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기독교적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천국과 지옥과 관련한 논의의 우주적 특성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직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이후에 인간이 궁극적으로 상속하게 될 것과 연결된 주제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종말과 함께 인간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이며, 그곳이 천국 혹은 지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서 성립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죽음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정상적인 사망인 경우 무덤에 놓이거나, 화장의 경우 신체의 일부를 구성했던 뼛가루는 공기 중으로나 바다나 혹은 강물에 뿌려지거나, 혹은 바다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죽은 후 사체가 수습되지 않아 바다에서 유실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어떻게 될까? 유교에서 이야기 하듯, 죽은 후 영혼이 살던 집 주변을 3년 정도 떠도는 신세가 되는가? 혹은 이런 착상을 가져다가 악용하여 인간이 본래 수명이 120년인데 다 못 채우고 죽은 경우 나머지 기간 동안 구천을 떠돌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귀신노릇하며 살면서 그 기간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인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죽음과 함께 처하는 상태를 하데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시점이 하데스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리스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쉐올인데, 국역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음부라고 번역되곤 한다. 그러니까 죽은 자는 음부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음부에는 두 구별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파라데이소스이고, 다른 하나가 게헨나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고, 게헨나는 죽은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면 영혼은 이곳에 언제 들어가는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아주 명쾌하게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자마자 즉시로 파라데이소스에 들어간다고 고백한다. 비록 동일한 신앙고백서가 불신자의 영혼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동일하게 죽음과 함께 즉시 게헨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영원한 상태는 아니다.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제한되어 있다. 일종의 막간의 기간이라고나 할까.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개인이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재림할 때에 파라데이소스에 있는 영혼이 무덤에 있는 자신의 육체와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한 그리스도인과 같은 상태를 누리게 된다. 그 후에 게헨나에 있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각각 제 몸과 연합되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살아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의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친히 재판하는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과 함께 영으로 파라데이소스 혹은 게헨나에 들어가 있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 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와서 육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간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간기 상태 혹은 잠정적인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에 거하는 영혼들은 각 상태의 특징에 따라 안식을 취하거나 혹은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안식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중에 완성된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하게 될 그것과 질적으로 연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그림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가운데 주어져 있다. 물론 이 비유는 사실관계를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화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그 자체로 거짓된 내용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문맥상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초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상태라는 그림을 차용하여 설명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사로가 거하는 곳에는 안식이, 부자가 거하는 곳에는 고통이 하나의 실재로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영혼이 각각 제 갈 곳으로 들어간 후에는 패자부활전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육체를 입고 살아갈 때에만 사후의 삶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 사후에는 사후의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영영 다시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을 때, 이곳에서 복음을 가지고 수고하는 분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주의력을 가지고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만이 사후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독특한 곳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 사이는 건너가거나 혹은 건너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각각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어서 뒤섞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하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의 이름을 귀히 여기고 주님의 백성으로 산 삶을 위로하고 안식으로 보상하는 반면에, 게헨나에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 그동안 거짓으로 꾀어낸 사람들의 분노와 폭압이 지배할 뿐 자비로운 하나님의 일반은총조차도 제공되지 않아서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곳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질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삶을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는 그 자체로 천국과 지옥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상속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린도교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순수한 영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은 부활의 날에 썩을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몸을 입으며,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되며, 병약한 몸을 벗고 강한 몸을 갖게 되며, 육신의 소욕이 거하는 몸을 벗고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는 몸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부활한 몸은 지금과 연속된 차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불연속된 새로운 차원을 갖는 실제적인 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런 부활의 몸을 갖고 있는 자들이 상속하게 되는 영원한 삶의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장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아직 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상태라고만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활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부활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성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지옥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성경을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그들이 거할 장소에 대하여는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는 반면에, 비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실체와 거할 장소에 관하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경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고려하면서 성경이 안내하는 곳까지 따라가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천국(天國)이라는 표현은 사실 마태복음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지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신국(神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주요 청중으로 삼고 기록된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신명(神名)과 관련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습을 잠시 기억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하나님을 하늘로 부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표현인 셈이다.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는 결국 성경은 하늘 어딘가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2000-4000억 개에 이르는 은하 밖의 어느 공간이라든지 혹은 태양계 밖의 어느 특정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인간이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자처하는 곳을 의미하며 그 공간은 여기든 아니면 다른 공간이든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잭 뉴턴의 시대만 해도 상대공간과 절대공간이라는 구별을 유지했다. 상대공간을 벗어난 공간이 절대공간이 되고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쉽게 말하면,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자리한 방배동은 서울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있고, 서울은 대한민국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대한민국은 아시아란 상대공간 안에, 아시아는 지구라는 상대공간 안에, 지구는 태양계라는 상대공간 안에, 태양계는 다른 은하라는 상대공간 안에, 그 은하는 또 다른 은하의 상대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상대공간이 끝나는 지점이 절대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공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인스타인을 거쳐 스티브 호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공간개념을 상대와 절대라는 개념에서 차원개념으로 전환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인류가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공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간이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삶만을 열어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는 무려 9차원 혹은 12차원까지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 인간의 몸은 3차원은 기본이고 4, 5, 6, 7, 8, 9차원에까지 참여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개념이 지금 현재의 개념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만큼 확장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부활의 몸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변화되고 또 그렇게 경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심지어 예수조차도 한목소리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세계가 변화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이 명확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하나는 죄가 창조세계에서 제거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세계가 홀연히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수까지도 한목소리로 만물이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에 이를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은 홀연히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를 드러내게 됨으로써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살기에 적합한 구조로 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냐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냐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 다스림으로써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눈물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신하와 백성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자신의 백성인 인간을 다스리는, 인간은 진정한 왕을 모시고 그 왕이 베푸는 영원히 지속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상태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열어 보여주는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인가? 사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인 언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장소라는 점과 그 장소에서 마귀와 그 졸개들과 그들을 섬겼던 악한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인도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옥과 관련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지점까지 성실하게 따라가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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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






1. 들어가는 말.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었던 이 장림 목사의 시한부 종말론이 신학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 기독교계를 강타한(1992년) 이래로 종말론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생존의 위기인 환경문제가 대두된 이래로 관습적이고 교리적인 종말론은 오히려 묵시적인 우주적 파국과 연결되어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인류멸망을 계속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필요성과 이유 때문에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더욱 시급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약의 종말론이 방대한 연구과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의 연구대상인 신약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안에 담겨있는 예수의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학계에서 200년 이상 줄곧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되어갈 전망이다. 이러한 신약학계의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지금까지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것에 관한 제학설들을 연구사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A. Ritschl은 “윤리적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고 공동체 내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인도하길 원하는 목표인 최고선(最高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에서 우러난 상호간의 행위를 통하여 실현되는 인류의 윤리적 공동체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자란다.

이 견해에 반대(反對)하여 J. Weiss는 “철저한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엄격히 미래적이고 초(超)세상적인 크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서 가까운 미래에 아직 그 세대 내에서 우주적인 파국을 통하여 동터온다.

이와 같은 철저한 종말론으로부터 R. Bultmann(과 M. Dibelius)은 “현존적 종말론”(die aktuelle Eschatologie)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묵시론에서 빌어왔고 한번도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하여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최후(의 날)를 선포한 선지자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임박한 세계 전환기에 대한 신화적 선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는 세상에 반대하고 하나님을 찬성하는 결정적인 결단이 자기의 말씀에 대하여 지금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 둘러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입장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며, 그리고 그의 결단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의식은 결단의 시간이 세상에서 바로 여기에 와 있다는 의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하여 C.H. Dodd은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윤리가 아니라 능력이다. 이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앙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의 영향력 있는 관철인데 예수의 오심 안에서 이미 현재적이다. C.H. Dodd의 영향을 받은 J. Jeremias는 그의 설을 수정해서 대안으로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을 예수의 비유연구를 통하여 제시한다.

불트만과 아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 H. Conzelmann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적 종말론”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에게는 그렇게 가까이 있어서 그것은 이미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없다. 관찰자가 오히려 완전히 요구되어진다. 예수는 언제라는 질문을 넘어서 버린다. 그의 부르심을 듣는 자는 즉각적인 회개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W.G. K?mmel은 위의 입장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면서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는 예수가 그 자신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영향과 자신의 죽음 후에 그 나라의 궁극적인 실현 사이의 중간시기를 고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미래적 도래를 모두 말했다고 생각한다.

H. Conzelmann과 W.G. K?mmel과는 조금 달리 E. J?ngel은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적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는 불트만이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비유들을 인용하면서 씨앗의 비유는 그 미래적 관점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통치의 미래적인 차원에서 특이한 것은 이 미래가 현재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미래는 장래에 올 그 무엇이 아니라 현재로 투사되고 있는 미래이다. 즉 이 미래 -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 는 예수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 사랑의 제안을 통하여 현재로 투사된다. 신약의 종말론의 전제로서 이런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신약의 종말론(=신약성서 기자들의 종말론)은 다른 신학적 관점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뿐만 아니라 인자의 재림, 성령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등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별히 재림과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저마다 각기 나름대로 종말론을 그가 속해있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재림을 이해하는 대로 전개하고 있다. 재림과 관련하여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이들의 종말론을 연대기적으로 개관하면, 우선 바울은 AD 약 50년에 집필한 그러므로 그가 가장 먼저 쓴 데살로니가전서에 의하면 임박한 재림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생전에 도적같이 임할 “임박한 재림에 대하여 항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권면한다(비교. 살전 4:13-5:11). 거기에 따르면 재림은 꼭 일어나며 그것도 곧 일어난다. 재림 때에 살아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살전 4:15). 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살전 4:17).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임박한 재림을 확언한 바울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것에 관하여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에서 재림 전에 죽는 교인이 생길 것을 완전히 배제했지만 AD 54/55년에 집필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는 죽는 교인이 몇 명 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에 기록한 로마서에서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재림이 지연되고 죽는 사람이 생기자 임박한 재림기대에 대한 표상이 처음에는 수정이 되었다가 더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되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Q저자는 AD 약 50-70년에 집필한 예수의 어록에서 재림의 지연 때문에 임박한 재림 기대를 언제 오실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오시는 재림의 항시 기대로 변경하여 신자들의 나태해짐을 경고한다(마 24:39-51 병행 눅12:36-46). 마가는 유대 전쟁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는 상황적 시점에서 인자 예수의 재림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갖고 그의 종말론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기독론과 구원론과 연결하여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대 전쟁과 같은 시대적 사건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징후이나 그것의 시점은 역사의 마지막 근거이며 지배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로 머물러 있다. 마태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비교. 마 22:1-14) 교회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서 있다고 본다. 그는 재림의 지연 때문에 이 중간기를 사는 마태 공동체는 그 기간의 연장을 계산에 넣어야만 하지만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요한은 임박한 재림 지연의 문제가 더 이상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 1세기의 마지막 십년 대에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재림을 다른 세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이처럼 재림과 관련해서 모든 저자들의 종말론이 각각 특색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전적으로 더욱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이들 중에서 마가복음서 저자와 Q문서 저자이후에 이 두문서를 사용한 누가문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도 이 천년이 지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학적 반성의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고로 이 소고에서는 집중적으로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을 상세히 다루려고 한다.

2.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그의 나머지 신학적인 관점들, 예를 들면 구속사, 하나님의 길, 종말의 역사화 그리고 Elija-revidivus (엘리야-재생) 기독론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종말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관점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1) 누가문서의 구속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한 편집사적 연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H. Conzelmann은 누가를 구속사의 신학자로 보고 그의 구속사는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재림 때까지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이 구속사는 이 두 시점 사이를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한다: 이스라엘, 즉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 (미래적 구원의 선(先) 제시로써)예수의 시대, 예수의 등장과 그의 재림 사이의 시대, 즉 교회 내지는 성령의 시대. 이 세 시대들은 연속성 안에 서있고 이 시대들의 중심은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 “Conzelmann적인 구속사의 세 단계 나눔은 누가에게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란 두 단계 도식에 의해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그리고 교회의 시대가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시대와 성취의 시대가 연속된다. 구속사는 그것에 따르면 창조와 재림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나누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시금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 시대로 이분되고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역시 이분된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소수의 순종적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불순종적인 이스라엘의 거역이라면, 즉 스테반의 설교에 의하면(행 7:2-53: 특히 51절 참조) 성령에 대한 거역이라면, 새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성령에 의해 형성된 새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즉 메시아의 백성의 성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런데 누가가 묘사하는 구속사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가 다루는 문서의 전제일 뿐이고 오로지 새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구속사의 묘사대상이 된다. 이것에 해당하게끔 누가복음이 메시아 시대를 다루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누가의 두 문서가 다루고 있는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이 역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행 13:23) 다윗의 위에 앉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한다(눅 24:21; 행 1:6)는 것이다. 이 역사는 상세하게는 부분적으로 이사야의 종말론적인 역사상에 기대어서 전개된다. 이렇게 주제를 기댈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혀짐(비교. 사 6:9-13), 메시아의 탄생(비교. 사 9:1-7)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써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미래적인 번영(비교. 사 37:31f.)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누가가 그의 두 번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닫혀짐을 이사야서의 인용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이 기대기의 첫 주제를 나머지 두 주제들과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인들을 그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이사야의 부름과 파송을 통하여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닫혀지게 했다. 그들의 닫혀짐의 기간은 한정된다(비교. 사 6:9-11). 닫혀짐의 해소는 메시아 희망과의 관련성 속에서 약속되어진다(비교. 사 29:17-19; 35:5-6). 그러나 우선은 그들의 닫혀짐에서 멸망과 추방의 하나님의 징벌이 따라온다(비교. 사 6:11-12). 이런 파멸 때에도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살아 남는다(비교. 사 1:7-9;6:13;10:18-23;17:4-6;30:17).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주를 진실하게 의뢰하는 자(사 10:20)들로 “하나님의 심음”이고 거룩한 씨로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사 6:13)이다. “이때 씨의 상을 통하여 남은 자는 새 창조임을 시사한다.” 새 창조로서 남은 자는 메시아와 관계를 갖는다(사 4:2ff.).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 내에서 ‘남은 자’를 상징적으로 구체화한(비교. 사 8:16-18; 1:9;7:10f.;11:1ff.) 그리고 임마누엘 이름과 사 9:5을 통하여 지시되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새로운 공동체가 의거하는 원인이다.”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근간은 이 원인에 의해 새로이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사 37:31).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남은 자로 된 이스라엘의 새롭게 된 형성은 실현될 것이고(비교. 사 37:32b) 이것은 궁극적인 언약에 해당한다. 이 이사야적인 이스라엘의 닫혀짐의 해소와 그루터기의 개화는 궁극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누가에게 중요한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 도식에 따르면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그런고로 누가가 묘사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대체로 이사야의 예언적 역사 상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반부인 메시아의 시대는 구속사에 있어서 “큰일”(눅 1:49)에 해당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러나 메시아의 공적인 사역의 길은 세례요한에 의해 준비된다. 그는 참회의 설교와 죄의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물세례를 통하여 준비된 백성을 예수의 사역에로 예비한다(비교. 눅 1:17;3:1-22). 그는 예비된 백성에게 오시는 “더 강한 자”, 즉 메시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 그의 선포에 따르면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 메시아의 시대에서 메시아인 예수의 공적인 사역은 세례 받고 기도할 때 그에게 성령의 임함으로 시작된다(눅 3:21-22). 성령에 충만한 예수의 사역의 과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함과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이외에 이사야적인 역사 상에 따라 눈 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눅 4:18-19). 이것은 이스라엘의 희망의 성취로서 닫혀짐의 해소를 의미한다. 바로 이 메시아 적인 사역으로서 눈을 떠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 즉 이스라엘의 구속을 이스라엘의 경건한 부분의 사람들이 고대하고 희망해 왔다(비교. 눅 2:25-38). 이 과제에 따라서 예수는 사역의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파송과제를 선포하고 이어서 고향 마을의 청중들의 닫혀진 눈과 귀를 열려고 시도하나 그들이 거부함으로 실패한다(비교. 눅 4:16-30). 이 과제의 성취는 부활절 이후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거부된 첫 시도 후에 곧 제자들을 부르고(비교. 눅 5:10-11.27) 사도들을 선택한다(비교. 눅 6:12-17). 이들은 세례요한에 의해 주께로 돌아온 많은 이스라엘인에 속하고(비교. 눅 1:16; 3:1-21) 주를 위해 예비된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이룬다(비교. 눅 1:17;3:21).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서 개화한 주를 위한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인 셈이다. 열두 사도의, 즉 “하나님의 백성(역자 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선택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의 재건에 해당한다(비교. 행 15:16).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과 게다가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의 선(先) 조건이다(비교. 행 15:17). 예수는 선택한 열두 대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명을 주어 파송한다(비교. 눅 9:2). 그것을 통하여 대표적으로 이미 새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모아진다. 본격적인 모음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닫혀진 부분과 유대인의 지도층은 이에 반하여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한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한다.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닫혀진 눈(비교. 눅 24:16.31)과 열두 사도들의 이성(비교. 눅 24:45)을 열어준다. 이것으로 부활한 예수가 눈을 열어주는 그의 메시아적 과업이 대표적으로 수행된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도들에게만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마침내 닫혀짐의 징벌이 해제되어진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새 가지를 내기 시작한다. 이 새 가지는 예수의 승천 후 성령을 부어주신 후에야 번성하게 된다. 예수의 승천으로 메시아의 시대는 막을 닫게 된다.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하나님의 큰일에 해당하는 메시아의 성령세례로 충만하게 시작된다. 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한 예수는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비교. 행 2:33) 그것을 사도들에게 부어준다(비교. 행 1:26;2:14). 이 성령의 부어주심은 메시아의 성령세례에 관한 예언의 성취이자(눅 3:15f.;행 1:5) 동시에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과 세계적인 선포를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스라엘의 새 열두 지파의 재건된 대표자들의 성령무장 후에는 그들이 다스릴(비교. 눅 22:28-3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모음(비교. 행 2장)만이 남아있게 된다. 이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스라엘 나라”(행 1:6)의 시민은 부어준 성령과 사도적 선포를 통하여 모아진다. 이 모음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그에 따라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의 편입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에서 종말론적으로 자라난 새싹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계속성안에서 단순한 이스라엘, 즉 옛 하나님의 백성에게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에게서 발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그리고 동시에 구속사적인 불연속성안에서 메시아적이고 종말적인 새창조이다. 메시아의 탄생을 통하여 그리고 열두 사도의 선택을 통하여 새롭게 개화한 그리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 인도되는 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을 모으는 데에 존재이유를 갖는다. 보편적인 선포를 통한 이 이스라엘의 모음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모든 것이 회복될 때까지’, 그러므로 καιροι εθνων (필자 주: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회개의 설교를 들을 때까지(눅 24:47), 재림은 지연된다.” “이방인의 시간으로서 재림까지의 시간은 ... 동시에 계속되는 이방인 선교의 시대이다”.

새 이스라엘의 모음의 시대와 그와 동시에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던 메시아는 땅위의 재앙과 창조질서의 흔들림과 혼돈으로 떨어짐처럼 보이는 하늘의 표시들 하에서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온다(비교. 눅 21:25-27). 다시 오신 예수는 주(눅 19:38;행 10:36), 구원자(눅 1:69f.;2:11;21:28), 왕(비교. 눅 19:12.15.38;23.42)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자(행 17:31;24:25)로서 그것에 해당하는 기능들을 갖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회복하신다(행 3:20f.). 이것은 메시아적인 새창조에 해당한다. 그는 동시에 구속자로서 예수의 제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속할 것이다(눅 21:28). 이 “구속은 여기에서 해방으로, 더 상세하게는 고난과 박해의 끝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 외에도 심판을 행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다(비교. 행 10:42). “예수의 심판자 기능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눅 2:34; 행 3:23). 이 재림 그리스도는 마침내 왕으로서 다윗의 위를 차지한다. 이 등극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 이 때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해있다. 그런데 재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등하다(눅 22:29f.),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없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구속이 가까이 온 것처럼(눅 21:25-33) 하나님의 나라도 끝 사건 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그의 사역과 인격) 안에서 역사적으로 현재적이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구속사 안에서 역사 하는 임박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고로 궁극적으로 재림 그리스도와 함께 온다. “우선 재림은 현재적인 것이 그것의 상(像)인 나라 자체를 가지고 온다.” 그렇다면 예수는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영원한 βασιλευ?(필자 주: 왕)”이며 동시에 항상 이미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βασιλευ?”이다.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통치는 끝이 없다(눅 1:32f.). 그러므로 “오고 있는(필자 주: 재림으로 말미암은) 세대의 전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구속사의 목표이다”.









이 구속사의 개요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

H. Conzelmann의 견해

창조 ?????????????????????????????????????????????????????????????????????????> 재림

이스라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의 시대




본인의 견해

구속사를 계획하시는 분: 하나님



구속사를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분: 성령님





?????????????? 이스라엘의 역사 ???????????????????????????새 이스라엘의 역사??????????????

? ?? ?

? ?? ?

? 성령집중① 성령집중② ?

창조???????????????????????????????????????????????????????????????????????????????????>재림

족장의 시대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의 시대

(메시아) (메시아의 백성)

<??????????????????????????????????????????><???????????????????????????????????????????>

누가문서의 전제적 요약 누가문서의 대상:

누가복음 사도행전

??

성령에 거스르는 시대 <???????????????????????????????????????????>성령에 순종하는 시대



성령이 집중되는 부분: ①눅1:49: μεγαλα

②행2:11: μεγαλεια

결과:

구속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이 계획을 세상에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수행한다: 성령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계속성 안에 있는 순종하는 소수의 이스라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의 계속성을 담보하고, 둘째로 예수 존재의 근거이며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의 근거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예수의 사역에 함께하시사 그의 사역 안에서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인간에게 도래케 하며, 넷째로 그의 승천에 직면하여 재림 임박 기대의 대체가 아니라 예수의 승천과 관련하여 예수를 대체한 종말론적인 선물로 메시아 백성들의(교회) 존재의 근거이며 “그리스도 증언을 위한 결정적인 장비”로 메시아 백성 모음의 담지자이며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일반적인 특성이고, 다섯째로 예수가 주로서 자기의 것들을 섬기듯 예수를 잉태케 한 창조주로서 예수를 섬기는 종이 된다. 이처럼 성령은 전 구속사의 영웅으로 구속사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이 구속사의 중심은, 마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중심이 예수 자신인 것처럼, 예수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다. 왜냐하면 승천한 메시아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예수는 구속사를 주도하는 성령의 주가 되어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구속사역을 계속하다가 왕(메시아)으로 재림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예수가 주이며 왕이며 구속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시는 세대의 전환점인 새로운 시대(재림이후), 우주적인 완성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이다.

이 구속사는 누가문서의 전제가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누가문서의 대상이 되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가 문서에서 전제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의 시대로 나누어지며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와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대비로 특징지어진다. 그 반면에 누가가 묘사한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사에 있어서 각각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비교. 눅 1:49; 행 2:11)에 해당하는 예수의 성령잉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예수(메시아)의 시대와 교회의(메시아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어지며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주도하는 성령에 대한 새 공동체 회원들의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누가적 구속사는 구속사의 목표를 향해 점점 고조되는 역사로 이스라엘 시대보다는 새 이스라엘 시대가, 예수의 시대보다는 종말이 역사화 된 교회의 시대가, 궁극적으로는 재림 이전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재림 이후의 시대가, 더 높은 단계다. 그런데 구속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에 의해 전개되며 나누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서 오시는(비교. 눅 1:68) 길과 동일시된다. 이 길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주의 길”(την οδον του κυριου 행 18:26) 이란 용어로 표시하고 있다. 이제 주의 길 내지는 하나님의 길이 누가문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2) 주의 길.

주의 길이란 용어에 대하여 E. Schweizer는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적게 나오고 또한 주의 길이 구약적인 언어사용법에 있어서 주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품행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대적 서기관에게만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매우 일면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쿰란 공동체는 주의 길이란 용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쿰란-에센인들의 공동체는 자기의 자리 매김을 “광야에로의 이주”(비교. 1QM12)로 표시했다. 그들의 광야에로의 이주는 확실히 예언자의 글인 사 40:3의 요구를 통하여 야기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1QS 8:12-14에는 “만일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 규정들에 따라 이 공동체에 연합하려고 한다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는 기록된 말씀에 따라 광야에 가서 거기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죄인들의 거주장소로부터 떠나야만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쿰란-에센파들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서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른 셈이다.

세례 요한도 에센파 사람들처럼 사 40:3의 요구에 의해 자극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을 그의 광야 체류, 쿰란 사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요단강에서의 설교와 세례가 이야기해준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활동은 분명히 주의 길을, 그러므로 개연적으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함에 해당한다. 세례요한과 사40:3 사이의 결합을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를 들면 마가복음, 어록과 누가의 특별자료 안에서 전승시켰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하나님(특별자료와 Q: 눅 3:3f. 병행 마 3:3f.) 혹은 예수(마가와 Q: 눅 7:24f. 병행 마 11:7f.)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처럼 쿰란인, 세례요한 그리고 기독 공동체들이 “주의 길”이란 어귀를 하나님이나 예수가 스스로 취하시는 길과 관련하여 해석하기 때문에 쉬바이쩌의 가설은 경솔한 것으로 드러난다.

“주의 길”은 그러나, W.C. Robinson이 지적한 것처럼, 누가문서에서 중요한 구성적 사실관련성 안에 서 있다. 이 관련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눅 3:4-6에 있는 사 40:3-5의 인용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미 있다. 공관적 비교에 의하면 누가는 마가복음에서가 아니라 Q에서 따온 사 40:3의 인용을 다음의 두절인 사 40:5까지 확장시킨다. 이 인용의 확장은 누가의 구성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진술(비교. 눅 1:76b-77; 2:30-32; 행 28:28)인 6절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주의 길”이란 어귀와 “하나님의 구원”이란 어귀가 서로 연결되게 된다. 이 이사야의 인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의 길”과 관계를 갖기 때문에 “주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동일시된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마가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은 이미 눅 1:16-17에서 천사를 통해 선포되어진다. 그때 요한의 기능(비교. 눅 1:17b)은 하나님의 길이 약속된 말 3:1의 빛에서 해석되어지고 요한의 사역의 성공과 관련하여 “주 하나님”이란 자세한 규정(비교. 눅 1:16)이 말 3:1에 기대기 바로 앞에 온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의 역할이 재차 Benedictus에서 울려나온다(비교. 눅 1:76b-77). 거기서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예언자로 불린다(비교. 눅 1:76a). 그의 역할이 다시금 말 3:1과 사 40:3-5의 의역으로 해석되어진다. “‘주’는 협의의 문맥에 따르면 자명하게 예언자가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세례요한은 그러므로 Benedictus에서 자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비교. 눅 1:68)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러한 세 구절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길 예비자이고, 주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두 문서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이 진기하게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그의 역할에 의해 겹쳐진다. 광의의 문맥들과 몇개의 진술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도 된다. 누가적인 사항관련성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에 들어 선다(비교. εισοδο?: 행 13:24f.). 그럼으로서 예수의 공적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비교. 눅 22:22) 길을 마땅이 가야한다(πορευεται: 비교. 눅 13:33). 그의 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근거하고 있다. 이 길은 지리적으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통하고 사항적으로는 예수의 올리움으로 끝난다(비교. 눅 9:51;13:31-33). “예수의 올리우심은 누가의 이해에 따르면 단순히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지상으로부터의 빼앗아감 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그것들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퇴장한다(εξοδο?: 눅 9:31). 이 구성적인 사항관련성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로 들어가서 많은 고난을 통하면서 그 길을 가고 마침내 주의 길로부터 영광에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받아서 사도들에게 부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주는 것이 된다(비교. 눅 12:49). 성령세례는 주의 길의 전환점이다.

“주의 길”에 관한 누가적 견해는 마가의 그것과의 비교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이 예수의 세례받음으로 시작해서 그의 부활로 끝나는 예수의 길과 동일시 되는 반면에, 누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은 그 반대로 예수의 길이 그의 올리워 감으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공동체에게 부어진 성령이 주(예수)의 길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주(예수)의 길의 계속되는 지리적인 진행은 복음서의 끝과 행전의 처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눅 24:47)와 “땅끝까지”로 잘 알려진다. “구속사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예수의 길이 예루살렘을 향해 뻗어 나갔드시, 예수 증인의 길도 그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뻗어 나간다.” 예수의 길은 그러므로 주의 길의 진행과 관련하여 증인들의 길 앞에 놓여 있다. 또한 고난에의 그리고 고난을 통한 영광에의 길(비교. 눅 22:22;24:26)로 표시되어진 예수의 길은 (예수의 증인 내지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형(典型)이 된다(비교. 눅 14:27;9:23). “그 길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른다는 것”은 예수에게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유효하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내지는 증인들)의 대표자로서 누구보다도 바울은 예수의 뒤를 따라 동일한 길을 간다(참조. 예수와 바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병행들). “바울의 길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있고(δει: 행 9:16;14:22;19:21;23:11; προχειριζομαι: 행 22:14;26:16: 비교. 10.14; αναγκαιον: 행 13:46)”, 이방인의 구원에 관하여는 예수의 길처럼 바로 그렇게 기능 한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예비하신 구원(비교. 눅 2:30)을 의미하는 메시아이다. 그는 빛으로 역시 이방인들을 비춘다(눅 2:32a). 그는 나사렛에서 “옛 시대에 축복을 받은 비 이스라엘인에 대해(4:25ff.)” 이야기한다.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비교. 행 26:16) 주로 이방인에게 보내어지나(비교. 행 9:15;13:46;15:12;18:6;21:19;26:20), 놀라웁게도 이방인의 빛으로 지정된다(비교. 행 14:47). 바울의 파송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향하고(비교. 행 26:18)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비교. 행 14:46f.;28:28).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들 앞에 준비한 구원을 이방인에게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비교. 행 28:28). 거기에 따르면 바울은 이방의 빛으로서 그들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고 그것을 완성한다. 바울의 길은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계속이다. 이 두 길은 더욱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선교적인 사역의 시작에서 바울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진력하고(행 13:10), 그의 사역 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보내졌다”(행 28:28)고 선포한다. 바울의 전체적 선교 사역이 이 두 단락을 통하여 감싸지기 때문에 구원을 위하여 이방인에게로 통해야만 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바울의 전체 길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울의 길은 예수의 길의 계속일 뿐만 아니라 한 조각 주의 길 자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요약: 만약 누가가 주의 길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그는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는 주, 곧 하나님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세례요한의 준비를 통하여, 예수의 등장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의 증인들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뻗어간다. 예수의 길은 그런고로 주, 곧 하나님의 길의 주요한 부분이나 전체는 아니다. 메시아인 예수의 길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세례이고 성령세례가 주의 길의 전환점으로 예수 증인들의 길을 연다. 이 증인들의 길은 구속사의 마지막 단계인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 전체를 관통하면서 재림까지 뻗게 된다. 성령은 종말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전환점인 성령세례를 통하여 전개되는 이 길은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고조된 길이다. 이제 증인의 길을 통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를 특징짓는 종말의 역사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3) 종말의 역사화.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세례의 실현을 통해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하는 근거도 제공한다. 종말의 역사화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종말시대의 도래와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들의 생각들로 이루어진 관련성은 사도행전의 서두(행 1-2장)에서 잘 나타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었다는 생각은 성령강림사건의 기사(행 2:1-41)에서 특히 민족목록 부분(행 2:5-13)의 구성에서 뚜렷이 반영되고,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강림을 통해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성령강림사건을 해석하는 요엘 인용구(행 2:17-21; 특히 17절)의 편집에서 시사되고 있고, 성령사건들을 추적해서 역사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행 1:4-8에서 편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세 부분을 살펴 보 것는데 편의상 요엘 인용구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1) 요엘 3:1-5 인용구의 편집에 나타난 종말시대의 도래.

누가문서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눅 3:16)과 그것을 새로이 언급한 예수의 예언(비교. 행 1:4-8)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요엘 3:1-5의 성취도 된다. 그런데 누가는 그 오순절 사건을 직접 요엘 인용구로 해석한다. 그 사건의 해석을 위해 사도행전에 사용된 요엘 3:1-5 인용구는, R. Morgenthaler가 지적한대로, 몇 개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우선 이 인용은 셉튜아진타의 요엘 본문에서 και εσται로부터 και εσται까지 선택되어졌다. 이것으로 그리고 πασα σαρξ - πα?로 대체로 인용구 전체의 테두리가 형성된다.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 εσχαται? ημεραι?로 대체함을 통해서 그리고 και προφητευσουσιν의 삽입을 통해서 전체 테두리 내에서 몇 개의 병행적 테두리를 갖는 첫 번째 통일성이 생긴다. 인용구의 중간 조각의 교차 대조적인 통일성은 두 번 삽입한 μου를 통하여 완성된다. 두 번째 중간 조각의 첫 부분에서는 σημεια, ανω와 κατω의 삽입을 통하여 병행적 구조와 그것과 동시에 두 번째 병행부분에 해당하는 통일성이 형성된다. 그런고로 이 인용된 구절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셉튜아진타의 구성양식을 인공적으로 완성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런 인공적인 개선 중에서 우리의 문맥과 관련하여 보면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 εσχαται? ημεραι?로 대체한 것이 특별히 눈에 뜨인다. 이 편집적인 대체를 통하여 요엘 인용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두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들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런 편집적인 작업을 통하여 저자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분명히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종말의 시대가 동터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오순절 사건과 함께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에 걸맞게 오순절에 열 두 사도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동시에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무장을 뜻한다. 성령강림사건으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밝힌 누가는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성령강림사건이 성령세례임과 동시에 이 종말적 시대에 있어서 성령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할 것을 시사한다.

b) 행 1:4-8에 나타난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 의도.

이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과 부활하신 예수의 예언의 성취로 메시아의 성령세례가 된다. 누가가 자기문서에서 주동기로 전개해온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세례기사의 앞에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행전의 서두에서(행 1:4-5) 부활하신 분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다음 처럼 언급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이 선언은 바로 앞에 있는 4절 “몇 날이 못되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약속과 밀접하게 연결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오순절기사를 준비하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의 받음을 성령세례로 규정한다. 여기서 선언되고 규정된 성령세례는 사도행전의 순서와 배치를 언급하는 행 1:8에서 “성령 받음 - 예루살렘으로 부터 땅끝까지의 파송”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것으로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증인사역의 전제로 분명히 그리스도 증거를 위한 파송에로 규정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모든 민족에게로 파송함과 그것을 통한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을 목적으로 하고 이 시대 내에 일어나는 모든 성령부어줌을 규정한다. 거기에 따라 누가는 한편으로 증인의 길의 지리적 정돈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서, 고넬료 가정에서 그리고 에베소 제자들에게서의 성령의 발생을 묘사할 뿐만이 아니라 성령과 증인들에 의한 그리스도 증언의 확장을 묘사하고 그것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한 시각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누가는 여기서 “성령세례”란 주제로 기독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발생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한다고 밝힌 셈이다.

c) 민족목록의 구성에 나타난 종말의 역사화.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는 종말의 역사화를 전제한다.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강림기사 가운데에 있는 민족목록의 구성사적인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이 민족목록은 문장론적인 구조분석을 통해서 보면 “동에서 서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론 서에서 동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구축되었다”. 민족목록 정돈의 원리인 이 “사방 방위”의 주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저자가 민족순례 기사(눅 13:28-28)를 마태와 마찬가지로 ‘Q’자료에서 받아들이나 마태와는 달리 Q의 동과 서의 두 방위를 분명히 동서남북의 네 방위로 편집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목록을 구성하는 사방 방위체계가 민족순례 기사의 편집적 사방 방위체계를 닮았다는 사실에서 저자가 민족목록을 구성할 때 천국잔치에로의 민족순례에 관한 기사를 기대어 민족목록을 조직적으로 배열했다는 결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실마리에 따라 두 기사의 관계를 살펴보게 될 때 이런 결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하여 강화된다: 첫째로, 민족순례 기사의 문맥(비교. 좁은 문: 눅 13:22-27 특히 2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목록의 문맥(비교. 오순절 설교: 행 2:14-41)에서도 동일하게 “구원 얻다”가 다루어진다. 둘째로, 민족순례의 기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순례의 주체자는 편집적으로 표현된 배척 당하는 “행악자들”(눅 13:27)과는 다른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과 비슷하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몰려온 주체는 천하 모든 민족을 대변하는 각처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이다. 셋째로, 민족순례기사는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에 관한 말씀(눅 22:29-30)과 다음과 같은 구성적인 조화를 이룬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와서 순례에 참여하는 의로운 자들은 종말적으로 사도들이 다스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된다. 오순절 기사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적인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다. 오순절에 성령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사도에게 임한다. 이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자 이들 쪽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천하 각국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서 3000명이 오순절 설교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다. 이들이 세례를 받음은 모든 민족 중에서 종말적 이스라엘의 범례적인 모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들은 열 두 사도에 의하여 다스려질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오순절 기사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열 두 사도와 천하 각국에서 몰려와 세례를 받은 범례적이고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적 조화가 반영되고 있다.

이런 구성적 기대기 방법을 통하여 누가는 “모든 민족들을 대표하는 천하에 흩어져 있다가 예루살렘에 우거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장소로 몰려옴을 종말에 동서남북 사방에서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순례의 선취이자 시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놀랍게도 종말을 역사화 한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시민들을 모으기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천국잔치에로 초대하는 첫 사건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종말적인 은사인 성령이 강림한 사건에 관해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는 “성령세례”란 주제로 성령강림사건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구속사를 전환시키는 대망하던 메시아의 성령세례이다. 이렇게 종말이 역사화 되었기 때문에 그는 종말적인 천국잔치에로의 첫 초대를 시사하는 민족목록 기사를 천국잔치에의 순례기사에 기대어 작성한다.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종말적인 성령의 사역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한다.

이렇게 구속사의 전환점인 오순절 성령강림(메시아의 성령세례)으로 부터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시대는 성령과 증인의 사역이 지배해야 하는 시대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한 죄사함의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비교. 눅 24:47ff.) 시대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중요한 전세계에 전파될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는 승천 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부어주신 성령을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를 회복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사역을 계속하시던 예수께서 구속사의 목적으로서 그 끝에 메시아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루실 만유의 회복사역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의 기독론적 정체성(正體性)을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재생한 엘리야로서의 메시아 예수.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는 말라기 3:23f.와 시락 48:10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회복(restitutio in integrum): 회개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복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회복’이고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한 모든 것들의 회복이다. 다시 올 엘리야의 이런 과제에 기대어 누가문서에서는 일련의 예수의 과제가 제시된다.

먼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세례요한이 선포한다(비교. 눅 3:3). 그러나 그의 세례가 죄 사함의 효력을 발생한다고 하지만, 누가문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죄사하는 권세는 오로지 예수에게만 있다(비교. 눅 5:24;7:48f.).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눅 5:32). 이 죄 사함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에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서 계속된다. 성령을 받아서 전 세계에, 모든 민족에게 증언해야 할 내용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다(비교. 눅 24:47f.).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예수의 사역은 재생한 엘리야의 사역인 죄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구속등으로 표현되고, 이스라엘 지파의 열 두 대표자의 회복 그리고 그들이 다스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회복등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관련성을 위하여는 먼저 누가복음의 서론부분에서 이스라엘의 구원(눅 2:25)과 예루살렘의 구속(눅 2:38)은 예수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그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은 메시아 예수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 나라의 열 두 지파의 회복은 대표자들의 회복으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된다. 종말적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의 회복과 그 회복에 해당하는 성령세례 받은 열 두 사도들이 그 나라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사상과 성령사건을 통하여 이 나라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되는 열 두 지파의 회복으로 구성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회복이라고 하는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누가문서에서는 재생한 엘리야의 마지막 과제로서 모든 것들의 회복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재림하신 예수가 궁극적으로 관장한다(비교. 행 3:21).

이와 같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죄사함은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과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이스라엘 나라(내지는 백성)의 완전한 회복과 연결되면서 역사의 끝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와 더불어 메시아가 누구인지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이 메시아 예수는 분명히 Elija-revidivus이다.

이 Elija-revidivus의 모범적 유형(Typus)은 엘리야이다. 말하자면 엘리야는 Elija-revidivus인 메시아 예수의 모범적 유형이다. 엘리야에 관한 여러 동기들이 예수와 엘리야 사이의 많은 병행을 통하여 예수의 유형이 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이 엘리야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과 동등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엘리야-예수 유형에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이 덧붙여진다. 이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도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관계와 이루는 여러 병행을 통하여 밝혀진다: 예를 들면 제자의 부름들이 예수와 엘리야에게서 서로 병행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죽은 자 살리는 치유기적들도 두 관계에서 서로 병행한다. 또한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은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제자 엘리사의 성령충만함을 회상시켜준다. 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은 분명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된다.

위와 같이 엘리야는 메시아 예수의 유형이고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가 된다. 그는 공생애 기간동안재생한 종말적 엘리야로서 일면 엘리야를 모범으로 활동하며 승천 후에는 성령세례 주심과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전세계적 전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새 창조로서 만유를 회복하신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거대한 구속사의 일부인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견해로 주의 길과 종말의 역사화와 Elija-revidivus 기독론과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 안에 서있다. 종말론이 관계하는 그리고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에서 완성되면서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이 구속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누가문서의 대상(對象)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 즉 세례요한에 의해서 준비되고 예수가 가고 그의 제자들이 이어 가는 길의 경로다. 주 하나님의 길의 경로를 통해 엮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구성되어진다. 이 두 시대의 시작점은 두개의 크신 하나님의 일로 점 찍혀진다: 성령에 의한 메시아 잉태와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로. 성령에 의한 메시아의 잉태가 구속사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대적으로 이등분하면서 메시아의 시대를 연다면,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를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면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연다.

두 성령사건으로 이루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종말적 역사로 볼 수 있다. 종말적 역사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도 약속과 성취 도식이 지배한다. 새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누가문서)도 누가문서의 주동기인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과 성취 도식에 의해 역시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뿐만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이등분된다. 메시아의 시대가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을 다룬다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성령세례에 대한 성취를 취급한다. 그런고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가 메시아의 시대보다 종말론적으로 더 점증된 시대다. 이 시대는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이 성취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개막된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실현된 사건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열 두 대표자들을 회복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가 시작되는 사건을 예표적으로 야기시킨다.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인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은 재림시까지 진행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그리고 범인류적인 모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파가 회복된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을 포함한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재림하셔서 왕으로 등극함으로 이루어진다. 재림한 종말적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만유를 회복하신다. 만유의 회복은 새창조에 해당한다.

이와같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구속사의 목적이며 끝인 메시아의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스라엘 나라와 만유의 회복을 지향하며 진행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다시 말하자면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여는 재림은 종말이 역사화 된 시대의 끝에 일어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길은 전체가 종말론적인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큰 일인 성령사건을 통해 일어나는 종말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종말적인 시대에서 종말이 역사화되는 종말론적으로 더욱 고조된 시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단계적으로 종말이 역사화 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구속사적 종말론이다. 이 종말론을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제학설(諸學設)들과 비교해보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J.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과 E. J?ngel의 현재에 시작되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되는 종말론이 결합된 종말론처럼 보여진다. 거기에 따르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은 과거(예수잉태)에 시작되었고 현재에 실현되어가며 미래(재림)에 완성될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흥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성사적으로 중요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누가문서의 저자는 그의 구속사적 종말론과 그의 문서를 전개할 때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적 선포(눅 3:16-17)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가 중요시하는 약속과 성취도식에 의하면 이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선포는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메시아에 관한 선포의 내용으로 메시아의 성령세례와 심판이다. 그는 한편으로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성령세례를 누가문서 구성의 주동기로 삼아 그것의 약속을 누가복음에서 다루고 그것의 성취를 사도행전에서 추적한다. 오순절에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성취된다. 다른 편으로 누가문서 저자는 메시아의 심판을 구속사의 끝인 재림 때로 미룬다. 분명히 그 저자는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종말적이고 동시대적인 두 가지 사역들을 분리해서 구속사의 종말이 역사화 되는 마지막 시대의 첫 사역과 마지막 사역으로 삼는다. 그는 그 사이에 재생한 엘리야로서 메시아의 사역인 이스라엘의 회복의 단계를 삽입하여 종말적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의 내용을 채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문서 저자는 묵시적 종말론, 구속사, 인자의 재림 그리고 재생한 엘리야 기독론을 결합하여 그의 독특한 종말론을 만든 것이다.



[출처] 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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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종말론....

탁영철 목사


 

기독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다고 믿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과 마지막이 언제냐는 문제가 항상 심각한 논쟁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한 관점이 훨씬 더 많이 논쟁거리가 됩니다. ...

특별히 종말시기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1. 시한부 종말론 predicted eschatology 

재림(parusia)의 날짜와 시간을 예고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역사상 많은 이단들이 시한부종말론을 통해 급격히 부흥하고 융성했다가 예고한 날짜가 지나간 후 급격히 사그라졌습니다. 

현세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도 없으며 희망도 없는 사람들은 쉽게 시한부종말론에 빠져듭니다. 

심지어 집단생활을 조장하고 강요하여 일종의 현실도피처를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 13:32-33)


2. 임박한 종말론 impending eschatology

 

마지막 날짜를 예고하지는 않지만 매우 가까웠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정말 교묘한 종말론으로 시한부종말론의 종국을 피하면서 종말론을 이용하여 긴박감을 조성하므로 교회나 선교단체를 급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특별히 어느 이슬람권선교단체는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하며 가정이나 사회를 모두 버리고 선교하러 나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미국에서 시작한 어느 선교단체 같은 곳은 늘 깨어있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개념을 강조하여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신들의 단체를 급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상과 방식을 도입하여 성장시키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선교단체나 교회가 임박한 종말론을 이용하여 현실에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현실도피처를 제공하여 자신들을 급성장시키고 가정을 깨뜨리며 개인의 인생을 망치는 행태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입니다. 


3. 돌연한 종말론 sudden eschatology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예수께서 갑자기 임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앞의 두 종말론과는 달리, 돌연한 종말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현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차리고 더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크리스천다운 인격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등지고 교회생활만 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 교회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한부종말론이나 임박한 종말론의 미혹에 빠져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인간관계를 단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마 5:13-16)

 

[2회 연속]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 종말론 발제(2)
-김광열 교수 ‘개혁주의 종말론의 목회적용’
2014년 04월 01일 (화) 14:44:38 박민균 기자 min@kidok.com

 
종말론 내세성·복음의 현재성 균형 중요

‘총체적 성화의 삶’ 이뤄가는 목회돼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삶 영위하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 가르쳐야


신학부가 주최하는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가 3월 24일 광주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1차 광주호남지역 대회는 종말론을 주제로 문병호 김광열 교수(총신대)가 발표를 했다. 문병호 교수는 현재 한국 교회에 불고 있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김광열 교수(사진)는 목회현장에서 개혁신학 종말론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2회에 걸쳐서 두 교수의 강의 핵심을 정리한다.<편집자주>


   
 
성경에서 종말론은 개인적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하여 설명되는 우주적 종말로 나뉘어 설명되어왔다. 금세기 초부터 성경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신약성경에서 종말이란 그리스도의 초림과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통적으로 ‘세상의 끝’이라는 종말개념(종말론의 내세성)과 함께 예수님의 지상사역 안에서부터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종말론의 현재성)을 말하는 구절들도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음(마12:28; 눅17:21; 마11:12; 눅16:16)을 확인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들을 고려해 종말론 논의에는 오늘을 사는 신자의 삶(예를들면, 성화의 삶 등)에 대한 논의도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이후의 신자의 삶은 이미 종말론적 삶이기 때문이다. 목회사역의 주요한 내용들 속에서도 신자들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삶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내세적 종말론에 치우친 분위기

총신의 개혁주의 종말론은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한 이율서 구례인 선교사의 영향 속에, 박형룡 박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형룡 박사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왕국연기론’에 대해 분명히 비판했다. 또한 박 박사는 신약의 종말개념의 이중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성과 신약의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내세적 삶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내세의 사건들에 더 흥미를 갖고 초점을 맞추어 종말론을 접근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 박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신학과 신복음주의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성경을 약화시키는 모습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종말론의 현재성보다 내세적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화돼야

한국 교회는 90년대 교회성장 정체기를 맞았고 21세기에 더욱 악화되는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교회가 복음의 사회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때이다. 우리가 지켜왔던 종말론의 내세성을 지키면서, 복음의 현재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주의 재림 때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만 관심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서의 현재적 교회의 삶 속에서도 의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종말이해를 제공해준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이미 공급되기 시작한 그 나라의 능력들을 부여받은 신자로서, 이 땅에서부터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제공해주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총체적 성화의 삶을 이뤄가는 목회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중요성과 내세론의 중요성이 함께 균형있게 제시되는 종말론이 요구된다. 목회사역에서도 신자들에게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도록 돕는 사역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포괄적인 관점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주는 개념이 바로 “총체적 복음”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가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삶의 가치들을 구현해가는 부분을 적절하게 취급해주는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성화의 삶”이라고 할 때, 특히, 그 성화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포괄성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해주는 성화론이 바로 “총체적 성화”인 것이다. 총체적 성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화의 삶을 전포괄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성화관이다. 그것은 주님과 연합하여 그 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사건이 주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우주적인 죄의 통치와의 전포괄적인 결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성화란 일차적으로 죄로 물들은 인간의 내적 성품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다. 그것은 죄인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영적 성숙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사회와 국가생활 속에서도 변화를 일으키는 작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8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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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연속]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 종말론 발제(1)
-문병호 교수 강의요약
2014년 03월 25일 (화) 14:22:30 박민균 기자 min@kidok.com

 
“기독론 떠난 자의적 종말론 존립할 수 없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너무 많이 벗어났다”

성경 문자 충실한 해석하려면 먼저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춰야


신학부가 주최하는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가 3월 24일 광주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1차 광주호남지역 대회는 종말론을 주제로 문병호 김광열 교수(총신대)가 발표를 했다. 문병호 교수(사진)는 현재 한국 교회에 불고 있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김광열 교수는 목회현장에서 개혁신학 종말론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2회에 걸쳐서 두 교수의 강의 핵심을 정리한다.<편집자주>


   
요즘 한국 교회에 종말론이 넘치고 있다. 유행하는 종말론을 보면 온건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대부분이다.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종말론을 언급하고 있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종말론은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에서만 합당하게 다룰 수 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종말론을 다루면서 성경해석학과 기독론이라는 두 축을 올바로 붙잡아야 한다. 자의적인 성경해석과 인용은 자의적인 종말론을 배태한다. 자의성은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교리는 성경의 문맥을 진술하는 동시에 성경의 각 구절이 놓여있는 문맥을 제시해 준다. 종말론의 경우,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구속사적-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그 문맥을 이룬다. 기독론을 떠난 종말론은 존립할 수 없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바로 이 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에 대해 기본(성경의 문맥)을 벗어나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태동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전천년설을 세대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신학화 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문제의 핵심은 세대주의 자체의 신학적 결함에 있다. 오늘날 세력을 얻고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다윗 왕국의 통치를 부활 때부터 시작하셨며 교회와 천년왕국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키는 ‘원래적 혹은 고전적 세대주의’와 일관적인 성경해석에 좀 더 주목하고자 한 ‘수정 세대주의’보다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점은 남아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역사를 일곱 단계의 세대로 나누고 각각의 세대에 이상적인 관념을 부여하고자 하는 정통교리로부터 벗어난 비성경적인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종말론과 관련해서는 마지막 세 세대 즉 율법-은혜-천년왕국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 유일성 무너뜨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은 그 중심에 이스라엘 민족이 있으므로 교회는 역사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여 구약의 예언을 이루고자 오셨으나 마땅한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교회를 설립하는데 그쳤으며, 그리하여 본래의 목적이 천년왕국의 때까지 미루어졌다는 연기론(延期論, postponement theory)을 제기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가 두 가지의 다른 복음 즉 초기에는 왕국의 복음, 나중에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우기도 한다.

또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은 근래에 좀 더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중보적인 왕국’(mediatorial kingdom)과 ‘우주적인 왕국’(universal kingdom)이라는 개념을 내놨는데, 그들이 얼마나 성경적 가르침으로부터 많이 일탈해 있는지를 잘 보여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몇몇 사람들을 중보자로 세워 역사상 여러 형태의 지상왕국을 이루어가시던 중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지막으로 우주적 왕권을 수립하고자 하셨다고 한다. 이 일이 처음에는 여의치 않았으나 그가 다시 오시면 이루실 것이니 천년왕국이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이 무색해진다.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의 중보를 완성하기 위하여 오실 뿐이다. 그는 구약의 왕국을 이루실 뿐 자신의 왕국을 수립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신약의 교회에 머물고 만다.


말씀에서 멀어진 세대주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구약 이스라엘 왕국의 완성으로서 유대인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는 천년왕국을 상정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몇몇 궤변을 양산한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7년 대환난 전에 어떤 예고나 징조도 없이 언제든 급박하게 그리스도의 은밀한 공중 재림이 있을 것이며 그때 성도들의 부활과 끌어올림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고 지상에는 대환난이 따른다. 이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왕국 복음이 다시 전파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 7년 대환난 이후에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있다. 이때 생존한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대환난 중에 죽은 성도들은 부활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멸망하며 사탄이 천 년간 결박되고 천년왕국이 건설되어 성전이 개건되고 레위 제사가 복구된다. 더불어 세계의 신속한 회심이 있게 되며 천년왕국에 대한 곡과 마곡의 대항이 있으나 패퇴하여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그리고 악인들의 부활이 있으며 대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뒤따른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문자적 성경해석과 교회와 왕국을 분리하는 근거 없는 이분법에 집중된다. 교회를 역사의 괄호에 집어넣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중의 재림, 삼중 혹은 사중의 부활, 삼중의 심판을 주장하는 그들의 입장은 성경의 말씀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진정 성경의 문자에 충실한 해석을 수행하고 있다고 자처하려면 먼저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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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비판

 

                                              김명도 교수   

   

 

1. '세대주의’와 ‘세대’라는 용어

 

'세대'라는 말의 헬라어 ‘오이코노메오’는 ‘청지기 사무를 보다’라는 뜻으로,

명사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우리말로 ‘청지기’라는 말로 이외에도 ‘직분’, ‘경영’, ‘경륜’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곤 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어떤 일정한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기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즉 세대주의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경륜)이 이루어지는 장(場)으로 간주하고서 시간의 과정 안에서 여러 단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이 성취되어 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단계마다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세대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주의자들은 단계적 세대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삼았는데,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마침내 완전한 종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러한 신학 사상을 가리켜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세대주의 개괄적인 역사와 한국 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

 

‘세대주의’란 19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적) 신학의 경향으로서 흔히 ‘세대주의 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일랜드계 영국인 존 넬슨 다비(J.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그는 변호사였으나 회심이후에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영국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일 년 만에 수백 명의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킬 만큼 유능한 목사였으나, 대주교의 교령에 반발하여 국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리머스 형제단’(Portsmouth Brethren)이라는 신령주의적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신앙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플리머스 교단의 대표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의 예언에 기초한 독창적인 성경해석법을 완성시켜 나가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10세의 어린 성령 운동 지도라는 ‘맥도날드’양의 예언(대환난이 있기 전에 휴거되는 환상)을 전해 듣고서 그녀의 휴거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다비의 대환난 이전의 휴거설과 7년 대환난과 이후에 전개되는 천년왕국 사상이 주장될 때만해도 반대 주장도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의 스코필드(C.I. Scofield) 박사의 손질을 거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무디 성서신학교 출신으로 회중 교회 목사였는데, 다비의 세대주의적 종말 사상에 심취되어 자신의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1917)의 주석에 그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스코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다비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스코필드의 주석 성경의 유명세와 더불어 삽시간에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어느덧 세대주의 종말론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성경적인 종말론 사상으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디 성서학원의 아이언싸이드(Ironside)를 비롯해서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론화 작업과 D.L 무디와 R.A. 토레이같은 유명 기독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9세기 이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확고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종말론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 선교화의 추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 온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이  당시 기독교 종말론의 정설로 인식되던 세대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깊이 관련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세대주의 종말론 신봉론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요한계시록을 많이 강해하신 길선주 목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도 세대주의 종말론의 여자적 논리성에 매료되었는데,

한국 정통 보수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와 성서침례신학교 장두만 교수 같은 이는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에 확신을 가졌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세대주의 신학(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사상)은 불안한 사회 현실과 맞물리면서

보다 극단적인 종말론 형태로 변형을 거듭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오용과 변질의 중심에서 가장 큰(나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J 목사입니다.

J 목사는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기초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기록된 순서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말세에 될 일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습니다.  1992년에 한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일파의 극단적 종말론 운동은 J 목사의 세대주의적 종말론 해석의 완곡한 적용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J 목사는 Y 교회와 산하 집단을 통해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한국적 토착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미선교회의 환상이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의 환상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세대주의 신학의 강조점(특징)

 

세대주의 신학의 세계화가 있었던 만큼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다비와 스코필드를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볼 때, 두 사람이 주장한 범위안에서 세대주의 신학의 포괄적인 신학적, 교리적 요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자적인 구약과 신약 해석에 근거하여 미래를 연속적인 시대의 도식으로 묘사한다.

 

--> 대개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은 교회의 휴거를 예언하며, 6-10장까지는 전환난 3년 반을,

 11-19장은 후환난 3년 반을 예언하다고 주장합니다.

 

후환난 시대의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도, 그리스도는 지상에 강림(둘째 강림)하여 천 년간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고 천년왕국을 건설합니다.

 

이 후 사단은 잠시 놓였다가 백보좌 심판이 있으며,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가 건설된다고 합니다. 특히 J 목사는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이러한 계시록의 문자적 성취 과정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해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스코필드의 일곱 세대 구분

 

① 낙원의 무죄세대

 ② 홍수까지의 양심세대

③ 인류 통치세대

④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하는 약속세대

⑤ 시내산에서 골고다까지의 율법세대

⑥ 은혜세대(교회)

 ⑦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세대

 

-->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하며,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 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3)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지연되었기에 하나님이 교회의 우회로를 택했다.

교회세대는 결국 과거의 이스라엘과 미래의 이스라엘 사이에 놓인 중간단계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으로 교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칠년 대환난이 끝난 이후에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난 이전에 ‘하늘로 들림’,

즉 ‘휴거’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중재림이다.

 

--> 세대주의는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 때에 교회와 성도들은 첫 번째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주님의 첫째 재림은 심판의 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입니다.

 이후에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이후에,

주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7년 공중혼인잔치를 마치고 지상 강림하시는데,

이것이 둘째 재림이요, 마지막 ‘지상 재림’인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은 모든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심으로서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천년왕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5) 문자적 해석에 천착한다.

 

--->세대주의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대부분의 숫자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144,000’이라는 숫자 역시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를 즐길 때,

지상에 남겨진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숫자로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회개를 하게 된다고 봅니다. 계 20장의 천년왕국도 문자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땅위에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건설해 직접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7년 대환난의 7년과 심지어 계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묘사된 모습마저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4.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세대주의 종말론 비판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몇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를만큼 세대주의 신학은 복잡,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특징을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언급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견지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1) 세대주의 종말론 해석법의 문제

보통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문자적 해석 방법

 ② 영해적(spiritualizing) 방법

③ 문자적 - 영해적 방법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무조건 적용할 수 없지만,

 대체로 개혁주의자들은 세 번째 해석 방법을 존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어떤 문학 형태로 고정할 수 없을 만큼, 저술 원인과 방식에서 그 어느 성경보다도 독특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 하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천상적 경험은 지상의 문자적 형식으로서 기술한 것입니다.

계시록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적 초월성을 함유한 동시에

세상에 내재된 관념으로 실제로 추론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진술을 한쪽 방향에서 고정된 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21 장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소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내가 본 천국“ 간증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데,

 과연 환상가운데 요한에게 보여 진 새 예루살렘이 진귀한 보석으로 치장된 새로운 문명 세계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또한 계시록의 ’144,00‘이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특정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년’은 과연 인류가 경험한 10세기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 관점에서의 초월성과 상징성과 묵시성을 지극히 인간적인 상식과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억지스런 시도가 바로 세대주의 종말론의 특징인 동시에 한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환상과 상징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라는 구도 속에서 성경의 유기적 진술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2)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 해석하는 문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 관계를 대립 혹은 단절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언약적 통일성 안에서 보는 개혁신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옛 언약(출 20:1-17, 24장)은 이스라엘과만 맺은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언약 역시 교회와만 맺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만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히 8:10-11).

새 언약은 또한 옛 언약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옛 언약의 성취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유대인에게, 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적용하는 이분법적 도식은 언약의 통일성적 유효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오류인 것입니다.

 

3) 이중 재림설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환난을 전후로 있을 그리스도의 이중 예정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그러니까 환난 전에 첫 번째 (공중) 재림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교회와 성도들이 들림(휴거)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휴거되지 못하고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신 세계의 심판을 위해 대환난을 겪은 후에야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또 한 번 반복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중 재림에 대해 말하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존 T. 샤프트라는 사람은 그의 책 『세상을 진동시키는 종말사건』을 통해

교회와 성도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단 한 구절이라도 찾는 사람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 4만 명의 목회자들에게 통지를 했으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재림은 정통 교부들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칼빈과 루터,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공히 지지받고 있는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적어도 19세기 세대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중 재림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7년 대환난을 전후로 각각의 다른 대상을 전제한 첫 휴거와 재림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의 말씀대로 인격적이며, 육체적이며, 가시적이며, 갑작스러우며, 영광스럽고 승리의 단 한 번의 재림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시기는 하나님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  그리고 모든 악의 세력의 파멸과 마지막 심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 문제

 

계시록 10:1-3에 나와 있는 ‘천년동안’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셋 또는 네 가지 해석의 경향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이 앞에 오면 전천년설이요,

뒤에 오면 후천년설입니다. (잘못 기재된 듯합니다. 천년왕국전에 재림이 있으면 즉

재림후 천년왕국이면 전천년설, 천년이후 재림이면 후천년설입니다. 카페지기 주)

 

이 두 가지 견해는 천년의 위치는 정반대이지만 천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편 무천년주의는 형식상 후천년설에 속하지만 천년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중 전천년설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지는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후자는 전자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재림을 단일 사건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진술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사건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개의 천년설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습니다.

 

기독교 3세기의 이레니우스, 저스틴, 터툴리안, 락탄티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유행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지 가운데 무천년설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즘,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들에 의해 현세적 천년왕국 사상이 번성하였습니다.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 대부분은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에 머물면서도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세력의 전천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켜보면서

 천년왕국설을 개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청교들의 신대륙 이주 이후 기독교 복음의 번성과 함께

낙관적인 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프린스톤 3인의 핫지, 댑니, 워필드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신학자들에 의해 후천년설이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와서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전천년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과 천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맞물려 예언 집회가 유행하던 때에,

다비와 플리머스 형제단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나타났습니다.

불과 몇 십년만에 이 사상은 20세기의 복음주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천년왕국설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네 가지 입장 모두 나름대로의 성경과 현실에 대한 주장과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배제하고라도

세 가지 주장중에 어느 것 하나가 유일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전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게 이루어진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볼 때, 문자적-영해적 해석을 근간으로 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천년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천년이 아니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순서들 역시 문자적인 예언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은 문자적 지상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집약적으로 상징화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천년 동안 왕노릇하다’는 계 20:4 말씀 역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성도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지상과 하늘에서 메시아 왕권이 발휘되는 이중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상과 천상을 통(通)하는 메시야의 ‘천년왕국’은

사단과 그의 대행자인 악의 세력들이 받을 아마겟돈 최후 전쟁과 더불어 임하게 될 주의 재림과 마지막 대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 상태가 완성될 것입니다.


 

5) 144,000과 짐승의 표(666),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자들은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숫자 ‘144,000’을 민족적,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교회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

지상의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살아남은 자의 이스라엘(유대인)의 숫자가 144,000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전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성도들 중에서

구원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요한계시록 말씀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수를 상징화한 숫자입니다.

즉 이 숫자는 12×12×1000으로서 약속의서의 구약의 백성(구약의 12지파)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신약의 12사도)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숫자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딤후 2:19). 계시록 7장에서는 이들이 마지막 때의 환난과 사단의 시험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14장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받을 최종적인 운명(영벌과 영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세대주의는 이 ‘표’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억지보다 더한 주장입니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컴퓨터의 영자 철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하여 합하면,

666이라는 숫자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더러는 사품의 통상부호인 바 코드(bar cord)도 666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외에도 666이라는 숫자를 적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언급된 ‘표’는 당시 군인들, 노예들, 신전 봉사자들에게 소유물의 증거로서 낙인을 찍는 통상적인 전통에서 빌려 온 상징어입니다.

 즉 ‘표’는 소유, 충성, 보호를 상징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에 적그리스도와 666이라는 숫자가 직접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지로 교회 역사를 보면, 666을 로마의 불신 황제들(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안등)과 관련시키거나  히브리어 원어를 환산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려했던 시도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전부 무익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666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짐승의 수를 판독하는 일보다 짐승의 도덕적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머리이고,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부정하며, 복음의 본질을 파괴하려 합니다.

집단적 권력의 총체로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에서는 네로로,

 중세시대에는 교황으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바른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시록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전의 적그리스도 보다 훨씬 더 가공할만한 능력과 속임을 가진 인격체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와 짐승이 언제 어느 때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며 인내와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계 13:10).


 

6) 대환난 이전에 나타날 징조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대환난을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7년 대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교회와 성도의 공중 들림(휴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7년 대환난이 다가올 시기와 징조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대주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한국의 세대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전도자라고 할 수 있는 J목사의 해석을 살펴보기만 해도

얼마나 황당하고, 억지스러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J목사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과 『지금이 말세인가?』, 『다가올 미래』라는 책에서

 7년 대환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세계적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EC통합을 로마 제국의 부활로 보면서

다니엘이 예언하고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열 발가락시대,

 열 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봅니다.

또 마지막 전쟁을 중동전쟁으로 보고,

19991년 1월의 걸프전을 전주곡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페라스토로이카의 실패로 경제가 위축된 소련이 아랍의 동조를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3차 대전과 같은 전지구적 전쟁이 발생하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으로 패하게 되고,

마침내 승리한 이스라엘이 시온산에 솔로몬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통일 유렵과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7년 대환난 직전에 일어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식의 세계 종말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습니다.

 unshakable 님의 질문중 예를 드신 일부 내용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가상적 답변이지만,

그러나 ‘아님 말고’식의 무책임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아무런 성경적 근거없이 계시록의 진실을 세계사적 사건에 끼워맞추려는

 그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조악스런 발상들이 세대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한다면,

왜 세대주의 신학(특히 종말론)을 경계해야 하는지 더욱 명백해 진다는 것입니다.


 

답변을 마치면서...

 

오늘날 성경 중에 요한계시록만큼 관심이 많은 반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도 드뭅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계시록 해석과 주해와 설교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드리운 불안하고 암담한 시대 정서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영혼의 도피처를 찾는 심약한 성도들에게

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호기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일 없는 거짓 선생들이 거짓된 가르침과 선동으로 이들을 파멸로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성도들에게 진정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과 신앙을

 보다 바르고 정밀하게 추구해 가는 일입니다.

이 답변을 통해 성도로서의 이 거룩한 사명을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해석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홍창표, 천년왕국, 합신대학원출판부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교회

계시록에 대한 좋은 통찰과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출처]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그리스도의 '강림'과 '종말론적 연합'의 의미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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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경계는 일부 성도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모종의 흥분 사태에 대한 마음의 동요였다. 그들은 머지 않아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직업조차 포기하면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강력하게 선전함으로서 다른 사람들까지 일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형제 사랑을 구현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들에 대한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바울은 형제 사랑에 담겨 있는 성령 충만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종말론적 흥분에 빠져 형제들을 희생시키는 일에 대해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미 급진적인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흥분과 관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완성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잘못된 종말관을 교정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에 보낸 서신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상고함으로써 이 땅의 성도들이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위로 가운데 살아갈 삶의 당위성을 점검하고자 한다.  

 

1. '죽은 자들'의 기업에 대한 오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를 품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 1:10)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주님의 강림을 소망하는 그들을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살전 2:12).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살전 3:13) 그들을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를 기도한다.
이 종말론적 신앙은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살전 4:6)에서 극적인 흥분을 가지게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만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림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의 심판 자리가 오히려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복된 자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주님의 강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열심히 지나쳐 종말론적 흥분이라고 하는 부작용(살전 4:9-12)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어느 누구도 그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염려가 번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문제, 즉 죽은 성도들과 주님의 재림과의 문제를 다룬다(살전 4:13-18).
반면에 또 다른 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의문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날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증폭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소망이 현실적으로 무산된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이 문제가 또 다시 심각한 주제로 떠올랐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때와 기한은 알 수 없지만 늦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신과 성도들이 신앙하는 부활하신 그분이 곧 심판주로 오신다는 소망을 고취시기며 깨어 근신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살전 5:1-11). 이 두 주제들은 성도들이 모두 주님과 함께 할 것이라는 약속(살전 4:17; 5:10)으로 결론을 맺으며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세워주라는 권고(살전 4:18; 5:11)로 끝맺는다.

 

2. '죽은 자들'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주 예수께서 언젠가 그의 백성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가르쳤다. 때문에 성도들은 주님께서 언제라도 다시 오실 수 있으며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께서 빨리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를 포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별을 경험하리라고는 미쳐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람들은 주께서 오시기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의아해 했으며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했음이 분명하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이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그들이 재림의 복에 과연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기기도 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내세관에 있어서 불확실한 내용이 있음을 암시한다(Grant Osborne).
먼저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로 죽은 자와 관련된 내세의 소망을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문장은 곡언법(litotes, 曲言法)으로 억제된 표현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수사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우리는 너희가 확실히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다'는 의미가 된다(Beverly R. Gaventa). 이러한 복잡한 문장을 도입하는 것은 이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 즉 주의 강림의 날에 나타날 죽은 신자의 기업에 대한 내용은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충분하게 교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많아야 3개월 정도밖에 체류할 수 없었던 사도들은 이 주제에 대해 가르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데살로니가에서 전파된 사도들의 메시지는 주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는 말로 압축되었던 것처럼, 재림과 그 이후에 대한 가르침에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자들'(          )이라는 완곡한 표현은 흔히 죽은 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교도들은 죽음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으로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이 단어가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거나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반면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잠잔다고 말할 때 잠자고 곧 깨어난다는 부활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왕상 2:10).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본문에서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른 이들'(         )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살전 4:5)을 지칭하는 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혹은 성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 즉 '그 나머지 인류'를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없었다(김세윤).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 앞에서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반면에 바울은 성도들은 그들과 다른 무리임을 비교함으로써 성도들이 가진 소망은 부활의 소망임을 강조함으로써 '그 나머지 인류'들처럼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3. 부활의 특징과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

 

성도들의 부활 신앙과 부활에 대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이 말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대해 보증하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을 일으키실 미래에 대해 언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곧 신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잠잔다'(         )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반면 어느 신약의 저자도 예수의 죽음을 가리켜 '잠잔다'는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다 되시지만(고전 15:20) 예수께서 친히 잠드셨다는 단어는 신약에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부활로 성취된 하나님의 이적을 가리킴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 되었다. 반면에 성도들이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때문에 성도들은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새로운 관점에서 '잠자고 있다'는 말로 묘사될 수 있었다(F. F. Bruce).
'잠자고 있다'는 단어가 성도들에게는 부활 소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그 나머지 인류들'에게 있어 이 말은 소망을 담을 수 없는 단어라는 점에서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 나머지 인류에게 소망이 없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당시 플라톤을 비롯해 그들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와 시간의 세계를 떠나서 이데아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로 복귀한다고 보았다. 또한 신비 종교들 역시 자연신과 연합해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더라고 결국 소생한다는 소망을 갖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비적인 종교인들도 나름대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과 신비 종교에도 불구하고 '그 나머지 인류들'에게는 죽음을 언제나 삶의 끝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음을 소망이 없는 상태로 여기고 있었다.

이처럼 자기들 나름대로 소망이 있다고 하는 플라톤 학파나 신비 종교 그리고 유대교조차도 참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단순히 이별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적인 슬픔이었다(김세윤).
반면에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 일부도 죽음 앞에서 이러한 이교적인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서 주를 영접해야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죽은 후에 부활되어 나중에 주의 재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울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잠자는 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로 번역된다. 이 문장에서 하나님은 주체가 되시며 예수라는 대리자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문장은 바울이 하나님에게 우선 순위를 두면서 동시에 예수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진다(Beverly R. Gaventa).

이 사상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례의 의미 속에 포함된 부활 사상과 더불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고후 4:14)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백성이 누리는 부활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예수는 자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는 일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가 되신다. 아울러 성도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와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고전 15:18)이라고 부르게 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죽은 자들에게 임하는 부활의 특징을 제시함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 있다. 그것은 재림 때에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나 이미 죽은 자들에게 결코 아무런 차별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엄히 말한다'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본문의 '주의 말씀'(             )은 '파루시아'와 '부활'에 관한 역사적 예수의 말씀들을 보존하고 있는 예루살렘 전승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높다(Jhon Stott).

이 전승에 기초한 가르침에 따르면 죽은 성도들이나 살아 있는 성도들이나 부활에 있어서 아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가장 절대적인 공평함을 보이실 것이다.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살아 있는 성도들과 다시 연합될 것이기 때문에 분리될 가능성은 없다. 이때 죽음은 어떤 성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함께 누리는 일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롬 8:35-39).

 

4. 주의 강림과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성도들

 

바울은 주께서 강림하시는 때에 대한 구체적인 현상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이 휴거하게 될 것을 말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표현은 '인자가 강림하리니'(막 13:26; 눅 17: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광경은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계시록에서 나팔 소리는 세상 권세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물리쳤다는 표시이며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임했다는 표시이다. 이때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은 잠자는 자들을 모으는 동일한 소집에 대한 다른 표현 양식이다(F. F. Bruce).
그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첫 번째 결과이다. 그후에 살아 남은 자들이 휴거하게 되어 각기 그들의 기업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휴거'(        , rapture)란 말은 '낚아채어져 올라가다'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아직 살아 있는 성도들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휩쓸려 올라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이 '휴거'라는 단어는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의 폭도들로부터 바울을 구해낸 경우(행 23:10),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와 대화를 나눈 후 빌립을 이끌어 가셨던 경우(행 8:29), 바울이 삼층천에 이끌려 간 경우(고후12:2, 3)에도 사용되었다. 이때 '구름'은 공중으로 옮겨가는 수단이 아니라 신 현현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시하고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수단이었다(출 19:16; 40:34; 왕상 8:10; 시 97:2)

때문에 부활과 휴거의 순서에는 우선권의 문제가 없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부활한 성도들과 살아 있어 휴거하는 성도들이 공중에서 서로 연합시키기 위한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부활과 휴거라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이미 죽은 성도들과 아직 살아 있는 성도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공중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Jhon Stott).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빌 1:23; 고후 5:8).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결론적인 표현은 부활한 성도들과 휴거된 성도들이 주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끌어 올려진 후에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될 것, 즉 종말론적 연합을 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강림하신 주님과 하늘로 올라간 성도들은 다시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의 강림은 신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연합됨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던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와 영원히 한 몸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의 지체인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최상의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신자의 죽음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잔다'고 묘사하는 바울의 인식이야말로 신자의 죽음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은 기꺼이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 성취일 뿐 아니라 그의 강림은 신자들과 영원히 한 몸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말 신앙을 우리가 가졌다 한다면 장차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될 신자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보람되며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가름하게 될 것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이종성 원장(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역임, 기독교학술원 원장)

먼저 성서적이고 정통적 종말론의 요점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과 인간과의 계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역사)에 마지막을 오게 한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마지막이 된다.
둘째, 예수의 재림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 된다.
셋째,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의 삶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한다. 그것을 최후심판이라고 부른다.
넷째, 예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다.
다섯째, 예수는 직접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온다.
여섯째, 예수는 승리자로 재림한다.
일곱째, 최후심판이 끝나면 모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버림의 세계로 나누어준다.
여덟째, 그것으로써 현재의 우주와 세상과 역사는 종결이 된다. 성서가 가르치고 교회가 이때까지 믿어온 종말신앙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성서가 가르치는 정통적 신앙과는 다른 종말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이단적 종말사상에 현혹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차제에 이단종말사상을 밝힘으로써 신앙적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종말이 없다는 이단

17세기부터 산업과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천재인재(天災人災)도 사람의 지혜로 막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도 발달된 지식과 상식과 이해심으로 공존을 위해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주장대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법에 의하여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종말사건으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나 지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가 와서 역사의 손을 대어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적 역사관과 강한 인본주의 신봉자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단적 종말관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서가 가르쳐준 것과 같은 역사관을 무시하고 상대적 존재를 절대화하고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오해하고 오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종말은 있으나 예수가 재림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이단

일반적으로 역사나 세상에는 종말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인들은 논리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풀도 일년초가 있고 일년을 더 산다 해도 몇 년 가지 못한다. 동물의 수명이 길다 해도 십수 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1백년 안팎이 한계 수명인 것을 알고 있다.

옛날 시인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었으나 의구(依舊)한 그 산천에는 사실은 매순간 퇴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고 느낀다.

일반 대중은 지식인들보다 세상에 종말이 있을 것을 일상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최근 한국인이 체험한 공중재난, 지상재난, 해상재난 등을 통하여 매우 불안해하고 있으며, 다음에는 지중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통사고나 화재사고 등으로 하루의 삶의 보장을 받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무심코 말세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과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사람으로서 역사와는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20세기의 오늘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이나 예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는, 성서에 의하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와 직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기(롬11:36, 마28:20) 때문이다.

예수가 직접 오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리라고 하는 이단
일반 평신도나 신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직접 오시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세상에는 환생(還生)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 인도교와 불교다. 그들은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 연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생에서 한 행동에 따라 현생에 사람으로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 미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짐 존스나 코레쉬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한국교회 안에도 심심치않게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방 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다. 통일교 교주는 자기가 예수를 대신하여 세상에 와서 예수가 실패한 그 일, 즉 육체적 구원을 완수하려고 포교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이단적인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대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렇게 위임한 일도 없거니와 이간으로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유한자가 영원자를 대행할 수가 없다. 성경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낭설을 믿지 않고 참예수가 오실 것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가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143, 행1:11).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아 마지막 날에 예수가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리라는 생각은 이단적인 생각이다.

예수가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이단

많은 사람들은 영과 육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원론) 서로 혼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은 영으로, 육체는 육체로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육체를 가진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람들(제자들)의 착각이었지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하늘에서 영적으로 계시므로 예수가 오실 때에는 육체를 가진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실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단체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시나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존재양태는 영과 육을 동시적으로 완전한 합일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한다(행1:11).

초림(성육신)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구하러 오시기 때문에 재림하실 예수도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따라서 이단적인 생각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는 이단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나 자기를 재림예수로 착각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이비 기독교 종파를 형성하여 그들의 추종자들을 모아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거나 재림 예수의 특별한 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면서 현세를 떠나 독특한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현세를 죄악시한다.

그러한 예로서 미국에서 일어난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천사이언스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유사한 운동은 통일교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예수가 이미 1914년에 하나님의 우편의 보좌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둘째 현존(역사 안에서의)이며 재림이다. 그때부터 예수는 지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교의 주장은 더 극단적이다. 예수가 세상에 온 초림 목적은 인간의 영과 육의 구원이었으나 그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됨으로써 인간의 영적 구원에는 성공했으나 육체적 구원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재림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과 똑같은 몸을 갖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올 것인데, 이미 일제 때 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육적 구원 사업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박해하고 있다. 그리고 원리 강론에서 그가 바로 문선명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교의 재림관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구원사역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으로 나누고 예수는 완전한 인류구원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반만 수행했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유일의 구주성을 부인한다.

또 하나의 이단적 요소는 현재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 문선명을 재림주처럼 선전하는 점이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재림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출현하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재림의 날짜를 예고할 수 있다고 하는 이단

예수의 재림은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날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수가 직접 말하고 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행1:7).

바울은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누차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2,4).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쉬이 동심(動心)하지 말라고 주의한다(살후2:2).

이와 같이 성서는 주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말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재림을 인간이 사용하는 시간으로 측정하여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고했다가 거짓말쟁이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윌리엄 밀러(1782~1849)와 한국의 이장림이다. 밀러는 재림의 날짜를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0일 사이라고 일차적으로 정했다가 그 동안에 재림사건이 없었으므로 다시 10월 20일까지 연기했다가 실패했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을 예수의 공중 재림일로 정하고 그날에 휴거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가 역시 불발로 끝났다.

이러한 예고는 하나님의 경세섭리(經世攝理)의 심부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라"(벧후1:20)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로이 예고했다가 실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했다.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일을 포기하는 이단

교회와 신자는 반드시 역사와 사회 안에서 활동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해도 현 사회를 부인하고 사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문화적 생활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 점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대상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요한도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라"(요일4:20). 이와 같이 신앙생활은 예수의 재림 날까지 이 세사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삶을 말하다.

그런데 예수재림의 날짜를 예고하는 사람들은 재림이 임박했으니 세상에서의 모든 육체적 삶의 멍에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로만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물론 신앙생활을 원숙하게 하려면 주님만을 생각하고 경건한 생활에 몰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고, 이혼하고, 직장을 떠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단절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회와 문화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모든 종교에는 현세의 구체적 생활을 단념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고 영혼의 안식만을 추구하는 제도가 있으나 그것이 정당한 신앙생활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원치 않으셨다. 세상에 나가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예수재림을 기다리면서 사회를 버리고 문화생활을 부인하고 기도에만 힘쓴다는 것은 성서적 종말신앙은 아니다.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언제 예수의 재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깨어있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의 일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비성서적인 이단사상이다.

한국교회는 상기한 것과 같은 잘못된 종말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이 혼란할 때 그러한 사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사상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른다해도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종말의 때를 가늠해보는 것들(지금은 어느 때인가?)

김정한 ㆍ 2013-09-09 (월) 22:46 IP: 1.xxx.17 ㆍ조회: 15      

종말의 때를 예상하는 시나리오들

현재의 한국교회는 주님의 오실 날(휴거)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너무 무관심한 쪽도 있는 것 같아 종말의 때를 가늠해보는 데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필자의 생각을 써 본다. 물론 이 글은 개인적인 견해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필자는 논쟁을 유발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여 보라고 쓴 글임을 밝힌다.

지난번의 글(725)에서 때를 알게 하는데 필요한 4대 요소에 대해 그 네 가지 요소가  
1. 이스라엘, 2. 적그리스도, 3. 교회의 배도, 그리고 4. 666 시스템이라고 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보아야 할 요소가 이스라엘이며, 적그리스도출현은 7년 환란 기에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가 언제 어떤 식으로 출현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과 발맞추어 나타나는 것이 음녀교회이기에 작금 교회들이 어떻게 배도하여 음녀교회로 가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고, 마지막은 666 표 혹은 시스템인데 이것이 어떤 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는지를 살려본다면 주님 오실 때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글은 이 네 가지 요소의 진행이 어떤 정도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것도 필자의 생각이기에 잘못 볼 수도 있다. (필자는 종말연구가가 아니고 일반 목회하는 목사다)

먼저 1. 이스라엘
주님의 재림에 시각에 대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야 할 것들은 먼저 흩어졌던 자들이 모여 건국하여 독립을 얻어야 하고,  그 다음은 수도였던 시온(예루살렘)을 차지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출할  제 3성전을 건축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 년도를 보면 1948에 이스라엘 독립 , 예루살렘 점령이 1967년에 이루어졌고  성전건축은 아직 준비 중인 상태에 있다.

주님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제 3성전 건축일 것인데 앞으로 어떤 경로로 건축될까? 를 예상한다면

(1)적대 세력인 이슬람의 완전무력화 된 후에 아니면
(2)이슬람의 화해무드에서 묵인 하에 되어 진다고 볼 때

(1)의 사건 이슬람의 완전 무력화가 되려면?
아마도 그것은 아랍권 특히 러시아와 밀접한 이란을 초토화해서 아랍권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 참고로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는 뉴스는 2005년 이후 매년 뉴스였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2) 이슬람과 화해무드에서 아랍권의 묵인 하에 성전이 건축되어진다는 것인데 그런 평화기가 언제쯤 올 것인가?
* 참고로 아랍권과 평화협정은 일부 이루었고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다. (이집트와 요르단과는 완료, 시리아, 팔레스틴과는 협상중) 물론 환난전 휴거론 자들은 이 성전 건축 이전에 방인의 때가 차면 휴거 사건이 있다고 믿는다.


2. 두 번 째 요소, 적그리스도(안티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활동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며 단 9장에 나오는 언약(평화협정)을 누구와 굳게 세운다는 말인가?

1)출현 시기
ㄱ, 일반적으로 환란 기를 수습할 위대한 메시야 지도자로 출현
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평화협상의 중재자며 평화의 보증자로 출현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환란 기에 얼마나 근접한 시점인가? 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재자며 보증 자가 될 여건인 결정적인 전쟁이 언제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 참고로 어떤 분은 지금 몇 째인의 시기(혹 몇 째나팔의 시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고 아직 이스라엘과 결정적인 언약을 맺게 중재할 자가 나타날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혹자는 적그리스도가 될 후보군에 대해서 이미 성급하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교황, 영국왕실, 통합유럽의 대통령, 미국의 대통령 등) 두고 볼 일이다.


3. 세 번째 요소 NWO(세계단일정부)
NWO의 세력은 성경으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몸통이 되어 환란 기에 세계를 꾸려갈 자들인데, 놀랍게도 NWO 세력들이 등장하여 이미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종교를 하나로 묶는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열심히 진행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환란 기 때는 세계를 666체제로 만들고 저들의 통치를 세계가 따르도록 할 것이다. 그때 활용되는 것이 666표일 것인데 베리칩이 666표인가에 대한 것이 뜨겁다.

NWO 세력들이 하려고 하는 것들
1)정치-UN, 2)경제-FTA, 3)문화-New Age, 4) 종교-WCC(UR)
* 참고로 NWO세력은 각계로 침투하여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일을 이제는 들어내 놓고 활동하고 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천주교 제수이트) 이것들에 대한 것은 시중에 많은 책과 알리는 자들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4. 네 번째 요소 음녀교회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교회 중에 음녀교회가 적그리스도(짐승)와 연합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은 WCC를 숙주삼고 천주교 제수이트(예수회), 와 개신교의 지도자 중에 프리메이슨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타종교와도 세계 평화공존을 근거로 하나로 만들어 가고 있고, 개신교도 그렇게 하고 있다.


결론
주님의 재림 사건은 이처럼 종합적인 상황가운데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봐야 할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로 한 말과 성경의 숫자에 대한 풀이 등,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과 국지적인 사건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예측하는 것 등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하다가는 미혹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진행되어지고 있고, 아직(Yet)인 상태인 것이다. 문제는 각자 안에 예수님으로 인해 거듭난 속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으로 건축되어지고 있고, 주님의 사명을 현실 속에서 광염(光鹽)으로 나타나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는 일일 것이다. 주님의 오실 날(주님 앞에 서는 날) 자신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종말의 때에 신앙관이라고 본다.

출처:USA아멘넷 게시판

영광화(榮光化)의 논리(The Logic of Glorification):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 연구



목차

1. 서론
2. 하나님의 영화의 위대한 계획
2.1.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의 종말론의 위치
2.2.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
2.3.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참여
2.4.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

3. 성도 개인의 영화
3.1. 영화의 계속적 진행으로서의 죽음
3.2. 영혼의 불멸
3.3. 분리된 성도의 축복

4. 인간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
4.1. 천년왕국의 역사
4.2.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4.3. 천년왕국과 하나님의 나라
4.4.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5. 하나님과 성도의 궁극적 영화(榮化)
5.1. 영광의 시대
5.2. 하나님의 영광의 공적인 드러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5.3. 최후의 심판
5.4.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요성

6. 영원한 생명의 성격: 새 하늘과 새 땅
6.1.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의 지복의 비전
6.2. 새 땅의 비전: 육신적 차원의 중요성
6.3. 천국 행복의 역동적인 비전

7. 결론




1. 서론


기독교 신학에서 20세기는 종말론의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물론 19세기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나라 등과 같은 종말론적 개념을 사용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 세계적인 개념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그들 신학의 중심 개념은 종말론이기보다는 윤리나 교회론이었을 뿐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세계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과정에서 위대한 예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세계 내적인 예수 이해, 하나님 나라의 이해에 대항하여 우선 성서신학의 분야에서 초월적인 종말론 이해가 전개되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가 강조한 이후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종말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만일 기독교가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니라면,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 소식의 전 부분을 관통하는 열쇠와 같다고 본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는 옳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지 부록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해 보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또한 현재를 혁명화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 따라서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오직 한 부분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전망은 모든 기독교 선포와, 모든 기독교 실존, 그리고 모든 교회의 특징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일 뿐 아니라, 역사의 핵심에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라는 점이 또한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러한 종말론의 재발견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자각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의 근본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종말론의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종말을 다루는 내용들은 아직도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요셉 라칭거에 따르면, 종말론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그저 미래의 신학과의 대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종말론을 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론의 형식적 강조 가운데 종말론의 고전적 주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아직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기독교적 시도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에 의하여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 첫째는 인간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입장으로서 계몽주의 이후로 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을 무지한 두려움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영향 가운데, 근대 신학의 종말론 이해는 "기독교 교의학의 결론에 추가된 짧고, 전적으로 무해한 한 장(章)"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인간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선포를 소위 성서적 종말 날짜 산정을 위한 자료들로서 간주하는 가운데, 종말론을 세계의 멸망에 대한 단순한 예측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종말론적인 비전이 기본적으로 이원론적 세계 이해에 근거해 있기에, 그들의 종말론적 의식은 세계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예에서 보이듯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 이해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다. 첫째 입장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외면하고 있다. 둘째 입장은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댓가로 운명론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이 입장에서는 종말론적 시각이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다니엘 밀리오리는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적 문제들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인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 나라를 이루어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을 균형적으로 강조하는 종말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문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귀중한 시각과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인간의 마지막 일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균형적으로 전개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특히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 성도들의 운명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가운데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의 차원과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균형 있게 조화하고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은 도피주의적, 개인주의적, 정적인 관점에서 살펴질 수 없다. 종말을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곧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 속에 더 심층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체의 삶 속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보다 역동적인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분석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榮化)로서 이해하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에드워즈 종말론의 중심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전개되는 에드워즈의 종말 이해는 종말론뿐만 아니라 에드워즈 해석 분야에 있어서도 작은 공헌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즈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정적이고, 영혼 중심적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공동체로서 이해되며, 그 가운데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광이 실현되는 장(場)으로 여겨진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의 종말론적 비전을 둘러싼 날카로운 논쟁이 있어 왔는데, 특히 그의 후천년설을 둘러싼 해석은 매우 날카로운 대립을 보여왔다. 한 편으로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와 성취적 요소를 강조한 흐름이 있다.

예를 들어, 알랜 하이머트(Alan Heimert)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최고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초월적 차원을 강조한 흐름이 있는데, 예를 들어 대롤 브라이언트(M. Darrol Bryant)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관심을 인간의 시도를 향한 원동력으로서 이해하고자 한 하이머트의 시도에 도전하였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인 목표"를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초역사적이며 영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오직 에드워즈의 신학적, 종말론적 비전을 전반적으로 분석함을 통해서만 그 결론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의 주장은 에드워즈가 최종적 상태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 가운데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의 중심특징인 하나님 중심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적 목표는 분명히 인간의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화(榮化)에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하나님 중심적 특성은 인간 책임의 외면을 뜻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위대한 계획은 모든 만물의 회복과 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역사의 변혁과 모든 성도들의 영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역사의 변혁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들은 서로 균형 가운데 존재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 가운데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시각은 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성도들의 운명이 하나님 자신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운명을 하나님의 최종적 운명과 연관시킨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화는 성도들의 영화를 포함하는 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의 선을 완성하려는 위대한 계획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목표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고찰하는 것이므로 이 논문의 범위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마지막 단계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인간 영혼의 문제, 중간상태의 문제,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최종적 완성의 문제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사역이 개별 신앙인들과 인간 역사를 통하여 완성되는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화의 위대한 계획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토대가 되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을 살펴볼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는 그의 독특한 성향론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현실태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에 대하여 전적으로 우선하여 존재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며, 또한 완전한 분"이며,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거나, 피조물로부터 어떤 이득을 받거나, 피조물로부터 받을 어떤 것이 있는 분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자존성, 자기충족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존재하는 분임을 뜻하거나, 이 세계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복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성, 독립성, 불변성 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은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며, 또 그것은 무한하고 덧붙여질 수 없으며, 또 전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변화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음의 내용이 추론되거나 그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닌데, 곧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상대적인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전달 가운데, 또는 자신이 피조물 안에 일으키는 결과들 가운데 그 어떤 참되고 본래적인 기쁨, 즐거움, 또는 행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즉, 에드워즈는 이렇게 완전한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역동성에 대하여 말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성향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서구 신학의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넘어서서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 성향적 하나님 이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내적인 존재를 확대하는 경향성을 가진 분임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충만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현실태를 계속 반복하며 그러한 반복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전달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이해를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 이해를 통하여 보다 명료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즉 피조물의 공헌이나 피조물의 존재가 없어도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도 생성 가운데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점에서 에드워즈의 신론은 과정신학의 신론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실존하기 위하여 세계를 창조할 수 없으며, 또는 그러한 속성, 완전성, 본성을 가지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위나 계획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현실태와 초월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에 관하여(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과 영생 이해에 대한 신학적 초석을 놓고 있다.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 개념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창조와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틀 속에서 개인적 종말, 인간 역사와 공동체의 종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이 모두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존재와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존재이기에 그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자신의 창조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창조의 목표로도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이나 과정신학의 하나님과 달리,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세계사의 과정을 통하여 그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주로서 이미 자존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양자택일의 곤경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라는 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로 이미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통하여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실현이 아니라, 이미 내적인 충만한 하나님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며 반복이다. 이러한 하나님 영광의 외적인 반복은 에드워즈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 곧 성향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미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충만한 현실태는 또한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화는 하나님의 내적인 지식, 사랑, 행복이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이 또한 하나님 밖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내적인 교제를 반복하고 증가시키는 과정 속에서 성취된다. 즉, 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며 향유되었던 하나님의 지식, 사랑, 행복이 외적으로 피조물을 통하여 반복될 때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출과 회귀의 신적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emanation and remanation)이라는 에드워즈의 이해를 만나게 된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또 찬양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며 인정되며, 하나님의 충만성은 수용되는 동시에 또한 되돌아온다. 여기에 유출이 있으며 회귀가 있다. 그 광채는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 속에 비추어지며, 또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창조와 구속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화로서 이해하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원리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함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화라는 궁극적 맥락에서 펼쳐지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다가오는 미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스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촛점 아래 위치시키며, 동시에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의 균형을 맞추어 놓는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기대란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추상적인 사건들의 예측에 그 촛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영화의 궁극적인 실현에 있으며,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화라는 궁극적인 차원에 미달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라는 이러한 맥락은 그저 일원적이며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는 반드시 피조물의 완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면에 피조물의 완성은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받으심을 함축하고 있다. 그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영광과 창조주의 영광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기에, 피조물의 완성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의미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완성을 통하여 더욱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확산되고 증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운명을 하나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화는 피조물의 선이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 또는 자신의 최종적 목표로 삼는 것과,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또는 서로 어긋나는 것의 반대 부분들로서 여겨져도 안된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다른 것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 종말론 사이의 구분을 가지고 있는데, 개인적 종말론이란 개개인의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반면에, 일반적 종말론은 인간의 전 역사와 관련하여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비록 에드워즈가 이러한 구분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드워즈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가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통합되고 있다. 두 측면의 종말 이해를 다룸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전자(前者)의 계획을 후자(後者)의 계획 안에 위치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 개개인의 영화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살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화라는 위대한 계획은 인간 몇몇의 구원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인데, 이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가 파괴되었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종말론적 성취의 영역에서 우주적 실재를 배제하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의 말에 따르면, "모든 하늘과 땅이 전복되었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 말하자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몇몇 개인들의 구원이나 또는 영혼만의 구원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모든 우주의 완전한 새롭게 됨이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된다.

개인의 영화는 인간 역사 전체의 영화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 종말론의 특징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즉, 여기서 에드워즈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영화가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의 영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지적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과 인간 역사의 변혁과 완성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이 단지 피조물 자신의 운명과 관계되어 있기만 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이 "영광스러운 피조물 존재의 사회"에 전달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반복되면서 또한 증대한다. 따라서 피조물의 영화는 피조물 자신의 영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화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피조물의 완성과 영화를 통한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을 "하나님 자신의 충만과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절(節)의 내용을 요약하도록 하자: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가 전개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곧 영원 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가진 영화의 틀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틀은 그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와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결합함으로써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며, 그에 상응하여 역동적인 세계의 종말 이해를 전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서 피조물은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기충족성, 자존성, 주권 등이 철저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중심성은 이 세계의 최종적 완성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는 인간 삶과 인간 역사의 최종적 순간을 하나님의 영화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역동적 과정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역할이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차원의 진정한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종말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비전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참여의 진정한 공헌을 긍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인간 역사의 상대적이나 진정한 공헌을 강조하고 있다.



3. 인간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


우리는 이전 항목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화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화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표현이며 반복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은 이미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충만하고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반복하는데 그 영광을 계속 실현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이러한 외향적 실천은 피조물의 존재를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며, 또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영광의 외적인 유출과 회귀라는 이러한 영원의 운동 속에 피조물의 선은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선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 안에 포함되어 있게 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고 실현되는 최후의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는 역사의 최종적 순간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궁극적 공동체가 이 세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최종적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비록 잠정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취된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역사와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념과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에드워즈는 적극적인 역사이해를 펼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장(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은 그 나라의 시간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를 고양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이 역동적인 역사 이해에 공헌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후천년설에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화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것은 또한 구속의 역사가 지향하는 바이다.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으며, 천년왕국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한 단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인간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이다. 이 시대 구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모두 종말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세계의 종말"로서 불릴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시대가 사물을 위대한 목적에로 마무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특징 지워진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한 나라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를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영역으로 파악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 역사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교회를 위한 진정한 미래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낙관적인 인간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에드워즈만큼이나 현실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인간의 죄악된 실상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데, 그의 역사 이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실현하는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왕국설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개혁자들의 비판은 천년왕국설이 미래에 대한 세상적이며, 육체적인 기대를 꽃피웠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격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은 천년왕국적인 사고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중요한데, 그것은 칼빈의 비판이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천년왕국설이 기독교 희망의 진정한 내용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것을 비판한다. 칼빈에 따르면, 천년왕국설은 기독교 희망의 거짓된 시간화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에드워즈를 변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브라이언트는 천년왕국적인 기대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애의 말기에 후천년설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대한 하이머트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브라이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분명히 "초월적인 목표"에 놓여 있었고, "지상의 나라"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라이언트에 의하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창조의 목표는 "초역사적이며 영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데, 에드워즈는 "역사적인 과정을 이 세계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하는 종말론"을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언트의 이러한 에드워즈 해석은 진리의 반쪽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가 역사의 미래에 일종의 황금시대로서의 천년왕국을 기대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과연 기독교 희망의 궁극적 차원을 약화시키는가의 문제이다. 칼빈이 비판하고 브라이언트가 변호할 때에 가정하고 있듯이,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드는가? 역사에 대한 후천년설적인 에드워즈의 해석은 그 자신의 근본적, 신학적 주장과 정말로 모순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데,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오히려 풍성하게 만들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달적 측면을 강조하는 에드워즈의 근본적, 신학적 틀에 전적으로 합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이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초역사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천년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개념을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는 틀 속에 통합시키고 있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궁극적 대상은 천년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임은 분명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초월적인 실재로서 오직 역사의 마지막에만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성격도 역시 강조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정적인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가시성(visibility)을 추구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초월적 실재를 이 세계 속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궁극적 실현은 이 세계의 마지막에야 충만히 실현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완성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이해를 그리스도의 나라의 네 차례의 도래의 틀에서 설명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서 다가온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도래로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천년왕국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틀에서 파악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천년왕국의 제한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천년왕국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 이전의(penultimate) 실현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역사의 진보 가운데서 예기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먼 미래에만 의미 있는 실재가 아니라, 바로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실재하는 성서적 확신을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천년왕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이 역사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차원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천년왕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 참여의 실질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부흥운동을 강조하였다. 부흥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단순히 영혼을 모으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spiritualistic) 동기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부흥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발전에서 그 중요성을 찾는다.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누차 경고한다.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세계에 대한 도피주의적 태도를 거부하고, 인간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적인 희망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 이해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와 그러한 영화의 과정 속에 대한 인간 참여의 강조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절(節)의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자: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에드워즈가 역사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공동체적이며 구체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으며, 따라서 천년왕국에 대하여 개인주의적이며 영혼주의적인(spiritualistic) 이해를 거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년왕국이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혼적인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영혼주의적 견해를 거부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신체적, 구체적 차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에 대하여 균형적인 이해를 전개한다. 인간 역사의 궁극적 완성의 차원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을 구원의 역사의 궁극이전의 완성으로서 이해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궁극적 비전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역사의 최종적 목표는 언제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최종적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천년왕국 속에서 인간 역사의 잠정적인 목표를 발견한다.

비록 천년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닐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으로서의 천년왕국은 이 세계 내적인 희망의 구체적 목표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측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성취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가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서 실현될 초월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 내적인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적 실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역사의 시간적 차원과 관련을 지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은 주의 깊게 그 의미가 밝혀져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소유 가운데 있거나 또는 인간 역사와 동일시된다는 의미에서의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실현은 언제나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 있는 것이므로,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소유로 돌려놓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실현은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실현과 반복임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파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강한 신념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진행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래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보다 충만하게 드러낼 영역이므로, 에드워즈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와 함께 적극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적극적 역사 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권면한다.



4. 영원한 생명의 성격: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주제이다. 에드워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을 묵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에 대해서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먼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구속의 사역의 목표로서 여겨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모든 혁명의 목표, 그들[성도들]의 수고와 고난의 최고의 보상, 그리고 세계의 이전 부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섭리의 이러한 놀랍고 이어지는 모든 경륜의 궁극적 목표"로서 이해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전의 모든 혁명들의 최종적 목표로 여겨지기에, 지상에서 교회가 누렸던 모든 영광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된 영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활 이후의 영광에 비하면 이전 시대의 영광은 "아무런 영광이 아니다." 부활 이후의 상태는 "완성의 상태"인 반면에, "하늘과 땅 모두에 있어서, 이전 시대의 교회의 영광은 자라 가는 상태에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충만함의 참여로서 요약될 수 있는데,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외적인 반복 가운데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전개되고 있다. 에드워즈의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회 속에 용납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성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권속 안에 포함시키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말하자면 한 사회, 한 가족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신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사회 속으로 용납된다.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에서 베르코프(H. Berkhof)는 영원한 생명을 "세계의 마지막"이나 "시간의 종말"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시작"으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착상을 전개하고 있다. 베르코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 피조물을 이러한 잠정적이며 소외된 형식의 삶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고향 속으로 인간을 데려갈 때, 마침내 삶이 참으로 시작된다." 베르코프의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에도 적용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모든 만물의 마지막"은 "어린 양의 결혼잔치"인데, 이것은 곧 영생의 시작이기에, 영생이란 진정한 삶, 참된 삶의 점진적인 전개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를 살펴보기 위하여,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지복의 비전, 새 땅의 비전, 그리고 천국에서의 행복의 역동성 등의 주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세대의 신학자들은 영생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영생은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으로 여겨져 왔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서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중요한 표상으로 간주한다. 영원한 축복의 삶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 of God)이다. 많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비전을 영생의 핵심으로서 간주하고 있다.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에서 ...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비물질적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도 역시 지상의 비전과 지복의 비전을 구분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지복의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비전으로, 오직 하늘의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칼빈도 요한일서 3장 주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에 가려지지 않고 명확한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볼 것이며, 이것은 새롭고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거룩한 양식의 비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복의 비전은 현대에 와서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아왔다. 지복의 비전에는 세계와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점이 거의 없음이 지적되어 왔고, 따라서 이것은 개인적이며 수동적인 비전으로서 여겨졌다. 또한 이것은 사변적인 개념으로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경계를 무시하고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의 본질적인 면을 다루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버카워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서적 증언 가운데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요한 축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에드워즈는 이러한 시도 속에 수반된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종말이 아직 다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것들[즉,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언어의 불충분성에 대해서 말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뛰어난 수사(修辭)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도 분명한 진리 그대로의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한참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을 기술하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성도들이 현재 누리는 행복과 전적으로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의 본질적 행복은 구속받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존재론적 교제의 완성이지 그 부정(否定)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의 맥락 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성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 속에 참여함으로 맛보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지성적인 한 기능이 하나님화(化)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누리는 지식, 사랑, 행복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의 본질적인 성격은 지적인 투시와 시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교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순전히 지적인 투시와 시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교제와 참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들은 인간학적인 고양(anthropological elevation)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기독론적인 관계(christological relationship)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 합일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하나됨은 피조물의 고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관계적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성도들은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천국의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행복, 자신의 모든 거룩함, 그리고 자신의 모든 빛에 있어서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인간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천국의 완성된 삶이란 인간의 유한성의 폐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피조물 됨을 완성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피조물이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상호관계로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한 헨드리의 언급은 적절하다.


하나님의 영광의 주권에 대한 그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과 관계지우는 영광으로서 간주한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에의 회귀 가운데 있는 영광의 완전성에 대하여 사고하였을 때, 에드워즈는 이러한 완전성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폐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고차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피조물과 자신 사이의 무한하도록 완전한 하나됨"을 지향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덧붙임으로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혼돈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나 "그 하나됨이 이제 무한하게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지복의 비전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그의 계시 이해와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는 지복의 비전이 계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종말론적 실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계시란 하나님에 관한 어떤 한 교리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탁월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나라의 주요한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도들의 궁극적 행복으로 여겨지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궁극적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다른 궁극 이전의 기쁨들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의 사변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생의 육신적 차원을 또한 포함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마지막 상태는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기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새 하늘의 차원뿐만 아니라 새 땅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그가 육신적, 공간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생에 대한 이해가 부분적이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의 실재를 무시간적이며 무공간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영역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새 땅의 측면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총체적이며 우주적 차원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몇몇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전 우주의 완전한 구속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범위에 대한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생각함에 있어서 새 땅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영생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이해의 역동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며, 여러 시기가 있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영광스러운 진전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자신의 현현(顯現)을 보는(BEHOLDING) 것 가운데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속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천국 행복의 점진적 성격은 단지 역사적 과정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데에 있다. 즉, 에드워즈는 영생의 삶 가운데서도 시간적인 요소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완성에 다다르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가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된 그 영화의 과정은 천국에서 그 완성에 이르는가?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구속 역사의 완성과 그 열매라는 시각에서 답하고 있다. 일단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종말에 이른다. 구속의 역사는 무작정 진행만 되고 그 결말이 없는 역사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구원의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역은 언제고 계속되기만 하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사역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곧 바로 덧붙인다: "하지만 이 사역의 열매는 영원한 열매이다." 즉 마지막 시대는 "만물의 궁극적이며 가장 완전한 상태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낼 것이며, 성자의 영광이 더 풍성히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성도들의 영광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속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는 계속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시작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데, 이 혼인은 영원한 영광의 오직 시작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혼인날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혼인의 기쁨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기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변화가 없는 것이며, 새로운 경우에 새로운 기쁨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는 하늘나라의 행복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하늘나라 그 자체는 어떤 사악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변화들"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성도의 영화는 변화 없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무한한 정도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변화와 진보의 종말이 쉽게 오는 지상의 행복과 천국의 행복을 대비하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상의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찌나 빨리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마는가!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너무도 빨리 하나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누릴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만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속에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며, 더욱 더 큰 사랑스러움이 또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토록 자라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점점 더 사랑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하나됨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며, 우리의 교제는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일종의 새로운 역사로서 보는 견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의 이면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영역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을 단순히 시간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시간적 차원의 중요성은 심지어 영원한 삶 속에서도 상실되지 않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가장 역동적인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피조물의 존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의 삶은 시간성을 포함한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새로운 역사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영원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 지상에의 과거의 삶의 기억과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의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본질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인간의 현재의 역사 가운데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분리나 모순은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따르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시간적 차원은 영원한 삶 속에서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천국 행복의 미래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들(성도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은 모든 증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희망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램지(P. Rams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천국 행복 이해는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부터 훨씬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의 운동"으로 기술될 수 있다.

영원한 삶의 시간성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강조하게 한다. 전통적인 천국 이해는 영원한 삶을 다분히 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에드워즈는 영생을 매우 역동적으로 이해한다.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창조에서의 타락 이전의 상태의 단순한 회복 이상을 지향하고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며, 이에 따라서 성도의 행복도 무한히 진보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새로운 역사로서 이해함으로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영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를 수정한다. 영생을 묘사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된 표상 가운데 하나는 영원한 휴식의 표상이다. 인간 삶의 완성의 이러한 측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구절에도 나타난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읍니다." 히브리서 4:9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목표는 "안식할 때"이다.

영생의 이러한 측면은 때로 인간 삶의 일종의 은퇴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권태라는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현대인들은 영원한 휴식의 개념을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따르면, 권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에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비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지루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에드워즈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기술함에 있어서 휴식의 표상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할 것이며,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데, 이 안식에 비하면 이전까지의 모든 안식은 그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은 분명히 휴식의 장소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휴식은 천국의 일에의 능동적인 참여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휴식은 무위(無爲)와 모든 행동의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모든 괴로움, 모든 수고, 모든 지겨운 일의 중단만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한 휴식은 계속적으로 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늘나라에 이르면, 실업자(失業者)가 되어서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는 지상의 성도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며 활동적인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무익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 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성도의 삶은 정적이거나 지루한 삶일 수는 없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 ... 하지만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님은 완전한 행위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누릴 "거룩함의 원리"는 "가장 활동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의 성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며, 따분하며 활발치 못한" 삶이다.


이 세계 속에서 성도들은 매우 지루한 가운데 있어서, 따분하며 활발치 못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 아니라, 활동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작용을 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며, 이러한 행동과 재-행동(re-action)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역동적으로 자라 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가운데 끌려 들어가기에, 영생은 결코 정적이며 변화 없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피조물을 향해 펼쳐질 것이며, 피조물은 또한 하나님 지식과 사랑 속에서 무한한 진보를 경험할 것이다.



5.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분석 가운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 위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데,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의 참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최종적 운명은 이 세계적인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와 역사 안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의 삶과 역사의 영화는 오직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 가운데 포함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틀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의 개인적 종말 이해가 역사적 차원의 종말 이해의 틀 속에서 전개됨을 지적하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영생이란 고독한 개인적 실존이 끝없이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성도가 참여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맥대널(C. McDannell)과 랭(B. Lang)은 개혁자들의 영생 이해와 하늘나라 이해가 다분히 개인적인 용어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의 전망에 보조를 맞추는 가운데, 개혁자들은 영생을 일차적으로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최고의 교제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새 하늘과 새 땅 이해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성도의 행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들은 "삼위일체의 사회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주의적 종말 이해는 그 시작에 있어서 배제된다. 에드워즈는 고독한 자아의 끝없는 연장 속에서 영생의 삶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함 가운데 발견되고 획득되는데, 이러한 공동체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생에 대한 에드워즈의 공동체적 이해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 이후의 성도의 운명은 보다 확장된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의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참여한다.

둘째,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역동적인 차원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이란 무시간적이며 정태적인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시간적인 운동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 자신의 영화의 운동 가운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삶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성도는 바로 이러한 반복 가운데 참여하기에, 영생은 시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영생의 시간적인 성격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주장한다. 천국에서의 삶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우(杞憂)는 영생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과 삶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베르코프의 견해는 에드워즈의 역동적 종말 이해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완성(Consummation)이란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과거가 우리에게 있어서 축복으로 움직이며, 또 미래가 현재를 통하여 그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피조물, 특히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영화의 틀에 위치지음으로써,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는 영화의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glorification)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의지력이 있고 능동적인 주체들 또는 매개체들로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능동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삶에의 능동적 참여, 곧 이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사역에의 심층적인 참여를 뜻한다. 자신의 종말론 이해에서의 성도의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성도의 운명에 관한 그의 이해 속에서 드러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를 향한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희미했던 구원의 역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영화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성도들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보다 강한 관심을 가지고, 또 참여하게 된다.

성도의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을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성도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함을 살펴보았다. 먼저,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임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드워즈 신학의 하나님 중심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책임과 양립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 받고 초대받으며, 이것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가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 영화이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표와 과제는 이러한 삼위일체적 영화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과 이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르트가 말한 바 "위대한 의"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서, 성도들은 인간 역사의 변혁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것 가운데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 성취된다.

인간의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점은 영생 이해에서도 약화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영생이란 인간 삶의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삶, 진정한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영화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그들의 삶은 이곳 성도들의 삶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였던 에드워즈 해석에 관한 쟁점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비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초월적인 실재인데, 브라이언트는 이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초월적인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서 있으며,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선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머트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는 "최고도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의 실현에 있지 않았으며,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확립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였으며, "경건한 옷을 입은 이념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브라이언트의 논지는 옳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실재는 그저 공허한 선물(Gabe)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과제(Aufgabe)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지적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에드워즈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영화라는 틀에서 이해하고 있고, 이것은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세계적인 책임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이해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타자성(otherness)은 하나님 나라의 타세계성(otherworldli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세계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하이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이 세계적인 성격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관한 마지막 요점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종말론)과 이 세계에 대한 책임성(윤리) 사이에 내재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계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궁극적인 희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언제나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저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의 능동적 참여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이다.

지나친 도피주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 성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삶이란 세계의 마지막까지 그저 숨겨져 있는 미래의 실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인 실현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주어져 있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이러한 시간적인 운동 가운데 참여하고, 또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미 초대받고 있다.

우리는 성도의 참여가 신앙인들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님을 아울러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운동의 참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도들의 행복이 증가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실상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참여에 의하여 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단지 피조물만의 운명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운명이기도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간의 참여로 인하여 더욱 그 영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참여는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이해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의 전 역사에 있어서 계속되는 중요성을 가진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자신을 확대하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이 바로 인간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다 영광스럽게 만드는 데에 공헌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이 그저 피조물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삶의 반복과 확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성도의 활동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궁극적인 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기에, 에드워즈의 윤리에는 강한 종말론적인 논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점진적 실현과 드러남에 참여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즐거움과 기쁨의 전조"를 경험하게 되며, 그 가운데 그들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자신들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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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마의 [종말론]  

[개혁주의 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 류호준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제1부 시작된 종말론



  “종말론”이란 영어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eschatos와 logos)가 합쳐져서 되었다. 이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개인에 관한 문제들에 관해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육체의 죽음, 영혼불멸성,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대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 등이다. 성경적 종말론에는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아울러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적” 면도 포함된다. “시작된 종말”과 “미래의 종말”을 포함한다. 여기서 “실현된 종말론”이란 용어보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표현을 더 적합하게 생각한다. “시작된 종말”이란 의미는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제1장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계시의 연관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책들에서만 종말론이 발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말론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기를 구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이 현재 우리들이 “마래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주제들-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에 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살펴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벨하우젠 학파는 종말론이란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학계의 방향은 종말론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인식되고 있다. 많은 수의 학자들이 구속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낳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해진 상황 속에서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 길만이 삶의 기반인 것을 인식할 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굳게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굳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새롭게 창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의 특징이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인 것이다. (pp. 14-15.)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에 관해 살펴보자. 창세기 3장 전반부에 기록된 인류 타락기사는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 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3:15에는 여인의 후손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장차 오실 이 구속자는 창세기 22:38(참조. 26:4; 28:34)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지칭되고 있다. 더욱이 창세기 49:10은 구체적으로 이 구속자가 유다의 지파로부터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14에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실 것이라는 생각과 아울러 이사야서에서는 그 구속자가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의 종”이란 개념은 자주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그 종이란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때로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가리키고 있다. 구약이 장차 오실 구속자를 묘사했던 또 하나의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다. 구속자 대망사상은 인자란 용어를 통해 다니엘 7:13~14에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표현해 주는 또 다른 계시적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의 종말론적 성향을 “새 언약” 개념도 강조한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주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임을 잊지 않았다. 구약에 암시되고 있는 많은 종말론적 개념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암울한 예언들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도 속속히 선포되었다. 선지자들은 회복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회복이란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아마 선지자들이 가졌던 윤리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결과란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믿고 정결케 된 남은 자라는 선지자들의 확신이었다. 요엘의 구절들을 보면 “주의 날”이란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주의 날이란 개념이 종종 암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들곤 하지만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저자들이 예언했던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였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구약의 예언자 들이 말했던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Ifin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yet completed)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출생사건은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한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되었던 승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교회 의 경험 위에 근거를 둔 소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G. Ladd)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 왜냐하면 승리를 결정지워 주는 전쟁이 이미 일어났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O. Cullmann)
    그러하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종말론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 관찰 결과를 종합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구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둘째, 구약의 저자들이 한 개의 운동으로 묘사했던 바가 이제는 두 개의 국면으로 보여진다(현세대와 미래의 세대). 셋째, 이 두 개의 종말론적 국면간의 관계성은, 현세대의 축복들은 장차 올 더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점으로 설명되어진다.

제3장 역사의 의미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우리의 세대는 전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 인류 장래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뜻과 희망대로 되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에 거스려 나가는 우리의 행로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존재의 의미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관한 환한 빛을 찾으려는 울부짖음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의미에 관한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한 울부짖음이다”라고 했다.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중요한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역사는 하나님의 여러 목적들을 이루는 작업이다.
  진리는 종종 곤경에 처할 때도 있으며 반면에 악이 융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사적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아낸다는 것 은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② 하나님은 역사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신다. 이것은 그가 인간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항상 유지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들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인간들의 악한 일들까지도 조정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에 대한 좋은 한 예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이다. 신약에 나타난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최상의 예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일도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핵심이 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축복의 최상의 원천이 되었다.

  ③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쿨만은 역사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신약의 이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역사의 중심점이 미래로부터 과거로 옮겨졌다는 것이라고 한다. 신약 시대의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 중심점이며 그러므로 신자는 역사의 중심점과 역사의 최정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적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의 모든 것 위에 그것의 특징적인 도장을 찍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이기셨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그와 화목케 하셨다(고후 5:19).

  ④ 새로운 세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세대는 정말로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새 세대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새 세대의 존재를 파기할 수는 없다. 히틀러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었다. 1945년에 노르웨이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만일 나찌 정권하에 억눌려 있는 몇몇 작은 마을들이 너무도 북쪽 산중에 처해 있어서 몇 주 동안 해방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동안의 그 마을 사람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마을의 거주민들은 노르웨이의 자유로운 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아직도 나찌 점령 하의 옛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그 일에 무지해서 악의 세력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된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해방과 구원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못한 지역에 살던 노르웨이의 몇몇 마을의 주민들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AD 속에 살면서도 BC 속에 사는 것처럼 지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⑤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역사가 마지막 결정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고 있다. 현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면(마 28:19-20), 교회가 해야 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신약의 신자들은 마지막 날들 속에서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을 향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죄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스럽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성령의 첫 열매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의 최종적 구속을 기다리면서 내면적으로는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방금 기술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우리가 동시에 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예수님께서 사단의 자식을 상징하는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계속 알곡과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에 마침내 가라지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 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 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 두 줄기의 발전, 즉 하나님의 왕 국의 줄기와 사단의 왕국의 줄기를 늘 인식해야 할 것이지만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왕국이 사단의 왕국을 지배하며 압제하고 마침내 정복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 판단들은 모두 잠정적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그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은 상대적이며 시험적이고 잠정적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또한-그 사건이 선과 악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면-악이 지 배적이다, 선이 지배적이다라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물의 끝이 오기 전까지는 어떠한 역사의 현상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흑백논리로 설명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여러 층의 회색들로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p. 60)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물의 궁극적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우 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은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며 “비록 악 이 종종 강해 보이나 하나님이 이미 지배자”이시라는 것이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 아니라 연속 상태가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연속과 연속이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좀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노력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그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학과 문화의 열매들이 새 땅에서도 역시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들, 우리의 선교사역, 그리스도인 문화를 세 우려는 우리의 시도 등은 이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하나님의 왕국

  우리가 부록에 나타난 역사적인 개관 속에서 보게 되겠지만 최초에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 논쟁 가운데서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 H. Dodd)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 (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1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다른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적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왕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되어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치심과 전파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왕국의 중심적 의미를 찾는 데 있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왕국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이나 영토(territory)를 상정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통치(reign)나 지배(rule)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가장 널리 수납되고 있는 의견은 왕국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영토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배냐 통치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역사 속에서 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왕국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심을 통하여, 특히 비유를 통하여 이 반석 위에 지은 자와 같고 반면에 그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의 집 을 모래 위에 지은 자와 같아서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게 된다(마 7:24-27). 혼인잔치의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은 즐기며 행복하게 되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죽음을 당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져진다(마 22:3-14).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이 대부분 왕국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로부터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 21:43). 하나님의 왕국의 근본적 목적은 그 단어 자체의 충만한 의미로 볼 때,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 의 구원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정조들인가? 이런 정조들 중 하나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이다. 사단의 떨어짐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기적들의 일어남이다. 천국 임재의 또 다른 표정은 복음의 전파이다. 죄사합의 부여이다. 구약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사함은 다가올 메시야 시대의 축복들 중의 하나였다(참조. 사 33:24; 렘 3l:34; 미 7:38-20; 슥 13:1).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이라고 나타난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라고 가르쳤다(고전 4:19-20; 롬 14:3). 그러나 왕국의 미래적 측면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구절들이 있다(딤후 4:18; 엡 5:5; 15:50).
   헤르만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예수님은 구약예언의 성취로서의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사실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으나 그의 사역 말기에 예수님은 왕국의 미래적 도래에 관해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리덜보스는 왕국의 미래적 면과 현재적 면들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어떤 의미를 가져 다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 구속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단지 어떤 개인의 구원만을 의미하거나 심지어 어떤 선택된 무리들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 로 절정을 이루게 될 전우주의 완전한 갱신이다.

제5장 성령과 종말론

   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 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구약은 말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 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게르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그가 성령의 사역의 우주적 보편성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모든 각 개인 안에 지금 거주하고 있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윤리적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과 신자들의 양자됨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로마서 8:3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다.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알려 주신다. 신약 시대에 목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가축에 인을 찍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구별을 지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상은 동시에 종말론적인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성령을 인으로서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 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긴장은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투쟁은 현재의 생활 전영역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자화상(self-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소유했으며 동시에 아직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완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비록 긴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성장으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은 새로운 자아는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자아이다.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되어 있다.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는 완전히 불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평가하는 것이 못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구속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가 만드신 것들을 괴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로부터 깨끗게 하사 완전케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땅이 영광스럽게 새로워진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상급과 기쁨의 언어로 신약이 묘사하고 있는 연속성이 있다(참조. 고전 3:34; 마 25:21,23).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중생치 못한 자들이 만든 산물들을 경시해 서는 안 되며 이러한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완전한 기독교 문화가 달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단지 완성에 가까이 가려 하는 추구의 땀일 뿐이다. 다가올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다가올 세계의 영광이 현 세계의 영광보다 훨씬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승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 중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왕국으로 들어가시며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룬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 죄, 죽음에 대하여 과거에 이미 결정적 승리를 얻으셨기 때문에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시작된 구속적 과정의 완성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은 이 마지막 날들에 발생하고 있는 것의 완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11)

제7장 육체의 죽음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 보자.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는가?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몇몇 기 독교의 스승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인 수도승인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된 펠라기우스의 제자 젤레스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 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은 셀레스티우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칼 바르트도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죽음의 심판이란 측면과 자연적 죽음의 측면을 구별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본다.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왜 성경은 철저하게 죄와 죽음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가? 만일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요 죽음이 자연적 귀결이라면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더욱이 하나님의 처음부터 계획 했던 바와 같이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신자와 불신자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다. 창세기 2:36~17을 보면,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서로 별도의 분리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 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 지고 있다. 로마서 5:12에서는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 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민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 신자는 아직도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 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 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란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 스 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3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제8장 영혼 불멸론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그에 대한 종교적 상대역인 유신론의 시대였던 18세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혼불멸 개념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때까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심지어 칸트도 실천이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선결조건으로서의 영혼불멸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던 것이다.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여러 형태로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희랍 등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다. 플라톤(P1ato, BC 427-347)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적 옷을 입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은 두 개의 구별되는 특징적인 본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견해에 있어서 영혼불멸 사상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불멸한 본체로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athanasia와 aphtharsia가 일반적으로 immortality(영흔불멸)로 번역되고 있는데, 신약은 athanasia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는 “오직 죽지 아니함을 갖고 있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ahtanasia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재림 시 일어날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다가 변화될 사람이나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은 신자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구 절에서 불신자들에 관해서 일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이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소유물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어지게 될 수여물이다. 불멸은 단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 아니라 전인으로서 인간이 갖는 특성이다. 영혼의 불멸을 나타내는 어떠한 시사도 없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다. 몇몇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이란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하면서 변호해 왔다.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불멸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 벌코프는 “영혼불멸의 사상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상당히 신중하다. 그는 “성경은 많은 말로 영혼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교리를 세세워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서로 상반된 견해들이 제시해야 하는가?
   1)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은 “영혼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 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상태에 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해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적용된 일이 없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보다 더 높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갖고 있고 파괴될 수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신성한 본체라고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 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다. 인간 속에는 피조되지 않은 영혼이란 없다.
   3)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애매케 하는 혹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하는 식의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며 경고하고 있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이란 영혼이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성경은 육체도 영혼만큼 실질적이다. 육체가 영혼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떠나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신자들의 미래적 축복은 그들의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최상의 풍요한 상태로서의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불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영혼이 불멸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은 성경의 강조점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에 반대적 사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제9장 중간상태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취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견해가 계속 가르쳐져 왔으며 특히 연옥에 관한 교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루터보다 이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반대하면서 도 중간상태의 교리는 계속 지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교인들(Anabaptists)은 영흔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란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 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이후로 중간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 백서들에 반영되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이라고 불리우는 죽음5 영역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 래드는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 방법이다”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올은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데 상징적으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스올은 때때로 무덤이라고 번역되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는 스올이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 형벌의 장소 혹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구절들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구절들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약의 가르침을 보완하고 확장하고 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은 인간은 사망시에 멸절되지 않고 음부(하데스)나 락원 또는 아브라함의 가슴이라고 불리는 축복의 장소 중 어느 한 곳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데스는 스올의 70인경의 번역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음부(하데스)의 의미는 구약에서 의 음부(스올)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스올의 개념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중간기 동안의 랍비 문헌들이나 몇몇 묵시문학적 작품들에는 지하세계에서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사이에는 공간적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몇 신구약 중간 시대의 작품들 속에는 하데스(음부)란 단어는 지하세계에서 불경건한 영혼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데스”란 단어의 신약성경 의 사용은 어느 정도 이런 개념의 발전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7,31에서 이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그가(그리스도) 음부(하데스)에 버림되지 않았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데스(음부)는 시편 16:30에 나타난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단지 죽은자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즉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았다. 하데스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1) 인간은 사후에 완전히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간다. 2) “죽은 자들의 영역” 속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사망이 목자가 될 것이며, 사망의 돌봄 아래 그들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신약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은 후와 부활 전 사망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영역에 내버림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들이 스올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불경건한 자들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9은 중간상태 기간 동안에 불경건한 자들이 어떤 상태 제 놓여 있게 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NIV).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1) 우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낙원이란 단어(고후 12:4; 계 2:7)를 보자. 고린도후서 12:4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환상 중에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낙원은 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7에서는 하나님의 낙원 속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여기서도 낙원은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바로 그날 하늘의 무한한 축복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그의 왕국에 들어가게 될 때인 그의 재림 시에 그가 강도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히려 그날, 즉 그가 죽는 날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게 되는가에 관하여 간단하나마 설명해 주고 있다. 영혼이 잠잔다는 사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중간상태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구절은 빌립보서 1:21-23이다. 사후에서는 영혼이 수면을 취하거나 혼이 전혀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간상태에 관한 세번째 중요한 구절은 고후 5:6-8이다. “중간상태”와 “부활육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모두”의 관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비록 부활이란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눠지지만 신자의 미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양쪽의 국면들은 모두 하늘의 영광이라는 경험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준다. 고린도후서 5:6-8이 보여주는 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실제로는 남과는 떨어져 있는 일종의 순례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다.

제10장 재림의 기대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그리스도의 재립에 대한 기대이며, 이러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 전체를 두루 다니며 복음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복음전도 여행이 끝마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며 종말론적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자들이 전도사역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것이 첫번째 “재림의 지연”이며, 예수께서는 그가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예수님은 이 경우에 마저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착각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덜 진보적인 최근의 어떤 신학자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조속한 재립을 예언함에 있어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오스카 쿨만이 이 그룹에 속한다. 그는 재림이 가까왔다는 초대교회의 기대는 “그 전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결정적인 전쟁이 이미 발발했다는 확신이 일단 있게 되면 그 전쟁은 그 전쟁의 종식 날짜를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자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은,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될 제자들의 미래적 활동들에 관계된 교훈들과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일이 있는 예언적 원근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으로 이 구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논의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들”은 수님의 당시의 사람들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재림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경성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그의 재림의 징조들을 제시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을 위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이런 징조들에 대해서도 정신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깨어 경성한다는 것은 준비함을 의미한다. 즉 항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래드는 ‘주의하라’(watch)는 단어는 ‘...을 찾는다, 기다린다’ 는 뜻이 아니라 깨어 있다’ 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사상에는 어떠한 변천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는 그는 곧 다가올, 지연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즉 너무나도 빨리 올 재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것이다. 후기 서신들에서는 그가 이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그 재림을 대비 한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를 희망했다고 말하는 것과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의 죽음 이전에 일어나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추정하려는 어떠한 흔적이 전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명심해야 한다.”(리덜보스) 바울도 비록 재림의 때는 불확실하지만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늦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약 구절이 하나 있는데 베드로후서 3:3-4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본문은 재림의 지연에 관해 말하는 자들이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의 답변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은 마치 그가 그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늦추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매우 사려깊게 죄인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좀더 잘 나타내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재림을 늦춤으로써 회개와 개종의 여지를 남겨두셨고 이는 어떠한 자라도 멸망케 되기를 그가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대망은 여러 변에서 우리의 삶의 질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우리 주님이 미래에 나타나신다는 사실은 디모데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만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에 대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다(눅 12:41-48). 마태복음 25:3l-46에 묘사된 최후심판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재림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계속적인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엣 것들을 추구 하는 최선의 길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위한 일에 분주해야 하는 것이다.

제11장  시대의 징조들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의 적절한 기능은 무엇인가?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의 중심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이 통치하시며 그의 목적들을 이루고 계신다. 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질책하셨다. 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하 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을 것을 권고하신다. 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의 본질은 경성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리고 우리는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고 해야 한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끊임없는 기대와 준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제12장 특별한 징조들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환난 배도 적그리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우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시대의 징조 중의 첫번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며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백성들에게 언약으로서 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하였고(42:6)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40:5).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이 징조가 완전히 성취될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시다고 우리는 먼저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시대의 징조로는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계속적으로 전파하는 일은 위에서 다루었던 시대의 징조의 한 단면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분명히 모든 민족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5-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에 관해 성경성경학 자들 간에는 의견이 너무도 분분하다. 크게 세 종류의 해석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그 충분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전체 단위로서 (그렇다고 반드시 이스라엘 국민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②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 모든 선택받은 자들 속에는 전인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의 선택자들을 포함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뜻은 단지 육체적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선택받은 무리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시기 역시 역사의 종말이나 예수님의 재림 바로 직전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③ 유대인들 중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견해와 일치하고 있는 점은 “온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이 역사적으로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역사가 흐르는 전 (全) 기간 동안 구원받게 될 선택자의 충만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점이다.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후크마는 세번째 견해를 택한다.
   바울이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라고 말한 참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이방인들의 전체적 숫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보여지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끝 무렵 어느 기간 동안 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계속되는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인가? 칼빈은 이 문구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들의 선택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열한 번 나타나는데 11:36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열 번의 경우에,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이방인과 구별되는 유대인만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모여진 후에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대규모적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을 것으로 로마서 11:26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세 대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1) 이 마지막 이스라엘 민족의 세대들은 지구상에 살아왔던 유대인 전체 숫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그 일부분의 이스라엘을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2) 본문은 “그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이상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때에라는 의미를 가 진 헬라어 tote나 epeita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후토스”(hout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시간적 연속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방법이나 양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 의미는 “그리하여”(so)다.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이다. 환언 하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 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인가? 이미 11장의 초반부에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째로, 많은 이스라엘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에 들어오게 되고 둘째로,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계속될 것이다. 로마서 11:26의 온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중 선택받은 무리 전체를 자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전적으로 역사의 끝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에 발생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좀더 역사를 소급해서 올라가자면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건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족속 중 선택받은 전체 수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은 11:5에서 말하고 있는 선택받은 남은 자와는 다르며 역사의 전체 흐름 동안에 있게 될 모든 남은 자들의 총합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우선적으로 논하고 있는 중심 사상은,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계셨지만 이제 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다루고 계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법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가 모여지는 일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 역사의 끝날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 다른 정조는 “배도”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면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울의 “불법의 사람”과 요한의 “적그리스도”는 동일시할 수 있다. 불법의 사람은 큰 반역 흑은 큰 배도사건 후에 나타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일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어느 것도 대적할 것이며 경배받는 그 무엇도 반대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자기의 대의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막는 것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제일 안전할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이 막는 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 묘사되고 있는 사람이 충만히 나타낸 바 되어야만 비로소 이 막는 자(것)가 제거될 것이 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제13장 재림의 본질

   재림이 하나인 단일 한 사건인가 아니면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가? 전(前)환난기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말하는데, 이 두 단계 사이에는 칠 년이라는 첫 단계가 있어 이를 휴거 혹은 전환난기 휴거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두번째 단계는 그의 돌아오심이라 불리운다.
   후크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해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로부터 두 단계 재림이론을 세울 수는 없다. epiphaneia란 단어는 딤전 6:14에서 전환난기론자들이 말하는 소위 휴거사건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apiphaneia)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 법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강림하게 나타나심으로(epiphaneia) 폐하시리라”(ASV). 그러므로 이상의 세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전환난기론자들의 이러한 구별에 어떠한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대환난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땅에서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고 가리키지 않는다.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 구절마저도 전환난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구절이 분명하게 전하여 주고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그때에 살아 있던 모든 신자들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고전 15:5I-52). 그때에 이 두 그룹의 무리들은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은 공중에서의 이러한 만남 후에 주님께서는 그의 방향을 바꾸사 그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말을 결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전환난기론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단계를 “그의 성도들을 위한 오심”(휴거)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심”(귀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떠한 학설도 대환난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인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골 3:4). 영광스런 정복자, 만유의 심판자, 온 창조 세계의 구속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는 다시 올 것이다(계 19:36).

제14장 천년기에 관한 주요한 견해들

   무천년기설(amillennialism)
   무천년론(무천년기설)이란 용어 자체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무천년기설이라고 하면 마치 무천년론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천년기도 믿지 않거나 또는 천년기적 통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3-6을 무시하거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 모두 올바른 정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문자적으로 일천 년 동안 지상 통치기간이 있을 것을 무천년론자들이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무천년론이란 용어는 무천년론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용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이 아담스(Jay E. Adams)는 무천년주의라는 용어는 “실현된 천년기론”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천년주의자들”(amillennialists)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가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과정 중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천년론자들은 요한계시록 20:4-6에 언급된 천년기를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첫 세 절 속에 언급 되어 있는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끝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천상적 천년기 통치 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천년론자들은 미래의 영화롭고 완전한 왕국이 장차 올 새 삶의 새 땅 위에 건설될 것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나 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미 쟁취하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악의 왕국은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현세대에서 많은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시작된 종말론) 또한 최종적 상태 시에 시작될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결정적 미래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도 바라보고 있다(미래적 종말론). 그러므로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복음이 모든 나라들에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재림 전에 한 명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이 극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한 한 사건이지 결코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부활사건 후에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신자들은 변화받은 몸이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이 모든 신자들의 “휴거”(들림)가 있은 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마치고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시게 된 다. 이 심판 후에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고 신자들은 새 하늘 과 새 땅의 축복들을 영원히 즐기게 될 것이다.

   후천년기설(postmillenniaIism)
   후천년론자들이 무천년론자들과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1) 후천년론자들은 천년기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들은 천년기가 전적으로 천 년 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3) 그들은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생각한다.
   후천년기설에 의하면 지구상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으로써 현세대는 점차적으로 천년기 세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후천년론자들은 로마서 11 :25~26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인 민족이 대규모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후천년기를 반대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일반적 후천년론적 해석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 강화문은 예루살렘 멸망과 이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강화문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 그의 백성들이 받게 될 환난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동시에, 이 세상 시작부터 전무후무했던 대환난이 있을 것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배도(반역)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결코 그날(주의 날 혹은 재림)이 이르지 아니하리라”(3절).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건들, 즉 데살로니가후서에 기록된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을 과거의 일들로만 처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치 못하다. 2) 요한계시록 20:1-6은 후천년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20:1-6은 현재의 세대 동안에 신자들의 영흔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 하고 있는 구절이지 결코 미래의 황금시대를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미래적 황금 시대가 있다는 후천년론자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간에 있는, 이 세상 역사 속의 계속적인 긴장 상태를 올바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historic premillenmalmm)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이 전천년적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후에 최종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에 의하면 몇 가지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발생해야만 한다: 온 민족들의 복음화, 대환난, 대반역과 배도하는 일의 발생, 한 개인적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이다. 교회는 이 최후의 환난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이에 죽은 신자들은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변화받아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 두 그룹의 신자들은 하늘에 들어 올려 주님을 공중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중에서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땅으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에, 적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강포한 통치가 끝장날 것이다. 바로 이 시기나 이 시기 직전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믿게 되며 또한 구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개종은 이 세상을 위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기에 대한 반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요한계시록 20장은 그리스도 재림 후에 지상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 을 결정적으로 증거하지 못한다. 요한계시록 20:3-6이 죽은 신자들의 영흔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무천년론적 입장은 어거스틴(Augustine) 이후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관한 무천년론적 해석을 좀더 발전시켜 변호하고 있는 장이 제16장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4는 그러한 지상적 천년기 통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증거자료도 주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들 중 어느 곳에서도, 최종상태 전에 천년기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3)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아직 죄와 사망이 존재하는 땅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영화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하게 된다. 중간기 상태 동안 하늘의 영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신자들이 죄와 사망 이 아직도 왕노릇하고 있는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4)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상적 천년기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사이에 제3의 세대가 있을 것이라고 어느 복음서도 사도행전에서도 서신들도 말하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학설이다. 비록 전천년기설 자체는 2세기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오긴 했지만 교회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두 개의 별도의 백성들로 엄격하게 구별하는 교리를 지닌 세대주의라고 불리는 이 신학적 체계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i, I800~1882)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
   세대주의적 사고를 결정짓는 두 개의 기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근본적이고 계속적인 구별이다. 2) 세대주의자들은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개의 특별한 “시대”들로 나누에 취급한다. 구약성경은 미래의 어느 시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고대로부터의 언약 백성들이 주체가 될 지상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 속들을 담고 있다. 비록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에 관한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언약의 핵심적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에서도 약속이 주어졌는데 곧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앉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린다는 약속이다. 3)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첫 단계는 소위 휴거(들림)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바로 휴거에 있어서 전(前)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과 역사적 전천년기론과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즉 역사적 전천년기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시대의 징조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반면에, 전자인 전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자들은 이 시대의 징조들이 그리스도 재림의 첫 단계가 발생한 후에 성취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환난기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임박한(imminent) 혹은 항시 올지도 모르는(any-moment)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휴거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 땅에까지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만 오신다고 본다. 그때 구약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참 신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영화롭게 된 다음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휴거된다. 즉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교회라고 불리는 이 신자들의 무리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칠 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 잔치 예식을 축하하게 된다.

제15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비판

   1) 세대주의는 성경 계시의 근본적 통일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 세대주의 체계가 노출하고 있는 최대의 난점은 구속역사의 다양한 기간들 간의 차이점들이 그 역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만일 누구라도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통일성을 공평하게 취급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시기(세대)들 사이의 심한 차이와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종합적, 영원적 구속사역의 진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적대감 내지는 분리의 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제거되었다(엡 2:14~15)는 사실을 신약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아직까지도 천년왕국 시기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까? 왜 그때에 (천년왕국 시) 유대 인들이 더 호의적인 지위를 얻고 이방인들보다도 더 높아지게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들의 답변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세대주의적 틀의 요청 때문에 신약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 샤이의 막힌 담이 제거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바로 신약성경 가르침 그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점이다.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 사이의 비연속성의 원리가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묵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항상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구약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아직도 미래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온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들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는 종종 의미하고 있다. 신약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서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용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일군의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한 사도가 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 장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 신자만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큰 포괄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미래가 이방인 신자들의 미래와 분리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하다. 즉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궁극적 영화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일천 년 동안 계속되어질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정치적 왕국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화롭게 새로워진 땅에서 함께 공유하고 나누게 될 영원한 축복 상태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구절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곤 한다. 사실상 구약은 이러한 천년통치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천년기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종종 해석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결정체인 새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여러 구약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이스라엘의 본토 회복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로운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자들과 서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영화로운 미래의 세계가 단지 천년기 에만 국한되는 것으로서는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한 상태로 계속된다고 주장한. 이 영화로운 미래는 이스라엘인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언들을 일천 년 동안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주의적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뒷받침을 결여하고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하는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첫째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구약은 결코 교회를 예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7) 그리스도가 다신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세대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휴거가 그리스도 재림의 최종적 단계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십사만 사천 명)와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칠년 환난기 동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오직 중생한 사람들만이 천년기가 시작 되는 때에 이 땅에서 살고 있을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천년기 동안에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교회(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가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또한 구원 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8)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기는 요한계시록 20:4-6에서 묘사하는 천년기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다. 라이리는 이스라엘의 지상적 목적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 그때 그들은 부활되지 않은 육체들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년기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하는 역할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천년기 동안 공중 위에 떠 있게 될 새로운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천년기 시대는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 즉 그때까지 자연 육체들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하고 있다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4절)은 이런 사람들에 관해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세대주의자들의 천년기에 대한 이해는, 가장 중요한 이 구절(계 20:4~6)에 대한 그들이 주장하는 문자적 해석에 마저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년기의 목적은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지상적 왕국을 세우는 일이며 이 왕국에서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적 왕위에 앉아 개종한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천년기의 목적이라면, 요한계시록 20:4-6이 유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팔레스틴 땅에 관해서 예루살렘에 관해서 등등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하다.

제16장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

   후크마는 본 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천년기에 관한 “무천년론적 견해”를 상세히 전개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후크마는 윌리암 핸드릭슨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란 방법을 따른다. l)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계시록은 일곱 단원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은 서로 평행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시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진술한다. 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천 년 통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주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단원들 중 마지막 단원에 속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재림 후에 되어질 것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20:3은 다시 한 번 신약 시대의 시작기로 돌아가게 한다. 옥에서 다시 놓임을 받아 나라들을 속여 모이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러 모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결박 되어 있을 동안에는 가능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세대 기간 중에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뜻은, 첫째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모두 함께 모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 시대에 교회는 심하게 핍박받았다는 사실은 이 환상이 가져다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우리는 깊이 간직하게 될 것이다.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동료 신자들 중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맛보았고 그중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죽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영흔들이 살아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는 것은 무한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이 지금 지상적 천년기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는 흔적을 이 구절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축복받은 상태에 대한 이유가 본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만일 여기서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면, 그들은 “다시 사망이 없는” 장차 올 세상의 완전하고 충만한 희락을 이미 향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 사망이 그들을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하더라고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천 년 전기간 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며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될 기간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육체의 부활이 있은 후에 이러한 죽은 신자들은 그들이 지금하고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섬기고 경배하며 그리스도와 왕노릇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에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육체를 입고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론적 해석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국을 지상적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사이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단이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없도록 이 현세대 기간 중에 결박되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17장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인의 인간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헬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약하고 방해물이다. 죽음 시에 육체는 소멸하게 되나 영혼은 계속 살아 남게 되며 육체 부활이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육체없이 완전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육체가 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 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독특한 기독교 교리인 것이다.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미래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정법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부패가 없음, 약함이 없음, 불명예스러움이 없음, 죽음과 눈물과 곡함과 울음과 교통이 없다(고전 15:42-43; 계 21:4).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바울이 어디선가 한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될 것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제18장 최후심판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미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3:18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또한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도 말하고 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심판의 뚜렷한 중요 목적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 최후심판 때까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은 감추어진 바 되었으나 이제 그 운명이 나타난 바 되었다. 신앙을 가졌었는지 그렇지 못했었는지, 어떤 행위를 했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통해 자기의 은혜를, 자기 원수들을 정죄하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핵심이 되는 것은 개인의 운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 두 번째 목적은 각 사람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도의 다소는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최후의 심판 때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3) 세 번째 목적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각 사람에게 그들이 영원토록 지내야 할 장소를 정해주신다. 새 땅이든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든 말이다.  
    최후심판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심판날”(마 11:22), “그 날”(마 7:22; 살후 1:10; 딤후 1:12), “진노의 날”(롬 2:5)에서 “날”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종종 긴 시간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나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듯, 심판의 날이 새 세계의 첫 천 년 동안 지속된 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나타났다면 모든 신자들도 이 속에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0에서도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무엇이 심판될 것인가? 이 현재의 삶 동안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이다. 심판의 날은 우리가 내뱉었던 말들도 다 심판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의해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만을 갖고 있었던 자들은 그들이 구약성경에 반응한 정도에 따라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도록 경고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인 평강, 행복, 구원을 추구하도록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계시들을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2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풍성한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쓰여진 율법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취한 반응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그들이 받지 못한 계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었던 빛에 근거해서 판단받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많은 책임들을 갖게 될 것이요 적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적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게 될 고통에도 “동급”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2:47-48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 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 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풍성한 빛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서, 즉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옷입었느냐이다. 사람의 영원한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 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왜 성경은 그렇게도 끊임없이 최후심판은 행위들에 따라 판단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지 결단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신앙과 행위간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신앙은 행위들 속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 하며 행위들은 참 신앙의 증거들이다. 요한 칼빈이 잘 요약했듯이, “의롭다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혼자서가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질적으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증거로 나타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참이라면 그곳에는 행위가 있을 것이며,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참이 아닌 것이다.
   상급(rewards)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사람이 어떤 재료들로 집을 지어 나가느냐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장차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상급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종종 상급들에 관해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 5:11~12; 6:19~21; 녹 6:35; 막 9:41; 마 25:33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못박아 말씀 하시기를,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어떤 음악기구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자.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마음의 모두를 바치는 사람을 절반 정도의 마음만을 바치는 사람보다 더 큰 주님의 기쁨 알게 된다. 하늘에서만 그런 기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보장해 주고 있지 않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의 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1) 세상의 역사는 무의미한 원형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운동이다. 2) 구원과 영원한 축복 상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각 개인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최후심판의 날은 최종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3)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 모든 각 개인들이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4)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와 역사 속의 그의 구속사역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한다. 즉, 그날은 모든 악에 대한 최종의 결정적 정복의 날이며 죽임을 당 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날이다.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세상 끝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제19장 영원한 형벌

   오늘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를 부정하는 두 가지 형태의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보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전멸주의이다. 보편주의자들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멸주의의 교리는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건적 불멸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게 되고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형태의 완전 소멸론은 모두 악한 자의 소멸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영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중엽 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칠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들은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지옥이 동시에 암흑도 되고 불도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상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상징들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자 모두가 유다가 당한 고통들을 겪어야만 하지는 않는다. 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옥의 장소성에 관해 말해 본다면,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료 생각하기를 하늘은 지구 위의 저 공중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지옥은 그 아래 어느 곳, 아마도 지구의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천문학을 알고 있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재 우주체계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20장 새로운 땅

   새 땅이 란 현재의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3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전우주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되고 현재의 우주와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우주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되 오직 새롭게 되고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루터교 신학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태복음 24:29, 베드로후서 3:32에 호소하고 있다. 분명히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들이 현재의 땅이 파괴될 때 발생할 것인데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은 죄 와 불완전으로 오염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에 열거할 4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보다 우주가 새롭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들인다. 첫째, 베드로후서 3:33과 요한계시록 21:1을 살펴볼 때, 새 우주의 참신 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인데 반해 kainos의 뜻은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an kainan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이란 의미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소멸이론보다도 갱신이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나 바울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20-21절).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양자간에는 엄연히 연속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갱신이론을 받아들이는 네번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키셔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단은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단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 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구속의 장면이 펼쳐질 장소는 바로 이 삼림들, 이 들판들, 이 도시들, 저 거리들, 이 사람들 속에서이다. 비록 현재는 전쟁터와 같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의 때를 향해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나 그때에는 이상의 모든 장소와 배경들은 승리의 들판이요 추수의 밭들이며 그 밭들에 눈물로 뿌려졌던 씨앗들이 영원한 곡식단들이 되어 창고에 들여질 것이다.”(에드워드 투르네이)
   새 땅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5:37-25와 66:22-23, 베드로후서 3:33; 요한계시록 21:3-4 등이다. 베드로의 관점을 보면, 비록 현재의 땅이 다 “타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새 하늘을 창조하실 터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하늘은 악과 불의는 모두 제거되고 의로움만이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 중에서 새 땅에 관해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1:1-4일 것이다. kainos(새로운)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땅 위에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이기에, 장차 올 영원한 삶의 영역에는 현재처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마치 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새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살 것이니 새 땅은 새 하늘에 대한 포괄적 대명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은혜 언약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약속이라 할 수 있다(참조. 창 17:7; 출 19:5-6; 렘 31:33; 겔 34:30; 고후 6:16; 히 8:30; 벧전 2:9-10).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비록 악이 이 세상 에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 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들이 번역되기도 하며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복음화되기도 하며 신자들이 새롭게 되고 문화가 변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위해 현재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이 장차 영원세계에서 그 충만한 진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 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중앙에 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 신 “어린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

부록: 종말론에 관한 최근의 경향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발견 되는 강조점들이 눈에 띄게 변천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였던 알브레흐트 리츨은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이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리츨적 이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우리는 아돌프 본 하르낙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예수님은 종교와 도덕을 아주 훌륭히 결합시켰으므로 종교는 도덕의 영혼으로, 도덕은 종교의 육체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성 등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그는 단정한다.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의 상과 하나님의 왕국의 이해에 대항하여 지난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리츨의 사위인 요하네스 봐이스는 하나님의 왕국에 리츨의 학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론적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했다. 봐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왕국에 대한 봐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동의되고 확대되었다. 봐이스와 함께 슈바이처가 행한 위대한 신학적 봉사란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자나 윤리의 선생으로 그리려 했던 구식의 예수님 상을 철저하게 깨뜨렸다는데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초기 저서에서 개진되었던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를 계속해서 견지하면서도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종말의 현재 속으로의 돌입을 인정하는 견해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봐이스와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 아니라 미래적이었지만(임박한 미래) 도드에게 있어서는 이 왕국은 이미 도래했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미래 종말론의 대부분은 유대 묵시문학의 잔영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허구적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도드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진정한 공정을 기했다고 할 수 없다.
   종말론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는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보스에 따르면, 신약의 신자들은 이 세대(세상)와 장차 올 세대(세상) 속에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올 세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의미에서 보스는 도드와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이라는 장에서 보스는 주장하기를, 신약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이 종말론이었지 결코 종말론을 형성시킨 것이 구원론이 아니었다고 한다.
   종말론에 관한 “구원사” 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의 하나인 스위스의 현대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접근방법을 묘사하는 용어로 구원사란 단어를 선호한다. “구원사”란 뜻은 하나님께서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며 이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부활이 놓여 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견해이다. 쿨만에게 있어서 성경의 종말론이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종말론은 교의학에 붙어 있는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 메시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한 몰트만의 공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가진 견해의 문제점 첫째는, 하나님의 왕국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만 보는 그의 일방적 강조점에 있다. 몰트만에 대한 두 번째 반대 이유는 그가 계시를 전적으로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있는데 있다. 몰트만에 대한 세 번째 어려움은 그가 미래를 모호하고 단순히 형식적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데 있다.
   역사의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읽고 나서

   안토니 후크마는 “시작된 종말론”(제1부)과 “미래 종말론”(제2부)이라는 큰 맥락에서 개혁주의 종말론을 전개하고, 부록으로 최근 종말론의 흐름을 싣고 있다. 후크마의 책은 “성경주해”에 기초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를 믿고 이 성경에 의지하여 신학하는 개혁파 신학도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배우는 시각으로 책의 주제를 몇 개 선정하여 생각한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종말론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해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후크마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종말론 사상을 전개한다. 성경의 계시 아래서만 종말 신앙을 갖도록 강조하면서 성경의 계시 앞에 겸손하게 개인과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논할 것을 권면한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종말론 신학의 기초로 본다. 그는 제3장, “역사의 의미”에서도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고 한 견해를 인용하며(p. 60) 역사적 사건을 판단할 때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7장, “육체의 죽음”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이나 칼 바르트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 부분에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크마는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성경이 죄와 죽음을 철저하게 연결시키는 부분을 부정하게 된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 나아가 부활신앙을 부정하게 되기에 후크마는 바르트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성경에서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한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 대해서도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라면서 영혼불멸사상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후크마는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라면서 이는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7장, “육체의 부활”에서도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면서 성경은 다만 약간의 힌트는 주지만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이 부분에 침묵한다고 내세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는가? 아니다. 후크마는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라면서 주님이 이루실 세계에 대해서 오히려 산소망,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후크마는 제19장, “영원한 형벌”에서도 지옥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있다고 믿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면서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처럼 순수한 재림신앙을 방해하는 첫째 세력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후크마는 이들의 견해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종말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사고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사는 존재요 우리 자신의 종말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하고 희망찬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만 계시하셨다. 후크마는 고전 2:9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지만, 놀라운 세계를 상상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다른 교리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종말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건전한 쪽으로 빠져들어간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알려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겸손한 자세를 상실하는 자세다. 이런 면에서, 후크마는 철저한 성경 주해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계시를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종말의 세상에서, 역사 앞에 겸손하고 미래의 일에 대해 겸허하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실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이 오늘을 사는 신자의 성경적인 내세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천년기론에서 재림신앙을 강조: “성경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 배격”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천년기론을 네 가지 입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무천년의 입장”에서 전개한다고 밝힌다. 본 책에서 후크마가 무천년기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재림의 기대”와 “현재의 삶”이다. 그는 제10장, “재림의 기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립에 대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했다고 강조한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후크마는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pp. 14-15.)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에게 재림신앙이 없다면, 긴장감도 없어지고 산소망도 없어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되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후크마는 “재림 신앙”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재림을 믿지 않는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실수를 하여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에게는 원래 종말신앙이 없었는데,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재림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분명히 깨어 경성할 것을 강조하는데, 재림 신앙이 없어지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식어질 뿐만 아니라 긴장감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면서 이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며 연약한 인간들에게 산소망을 심어준다고 강조한다. 제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라면서 내세에 대한 산소망을 강조한다.

   3. “이미”와 “아직”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

   후크마는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에서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한다. 그는 제4장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건전한 종말론을 가진 신자는 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크마는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을 거듭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서도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면서 현재에 대한 강조는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의 관계를 “연속성”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한다. 균형잡힌 종말론은 결국 오늘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으로 “일반은총”을 존중하며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오늘과 내일을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은 영원한 왕궁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데 아주 유익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후크마는 이런 긴장 속에서도 기독교인은 “승리”를 확신하는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는 쿨만의 말처럼 재림신앙이 있어야만 승리의 날을 향해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후크마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은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4. 전인적인 관점을 강조한 종말론

   후크마는 성경은 전인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헬라철학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결코 성경적인 종말론에 맞지 않다고 본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서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는 부활한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고 주장한다. 중간상태의 교리에서도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되며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라면서 우주의 종말도 “갱신”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생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갱신, 문화 창달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일으킬 수 있다.

   5.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강조

   후크마는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한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역사의 종말이 임한다. 그는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후크마가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본 예는 제12장 “특별한 징조들”에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는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입장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논리를 전개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본토”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는 이스라엘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역사의 중앙에 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면서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라고 희망한다.
   특히 재림의 때를 알려주는 징조 중에서 “배도”를 강조한다. 후크마는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면서 배도를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을 심각한 배도로 본다.
   오늘의 세상과 기독교 현실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너무나 멀리 간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보다 돈과 명예와 정욕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다. 예배당에서 예배하지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종말이 없을 것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들이 늘어간다. 가장 큰 배도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윤리 선생 정도로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들은, 브라운 교수가 [이단과 정통]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론을 부정하는 이단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견해를 첨가하거나, 예수님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 늘어가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상황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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