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155~185p, 기독교문서선교회, 류호준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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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주: 아래 '하나로'님의 글은 안토니 후크마(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본 뜻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로님은 중생의 7가지 소제목 중에 7번을 이 글의 결론인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런가요? 저자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그쪽을 포커스한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최근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단지 초기 개혁신학의 신학자들이(칼빈을 비롯) 중생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처럼 7번 소제목을 통해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미 중생에 대한 의미를 1~5번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였고 6번을 통해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고 7번에서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설교자의 할 일, 즉 중생과 연관해서 신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저자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한다면 하나로님 같으면 중생의 본질 등.. 이렇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연중론을 의식해서 그런지 하나로님은 잘못 독해를 하고 계십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연중론에서 주장하는 것이 안토니 후크마가 이야기하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같은 해석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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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4. 중생의 본질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7. 중생과 설교자

  

제8장  돌이킴

제9장  회개

제10장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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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3:3, 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낼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전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된 의미들 중 첫 두가지의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휠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 제8장 참조)과 동일시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위의 (1)의 의미)과 넓은 의미의 중생(위의 (2)에 해당)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지는 것돌이킴

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신다.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3:3, 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낼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전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59p 7줄)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62p 마지막줄) 이러한 신생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165p 6줄~) 중생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활동의 열매이며, 이 열매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  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창조세계의 한 부분인 것을 의미한다.

  

    (168p 6줄~)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중생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말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상과 같은 주석학적 연구에 기초를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힘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한 의미의 중생은(새로운 영적 생명의 심겨짐)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여 일어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행위자이시다. 즉 중생은 "단일적"(monergistic)인 하나님만의 일이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 행위가 아니다. 요한복음서와 서신서에서 보았듯이 중생을 묘사하는 동사는 수동형이었다: "gennethe", "gennethenai", gegennetai", "gegennemenos". 일찍이 에베소서 2:5에서 우리는 매우 독특한 문구를 본 일이 있었다: "우리가 범죄함 가운데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보시다시피 죽었던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살릴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협력하여 자기 자신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하나님만이 일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구원론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배운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찬양을 드리자!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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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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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중생은 일방적이지 상호협력적인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만의 사역이다. 인간의 타락한 자연상태, 유효적인 부르심, 사림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등을 고찰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사실이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를 구별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벌코프는 효력적 부르심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뒤따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죤 머레이는 효력적 부르심이 중생을 선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의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최근의 학자드로는 스트롱(Augustus Hopkins Strong)과 바빙크를 들 수 있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이 사역을 통하여 복음초청을 듣는 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이 두 가지 용어는 결국 서로 다른 비유를 통하여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변화란 곧 새 생명의 부여(중생) 혹은 믿음으로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음(효력적 부르심)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영적 성장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출발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응하고 있다. 중생은 돌이킴으로 발전하여 순종과 헌신의 삶으로 인도된다. 앞에서 본 바처럼, 효력적 부르심은 독특한 삶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그리스도와의 삶, 거룩과 자유와 평화의 삶으로.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즉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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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의 경우에서처럼, 생과 돌이킴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원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사람은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수도꼭지를 틀면 수도물이 나온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수도꼭지를 트는 것과 물이 나오는 것은 동시적이나 구태여 순서를 따지자면 수도꼭지를 트는 것이 먼저이고 그후에 물이 나온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 본 것처럼 중생은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향에서 나타나고 느껴지게 된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적(definitive)이다. 단회적 성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다.................. 중생은 과정이 아니라 한 기점이다. 그러나 성결과 순종안에서 성장의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성장은 성화의 많은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점진적 성화의 첫번째 단계이다.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7. 중생과 설교자

 

(181p) 이제 우리는 한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위에서 본 바처럼,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결코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면, 설교자는 중생에 관해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교인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요3:7). 그러나 그들 스스로 중생할 수 있다고 권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중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남을 받아야 한다고만 외칠수도 없다. 성령께서만이 거듭남을 부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중생의 교리를 어떠한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는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를 지적하려고 한다. 중생은 일반적으로 설교시나, 성경을 가르침받는 동안, 성경을 읽을 때 등에 일어난다. 사도행전 16;14에서 본 것처럼 루디아가 중생하게 된 것은 그가 바울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있을 때였다.

 

다음으로 야고보서 1:18을  보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우리로 그의 피조물 중에 첫열매가 되게 하심이라." 여기에 사용된 "아포케인"이란 동사는 "출생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출생시키다"라는 뜻이다. 15절에도 사용된 바가 있는데 그곳에서 야고보는 죄가 성장하면 죽음을 낳게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17절)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을 주심으로써 그의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셨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신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새 생명의 부여)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 다시 말해서 돌이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새생활의 첫번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진리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된다.

 

베드로가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동사 "아나게나오"는 다시 "출생하다" 혹은 "다시 태어나도록 하다"라는 뜻이다. 본장의 3절(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처럼 본절에서의 의미도 일반적으로 두번째 의미로 이해되었고 NI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25절을 통해 보면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설교된 말씀임에 틀림없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 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의 외적 표출은 말씀을-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여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하여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중생에 관한한 설교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184p 9줄)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 대해서 갖는 설교자의 의무와 특권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경험했던 기적적인 신생의 놀라운 측면들을 기억하고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184p 15줄) 설교자는 중생에 관한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중생이란 새 생명(삶)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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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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