그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 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 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 28 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 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 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는 모든 곳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 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 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 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만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표준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을 지키지 못 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 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 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 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을 지니지 못 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 음 12:36),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 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 考)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성회 조례, 8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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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무서운 죄가 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어.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해......’
그렇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것 같은 불안이 혹시 당신의 가슴 속에 있습니까?

인류최초의 살인사건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 의하여 저질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떠는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장 13-15절)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인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동생을 죽인 극악한 가인 같은 악인이 용서를 받는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 할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용서는 먼 훗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 아담으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한꺼번에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로 이미 작정하시고 그 피로 가인을 미리 용서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인을 용서하신 것은 어떠한 죄인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그 죄를 들고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울며 나오는 자는 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용서 할 수 없는 죄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인을 용서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 말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아래 나아와 울며 엎드리십시오.
가인이 용서를 받았는데 당신이 왜 용서받지 못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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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도덕질하고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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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처럼요? 말도 안 돼. 못 믿겠어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 곧 십자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쪼개어지고 그의 살과 피는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처럼 흩뿌려질 것입니다. 밤하늘 별은 독생자의 살과 피, 그리고 구원받은 모래알 보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아브람의 수많은 영적후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원대한 우주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일 뿐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우주를 티끌같이 작은 이 지구에 살면서 쳐다나 보라고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열 므나를 남겼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다섯 므나를 남겼으니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아니, 세상의 마지막 때 이 땅 위에 고을이 어디 남아있어 고을을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 고을들은 어쩌면 은하계,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거대한 갤럭시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넓은 우주공간의 1,000억 개, 2,000억 개 은하계, 성운 가운데 열 개, 다섯 개씩을 받아 다스리는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그 날을 고통 가운데에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그리하여 끝 간 데 없는 광활한 우주공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원대한 그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주공간 가운데 티끌처럼 작은 이 지구별에서 100년도 못 살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영광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그 꿈이 있습니까?
황당한 상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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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5)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왜 그처럼 중요합니까?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잘못 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 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 고 믿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 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 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도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 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 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18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 간 본연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 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 라” (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 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라” (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 편지에서 말 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 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 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 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 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 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 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 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결혼 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또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 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 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 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 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 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 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 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 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 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 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 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 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 알고 있었 습니다. 그는 청년 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 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20 하듯 하라” (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이 과거에 심판하 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의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 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을 보 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 혼 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족하게 유익을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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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으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참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구하고 찾아다닙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캄캄함이 임한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였던 것입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관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쪼갠 고기가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하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쪼갠 고기’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하나님은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밤하늘별을 가리키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쪼개진 아들의 몸, 그 살과 피,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밤하늘별은 그 살과 피, 생명을 받아먹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 아브람의 후손일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밤하늘별을 가리키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오실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가슴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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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리켜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무수한 육신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아브람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아, 내게서 날 후손들 가운데 언젠가 오실 메시아, 그 메시아가 저렇게 밤하늘 별처럼 되는 거로구나.” 그렇게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실 때 아브람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고 후손이 번성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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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죽지만 생명은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자신을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물론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 후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고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은 후손이 번성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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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

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개인의 대화와 언어를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교회는 정말로 험담을 죄악이라고 믿습니까?

 

언어와 대화는 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아버지 와 대화를 나누셨는가 하는 것(누가복음 22:41, 42)을 읽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모독과 음 란한 말은 그들의 마음의 본질을 나타내 줍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칼과 화살과 같은 무기로 표 현됩니다 (시편 57:4, 64:3; 예레미야 9:8). 야고보는 혀와 말의 능력을 배의 키나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3:2-12). 기독교인은 오늘날 정치적 선전이 나 미디어 뉴스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성회는 험담이 죄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그리 고 자주 소문을 퍼뜨리는 모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비난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레위기 19:1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 보서 1:26).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5, 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험담은 기독교인과 성령 충만한 삶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가장 강력한 도구 인 언어와 말을 잔인한 무기로 변화시킵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진실에 상처를 주며, 지혜로움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서 3 장). 험담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6; 갈라디아서 5:14, 15). 그것은 도움 대신에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 것은 화평 대신에 분노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잠언 16:28; 고린도후서 12:20). 그것은 믿 음 대신에 배신을 가져옵니다 (잠언 20:19).

 

왜 기독교인들 사이에 험담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리고 야고보는 혀의 힘에 대해서 열정적 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모두 험담이 마귀에게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 은 지옥의 불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25-32; 야고보서 3:6).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에 험 담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험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일종의 오락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은 일반적으로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 님께서 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충족되도록 계획하신 대화와 관계에 있어서의 필요성 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만족시켜 줄 뿐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험담을 나누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그룹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룹 밖 에 있는 사람들을 남용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험담은 노여움의 돌출구가 됩니다. 어떤 경 우에는 사람들은 그들이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를 발산시킵니다. 이 모든 이유들은 주님 안에서 신뢰와 힘을 갖는 사람, 기독교인의 봉사를 사랑으로 감당함으로 기쁨을 갖는 사람의 생 활에는 험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거나 허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적당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강요나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거나, 그 것의 힘 아래 우리들이 얽매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2). 기본적으로 진 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 들에게 친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다 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사려 없이 관여하는 것은 자제심이 결여된 것을 보여줍 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떤 말 이라도 삼가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2).

 

우리들은 험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를 함으로서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 에 있어서도 그러한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을 암시 하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을 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2)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잠언 11:13).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떤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오직 목사님이나 혹은 적절하게 행동할 위치에 있는 부모 에게만 말하십시오.

(3)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을 듣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표현 하십시오.

(4)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십시오 (잠언 26:20).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가운데 흔히 간과하는 분야는 사려 없는 표현과 조심없는 맹세의 사용입 니다. 철저히 모독하려는 의도 없이도, 어떤 기독교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 (gee),” “단 (darn)” 그리고 “가쉬 (gosh)” 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낱말의 어원에 대 한 연구는 이러한 말들이 “예수 (Jesus),” “댐 (damn),” 그리고 “하나님 (God)” 을 의미 없 이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부지중에 사 용하는 어휘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습 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 16 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또 신자의 생활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세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관심사: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개 교회에서, 왜 그토록 긴장되 는 일이 많이 있고, 또 화합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흔히 그러한 어려 움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급하게 내뱉는 부주의한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니 라 할지라도, “말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라고 하는 한 옛 속담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 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명령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 안에, 성령님이 먼저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며, 또한 하는 말이 덕을 세우 며 신자들을 연합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기회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한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위한 전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 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적 충만과 함께 받는 기도의 언어와 함께, 인간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은 험담의 유혹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에베 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한 말씀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 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 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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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생해야 한다. 반드시 영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왜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하나님 때문이다.
우주만유, 끝없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만유를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은 또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잠시 생겼다 사라진 다음 하나님 홀로 수백억년 수천억년..., 영원히 혼자 우주만유를 즐기시겠는가?

하나님에겐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그러므로 또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었으며 그 생명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할 수 없었고 원수 사단마귀에게 헌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포기하지 아니하셨고 사랑하는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셨다.

이제 인간은 죄를 벗고 울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영원히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울며 돌아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우주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에게 어찌 상속재산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우주만유를, 1천억 개의 항성을 가진 은하계, 2천억 개의 갤럭시, 끝없이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우주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웅장한 찬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은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해피 뉴이어! 할렐루야!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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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대뜸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영어성경은 'born agai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이 번역한‘거듭’은 중복의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 것을 그냥 둔 채 또다시 거듭하여 더 하는 것입니다. 거듭 나면 목숨이 두 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다시 나지 않으면’, 또는 ‘네가 새로 나지 않으면‘입니다. 처음 것은 없애고, 무효로 하고, 다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아니라 ’다시 남‘, ’새로 남‘입니다.

니고데모가 놀라서 되묻습니다. “제가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납니까? 어머니의 태에 도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은 땅에 속하고 영은 하늘에 속하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이어야 하고, 그래서 너는 영으로 다시 나야 한다.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바람이 불어도 눈에 보이지 않듯이 영으로 다시 나는 것도 그렇단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너도 알듯이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어가던 사람이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듯이 멸망하는 사람이 십자가 위의 독생자를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광야의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죽어가던 죄인들이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영적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거듭남, 아니 ‘다시 남’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시 남’은 바람이 보이지 않듯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성령과 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다시 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과 결심으로, 혹은 노력으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로'는 죄를 씻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성령과 물로 다시 나는 것은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듭, 아니 다시 나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그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을 영으로 다시 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거듭'이 아니고 '다시' 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니고 영의 생명으로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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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는 그 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한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
사람들은 이 굉장한 사람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예수님은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이 산에서 돌아오시지 않자 기다리던 제자들은 밤에 배를 저어 갈릴리바다를 건너려다 풍랑을 만나 고생하였고 그 때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다음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굉장한 사람인 예수님을 찾아다니다 바다 이 편 건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다시 놀란다. “아니. 언제 바다를 건너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먹고 배때기가 부르니 나를 찾는구나.” 하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다 함이 없는 하늘의 떡,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자기 살을 먹으라고? 어렵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여럿이 이해하지 못 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해하지 못 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붙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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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 존중이 오만함과 죄악 선을 는가?

 

  번째 질문 -------------------------------------------

 

 

교만은 심지어  이전에 늘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 문에  번째 라고 어집니다 (두로  교만을 하는 것으로 하여 에스겔 28:14-17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 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함으로 번역  리어와 그리 단어는 마음의 못된 ,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16:18

  말의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 봉이요 만한 마음은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정적인  아니라 정적인  사용에 대해서도 명합니다. 우리들은 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하여  말을 사용할  있습니다.  단어의 정적인 의미와 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 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모들이 그러한 말을 들에게 사용하지 도록  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있습니다. 

 

적절한 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조물에게 두신  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은사에 대해 감사할 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쟁적인 것으로 변질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에서 그는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대로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 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에는 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무나도 하게, 주의하지  람을 사로는데, 냐하면 그것은 타락  육체의 본질이기 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하시는 하나님의 정당  하는 생각이 자리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사람은 그로 하여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 해결할  있다고 생각하도록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는데, 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취되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가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그로 하여, 다른 사람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니다 (시편 10:2-4; 모데전서 1:12, 13). 사회에

  소수의 문화권 에서, 총체적 교만은  차별,  차별, 그리고 편견을   있습니다.

 

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는 교만을 하는 것은 도움이 니다. 다른 사람의  에서  사람을 헐뜯 (시편 101:5), 교만한  (잠언 6:17),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복음 20:25, 26),   찬을 받아들(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심이나 영심 (빌립보서 2:3, 4),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하기를 (베소서 5:21) --- 랄프 해리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감시를  하지 으면, 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속으 기어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하기  교만이 겉으로 란스 나지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전히 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가뜨니다. 때때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소서. 내게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사되습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있는 능력 인가 하는  완전히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을 습니다. 그러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어주신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능합니다.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해서 교만함을 져서는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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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아들이 있었으나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만이 진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주 대놓고 요셉을 편애하여 요셉에게만 멋진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은 또 꿈 이야기를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멀리 가서 양을 치는 아들들이 무사한지 궁금하여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보냅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지나가는 이스마엘 족속 무역상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종이 되어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나중에 맏형 르우벤이 돌아와 보니 구덩이에 요셉이 없습니다. “아이가 없다, 아이가 없어졌다. 어이할꼬?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큰일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야곱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은 꾀를 내었습니다. 염소를 때려죽이고 요셉의 채색옷을 찢어서 그 염소피를 묻혀서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길에서 이 옷을 주웠는데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닌가 보소서.”
야곱이 대성통곡을 합니다. “아이고, 내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혔구나. 요셉아, 요셉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식음을 전폐하고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들을 따라 죽겠다고, 흰 머리를 날리며 음부에 내려가리라고 몇날며칠 밤낮을 새우며 슬피 애곡합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그렇습니다.
아들의 피와 아들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야곱은 까맣게 모르고 속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다 아시면서 속아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통곡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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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
가슴을 찢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십자가에 몸을 찢으신 주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어느 누가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누가 이런 희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제쳐두고 산타클로스 선물에 검댕 묻은 사람들아.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선물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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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은  훈련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는가?

 

 번째 질문 -------------------------------------------

 

우리들은 훈련 절제의 중요성을  가지 면에서 직면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것을 합니다. 둘째로는,  가능하며, 자유분방하고,  이기주의적인 우리 사회의 본질은 바로   것을 부르짖 있는데, 그것은 오직 개인의 훈련 절제를 하여서만이   있는 것입니다.

 보도 , 기독교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영화, 그리고 하게 도덕을 타락하도록  텔레비전의 연속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세상이  어가고 있는가? 라고    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세상이 게 어가고 있는지, 특별 우리들이  있는  세상의 마지  있을 도덕적인 현상에

대해서  일이 일어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은 결국 내면의 훈련  때문에 일어나는 통제할   회로 결됩니다. 디모데후서 3:1-5   이것을 . 말세에  하는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사랑하며, 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모를 하며, 감사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하며, 자고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하는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게 항목들을 하게 스쳐 지나다면, 아마도 당신은 절제하지 못하며 라는 말을 을런지도 릅니다. 

 

 항목 가운데 있는 다른 모든  행동들은 절제함의 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하고 있는 그러한 ()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게 있어야만 합니다. 수님께서는 너희 서로 사랑하면 이로 모든 사람이 너희 제자인줄 리라.” 라고 말씀하습니다 (요한복음 13:35).

물론, 사랑은  가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번째 열매입니다 (아서 5:22, 23). 절제는  항목에서 마지입니다. 그러나 절제는  있는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  덕을 통제합니다. 제함이  사랑은 정이 니다. 과도한 희락 박한 것입니다. 자제함이   함이 됩니다. 균형   참음은 담함이 니다.

자비는 약점이 되며, 양선은 이기적인 것이 니다. 아무런 이유  충성은 맹목적인 미신과 습니다. 단적인 온유는 겁쟁이가 됩니다. 세상은 사랑과 희락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어두워진 마음은 경건한 삶의  자를  있을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할   세상 에서, 절제에 대한 본을 보여주어야만 

니다.

 

타락하고  세상에서는, 절제는 신앙심이  에서부터 완전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 성령의 열매   바로  육체의 일로 기록한 것들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 숭배와 술수와 수를  것과 분쟁 시기와 분냄  것과 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함과 방탕함과  그와  것들 (라디아서 5:19-21) --– , 주님 앞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성령께서 순화하시도록 함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배제어야 합니다.

 

훈련 절제는 성품을 표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사람들에게는 여가와 쾌락 높은 목표를 하는  필요하다는 것을 니다. 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기도, 성경공, 그리고  것들에 대한 명상과 함께 갖어야만 하는 식과 그들이 사하는  사이에 얼마나  균형있는 삶을 져야만 ?

자제는, 편리하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다른 덕에  품목 아닙니다. 그것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인을 확인시주는 표시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지  운데 열하였으며, 그것을 보다도 믿음에 포함시켰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이 것이 너희에게 있어 족한즉 너희 우리   그리도를 알기에 게으  

  자가   하려니와 이런 것이  자는 소경이라  못하고 그의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후서 1:8, 9).

 

 

관심사: 자제심은 훌륭 지도 위한 근본적인 자질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제심에 대해 본이 되어야   아니라, 또한 자제심을 배우고  하도록 은이들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회자가 자제심에 대해 본이 어야할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와  또한 그들이 영적  야하는 사람들에게 자제심을 취시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엄청난 자의 20  이하 은이들은 그들의 리가 들려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본질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인 험을 해서나  성령님의 역사를 해서  자제심을 개발하지 습니다.  느 보다도 늘날 자제심에 대해 본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정적인  주기 위해서는 자제심의 본은 그것을 르치 사람의 생활과 일관 어야만 합니다.  들면, 명히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절제하는  대해 호소를 한다면  과는 상당히 절감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욕설  것이라고 르친다면 그다지 효력  것입니다.

자제심이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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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 구원자가 올 때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길을 열어두셨지요. 그것이 제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오실 때까지는 애꿎은 짐승을 잡아, 그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의 효력으로 잠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지요.

짐승의 희생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참혹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인간은,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나아갔지요.
그것은 인간의 죄는 참혹한 죽음의 대가 지불 없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대속자(代贖者)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듯 하는 참혹한 고통을 당하며 죽으심으로 그 대속자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역사상 인간이 고안해낸 최악의 형틀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려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하시며 죄인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를 믿는 모든 자는, 그 십자가 아래 엎드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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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시급한 문제.......
믿으세요. 믿으면 됩니다.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냥 믿고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입으로 “예수님 내 구주”, 그 이름을 부르세요.

그런데 안 믿어진다고요? 아직 믿고 싶지 않다고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마지막 날에, 죽음이 당신을 덮쳐 캄캄한 무저갱으로 끌어갈 때, 그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세요. 구원자는 그 분밖에 없어요.
당신이 한 평생 하나님 떠나 살고 예수를 거부하였다 해도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소리를 그 분은 들으시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거든요.

그러나 또한 기억하세요.
모든 죽음이 주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부를 만큼 그렇게 여유 있게 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 절박한 순간에 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기억이고 뭐고 즉사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일평생 불안 속에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 주님을 찾겠다는 생각일랑 마시고,
당신의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기 전에, 당신의 시간이 다 하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오늘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주님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죄의 짐, 죽음의 짐을 내려놓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안식과 기쁨과 축복을 누리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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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려면 사람이 되어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려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쪼개 생명을 쏟아내고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여자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되려면 그 방법이어야 했고 생명을 쏟아 내어주고 죽으시려면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요? 과학적이 아니라고요?
그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과학 때문에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도 없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실 길도 없어야 하나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아무 방법 없어 손 놓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능력한 하나님이어야 하나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 나신 날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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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있는 찬송, 미국에서 만났던 찬송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오래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근처 훼어필드 한인교회에서

미국 첫 목회를 시작하면서 교회비품을 점검하는 가운데 기존 한영 찬송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교회에서는 널리 쓰여진 찬송가책,

영어와 한글이 같이 있는 찬송가, 펴보니 대부분은 아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발견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이었습니다.

피아노를 떠듬떠듬 치면서 불러보니까 어린이용 찬송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에 은근히 강한 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참 특이한 가사!

이런 노래, 이런 가사도 있구나,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댠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친구되신 하나님과 초장을 거닌다.... 오! 음!...

미국 캘리포니아의 그 넓은 초장들,

물론 원래 사막지방이니 모든 물을 ​밖에서 끌어오는 것입니다만 어쨌든,

그 푸른 초장들...

그래서

미국이라는 곳에서

한인 교회당에서 ​

그 텅빈 예배당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참 특이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때묻고 교활한 어른에서 순수한 어린이로 변화되는듯한 느낌..

느낌적인 느낌^^

 

 

 

최근 이 노래가 기억났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긴 세월 거의 불러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어? 한국에서도 아주 옛날부터 불렀던 어린이 찬송이었구나?!하는 발견,

그런데 왜 나는 이 노래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아마도, 이 노래를 모르고 있었을까? 아닌가? 나만, 우리만 몰랐나?

특정 교단에서 주로 불렀나? 의문?

암튼 저는 30대 중반에야 알게된 어린이? 찬양^^

 

더 나아가 카톨릭에서도 가사를 바꾸어서

차분한 분위기로

성가곡으로 부르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이트를 찾아보다가 1935년경에 발표된

이 노래로 말미암아

저작권 다툼이 있었구나 하는 것도....

 

그리고 미국 사이트에는 이 노래에 대해

우리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어린 시절 너무 너무 많이 부르신 노래라고 추억을 말하는...

미국 주일학교의 추억에는

잊지 못할 노래라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되신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는 날,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같애....

 

 

그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동요풍

 

 

 

 

My God And I 

 

My God and I go in the field together; 

We walk and talk as good friends should and do; 

We clasp our hands, our voices ring with laughter; 

My God and I walk through the meadow's hue. 

We clasp our hands, our voices ring with laughter; 

My God and I walk through the meadow's hue. 

 

He tells me of the years that went before me 

When heavenly plans were made for me to be; 

When all was but a dream of dim reflection; 

To come to life, earth's verdant glory see. 

When all was but a dream of dim reflection; 

To come to life, earth's verdant glory see. 

 

My God and I will go for aye together, 

We'll walk and talk just as good friends do; 

This earth will pass, and with it common trifles, 

But God and I will go unendingly. 

This earth will pass, and with it common trifles, 

But God and I will go unendingly.

 

 

발췌: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panem


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거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3.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건전한가 불건전한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세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지난 번 칼럼 글 아래 남긴 한 독자님의 질문, 1.말씀의 잣대(canon)하셨는데 로마서 2장 14,15절에 나오는 양심의 송사와의 관계와 히브리서 13장 18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있는 선한양심"과 연관지어 설명하여 주실수 있는지요?)의 답으로도 가할 듯,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사람 속의 양심의 소리가 진정한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양심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이렇게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을 심어두셨고 그 선한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외형적 성도가 아닌 내면적 참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상태가 거듭난 성도란 것이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인간(성도)에게 나타나는 표현(행동)에 주된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다시 살아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내적 신앙인격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깨끗함에만 치우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문제아(兒)로 대두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 7)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주님께서 실망치 않도록 주께 마음을 내어드리는 자가 성도요, 이런 사람은 비록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잠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고의적인 죄나 계속되는 자범죄를 지을 수가 없다. (요한 1서 5: 18절 참조)


4. 성령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해석이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만 이해하고 있어도(원어나 영어를 알지 못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충분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기록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이 성경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자국어로 된 번역문만 보는 것보다는 원어를 배울 수 있다면 이해력을 돕는데 편리하고, 더욱 명쾌한 해석을 답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 교사님들은 원문을 읽거나 배울 필요까지 없다고 하나 적어도 원문에서 가장 근사치로 번역되었다는 권위 있는 영어 성경에서 그 뜻을 찾아보는 정도라도 자신을 계발시킨다면 주님의 말씀을 억지해석하지 않고 자신에게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도저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고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난해한 단어를 좀 더 이해하기원하는 분이라면, 우리나라 정통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를 구하여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전제로, 별이가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마음을 지녔기에, 모국어 번역문만으로는 애매모호한 단어나 댓글은 영어 성경, 혹은 원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하는 것이다.

1) 성령 충만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 전인격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우리 영혼에 충만케 채워주기도 하신다" .”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하시며 의로 교육하시고 선한길 의의길로 인도하시기를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
"이라고 한다. 
 
2) “성령을 소멸치 말며(to; pneu'ma mh; sbevnnute)”(살전 5: 19) 여기에서 “소멸”이란 단어는 원어가 주고자 하는 뜻이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소멸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스벤누테( sbevnnute)”, 번역하면, “태우다.” “불사르다” “ 등불을 끄다.(put out, quench)”그런 뜻이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한자어 번역문 “태워서 없어지다, 사라지다”의 뜻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영어만 보더라도 (KJV) “Quench not the Spirit” (살전 5: 19)이다. Quench의 사전적 의미는 “소멸시키다” 이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끄다. 가열된 것을 물로 식히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러니까, 적용하자면, “성령 충만을 불같은 성령, 불의 혀” 이런 강렬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성령의 활동하심을 제지하거나 거역(불순종)하게 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잠잠히, 탄식하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서는 성령의 불같이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로 번역을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 성령 소멸'은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버리신다라고 하는 뜻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성령의 불을 끈다. " 혹은 "성령의 역사를 억누르게 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 본다.
성령님에 대한 인격적인 의미로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인류에게 있어 불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했기에 그만큼 관리 보호가 필요 했을것이라고 보며, 불(능력을 의미)이 꺼지지 않도록 늘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재론하자면, 성령의 소멸이라고 하여서, 한자어가 주는 개념의 완전히 떠나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정확히 이해가 된 것이다. 만약, “소멸”이란 한자의 뜻대로라면, 성경 전체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야 하고 끊겨져 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한번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임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친다 라고 하는 것이다.(엡 1: 13- 14 ) 한 독자님이 제기하신 "성령 소멸"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지난 칼럼의 댓글에 관한 답변,

그리고 또 다른 독자님과 지난 칼럼 글 아래 댓글로 남기신 질문을, 칼럼 글로 다루겠다는 약속을 드렸기에, 오늘은 그 두 분의 질문을 근거로 생각해본 내용이긴 하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리해본 것이다. 짧은 지면에 원하시는 만큼의 만족한 답변이 소개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기도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여 최선의 답변을 드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 정성 하나만으로 은혜점수를 후하게 주셨으면 좋겠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우리 심령에 두루 비치시기를 기도해 본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6-2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20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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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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