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 월터 챈트리

 

 

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막 10: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첫 번째 아홉 가지 계명

부자 죄인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좀더 밀접하게 분석하면 할수록 현대 복음전도와의 차이점은 훨씬 현저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대화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 특히 십계명으로 요약되어진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진술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 그는 첫 번째 4 가지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적절하게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인간을 찬양하는데 더 민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 관원으로 하여금 ‘첫번째 부분의 율법들’을 깨뜨릴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정확한 순서는 아니지만 그 다음의 다섯가지 계명들을 명확하게 인용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는 질문에 이것은 좀 이상한 답변처럼 보이지 않는가? 진실로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값없는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점입니다! 왜 자신을 “개인의 구세주”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 모든 것들은 율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다시금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보다도 훨씬 유능한 전도자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메시지를 그분의 메시지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 반대로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은 복음 전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롬 3:20). 현대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빠진 것은 아마도 현대의 교회와 선교가 무기력한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 관원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께서 계명들을 열거하셨을 때 그는 계명들에 따른 모든 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예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자는 “전혀 무죄입니다”라고 이와같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그의 대답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려진 눈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 그에게 율법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마음속에 있는 죄라고 하는 해충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답변은 요한일서 3: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오해했다면 부자 관원은 자신의 죄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하다면 자신들을 정죄되어진 죄인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마음속에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개념도 생소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복음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쉽게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과 분리해서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극심한 고난은 온전한 계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이 볼 때에는 비참하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합당한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만약 죄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십계명의 요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십자가는 죄인들로부터 구원의 믿음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동정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화목제물(롬 3:25) - 즉 파기되어진 율법에 대해 가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속물 - 로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위험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이 영생을 얻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율법의 파기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따라서 그는 자신이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도덕주의자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서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는 인간은 구세주를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개념에 대해 입에 발린 말만을 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전도용 소책자는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다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의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장 완악한 죄인을 포함해서 이 광범위한 진술을 부인할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물론 나는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며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젊은 관원 역시 그처럼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죄에 대한 인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거짓말장이요 간음자요 도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옛 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요, 오늘날 그것을 지키면 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차단시키게 될 것이라고 하는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도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전하는 것이 죄인에게 죄의식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그녀의 양심에 적용되어진 제7계명을 들어야만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결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관원도 개인적으로 전하여진 율법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여전히 혼돈 가운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모든 참된 성도는 자신의 회심을 율법의 사역에 기인한 것으로 말했던 바울에게 동의를 표할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 죄를 알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정죄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인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죄인이 해야 할 일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무지합니다. 강단은 출애굽기 20장을 무시하며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안식일을 기념하라”고 하는 제 4계명을 무시합니다. 이 세대가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잡동사니 신학에 대해 나무라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설교자들은 현대에 필요한 진리의 참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도구로 필요한 율법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매우 현명한 계략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율법과 사랑은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원수요 적대관계라고 제시해왔습니다. 만일 양자가 대립관계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을 택하고 율법을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무시할만한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악한 원수는 사랑은 율법과 무관한 것이요 그것과 적대관계라고 선포해 왔습니다.

성경은 이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사람들에게 강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의로운 율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마 22: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은 사랑의 요구에 대한 설명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과 연관지어 정의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한 반복은 놀랄만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은 율법의 인도 없이 표현되어질 수 없고 율법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서는 결코 영적으로 준행되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사랑은 율법을 즐겁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기쁘게 준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윗처럼 외칠 것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자연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율법은 사슬과 같고 지배자의 뜻에 강요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부재를 말해줍니다. 만일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그는 율법을 결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율법도 사랑을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살아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답변을 제시해줍니다. 요한일서 5:3이 선포하듯이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표출되어집니다. 또한 로마서 13:8-10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듯이 율법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지침입니다.

(롬 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과 사랑은 결코 대립관계가 아닙니다. 갈등은 구원의 방식으로서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생명으로 나가는 길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여 칭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은혜에로 그를 이끕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를 인한 믿음으로 말미암는(엡 2:8)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복음전도에 있어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압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준행되어지는 기준으로는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부터 율법의 검을 폭 넓게 휘둘렀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한 이유는“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죄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미움과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명들을 선포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 의와 사랑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설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주제를 오랫동안 취급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그 계명으로 인해 죽게 될 때까지 십계명을 설명하십시오.(롬 7:10).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복음이라고 하는 향유를 발라줄 때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바늘을 통해서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주홍색 실은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 10 계명

우리 주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그 관원의 지식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주께서 계명을 언급하셨을 때 이 가련한 친구는 자신의 무죄를 고백했습니다. 외적인 행위가 결코 계명이 요구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그 청년은 “율법이 신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롬 7:14). 아마도 그는 율법의 엄한 외적 규율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하시는 데 있어서 훨씬 철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점을 그 영혼 깊은 곳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셨던 것처럼 각 계명들에 영적인 적용을 첨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함께 그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설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아무런 이유없이)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마 5:22)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부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상생께서는 부자가 그 마음속에 가장 아끼는 죄를 지적하실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제10계명을 적용하여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탐 내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영혼에 있는 지독스런 탐욕을 찌르는 칼로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죄는 부자의 표면적인 행위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물과 추함에 딸라 탐욕은 그의 영혼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치 화살처럼 이 청년의 양심을 처음으로 꿰뚫었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탐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공손한 질문자는 “나는 그 누구의 재물이나 부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출애굽기 20장을 재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제 10계명을 실제적인 테스트로 전환시키셨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부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떠나갈 때 그는 자신이 탐욕스런 죄인이라는 명백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었습니다(마 22:40).

여러분은 예수께서 구한 것이 그 청년이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의 양심에 깊고도 고통스러운 상처가 생길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하도록 그를 설득시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청년의 영혼이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요, 그의 영혼은 탐욕으로 인해 사단에게 팔리운 바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율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미영하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진리와 타협하기보다 오히려 그 관원이 떠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죄인을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서 온전한 율법의 파기할 수 없는 특성을 무시했다면 그는 사랑을 파괴시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과 연루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자리를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필히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선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양심에 상처를 내는 법을 알아야만 비로소 그 상처들을 복음이라고 하는 붕대로 감싸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교회들은 미력이나마 전도하여 회심자들을 얻는 비결을 알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공동적인 메시지가 우리의 힘을 유지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며 나아가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연합을 가져다 줄 것으로 가정해왔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진리를 약하게 전해왔기 때문에 세상은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단조롭게 반복되어져 왔던 사영리의 전도방법은 죄인들이 우리 주위에 생겨나게 했으며 또한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을 회복시킬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증거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우리의 회중 가운데서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시키면서 전파해야만 합니다. 율법의 용례를 보면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끌어내고자 하신 것은 “무지하고 무감각하며 자고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법의 적용은 바로 인간의 속사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율법이 영혼의 동기, 열망, 감정과 태도에 엄격한 요구를 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강단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강단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가 구원의 도에 대해 듣고자 하는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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