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 아타나시우스

진실 2009.09.09 10:27   http://blog.daum.net/kkho1105/2435 

 1. 서 론

기독교의 대박해는 콘스탄틴 시대(니케아 시대)종식 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박해가 끝이 나고 평안의 시대가 교회 안에 주어졌을 때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의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최대의 교리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성,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등의 문제는 주후 수세기 동안 초대 교회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이라 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들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가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리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회의가 소집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를 연구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기타 여러 교리논쟁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Ⅱ. 본 론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위일체 논쟁의 기원은 기독교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신학적 발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속사도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 성부/성자/성령을 하나님으로고백.
②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폴리갑 -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

변증가
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함.
② 저스틴 -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종속설과 유사)
③ 데오필루스 - 삼위일체(Trinity:Trias).
④ 저스틴,타티안,아테나고라스 - 로고스를 삼위의 제2위로 인정.

교 부
①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함
② 이레니우스 - 창조주가 성자이심을 고백하고 성자와 성부를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함.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모든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
③ 터툴리안 -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
삼위의 한 본성(one substans),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
성부, 성자, 성령을 연관시킴.
*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 - 단일신론
단일신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로 아리우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류
단일신론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성부 고난설 Patripassianism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샤벨리안주의 Sabellianism

주장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오류들
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
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으로 봄.
② 성부고난설에서는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따라서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함.
③ 시벨리안주의는 단일신론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성령의 다른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주장.

영향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
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 그리스도를 단순히 신성이 충만한
인간으로 봄.- 에비온파(Ebionites)
<영향>
에비온파 --> 데오도투스의 양자설 --> 사모사타의 바울 -->

2. 아리우스 생애와 사상
1) 생 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260-272)의 여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향연(饗宴,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한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을 복직되었다.

2) 사 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시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3) 아이우스의 교리체계
① 하나님의 특징은 단독과 영원이다.
② 하나님 안에 지혜와 말씀이 거하지만 이들은 위격체가 아니다.
③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한 독립된 실체를 만물 창조의
도구로 존재케 하셨다.
④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실체와 본성에 있어 아버지와 다르다.
⑤ 아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소위 말씀과 지혜에 불과하다.
⑥ 하지만 이들은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완전한 피조물)
⑦ 그리스도는 실제로 신체를 취하였으나 로고스가 영혼을 대신하므로 그
것은 영혼이 없는 몸이었다.
⑧ 기타 피조된 존재들 가운데서 성령은 제2의 독립된 실체로서 아들 곁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와 신학
1) 생 애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고 373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작성하는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신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며, 에집트의 수도사들중에 그의 최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253년에 사망한 오리겐과 354년에 출생한 어거스틴 사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 학
그의 신학과 신앙은 벧후1:4에 있는 말씀에 지배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간의 큰 차이점에 직면하게 된다.

서방 신학
서방신학의 중심된 문제는 죄의 제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우리는 그분 앞에 죄인으로 서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제거되지 않고는 다시는 그의 호의를 누릴 수 없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화육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동방 신학
인간의 타락의 문제였다. 창조의 머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의 창조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은 신성과 결합했고, 그 안에 인간의 타락된 사망은 아름다운 영생으로 변환되었다. “우리에게 신성을 주시기 위하여”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그는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이 아니면 구원은 없다.

아리우스는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전심 전력 그를 반대했다.

4.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발 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은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 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들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호시우스 등의 소수-.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립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니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주장
아리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유사본질이다(΄ομοιουσιοςHomoiousios-Like Substan -ce)
인 성:그리스도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아다나시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시다(΄ομοουσιος:Homoousios-one Substance)
인 성: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3) 결 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재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4) 니케아 신조 전문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지도 만들어지지는 아니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종말은 준비되어 있었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제1기:콘스탄틴대제의 사망까지(337년5월)
①니케아 신조가 ‘진실한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짐.
②그러나, 황실 교회 고문으로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임명된후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확장됨
③안디옥 감독 유스타스유배, 아다나시우스의 감독직을 박탈하고 파문, 앙크라의 마르셀루스 파문 유배.
④ 337년 아리우스와 콘스탄틴 황제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

제2기: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직후부터 361년까지
①정치적,교회적 혼란기
②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유배를 두고 동서방교회간에 논쟁, 타협안으로 아다나시우스 복직.
③정치적으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어 아다나시우스파를 정죄, -칼라리스의 루시퍼,베르셀라이의 유세비우스 ,밀란의 디오니시우스, 로마의 리베리우스을 추방 알렉산드리아의 아다나시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조오지를 감독으로 임명, 안디옥에도 아리우스주의자 유독시우스를 감독으로 임명.동방교회의 혼란.
④아다나시우스와 앙크라의 바실파의 동맹

제3기:줄리안의 즉위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까지
①줄리안의 즉위 -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신조에 호의적 : 아리우스주의 영향력 상실
②데오도시우스 즉위 - 아리우스주의 배척
③아다나시우스 활동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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