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휴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다를 뿐이다. 여기서 내가 휴거의 어원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그것이 포인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은 그 속에 “황홀경”, “이동”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 중에 이 “끌어올림” “낚아채어감 (rapture)”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 그리고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휴거는 황홀경 속에 몸이 예수님 부활후의 몸과 같이 변화되어 구름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 사람인가? 신앙 생활한지 몇 년 이상 되었으면 휴거에 대해 들어 보았을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

 

“나는 그 생각 안하고도 예수 잘 믿고 있는데...” 옳은 말씀이다. 3개의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휴거에 관해 공부해본 적이 거의 없다. 왜 그랬을까? 바로 같은 이유이다. 교수님이든 목사님이든 다들 관심이 없다. 모두 “우리 생전에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휴거 얘기를 잘 안하는데, 어떻게 우리는 휴거에 관해 알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1992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00 선교회 덕분이다.

 

당시 한국 사회를 아주 시끄럽게 만든 사건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사탄은 대한민국 성도들의 뜨거운 하늘 신앙을 깨뜨리고 성도들 마음속에서 휴거를 지우기 위해 이들을 사용 했다.

 

과연 그 계획은 성공했고 우리들의 하늘신앙은 땅의 신앙으로 바뀌었고 휴거는 아득한 미래에 혹 있을지도 모르는 전설적인 얘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떤 싸움에서든지 어느 정도 포인트를 상대방에 주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우리는 하늘 신앙과 휴거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대신 휴거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단어는 없더라도 의미의 말씀은)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알게 되었다.

 

휴거에 관해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 중에서도 누가복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을 주 대상으로 써진 책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둘 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마태복음은 제1장 1절에 족보가 나오는데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로 족보가 끝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내용의 족보(3장 23-38절까지)가 예수님과 요셉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과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까지만 나오는 족보가 누가복음에서는 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이 노아의 후손이고 아담의 후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나,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까지 알려주지 않으면 복음이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의 비유가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에서 므나의 비유가 나온다. 실제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화폐단위가 다르다. 당시 달란트는 이스라엘의 화폐이고 므나는 이방인의 화폐였다.

 

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인데 이방인의 화폐로 표현하셨을까? 이러한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누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에게 주신 말씀임을 우리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나누고 가르자는 말은 아니다. 휴거에 관해 말하려다 보니 휴거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방인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가 우리의 휴거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는 그 끝에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없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평범한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씀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 하나이다 하였더라.” (눅 19:12-14)

 

그 후 세월이 흘러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 왕이 종들을 불러 결산하는 장면을 설명한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나이다” (눅 19:20) 그러자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하니” (눅 19:24)

 

이것으로 결산은 끝났는데, 왕이신 예수님은 갑자기 무서운 명령을 내리신다. (즉, 이 부분이 마태복음과 다르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 19:27)

 

왜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 끝에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없는 이 무서운 말씀이 있는가?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을 끌어내어 죽이라는 말씀이 어째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가? 왜 이 말씀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누가복음에서만 특별히 나오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진정 소망하고 있을까?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이 진실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왕으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일단 어떤 사람을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면 바로 그 사람을 그들의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현 세상에서 그들을 통치하는 실제적인 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 5:43)

 

마태복음(이스라엘 민족에 해당되는 복음)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왕(메시야)이 빨리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왕됨을 원치 않는다"라는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필요없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꼭 하셔야만 하는 말씀인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다시 오실 실제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들 중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우리의 왕을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 민주주의 시대에, 이 문명 시대에, 이 과학 시대에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특별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예수님이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시적 현실적인 왕이 되는 것에는 개념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큰 욕심은 없다 라고 말들은 하면서 아이들을 좀 더 나은 대학에 보내고 싶고, 좀 더 나은 곳에 출가시키고 싶고, 그리고 노후자금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만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천국 가기 전까지만 나와 우리 가족 불의의 사고에서 보호하시고 건강 주시고 아이들 나쁜 곳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직장과 사업에서 잘 되게 해 주시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이렇게 이방인 성도들인 우리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누가복음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들에게 강력하고도 무서운 경고를 주신 것이다. “내가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

 

생각해보라. 자신이 애써 만든 것들이 자기를 등지고 원수에 팔려 갔던 것을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도로 찾았는데 자기를 진심으로 따르지는 않고 마음은 항상 원수에게 주고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와 가족의 신변 경호를 해주시고 내가 죽은 후에는 내 영혼을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받아주시오”라는 모습에 주님은 분노하실 것이다.

 

신비로운 것은 유대인들은 초림예수를 거부했는데 이방인 교회는 재림예수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거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WCC가 바로 재림예수를 전 세계적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집단이다. 666 짐승의 표가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재림예수를 거부하려는 전조인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재림예수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WCC 세력과 세상염려 혹은 재미에 빠져 예수님 재림에 무관심한 성도들은 함께 예수님의 원수로 분류되어 예수님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케 될 것이다.

 

지금 예수 믿고 있는 내가 혹시 주님의 원수는 아닐까 ? 자신을 살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계 11:15) 이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는가? 이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이 말씀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이 세상 임금(사탄)의 백성인가?

 

우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문은 닫히고 휴거는 일어난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휴거시키는 것일까? 예수님은 왕이시다. 왕은 주권, 영토, 백성이 있어야 한다. 주권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다. 영토는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마 28:18)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0)

 

백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왕은 왕비를 어디서 뽑는가?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신부라는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

 

세례요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신부로 보았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 3:29)

 

그런데 신부는 신랑과 같은 신체적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과 다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문이 닫혔는데 홀연히 나타나셨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6)

 

“그 후에 저희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2)

 

부활 후의 예수님은 신비의 몸을 가지게 되셨다. 그렇다고 영체도 아니셨다. “내 손과 발을 만져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이렇게 부활 후의 예수님은 부활전과 다르시고 우리 몸과도 다르다. 좀 더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 무덤 밖에서 마리아를 만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예수님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

 

그 후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문들이 닫혔는데”,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부활 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몸을 가지셨다. 우리도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신비한 몸, 시공을 가로지르는 몸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휴거가 필요한 것이다.

 

정말 예수님과 똑 같은 몸이 되는가? 성경에 있는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21)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이렇게 우리 몸이 부활 후의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은 몸을 입게된다 이 죄 투성이 고집과 교만과 위선과 더러운 걸레에 불과한 내가 주님과 똑같은 신비의 몸이 된다니...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뼈에 새기며 다시 본 주제로 들어가자. 우선 휴거 관련 구절부터 살펴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좆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우리는 그야말로 눈 깜박(in the twinkling of an eye)할 사이에 몸이 변화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찬란한 빛의 몸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기도하여 말할 때에 “그 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단 9:21)

 

휴거된 우리들은 적어도 가브리엘 천사 이상의 속력으로 우주를 가로질러 다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부로서 신랑과 같은 몸을 입기 위하여 휴거되는 것이다.

 

휴거가 꼭 일어나야 할 다른 이유는 이 지구의 형편이 대환란 때에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눈 빙하자료센터(NSIDC)에서 최근 발표한 것을 보면 서기 2013-2018년 사이에 북극의 얼음 덩어리가 다 녹는다지 않는가?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눅 21:25)

 

동남아 쓰나미, 미국 카트리나, 허리케인, 미얀마 태풍, 중국 쓰촨성 지진, 쌀, 밀가루 등의 곡물가 , 철광석을 비롯한 원 자재 가격 , 석유 가격, 그리고 핵전쟁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에스겔 38, 39장에서는 러시아와 이스라엘 간 전쟁을 말씀하셨다. 지구가 정말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대기권이 아닌 우주에서도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신부들을 생지옥에서 미리 구해 내시는 것이 휴거이다.

 

수 년전 일이다. 큰 애가 중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도마뱀을 만들었었는데, 그게 못마땅해서 집에 들여놓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것을 요리조리 숨겨서 어떻게든 없애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을 보았었다.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애착이 가서 그랬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은 말씀으로 지으셨으나 유독 사람만은 직접 만드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 사람이 귀엽게 생각되시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인생이 죄를 짓고 사단의 권세에 속하므로(행 26:18),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의 죽음에 내주심으로 우리를 다시 구해내셨으니 그 인생에 대한 긍휼히 여기심과 애틋하신 마음을 무엇에 비하겠는가?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5:9)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만드시고 아들의 피 값으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아들을 진정으로 믿는 자는 환란에 내버리지 않으시고 휴거 시키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과 머리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고전 12:27)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3)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하여 진정한 교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는 그야말로 눈 깜박할 순간에 예수님에게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는 세상 잠에서 깨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야 할 때이다. 마태복음 25장의 10처녀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잠을 잤다. 이제 세상 잠을 깨어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징조(sign)가 보일 때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 휴거에 반드시 들어가라 하는 의도이시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휴거에 관한 말씀은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사도들에게 주시지 않고, 바울에게 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였고, 이 휴거는 거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방인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이방)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롬 9:26) “저희(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롬 11:11)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후,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가게 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 하리로다” (시 89:30-34)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란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렘 30: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 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렘 30:11)

 

휴거의 말씀은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전한 주님의 말씀인데 한쪽은 말썽이 많은 교회였다. 교인 중 육신적이고 세상 물이 빠지지 않은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은 교회, 그런데 바울은 “홀연히 다(all) 변화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마 24:40에서 그리고 눅 17:34에서 분명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한다고 하셨는데, 바울은 모두 다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가? 외견상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두 사람 중 한 사람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휴거된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여기서 누가 휴거되고 안 되고를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시간부터 무조건 지난 동안의 허물과 죄를 통회 자복하고 용서 받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흔히들 하나님께서 우리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성경에 없는 말씀이고 자칫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돌보심)하려니와” (사 66:2)

 

이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시니 바로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시지 않겠는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한 그들”(렘 7:24)에게는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주며 그 무서워 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치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사 66:4)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다 드리고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십일조 드리고 열심히 봉사하고 기쁨과 감사로 살고 있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훌륭하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리새인만도 못한 사람이다. 내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무례한 억지라고 생각하는가?

 

서기 2008년 6월 현재 세계 인구는 약 67억이다. 가톨릭, 그리스정교회, 성공회 등 다 포함해서 기독교인은 22억이다. 그러면 나머지 45억의 인구는 어찌되고 있는 줄 생각해보았나?

 

매년마다 5천 6백만 명씩 죽는데 기독교인은 다 구원 받았다고 하더라도 1천9백만 명이 천국에 갔고 나머지 3천7백만 명은 어디로 갔는가? 지옥으로 갔다.

 

예수님이 속히 오셔서 그 모든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그만 정지시키셔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가 아무리 선행과 봉사를 한다 해도 예수님께서 하루 더 일찍 오시는 것만 못하다.

 

그 하루 동안에 약 십만 4천명, 그 중 어린이를 제외하면 5, 6만 명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1개월에 150만명-180만명이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영혼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오셔야 한다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이(가) 임하옵시며”(주기도문 제발 건성으로 하지말자)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그렇다.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신랑을 기다리며 바라는 자들에게 말이다. 심령에 통회하며 주의 말씀에 떨고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어 휴거에 꼭 참여하자. 이 글을 읽는 분 모두 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제부터 민감한 얘기로 넘어간다.

바로 그 시기 말이다. 이쯤해서 우리나라 사람들 입에 재갈 물리기에 성공한 고위급 마귀는 얼굴에 친절하고도 상냥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언제인지 그 날짜를 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 않겠는가?

 

마귀들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그 날짜는 솔직히 잘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는 것이 죄송하고 좀 면구스럽지만 성경은 66권의 합본이다. 그 한권 한권이 독립적이면서도 한 주제로 통일성을 가진다.

 

거기에 더하여 성경은 역사의 시간적 순차를 갖는다. 즉 창세기는 출애굽기보다 앞에 있고 마태복음은 사도행전보다 앞에 있다. 그리고 대략 사건의 전개 방식이 전체 66권으로도 그렇거니와 각 권으로도 시간적 순차를 갖는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노아 그 후 아브라함 그리고 그 후 모세, 인물과 사건이 시간적 순서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각각의 책에서도 대부분 그렇다.

 

동의하시는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예수님 탄생으로부터 부활, 승천까지 시차적 순서를 따라 기술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이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주신 말씀임을 말했거니와 우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므로 휴거와 종말의 순서를 여기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 12:35, 36)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을 알았다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2:39, 40)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42, 43)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눅 12:45-46)

 

위 말씀의 요지는 예수님 재림을 예비하고 있을 것과 청지기(교직자)들은 종(성도님)들에게 재림의 때에는 재림의 성경말씀을 강론 하라는 것이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 공중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부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할 때 벌판에 나온 것 같이(창24:63) 공중에 오신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 아스낫을 얻은 것 같이(창41:45) 예수님은 동족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신부를 맞는 것이다. 휴거 때까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 후에야 깨닫게 된다.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13:1)

 

이와 같이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재림설교의 필요성과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17장에서 휴거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눅 17:34)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5)

 

이 휴거 후에 실로 엄청난 멸망의 재앙들이 일어날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7일 후에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이때가 환란 후인가 아니면 환란이 막 일어나는 시점인가 하는 것인데, 이때는 환란이 막 일어나는 시점이다. 왜냐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갔다. (눅 17:27)고 말씀하시며, 실제로는 그 후 7일 후에 홍수가 났다. (창7:10)

 

롯의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17:28)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하는 평화로운 때에 갑자기 휴거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 마태복음 24장 31절 말씀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휴거가 아니고 환란에 살아남은 성도(주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천사를 시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는 장면이다.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그날 환란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 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 택하신 백성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은 환란 후에 천사들을 보내신다. 666 짐승의 표(베리칩)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을 천사들을 보내어 이스라엘로 순간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때 지구는 초토화된 이후이며 아무런 이동 수단이 없는 때이다.

 

적어도 3년 6개월 이상 굶주린 몸으로 예루살렘까지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10:22)

 

휴거는 전혀 다르다. 휴거는 우리 몸이 변화하여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인데 천사의 데려감이 아닌 것이다. 휴거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 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 까지 하리라” (살후 2:7)

 

성령께서 적그리스도의 일을 교회를 통해 막고 계시다가 교회를 옮기시는 게 휴거다. 마치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리고 이삭에게로 가듯이 말이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누가복음 17장에 휴거가 있고 다음 누가복음 19장으로 가면 므나 비유의 말씀인데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상급의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휴거 후에 우리에게 상주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백성 중에 그가 왕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 믿는 우리들 중 누군가이다. 그들은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 이 세상에서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휴거되지 못하고 환란에 남겨지게 되고 대재앙 속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 7장 9절 이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사람들이 환란 중간에 휴거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들이 죽어서 올라왔거나 죽음 이상의 고난을 통과한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전 6장 12절 이하에 큰 지진과 해가 검어짐과 달이 피같이 됨과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 말림같이 떠나감과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는 일이 일어난 후이기 때문에 이들은 죽은 사람들이거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께서 목자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의 신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서 봉사하게 된다. 휴거자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계 7:9)

 

이번 미얀마 태풍에도 기독교인 1만 명이 소천하였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장인 계시록 6장 10,11절에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원수 갚음)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원수 갚아 달라는 영혼들의 청원에 더 많은 성도들이 죽어야 한다는 대답이시다. 이런 일들 후에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하늘에 올라왔기 때문에 이들은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떠난(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성도들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풀었는데 거의 다 꼭 몇 군데씩 서로 다르다. 이제 초등학생도 계시록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해석할 때가 되고 있다.

 

지성이나 도덕성이나 신앙의 결단이나 말씀에 따르는 실행력, 그리고 능력 행함과는 달리 예언의 해석에서는 예언이 응해지는 시점에 가까울수록 더 정확하게 풀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어거스틴이나 칼빈보다 오늘날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훨씬 더 정확하게 예언들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보가 쌓이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야만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환란 전 휴거를 얘기하면 화를 내면서 거짓선지자, 이단이라고 한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참 감사한다. 왜냐하면 세상살이도 나에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뒤늦게 나이 50에 목사가 되어 예수님께로부터 상 받을만한게 통 없던 차에 견딜만하고 나름대로 행복한(?) 핍박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들도 다 천국에서 만나게 될 귀한 형제, 자매들인데 혹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말씀을 올린다.

 

“환란 중간 혹은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성도들을 가르쳐서 가뜩이나 세상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지 않은 차에 “그러면 환란이 오는 것을 보고 환란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예수님 만날 준비하면 되지”라고 유도한다면(고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는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예수님 말씀에도 정면 도전하는 것임을 말씀 올리고 싶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36)

 

항상 깨어 기도하면 환란을 피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는 말씀이다. 환란을 피하는 길은 이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휴거시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겠는가? 자신이 직접 만드시고 더군다나 자신의 희생으로 도로 찾은 자신의 신부를 장차 올 이 모든 일 (창세 이래 없었던 그리고 미래에도 없을 최고의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지구에 계실 때 왜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나?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 죽게 될텐데 말이다.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라면 대표적인 몇 사람만 고치시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불쌍해서 이 대환란의 지구로부터 탈출시키시는 것이다. 바로 휴거라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아들들인 성도들을 불과 유황불,그리고 홍수를 통과시키시겠는가? 예수님이 그렇지 않다는데, 굳이 환란을 통과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도들로 하여금 휴거를 놓치게 하고 환란에 빠뜨려서 종당에는 666짐승의 표(칩)를 다 받게 만들어서 불과 유황 불못에까지 끌고 가려는 계략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적같이 오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들을 안다면 어떻게 환란 중간이나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는 7년전에 이스라엘과 관련된 7년 시효의 언약을 여러 사람과 맺는데(단 9:27), 바울은 바로 이 적그리스도와 휴거시기를 관련짓고 있기에 휴거는 7년 전인 것이다.

 

사 26:20-21에서도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 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것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기 이전에 밀실(휴거)에 들어가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성경 인물 사건의 시차적 배열로 생각해보면 더욱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휴거는 환란 이전 즉,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임할 것이다. 창세기는 지구 창조, 계시록은 지구 및 인간의 심판, 그리고 천년왕국을 설명한다.

 

이 성경에서 휴거는 어디에 나오는가?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이다. 왜 신명기나 열왕기가 아닌 계시록 앞에 있는 교회 시대의 서신서에 나오는가 말이다.

 

그것은 심판에 들기 전 교회 시대에 휴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성도들이 휴거에 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갖는 것이 가장 싫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외국에도 여러 번 거짓 휴거날짜를 퍼뜨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백신 주사를 맞힌 것이다.

 

여러 번 속은 성도들은 휴거 얘기는 모두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되고 진짜가 올 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다 놓치게 만들어 표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말이다.

 

계시록 7장 9절-17절까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서있다” (계 7:9)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계 7:14)

 

그들은 이미 굶주렸고 목말랐고, 태양이나 핵폭발로 몸을 상한 사람들이다. (16절 참조) 예수께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 하시고 눈물을 씻어주신다(17절).

 

영혼이 아닌 육신으로 천국에 들어온 것 같은데 이들은 실로 엄청난 대재앙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된다(계 7:15).

 

이들도 휴거된 것으로 보아도 되겠지만 휴거라 하더라도 의미없는 휴거이다. 대재앙에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들도 다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먼저 휴거된 성도들과 다른 직임이 주어진다. 휴거된 성도들은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창세 이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환란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바로 휴거이고,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험악한 상황과 몰골로 그 대 재앙을 통과하다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대환란)에서의 구원이다. 그 이유는 4장 16절부터 5장 9절 바로 여기까지 전체가 휴거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3장 7절 이하의 말씀이 바로 휴거되는 교회인데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3:8)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주님의 말씀은 간단명료하시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 다는데 어떻게 되는 것이 시험의 때를 면하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지구를 떠나거나 죽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몸이 변화되어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면서 기도 중에 형제라고 칭했더니, 그 친구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신앙인의 세계도 참 씁쓸하다. 정말 순수하게 형제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세상이 빨리 와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아 이제 그만 세상 미련 버리고 생각나는 죄는 몽땅 회개하고 휴거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자.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때가 우리에게는 휴거의 때이고 세상은 멸망의 대심판임을 알라. 그때에 우리가 멸망의 대재앙에 빠질 것이라면 세상에 어떤 바보 성도가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것인가?

 

다시 성경 인물 사건의 시차적 배열론(?)에 의거하여 휴거되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성경의 어디에 있는가? 계시록 초반 3장 아닌가? 아직 재앙이 발생하기 이전이다.

 

계시록은 6장부터가 재앙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복음인 누가복음 12장에서 종말의 때에 재림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과, 17장에서 휴거의 말씀, 그리고 19장에서 시상식인 므나 비유를 살폈고, 그 다음 21장으로 넘어가서 본격적인 환란의 상황을 보게 된다.

 

21장의 내용은 계시록에서 상세히 말씀하시고 계신바 우리는 그 환란을 피하는 방법에 모든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한다.

 

바로 누가복음 21장 36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재앙들은 아직은 징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제 곧 일어나는 휴거에 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신호인 것이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 13:33)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예수 재림을 모호하게 하고 희미하게 보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연유로 야고보서 3장 1절에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하시라도 재림(휴거)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눅 12:32)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 12: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막 13:35)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막 13:36)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막 13:37)

 

휴거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모하고 기다리며 깨어있어(세속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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