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당한 자들과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과 7장]

이 세상은 이미 정죄되었고 불태우기 위하여 간수된바 되었습니다. 심판과 마지막날은 반드시 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단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께서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천군천사가 환호하며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토록 소망하였던 그 날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어린양이 인을 떼시기 시작합니다. 첫째 인을 떼시자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은 자가 흰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 탄 자가 나오는데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합니다. 셋째 인을 떼시자 검은 말을 탄 자가 저울을 들고 등장합니다.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을 탄 ‘사망’이라는 자가 나와 땅 사분의 일을 검과 흉년과 사망과 짐승으로 죽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처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네 마리의 말은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지진과 전쟁과 기근과 죽음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시자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인하여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영혼들에게 친구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죽임 당하는 자의 수가 차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죽음과 희생을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시며 진노를 쌓아 심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자신들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참으로 무섭고 참혹한 정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입니다.

계시록 7장에 들어가면 땅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려고 땅의 네 모퉁이에 선 천사들을 향하여 다른 천사 하나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서 9장에 먹 그릇을 차고 등장하여 살육하는 기계를 가진 여섯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인 맞은 자들의 숫자, 이스라엘 각지파에 만 이천 씩, 도합 십사만 사천의 숫자를 듣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찬양하며 모든 천국천사가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천사는 ‘이 무리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이 ‘십사만 사천’은 참으로 분분한 해석과 논란을 불러오는 숫자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과 바로 뒤의 ‘아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무리’가 같은 무리인가 다른 무리인가,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셀 수 없는 무리는 각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구원받은 무리인가....... 신천지라는 괴상한 이단이 있습니다. 이만희를 보혜사로 믿는 신천지의 한 신도가 이만희가 있는 한국이 바로 천국이며 이 ‘십사만사천’이 거의 찼고, 다 차면 신천지가 시작될 것이며, ‘십사만사천’에 들어가야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되어 자신의 부모형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이없었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사용된 가장 큰 숫자의 용어는 ‘천’이었습니다. 아직 ‘백만’ 곧 ‘밀리언’이라는 용어가 없을 때입니다. 영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천(Ten Thousand)’, ‘백천(Hundred Thousand)' 식 아닙니까? 즉 ’천‘은 당시의 가장 큰 숫자이였고 열둘은 하나님의 충만한 숫자이므로 ’12천‘, ’144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엄청난 숫자라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숫자를 딱 정해놓고, 겨우 14만 4천명으로 제한해놓고 무슨 입학시험 보듯이 커트라인으로 잘라 구원하시는 분이시겠습니까?

그보다 저는 특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오는”은 영어로 ‘have come' 현재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한 자들도 아니요 환난을 면한 자들도 아닙니다. ’환난에서 막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인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인정받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보혈로 구별된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휴거’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를 몰다가, 비행기를 몰다가 운전사가, 비행사가 사라져버리고 환난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함께 전삼년반환난휴거설, 후삼년반환난휴거설도 있습니다. 하긴 어느 누가 그 무서운 환난을 당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 할 것이라(마24:22)는 무서운 환난을 당하지 않고 들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6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들, 7장에서는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온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서 마치 용광로에서 정련된 금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한 욥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심판과 환난을 거쳐서 어린양의 피에 적신 흰옷 입은 무리를 이끌어내시는 것은 만일 심판과 환난이 없다면 가라지와 쭉정이와 찌끼까지도 분리되지 않고 함께 거두어질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판과 환난이 두렵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주를 믿는 당신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철은 용광로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금은 아무리 단련하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금을 찌꺼기와 함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가진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이고 참사랑이라면, 당신이 어린양의 피에 씻기어 있다면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단 한 방울의 귀한 어린양의 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환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환난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목을 베고 사자에게 던지고 기름가마에 던지는 개인적인 환난이나 믿음의 증거로 인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는 일은 어느 세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환난은 있습니다. 풍요와 안일, 회의와 증오, 유혹과 타락 같은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시험은 매일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믿음 때문에 핍박당하고, 손해보고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혼돈의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기기 힘 드는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이 어두운 세상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임당하며 환난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닥친 환난을 믿음으로, 사랑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이겨내십시오. 휴거로 면하려 하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믿음으로 부딪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임 당하거나(6장), 큰 환난에서 나오거나(7장),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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