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운 동아일보와 되풀이되는 역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어제(29일) “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은 중앙정보부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진실·화해위는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동조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인들의 생존권과 명예를 침해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면서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등 적절한 화해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결과를 얻은 동아투위 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동아투위 정동익 위원장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진리가 확인됐다”며 “언론탄압이나 강제 해직 같은 야만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경향발췌)

이번 결과를 보면서 YTN과 KBS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YTN과 KBS 경영진의 무모한 행각이 다시 조명받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YTN은 이미 대량해고와 징계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마침 오늘이 TYN을 생각하는 날, YTN과 함께 하는 날로 오후 7시에 서울역에서 집회가 있다니 그 의미가 더 크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33년 전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2008년에 신문사가 아니라 방송사를 대상으로 똑 같이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이 비굴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사람들, YTN과 KBS의 경영진은 그리고 KBS의 어용노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집니다. 그들에게도 진실에 대한 영혼이 있을까요? 


재미 있는 것은 동아일보 홈페이지 회사소개란을 보면 지난 74-75년의 백지광고사태를 자랑스럽게 적어 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측의 굴복으로 비참하게 끝난 백지광고사태마저도 이용하는 더럽고 비겁한 짓이지요.

아 또 하나 재미 있는 것은,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에 대한 오늘 결과가 '동아일보 인터넷판'에는 아직 살리지 않았다는 거죠. donga.com 에서 '광고탄압'으로 검색해보니 촛불집회 때의 소비자주권운동 때의 기사만 보이는군요. 내일은 실릴까요?

예전에 썼던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에 대한 글입니다.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과를 보며 참고가 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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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지금과는 다른 사람들


지금은 온갖 쓰레기들의 집합소로 보이는 동아일보도 한 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백지광고 시위 때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동아일보 사옥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지광고 사건 후에 비열하게 남게 된 사람들이 지금의 동아일보 맥을 이어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974년 말부터 1975년 5월까지 동아일보의 지면이 비거나 이상한 광고로 채워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예 백지로 나오거나 일반시민들의 작은 광고들이 지면을 채우는 일이 발생하는 데, 이를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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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연행에 항의집회를 가진 기자들이 언론수호 만세를 부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와 자유언론수호대회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을 포함한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나서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됩니다. 그 후 73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박정희 8대 대통령 취임합니다. 지식인들의 극렬한 저항은 2년여를 계속되었고, 유신정부는 74년 1-4회의 긴급조치로 맞섰습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언론은 철저한 통제를 거쳐 제작되고 있었습니다.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교정 받아 실렸습니다. ‘연탄값 인상’이란 제목도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연탄값 현실화’로 바꾸기도 하는 등의 전방위 통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자괴심에 빠져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언론의 보도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동아일보 앞에서의 동아일보 불태우기 시위가 있자, 기자들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떨치고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이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는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이 가이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는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다 25일에 실리게 됩니다.

백지광고의 시작

그 이후 동아일보에는 그간 실리지 못하던 인권, 데모, 야당인사들의 발언, 개헌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정부는 결국 광고주들을 회유협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를 조여오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백지광고사태의 시작입니다.

대형광고주들이 광고원판을 회수하고 광고취소를 요구하자 자체광고로 버티던 동아일보가 결국 74년 12월 26일 처음으로 광고해약사태에 대한 우려의 기사와 함께 세 면의 하단광고가 백지로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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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의 첫 백지광고 모습)


동아일보가 백지로 광고를 내 보내자 시민들의 폭발적인 격려를 받게 됩니다. 시민들은 광고를 채우기 위해 동아일보로 몰려들게 되고,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들까지 동참하는 범국민적 언론자유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택시운전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동아일보로 가자는 시민들에게는 택시비를 받지 않는 분도 있을 만큼 국민의 성원 속에 진행된 백지광고 채우기는 74년 5월 중순까지 이어집니다.

첫 테이프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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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광고)


이를 시작으로 장준하, 문동환 등 지식인의 동아일보 지지 광고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1월 4일 3면에 고은 시인은 ‘동아일보에 붙이는 노래’를 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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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동아일보에 붙이는 노래)


“우리는 알고 있노라 동아가 우리의 것임을/ 우리나라의 겨울 산 능선과 벌판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어느 시대의 권좌가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동아는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동아가 동아 이상의 것임을알고 있노라/ 동아의 취재자는 우리 자신이며/ 동아의 편집자는 우리 자신이며/ 동아의 텅 빈 광고야말로 우리 자신의 아우성임을 알고 있노라 .........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와 사랑의 자손으로서 세세생생 살아있노라/ 동아여, 동아여, 동아여, 동아여, 고난의 동아여”


하지만 이 보다 더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개개 국민들의 마음입니다. 동아일보  지면을 꽉 매웠던 국민들의 가슴 뭉쿨한 감동은 뜨겁게 우리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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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격려광고가 매일 끊이지 않았다)


 


“동아야 우리는 안다. 너희는 불사조임을...”

“가슴아픈 우리는 꼭 승리한다.”

“자유 정의 진리여 싸워 이기라.”

“동아의 굳건한 필봉은 꺾이지 않으리.”   

“존경하는 삼천만 배달민족이여 권력과 악질 재벌들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아를 구하는 데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하고 재벌의 돈이나 받아먹는 다른 신문이나 방송은 구독이나 청취를 하지 맙시다.”

“동아의 고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입니다. 힘을 내어 용감히 싸워 주십시오.”

“해마다 1년간 모은 돼지저금통을 깨어서 불우이웃을 도와왔으나 이번에는 광고해약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아를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굽히지 말고 견디어라 민족의 얼 동아여, 기필코 광명 있으리”

“우리들에게 희망을 준 동아일보여 감사드립니다.”

“긴급조치로 구속된 동료학생들에게 차식비로 전하려 했으나 이길마저 당국이 차단해서 광고없는 동아일보에 성금으로 바칩니다.”

“민의가 동아의 고난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자랑이요 조국의 등불인 동아일보를 사랑합니다.”

“동경 정인량의 맥박은 동아와 함께 뛰고 있습니다.”

“배운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

“4.19의 꽃은 어디에 피었는고?”

“술 한잔 덜먹고 여기에 내 마음을 담는다”

“요즘처럼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국민들의 열망조차도 3월 들어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 굴복한 사측에 의해 국민들의 갈망이 날아가 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하게 됩니다.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전 한겨레신문 대표)의 사표 제출, 기자와 아나운서들의 제작거부, 그에 이어 130여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의 해고가 단행됩니다.

송건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장이나 주필도 나를 신임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에게 원한을 가질 일도, 더욱이 신문사를 그만둘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측의 굴복과 어용신문으로의 전락


정부의 탄압에 굴복해 대량 해고를 단행한 동아일보는 그 이후로 정부의 기관지로 전락해버리고, 열광적으로 진행되던 격려광고는 4월 들어 급격히 줄어들다 5월 들어 완전히 끊겨버리게 됩니다. 국민들은 동아일보 해직을 접하고 기자들의 복직과 성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 격렬히 항의하지만 동아일보 사측의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못하고 동아는 더 이상 민족의 신문이 아닌 어용 신문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백지광고사태를 지나면서 해직된 이들은 함께 해직된 조선일보 기자 12명과 함께 80년에 해직언론인협회를, 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기관지로서 '말'을 창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 뒤에는 자유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됩니다. 결국 지난 동아일보의 굳은 언론인들은 해직의 아픔을 딛고 한겨레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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