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로마서 1장 28~32절까 내용의 해석을 요구하시는 분의 메일이 왔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죄에 대해 원어 적으로 해석을 원하시는 모양인데 죄송하지만 너무나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해야 된다. 일 년을 설교를 해도 모자랄 정도이기 때문에 책을 몇 권으로 펴야할 만큼 엄청난 내용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의 내용 중에 ‘모든 불의’란 의미는 몇 편의 설교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해석의 지면을 사용해야 된다. 그렇다고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인간 구조를 생각해야 된다. 사람은 혼과 영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조가 무너진 상태가 바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었다고 하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상태가 바로 죄의 삯이다. 이런 상태에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불의”라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혼과 영과 몸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창조의 목적인데 여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의라는 자체라는 존재로써 우리에게 의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이것을 싫어하는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추악”도 마찬가지 사람은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영으로 살아가야만 된다. 그런데 혼이 영과 몸을 지배하여 영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추악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추악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탐욕”은 사람의 혼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탐욕인데 골로새서 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이 우리 눈에만 보이는 그런 형상이 아니라 바로 내 배 속에 가득 차 있는 신들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면 얼마나 추악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니 악의가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멋쟁이 신사처럼 요조숙녀처럼 차림을 갖추어도 그 속에 끊임없는 추악과 악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절에 다녀도 고행을 하는 수도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신성한 옷을 입은 성직자라고 할지라도 추악함이 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막아보려고 사막이나 산에 가서 고행을 한다. 그러나 속세에 돌아오면 그 어느 누구도 속세의 사람과 달라지지 않는다 것을 주의해야 한다.

 

   대선배이시고 영성운동가이신 엄두섭 목사님께서 빛과 소금이란 월간지에 언급하기를 자신의 영성수도원에서 기도와 영성으로 무장되었기에 충무로나 명동에 나가 길에 걸어 다니면서 음욕이 안 일어날 줄 알았지만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는 데 자꾸 눈이 그리로 가고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나 읽는 독자들도 더했으면 더 했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시기”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와 비교하게 되어 있고 차이를 느끼고 살아간다. 시기는 바로 자신의 열등감에서 시작된다. 왜 사람들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사람의 구조상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중에 공격형의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다.

 

   “살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지만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뺏는 것만이 살인인 줄 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있다. 무관심도 사람을 죽인다. 성경에 나오는 살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칼인데 그 칼을 들고 혼으로 설교하면서 협박하고 그 칼로 무수한 영혼들을 난도질하여 처참하게 죽이고 있다.

 

   “분쟁”은 이미 사람의 혼과 영과 몸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성 자체가 분쟁을 밥 먹듯이 행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교회 안이라고 할지라도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마10:34~36과 누가복음 12:49~53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불을 던지러, 분쟁을 일으키려 오셨다고 피력하고 있다.

“사기”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지요. 사람만 속이면 좋겠는데 하나님마저 속이고 있는 실정이다. 사기 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반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있다. 부모를, 형제를, 친척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성도들을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악독이 가득한 자” 위에 내용들을 알게 되면 악독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사람은 독을 뿜어내고 살아가고 있다. 과학적인 실험으로도 증명되었듯이 사람들을 화를 내게 한 후 입 안에 분비물인 침을 검사했더니 수십 마리의 쥐를 죽일 수 있는 분비물이 첨가되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독을 항상 품고 다니는 존재다.

“수군수군하는 자”자기의 생각과 같은 자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대화들이 수군수군하게 되어 있다. 마음만 맞으면 이런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옛 자아와 옛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며 마귀 사탄과 대화하는 것이 바로 수군수군하는 것이다.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면 수군수군하는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방하는 자”도 마찬가지 세상에서 잘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며 비방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이와 같이 내 안에 숨어 있는 옛 자아가 새 사람이 된 나에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 하며 끊임없이 비방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갖고 편견으로 얼마나 비방하고 평가하며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해대는지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가 바로 수군수군하는 자들이며 비방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죄악을 과감하게 행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기 믿어도 미워하는 존재들이다. 나보다 남을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 질투하며 자신으 처지를 원망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이 성경 안에 얼마든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언급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가 아니다.

 

  “능욕하는 자”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조롱하는 것도 능욕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존재가 바로 내 안에 숨어있는 옛 자아들이다. 이런 내용들을 언급하는 주석이나 성경지침서들이 나와야 된다. 새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고 옛 자아가 용트림하여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능욕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만한 자”도 마찬가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비하하거나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옛 자아가 새 사람을 겨냥하여 손가락하고 야유를 퍼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며 분신인 형상에다 오물을 뿌리는 짓이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 없이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고 혼과 영과 몸이 서로 분리되어 죽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안 죽었다고 우기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옛 자아다. 이런 자들이 내가 예수님을 믿어 줄게, 하나님께 기도 좀 해주지, 찬양 열심히 해 줄게 식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가 바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글을 쓰는 저 자신도 이 글을 쓰면서 제 자랑을 들어낼까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랑을 하게 되어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병까지 자신의 자격지심, 열등의식까지 자랑하고 있다. 자신의 좋은 점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단점까지도 자랑하는 것이 겸손으로 착각하고 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시편 1:1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 주변에 이런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필자도 그렇게 알았다. 그런데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가 내 안에 숨어있는 옛 자아들이며 옛 사람들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도 우리 육신의 부모가 아무리 무식한 분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부모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 원래 우리는 순종을 잘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순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길들어지지 않으면 순종을 잘할 수 없다. 이렇게 우매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길들어지는 상태가 바로 온유한 자이다. 얼굴의 인상이나 성품이 온유하다고 해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잡힌 바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온유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배약하는 자나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모두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베드로, 가롯 유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 없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짓을 자행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상태가 다가온다면 도망할 궁리부터 하는 것이 나타나면 그런 존재들이 배약하며 무정하며 무자비한 존재들이다.

 

   이 같은 행하는 자들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급했는데 죽음이 무엇인가? 현재 살아있는 목숨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며 내 혼과 몸과 영이 서로 어긋나 따로 국밥처럼 놀아나는 것이 죽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며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이렇게 살아가면 천국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고 꼬드기고 있다.

 

   이 보다 더 상세한 답변을 요구하실 것이지만 설명하면 더욱 어려워지며 수많은 설명으로 인해 더 헷갈릴 수 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읽다가 의문이 나지 않는다면 말씀을 자기 중심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필자도 끊임없이 말씀을 대하는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나왔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학력을 얻기 위해 열공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천천히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정확하다.

 

글: 이준호 목사/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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