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성실
(Q 1) “진실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자 중에서 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습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성경적 원리입니다. 많은 현대 사회의 악은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잘못 다루는 결과의 산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및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정직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사법 과정의 세계에서는 정직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많은 합의 사항을 주로 문서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과 약속이, 구두로 하는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없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2천 년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야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기준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이 솔직한 대답을 찾을 것을 원합니다.
진실은 입증 될 수 있는 특정한 사실일까요? 올바르게 작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그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혹은, 진실은 그 누가 믿지 않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상황마다 다른 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찾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변호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방어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수많은 음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임수에 빠져서 거짓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명백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척도로서 우리들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요구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책략과 거짓입니다. 광고, 정치, 관계, 사업과 상업,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또한 공공연한 결의가 부정직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솔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사악함과 진리의 남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원할 때에라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과 악한 습관이 비밀스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 겉으로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스스로 진실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약속 혹은 서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함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정직과 진실을 지키는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에 상치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않더라도 겉으로만 정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부정직함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같은 신자들을 대할 때에 옳고 정직하게 행하도록 더욱 더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6:7, 8).

마가복음 10:19에 기록된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제5, 6, 7, 8, 그리고 9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거짓 증거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관심사:
거짓말을 하려고 계획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드는 것을 북돋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에 대해 감당해야 하는 형벌을 피하는 것은 그가 모르는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부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일은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사악한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와 상황윤리(situational ethics)를 생산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히 염려되는 것은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성령님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그 사람의 명망(名望)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적인 형상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은 형상으로 표현될 때에 진실은 위태롭게 됩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은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라고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역자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란 있을 수 없고 올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 1960년대 말에 생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을 부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개인은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를 스스로의 직관을 통해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을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즉, 절대적인 원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즉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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