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짜 부활을 믿는가? / 박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마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얼마 전 작고한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부활절만 되면 괴로웠다”라고 고백한 것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설교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어서야 부활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지옥에 가는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 천국으로 가게 될 영원한 운명을 살아서부터 미리 보장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행한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 초점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모여졌듯이 기독교는 한 마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의 목사님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면, 목사라는 직분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인 동행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이 동행해 주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을 한 교인일 수는, 그것도 스스로 칭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잘못을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더러 잘못한다고 야단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는 부활을 믿는 데도 잘못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재림과 부활의 시기와 모습, 휴거, 대 환난, 적그리스도, 천년왕국 등에 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면 실제 삶이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왕자로 태어난 자는 장차 왕이 될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될 때까지 두 가지 유형의 생활양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것이니까 그저 편하게 놀고먹으려는, 심지어 왕이 되면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하지 못할 온갖 쾌락을 미리 맛보려는 왕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왕이 될 것에 대비해 열심히 배우고 훈련을 쌓는 왕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망나니 왕자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보장되다보니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지거나 어차피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쾌락을 더 즐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망나니 왕자는 왕이 된다는 궁극적 운명이 그 전의 왕자로서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오히려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부활이 신자에게 그 이전의 삶 즉 이 땅에서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론 싸이더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기에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인생관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물질로 이뤄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부활이 있으면 이 땅과는 별도로 비물질로 이뤄진 눈에 안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 물질에만 의존하는 인생관을 가짐에 반하여 믿는 자의 그것은 다음 세상을 대비해 물질이 아닌 것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죽은 후의 하나님 심판에 대비해 미리부터 선행을 많이 하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면제된 신자로선 그런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영생이 있다면 이 땅의 삶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갈 찰나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진짜 시민권과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신자의 진짜 인생은 천국에서 시작하기에 이 땅은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의 이 땅의 삶은 왕자로서 사는 것이라면 천국에 가서야 왕으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아니 본격적인 인생은 죽음 이후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왕이 될 것을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보상으로 천국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에 갖고 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에 관한 인식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이 끝나면 천국의 보상이 기다린다는 차원에만 머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경우를 겪더라도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최후의 도피성에 불과해졌습니다. 마치 “결국 나중에 누가 잘 되나 두고 보자. 너희는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간다!” 식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그런 복수 심리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천국에서 마음껏 한을 풀겠다는 기대 심리는 있습니다. 부활이 이 땅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없고 부활로 이 땅의 삶을 보완시키리라 작정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천국 삶의 훈련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고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천국은 죄만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천국은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물질이 무한정으로 많아서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가능하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아예 없고 전혀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죄를 멀리하는 훈련뿐 아니라 물질 없이 사는 법도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 자체를 아예 소유하지 말라든지 돈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선 물질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 자체를 좌우할 만큼 우선적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추하고 더러운 것 하나 없이 진선미가 완벽하게 구현되며 참 사랑으로 섬기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런 삶을 장래 일로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방식대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천국 보화를 평생토록 갈고 닦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가치를 자기가 속한 곳곳마다 심어서 천국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려준 불씨를 어떻게 하든 끄지 않고 천국까지 갖고 가는 것만이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작은 불씨를 천국의 불과 연결시켜 이 땅에 활활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신자는 물질만 목표로 사는, 즉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이 땅에서 물질을 다루는 면에선 당연히 뒤처지며 그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이미 소유했기에 물질에 의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게 됩니다. 고달픈 현실이 육신적 불편은 될지언정 결코 영적인 고통으로 연장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이 땅의 고달픈 삶 자체가 천국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더욱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으면 오히려 불신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동안의 필요만 공급할 뿐입니다. 죽을 때 남는 것은 집, 자동차, 현찰, 본인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눈에 안 보이는 영혼뿐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남지도 않을 것들에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만큼 헛된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소유한 자처럼, 이미 부활을 입은 자처럼 살지 않는 한 세상 사람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미 확보된 부활이 이 땅의 인생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고하는 중심, 바라보는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영원과 이어진, 아니 이미 영원한 존재가 된 자가 일시적인 가치에 영향 받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단지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실현하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물질에 좌우되는 인생들이, 사실은 때로는 그러는 내 자신이 진정 불쌍하게 보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의 노목사님처럼 교인은 되었어도 아직 부활을 진짜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3/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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