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정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우리는 개혁교회론을 구성하는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 그리고 교회법적인 관점에서 가정교회론을 평가하려고 한다.

 

a. 성경적인 사역 분담(엡 4:11-12)에 근거하여 마태복음 28:19-20을 설명한다. 교회 개척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명령이요,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곳이다.13) 제자 만드는 길이 가정교회이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심지어 설교도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정교회 구로조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 목사는 제자 만드는 사역을 분담한다. 가정교회는 전도하고 목사는 성경공부와 침례로 제자를 만든다. 이런 식의 포괄적인 역할 분담을 성경 주석적으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만 하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은 전도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14)는 발언은 주석적 근거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주석이 널리 퍼져있다. 그렇지만 전도 역시 설교자가 받은 직무에 속한다. 목사는 설교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주석은 그 근거가 약하다.15)

 

b. 그런데 제자 삼는 방법 가운데 설교가 있다고 전제하지만, 설교에 대한 발언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막 4:13-15).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제자는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임으로써 만들어집니다. ... 목회자가 무슨 설교를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보고 배우지 듣고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16) 최 목사는 기성 교회와 목회자의 취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문제도 안고 있다. 종교개혁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에 기초하여 설교를 중시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들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전도) 사역이다. 그런데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는 발언이나 “설교도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제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17)는 발언은 지나치다.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임무 수행과는 관계없이 설교를 제정하신 주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담긴 설교의 방편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이 발언은 직분론적 문제도 담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에 생사를 걸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님께서 설교를 방편으로 삼아 역사하시게 섬겨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삶의 모범도 보여야 한다. 목회자는 삶으로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목사에 대한 대단한 질책을 담고 있지만, 이 질책이 목사직 자체에 어떤 훼손도 가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평신도의 위치를 더 부각시킬 수도 없다.

 

c.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침례는 서울 침례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아주 옳은 입장이다. 그리고 영접과 침례는 담임 목사가 책임진다는 말도 직분론에서 보자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목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목사가 관장한다는 근거는 직분론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18) 세례가 지닌 은혜의 방편의 성격도 약화된다.

 

d. 가정교회에서는 친교를 위하여 공동식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찬의 근거로 사도행전 2:46절에 나오는 “떡을 떼다”는 표현을 제시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애찬일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중에 성찬을 제정하셨다. 이를 따라 초대교회는 식사 중에 성찬을 행하는 풍습을 지켜왔다. “떡을 떼다”는 표현은 오히려 성찬을 말한다. 46절 하반절에 나오는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가 애찬을 지시한다. 그러나 교회사의 상당히 초기부터 애찬 풍습은 사라지고 성찬만 남았다. 한국교회가 회복한 애찬 풍습은 세계 교회를 향한 기여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풍습을 회복하려면, 애찬과 성찬이 결합된 원래의 모습의 복원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이것은 가정교회의 역할이 아니라,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 곧 은혜의 방편으로 교회를 구현하는 교회의 본래적 직무이다. 이 직무는 목사의 직무이기도 하다.

 

e. 이렇게 볼 때, 가정교회를 ‘교회’라 부르는 것은 주석적으로 약하다. 최 목사는 가정교회가 지닌 포괄적 성격을 부각하면서 ‘교회’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처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19)

 

또 가정교회는 개교회의 역할을 하며, 완전히 교회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주일은 합동 목장으로 모인다. 같은 목장의 목원들끼리는 잘 알지만 다른 목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목장 모임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대치하지 않도록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한다.20) 이런 권면의 근거는 실용적이다. 교회를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f. 가정교회는 침례교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가정교회가 재량권을 가진 만큼, 독자적으로 발전할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가정교회는 ‘집단적인 개인’이다. 이 집단적 개인은 기존의 목회 방식이나 교회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영적 완결체를 목표로 삼는다.

 

특히 가정교회는 성인 위주의 목회론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위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차라리 가정교회를 ‘구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활’이라고 본다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g. 가정교회론은 교회 정치적으로 회중교회론에 기초한다. 회중교회답게 등록교인과 회원을 구분한다. 직분을 맡고 투표권을 갖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하고, 이미 침례를 받은 이들은 안수집사회의를 거치고 임시 신도(信徒) 사무 총회에서 정식 의결을 거쳐 회원이 된다.21) 이것은 전통적인 회중교회의의 모습이다. 즉 치리권을 회중이 지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목사가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데, 이 점에서는 전통적인 회중교회론을 벗어나기도 한다.

 

미국 회중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목사, 장로, 교사와 집사직이 있었으나, 이미 17세기 말에 장로와 교사직은 사라졌다. 미국 제1차 부흥운동의 여파로 회중교회가 많이 침례교회로 바뀌었다. 침례교는 전통적으로 목사(감독; 장로)와 집사 두 직분만을 인정한다.22) 가정교회론에서는 교사직이 회복되고 있음을 본다.23) 신도 사무 총회가 치리권을 갖는 한, 안수집사회는 당회를 대신할 수 없는 제도이다.

 

가정교회라는 목회 방법론도 목사가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장로교회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이 방법론을 시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노회가 이런 일을 바로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이미 교파의 분리를 당연하게 전제하고 성장이 목회의 잣대가 된 상황에서 보자면, 장로교회의 노회는 이미 이런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못하고 있다.24)

 

h. ‘평신도 목회’라는 말이 지닌 의도를 동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여도, 평신도는 목회의 사명을 받지 않았다. 이 용어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평신도를 활성화시켜야 하며, 이들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목회’라고 부를 성경적 근거는 약하다. 목회자가 평신도 목회를 도와준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사람에게 목회의 사명을 맡기셨다. 직분자의 사역인 목회의 원래 의미를 순수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배경에는 이른바 ‘만인사제직’이 있다. 그러나 이를 주창한 루터가 ‘절대적인’ 만인제사장직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인 것은 옳다. 그러나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 그가 신자요 제사장이라는 사실 위에 직분과 위임받은 교구도 가져야 한다. 소명과 위임이 목사와 설교자로 만든다.”25) 비록 말씀과 성례 집행권이 교중과 전체 교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라도 이 권을 스스로 행할 수는 없다. 먼저 청빙을 받아야 하고, 교중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교중은 특정인을 말씀과 성례 집행을 위하여 청빙한다.26) 이처럼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으로부터 이 특별한 직책, 곧 목사직을 도출한다.27)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목사직의 두 사역, 곧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서 도출한 것도 루터의 이런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28) 이렇게 볼 때, 만인사제직에 기초하여 ‘평신도 목회’를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6. 몇 가지 결론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과 교회법적으로 볼 때, 가정교회론과 개혁교회론은 서로 다르다. 가정교회론의 배경에 있는 은혜의 방편론과 교회법적 측면은 취할 수가 없지만, 직분론 즉 장로교회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장로직에 대해서도 강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목회 방법론으로서 가정교회론의 특성은 참고할만하다. 친교를 추구하는 가정교회는 현대 사회와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기여는 적지 않다. 그렇지만 친교는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말한다(행 2:42 참고). 이점에서 ‘공’예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가 일차적이며, 이 일차적 교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예배에서 확인하며, 구역이나 소모임에서 강화한다. 이를 인지하고 전제할 경우, 공동 식사와 기도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는 가정교회는 현대병을 치유하는 좋은 방편이며, 교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비록 이 배경에 침례교나 회중교회론이 있다 하더라도, 장로교화하여 도입하고 배울만한 방법론이다.29)

 

가정교회는 성경적이며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물론 다른 목회 방법론과는 달리 가정교회론은 세례와 성찬의 공적 성격을 확인하며, 가정교회만을 고수하는 아집을 보이지 않는 유연성도 지닌다.30) 그러나 회복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이 조차도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과 함께 영원한 현재인 장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초대교회를 회복하겠다고 나온 새로운 운동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느 기성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교회사적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방편으로 창조된다. 은혜의 방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셨고,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사가 진다. 이를 기초로 하여 개혁교회는 언약론적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 교회론은 가정교회론이 지닌 ‘집단적 개인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 언약론은 애초부터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극복한다. 친교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말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교회의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교회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개혁교회는 설교와 성례와 목회를 통하여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양육한다. 다만 개혁교회론은 교인들이 지금보다는 전도와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인도하는 방법론을 꾸준히 계발해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는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역의 초점을 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맞춘다는 랄프 네이버의 한탄은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도 해당한다.31)

 

목회방법론은 다양하지만, 그 출생배경은 항상 존속한다. 가정교회론이 침례교회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경우 침례교회가 발생 초기부터 주장한 만인사제직이나 직분 등 교회론이 작용한다.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완전한 독립을 기조로 삼는다. 침례교회는 상부 기관에서의 하달식 명령이나 하급 기관에서의 절대 복종식 제도를 배제한다. 즉 개교회중심체제로서 각 지역교회는 다른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목회자의 파송, 총회나 및 그 산하 기관으로부터 하달식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교회는 완전한 독립 기관으로서 자의에 의하여 협동할 뿐이다.32) 이처럼 침례교회는 감독제도 뿐만 아니라 장로교 제도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자의에 의한 협동으로 총회와 그 산하 기관이 있지만, 총회는 이러저러한 문제에서 교회들을 구속할 수 없다.33)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와는 무관하게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교회들이 자의적으로 협동할 경우, 이들은 교회 정치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옥상옥이랄까,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가 침례교적인 연합체의 일원으로 사역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직분론에서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침례교가 애초부터 교회에 두 직분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장로직은 여전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정교회의 장점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미 장로가 시무하는 장로교회를 가정교회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예 개척 형태로 시작하여 장로를 임직함과 동시에 목자로 계속 세우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운용의 미를 기대할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장로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서 나온 가정교회를 장로교화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일 것이다. 총회나 직분론 등은 교회법의 소관사인데, 교회법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을 직분자인 사도들에게 맡기셨고, 목사직은 이 일을 계속한다. 교회법도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목자를 선발하는 인선위원회도 당회이면 되고, 목자를 안수하여 장로로 세우면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당회에 해당된다는 안수집사회를 따로 둘 필요도 없다. 장로가 목자이면 가정교회론이 지닌 장점도 살리고 회중교회론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34)

 

장로교회는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 예배와 교회정치에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목회 방법론을 단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정체성을 바로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7. 남은 과제: 개혁교회의 공교회성을 위하여

 

가정교회론의 비판처럼,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성장 일변도의 목회 방법론에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도입한 방법론의 부침은 심하다. 방법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장은 목회자의 투쟁의 현장이요, 신학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을 통하여 세계 선교의 두 번째 주역이 된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지향할 때가 되었다.

 

현대 침례교회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 제2차 부흥운동에서 나온 ‘신조가 아니라 성경만’(no creed but the Bible)이라는 신조 아닌 신조만을 충실하게 고수한다. 침례교도 그 역사의 초기에는 여러 신조들을 작성하고 참고하였다. 그러나 현대 침례교도들 중에는 심지어 사도신경도 고백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침례교의 시초부터 있었던 저항 정신(Non Conformist)이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이다. 전통이라는 전통은 모두 거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정치 부분에서만 제외하고 따르던 미국 초기 회중교회와도 다르다.

 

이미 언급한 교회론이나 직분론과 더불어 신조에 대한 이런 자세는 침례교회가 외부의 영향에 쉽게 노출되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교회 조직이나 전통보다는 자발적인 조직을 통한 사역 위주의 교회론을 창출하였다. 이 교회론의 연장선상에 가정교회도 있다고 하겠다. 이 교회론은 교구교회보다는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연합한 성도들로 ‘모인’ 교회(a gathered church)를 강조한다.35) 이것이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세례만을 인정하는 침례로 가시화된다. 스스로 결정하고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만이 회원이 된다. 이것은 미국 내지 선교와 외지 선교의 저력이었다. 이런 자발적 단체가 목회 방법론적으로는 가정교회이다. 즉 가정교회는 사역 중심의 자발적 단체이며, 은혜의 방편과 표지로써 말하는 교회는 부차적이다.

 

사실 교회 연합 운동에 익숙한 한국교회로서는 이런 교회론에 이미 익숙하다. 랄프 네이버도 프로그램 위주의 전통주의 교회를 심하게 비판한다. 사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는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요 분석이다. 그렇다 하여 가정교회인가?

 

여기에서 교의학자는 안타까움만을 토로할 뿐이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다른 교파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교인들을 훈련시키지 못하며 세계 선교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허공을 치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만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로교의 전통과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며, 탁월한 목회 방법론을 개발할 책임도 져야 한다.

 

이런 고민 중에 미국의 한 침례교신학자의 부르짖음을 듣는다. 하몬은 침례교회가 고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공교회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가 말하는 공교회성은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공동생활에서 표현되는 한 믿음과 한 성찬 공동체가 나타내는 가시적 일치이다. 그는 이를 “성례전적 영성”이라고도 표현한다.36) 이 공교회성과 영성을 바로 확보하지 못하면, 침례교회도 모르몬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로 자칭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37) 그의 관심은 공교회적 전통을 도입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 곧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는 침례교회의 초기 역사에는 ‘공교회적 침례교도’들이 있었다는 것도 밝히면서 전통을 거부하는 현대의 침례교회인들을 정체성 회복을 향한 대화에 초청한다. 그는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신조와 예배와 전통의 권위를 강조한다.

 

우리 고신교회 역시 이런 절박한 현실 앞에 서있다. 그간 많은 목회방법론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은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공교회적인가? 이 질문에 몰두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영지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제 가정교회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새로운 모델을 계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정교회론을 남에게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신교회의 신학은 방법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도입되는 방법론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평가하고, 목회 현장에서 공교회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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