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분의 속성과 사역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신은 그들의 상상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고 그것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시편 저자를 통해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50:21)라고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거룩하심, 의로우심, 주권, 진노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혐오스런 표정으로 나의 하나님은 이렇지 않아라거나 나는 이런 하나님을 절대 사랑할 수 없어라고 외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성경의 하나님과 마주할 때 반감을 드러내며 강력히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그분께 복종할 수 없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개인의 복종과 공로, 또는 신을 기쁘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 없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거나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7:14-24,2:4,5).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런 공포도 내세울 수 없다. 심지어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64:6).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다. 20세기는 인간이 더 위대하고 고귀한 피조물로 진화될 것이라는 낙관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혁신의 시대가 될 것으로 믿었지만, 절망과 혼란으로 귀결되었다.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났다고 가르친다. 자기 혁신을 위한 인간의 시도는 무엇이든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번번히 실패로 끝날 뿐이다.

 

인간의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희망을 붙잡으려면, 먼저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고 스스로에 대해 절망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복음 설교의 핵심 기능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부패한 본성에 속박된 채로 태어나 사탄의 노예가 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공중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2:2).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탄에게 지배받는 길을 선택했다. 회심 이전의 인간은 모두 마귀의 자녀로 불려야 마땅하다(요일3:8,8:44).

 

폴 워셔, 복음, PP 163-167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게 진실입니다. / 폴워셔 목사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시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반응을 요구하고, 또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본문은 복음을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가 그 위대한 가치에 적합한 태도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나님 앞에 섰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여야한다. 이 말은 매우 놀랍고 혁신적인 성경 용어다. 첫째, 서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둘 있다면, 그중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복음과 세상은 서로 유사점도 없고, 친밀하지도 않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혁신인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을 받고 그 요구에 따라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11:1,7,27,벧전1:8).

 

2,000년 전, 반란죄와 신성모독죄로 처형된 메시야를 섬기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과 자치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다수와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고 교회라는 핍박받는 소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뜻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을 위해 온갖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진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것 하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를 증오해 멀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특히 자아)을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의 공로나 선행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선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격과 온전하신 사역만 전적으로 의지한다.

 

셋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오직 예수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2:36). 하나님은 그분의 왕을 거룩한 산에 세우시고, 그분에게 반역하는 이들을 비웃으신다(2:4-6).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그런 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세우신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살라고 명하실 뿐이다. 따라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모든 자율성과 자치권을 복음의 주님께 기꺼이 넘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복음 설교자는 이런 말의 뉘앙스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구도자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정직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또한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놓고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신다(11:28,10:16,3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이다.

 

넷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구원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동기이자 목적이요 원천이시다. 그분은 우주의 중심이시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 전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다.

 

처음 회심했을 때 겉으로 드러난 극적인 현상은 없을지라도, 그 효력은 점차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호수 중앙에 던진 작은 돌맹이처럼, 복음의 파장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장 바깥쪽까지 구석구석 퍼진다. 참된 회심자는 복음을 이전 삶에 추가되는 부가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으로 옛 사람을 대체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옛 삶은 버려진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생명)의 원천이요 유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이미 소유하고 있는 다른 좋은 것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좀 더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장신구가 아니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분 자신이 곧 우리 생명이 되신다(3:4).

 

과거에 아무리 훌륭하던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3:7,8). 비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룬 개인의 업적은 한갓 헛된 허영심을 보여주는 증거물, 곧 눈 깜짝할 새에 무너질 모래성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고 가르치셨다. 어려운 말씀”(6;60)은 그리스도가 단지 삶의 양념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자이시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요, 사막에서 생수를 내는 바위시며, 생명과 열매 맺을 능력을 공급하는 포도나무시다(6:31-35,41,47-51,고전10:4,15:5,6).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자는 양식이 아닌 것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곧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양식을 위해 살아간다(55:2,6:50).

 

설교자는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복음을 맏아들이라고 외쳐야 한다. 설교자는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이 시대의 양식을 버리라고 외쳐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참된 양식이 쌓여 있는 곳간으로 인도해야 한다. 다윗처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34:8)라고 권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분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분의 구원을 진정으로 맛본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 폴 워셔, 복음, pp 22-27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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