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NIV)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을 따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히 다른 점은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창조주 성자하나님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흡사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성자하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었으나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 하였고,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1장 12절) 그런데 바로 다음절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13절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 받고,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에 의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엑 데우 에게네세산”,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출산은 피를 흘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피, 곧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이 들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이 고통의 출산을 통하여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1장 12절만 암송하여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3절 말씀에 얼마나 처절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과 인내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 얼마나 극적이며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가슴을 찢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손에 아들을 넘기셨으며 참혹한 십자가에서 그의 살을 찢어지고 그의 피는 십자가 나무를 타고 대지에 흘러내렸습니다. 그 살과 피는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마다 먹고 마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 전이므로 그렇게 절박하거나 현실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한 번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니 나는 그 속에 포함되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에고 에이미, I am",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께서는 잊어버리시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탄생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생생한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 사람이 십자가 아래 엎드려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의 십자가의 고통, 피를 흘리며 출산하는 그 고통을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다시금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죄악을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시금 당하고 피 흘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낳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 단 한 번 십자가 사건으로 무더기로,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영어로 읽어 보십시오(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욱 분명합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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