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 글 김문수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새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그 분과 학생회 수련회에 가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를 못했고,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그 분의 사도들이 혹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주여 삼창"이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단 9:19, 킹흠정)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또한 "주여 삼창"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렘 33:3),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불러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여~ 성령이여~" 하고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롬 8:26, 킹흠정)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요 16:23, 킹흠정)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단 9:17-19, 킹흠정) [17]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다니엘 9:19에 나오는 "오 주여, 들으소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주여 삼창"을 외치는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삼창"의 모태가 되는 것은 "만세 삼창"인데, 이 만세 삼창은 중국에서 한무제가 숭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시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이라는 시 중 일부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이란 죽은 이의 혼령(넋)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며, 동양의 제사의식, 황제 숭배,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를 들으시는가?
(렘 33:3, 개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개역은 "부르짖으라"라고 번역했지만, 킹제임스성경에 나오는 call 이라는 단어는 목청 터지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사 59:1, 킹흠정)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주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2) "주여 삼창"으로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가?
피난처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시 62:8, 킹흠정)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요 14:26, 킹흠정)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주께서 내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주여"를 외칠
필요가 있을까요?
(시 139:1-4, 킹흠정)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7-28, 킹흠정) [27]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주를 연이어 부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연이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마 7:21, 킹흠정)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킹흠정)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 킹흠정)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눅 6:46, 킹흠정)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주여 삼창"이라는 종교 의식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통성기도 시작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 혹은 기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이제는 주여 삼창이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주여 삼창"이라는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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