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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싸늘한 안개가 드리우나니

이 골짜기 밑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러울 것이랴.

저 멀리 아름다운 언덕이 보이나니

언제나 신선하고 언제나 초록색의 언덕

날개가 있다면, 깃이 있다면

나는 저 언덕으로 날아 가련만.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 오나니

천국의 달콤한 안식의 노래여라.

그리고 산들바람은 내게

향긋한 냄새를 보내 주고 있다.

황금빛 열매가 빛나는 것이 보이고

어스름한 나무 사이에서 나를 부른다.

저기 피어 있는 꽃들은

겨울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아 저기 저 무한한 햇빛 속에는

얼마나 멋진 일이 펼쳐지고 있을까

저기 저 높은 곳에 부는 바람 -

아아 그 얼마나 시원스러운가.

하지만 거센 물결이 나를 가로막고

성내어 떠들고 있다.

그 물결이 높이 넘실거리며

내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 준다.

 

흔들리는 한 척의 조각배가 보이지만

아아 거기에 뱃사공은 없구나.

용감하게 나가자 주저하지 말고

돛은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다.

믿고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신께서 보증을 준다고 생각지 말라.

오로지 놀라움만이 너를 태우고

아름다운 저 나라로 실어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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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체보기 작자 : 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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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체보기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실러의 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그의 고매한 정신과 강력한 의지를 관념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제 3연과 제 4연에는 청년 시대에 그가 참여한 슈트룸운트드랑(질풍노도)의 힘찬 휴머니즘이 강하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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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체보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 11. 10 뷔르템베르크 마르바흐~1805. 5. 9 작센바이마르 바이마르.

독일의 뛰어난 극작가·시인·문학이론가.

〈군도(群盜) Die Rauber〉(1781)·〈발렌슈타인 Wallenstein〉(3부작, 1800~01)·〈마리아 슈투아르트 Maria Stuart〉(1801)·〈빌헬름 텔 Wilhelm Tell〉(1804)과 같은 희곡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802년에 귀족칭호를 받았다.


청년기와 초기 희곡

요한 카스파르 실러 소위와 그의 아내 도로테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는 군직에서 은퇴한 후 원예에 몰두했고, 뷔르템베르크에 있는 카를 오이겐 공(公)의 저택인 루트비히스부르크 성(城)에 원예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들 프리드리히가 13세가 될 때까지 고전문법학교에서 견실한 교육을 시켰고, 전제군주 카를 오이겐 공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아들을 카를 사관학교에 보내는 데 동의했다. 이 학교는 대공(大公)이 직접 세우고 관리하는 학교였다. 부모들은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려 했으나 대공은 소년 프리드리히에게 법률 공부를 하라고 명령했고, 나중에는 의학으로 바꾸는 것을 허락했다. 8년 동안 사관학교의 지긋지긋한 단체생활을 견뎌낸 다음 실러는 군의 부위생관으로 임명받아 슈투트가르트 연대로 떠났다.


엄격한 전제적인 규율 속에서 청년기를 보낸 실러는 권력의 이용과 남용이라는 문제와 부딪치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그의 대부분의 희곡에서 끊임없이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몇몇 초기 시에서 드러나는 그에 대한 분노는 최초의 희곡인 〈군도〉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숨막히는 관습과 고위층의 부패에 대한 맹렬한 저항을 그린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원기왕성하고 불 같은 영혼을 지닌 카를 모어라는 청년은 다소 무질서한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된다. 악당 같은 동생 프란츠의 모략에 넘어간 연로한 아버지는 이러한 방탕한 형을 나쁘게 생각하게 되고, 아버지 모어 백작에게 쫓겨난 카를은 산적떼에 가담해 이 무법자들의 두목이 되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도전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기존의 질서가 아무리 부패한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과 무법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하며 사회 역시 테러나 범법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법의 처벌을 받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비웃던 법에 복종한다. 이렇게 작품을 전개함으로써 실러는 법과 도덕성을 옹호한 글을 썼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카를 모어를 '숭고한 죄인'으로 그림으로써 기본적으로 아주 고귀한 성품의 소유자를 전과자로 만드는 사회를 비난·고발할 수 있었다.


이 희곡이 무대 위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원본이 지닌 열정적인 반란의 색채를 다소 누그러뜨린 대본을 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만하임 국립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때(1782. 1. 13)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독일 연극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실러는 공연 첫날 저녁에 관객들 앞에 서기 위해 대공의 허락 없이 만하임에 다녀왔다. 그 소식을 들은 대공은 그를 2주간의 구류형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희곡을 쓰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밤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빠져나와 그의 첫 희곡을 무대 위에 올린 극장장, 헤리베르트 폰 달베르크에게 도움을 청하러 만하임으로 떠났다. 이때 새 작품 〈 제노바에서 일어난 피에스코의 모반 Die Verschworung des Fiesko zu Genua〉(1783)의 원고를 가지고 갔다. '한 공화주의자의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16세기 제노바를 무대로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의 흥망을 그리고 있는데, 실러의 표현대로 '야심을 행동으로 옮기면 최후에는 패배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새 희곡은 거절당했으며, 실러가 결말부를 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연을 거부당했다. 도망자를 도와주어 특별히 외교상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달베르크는 그를 가급적 멀리했다. 그는 긴장이 감도는 몇 주일을 한 피난처에서 불안정하게 보내다가 마침내 헨리에테 폰 볼초겐의 집에서 당분간 묵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그녀의 아들들이 학교동창이었던 까닭에 튀링겐의 바우어바흐에 있는 그녀의 집에 초대하여 머물게 했던 것이다. 거기서 3번째의 비극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1784)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한 귀족 청년이 천한 출신의 소녀를 사랑하는 이야기로서 실러의 타고난 극적 감각이 크게 부각된다. 인간의 기본적 감정이 부자연스러운 인습에 항거한다는 호소력 있는 주제, 활기찬 사회비판, 생생한 대화와 인물묘사 등이 결합하여 〈간계와 사랑〉은 위대한 작품으로 부상했다.


결국 달베르크는 실러에게 만하임 극장의 전속극작가라는 직책을 제안했다. 이것을 받아들인 실러는 〈간계와 사랑〉이 성공의 메아리를 울리는 것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수입을 얻으려던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계약이 끝난 1년 후 재계약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또다시 자신을 재정적 곤경에서 구해줄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또한 매력적이지만 불안한 성격의 기혼녀 샤를로테 폰 칼프와의 관계로 인한 감정적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러는 라이프치히로 이사했고 거기서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와 친구가 되었다. 재산이 조금 있었던 쾨르너는 실러가 2년 동안 작센에 머물면서 〈돈 카를로스 Don Carlos〉를 끝낼 무렵까지만 그를 후원해주었다. 첫번째 주요 시극(詩劇)인 이 작품은 1787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돈 카를로스〉는 실러가 극작가로 발전하는 데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어느 면에서 이 작품은 스페인의 노왕(老王) 펠리페 2세와 그의 3번째 왕비 발루아가(家)의 이사벨, 그리고 이사벨을 사랑하게 된 첫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 돈 카를로스 사이의 관계를 다룬 가정극이다. 그렇지만 부자간의 갈등은 사생활에 국한되지 않고 넓은 정치적 의미가 함축된 것이었다. 가정사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초점이 변화됨으로써 구성이 들쭉날쭉하고 복잡하게 되어버렸지만 이러한 단점이 보완될 만한 긍정적인 면들이 있었다. 즉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다양한 장면이라든가 섬세하게 개성이 부여된 인물들의 큰 폭, 복잡다단하고 사색적이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비극적 인물인 펠리페 왕이 그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독특하게 울리는 실러의 약강 5보격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의 음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무운시는 이전에도 독일 작가들에 의해 씌어졌지만, 독일의 시극에서 인정받는 형식으로 분명히 자리잡은 것은 실러의 〈돈 카를로스〉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를 통해서였다.


고전주의 희곡과 역사 연구

실러는 그를 환대하며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는 쾨르너의 관대한 제안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운 만족감을 환희에 찬 표현으로 〈기쁨에 부쳐 An die Freude〉를 통해 표현했는데, 이 찬가는 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교향곡 제9번 합창부의 악장에 이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러는 쾨르너의 집에 무한정 머물 수 없었다.


1787년 7월 바이마르를 독일 문학의 중심지로 이끈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바이마르에 갔다. 당시 이탈리아를 여행중이던 괴테가 이듬해인 1788년 바이마르로 돌아왔으며, 1794년 실러가 괴테를 만난 후 두 사람은 계속 편지를 교환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반대인 두 사람의 만남으로 독일 서간문 사상 고무적인 장(章)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반감을 느꼈으나 괴테는 실러를 예나대학교의 역사교수직에 추천했다. 실러는 이미 〈스페인의 통치에 따른 네덜란드 제국의 몰락사 Geschichte des Abfalls der vereinigten Niederlande von der spanischen Regierung〉(1788)로 교수 임명에 필요한 신임장을 제출한 셈이었다. 〈30년전쟁의 역사 Geschichte des dreissigjahrigen Krieges〉(1791~93)도 역사가로서의 그의 신망을 한층 높여주었으며 이것은 그의 위대한 희곡 〈발렌슈타인〉(1800)에 자료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1790년 실러는 좋은 가문 출신의 교양 있는 처녀 샤를로테 폰 렝게펠트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결혼생활 2년째 되던 해 실러의 건강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로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가슴의 통증과 소화불량이 겹쳐 한동안 몹시 아파 누워 있었으며, 그후에도 몇 번이나 재발되어 다시 기력을 찾긴 했어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치유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남은 생애는 뛰어난 인내로 가혹하게 악화되어가는 병과 싸우는 전투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철학 연구와 역사학

실러의 병은 불행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조각의 큰 행운을 안겨주었다. 쉬면서 건강을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 2명의 덴마크인 후원자가 3년 동안 풍부한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러는 이러한 시간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공부하고자 결심했다. 칸트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곧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렇게 칸트의 철학과 우연히 만나게 됨으로써 1793~1801년에 일련의 평론들을 발표했다.


〈우미(優美)와 품위에 관하여 Uber Anmut und Wurde〉·〈숭고에 관하여 Uber das Erhabene〉를 비롯하여 2가지 시적 창조 유형의 차이에 관한 저명한 논문집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인 문학에 대하여 U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등에서 실러는 미적 활동의 성격과 이것의 사회 속에서의 기능 및 도덕적 경험과의 상관관계를 정의하려고 했다.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인 문학에 대하여〉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들을 모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Briefe uber die a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과 마찬가지로 〈호렌 Die Horen〉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야심적이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던 이 문학지는 실러가 편집을 맡았으며 요한 프리드리히 코타가 출판을 담당했다. 코타는 독일의 지도적인 출판인으로 실러가 1793~94년 고향 슈바벤을 방문하는 동안 만나게 되었다.


이 비평활동의 시기에 〈이상과 삶 Das Ideal und das Leben〉·〈산책 Der Spaziergang〉·〈노래의 힘 Die Macht des Gesanges〉과 같은 절묘한 성찰시가 나왔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서정시'인데, 이는 시로 쓴 철학이 아니라 지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얻은 시적 발언을 말한다. 여기에는 실러의 철학적·비판적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으며 그가 쓴 시 가운데 가장 뛰어나지만 소수만이 감상할 수 있는 시이다. 반면 〈장갑 Der Handschuh〉·〈잠수부 Der Taucher〉·〈이비쿠스의 두루미 Die Kraniche des Ibykus〉 등 1797년에 쓴 발라드들은 가장 애독되는 작품들이다. 그는 이러한 시들과 아울러 유명한 시 〈종(鐘)의 노래 Lied von der Glocke〉를 통해 어떻게 하면 시가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로 된 서문, 극적 프롤로그, 2편의 5막극으로 구성된 장대한 규모의 〈발렌슈타인〉에서 극작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이 희곡은 30년전쟁중 신성 로마 제국 군대의 대장이었던 알브레히트 벤첼 오이제비우스 폰 발렌슈타인을 그린 작품이다. 음산한 전쟁 분위기를 배경으로 사악한 발렌슈타인의 모습이 부각되는데, 그는 내심 적군에 가담함으로써 제국의 중재자가 되길 바라며 반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자신이 특권적 존재이고 선과 악을 초월한 초인이며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이라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특성들은 불쾌감을 주긴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태도는 관객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심지어 약간의 동정심마저 유발시키고 있다. 그의 초상은 권력의 유혹과 위해성에 관한 심오한 연구이다.


시간과 싸우며 실러는 4편의 희곡을 잇따라 발표했다. 〈마리아 슈투아르트〉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도덕적 재탄생을 담은 심리극이며, 〈오를레앙의 처녀 Die Jungfrau von Orleans〉(1801)는 잔 다르크를 주제로 한 '낭만주의 비극'인데, 여기서 여주인공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화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승전 후 화염 속에서 영광의 승천을 한다. 또 실러의 마지막 비평적 발언이라 할 중요한 서문이 들어 있는 〈메시나의 신부 Die Braut von Messina〉(1803)는 그리스 극을 본떠 쓴 것이며 〈빌헬름 텔 Wilhelm Tell〉(1804)은 정치적 행동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대항하는 스위스 삼림주(森林州)의 항거와 주인공이 폭압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행정관을 암살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실러의 고전주의 시기에 씌어진 이들 희곡들은 각각 나름대로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 슈투아르트〉가 가장 극적으로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데, 이 극의 사건은 메리가 포더링게이에서 처형되기 전 마지막 3일 동안으로 압축된다. 그녀의 프랑스 왕과의 결혼, 짧았지만 문제가 많았던 스코틀랜드 통치기, 영국에서의 오랜 감금생활 등의 모든 사건들이 회상적인 분석의 수단에 의해 부상된다. 실러는 이 주제를 다루면서 기록된 사실들로부터 자주 벗어나긴 했으나, 이 희곡을 통해 역사적 상황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정치적 편의주의가 정의인 것처럼 가장되고 재판관들이 권력 정치의 압력이나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굴복할 때마다 야기되는 문제들을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메리는 영국 재판소가 내린 판결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임으로써 외적인 재앙을 내적 승리로 승화시킨다. 판사들의 판결에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법권을 초월하여 구원받고 승화된 죄인이 되는데, 이것은 극의 주인공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실러의 비극론과 일치한다. 1805년에는 러시아를 주제로 한 새 희곡 〈데메트리우스 Demetrius〉(1805)를 쓰던 중 죽음이 그를 덮쳤다. 이 작품은 남아 있는 훌륭한 단편들로 미루어볼 때 충분히 걸작이 될 만한 작품이었다.

평가

괴테는 "자유의 이념은 실러가 스스로 발전해가며 다른 사람이 되어감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육체적 자유가 그를 사로잡아 작품에 반영되었으나 말년에는 정신적 자유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실러의 초기 비극은 정치적 억압과 전제적 사회 관습을 공격한 것이었으나 후기 희곡들은 사람이 육신의 허약함을 초월하고 물리적 외부조건들을 극복하는 영혼의 내적 자유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 희곡들은 현세가 바라는 것과 영원한 도덕적 질서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성실성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찰적인 시와 논문들을 통해서 그는 예술이 내적 조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과 시민 각자의 '미적 교육'을 통해 보다 행복하고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계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의 미학에 대한 성찰문들은 정치적·역사적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 실러의 모든 저작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대성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깜짝 놀랄 만큼 20세기의 생활과 연관성을 지닌다. 한동안 독일 지식인들의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역작들이 지닌 항구적인 가치는 어떤 비평의 시류에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W. Witt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미지 전체보기 질풍노도운동(疾風怒濤運動) Sturm und Drang 슈트름 운트 드랑 (영)Storm and Stress.

18세기말 독일에서 일어난 문예운동.

자연·감정·개인주의를 고양시켰으며, 합리주의의 계몽 숭배를 뒤엎고자 했다. 괴테와 실러가 이 운동의 선두주자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질풍노도운동의 대표적 인물들은 존재의 기본진리를 믿음과 감각의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 장 자크 루소와 요한 게오르크 하만의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젊은 작가들은 또한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의 작품들, 제임스 맥퍼슨의 의사서사시 〈오시안 Ossian〉, 그당시 번역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젊은시절의 괴테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데,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 학생시절 괴테는 하만의 제자였던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를 알게 되었으며, 헤르더는 괴테로 하여금 고딕 건축, 독일 민요, 셰익스피어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헤르더의 사상에 고무된 괴테는 비상한 창조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773년 괴테는 16세기의 독일 기사의 이야기에 토대를 둔 〈괴츠 폰 베를리힝겐 Goz von Berlichingen〉이라는 희곡을 발표했다. 헤르더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질풍노도운동의 선언문격인 〈독일의 예술과 문예에 관하여 Von deutscher Art und Kunst〉라는 소논문을 발표했다. 이 운동의 정신을 요약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줌과 동시에 수많은 모방자들을 만들어냈다.


질풍노도운동 시기의 극문학은 이 운동의 가장 특징적인 산물이었다. 사실 이 운동의 이름 자체가 프리드리히 폰 클링거의 희곡에서 따온 것이었다. 클링거는 셰익스피어의 인물처럼 깊이 있는 무게를 지닌 인물들을 무대에 올려보고 싶은 욕구에서 구조의 문제보다 등장인물을 우선시하고, 비평가인 요한 크리스토프 폰 고쳬트가 독일에 들여온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관행을 거부했다. 실러의 〈군도(群盜) Die Raber〉(1781)가 발표됨으로써 질풍노도의 극문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절제를 모르는 이 운동은 얼마 안 가 스스로 사그라들었고, 가장 재능있는 대표자였던 괴테와 실러는 창작을 계속하여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몸과 정신을 형성한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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