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같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며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불과(?)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836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우리 인간들에게는 감각과 감정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무기물질과 물이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아 광합성을 일으켜 유기물질이 생겨나고 이 유기물질들이 결합하여 DNA와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DNA가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크기의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무려 200여종의 다양한 핵산, 아미노산의 질서정연한 결합체라는 사실은 자연적이고 우연한 진화에 의한 생명기원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합니다.

진화론자들은 물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물에 비친 햇빛이 무기물질을 변화시켜 유기물질을 만들고, 그 유기물질들이 결합, 연합하여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물은 물에 섞인 것들을 녹이고 흩어서 분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 백 종류의 핵산, 아미노산이 물 속에서 한 자리에서 생성되어 30억 개가 질서정연하게 조립, 연결되어 DNA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수분이 있으면 다 녹아서 흩어져 버리고 물이 없으면 말라붙어 버립니다. 물속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가설은 억지입니다. 

좋습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물에서 그런 식으로 DNA가 생겨나고 또 원시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칩시다. 그러나 생명이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생명이란 어떤 현상도 아니요 유형적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전기작용도 아니고, 화학작용이나 물리작용도 아니고, 형체도 없고 부피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미세한 조직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것이 살겠습니까? 저절로 생명이 생기겠습니까? 죽은 세포가 도로 살아나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생명이 저절로 생겨난단 말입니까? DNA가 생기고 생명체조직이 생겨나면 저절로 생명이 부여되거나 생긴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약적 억지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생명운동과 감각과 감정의 문제입니다. 처음 생겨난 생명체가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는 생명운동이 필요합니다. 먹고 배설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이를 산소와 결합시켜 에너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먹기 위하여는 먹고자 하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아무 의욕이나 감각이 없이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조그만 생명체에도 주어진 먹고 생존하려는 본능과 생명활동은 결코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든지, 뜨겁게 느껴지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부드럽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맛으로 독성을 구별하는 능력도 생명체가 저절로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뜨겁다, 차갑다 하는 개념조차 있을 턱이 없을 테니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억지는 계속됩니다. 그렇게 생명활동을 시작한 생명체가 분열하여 그 개체수가 증가하는 현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를 단순히 "분열", “진화”라는 말 한 마디로 비판 없는 맹신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열이라니요? 쪼개면 죽어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분열하여 똑같은 개체로 늘어나서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이보다 신기한 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비한 생명체의 분열증식의 신비한 과정은 전혀 설명조차 않고 '분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진화론자들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양심불량자들입니다. 생명체의 분열 뿐 아니라 생식과 온갖 생명작용이 온통 신비인데 진화론자들은 전혀 이를 설명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더욱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감성과 이성은 모든 다른 생명체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라운 지적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적세계를 감지하고 영원을 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 분노와 질투까지도, 모든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랑이 많은 사람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의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과 분노와 격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격정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근원이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질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때로 욱하는 성질을 낼 때가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새파랗게 화를 내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감정을 분출하시고 새파랗게 화를 내시며 욱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았습니다.
모세를 길에서 만나 죽이시려고 하신 것도 그런 한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복지까지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다 처박아(?)놓고 각기 소견에 선한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수백년 동안 실로에서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부 신실한 백성들은 일 년에 한 차례 실로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겨우 일 년에 한 차례 말입니다. 마치 마지 못 해 일년에 한 번 성탄예배에 나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엘가나와 그 아내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의하여 모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먼저 먹고 가로채고 빼앗았으며 수종 드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멸 받던 하나님의 법궤는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까지 강제동원됩니다. 그 날 이스라엘 보병 3만이 추풍낙엽처럼 블레셋 족속에게 엎드러집니다. 수 백 년 동안 홀대받던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 해결사로 투입되자 지금까지 참으셨던 하나님의 분노는 폭발하였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 당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은 그 소식을 듣고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 며느리는 고통중에 아들을 낳고 죽어갑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은 하루에 멸문지화를 당하였습니다.

법궤가 탈취당하여 간 곳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에서 하나님은 다곤신상을 치시고 불레셋 족속을 독종과 재앙으로 치심으로 진노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놀란 블레셋 족속들은 금으로 독종과 쥐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하고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더러운 낯짝들을 어디다 들이미는 거냐?”
그리고 20년 후 사울왕이 죽고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소가 뛰는 바람에 수레가 흔들리자 법궤를 붙잡았던 웃사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감히 나를 붙잡아?”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이렇게 표독하리만치 신경질적인 반응에 놀라서 법궤를 모시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머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과 그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다시금 법궤를 모셔오게 되는데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춤을 추었던지 옷이 내려가 벌거벗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니셨는지를 생각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조그만 행동에까지 웃고 우시고 토라지시는 것을 생각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슬프게 만들어드리는 일을 쉽게 저질러 버립니다.
못 본 체 외면하고, 무시하고, 내버려둡니다.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뒷방에 내팽개쳐두었다가 한 주일에 겨우 한 번 주일예배에 마지 못 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섬세하시고 더욱 예민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 분과 더욱 가까이 교제하십시오.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
한없이 다정다감하시고 사랑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이 그분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 힘들 땐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외로워 울고 싶을 때 소리쳐
부를 친구가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할 머리가 내게 있어
나는 행복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별의
따스함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슬플 때 거울 보며 웃을 수 있는 미소가
내게 있기에 난 행복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목소리가 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온몸에 힘이 빠져 걷기도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슬픔이 있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내 비록 우울하지만 나보다
더 슬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발이 있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가진 것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편지 하나 보낼 수 있는
힘이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가슴 활짝 펴 내 작은 가슴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어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 만남은 소중해야 하고
인연은 아름다워야 한다
서로를 생각하는 행복넘치는
하루 만들어 가요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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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정권이 국내시장을 개방을 하고 서방 자본을 유치하여 북한 인민들의 오랜 숙원인 경제발전을 통해 잘사는 북한을 만들어 나가야하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통큰 정치로 변신하여 미북회담 할 것을 요구하는 반면

미국은 가장 큰 논제인 대량살상무기 핵시설과 생물 화학무기를 먼저 내려놓으라고 하고 있어
협상에 큰 걸림돌이 걸려 있습니다

이러한 윈윈정책의 중재 역할은 현 정부가 솔직하면서도 국제사회에 신용 높은 전략으로 접근하여 인정받아야 성공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정부가 그간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국제사회에 쌓아놓은 신용이 없어 믿음을 주지않는데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그들 스스로가 주민들을 믿을 수가 없어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고
정권 내에서도 목소리 높이거나 분열조짐있는
반대파에 대해서는 암살 숙청하는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 속에 있는 국가를 운영하는 북한정권을 믿어달라고 하면 과연 어느나라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북한 정권은 믿음을 주는 행동으로 먼저 핵과 대량 살상무기 및 대륙 간 탄도탄 미사일 등의 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을 때 신뢰가 회복되어 외부자본 투자와 개발로 인한 소득증대를 통해 경제성장의 부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통일이란 정권과 정권간 합의에 의해
이루어 지는게 아니라 독일의 경우와 같이 장벽이 주민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진정한 평화 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북한정부는 날로 심해지는 자유 억압과 주석 신격화 사상을 버리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기 바라며

남한 정부는 이러한 국제적으로 믿음을 주지못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오판하지 않도록 설득협조가 필요하며 목소리를 키울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강한 어조로 경고하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근본취지는 국가가 아닌 각 개인과 기업이 가진 자본을 토대로 우수한 기술을 축적하며 가격 경쟁을 극복하는 노우하우가 축적되기 때문에 고속으로 발전 해 나갈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개인과 기업의 부가 축적되면서 국가 경제력의 토대가 되어 선진국형의 고소득 국가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공산 사회주의는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시스템으로 인해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부족하고 서비스 경쟁력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따라가지 못해 각종 산업들이 점점 퇴보의 길을 걷게됩니다

현 정부는 이러한 기업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권익은 앞세워주면서 기업은 옥죄고 가진자의 나쁜면 만을 부각시켜 국민들의 기업정서를 네거티브적으로 각인시켜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현정부는 경제력의 근원인 기업경제를 키우고 육성하여야 국가경제력이 커진다는 것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장래가 걱정됩니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옳바른 지방자치단체 선량과 국회의원을 뽑아 쓰러져가는 국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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