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거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3.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건전한가 불건전한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세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지난 번 칼럼 글 아래 남긴 한 독자님의 질문, 1.말씀의 잣대(canon)하셨는데 로마서 2장 14,15절에 나오는 양심의 송사와의 관계와 히브리서 13장 18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있는 선한양심"과 연관지어 설명하여 주실수 있는지요?)의 답으로도 가할 듯,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사람 속의 양심의 소리가 진정한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양심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이렇게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을 심어두셨고 그 선한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외형적 성도가 아닌 내면적 참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상태가 거듭난 성도란 것이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인간(성도)에게 나타나는 표현(행동)에 주된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다시 살아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내적 신앙인격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깨끗함에만 치우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문제아(兒)로 대두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 7)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주님께서 실망치 않도록 주께 마음을 내어드리는 자가 성도요, 이런 사람은 비록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잠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고의적인 죄나 계속되는 자범죄를 지을 수가 없다. (요한 1서 5: 18절 참조)


4. 성령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해석이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만 이해하고 있어도(원어나 영어를 알지 못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충분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기록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이 성경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자국어로 된 번역문만 보는 것보다는 원어를 배울 수 있다면 이해력을 돕는데 편리하고, 더욱 명쾌한 해석을 답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 교사님들은 원문을 읽거나 배울 필요까지 없다고 하나 적어도 원문에서 가장 근사치로 번역되었다는 권위 있는 영어 성경에서 그 뜻을 찾아보는 정도라도 자신을 계발시킨다면 주님의 말씀을 억지해석하지 않고 자신에게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도저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고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난해한 단어를 좀 더 이해하기원하는 분이라면, 우리나라 정통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를 구하여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전제로, 별이가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마음을 지녔기에, 모국어 번역문만으로는 애매모호한 단어나 댓글은 영어 성경, 혹은 원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하는 것이다.

1) 성령 충만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 전인격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우리 영혼에 충만케 채워주기도 하신다" .”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하시며 의로 교육하시고 선한길 의의길로 인도하시기를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
"이라고 한다. 
 
2) “성령을 소멸치 말며(to; pneu'ma mh; sbevnnute)”(살전 5: 19) 여기에서 “소멸”이란 단어는 원어가 주고자 하는 뜻이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소멸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스벤누테( sbevnnute)”, 번역하면, “태우다.” “불사르다” “ 등불을 끄다.(put out, quench)”그런 뜻이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한자어 번역문 “태워서 없어지다, 사라지다”의 뜻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영어만 보더라도 (KJV) “Quench not the Spirit” (살전 5: 19)이다. Quench의 사전적 의미는 “소멸시키다” 이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끄다. 가열된 것을 물로 식히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러니까, 적용하자면, “성령 충만을 불같은 성령, 불의 혀” 이런 강렬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성령의 활동하심을 제지하거나 거역(불순종)하게 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잠잠히, 탄식하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서는 성령의 불같이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로 번역을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 성령 소멸'은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버리신다라고 하는 뜻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성령의 불을 끈다. " 혹은 "성령의 역사를 억누르게 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 본다.
성령님에 대한 인격적인 의미로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인류에게 있어 불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했기에 그만큼 관리 보호가 필요 했을것이라고 보며, 불(능력을 의미)이 꺼지지 않도록 늘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재론하자면, 성령의 소멸이라고 하여서, 한자어가 주는 개념의 완전히 떠나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정확히 이해가 된 것이다. 만약, “소멸”이란 한자의 뜻대로라면, 성경 전체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야 하고 끊겨져 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한번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임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친다 라고 하는 것이다.(엡 1: 13- 14 ) 한 독자님이 제기하신 "성령 소멸"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지난 칼럼의 댓글에 관한 답변,

그리고 또 다른 독자님과 지난 칼럼 글 아래 댓글로 남기신 질문을, 칼럼 글로 다루겠다는 약속을 드렸기에, 오늘은 그 두 분의 질문을 근거로 생각해본 내용이긴 하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리해본 것이다. 짧은 지면에 원하시는 만큼의 만족한 답변이 소개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기도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여 최선의 답변을 드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 정성 하나만으로 은혜점수를 후하게 주셨으면 좋겠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우리 심령에 두루 비치시기를 기도해 본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6-2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20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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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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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말하는  기독교 신자 중에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 있을?

 

 번째 질문 -------------------------------------------

 

진실을 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제일의 성경적 리입니다. 현대 사회의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결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에서 들의 정직함에 대해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과정의 세계는 정직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나   있기 문에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도록,  합의  주로 문서로 성해  것을 하고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녀들의 말과 약속이,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하십니다.

 

진리가 ? 2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늘날에도 문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정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인은 그러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갖을 것을 구합니다.

진실은 입증   있는 정한 사실일? 바르 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진실은   믿지 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황마다 다른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하고, "사랑 에서" 그것을 어해야 합니다 (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음성 문에  사람들이 수에 빠져  르침 따라니다. 백하게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조하신 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도로서 우리를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율법 책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적일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입니다. , , 관계,  ,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공공연한 결의가 정직과 신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함과 진리의 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라도

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  습관이 비밀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 으로는 하나님께 신하는 것처럼 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직하게 말하는  말하는 사람에게    에라도 스스 진실함을 합니다. 약속  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것은 정직과 진실에 대한 (名望)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 될지도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님은 나다나엘  속에 사한 것이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더라도 으로만 정직해 보일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있는 정직함  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신자들을 대할   정직하게 행하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 그것을 합니다. 너희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아니하? 너희  행하고 속이는.  너희 제로다.” (고린도전서 6:7,8).

 

마가복음 10:19  기록된  청년에게 하신 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계명을 아나니 인하지 말라,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증거 하지 말라속여 하지 말라,  모를 공경하라 였느니라.”  5, 6, 7, 8, 그리고 9 계명은 모두 “ 하지 말라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관심사: 

 

어떤 선의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이 약성경에서  말했 것이 나중에  결과를  주었던 사람에 대한  지적합니다. 이러한 부터 그들은  말하는 것이 용되 예외의  있다고 결론을 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받침해주 로서 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인용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하는 사가 찾아와서  고소된 사람이나 가족들에 대해서 물을  다른 사람의 생명 호하는 것이  일이 닐까? 성경은 계명에 대해서 외의 경우를  주지  있습니다.

 

짓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말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것을 북돋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못에 대해 주어 하는 형벌 피하는 것은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 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 황윤리(situational ethics) 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령님을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사람의 (名望)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간적인 방법 사용합니다. 적인 형상이 령님에 인도함을 받은 상으로 표현될  진실은 태롭 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하지 ,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 일이 없노 라고 증거   있어야 합니.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바른 진리 있을   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1960  말에 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 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 처한 개인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 스스로의 직관을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  그대로 따라야 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 절대적인 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 따라서는   없었다는 것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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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털로 손등을 덮고 염소고기를 손에 들고 떨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갔어요.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는 게 들통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옷 냄새를 맡아보고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요.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니 에서로구나.” 그리고 염소고기를 먹고 야곱을 축복하였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하나님 속이기예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어린양의 그 피를 들고 두려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속아주실 거예요.
속아주시기로 작정하고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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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안 보입니다. 전기(電氣)도 안 보이고, 자력(磁力)도 안 보이고, 전파도 안 보이고, 힘, 에너지, 중력, 인력(引力)도 안 보입니다. 우리는 그 안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명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 보이는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바이러스로부터 모든 동식물, 거대한 고래까지 생명으로 삽니다. 이 지구, 온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전기작용? 물리학적 현상? 화학작용?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낼 수 없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 한 조각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 또한 영적세계에 속한 것일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이 무엇일까, 내가 죽으면 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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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도 없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일평생 매여 종노릇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을 생명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몸을 깨뜨려 흘려주신 영원한 새 생명으로 바꾸는 것,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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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글롯사와 디알렉토스)

(행 2:1-5) 오순절 날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120문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던(창11:1) 인류의 언어 체계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구음의 언어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빼앗기고 흐트러지게 됩니다.(창11:7-8) 이렇게 빼앗기고 흐트러졌던 인류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회복되는 때라. 요엘2:28에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이 있겠다 예언하신 요엘2장의 말씀의 성취가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행2장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행2장의 방언을 영언이라 부름니다.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던 (창11:1) 시점에서 (창2:7)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창11:1)의 언어가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시던 동일한 하늘언어였음이 확인됩니다. 이로써 곧 (행2:1-5)방언을 곧 영언(하늘언어)이라 추리해 낼 수있는 근거가 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인류의 하나였던 언어 체계가 행2장의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언어, 영언이 회복되는 사건이라 주장한다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는지요?

행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방언의 원어는 글롯사 즉 ‘혀’ tongue, 언어 language라는 의미로 방언은 혀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발생하는 언어라는 의미 입니다.

6 절에는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여기에서 “듣고 소동하여” ‘듣다’의 원어의 의미는 디알렉토스, 들려 오는데로 들었다 하는 의미 입니다. 즉 혀에서 글랏사로 말한 방언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듣는이의 귀에 각각 다른 언어 디알렉토스로 들렸다는 의미 입니다.

글롯사와 디알렉토스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글롯사)
1. 방언을 본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을 외국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을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던 하늘 언어(영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알렉스토)
A. 혀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로 들렸다.
B.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 또는 하늘 언어로 들렸다

다음과 같은 6가지 형태로 방언으로 말하고 들릴 수가 있다

1A: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본국어로 들렸다
1B: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2A: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외국어로 들렸다.
2B: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3A: 영언 방언을 말 한대로 영언으로 들렸다.
3B: 영언 방언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본국어로 들렸다.

120문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국어와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오순절 날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여 온 디아스포라와 현장에 있던 본토인들에게 각각 자기언어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에는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 와 얼굴을 보이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올라 온 사람들을 나라별로 세어보니 대략 17개국의 사람들과 본토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7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들에게 각각 자기나라 말로 방언이 들렸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나라 외국어로 들렸으므로 오순절의 방언은 순전히 외국어 언어였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다만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들리는 각 나라의 방언이었다면 디알렉토스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

 

 

 

 

 

 

 

3. 죄와 심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와 심판을 두려워한다. 죽어서 지옥 갈까봐 무서워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두신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죄와 심판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 인간의 죄를 다스릴 절대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절대자가 없다면 죄나 벌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둘째, 그 절대자는 인간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자면 절대자는 창조주이어야 한다. 인간을 만들고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소유권이나 통치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도 아니면서 인간을 심판하고 지옥에 보낸다면 그것은 부당한 횡포일 것이다.
“네가 뭔데? 네가 내게 무슨 권리가 있는데? 힘세면 다냐? 너 깡패냐?” 이렇게 되겠다.

셋째, 심판이나 처벌을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이성과 사리판단 능력을 부여하고 죄를 짓지 아니해야 할 이유를 알게 하고, 임무를 부여하고, 명령을 하고.....

넷째, 그 절대자 자신이 죄가 없고 거룩해야 한다. 자신이 거룩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더러 목욕하라 하는 거 보았는가? “아가, 우리 함께 뒹굴자꾸나...”

다섯째, 절대자가 인간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고 또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관심이 없고 함께 할 생각이 없다면 인간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더러워지든지, 죽든지 말든지, 냄새가 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섯째, 절대자는 전지전능하여 모든 인간의 심령과 폐부를 감찰하고 모든 행위와 죄를 알고, 그 죄인을 빠짐없이 체포, 구금, 재판, 처벌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절대자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수십억 인구 속에서 죄를 짓고 시치미를 뚝 떼면 속아서 어물쩍 넘어갈 테고, 혀를 날름 내밀고 도망하는 개구쟁이를 못 따라 잡는 꼬부랑 할머니 꼴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그런데 세상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두려워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들, 우상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신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맡겨버리니 참 이상한 일이다.
부처? 두려워 마라, 그는 사람이다. 시바신, 크리슈나신? 무서워 마라. 그것들은 세상신, 우상들일 뿐이다. 오직 참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불에 멸하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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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 ‘태초’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히브리어로 ‘브 레싯’, 헬라어로 ‘엔 아르케’
한글로 ‘태초에’, ‘아주 처음에’라고 번역된 게 좀 그렇다.
영어성경은 “In the beginning', ‘시작’으로 번역하고 있다.
‘태초’와 ‘시작’에는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태초’ 보다는 ‘시작’이 좀 더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속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우주공간 여기저기의 시간이 다르다. 우주에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웜홀(worm hole)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는 그런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의 전제조건이며 바탕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도 없고 공간이 없으면 시간도 성립되지 않으며 존재도 없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도 피조물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이므로 시간과 공간이 피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빅뱅이론을 생각해보라.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면 우주만유가 한 점에서 폭발하는 빅뱅이 가능할까?
빅뱅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이어야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면 한 점에서 우주만유가 압축되어 있다가 폭발하는 빅뱅은 불가능하다.
빅뱅이란 시간과 공간이 처음으로 생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모든 물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과 존재를 시작시키신 것이다.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있던 시간과 공간일 것이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피조물일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때에 모든 것이 시작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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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내가 제일 싫은 말은 “기독교가 종교”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종교라면 원자력발전소 건설하던 놈이 목사가 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미쳤다고 기독교를 믿고 목사까지 되냐?
평생을 믿었는데 죽고 보니 하나님도 없고 예수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다면 이 보다 억울하고 분하고 기가 막히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실컷 마시고 즐기고 놀기나 할 걸, 속았다고, 잘못 살았다고 가슴을 쳐봐야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하기야 죽고 난 다음에야 칠 가슴도 없겠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사실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고 우리를 만드셨다. 믿고 안 믿고 우리에게 선택권 없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살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영원히 죽을 뿐이다.
믿지 않는 자는 진노의 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 주신 생명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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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을 보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히브리어 원어는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우리’라고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어로 “His own image”, 단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셨다가 단수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씨하나 안 빼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다 기록해야 했던 모세나, 또 성경을 필사했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라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 것은 여기 뿐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2절, 11장 7절, 이사야서 6장 8절에서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수이면서도 복수이시고 복수이시면서도 단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거듭거듭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형상'을 “our imag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모양대로”, 영어성경은 '모양'을 ‘our like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도 눈, 코, 입, 귀가 있고, 수염이 나고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했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 학자들 간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품을 말한다, 그 성품을 말한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엄을 말한다, 영원불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등등........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전혀 낯설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실 때마다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달랐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우리가 아담을 만들고’입니다. 단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수 ‘그’로 되어 있음)
왜 금방 단수로 말씀하셨다가 금방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지금은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을 만드시지만 그 아담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갈비뼈로 아담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제야 비로소 아, 여자를 안 만들었네, 생각이 나서 하와가 필요하겠다 싶으셔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그 속에 하와를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끄집어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셔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까지도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 속에는 이미 후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수가 늘어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를 지으시지만 그는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면서 여럿, 즉 한 분이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형상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하나 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혼자 군림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신 하나님, 성령님 없으신 독불장군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곧 세 분이면서 한 분,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오해와 잘못된 교리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 아닌 신(神)은 아무 신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독불장군 같은 인간도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독처하는 것이 선하지 못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여자가 남자를 밟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저 잘 났다고 혼자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짓지만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 같이 그가 그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제자삼아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가 되어 자기 혼자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분열시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저 여자입니다. 아닙니다, 뱀입니다. 뱀이 그랬습니다.”
혼자가 되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폭력과 추악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마귀의 형상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힘써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산상수훈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면 뭣 하러 이렇게 가르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얼마나 이 말씀을 하시는지 보십시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가서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을 닮는 것은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골고루 똑같이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리시는 속없는 하나님,
할 줄 아는 게 사랑밖에 없어서 사랑밖에는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찾아오셔서 원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하나님을 닮기 위해, 그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축복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누리도록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이러한 축복을 회복할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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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한발 코로나 팬데믹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침체와 실업증가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우리의 삶과 생명은 앞날을 알 수 없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오고 이 질병이 퇴치될 수 있을지, 이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수 있을지, 언제 끝날지, 우리의 생활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피하며 이 죽음의 코로나를 피해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과연 이 세상을, 인류를 코로나로부터 구해낼 구세주는 없는 것일까요?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강력하여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로마제국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가죽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로 나아와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표로 세례를 받아야 메시아가 로마를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때 거기에 속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대로 로마를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군병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외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것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였다는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누르고 결박한 것은 로마의 통치와 압제가 아니라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어갈 죄와 사망의 족쇄와 사슬이었다는 것도 그들은 깨닫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당신도 이천년 전 로마통치에 압박 받던 그들처럼 코로나 팬데믹에 짓눌려 있습니까? 당신의 관심은 이 팬데믹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까? 코로나 팬데믹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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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내준 감동의 글


독일 대학에 한 노교수님이 계셨답니다.


이분은 연세가 드신 라틴어 교수님이셨는데, 그 교수님께서 구사하는 언어가 10개는 족히 되신다는 것입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스페인어에다 몇 개의 동양언어 까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교수님의 어학 실력이었지만 그 분이 유창한 히브리어까지 구사하신다는 사실에는, 신학을 전공하는 목사님 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된 기회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히브리어까지 하시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교수님께서는 수십년 전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교수님께서 갓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때 기숙사에서 만난 한 친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친구는 유대인 이었답니다. 


그 친구랑 같은 방을 쓰고 같이 먹고, 같이 다니고 물론 공부도 늘 같이 했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큰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공부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사람이 피곤하고 지칠 때 쯤 되면, 늘 무슨 이상한 시 같은 것을 소리높여 외우는데 그 알 수 없는 언어가 알고보니 히브리어 였다는 겁니다.  


교수님이 궁금해서 친구에게 그것이 무슨 시냐고 물었더니, 이 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시편 23편이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궁금해서 왜 피곤해지고 집중이 안될 때 그 시를 외우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이 시를 외우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이 느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며 정신도 맑아지고 자신이 알 수 없는 힘이 밀려 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교수님도 그 날부터 그 친구에게 배워 시편 23편을 같이 외우기 시작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친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해 주었답니다. 


그렇게 1년, 2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두 친구는, 공부하다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소리높여 외웠답니다. 


이때 나찌의 핍박이 점점 심해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만 했던 친구에게서, 어느날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나찌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잡아가는데 자신도 잡혀서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고...


교수님은 급히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은신처로 달렸습니다. 


친구의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려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달려갔는데 이미 친구를 태운 차가 마을에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트럭을 뒤따라가면서 친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갑자기 트럭 옆으로 친 포장을 들치고 한 사람이 고개를 내 밀었는데 그가 바로 친구더라는 것입니다. 


눈물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인 친구의 얼굴은, 놀랍게도 싱긋이 웃고 있었답니다. 그 때 친구가 갑자기 소리높여 외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친구가 미소지으며 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시편 23편 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그 시절, 아무 걱정없던 그 때와 같이 평온한 얼굴에 미소 띤 모습으로, 친구는 시편을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시편을 외우는 친구를 보면서 교수님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 지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수님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친구의 얼굴을 보며 같이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시편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새 차는 모통이를 돌아서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친구를 본 마지막 날이었고 마지막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패색은 더 짙어갔고 나찌는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도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러시아의 전장에서 나찌가 패전하여 포로로 잡혀서 총살을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대열에 끼여 걸으면서, 젊은 독일군 포로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수님의 머릿속에 갑자기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웃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그 친구처럼, 나도 담담하게 죽음으로 맞이하자." 


어느새 형장에 도착을 하였고 동료들이 하나 둘씩 총알에 쓰러지고, 드디어 교수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교수님은 형집행관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할 말인지 해보라는 허락을 받고 교수님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친구가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도 환한 얼굴로 외우던 시편 23편을 자신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순간 왠지 나도 알 수 없는 힘이 밀려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을 겨눈 총구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장을 지키고 있던 

연합군의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같이 시편 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히브리어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연합군 장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장교는 곧 바로 교수님을 풀어주라고 명령했고 사형중지 서류에 싸인을 했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장교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었다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라고 하고는 자기를 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때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형장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그 마음 때문" 이였답니다. 


자신도 놀랐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주셨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또한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며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지므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2020년 7월 16일, NASA는 태양의 극지방을 탐사하는 궤도 탐사선 '솔라 오비터'(Solar Orbiter)가 인류 역사상 태양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2020년 5월 말 솔라 오비터가 태양과 지구의 거리 1억 5천만 km의 절반 가령 거리인 약 7,700만 km 거리에 근접해 비행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태양 표면에서 수많은 작은 태양폭발(solar flares)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나 밝은 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점들이 작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한 도(道)나 미국의 한 카운티(County) 만큼 큽니다. 연구진들은 이 작은 규모의 태양폭발 현상에 '캠프파이어', ‘나노 플레어’(nanoflares)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태양표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이러한 작은 폭발들은 태양의 외부 대기나 코로나를 가열시켜 약 6000도의 주변의 태양 표면보다 300 배나 더 높은 수천 만도의 온도로 매우 밝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태양 표면에서 또다시 수많은 작은 폭발들이 불꽃놀이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수소를 핵융합하여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크기가 지구의 130만 배에 달하고 질량이 30만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소폭탄인 셈입니다. (태양이 공 크기라면 목성은 콩만 하고 지구는 좁쌀만 합니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나타나듯이 태양은 정적이지 않으며 매우 격렬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내부는 거대한 수소핵융합반응으로 소용돌이치며 표면에서 또 수없는 작은 폭발들이 일어나고 거대한 플레어와 흑점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 태양이 수십억 년 동안 지구에 빛과 에너지를 공급하며 생명의 근원이요 어머니의 젖줄이 되어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십억 년 동안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래식 화약 폭탄이나 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핵폭탄, 그리고 수소폭탄은 한꺼번에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모든 것을 날려버립니다. 속도조절이 안 됩니다. 그런데 거대한 수소 덩어리인 태양에서는 수소가 한꺼번에 폭발하지 않고 수십억 년을 두고 조금씩 수소핵융합반응이 일어나며 헬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장작 같은 땔감이나 석탄, 기름 같은 것이, 더구나 화약같은 것이 스스로 타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정한 속도로 타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꺼번에 폭발하거나 화르르 타오른 다음 사그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은 어째서 한꺼번에 폭발해버리거나 사그라지지 않고 수십억 년을 한결같이 활동해 오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태양의 활동이 점점 왕성하게 일어나는 도중이거나 아니면 점점 사그라지는 도중이었다면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생대나 중생대, 신생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구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태양이 뜨거워지는 중이거나 식어가는 중이라면 우리가 마음놓고 살아갈 수나 있을까요?

변함없이 활동하는 태양,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고, 그렇게 명하셨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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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애가 1:1-9
제   목: 눈물의 선지자를 주소서.
          
슬프다 이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애가1:1) How doth the sit solitary, that was full of people! how is she become as a widow! she that was great among the nations, and princess among the provinces, how is she become tributary! (Lamentations1:1)

이번주간은 6.25전쟁 70주년 맞은 주간이었습니다.

지난번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알링톤 국립묘지를 간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6.25때 한국으로 날아와 꽃다운 나이에 우리 민족을 위하여 전사한 수많은 병사들의 묘입니다.

그곳에는 이름도 찾을 수 없어‘무명용사의 묘’라고 만 적혀있는 탑도 있습니다. 그리고 참전 기념비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라를 위하여 전혀 만나본 적도 없는 백성들을 위하여 우리는 부름을 받았노라.’(We Serre for people we have never met and countries we have never visited)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에 와서 전사했습니다.

이런 비문을 읽으며, 대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묘지들을 바라보면서 당신들이 이렇게 죽었기에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고백하면서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동족끼리 피를 흘리며 전쟁한 6.25.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치되어 있는 곳이 남북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에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회복되었듯이 우리 민족에게도 복음통일이 오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미국에는 곳곳에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기념탑이 있습니다.
우리지역에 부조형식의 조형물로 된 탑에는 미국의 전사자 수와 피해자 명단이 빼곡이 적혀 있습니다.

6.25때 한국군과 유엔에서 죽은 사람과 부상자가 776,360명이고.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자와 실종자가 990,960명입니다. 

약 2백만명이 죽거나 부상자가 되었고,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가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가 우리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통일을 말할 때도 복음통일 이란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통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내나라 내 조국이 있음을 무엇보다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용사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암울한 조국의 앞날을 바라보면서, 노구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주저앉아 슬피 울고 있는 예레미야의 애가는,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와야 합니다. 

지금도 끝이 나지 않은 전쟁의 휴전 속에서, 북한에서는 수없이 미사일을 쏟고 있으며, 언제 핵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지구상에 가장 전쟁의 위험이 높은 곳이 우리나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마설마 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와 경제라고 생각합니다. 
안보와 경제는 나라를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1) 세상은 경제의 논리로 움직여집니다.
    
(2) 안보가 무너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경제와 안보는 여, 야가 따로 없고, 보수 진보가 따로 없습니다. 

  나라가 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기업의 번영도, 신앙의 자유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위해 어느 때 보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수난사를 재현해 놓은
“야드바셈”이란 박물관이 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막상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답니다. 

눈물없이 관람 할 수 없을 만큼, 유대인이 당했던 지난 역사의 수난사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전시관 맨 끝에 가면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용서는 해 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라는 글입니다. 

유대인들은 히틀러에게 6백만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은 그 후 6백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으면서 눈물로 민족의 혼을 간직하며, 그리고 후손들에게“그들을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역사를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본국에는 유대인이 610만 밖에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민족정신은 상상을 초월 합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수입의 몇%를 본국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변의 300대 1의 아랍국가들 속에 둘려 싸여 있지만, 감히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민족정신입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도 다음세대에게 유대인들처럼 민족의 혼을 심어 줘야 하는데, 역사를 왜곡하며, 6.25노래 가사도 변경시켰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레미야 애가라는 책은, 슬픈 노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에 함락되면서 눈물로 고백하는 5번의 슬픈 노래를 지었습니다. 

내용은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한 죄악을 회개하고, 또한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가운데, 다시 회복될 날을 기대하는 소망의 노래입니다.

1. 예레미야는 나라 잃은 슬픔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3절)

1) 슬프다 이 성이여. (1절)

슬프다는 히브리어 원문은‘에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리나라의 ‘아이고’와 같은 말로 사용하며,‘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란 비극적인 상황을 뜻하는 언어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장례식에서 조문을 낭독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예레미야의 심정은 마치 초상을 당한 상주의 비탄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처럼 멸망하게된 비참한 현실을 강하게 전달함으로 백성들로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도록 했습니다.

1절에 전에는 이란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나라가 흥할 때는 사람도 많았고, 열국 중에 큰 자였고, 공주같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과부같고, 이제는 강제노동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나라를 잃은 슬픈 조국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백성들이 잡혀가고, 유다왕 여호야긴 까지도 사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나라가 망하고 나니, 그토록 절친했던 이웃 나라도, 많았던 친구도 떠나고, 돌아보는 자가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당시 가장 믿은 동맹국이었던 애굽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동맹을 맺은 에돔족속은 오히려 유다 성읍을 약탈을 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리에 주저앉자 처절하게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힘이 있을 때는 주변국들이 모두 친구인줄 알았는데, 나라가 망하고 빼앗기고 나니 모두가 등을 돌렸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될 때 인사하는 사람도 많고 찾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당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났을 때, 내 곁에 남은 친구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망하고 나니 친구도 떠나고, 이웃도 떠나고, 자기 형제도 외면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망하고 추락할 때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 생각납니까?

나라도 국력이 있어야 힘이 있고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내 조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개인의 성공도, 가정의 행복도, 기업의 발전도 나라가 없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동족끼리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민족은 다시 회복 할 수 없는 최악의 비극이 됩니다, 반면에, 일본, 중국, 러시아 주변국들은 대박이 터지는 것이 된다는 글을 보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대처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국민의 상처가 치유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남남갈등을 치유하고 복음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는 날,세계민족들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거리에 주저앉아 처절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오길 축복합니다.  

2) 또한, 사랑하던 자가 원수가 되었다는 슬픈 탄식입니다.(2절)

이렇게 슬퍼하고 있지만 누구도 위로 자는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였습니다.(2절)

사랑한다고 하던 자가 오히려 원수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힘의 원리, 쩐의 원리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나라를 잃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관을 분명히 하고 애국심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주의가 되면 종교자유가 없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집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존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애국심이란 자기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입니다. 
이 땅을 지켜내려고 하는 마음이 애국심입니다.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는 조국을 사랑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 시대에 조국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라가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안보 경제 국방이 튼튼해야 합니다.

2. 예레미야는 예배가 무너진 슬픔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4-6절)

1) 제사장들의 탄식을 보세요.(4절)

왜 제사장들이 탄식을 합니까? 

거룩한 성일이 되어도 성전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3차 침공으로 솔로몬 성전과 제단은 불에 타서 파괴되어 없어졌습니다, (왕하25:9) 

유다백성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으니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절기를 지키려고 나가는 사람이 없는 비통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주일이면 예배드리러 오는 곳인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절기를 지키러 나오는 자들도 없습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시온의 도로가 슬퍼한다는 말은,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과 절기가 되면 순례객들로 항상 붐비던 곳이 시온의 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성문들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를 통해 예배의 문이 닫히는 것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국경이 막히고, 하늘길이 막히고, 교회 문이 닫혔습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줄 몰랐다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마음껏 기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이렇게 복된 줄 막히고 나니 알았답니다. 

거룩한 성일이 되어도 성전 문이 닫혀있고, 제사 할 곳이 없는 제사장들은 탄식을 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딸 시온의 딸 영광이 떠나감이여.... 
모세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광과 축복을 이제는 모두 다 빼앗겨 버리고 수치만 당한다고 한탄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음으로..(1:5)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함으로.....(8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므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하였으니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 대적에게 패 할 것이라 했습니다.(레26:14~17. 신28:36, 63~68)

하나님의 언약과 규례와 법도 계명을 중시 여겨야 합니다.

WCC, 다원종교, 동성애, 이단, 영적간음, 우상숭배 등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이 없어졌습니다.
미사일 핵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두려울 것이 없고, 죄가 부끄러워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수단 방법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아닌 맘몬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당이 문 닫힌 것에 눈물 흘리며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가고 싶어 울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맘껏 기도하고 찬양하고 싶어 몸서리치는 성도들의 모임이 부활돼야 합니다. (선교와 구제)

이것이 예레미아 애가입니다.  
마음껏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맘껏 찬양과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 얼마나 축복인줄 아십니까?

지금도 북한에는 성경책을 소지하지만 하고 있어도 큰 일 납니다. 
제2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이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지하교회서 예배드리다가 잡혀서 감옥에 가고, 처형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신앙 자유가 있음을 감사하시길 축복합니다. 

2) 포로가 되니 지도자들은 백성을 버리고 힘없이 달아났습니다.(6절)
  왜 지도자들이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힘없이 달아났을까요? 

나라가 포로가 되어도 싸울 힘도 없고 막을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싸울 힘도 있어야 하고 지킬 힘도 있어야 합니다. 

사실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힘(면역)이 있으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암 세포가 떠돌아다녀도 건강하고 면역이 있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요즘 이단들을 무서워 할 것이 아니고, 내 교회가 교육과 훈련으로 
건강하면 빠지지 않습니다.

육체도 힘이 있어야 건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경제도 힘이 있어야 하고, 국력도 힘이 있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협상이 안 됩니다. 대화도 안 됩니다. 굴종입니다. 

북한이 왜 핵을 목숨 걸고 집착하고 있습니까? 
힘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탈 원전을 하고 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의 자원은 사람과 기술입니다. 

우리는 경쟁력 있는 사람을 잘 키워야 합니다.
세계에 가장 뛰어난 원전기술은 앞으로 1000조의 가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다시 우리민족은, 두 기둥 안보와 경제로 국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버트랜드 러셀은 인간의 힘을 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하나는 칼을 상징하는 ‘물리적인 힘’ 이 있고, 
(2) 또 하나는 돈을 상징하는 ‘경제적인 힘’이있고, 
(3) 그 다음은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3가지의 힘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힘을 균형있게 유지하고 지혜롭게 분별하는 제 3의 힘이 있는데. 그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다윗도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시18:1)  모든 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어, 신앙도 일어서고, 가정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길 축복합니다.

3.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9절. 11절하)

1) 지금은 나라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나의 환란을 감찰 하소서. (9절 하),
나는 비천 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11절 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애절하게 눈물로 호소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위기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의 가장 큰 무기는 눈물입니다. 
울면 다 해결됩니다. 배고파도 울고, 아파도 울고, 괴로워도 웁니다. 

아이가 울면 엄마는 아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1) 우리도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합니다. 

눈물은 진실을 말합니다. 진실한 감정이 눈물로 나타납니다. 
슬플 때도 울고, 지칠 때도 울고, 그리울 때도 울고, 외로울 때도 울고, 기쁠 때도 웁니다. 

(2) 눈물은 거룩한 전염을 시킵니다.

눈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감동을 전합니다. 
눈물 자체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메마를 때 삶이 삭막해 집니다. 

(3) 하나님도 눈물을 보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병들어 살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홀로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히스기야에게 15년의 생명을 연장해 준다고 알려주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20:5)

진실한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확진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속에 살고, 가족을 잃은 이들은 슬픔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의 광선이 입하시길, 하나님의 위로 기원합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하시길 간구합니다.

6.25 사변 70주년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해방되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로 하루빨리 완전히 복음통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기도의 뜨거운 눈물이 필요합니다. 

민족을 가슴에 앉고 기도하던 모세와 에스더, 바울과 같은 애국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울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여 눈물을 주소서. 이 민족을 위한 눈물을 나에게 주소서. 
예레미야처럼 나라를 위하여 눈물을 달라고 기도하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월 애국의 달을 맞아 동족의 상잔(相殘), 비극인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던 예레미야나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선지자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엘란 패튼의“조국이여 울어라”는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울어 본적이 있는가? 

두 동강난 내 조국을 위해 희생당한 애국자들,
전쟁의 폐허 속에 허리띠 졸라매고, 오늘의 근대화를 이룬 조상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려 본적이 있습니까?

애국의 선지자들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귀사탄의 흑암의 권세를 예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길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김경열 목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917-963-9356)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
온 나라 국민이
읽고 정신차려
눈물로 우리주 하나님께 기도
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해요!!

그래서 우리의
주 하나님께서
우리 눈물들을
보시고 온 국민
이 주님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
인 나라로 변화
받고 예수복음
통일되기를소망
하옵니다.아멘!!
감사합니다!!

우리 크리스챤 국민 여러분!? 우리모두 눈물
로 우리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로 호소해요 !!

許英子 목사도
윗 말씀에 아멘!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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