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무렵, 시아버님은 우리 둘을 불러 놓고 남편에게 통장 하나를 내 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통장을 열어 보고 마음이 상했다. 결혼하는 아들에게 겨우 300만 원이 뭐란 말인가. ‘친아들이 아니라고 이 정도밖에 안 주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혼한 지 3년이 흘렀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시아버님을 뵈러 시골에 내려갔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시아버님께 포도를 사서 드렸는데, 시아버님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스무 번은 넘게 씹었다가 삼키셨다.

통장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여전했던 나는 아버님이 건강을 무척 생각하신다고 시어머니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건강 생각하느라 포도 한 알을 그리 오래 씹는 줄 아니? 아니다. 어금니가 다 빠져서 그래. 얼마 전부터 앞니가 흔들린다고 못 씹으신다. 내가 성치 않은 이를 뽑으라고 해도 안 들으신다. ‘뽑고 나서 새 이를 안 해 넣고 다니면 자식들이 부모 이 하나 제대로 안 해 준다고. 자식 욕 듣게 하는 일이라고 저렇게 몇 개 안 남은 이를 붙들고 사신단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좁은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날, 시부모님께서 숨겨 왔던 남편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친부모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부모님이 남편을 데려다 주려고 찾아갔더니, 생부는 세상을 떠났고 생모는 쌓인 빚을 갚느라 아기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 후 생모마저 재혼한다는 말과 함께 남편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남편을 당신의 호적에 올렸고, 아들을 얻은 대가로 남편의 친부모가 남긴 빚마저 떠 안으셨다. 시아버님은 빚을 갚아야 아들이 떳떳하게 산다고 31년 동안 그 빚을 갚아오셨다. 그래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만 하셨고, 건강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뒷전으로 미루셨다고 한다. 마침내 그 많은 빚을 모두 갚으셨지만, 그러다 보니 수중에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도 알았다. 우리가 결혼할 때, 아버님이 주신 통장의 300만 원. 이것도 아주버님이 시아버님 틀니 하라고 주신 돈이었고, 시아버님이 가진 전 재산이었는데, 그것마저 우리에게 주셨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포도를 그렇게 드실 수밖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의 절반이라도 갚아드릴 수 있을까.

《곁에 있어 고마워요》, 김경숙 외,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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