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대죄(SEVEN DEADLY SINS)

7대 대죄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 도 폰토에 의해 처음 체계화되었
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덟 가지였으며 인간이 그르치기 쉬운 부정적 성향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들 모두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목록에 ‘질투’를 포함시키고 기존의 ‘교만’과 ‘허영’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17세기에 이 목록은 다시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멜랑코리’를 더
이상 죄에 포함시키지 않는 대신 ‘나태’가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7대 대죄는 교만, 질투, 탐욕, 분노, 탐식, 음욕, 게으름을 가리킵니다.

1) 교만
교만은 라틴어의 Superbia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 오만, 자만심 거만함, 무례함을 말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첫 번째 계율인 ‘너희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에 반하는 죄악입니다.

랍비 아딘 스타인살츠의 ‘교만’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이 곁다리에 불과한 비교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애 쓴다면 빈 껍데기들만 발견하게 된다. 이 빈 껍데기들이 그럴 듯 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자신을 톰의 친구, 딕의 아들, 대단한 자리에 있는 중역, 이러저러한 업무를 하는 누구로 정의 내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은 모두 우리들의 한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들은 대개 비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눈에 띄고자 하는 이들의 특성이다. 진실한 단 하나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이루어진 다음부터 모든 것은 이치에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위대한 의미에 눈뜨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만심일 뿐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커다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경에는 ‘교만’에 대한 경구가 씌어 있습니다. ‘만약 꽃병에 물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을 나르려고 하기보다는 꽃병을 가득 채우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가 칼날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아놓는다면 칼날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금과 옥이 방에 가득하다면 그 주인은 그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재산과 명예가 오만함으로 이어질 때 틀림없이 악이 뒤 따른다.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다해 이름을 얻기 시작할 때 일이 완수되자마자 지혜는 미망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성경 말씀에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에서는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언 13장 10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잠언 21장 24절)

2) 질투
질투는 라틴어 Invidia에 그 어원이 있습니다. 질투는 고통과 분노가 혼재하는 감정이자 타인의 번영과 행복에 대해 불쾌하게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마음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질투는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한 십계의 마지막 계율을 반하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질투는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창세기의 한 대목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신께서 아벨이 바친 재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카인의 재물에는 만족스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카인이 굉장히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지니까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화가 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느냐?’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신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어야 했네. ‘왜 화가 났느냐? 내가 너의 재물을 받지 않아서냐, 아니면 내가 아벨의 재물을 받아서냐?’

작가 지오바니 파피니는 “내가 내 자신을 비하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최고의 길은 더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밑바닥에 떨어지기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자극이 없다면 나는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손상된 명예를 발판으로 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더 아름답게 다듬고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를 없앤다.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자아를 완성하는데 협력하게 된다.”

과학자이자 연구자인 윌리엄 M. 셀턴 박사는 ‘질투’를 낙오자들의 전형적 반응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고귀한 사상’ ‘사회 정의’를 이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성전 뒤에 숨어서 현실을 회피한다는 것이죠.

셀턴 박사는 학교가 학생으로 하여금 성공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어떤 성공이든 늘 부패, 조작, 도덕적 타락과 연결시킬 때 상황은 위험해진다고 지적합니다. 성공의 추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학생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는 성공을 증오하는 정신분열적 상태에 빠짐으로써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사회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어둠의 왕자’를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답니다. 2년 동안 사막에 사는 어떤 수도사를 유혹했는데 돈이든 여자든 그들이 가진 걸 다 내밀어도 소용없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유혹하는 법을 잘 모르는구나. 날 따라와서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보아라.”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결한 수도사가 사는 동굴로 날아 갔습니다. 거기서 사탄이 수도사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네 친구 마카리우스가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승진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도사는 하늘에 대고 욕을 퍼붓더니 정신을 잃었답니다.

성경 말씀에 요셉이 형들로부터 질투를 받아 형들이 미디안 사람 이스마엘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버린다. (창세기 37장)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하여 다윗을 창으로 벽에 박으려 하였고(사무엘 상 18장 7~11절)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시기를 당하여 불량배들에게 끌어 내려 함을 당하고(사도행전 17장 5~9절)
또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잠언 24장 1절)
이러한 일을 경계하는 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 있지 못함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20~21절)

3) 탐욕
탐욕은 라틴어 Avariti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 인색함, 비열함에 대한 과도한 맹신을 뜻하는 말이지요.

인색(탐욕)을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계율(내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과 열 번째 계율(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에 반하는 것이라고요.
탐욕은 쾌락 또는 소유에 관한 무절제한 성향입니다.

“사막의 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련수사가 대수도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성자이시여, 제 가슴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제 영혼은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대수도 원장이 수사에게 병자성사에 같이 가자고 말했습니다. 환자의 가족들을 위로한 대수도 원장은 집 한구석에 여행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삼촌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들어 있습니다,’ 환자의 조카가 대답했습니다. ‘삼촌은 그 옷들을 입을 적당한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샀지요. 하지만 가방 안에서 썩고 있습니다.’ ‘저 가방을 잊지 말거라. 그곳을 떠나면서 대수도 원장이 수련수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네 마음에 영적인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사용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 보물들은 썩어 사라질 것이다’

수백 년 전 랍비 모세 벤 마이몬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이름의 사자를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신의 영원한 섭리는 자신으로 하여금 인간의 건강을 돌보게 하는 것이라고요. 그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사랑이 매 순간 나를 인도하게 하소서, 탐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 혹은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에 나의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함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도덕경”에는 ‘갖가지 색깔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온갖 음악이 인간의 귀를 먹게 한다. 기름진 음식이 사람의 혀를 버려 놓았다.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분노와 과격한 열정을 심어 놓는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위험한 장애물을 낳기에 화를 초래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현자는 피상적인 것을 거부하고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 전서 6장 9절)

4) 분노
분노는 라틴어 Ir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성마름, 노여움, 분개, 복수심을 뜻하는 말이지요. 가톨릭교회는 “분노는 단지 타인을 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에 증오의 씨를 뿌린 우리 자신에게도 분노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자살로 끝이 난다. 우리는 단죄와 형벌이 신에 귀속된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예배당에 함께 기거하던 두 현자가 어느 날 담소를 나누었답니다. 한 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싸움 한판 합시다. 이렇게 고립된 생활을 하니 인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소, 싸움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끝내 인간을 괴롭히는 정념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어떻게 싸움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렇게 해봅시다, 내가 이 벽돌을 여기 가운데에다가 놓을 테니 당신은 벽돌이 당신 것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아니다, 이 벽돌은 내 것이라고 반박하겠소, 이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면 결국 싸우게 될 것 아니겠소.’ 그래서 두 현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싸우는 방법을 모르겠다던 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이 벽돌은 당신이 가지시오, 싸움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싸움은 불가능합니다.’

재니스 윌리엄스(Janice William’s)라는 분은 45세에서 64세까지의 연령대에 속한 13,000명의 행동을 연구한 결과, 심하게 화를 내고 또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역경에 빠졌을 때 좀 더 차분하게 대하는 사람들 보다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세 배나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매번 화를 낼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에 추가로 방출되기 때문이랍니다. 아드레날린 농도가 강해지면 심박수가 증가하는 동시에 혈관이 좁아져 혈압이 높아지고, 이런 증상이 반복되다 보면 일반적으로 심장마비와 관련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는 심장이 뛰는 속도가 변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맥에 쌓인 지방이 갑자기 팽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론 G. J의 책 ‘부정적인 감정, 화와 증오’중에서)

도덕경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모든 무기는 악의 도구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라면 절대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해선 안되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군주가 가치를 두는 것은 고요함과 평안이다. 군주에게 무력으로 얻은 승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도덕경은 군주의 분노가 살육을 부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력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즐긴다는 뜻이다. 살육을 즐기는 사람이 제국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힘을 꺾고 싶으면 먼저 상대의 힘을 북돋아야 하고, 때려 눞히고 싶으면 먼저 일으켜야 하며,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선물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이리하면 약자가 강자를 이길 것이다.”

성경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욥기 5장 2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시편 37편 8절)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29장 22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자의 분노는 이 돌보다 무거우니라.” (잠언 27장 3절)

5. 탐식
탐식은 라틴어 gula에서 온 여성 명사로 과다하게 먹고 마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탐식은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무절제한 욕망입니다. 인간은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보다 음식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내보여서도 안 됩니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술에 취하는 것은 완전히 몰지각한 행동이며 대죄라고 말합니다.

에보트 신부는 한 수사와 함께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최고의 음식을 내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수사는 단식 중이었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수사는 콩 한쪽을 집더니 천천히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나오자 마자 에보트 신부가 수사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당신의 고결함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단식 때는 식사 초대에 응하지 마십시오.’

현재 개발도상국의 기아 인구는 7억7천7백만 명에 달합니다. 1996년 열린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목표수치(1990년부터 1992년 사이의 기아 인구 팔억1천5백만 명의 절반)를 2030년까지 달성할 수 있을지 불투명합니다. 이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영양 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수가 1억9천4백만 명에서 2030년에 1억8천3백만 명으로 밖에 줄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자 우와이스를 만나고 싶어하는 빵 굽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와이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그 빵집에 가서 빵 하나를 집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빵 장수는 그를 때리며 길바닥으로 내쫓았습니다. 이를 본 우와이스의 제자가 말했습니다. ‘미쳤군요! 방금 내쫓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스승님입니다.’ 빵 장수는 깊이 뉘우치고서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우와이스 말이 자신과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빵 장수는 그들을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가서 가장 비싼 음식들을 주문했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이렇게 구별하는 걸세, 저 사람은 내가 유명하기 때문에 금화 열 냥을 들여가며 진수성찬을 대접하지만 배고픈 거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네.’

하나의 바퀴를 완성하려면 바퀴살 서른 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퀴 가운데의 빈 공간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빈 공간이다.

성경에 “술을 즐겨 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 임이니라.” (잠언 23장 20절~21절)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언 21장 17절))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잠언 23장 2절)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잠언 28장 7절)

6. 음욕
음욕은 라틴어 Luxuria에서 파생된 여성 명사입니다. 호색, 육욕, 음탕함을 뜻하는 이 말은 식물의 무성함 또는 수액의 충만함으로 정의되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성적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욕구를 ‘음욕’이라고 말합니다. 욕망과 행동에 있어서 신의 목적은 배우자 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조화시키고 자식을 얻는 것입니다. 음욕은 여섯 번째 계율 ‘간음하지 말라’에 반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우화가 있습니다. 주와 우는 사찰에서 일주일 참선을 마친 후 귀가했습니다. 그들은 유혹이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둑에 도달했을 때, 한 아름다운 여인이 강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는 그녀를 안아 강을 건너 주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어느 순간 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혹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자네는 그 여인을 팔로 안았네, 그건 죄악이 자네 영혼에 스며들 기회를 제공한 거네.’ 주가 대답했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우러나는 대로 행동한 걸세, 나는 그 여인을 건너게 한 후 강 반대편에 남겨놓고 왔네, 그러나 자네는 계속 생각 속에 그녀를 담아두고 있네, 그러니 자네가 죄에 더 가까이 있는 걸세.’

또 한 창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썼답니다. ‘나는 남자와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350 스위스 프랑을 벌었다. 나는 과장되게 행동했다. 만약 옷 벗는 시간, 좋아하는 척 꾸미는 시간, 뻔한 이야기들로 잡담하는 시간 그리고 옷 입는 시간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이 한 시간은 실제로 행위를 하는 데 드는 11분으로 줄 수 있을 것이다.
11분, 세상은 겨우 11분밖에 걸리지 않는 무언가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사람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느라 애쓰고, 제네바 호수 주변을 같이 산책하고 싶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다른 여인들을 쳐다보고, 자신들이 입을 비싼 옷을 사고, 그것보다 더 비싼 옷을 자신의 부인을 위해 사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기 위해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화장품, 다이어트, 운동, 포르노, 권력이라는 거대산업을 부양하는 것은 바로 하루 24시간 중 이 11분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들의 부인과 매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렇다. 하지만 ‘매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진짜 터무니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 여자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에 대해, 돈과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문명에는 아주 큰 결함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간음과 탐욕과 악덕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장 22절~23절)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求?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잠언 6장 32절~33절)

7. 게으름
7대 죄악 중 마지막인 ‘나태’(게으름)는 라틴어 Prigriti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매일 땀 흘려서 빵을 벌어야 하고 일신의 안일과 당장의 결과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태는 육체적, 정신적 노력의 결핍에서 오며, 영혼을 타락시키고 결국 비탄과 우울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죠.

후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자마자 자신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에서 그리던 안락함과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때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됩니다. 무슨 음식이든 실컷 먹고 재미있고 즐겁게 지내세요.” 후안은 너무 기뻐서 그가 살았을 때 꿈꾸던 것들을 다 해봤습니다.
몇 년 동안 즐겁게 지내던 후안은 어느 날 하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미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했습니다. 이젠 약간의 일이 필요합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 싶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일입니다. 이곳엔 전혀 할 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지루하게 살라는 말입니까? 차라리 지옥에 가겠습니다.”
그러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도하게 일하는 사람과 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똑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겪는 자연스런 문제들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현실이나 삶에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출처-강박적으로 일하는 사람=The compulsive worker, 옥스포드. 2001)

불교전통에서는 영혼의 깨우침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 중 하나로 ‘나태’를 들면서 이것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나태로 항상 같은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나태로 용기를 잃거나 자극이 없을 때이고, 마지막 무관심의 나태는 모든 일이 다 무의미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19장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19장24절)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언 22장13절)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24장32절~34절)

작가의 말
우리는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지? 비록 내가 원했던 곳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고 가족을 부양했으니까 이 모든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일까?
빛의 전사는 ‘깨달음이 긴 과정이며 원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명상과 노동을 균형 있게 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착하면 우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질문 속에 나태와 냉담이 싹트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잘 해냈지만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결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결과는 언젠가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올로 코엘료가 인간의 7대 죄악을 논한 에세이를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을 발췌하여 수록 가필하였습니다.
유네스코의 ‘영적 집중과 상호문화교류’ 프로그램 특별자문위원회이기도 한 코엘료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도교 등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끌어오고 현대 문명이 범한 잘못을 지적합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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