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올린 지 어언 1년이 지났군요.
아멘넷 독자님들께서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시라고 올립니다.

*아래 글은 이 곳 게시판에 몇 번에 걸쳐 나눠올렸던 글을 합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손질(오타 수정등등)해서 다시 올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영(프뉴마)과 진리(참-알레데이아)로 예배해야 한다'는 본문이 속한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신학적 이해를 무시한 채, '예배의 구호'로 써먹는 사례가 빈번하다 못해 도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우물쭈물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열린 예배'가 유행합니다. 심지어 '예배의 성공'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한 상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예배,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현재 우리가 드리는 모임예배 나아가 생활예배를 뛰어넘는 광활한 성경적 개념을 지닌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한구절적용'식의 성경이해는 여러가지 페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그러니까 (구약)제사에 담긴 영과 진리, 그리고 제사가 가리키는 바 영적 의미와 진리이신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 찾아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수가성을 그냥 찾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에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그 찾으심을 이루시기(일하기) 위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거쳐 갈릴리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수가란 이름이 가진 역사성을 외면한 채 성경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처음 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쉐켐은 신약에서 헬라어로 음역되어 쉬칼(수가)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마리아와 요세"란 표현이 나옵니다. (갈릴리역)아람어는 종종 끝글자 받침이 탈락되어 불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암-마리아, 요셉-요세'로 말입니다.

쉬카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쉐켐-쉐케, 쉐케(아람어식 발언)를 헬라어 쉬칼로 번역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유서깊은 역사적 고장으로 각자가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시대로부터 시작되는 지명이지만 그 이전 아벨의 제사로 시작해서 아브라함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단을 쌓음-제사'임을 알게 해 줍니다. 야곱의 세겜,모세가 명한 세겜 땅인 그리삼산과 에발산 사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서 율법을 선포하고 에발산에 단을 쌓음등등,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나오는 쉐켐과 제사(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함를 말함)에 대한 이해의 선행없이 곧장 '따옴표'로서의 예배는 무의미를 넘어 본문의 참된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꺼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만 적어도 세겜(수가)에 대해서만은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동참하실 분들은 예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개역개정)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실 위 본문으로 바로 강해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오는 기록인 1-3장을 바르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전체를 다 강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큰 문단으로 되어 있지요. 성삼위 하나님의 '원 창조(첫 장조)의 구조'를 '새 창조'와 이미지로 유비시켜 글을 구성해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1-2:3절 까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문단격인 서론문단은 1:1에서 2:11절 까지입니다.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의 이미지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개의 작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징 중 하나는 마지막 일곱 째 단락을 생략한 채,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 묻어둔다는 사실이지요. 이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서 마지막 문단인 "안식 후 첫 날"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믿을 때-영접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두번 째 큰 문단인 2:12 이하 "그 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에 어어지는 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 두 번째 문단에 속한 글이 '성전정화 사건',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입니다.-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새 창조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씀인데요,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루아흐-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물이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 창조행위의 과정이요 결과였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아노덴-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로고스)이신 아들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례전적인 물세례(사실상 침례)가 이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례는 하나의 상징이요,표(sign)일 뿐입니다. 본질적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에게 아무리 세례를 준다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하여 세례주어 제자삼기 경쟁을 벌릴 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제자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가르치고자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거쳐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힘에 있지 않습니다. 수와 힘의 논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해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십니다. 위 본문 1-4절을 원문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세례를 주고있는데(미완료)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셨다(과거 시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왕국 건설에 이 적은 무리로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숫자를 불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물도 없는(세례주지 못 하는) 사마리아로 가시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메시야 왕국 건설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제자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입이 튀어나온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셨습니까. 천국((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지 못 하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큰 게 좋은 것이고 교인 수가 많아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저히 수와 힘의 논리로 무장하고 그에 함몰되어 주를 따르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보시고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요?

정신차려야 할 때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고 있습니다. 세상 잠에 세상 영광에 취해 있습니다. 술에 잠긴 자 보다 나을게 조금도 없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찾으심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무엇인지, 왜 물세례주어 숫자 불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지를 몸소 가르치고 친히 교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드디어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수가(쉐켐),야곱,요셉의 이름만 들어도 창세기 족장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처음 독자는 1세기 말경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가까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었고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도 대부분 순교하거나 죽었던 시기였을 것으로 봅니다. 더하여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어 쪽복음과 서신의 형태로 여러 교회들에서 읽혀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을 영감하셔서 이 책(요한복음)을 기록케 하신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끝자락(20장)에 나오는 기록목적을 한 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쉐켐에 대해 예습을 하신 줄로 알고 자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물론 사마리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배경)도 생략합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 풀썩 주저앉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에브라임 산지에는 물이 귀합니다.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식구와 가축이 다 마시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우물이라고 합니다. 이 참에 야곱에 대해서도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무릎에 앉아(형 에서와 함께),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하나님 이야기! 생명주시는 구원자가 오신다는 이야기! 창조기사는 물론이요,타락과 회복의 약속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 이야기,제사 제도와 노아 홍수등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야곱입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형 에서와는 전혀 다른 야곱입니다. 그랬기에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빼앗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어코 내 것으로 삼고야 말겠다는 야곱의 거룩한 욕심(열망)이 족장시대 야곱이야기를 그토록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 야곱의 우물에 아브라함의 후손 곧, 야곱의 허리 아래 씨로 계셨던 생명주시는 그 분이 인자됨을 인하여 피곤하여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계십니다. 요한복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심을 동시에 강조하되 어느 한 쪽도 그러니까, 신성과 인성 어느 한 부분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마실 것 좀 다오(주시오)"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입이 한 발이나 나온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다 동네에 들어가고 한 넘(?)도 예수님 곁에 없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 길러 왔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달라 하나이까"
여자의 말이 젊잖아 보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실로 젊잖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말은 언중유골도 아닌 가시가 돋친 발언입니다. '평소에는 상종조차 않고 개 취급하더니만 목마르니까 유대인이라고 별수없구나'라는 응어리가 묻어나는 말입니다.(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도 공부하셨으리라 믿고 약(略)합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위 말씀을 꼽씹어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니 그냥 곱게 물 좀 달라면 됐지 하나님의 선물 운운하면서 이 우물이 마치 유대인 자기들 것인양 말한단 말인가! 우리 조상 야곱이 분명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리고 이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도 없는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생수를 준다는 말인가!'

그래서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대든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지만 이 여자는 그렇게 하고도남을 인생역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예전에(이십년 가까이 전) 요한복음을 좋은 읽을거리로 여겨 참 재미있게 읽고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가지고 설교도 두어 번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젊잖게 성경을 대합니다. 물론 경외심을 가지고 읽어야겠지만 글맛까지 놓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몸을 가져셨기에 마실 것 좀 다오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도 참말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리만 증거하고 있음이지요.

말귀 알아먹지 못 하는 이 여자는, 아니꼽게 여기고 말꼬리 잡고 대들고 이제는 아예 비아냥댑니다. '아니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딨담! 내가 바본 줄 아나?' 그래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긍정을 통한 강한 반감과 비아냥댐을 표시하고 있음이지요. (상대가 말도 안 되는 말로 고집을 부릴 적에,'그래 니 말 맞다!' 하면서 상대의 말을 인정 안 하려는 우리의 어투도 있습니다)

모든 게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해가 넘칩니다. 무지에서,오해에서 바른 이해(앎)의 자리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여자와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 가능할까요?

출처: USA 아멘넷/ 지혜자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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