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재침례(재세례)파에 관한 소개글이다. 윌리엄 에스텝의 <재침례교의 역사>를 읽어보기 전에 먼저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이와 함께 재세례파 관점에서 쓴 정수영 목사님의 <새교회사>를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재침례(재세례)파의 핵심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한계와 로마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세력에게도 박해를 받아 재침례(재세례)파의 순수한 신앙이 왜곡되기에 이른 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은 청교도의 신앙과 비슷하다. 청교도들이 거듭난 성도의 모임을 교회로 보고, 거듭난 성도의 가견적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려했다. 신대륙에 미국에서 그들의 신앙의 이상은 처음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마지막 청교도인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노스햄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청교도의 가견적인 교회관은 자취를 감추었다.


재침례(재세례)파도 청교도와 같은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건데 그들은 청교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신대륙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다가 재침례(재세례)파의 후손인 모라비아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각성한 경험을 한다. 그후 모라비아에 방문하여 그들과 교류도 한다. 물론 그후 그들의 수동적인 신앙의 모습에 실망하여 웨슬리는 모라비아 성도들과 관계를 끊는다. 그럼에도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에 있어 모라비아 성도들의 거룩한 신앙이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이 재침례(재세례)파는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이상으로 개인과 교회의 거룩한 신앙을 추구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더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청교도와 웨슬리 목사님의 선구자로서 많은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신앙이 참모습이 무엇인지 이제는 후세에 사는 우리들은 재평가해야 한다. 물론 재침례(재세례)파에도 가라지가 있다. 하지만 참 열매와 가라지를 구별하지 않고 배척한다면 참으로 후대의 크리스천으로서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침례(재세례)파 운동과 확산


 

Ⅰ. 서론

Ⅱ. 본론

     1. 재침례(재세례)파 운동의 기원과 성격

     2. 재침례(재세례)파 개혁자들

       (1) 스위스 형제단

       (2)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 1485∼1528)

       (3) 새틀러와 슐라이다임 신앙고백서(Michael Sattler,1490∼1527)

     3. 광신적 천년왕국주의자들 

       (1) 광신적 신령주의자들

       (2) 뮌스터의 천년왕국운동

     4. 네덜란드의 재침례(재세례)운동


  Ⅲ. 결론


Ⅰ. 서론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무지와 미신으로 오염된 하나님의 교회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점점 확대되어 그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중 재침례(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신앙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침례(세례)를 베풀어야한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재침례(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에게 재침례(재세례)파란 이름이 붙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입교문답만 했으므로 성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았음에도 새로이 세례를 베풀었으므로 재침례(재세례)파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루터나 츠빙글리, 칼빈의 개혁운동의 그늘에 가리워져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재침례(재세례)파가 다른 종교개혁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재침례(재세례)파는 루터나 츠빙글리의 동지나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개혁의 이념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몇 년 동안에 이 운동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여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재침례(재세례)파의 기원과 성격을 알아보고 아울러 재침례(재세례)파가 진행되는 가운데 어떠한 흐름으로 나아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후 재침례(재세례)파의 활동을 알아보려 한다.



Ⅱ. 본론


1. 재세례파 운동의 기원과 성격

루터와 츠빙글리는 중세 교회가 가진 교회와 신학적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들의 개혁 근거는 성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개혁적 주장을 추종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 운동이 성경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더구나 개혁가들은 자신의 주변 정치 상황과 타협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영주나 시의회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면서 나온 사람들이 재세례파였다. 이들은 기존의 모든 질서를 사탄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아 역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에게는 중세 1000년은 성령의 사역이 중지된 교회 역사의 단절시기이며 사탄이 지배하연 시대였다. 그래서 기존 교회는 개혁이 아닌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입장 때문에 재세례파에게 있어 성경 연구의 목적은 현실 세계에서 기존의 질서를 바로 잡고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모범을 발견하는데 있었다.


재세례파들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아래 있으므로 멀지 않는 장래에 멸망할 것이라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시 잠깐 박해를 당하지만 말씀 운동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재세례파는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려면 우선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이나 루터가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를 구별하는 척도로 말씀의 바른 선포와 성례의 바른 시행을 강조하였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권징의 성실한 시행을 강조하였다. 권징에 의하여 교회의 순수성이 유지되고 순수한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 개혁이 완성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재세례파의 핵심은 도덕에 대한 강조였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그 도덕 수준을 개선하였더라면 자신들은 그리로 복귀하는 것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재세례파는 엄격한 도덕 수준을 요구했고 그들은 이를 달성하였다. 그를 반대한 츠빙글리조차 그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의 행실은 책잡을 데 없고 경건하고 가식 없고 매력적으로 보인다....심지어 비판적 성향을 가진 이들도 그들의 생활이 훌륭하다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그들은 도덕을 중시했다. 한 예로 알코올음료를 완전히 금지하는 운동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가톨릭 수도원조차 완전한 금주를 요구하지 않았고 루터와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를 노선을 고수하였고 또한 실천하였다.


2. 재세례파 개혁자들


(1) 스위스 형제단

스위스에서 출현한 재세례파는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모여서 성격을 연구하던 제자들 가운데 발생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스위스 형제단' 이라고 부른다.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은 취리히의 개혁자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48∼1526)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또 한명의 스위스 형제단인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은 그레벨에게 재세례를 주고 블라우록가 그레벨을 비롯한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를 형성하여 1525년 1월 21일에 재세례파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레벨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로마 천주교회의 유산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면서 츠빙글리와는 달리 급진적인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레벨은 통치자의 도움 없이 교회 스스로 신속한 개혁을 이룰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교회를 자발적으로 모인 신자들의 모임으로 보고, 츠빙글리와 시의회에게 중생한 신자로 구성된 참된 교회를 세움으로 교회를 개혁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정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개혁 방법론의 차이가 두 개혁자를 갈라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레벨은 도나투스(Donatus)의 교회관을 수용하고 신자들로만 구성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23년 펠릭스 만츠(Felix Manz, 1500∼1527)와 함께 교회에서 태어난 모든 자에게 교회 회원권을 주는 국가 교회 제도가 자발적인 신앙 고백에 의해 순수한 교회를 세우려는 개혁운동을 막는 장애물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참된 성도로 구성된 교회를 세우려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 온 유아세례 제도를 폐지해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세례는 중생과 신앙의 상징이므로 자기 자신의 판단과 책임 아래 신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달한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아세례는 성격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유아세례를 제정하셨다면 왜 성경이 침묵하며, 1∼2세기의 기록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유아세례가 인간들에 의하여 세워진 제도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레벨은 교회와 정부의 전적인 분리를 주장하였다. 정부는 모든 백성과 관계를 맺지만 교회는 단지 성도로 구성되며, 정부는 죄 때문에 생겨났지만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므로 정교의 분리는 당연하다고 보았다.


블라우록은『재세례파 종교개혁의 출발』(Beginnings of the Anabaptist Reformation)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재세례파 운동을 옹호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황 제도의 산물이므로, 미사와 연옥 교리처럼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충만히 비춰지는 진리의 샛별' 운동을 그레벨과 만츠와 불라우록 자신을 통해 시작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재침례파의 주장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와 계약신학을 옹호하는 4편의 글을 썼다. '모든 믿는 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구약 시대에 할례가 은혜 계약의 표시였던 것처럼, 세례는 신약 시대의 은혜 계약 표시이므로 어린아이는 나면서 8일 안에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 또한 성경에는 재세례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


이렇게 유아세례에 대한 비판으로 취리히가 혼란에 빠지자, 시의회는 1525년 1월 유아 세례에 대한 공개 토론을 열어 유아들이 출생 후 8일 안에 세례를 받고, 무자격자에 의한 설교와 불법 예배 모임을 금지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시의회의 결정을 무시한 채 믿는 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유아 세례 논쟁 후, 취리히 시는 혼동과 무질서에 빠지게 되었다. 재침례주의자들의 유아 세례 부인과 교회와 정부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영권과 세속권의 권세가 추락하였다. 재침례파가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군대에 나가는 것,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대하여 반대하고 정죄하므로, 사회적 기강이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교회와 정부는 재침례교들을 백성의 영혼을 죽이는 자들로 간주하고, 재침례를 주장하는 자를 정부를 전복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이처럼 스위스 형제단은 그 출현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레벨은 두 번이나 투옥당했다가 결국 감옥에서 병에 걸려 죽었고, 만쯔는 1527년 취리히 시의 관헌이 호수에 던져서 죽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스위스와 남독일 일대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2)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 1485∼1528)

이러한 재침례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후브마이어이다. 그는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로부터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종하였으나, 얼마 후 재세례파가 되어 제세례파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이라고 표방하고, 교인이 성경의 영적인 표준에 따라 자라야 하는데,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농민 전쟁으로 발츠후트 신앙 공동체가 해체되자, 취리히로 피신하여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을 돕던 중 미사 제도를 인정하는 등 진부한 취리히의 개혁에 실망하여 그레벨과 함께 급진적인 개혁을 촉구하였다.


후브마이어는 교회를 청소하라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에서 로마 천주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유아 세례 교리를 반대하면서, 신앙고백이 선행되어야만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재침례교도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많은 재침례교도들이 독일에서 스위스로 건너 와 1525년에 츠빙글리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후브마이어는 농민전쟁의 발상지 발츠후트(waldshut)에서 1525년 4월 15일에 재세례를 받았다.


1527년 『자유의지에 대하여』(On Free Will)에서 영의 순수성을 주장했다. 영의 순수성을 주장한 것은 인간 안에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어떠한 기능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라비아에서는 루터란 교회를 재침례교회로 만들기도 했다. 그는 1527년 모라비아 형제단을 섬기던 중 한스 후트와 논쟁을 벌이면서 세속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대 복무와 납세 등의 문제에 대해서 정부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도 관료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한 전쟁과 사형 제도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세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여 1528년 비엔나에서 화형 당하였다.


(3) 새틀러와 슐라이다임 신앙고백서(Michael Sattler, 1490∼1527)

재침례교도들의 신앙과 신학 사상은 마이클 새틀러에 의해 1527년 작성된 『슐라다임 신앙고백서』(Schleitheim Confession)에 잘 나타난다.


① 회개 및 회심을 체험하고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 사하여졌다고 믿는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푼다. 교황이 제정한 가장 큰 오류인 유아 세례를 제외시켰다.

② 일단 재침례교의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세례 받은 이가 실수하거나 범죄 했을 경우 출교에 처한다.

③ 성찬을 기념으로 보았고, 성찬 참여 자격을 세례 받은 자로 제한하였다.

④ 세례를 받은 이는 사탄이 세상에 심어 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 성별되어야 한다. 로마 천주교회와 기독교의 국가교회를 포함하는 악한 세상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어떤 이유로도 무기를 사용할 수 없고,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며, 때리는 자에게 맞으라고 하였다.

⑤ 목사는 불신자들 사이에도 좋은 평판을 가져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훈계하고, 가르치고, 경고하고, 모든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고, 떡을 떼어야 할 때에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세워져 발전하도록 돌보고, 비방자의 입을 막는다.

⑥ 이 세상의 통치는 육신을 따르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철과 검으로 무장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 믿음,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

⑦ 교인은 누구 앞에서도 맹세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맹세를 언급했지만, 인간이 맹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맹세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새틀러는 이와 같은 재침례주의를 보급하다가 1527년 5월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선동적이며 이단적인 주장을 편다는 이유로 정죄 되었다.


3. 광신적 천년왕국주의자들 

스위스 형제단보다도 더 과격한 신학적 입장을 전개한 이들을 광신적인 신령주의자들이다. 한스 후트(Hans Hut), 데이비드 죠리스(David Joris). 멜키올 호프만(MelchioHofmann), 그리고 1534년 뮌스터에서 폭동을 일으킨 천년왕국주의자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1) 광신적 신령주의자들


① 한스 후트(Hans Hut)

독일의 광신적 신령주의 운동은 한스 후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1526년 오순절에 한스 뎅크에게서 재침례를 받았고 귀족 가문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큰 교회를 세웠으며 나중에는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브마이어가 정당방위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의 사용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후트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사도로, 예언자임을 자처하고,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신령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에 의한 천년 왕국의 건설을 주장하여, 당국의 수배를 받았고, 1527년 체포되어 아우구스부르그에 투옥되었는데, 감옥의 화재로 인하여 타 죽었다.


② 한스 뎅크(Hans Denk, 1500∼1527)

재침례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학자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수용하였으며, 사랑의 실천, 평화의 유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1525년 뮌쳐의 신령주의적인 견해에 동조하면서 광신적인 신령파가 되었다. 신령파의 영향을 받은 뒤로는, 성경이 계시를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날 신자는 계시를 직접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광신적 신비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뎅크의 과격한 신학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심해졌고, 1526년 후브마이어에게 재세례를 받은 뒤로는 광신적인 재침례파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스 뎅크를 유명하게 만든 1526년 8월 재세례교도자 집회에서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처형되었다. 재침례파 지도자들이 처형된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만이 아니라 광신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③ 멜키올 호프만(Melchior Hoffmann, 1498∼1543)

호프만은 스와비안 지방의 모피공으로 1523년 개종하여, 유럽 북동부 및 라인랜드를 돌아다니면서 임박할 세상의 종말에 대해 설교하였다. 1529년 츠빙글리의 성찬관을 지지하다가 덴마크에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생활하던 중, 슈벵크펠트의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학 사상을 주장하였다. 호프만은 1530년 재침례교도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규례』(The Ordinance of God)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세례란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고, 옛 아담을 버리고 새 아담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호프만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후 임박한 천년 왕국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루터를 “시작의 사도”, 자신을 “마지막 사도”라고 칭하면서 자신을 사도 시대의 기독교를 회복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명 받은 자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1533년에 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하사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실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자신이 부름을 받았다고 설교하였다. 이 일로 박해가 이어지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그를 따르는 자를 멜키올파(Melchiorites)라고 부른다.


(2) 뮌스터의 천년왕국운동

네덜란드 저지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뮌스터시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베르나트 로츠만(bernt Rothman, 1495∼1535)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마우리 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고 있던 로츠만은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러 모았으며, 그의 설교 운동으로 개혁 운동이 점차로 힘을 얻으면서 교회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뮌스터 시의 상인조합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그는 비밀리에 학자금을 받아 비텔베르크 대학에 가게 되었다.


1531년 7월 뮌스터 시에 돌아온 로츠만은 개혁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에 놀란 주교가 그를 사제직에서 해임시키자 조합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로츠만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시내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 들 중에는 루터파, 개혁과, 그리고 나중에 재세례파가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회를 반대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행동을 같이 하였다. 시민들은 신속하게 로스만을 뮌스터 시의 종교적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뮌스터 시의 길드 회원들은 도시의 평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532년 이들은 주교와 무력으로 대항하여 승리를 얻었다. 뮌스터를 다스리던 로마 천주교회의 주교도 1533년 뮌스터를 “복음적인 도시”로 선포할 단계에 이르렀다. 뮌스터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박해로 인해 피신했던 많은 재침례파들이 네덜란드에서 뮌스터로 몰려왔다. 1533년 이후에는 뮌스터의 시민들보다 이민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뮌스터시는 네덜란드인 쟌 마티스(Jan Matthys)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티스는 농민 전쟁을 부추겼던 뮌쳐의 사상을 뮌스터 시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다.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성경에 따라 뮌스터를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성경 강조는 주관주의에 머물렀다. 그는 주관적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종말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마티스 자신을 스스로 예언자 에녹이라고 자처하여 재세례파를 규합하였고, 곧 뮌스터 시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칭하고, 성도돌이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천년 왕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현금과 재산은 국가 소유로 되었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서적은 불태워졌고,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현물로 임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공산 사상에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항거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다. 소수의 군대로 로마 천주교의 군대를 무찌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외치면서 로마 천주교회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나. 막강한 로마 천주교회의 군대에 의해 마티스은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후 함락되기 까지 마지막 1년 2개월 동안 버티면서 뮌스터를 지휘한 한 사람이 존 레이든(Jhon of Leyden)이었다. 그 역시 주관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친위대를 조직하여 모든 뮌스터 시민의 생활을 규제함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였고, 로마 천주교도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면서, 과부들에게 결혼하여 자녀를 두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의 족장들처럼 일부다처제를 수용하라는 계시를 환상 중에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미모의 여인 15명을 아내로 삼았다.


존은 1534년 8월 주교의 용병을 격퇴한 후, 자신이 마지막 시대의 메시아요, 새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주관주의적 이단 사상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들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1535년 1월 뮌스터를 공격했다. 결국 투쟁 끝에 1536년 6월 24일 뮌스터는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존은 불에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이 일로 명성이 땅에 떨어진 재침례교들은 박해를 감수하거나, 아니면 신앙을 버리고 아우구스부르그 신조에 서명하여 정통 신학으로 복귀하려는 양자택일을 하여야 했다.


4. 네덜란드의 제세례운동

뮌스터시의 붕괴로 하층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재세례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극심한 탄압 속에서 살아남은 재세례파들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크게 4개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얀 반 바테른베르히(Jan van Baternberch)를 중심으로 뮌스터 시를 재탈환하려고 시도했으나 전멸했던 바테른부르크파가 있었고 둘째로 박해 속에서 네덜란드의 재세례를 평화주의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려다 재세례파에 대해 실망하고 신비주의자가 된 오베 필립스(Obbe Philips)파가 있었다. 셋째, 다비드 고리스(David Goris)파는 고리스가 전파한 사상을 계승하여 비밀단체인 '사랑의 집'을 만들어 신비적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필립스와 고리스 등이 사라진 후  네덜란드에 있어서 재세례파를 조직화하고 교리화 시킨 사람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였다. 메노 시몬스는 뮌스터 사건의 결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평화 지상적 복음주의적인 침례 교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메노는 슐라이다임 고백서에 진술된 대로 복음적인 재세례교의 입장을 재조명하였다.


그는 혁명을 통한 교회 개혁을 반대하고, 개인적인 특별 계시를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존하던 심령주의적인 재침례파를 반대하였다. 참된 개혁 운동은 성경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메노는 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 예로 마리아를 예수의 “양모”로 보았는데, 이미 2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상으로, 그는 역사를 경시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되었다.


메노는 성경적 교회를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으며 평화와 봉사의 삶을 사는 중생한 자로 구성된 교회로 보고, 이러한 교회를 세우려면 권징이 철저하게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권징의 최종적인 단계로 출교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출교는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성도는 출교 받은 자를 격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주신 출교의 명령은 우리가 출교를 행하든 아니면 우리 자신이 "공동체에 의하여 기피되고 출교 당하던가 해야 한다"고 하였다.


메노는 성찬을 츠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기념으로 보았고, 세례는 성도의 중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유아들이 설교를 듣거나 교훈을 받을 수 없으므로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메노는 세례가 은혜를 수반한다거나 은혜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배척하고, 오히려 순종의 표징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신학적인 전제에 근거하여, 그는 유아 세례가 407년 교황청에 의하여 도입되었다고 주장했다. 재침례파의 전통을 따라, 서약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 세속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Ⅲ. 결론


이처럼 재세례파 운동은 종교 개혁기에 종교적 순수운동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경에 있는 대로만 하자는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형식과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내적으로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주장했던 재세례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형식적이었던 모습을 탈피하고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다시금 세례를 받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점차 극단적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많은 박해를 받았다. 또한 그들의 광신적 행동은 급진적은 종교개혁이었기 때문에 그 16세기 당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조차도 처절하게 비판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재세례파의 등장에 대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 로마가톨릭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신앙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난 순수 신앙 운동이라는 점에서 좀더 적극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고난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은 박해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한 흐름은 후터파와 연결됨으로서 경건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 참고문헌 ◈

1. 롤란드 베인턴 저 홍치모 ·이훈영 옮김, 『종교개혁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2. EM.번즈 · R 러너 · S 미첨 씀, 박상익 옮김, 『서양문명의 역사Ⅱ』, 소나무, 1994

3. 오덕교 저, 『종교개혁사』,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8

4. 오연수 저, 『종교개혁사』, 한글, 2000

5. 홍치모 공저, 『급진종교개혁사론』느티나무, 1993



출처: 청교도 도서관/ 천국도서관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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