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님이 투신한 것 같습니다” 듣는 순간 주위가 빙글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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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을 잃은 뒤 자살자유가족 상담사로 나선 박인순 한국자살자유가족대표(왼쪽)가 상담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그는 “자살자 유가족 역시 함께 밖으로 나와야 살 수 있다”며 “혼자서는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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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똑같은 꿈이다. 대여섯 살 된 아들을 등에 업고 있다. 아이가 제법 무거워 포대기를 자꾸 추스른다. 눈을 뜬 아이가 “엄마, 왜 자꾸 깨워”라며 투정을 부린다. 다시 업어주니 아이는 쌔근쌔근 잠이 든다. 아이 얼굴에 손을 뻗어 본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그 순간 꿈이 깬다. 애가 닳아 숨이 가빠진다. 눈가도, 베개도 촉촉이 젖어 있다. 2009년 8월 3일 새벽. ‘딩동!’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아드님이 ○○○ 씨 맞나요?” “네, 맞는데요.” “집에 계시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이 방문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도, 거실에도 흔적이 없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경찰은 8층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하얀 천이 보였다. 》

○ 못난 부모 탓에 우울증 앓던 외아들이…

“아드님이 투신하신 것 같습니다.”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하얀 천을 들춰 보았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시신은 깨끗했다. 흘러내린 코피 한 줄이 땅으로 떨어졌을 때의 충격을 증명할 뿐이었다. 혹시 그냥 잠든 것 아닌가. “○○야!” 흔들어 깨워 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전날은 바로 엄마의 생일이었다. 조촐한 생일파티가 끝난 뒤 아들은 “엄마, 우리 영화 보러 가요. 매트릭스요. 부활의 메시지가 담겼다던데요”라고 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내일 가자.”

마지막 대화였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혹시 영화를 봤더라면 소중한 아이는 엄마 곁에 있었을까.

“CCTV를 보시겠습니까?”

차마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장례식은 하루 만에 끝났다. 시댁에서 흉사(凶事)니 서두르자고 했다. 미처 슬픔을 느낄 틈도 없었다. 스물두 살 외아들은 그렇게 곁을 떠났다. 박인순 씨(58)는 그 후 아이 업어주는 꿈을 자주 꾼다.

종종 엄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자던 자상한 아들이었다. 교보문고에서 두세 시간은 거뜬히 앉아 있다 오는 책벌레이기도 했다. 변변한 과외 한번 못 시켰지만 명문대에 진학했다. 영리하고 따뜻한 아이였다. 모진 결심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울증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자살을 기도했다. 팔목에는 칼로 그은 흉터가 남았다. 상담을 받으면 호전되다가 상담이 끝나면 다시 나빠졌다. 어린 나이에 정신과를 다니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극복해 낼 것이란 믿음도 컸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별거를 시작했다.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수치심, 한편으로는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까지 3년이 걸렸다. 엄마는 자신의 상처가 너무 아파 미처 아이의 상처를 돌보지 못했다.

동네에 별거한다는 소문이 나 이사를 갔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아이는 부산 아빠 집으로 보내졌다가 서울 엄마 집으로 오가기를 반복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섯 번 이사했다.

“아이가 산 날이 8000일 정도예요. 뽑았다, 심었다, 뽑았다, 심었다…. 한 번도 뿌리를 못 내리고 살았던 거예요. 뿌리가 없으니 시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 그날 이후 살아도 산 게 아닌 死線의 날들

이혼한 뒤 양육비 한 푼 못 받았다. 당장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막막했다. 다행히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신학대에도 진학했다. 몰두할 일이 있어야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길이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루 3, 4시간 자면서 버텼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가 아이에게 저녁을 먹였다.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낸 뒤 집을 나왔다. 5년 넘게 아이는 혼자 지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 아이의 병은 이미 깊어졌다. 군에 입대했다가 사흘 만에 되돌아왔다. 팔목의 상처를 들켰고 우울증 진단이 내려졌다. 대학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마다 징병검사를 다시 받았다. 완치 판정을 받아 입대하든지, 면제 판정을 받든지 해야 하는데 2년간 입대만 자꾸 미뤄졌다. 학교를 휴학한 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 나 이제 좋아진 것 같아. 평생 약을 먹을 순 없잖아요.”

약을 끊은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아이는 집 앞에서 뛰어내렸다. 우울증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다. 꾸준히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가슴을 쳤다. 병의 원인이 부부 갈등은 아니었을까 싶어 또 가슴을 쳤다. 장례식장에서 아이 아버지를 만났다. 회한으로 흐느끼는 그를 보고 처음으로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비였고 박 씨는 어미일 뿐이었다.

가족의 죽음.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슬픔이다. 그러나 자살은 여느 죽음과 다르다. 고통의 원인이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 왜 나를 버렸을까 하는 분노, 떳떳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수치심 등 온갖 감정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먼저 떠난 고인을 따라가는 가족도 많다.

“1년간 누워서 울기만 했어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죠. 채집당한 곤충이 산 채로 핀에 꽂혀 있는 듯한 아픔이었어요. 아무도 이 핀을 뽑아주지 못하죠.”

먹고 자는 것조차 잊었다.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들이 뛰어내릴 때 느꼈을 두려움부터 몸이 부서지는 통증까지 하나하나 느껴지자 숨이 조여 왔다. “오죽했으면…” 하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 따뜻한 시선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불효했다.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위로의 말은 비수가 돼 꽂혔다. 자연스럽게 가족도, 친구도 멀어졌다. 화장을 하는 것도, 옷을 차려 입는 것도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TV를 보며 웃다가도 ‘내가 이래도 되나’ 싶어 순식간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박 씨는 남 앞에서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을 ‘가면 쓴다’고 표현한다.

아들의 1주기. 아이가 떠난 날보다 고통스러웠다.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일이면서 아들의 기일인 날. 그리고 몸에서 혹을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림프샘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덤덤했다.

“간단한 수술이면 됩니다.”

의사의 말에 ‘차라리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외쳤다.

○ 무너지기 직전 만난 동병상련 사람들

그 즈음부터 ‘생명의 전화’ 자살자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여했다. 7주간 매주 자살 유가족끼리 만나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주변에서는 다들 심장마비인 줄 알지만….” “결국 아내가 딸을 따라갔어요.”

이런 말들이 오갔지만 불편하거나 숨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편안했다. 그냥 손을 마주잡고 안아주기만 해도 위로가 됐다. 심리상담보다 더 힘이 됐다. 상담소에 가면 심리상담사가 오히려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같은 프로그램을 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자살이 일어나면 그 사람의 죽음에만 관심이 쏠려요. 남은 사람의 삶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십수 년이 지나 고인을 따라가는 사람도 많죠.”

박 씨는 지난해 4월부터 직접 유가족 상담사로 나섰다. 일주일에 사흘 동안 반나절씩 ‘생명의 전화’에서 전화 상담을 한다. 유가족 모임인 한국자살자유가족대표도 맡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회복이 가장 더디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마음을 알까. 지난해 A대학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그 가운데 한 아이의 엄마가 흐느끼며 전화를 걸어왔다.

“외동딸이 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픔을 감추려는 남편은 ‘그만하지’라며 호통을 친다고 했다. 아내는 벌써 잊었나 싶어 서러워진다. 항해하던 배가 부서진 것과 같다. 남은 가족은 난파된 배 조각에 매달려 위태위태하다.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가 너무 원망스러워요.”

아내를 잃은 남편은 갑자기 생계와 육아라는 현실적인 짐을 떠안게 된다.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너 때문에 내 아이가 갔다’는 처가의 비난에 가족과도 멀어진다. 수화기 넘어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일조차 잘 안 돼요.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마음에 ‘주홍글씨’가 새겨진 사람들이다. 특히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 상담 이후 꾸준히 연락해 오는 유가족이 80명 정도다. 하루 2, 3통씩 유가족이 전화를 걸어온다.

“폭우가 쏟아진 뒤 물에 잠긴 길을 건너봤어요?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허리를 감고 걸어갑니다. 힘들지만 유가족 역시 함께 밖으로 나와야 삽니다. 혼자서는 못 견딥니다.”

○ 그들을 살리며 살아야 할 이유 찾았다

자살 유가족에 대한 시선도 바뀌었으면 한다. 한마디, 한마디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기자에게 어렵게 속내를 털어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자살 유가족은 대표적인 자살 고위험군. 예방이 필요하지만 상담비용이 높고 정보가 부족해 방치되는 사례가 많다. 자살이 발생했을 때 병원, 경찰서 등이 유가족을 자조모임에 바로 연결해 주면 이차적인 사고를 막을 수 있다.

박 씨는 접었던 공부를 3월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끼리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어 사회복지학을 공부한다. 아이가 못다 이룬 꿈이기도 하다.

오늘 밤에도 아이를 업어주는 꿈을 꿀지 모른다. 꿈에서라도 다시 한 번 아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아이에게 하고픈 이야기도 있다.

‘네가 엄마에게 남겨준 살아야 할 이유를 이제야 찾았다고….’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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