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건네진 성경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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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들어온 성경이 영어 성경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816년 9월 5일, 서해안을 탐사하던 영국함선의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은 충남 서천의 마량진에서 배를 정박했다. 바실 홀은 그가 저술한 ‘조선항해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들이 해안에 가까이 가자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배에 있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법썩거렸다. 해변가에 사람들은 급히 나룻배에 뛰어 오르고 한편 큰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닻을 거두고 우리가 육지에 닿기 전에 재빠르게 우리를 만나러 나왔다. 배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수많은 깃발과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푸른 빛을 띤 우산으로 특별하게 보였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이 상관의 표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배를 향해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양산 밑에 한 점잖은 노대관이 앉아 있었다. 그의 하얀 턱수염은 가슴을 거쳐 허리 밑까지 닿았고 푸른 명주로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든 옷은 위풍있게 펄럭였다. 이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장이 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배로 들어갔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

배에서 내려 리라호 함상에 안내된 첨사 일행은 미리 준비해 가져온 돗자리를 갑판에 깔고 나서 참사가 먼저 정좌하자 시종무관이 첨사의 후면 좌우에 섰고, 붓과 종이를 가진 서기가 앞에 앉아 문정(외국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 관리를 보내어 그 사정을 알아보던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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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 조대복은 “너희들은 어느 땅의 사람이냐?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냐? 어떤 목적으로 여기 왔느냐? 당신들의 배에서는 기록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한문으로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맥스웰과 바실 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다시 한글로 물었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장인 맥스웰 일행의 친절에 안도감을 느낀 조대복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의 장정에 상당히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 할 때 다시 건네주자 감사를 표하며 성경을 받아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바실 홀과 맥스웰의 서해안 항해 중 마량진에서 맥스웰 함장을 통해 영어 성경 한 권이 처음으로 조대복에게 건네진 것이다. 훗날 조선 순조실록에 “배에서 내릴 때에 그 중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주는 것을 고사하여 받지 않았더니 필경 우리 배 가운데 던져 버렸다. 그러므로 소선호(리라호)에서 받은 2권이 있어 모두 3권인데 1권은 상사에게 주었고, 1권은 순영에 보내었고, 1권은 병영에 보내었다” 그 후 받은 물건들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다. 영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성경을 배달하셨다.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서해도는 훗날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기록한 조선 항해기와 서해안 해도, 그리고 한 권의 성경이 조선인들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도전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칼 귀츨라프 선교사였다. 귀츨라프는 정확히 16년 후인 1832년, 1개월간 고대도에서 체류하면서 복음을 조선인에게 심어주었다. 귀츨라프 일행이 당도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놀랄 정도로 마음을 열고 그 일행을 맞이했었는데 그것은 이미 맥스웰과 바실 홀 일행을 만나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유태계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귀츨라프선교사는 중국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이 보급하라는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1982년도에 한국 해안을 방문했다.
7월17일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에 도착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약품과 그리고 복음서를 건네주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머물면서 감자씨를 나눠주고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처음 감자가 들어온 경로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개신교적인 차원에서 선교사에 의하여 중국성경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경로다.

1865년, 로버트 토마스목사가 조선에 처음 입국하였다. 중국에 와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인 알렉산더 윌리암슨에게 받은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국 서해안에 들어섰다. 배는 대동강변을 따라 여러 군데 머물렀다. 그때 마다 토마스는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그 후 1866년 8월 상당한 많은 성경을 가지고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쇄국정책으로 꽉 닫혀 있는 조선은 제네럴 셔먼호에서 요구하는 무역을 받아드리지 않고 셔먼호에 불을 질러 배를 침몰시켰다. 이 때 토마스목사는 불타는 배에서 한문성경을 가지고 물에 뛰어 들어 헤엄쳐 나왔으나 포졸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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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선교사의 순교이야기가 스코틀랜드에 전해지자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이 미국과 영국에서 불같이 일어났다. 이때 존 로스목사는 선교지인 중국에 도착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아내가 죽었지만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는 1873년 만주를
돌아보고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1874년 다시 고려문을 방문한 존 로스는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조선어를 가르쳐줄 선생을 찾았다. 이러한 존 로스를 도와준 맥킨타이어와 함께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가 있었고 후에 서상륜과 김청송이 합류하여 6명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존 로스는 이들의 도움으로 1882년도 3월에 한글로 된 누가복음을 문광서원을 통하여 처음 인쇄하였다. 5월에는 요한복음을, 1887년에 신약 전권인 ‘예수셩교젼셔’를 발행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발행된 첫 한글성경이다. 여기에서는 원초적인 한글로 적혀서 ‘맛대복음’으로 표시가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현대어가 “처음에 도가 있으되”로 표기 되어 있어 로스목사가 번역한 말씀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번역과 다름을 볼 수 있다.

그 후에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복음서를 가지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였다. 김청송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수천 권을 몰래 가지고 자기의 고향인 집안현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였다. 백홍준은 성경을 반입하다 적발되자 고심 끝에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 돌돌 말아 짐을 묵는 새끼로 꼬아서 성경책을 밀반입하였다. 1883년 고향인 의주로 돌아온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군에 가서 정착을 하고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때 존 로스가 준 성경 6,000권을 몰래 조선으로 들여와 보급하였다.

1883년, 일본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일본인 나가사카를 한국 부산에 파송하여 매서인으로 성경을 보급하게 하였다. 그가 보급한 것은 아마도 로스목사가 번역한 성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일본에 가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으로부터 마가복음을 받아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1887년, 새문안교회 창립예배를 드릴 때 로스목사가 초청이 되었고, 그때 사용된 성경은 로스가 번역한 ‘예수셩교젼셔’였다. 그 후 로스번역에 지방 방언과 사투리가 조선의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언더우드와 몇 선교사들은 1890년 한국성서교회를 시작하고 1895년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00년에 신약성경 모두를 번역하여 인쇄하였으며, 1911년 3월에 완성된 구약성경이 2권 또는 3권으로 나뉘어 인쇄되었다. 그 후에 계속적인 개역작업이 있었는데 그 작업은 1937년에 완료되었고, 1938년 비로소 신구약 합본 성경이 발행이 되었다.

이것이 6.25를 마치고 1952년까지 남한교회가 사용해 온 신구약 성경전서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에 복음이 전해질 때 성경이 함께 들어왔고 한글로 번역이 되어 평민들에게도 예수의 사랑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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