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명료했다. 그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 특권, 가정의 안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때만 고백할 수 있는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각오와 진심어린 고백이 없다면 감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때가 바로 초기 기독교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그렇게 간단 명료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때부터 교회에 출석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입니다.”, ”병 낫기 위해서 갑니다.”, "축복받고 잘되기 위해서 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의식 세계, 지식 수준, 환경이나 인격에 따라 모두 다른 대답을 할 것이지만, 대체로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다행이 천국이 있다면 죽어 천국에 가는 것, 생명보험을 사두는 것 정도, 사행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충성스러운 노예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안디옥’에서 처음 불렸던 것 같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동기는, 당시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위에서 처형된 죄수, 예수란 청년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다가 목숨까지 빼앗기는 무모(?)한 자들이 많음을 비웃는 불신자들의 표현이었으며 조롱의 대상이었다. 원형극장의 사자 앞에서나 길거리에 세워둔 십자가 형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거침없이 대답하는 그들을 향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노예’란 의미로서 상용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가이사 황제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던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가이사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에 대한 깊은 충성을 들어내기를 기뻐했다.(행 11: 26) 이와 마찬가지,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대한 자신의 궁극적인 충성을 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순교자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외치는 그 외침은 나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노예다.”하는 것과 동일 語였던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성도들은 하나님의 노예, 그리스도의 노예로 언급된다. 사실, 바깥세상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불렀지만, 신약 성경에서 초기의 성도들은 스스로도 반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리기를 기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이 강조한 “하나님의 노예”라는 개념은 현대 영어 번역본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이 노예 개념은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성도들에게는 핵심적인 진리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변하지 않는 충성스러움, 진실한 주의 종(노예)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의 종”이라고 하면, 목에 힘을 주는 권위적 대명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변질한 것이다. 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행성 심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 일부 약삭빠른 자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사람의 영혼을 살리며 우리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잘 풀이하여 가르치기보다 성공했다는 목사들의 꽁무니를 좇아다니기도 하고, 그들이 사용한다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접목하기도 한다.
 
또 가짜 학위를 받고서라도 큰 교회를 맡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가족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인 형제 교회들마저 돌팔매질 당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인지.... 여전히 가짜 박사 목사님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이 "어, 이 사람도 박사라고 하네, 학위 공부를 언제 했다는 것인지? 거 참, 이런 때는, 내가 박사 아닌 것이 정말 감사하다." 하면서 혀를 찼다. 그만큼 가짜 박사님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한탄하는 말일 게다. ㅋ

이런 현상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가짜 성령 운동은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분별하자고 하는 목사님들이나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인 것 같아 그 또한 마음이 착잡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같은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무섭고 글쓰는 것도, 댓글 토론하는 것도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긍정적인 토론 자세가 결여되고 자신의 뜻에 반하면 죽여보자고 모함도 마다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정말 무섭다. 성경은 반드시 분별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분별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필자가 칼럼니스트로 섬기고 있는 아멘넷에도 김oo교수님이 정oo 목사님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면서 "모든 성령운동은 신사도 운동인가?" 정oo 목사님은 모든 성령운동을 다 사단의 장난(신사도 극단적 신비주의)라고 한다."라는 뜻이 담긴 제목부터가 타당하지 않은 글, 정oo 목사님의 글이 비성경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평하는 글이 헤드라인 칼럼에 올라와 있다. 필자가 정oo 목사님의 글을 모두 정독을 해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목사님의 뜻은 영들을 다 믿지말고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같은 목회자끼리도 바르게 분별하자고 하는 목소리를 싫어하는 세대이니 성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싶다. 그러면, 가짜 성령의 장난질이란 전혀 없다는 말씀인지...

주님께서는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면, “내 음성(성경)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듣는다(listening)는 것은 경청하는 것, 곧 순종을 의미한다. 환청이나 헤롱거리는 음성이나 쪽집게식 예언이 아니란 것이다. 성도들은 사단의 장난질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반드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과 충성 그분의 말씀(성경)에 전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 14),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 31) 자신을 가리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거나 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 받으려고 하면 먼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성경)에 복종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1)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2.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 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할 때는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만 그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끄집어 내어 죽여보자고 들이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잠시 조용하던 옹달샘 수면에 악동이 막대기를 넣고 한 번 휘젓기만 하면 그 속에 가라앉아 있던 더러운 흙탕물이 온갖 잡탕과 섞여 있다가 시커멓게 물 위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도의 가슴 속에 어찌 그토록 포악한 언사가 감추어져 있었단 말인가? 그저 아연실색 할 때가 간혹 있다. 어떤 사람은, 음욕 앞에, 또 어떤 사람은 탐욕이나 명예 앞에서 여지없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도 진짜 '그리스도인'이랄 수가 있을 것인가? 글쎄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현대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역자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죄를 물 마시듯 마시며, 기복신앙,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신앙으로 복음을 변질시켜 가르치고 행한 결과로, 작금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책임을 잘못 가고 있는 소수의 몇몇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전가하려 하고 자신은 이에서 제외되고 의로운 자라 착각하는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는 숨겨지기를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은 끝까지 들추어내는 것이 義라고 한다.

과연 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한 형제. 자매, 신령한 의미로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각 지체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지상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연대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리새파 닮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떠난 생활,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개개인이 그분 앞에서 사는 것만이 문제 해결(solution)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진심되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까지 내어놓을 만한 마음자세로 준비된 사람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 35-38)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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