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성신과 종말론 / 리처드 개핀

 

 

3. 하지만 성신의 사역의 종말론적 양상을 가장 현저하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는 성신을 '보증'과 '첫 열매'로 표현하는데, 그가 이러한 용어들을 써서 성신에 관해 가르친 데에는 교회가 현재 성신을 받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잠정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종말론적임을 알리려는 구체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아라본'(보증)과 '아파르케'(첫 열매)라는 이 단어들은 성신의 역사를 바울 종말론의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 안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에베소서 1:14은 성신께서 "우리(곧 교회)의 기업에 보증"이 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명백히 종말론적 범주에 해당합니다(참조. 특히 1:13과 4:30; 5:5). 그리고 로마서 8:23과 고린도후서 5:5은 성신께서 신자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 즉 육체의 종말론적 존재에 대한 '첫 열매'와 '보증'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성신에 대하여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한 목적은 교회에 임재해 계시는 성신, 곧 모든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풍성하고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신께서 마지막 날에 치를 금액의 첫 지불금이심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이 첫 지불금은 그 자체가 종말의 실현입니다. 성신께서는 종말론적 존재의 첫 지불금이십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의미에서, 성신께서는 신자들이 이미 처음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온전히 받게 될 것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성신의 역사는 육체의 부활로써 온전히 성취될 종말론적 변화를 미리 잠정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두 단어는 바울이 성신께 관해 생각할 때 그 방향이 현재로부터 미래로 움직이지 않고, 미래로부터 현재로 움직였음을 보여 줍니다. 즉 미래가 현재의 연장이라기보다(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긴 하지만) 현재가 (종말론적) 미래를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와 온전히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주의에서 취한 역사적-종말론적 구도를 근거로 성신과 연관된 권능을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6:4-5).

 

사도 바울이 성신의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은 위대한 부활을 언급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는 42-49절의 단락에서 신자가 장차 입을 부활의 (종말론적) 몸을 묘사하기 위해서 '신령한'(spiritual, 프뉴마티콘. 44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형용사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적인 것, 곧 정신에 적응되거나 정신의 지배를 받는 몸도 아니고, 본질적인 것, 곧 부활의 몸이 지닐 것으로 추정되는 비물질적인 영적 실체도 아니며, 다만 성신의 활동입니다. 사도의 논지는 종말론적 특성들을 지닌 부활의 몸이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성신에 의해 철저히 변화하고 새로워질 것이므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만한 한 단어가 구체적으로 '신령한'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단락은 종말에 성신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우주적인 차원의 것임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사도는 단지 관념적으로 부활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자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맥락이나 상황도 함께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가 부활 전의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할 때(42-44절), 그 근거를 각각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대조하는 데 두는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45, 47-49절). 따라서 마지막 아담과 관련되시는 성신께서는 다름 아닌 새롭고 종말론적인 창조 질서의 모든 양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주적인 규모로 수행됩니다(참조. 롬8:19-2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추상적이고 독립된 종말론적 원리들로, 즉 다소 고립된 영적인 교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교훈을 사도의 교훈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적-역사적 관점과 관련지어 다루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하반절)

 

내 판단으로는, 이 절을 주의 깊게 해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영'(프뉴마)은 성신의 위격을 가리킵니다. 둘째, '되었나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셨을 때 된 일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부활을 기점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에 이루어진 어떤 동일시, 혹은 연합이나 일치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성신론은 물론, 신약 성경의 나머지 상당 부분의 교훈도 주관하는 대단히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성신과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에 관한 모든 사유는 이 동일화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기우이지만, 나의 이 말을 곡해하여 삼위일체를 혼동했다거나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의 위격 구분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삼위일체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를 리 없지만(참조. 예. 롬1:3, 8:3,32; 9:5; 빌2:6), 여기서 그것은 그의 시야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근거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안에서, 즉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는 바에 관하여 말합니다(47절).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눈길을 두는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성신의 하나 됨 곧 동일화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륜적이고 기능적이고 '종말론적'인 동일화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활(영화)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화되셨을 뿐 아니라,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사로잡힌바 되신 까닭에, 두 분이 각자의 사역에서 하나가 되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구체적으로 '생명을 주는', 즉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에서 하나가 되셨기에 두 분을 한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15장의 문맥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이러한 활동(20절)은 여전히 미래에 이루어질 추수, 곧 몸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지금 누구시고 어떤 분이 되셨는가('살려 주는 영') 하는 점 때문에, 종말론적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 하시는 것이 적어도 암시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 신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은 사실상 오순절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한 문장짜리 주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선포하듯이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와 연결된 일이고 단회적이고 영구한 의의를 가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신 강림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는 다소 독립된 활동 영역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순절은 그릿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까지도 밝히 말해 줍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신을 선물로 주신 날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친히 '살려 주는 영'으로서 주님의 교회에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실 때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시어서 자기 자신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선물로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 곧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사고 유형이 요한복음 14-16장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14:12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심'을 전제로 성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약속입니다(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참조. 16:16 이하).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 뒤에 성신께서 오심(참조. 7:39)은 곧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고 약속하실 때(마28:20),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신적 편재(遍在)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성신의 임재와 권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 신약 성경의 이러한 조망을 정리하여 그 주된 논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종말론적 성신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납득할 만한 일반화인지를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이것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성신 안에 있는 종말론적 생명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신과 공유하시는 생명입니다. 신약 성경이 성신께서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일에 관해서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적 생명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약 성경이 현재의 관점이든 미래의 관점이든 부활에 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을 염두에 둡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11에서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들(9절 중)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 원리를 끄집어내는데, 여기서 그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절 상)이라고 말하며, 만일 그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즉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9절 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고 함축적으로 말합나다(10절 상). 짧은 세 문장 안에 가능한 모든 조합이 나옵니다. '너희가 성신 안에', '성신께서 너희 안에',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라는 표현을 사실상 동의어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삶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사용 유형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선행(先行)하고 근거가 되는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는 영'이시고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사실 때문입니다(9절 하). 그리고 11절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의 죽을 몸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성신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셨듯이 신자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성신은 종말론적인 부활의 권능이십니다. 성신의 권능은 부활의 권능이기 때문에 성신은 종말론적 영입니다.

 

 

리처드 개핀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의 '제5장 성신과 종말론'에서 발췌(73-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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