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교회의 성가대원은 5명이었다. 초미니 사이즈다. 풍금 반주에 맞춰 부르던 그 미니 성가대의 노래 소리는 아직도 내 마음을 울려주는 소중한 추억의 멜로디로 남아 있다. 성가대 까운도 없고 소프라노, 테너로 갈라서 부르는 파트 구분도 없고 화음이랄 것도 없다. 가사만 거룩할 뿐 노래실력은 지금으로 따지면 시골 노래방 수준이었을 것이다.      

가을이 되니 여기저기서 연주회가 열리고 교회 성가대원들이 바빠지는 계절이 되었다.
특별히 여러 교회 성가대가 연합으로 연주회를 갖는 곳에 가보면 자칫 성가대가 그 교회의 교세를 과시하는 특임 대사라도 되는 듯이 엄청 많은 숫자가 무대에 오르는 경우를 가끔 본다.

성가대원은 얼마가 정원일까? 음악대학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정원은 없는 것 같다. 그럼 다다익선? 그렇다고 서울에서 음악대학만 나왔다고 성가대는 무임승차해도 되는가? 성가대 점심 잘 사주시는 장로님 사모님, 그 분의 인기가 짱이니까 그냥 성가대원으로 모셔 와도 되는가?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수평이동 교인이 한 달도 안됐는데 남아도는 성가대 까운도 처치할 겸 급한 대로 성가대에 세워도 되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성가대가 얼마나 거룩해야 하는지는 예배시간에 롭(robe)을 걸치고  강단에 서는 설교자와 똑같이 까운을 입고 예배에 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 원론에 비해 현실은 너무 엉터리다.

성가대원은 라이센스가 없다. 성가대 들어갈 때 오디션도 없다. 연장교육 서티피컷을 받아 올 필요도 없다. 한번 성가대원은 영원한 해병처럼 실력이고 뭐고 영원한 성가대원이다. 그래서 ‘젊은 피’는 없고, 많은 교회들이 ‘경로당 성가대’로 변모해 가고 있다.

연장 교육, 재교육, 재 신임 같은 것도 필요 없는 직책이다. 그러다가 어디서 연합으로 연주회가 열린다하면 집사님, 권사님, 사모님이 성가대원으로 구름처럼 무단 입성하여 갑자기 초대형 수퍼 성가대로 몸집이 불어난다.        

이런 성가대의 찬양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면 우리 하나님은 너무 싸구려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 분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하나님은 수퍼 사이즈가 아니라 초미니 성가대를 통해서라도 정녕 그 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를 소원하는 순전한 성가대의 찬양을 원하실 것이다.

그래서 성가대 하면 지휘자에게 일임하여 교회음악을 딴 나라 살림으로 착각하는 담임목사의 무책임도 문제고, 성가대 지휘자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경쟁심과 질투심도 문제로 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성가대 지휘자를 크게 4가지로 분류하라면 음악성은 뛰어난데 신앙심이 깊지 못한 ‘쟁이 스타일’, 신앙심은 깊은데 음악성이 수준 미달인 ‘아멘 스타일,’ 음악성도 없고 신앙심도 깊지 못한데 담임목사 ‘빽’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눈치 스타일,’ 신앙심도 깊고 음악성도 높은 ‘다홍치마 스타일,’ 아마 그렇게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네 미주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모두 다홍치마 스타일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제일 골치하픈 존재는 눈치 스타일이다. 눈치만 살피면서 어디 연합으로 연주회가 열린다하면 자기네 교회를 대표하여 출정하는 무슨 십자군 군병처럼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철학과 자존심 따위는 덮어 두고 무조건 급조 성가대원 총동원령을 내려 평소 30명 하던 성가대원을 80명, 혹은 100명으로 부풀려서 무대에 끌고 오르는 성가대 지휘자가 있다면 이는 오버해도 한참 오버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래야 교회 위신도 빵빵하게 세워주고, 지휘자로서의 명예도 빵빵하게 수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뻥튀기 강박증, 이건 누구에게 세라피를 받아야 치유가능 한 것인가?

헨델의 ‘메시야’가 초연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스 성당에 가면 성당 옆에 큰 건물로 자리 잡고 있는 ‘성가대 학교(Choir School)’란 간판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미주 한인교계에 더블린에 있는 성가대 학교는 없다할지라도 개체교회가, 혹은 교회 음악가 협회 등이 정기적으로 지휘자와 성가대원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세미나 혹은 음악학교를 여는 것은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성가대원들조차 주님 제단 앞에 나가 찬양을 부르면서 앉아 있는 관객들의 눈치나 살피며 화장 고칠 생각이나 하지 그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민감성 따위는 아예 기대할 수 도 없는 경우를 허다하게 목격한다.

연습도 없이 지각생처럼 허둥지둥 악보집 들고 성가대에 끼어들어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어찌 성가대원이라 말할 수 있으리요. 입에 담아 올려드리는 찬양의 내용대로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숙성된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다는 설레이는 기대를 가지고 한결 같이 연습에 임하는 성가대 . . . 그런 성가대라면 도대체 성가대 숫자나 사이즈를 뻥튀기하겠다는 발상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성가대 사이즈를 뻥튀기하려는 강박증은 이제 버려야 마땅하다.  

조명환 목사, 크리스천뉴스위크 발행인
ⓒ 크리스천뉴스위크

'마음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 마 설(借馬說)  (0) 2011.11.07
히틀러의 증오  (0) 2011.11.03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0) 2011.09.06
성공의 열매  (0) 2011.08.29
욕심을 부리지 마라  (0) 2011.08.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