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시 5:3)

 

매튜 헨리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오는가?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아니,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셨던,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의 사역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11:7)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밭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나온 것이 단지 상쾌한 아침 산책을 위한 것이거나, 전에는 이러한 아침 설교가 없었으니 한번 가볼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단순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로부터 은혜를 받고 그 가운데서 영적인 교제를 잘 유지하기 위한 경건한 목적에서 이곳에 나온 것이기를 바란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목사들의 직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심으로)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오도록 도와주고 밀어주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평강을 위하여오시나이까"(삼상16:4)라고 물었듯이, 아마 여러분들도 우리에게 그렇게 물어 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예언자가 대답했던 것처럼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삼상16:5)라고 답할 것이다.

여러분이 이 설교를 계속 듣는다면 여러분의 아침 경건 시간은 두 배의 효력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다고 여러분 혼자서 혹은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던 시간을 없애 버리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여하간 지금 여러분은 여기 엄숙한 모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아침 예배는 온 영국 사람들이 시민전쟁(영국의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싸움으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을 말함 - 역자주)이라는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아 신음하고 있을 때, 기도하기 위해 모였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매 구절 구절에서 훈계 위에 훈계를 받게 되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처럼)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될 것이다(사50:4)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러분이 이런 기회들을 통해 감화받음으로써 항상 그러한 효과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아침 설교로 인해 앞으로 아침 예배에 대해 더욱더 호의를 갖게 되고, 이같이 반복되는 경건 시간이 습관이 되어 여러분이 드리는 매일 매일의 예비가 더욱 쉽고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도록 경건한 다윗을 예로 들어 소개하려 한다. 그는 시편 5:2에서 기도의 의무를 충만하여 그것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기서 그는 아침을 기도하기에 적당한 시간으로 정하고 있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그러나 아침에만 한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 그랬듯이 하루 3번 기도하는 일을 진지하게 실행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시55:17) 아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고 그는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라고 했다. 그러나 특히 그는 아침 기도를 중시했다.

 

Point

매일 매일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우리가 해야 하는 선한 일 :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실 것이니 우리는 주께 기도하고 그를 바라야 한다.

2. 이 선한 일을 위해 정해 놓고 지켜야 할 특별한 시간 : 그것은 바로 아침이다.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매일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

 

1. 우리가 해야 하는 선한 일 : 기도

 

첫 번째로 다윗의 예를 통해 여기에서 배울 것은 한마디로 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명료하게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빛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지시되는 의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가르침과 격려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며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아침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설교라는 말은 들었어도 기도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도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는 언제나 열려 있으며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를 언제라도 환영하고 있어서, 어느 때 나아가더라도 적당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윗이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한 경건한 결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여기에서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 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아 주시리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다.

즉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할 때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를 둔 그의 믿음을 나타낸다. 주님의 귀는 언제나 백성의 울부짖음에 대하여 열려 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의 표현이다. 그는 시편 5:1에서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라고 기도했고, 2절에서는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는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그는 주님께서 들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내가 기도한 것들이 즉시 응답받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될 것을 확신한다(고넬료의 기도가 그러했듯이), 그 기도는 기록에 남게 되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심중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셨다고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라고 기대하는 확신을 가지고 주께서 귀기울여 들으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하는 영혼을 발견하시면 어디에서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며 또 그러한 확신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비록 기도하는 음성이 연약하고 낮은 목소리일지라도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되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기쁨이므로 은혜로운 응답을 해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우리의 눈물을 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며 다음과 같은 근거와 다음과 같은 원칙 아래에서 기도해야 한다.

즉,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우리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23의 약속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인류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일치되는 경험이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셨다."(사45:19)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감이나 사랑과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의 기도를 멀리하지 아니하신다.

 

둘째로, 다윗은 그가 서원한 대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약속하고 있다.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즉 다윗은 "나는 그에게 말씀드릴 것이다. 주님께서 수없이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기로 결심했다.(시116:2) 하루도 어김없이 나는 주께 기도할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을 그들의 "목소리로 상달케"(사58:4)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 중시하신 것은 목소리가 아니다.

한나의 기도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효험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마음의 목소리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출14:15)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올리며, 그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건한 감동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생각을 고착시키고 욕망을 북돋우며 고무시키는데 필요할 수 있다. 정결한 마음과 겸손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좋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로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언어를 이해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다윗은 시편 5:1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으며, 시편19:14에서도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며 편지를 써야 한다. 우리는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으면 그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로부터 소식듣기를 원하시는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대하시며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봉사가 필요하신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것에 의해 이익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제사를 드리며 끊임없이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높이며 끊임없이 그분께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그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를 바라시며, 이러한 행위가 자주 반복됨으로써 그의 율례를 관찰하고 지켜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강화하고 그 중요성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그를 경배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늘 겸손히 경배드림으로써, 계속해서 그의 뜻에 더욱 자연스럽고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경배를 통해서 우리는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연민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고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한 아버지가 아이를 멀리 보낼 때 그 아이에게 애정을 표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심을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매일같이 기도하라고 하신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의 기쁨이며 그의 귀에 음악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아가서 2:14에서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서 끝 부분에서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아8:13)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배우자인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으려 하시며,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들어주실 준비를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의 죄악이며 불행이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에게 그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드릴 말씀이 아무 것도 없다. 탕자가 한 주일 또 한 주일을 소요하며 방황할 때 그 아버지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아무 것도 듣지 못하신다.

그들은 전능자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경멸하듯이 묻는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느냐고 그들이 묻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라고 말하게 되며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겁도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것을 금하는 자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능자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려 하시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유익한 줄 알아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로 결단함으로써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시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 사랑하는 친구에게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말씀드리라.

친구에게는 특별한 용무가 없더라도 찾아가서 이야깃거리가 궁색한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눈다. 또한 허심탄회하게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며 사랑과 존경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모든 성도들도 그 같은 영광을 갖게 된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였노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그는 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비밀을 나누셨다. 우리는 그와 친밀해지며, 친구들이 서로 나란히 걸어가듯이 그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요일1:3)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드릴 말씀이 아무 것도 없는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심사숙고해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는 주님의 무한하신 완전무결함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즐거움을 얻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주님 자신을 세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내시면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와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리면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라고 주님께 향한 사랑과 순종을 고백하는 것 등, 그에게 드릴 말씀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원하신다.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그의 섭리와 우리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려고 귀기울이시는데 우리가 할 말이 없다며 너무 박정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하실 때에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시27:8)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때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3:22)라고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면 자백과 복종으로 응답하며, 주께서 위로하시면 찬양으로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드릴 말씀을 애써 짜내거나 우리의 마음을 억지로 쏟아 놓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주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함께 동역하며 섬기는 주인에게 하듯 말씀드리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관심사가 얼마나 방대하며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주님께 드릴 말씀이 무척 많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대는 그로부터 나오고 항상 그와 관련을 갖고 있다. 그는 우리와 관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히4:13)

우리의 행복은 그의 은혜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은 생명 곧 우리 영혼의 생명으로서 우리 육체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 또한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간구하며,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을 수 있으니 그의 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해 왔고,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진노와 저주에 합당한 자가 되었으며 날마다 죄에 물들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께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용서를 구하며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맺으며 주님의 능력 안에서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그와 세운 언약을 새롭게 하는 등 하나님과 더불어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날 그날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그것을 위해 우리를 능력으로 입혀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 없겠는가? 우리를 도우시고 용납하시어 우리가 선한 일에 뜻을 두고 행하도록 역사하시고 후원하시며, 우리의 일을 나타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일들이 종된 우리가 주인 되시는 주님께 해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위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우리의 육체가 그렇고 그 생명과 안위 또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질병과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화살은 밤이나 낮이나 가릴 것 없이 날아든다. 그런데도 들어오고 나오면서, 자리에 눕고 일어나면서 그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과 천사들의 보호 속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 없는가? 하물며 우리의 영혼에는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를 대항해서 싸우며 삼키려는 자는 힘세고 교활한 마귀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보호하심을 입고 그의 전신 갑주를 입어 사탄의 계략과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며 갑자기 닥쳐오는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져 놀라거나 강한 유혹에 압제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 없겠는가?

우리는 날마다 죽고 있다. 그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또한 죽음이 심판을 동반해 오는 것과 그 심판이 우리에게 영원한 운명을 지어 줄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우리 앞에 닥쳐올 것을 예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주여, 우리로 종말을 알게 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겠는가?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살펴보고 우리의 행위가 선한가를 주의해 보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없겠는가?

그리스도는 머리되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인데도 우리가 살아 있는 지체임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없는가? 교회를 위해 중보하거나 시온과 예루살렘의 무너진 벽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겠는가? 조국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겠는가? 가족의 일원으로서 집안 일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어린아이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할 것도, 불평할 일도, 간구할 것도 없는가? 아픈 사람이나 곤궁에 처해 있거나 유혹을 당하거나 수심에 잠겨 있는 사람은 없는가? 그들을 구제하고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일이 없단 말인가?

자,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

이래도 매일 하나님께 아뢸 것이 없는가? 더구나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욥34:31)라고 말하며,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욥10:2)라고 아뢰게 될 환난의 날에도 그러한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아뢸 것들이 많이 있는데도 매일같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많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무엇이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는가?

 

기도가 방해받지 않게 하라

▶ 거리감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친구와 이야기해야 할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연락할 수가 없고 어디서 그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며 그에게 편지도 쓸 수 없다면 자연히 친구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데는 이런 일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을 찾는 백성 곧 기도하는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목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130:1)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시61:2)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라고 요나는 말했다. 어느 곳에서나 하늘로 향한 길이 열려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보혈을 흘려 우리를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시고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을 이룩해 놓으신 덕분이다.

 

▶ 두려움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아주 위대한 사람에게는 용무가 있어도 너무 신분이 높고 완고하고 엄격하여 이야기하기가 두려울 때가 있다. 우리를 소개해 주거나 좋게 말해 줄 사람이 없어서 목적했던 바를 취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려 할 때는 그런 일로 실망하는 경우가 없다.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거기서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우리의 온 영혼을 쏟아 놓을 수가 있다.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들에게 연민을 베푸시므로 주님의 엄위하심조차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롬8:1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다른 복된 자유함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우리를 소개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하나님께 중보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

아이들이 아버지께 갈 때 중보자가 필요한가? 그러나 의지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하늘나라의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관심과 중보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의 이름을 의지해서 언제 어디서나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 우리의 해야 할 일과 우리가 그분께 아뢰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므로 기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이미 알고 계시므로 기도드리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음은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와 부담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우리가 간청해야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고 하셨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 아무런 정보를 드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기도로써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고 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으며 은혜받기에 합당한 형상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라는 것은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매우 쉽고도 타당성 있는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소경된 자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20:33)라고 다소 이상한 질문을 하신 것은 우리가 은총을 입기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지만, 금홀의 끝을 만지는 사람은 자신의 청원이 무엇이며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던 것이다.

 

▶ 다른 어떤 일로도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친구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어떤 일이라도 제쳐놓고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나 재산을 늘리는 일 따위는 우리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그의 은총을 입으며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일이 더욱 중요할수록 하나님께서 그 위에 축복해 주실 것을 기도함으로써 더욱더 하나님께 의탁하며 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도에 더욱 전념하며 기도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수록 우리의 모든 행사는 더욱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음성을 자주 들으실 수 있게 하라

비록 그것이 살아 있는 표시인 탄식 소리에 불과하며(애3:25) 신음소리에 불과할지라도, 너무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롬8:26) 주님께서 여러분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게 하라. 히스기야 왕이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사38:14)라고 했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온전한 언어가 못 될지라도 그에게 기도하라. 자주 주님께 말씀드리라. 그는 언제나 들으신다.

그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경청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는 모든 것을 주목해 보라. 사업상의 편지에 답장을 쓸 때 그 편지를 앞에 놓고 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소원에 대한 인도자가 되어야 하며,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기대에 바탕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에게 구한 것에 대한 자비로운 응답을 주실 것을 기대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대화할 기회를 자주 가져서 그와의 교제 안에서 더욱 성장하며, 그를 불쾌하게 하는 어떠한 일도 삼가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도록 힘쓰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하기에 알맞도록 목소리를 조정하고 언어를 깨끗하게 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하게 하라(습3:9).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여러분 영혼 깊숙이 경외심을 가지고 있음도 나타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전5:2). 만일 그가 우리를 초청하고 격려치 않으셨다면 티끌과 같은 우리가 감히 주께 고하는 것은(창18:27)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아뢰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의 가슴속에서부터 간절히 말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를 드리라.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 드릴 뿐 아니라 신중하게 계획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한다. 원래는 "내가 주께 기도하고"(시5:3)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시편 25:1에서처럼 "나의 영혼이 주께 기도한다"고 보충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을 주께 드리나이다. 나의 사랑을 주께 정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라는 말이다. 우리의 번역은 이 말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집중해서 기도해 한다.

이것은 기도의 의무에 대한 생각을 확정하여 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기도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자답게 신중하게 구해야 하며 소흘히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구하는, 그런 어리석은 제사를 드려서는 안된다. 선한 목적에 목표를 두고 그 목적에 표적을 맞추어 현명하게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구해야 한다.

은혜의 약속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것이 실제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유익을 효과적으로 구하는 것이 되도록 하셨다. 화살을 쏘아 표적을 맞히려는 사람이 그것을 겨냥하여 눈을 고정시키고 손을 똑바로 하여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집중하여 기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몰두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한 눈으로 목표를 겨냥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보지 말아야 하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모아서 총동원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필요하며, 그것들 모두가 모여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시57:7)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신실한 목적을 갖고 기도한다. 바리새인들이 구제할 때 남들에게 보임으로 자신들이 영광을 얻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함으로써 칭송과 갈채를 받게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로 그들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만과 위선을 싫어하신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리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조건 기도해서도 안 된다.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는"(호7:14) 자들처럼, 세상의 환심을 사고 부귀를 추구하면서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된다. 우리 기도의 중심과 동기가 우리 자신, 즉 육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최상의 목적이 되시도록 영혼의 눈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 영혼의 습관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또한 바라는 모든 것 중에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한다. 곤핍함이 닥쳐올 때도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조정되고 결정되며 성화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의 첫머리에서 분명히 이것을 생각하게 하셨다. 즉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 우리는 그 가운데서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구하게 된다. 그 속에서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 거룩하심의 영광을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때 그의 나라가 임하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며 양육을 받고 도우심을 입으며 용서하심을 입게 된다. 우리의 신실하고 온전한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눈이 성하면 온몸과 온 영혼이 밝을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만을 향하여 드려야 한다.

 

→ 한결같이 하나님만 생각하며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한다. 마치 그분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를 생각해야 하며, 용무가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며, 기도는 우리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에는 겉봉을 써야 하고 내용물이 올바르게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잘못 배달될 수 있으며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여러분은 매일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여러분의 편지가 잘못 배달된다면 여러분의 손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는 다음의 지침을 따라해야 한다.

 

?  존경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호칭을 사용하라. 위대하신 여호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영원토록 영광받으실 하나님께 기도하라. 왕 중의 왕이시며, 주중의 주이시며,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입에 그를 향한 경건한 경배와 찬양으로 가득차게 하며, 경외하는 마음과 신성한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께 경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합당한 주님의 호칭에 주의를 기울여 어마어마한 위엄과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이 있는 영광의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기도할 때 그를 감히 하찮게 여기거나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나친 경배심으로 인해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선한 사람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된 그의 기록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발견되었다. "은밀한 기도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두렵고 무서운 호칭들을 부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훈과 본보기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라 하지 않으셨는가? 또한 양자의 영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가? 아들이라면 비록 그가 탕자일지라도, 돌아와 회개할 때는 그의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아들이라 불릴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히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에브라임이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같이 스스로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으로 측은히 여기셨다.(렘31:18,20) 그러니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실진대, 그와의 관계를 두려움 없이 유지하도록 하자.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드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첫머리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제한되어 계시거나 하늘 혹은 하늘 중의 하늘이 그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왕국을 통치하는 통치의 보좌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은혜의 보좌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든 사원 안에 거하는 이방인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신 주님께 눈을 돌려야 한다. 하늘은 높은 곳이니 우리는 지극히 높이 계신 하나님이신 그분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곳은 빛의 원천이므로 우리는 주님을 빛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곳은 감찰하는 곳이므로 그의 눈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곳은 정결한 곳이므로 우리는 기도드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여 감사드려야 한다. 그곳은 그의 능력의 창공이므로 우리는 그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줄을 알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축복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눈을 하늘로 드시고 기도하셨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님의 손에 이 편지를 드리라. 그의 손에 드리지 않는다면 물론 잘못 전달될 것이다. 바로 그가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많은 향을 넣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 천사(계8:3)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아버지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것도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히5:1).

편지를 주님께 드리라. 그러면 주께서 신속하고도 사려 깊게 우리의 기도가 열납되게 해주실 것이다. 조지 허버트는 "가방"이라는 시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의 옆구리의 상처를 감동적으로 묘사하면서, 주님께서 하늘로 가시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너희가 전해야 할 것이나 편지가 있다면,

내게 가방은 없으나 여기 공간이 있다.

내 아버지의 손과 그의 목전에

안전하게 전해질 것을 믿으라.

네가 알리고자 하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리니

자, 나의 심장 가까이로 가져 오라.

또한 이후로 나의 친구들 중 누구라도

이처럼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문은 그때에도 여전히 열려져 있을 것이다.

그가 보내는 것을 내가 전할 것이며,

그에게 해가 되지 않게 더 보완할 것이다.

탄식만으로도 내게 모든 것을 전할 수 있다.

절망이여, 사라져라.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 기도할 때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보다 높은 곳에, 무한히 높은 곳에 계시며 영원히 사시는 높고 거룩하신 분께 말씀드리는 자처럼, 위에 계신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것과 온전한 선물들을 기대하는 자답게, 지성소에 들어가 진정한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자처럼, 위를 바라보며 기도드려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 그 이상을 쳐다보아야 하며, 시간에 국한된 문제 그 이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을 올바로 평가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이 세상과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의 영혼은 이를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은 후에 위로 올라간다(전3:21). 따라서 그 근원을 잊지 않고 기도할 때마다 위에 보물을 쌓아 놓는 것이니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위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며, 그 고향을 향하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드리자(애3:41). 예전에 어떤 교회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높여 우리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 기도가 끝난 뒤에도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 만족과 기쁨의 눈으로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내려다보는 것이 슬픔의 표현인 데 비해 우러러보는 것은 기쁨의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하여 기도드림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기쁨에 가득 차며, 그의 지혜와 선하심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응답을 참을성 있게 기대하며 기다려야 한다. 한나는 기도할 때 위를 바라보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감돌았다. 그녀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삼상1:18). 기도는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이다. 기도할 때는, 은혜를 통하여 기도한 그것을 받은 것처럼 여기며 바라보아야 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떤 응답을 주시는지를 관찰하는 눈으로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화살을 쏜 사람이 그 화살이 표적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 기도를 마친 후 우리 영혼이 어떠한 상태이며,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으며, 그 뜻에 얼마나 적응할 뜻을 갖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감사를 드릴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계속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를 보기 위해 더욱 간절히 살펴야 한다(히2:1)

또한 화평을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 다시는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시85:8).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마다 그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춰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지속해야 한다. 때로는 그 응답이 빨라서 기도하는 도중에 듣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보낸 편지에 대한 회답을 받는 것보다도 더 빠른 회답을 받게 될 것이나 기도했는데도 그렇지 않다면 기다려야 한다.

기도를 드리고 위를 바라보며 모든 일을 하나님과 더불어 하며 기쁨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을 배우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휘장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도록 명령을 받고 격려를 받고서도 바깥 뜰에서 기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정해 놓고 지켜야 할 특별한 시간 : 아침

 

두 번째로 본문에서 이 선한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 놓은 시간은 아침이다. 시편기자는 아침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아침 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로 삼으라. 율법 아래서는 아침마다 양을 잡아 제사드렸고(출29:39). 또한 아침마다 제사장이 향을 피웠던 것(출30:7)을 알 수 있으며, 매일 아침 주께 감사드리며 찬송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상9:33).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아침마다 정해 놓고 제사드리는 일이 있었다(겔46:13-15).

이것들은 아침이 어김없이 오는 것처럼 영적인 제사는 제사장에 의하여 매일 아침 어김없이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또한 모든 가정의 가장들은 가족과 함께 매일 아침 은밀한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들이 충분히 있다.

 

아침에 기도해야 할 이유들

▶ 아침은 하루의 첫 부분이다.

따라서 가장 위에 계신 주님께서 첫 번째 자리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합당하다. 이방인들도 "무엇을 하든지 신과 더불어 시작하라"고 하였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도 그렇다. 따라서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그와 함께 해야 한다. 태양이 우리의 영혼에 솟아오르자마자 우리 인생의 나날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에게 예배드려야 한다.

아침에 동일 틀 때부터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가기를 바란다(시110:3). 첫 열매와 짐승들의 첫 수확은 언제나 주님의 것이었다. 아침과 저녁 기도로써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 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지어야 한다. 그는 시작이며 끝이 되시고 처음이시고 또한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말했다. 즉 젊어서부터, 아침 일찍부터 하나님을 찾는 자가 그를 만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 즉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드리며, 우리가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과 그에게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진실하게 구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침 일찍 하라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시101:8). 부지러한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시63:1)라고 말하면서 다윗은 온 마음과 정성으로 주께 헌신함을 표현했다.

 

▶ 아침은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는 최상의 시간이다.

밤에 수면과 휴식으로 우리 영혼이 활기를 되찾은 후, 아침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전날의 피곤함이 잊혀져 있을 때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평소보다 큰 일을 하실 때에는 자다가 깨어나신 것으로 표현이 된다.(시78:65)

우리가 어떤 일이든 훌륭히 하게 되는 것은 아침이다. 아침이 시적 영감을 얻는 데 최상의 시간이라면 은혜를 얻는 데도 최상의 시간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 되시는 주님께서 처음 것을 받으셔야 하며, 으뜸 되시는 주님께서 으뜸되는 것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 가장 좋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어떻게 그들이 이보다 더 잘 사용이 되며, 더 좋은 이익을 낳을 수 있겠는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한다고 다윗은 말했으며 그 모든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은사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을 불일 듯하게(딤후1:6) 하기에 가장 적당한 때는, 우리의 영혼이 신선해지고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인 아침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이처럼 하나님을 붙잡도록 자신을 일깨우자.

 

▶ 아침은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갖기에 가장 적합하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잠을 자겠느냐고 그들의 할 일이 부를 때까지도 잠이 덜 깨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면, 북적거리기 전에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아침에 시간을 갖는 것이 이 세상에 할 일이 많고 하루 중 1분이라도 아쉬운 사람들의 지혜이다. 그래야만 그 일을 완전히 할 수 있으며, 더욱 몰두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내적으로 무감각하고 우둔하지 않을 때, 즉 외적으로 주의가 산만하고 분요하지 않을 때 드려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고전7:35)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7일 중에 하루는 (이것 또한 한 주일의 첫 번째 날로서, 한 주일의 아침이다) 거룩한 일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러 산 위에 올라갈 때 산 아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갔다. 그러니 우리는 이생의 문제 속으로 휘말려 들기 전에, 아침 일찍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다른 차원의 생에 관심을 가져보자. 주 예수께서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그의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을 위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날이 밝기 훨씬 전, 무리들이 모여들기 훨씬 전에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막1:35)

 

▶ 아침은 새로운 자비를 받는 시간이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적합하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의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 주님께서 날마다, 특히 아침에 우리를 축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찬양할 이유가 있다. 아침마다 새로운(애3:23) 그의 은총의 열매들, 즉 우리가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을지라도 또 다시 필요하여 늘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은총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감사와 경건하고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야 하며, 단 위의 불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해야 한다(레6:12).

편안하게 하룻밤을 지냈다면 그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밤이 편안하게 되기 위해서 동시에 얼마나 많은 자비가 베풀어졌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은혜가 우리에게는 허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둘 곳이 없다. 우리 주님 자신이 그러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거할 집이 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처가 있다. 아마도 대궐같이 좋은 집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울 침상이 있고, 그것도 따뜻하고 안락하며, 은빛 나는 좋은 것으로서 들어가 누우면 마치 시온에 있는 것처럼 편안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귀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던 어떤 성도들은, 사막이나 산에서 혹은 동굴 속에서 방황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누울 침상은 있으되 친구들의 병이나 원수의 두려움 때문에 밤을 지새우며 누울 수도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울 수 있으며 우리를 두렵게 하는 자도 없으며 창, 칼의 위협이나 전쟁과 핍박의 두려움도 없다. 자리에 누울 수는 있으나 마음의 고민과 몸의 고통으로 인하여 새벽까지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근심 어린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워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잔다. 우리의 잠은 달고 피로를 풀어주며, 고민과 수고 사이에서 쾌적한 안식이 된다.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듯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한번 자리에 누워 잠이 들어서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잠을 자 침상이 무덤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워서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났으며 쉼을 얻고 새롭게 되었다. 우리가 여느 때처럼 누워 자고 깨어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시3:5)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는가? 아침 햇살이 기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아침을 맞게 해주신 주님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아침에 입을 따뜻한 의복이 있다(욥37:17).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치장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가?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는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기 위해 주신 털과 천으로서 모두 그의 것이다. 그러니 옷을 입고 난 그 아침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이처럼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건강하고 평안한가? 오랫동안 그렇지 않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그러한 것들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특별한 은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평상시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화재나 도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이나 보이지 않는 많은 위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우리 자신이나 가족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밤에는 울음이 계속되다가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큰소리로 외칠지도 모른다. 파괴하는 천사가 밤중에 날아다니며 흑암 속에서 다른 집 창문에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갔으니 문설주에 뿌려진 언약의 피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어둠을 조성하여 캄캄하게 하고는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천사들의 원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며, 은혜를 베푸는 우리 주위의 착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모든 영광을 천사들의 하나님께 돌리라.

 

▶ 아침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경배하게 하는 신선한 그 무엇이 있다.

안락과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소견이 좁은 소행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전 인류에게는 유익을 주는 그의 섭리 가운데서 더욱더 일반적인 주님의 지혜와 권능들을 관찰해야 한다.

시편 19편은 "아침의 묵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우리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빛과 권세로부터 우리가 받는 유익뿐만 아니라, 하늘에 장막을 베푸시고 기둥을 세우시며 운행하는 법을 세우신 여호와께 그들이 드리는 영광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따라 계속 운행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이 사실을 선포하고 밤이면 밤마다 이 지식을 나타낸다. 심지어 천지를 지으신 위대한 창조자이시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도 드러내신다. 원래의 약정에 따라 빛과 어둠이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회전하면서 교대로 다스리고 있음은 창조의 역사를 말해 주는 신성한 묵시나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약속(창8:22) 낮과 밤에 대한 그의 약정(렘33:20)에 대한 것들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줄 수 있다.

새벽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처소와 시간을 알아 그것을 지키며, 아침 햇살이 땅 끝과 하늘을 비추며, 그 빛을 받자마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는지를 바라보라(욥38:12-14). 최근에 어느 훌륭하신 목사님의 이런 표현을 듣고서 매우 기뻤다. "우리와 같은 비천하고 죄 많은 자들에게 아침 햇살을 비춰 주기 위해 태양은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리고 성장한 신랑처럼 무한한 기쁨을 안고 그의 방에서 나와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장사와 같은 태양을 바라보라. 그 빛이 얼마나 밝으며 그 미소는 얼마나 감미로우며 그의 세력은 얼마나 강한지를 살펴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이러한 불멸의 자연에 대한 설교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이 없는데, 그러한 설교자들의 소리에 메아리치며 즐기는, 아침과 저녁을 만드신 주께 영광을 돌리는 주를 섬기는 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남들이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아침마다 찬송을 드리자.

 

▶ 아침은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되므로 그의 이름을 묵상하며,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다윗은 본보기처럼 우리는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시63:6) 했는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깨어나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입술의 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마음의 묵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나는 제사가 도리 것이다. 마음에서부터 좋은 말이 우러나오면 여러분의 혀로 하여금 왕 앞에 그것을 쏟아 놓는 필객의 붓과 같이 되게 하라(시45:1).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므로 밤낮으로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을 은혜의 보좌로 인도할 것이며, 그곳에서 많은 좋은 것들로 우리를 채워줄 것이다.

 

▶ 아침은 지난 밤에 품었던 헛되고 죄된 생각들을 반성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헛되고 죄된 생각들을 반성하고 용서받기 위하여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적으로 아침에 기도드리도록 고안된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분주하게 하루를 지내면서 일관성이 없는 말과 행실로써 죄를 짓게 되는 것처럼, 부패된 생각과 절제되지 못한 환상 속을 방황하며 밤의 적막 속에서도 죄를 짓게 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이 죄가 된다는 것(잠24:9)은 분명하다. 미련한 생각은 곧 죄된 생각이며 모든 죄의 시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너무나 많은 헛된 생각들이 숨어 있다.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군대라 한다. 누가 이러한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수보다도 더 많다. 우리는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 그것을 행하는 자"(미2:1)를 보게 된다. 밤이 되면 수없이 의심하고 염려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미혹케 되고, 부정하고 음란한 생각들로 오염되고, 솟구치는 교만한 생각들로 인해 도취되며, 경건한 생각들은 수없이 많은 무례한 것들에 의해 침해당한다.

우리와 함께 눕고 함께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며,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라 다니는 이 부패된 샘에서부터 이런 샘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온다(전5:2). 많은 말뿐만 아니라 많은 꿈속에도 허다한 허영이 담겨 있다.

매일 밤낮으로 회개할 일을 저지르는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기 전에 집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방황하며, 반항과 고집으로 불평하며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며,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겠는가? 자백하여 용서받지 않은 죄를 안고는 하루의 일과를 안전하게 시작할 수가 없다.

 

▶ 아침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므로 하나님께 한 날의 모든 일에 함께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에 적합하다.

우리는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있는가? 그러니 기도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아침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같이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스3:4).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비롭게 섭리해 주실 것과 성령께서 은혜롭게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돌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그들이 잘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기도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있게 하자. 그것이 효과적으로 그들을 주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 가운데 두는 것이다.

경건한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우리도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한다(욥1:5). 그리하여 주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 위에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업을 위하여 나가려 할 때,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들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구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일들을 행하자. 믿음으로 우리가 그 일에 번영하고 성공할 것과 주님께서 그 일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시며 피곤할 때 붙들어 주시고 그 일들을 계획할 때에 인도해 주시며 좋은 결과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여행을 하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가 주실 것을 기도드릴 수 없는 곳이라면 가지 말자.

일이 잘되어 갈 좋은 기회가 보이면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 손에 달려 있는 모든 것들, 즉 기술과 의지와 용기에 열심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하자. 유혹은 매일같이 뒤따른다. 어떤 것들은 미리 예견했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유혹에도 끌려가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고 어떤 일터에 들어가더라도 선을 행하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좋은 일을 당하고 해를 받지 않도록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데 열심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하루가 될지, 무슨 소식을 듣게 될지, 밤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일들과 어려움도 은혜 가운데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서기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날의 걱정은 그날로 충분하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오늘은 오늘 일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란 모든 선한 말과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채워 주시며, 모든 악한 말과 악한 일에 대항하여 우리를 온전히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밤에 또다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루 종일 생각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적용

 

첫째, 태만은 죄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마음속에 새겨 두라.

아침에 성경 보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소흘히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전혀 하지 않거나 거짓되게 행한다. 전혀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혹 드린다 해도 상처난 것, 절름발이거나 병든 것으로 드린다. 기도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해도 올바르게 하나님께 우러러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아침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표하시기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에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부끄럽게도 그의 자녀로서의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며, 우리 자신들이 아침 경건회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린 어리석음과 죄를 인하여, 오늘 아침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열매를 찾으시며 우리의 골방에 오셨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셨고, 혹 발견하셨더라도 전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거나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찮은 것을 핑계삼아 아침 경건회를 제쳐놓게 되면, 좋은 구실이 없을 때는 양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뼈가 쇠잔하여지며, 점점 더 냉담해져 경건회 갖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

 

둘째, 아침 경건의 시간에 대한 권고의 말을 간직하라.

은밀한 가운데 계속해서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를 바라라.

 

▶ 지속적으로 아침 경건의 시간을 지키라.

이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행한 전통적인 관습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주께 받은 계명과 관련된 의무이기에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해 놓은 시간을 지키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이제까지 은밀하게 기도드리는 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상태에서 살았거나 이 일을 종종 소흘히 한 사람들도 지금부터는 이것이 여러분들의 어떠한 일과보다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며 그날의 위로 중 가장 즐거운 부분으로 여기고, 끊임없는 주의와 기쁨을 가지고 이를 행해야 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아무도 이 의무를 면하려고 핑계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야기되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기도하라. 계속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손이 일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처럼 자선금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기도는 다같이 해야 한다. 부자라고 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이 일을 지나칠 수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기도를 시작하기에 이르지 않으며, 아무리 고령의 사람일지라도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더 이상 기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말년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기도할 수 없다고 변론하지 말라. 굶주려서 멸망케 되었거든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하며, 죄로 말미암아 파멸케 되었거든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할 수 없다는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군인이 무기를 혹은 목수가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함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부르심을 입은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함이다. 여러분이 남들과 같이 기도를 잘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아침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분명히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을 원하기보다는 잠자는 시간을 갖기를 더 바라는데,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시간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루의 모든 일과는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때 더욱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하기에 적합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이삭은 기도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으며, 시편 기자는 지붕 꼭대기 한쪽 구석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은밀한 중에 기도할 수 없다 해도 있는 그 상태에서 기도하라. 과시하기 위해서 남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는 것이 나쁘지,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젊은 시절, 런던으로 여행을 하는 길에 우연히 한 신사와 동행하게 된 일이 기억난다. 그는 로마 카톨릭 신자임을 털어놓기를 꺼리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가는 동안 많은 논쟁을 했는데 그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그는 카톨릭에서는 어느 때나 사람들이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당 문을 늘 열어 놓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 말에 내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 같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격분하여 "당신에 신교도들은 아무 곳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걸로 나는 알고 있소"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신교도들과 함께 여행한 적이 많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여관 방에 지내기도 하면서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밤이든 아침이든 기도하는 사람은 장로교인이었던 단 한 사람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기보다 악의로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을 일례로, 우리가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보며 기도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은밀한 곳에 있지 못하더라도 빠뜨리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빠뜨리고 지나침으로써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지라.

이 일이 형식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며 예배드릴 때 관습적으로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 단순히 기도한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므로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며,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드려야 한다(약5:17). 에바브라가 기도했던 것 같이(골4:12)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을 배우자. 그리하면 우리를 부요케 해주는 것은 바로 부지런히 이 일을 행하는 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기도를 길게 하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또한 여러분이 유창하게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며,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정직한 자들의 기도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면서 기도드린다면, 아침 경건의 시간을 통해 오는 위로와 축복은 지나쳐 가는 아침 구름 같지 않고,점점 더 밝게 비치는 아침 햇살과 같을 것이다.

 

 

 

2008.01.04  메튜 헨리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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