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3 (토마스 왓슨)

 

 

제 3장 왜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가

1.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큰 이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친밀하고 친근한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렘 32:38) 이 계약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 백성에게 선을 이루며 틀림없이 이룬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시로다”(시 50:7)
“네 하나님”, 이 말은 성경에서 가장 달콤한 말이며, 가장 뛰어난 관계를 함축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을 수 없다면, 따라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선을 이루지는 않는다. “나는 네 하나님이라”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의원과 환자의 관계 : “나는 네 의원이다.”
하나님은 솜씨 좋은 의원이시다. 그분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이한 기질을 관찰하시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어떤 기질은 친절한 성향에 속하여 자비에 이끌린다. 어떤 기질은 거세고 억세며 복잡하다. 이런 기질은 하나님은 좀 더 강력하게 다루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똑같이 다루지 않으신다. 강한 자에게는 시련을 주시고 약한 자에게는 강심제를 주신다.
하나님은 신실한 의원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주시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은 주실 것이다. 의원은 환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하여 애쓰지 않고 병을 고치려고 애쓴다. 우리는 아주 쓰라린 시험이 닥치는 것을 불평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원이심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기분을 맞추기보다 우리를 치유하려고 애쓰신다. 하나님이 자녀를 가혹하게 다루실지라도 그들은 안전하며 치유를 받는다.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2)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함축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웃음을 보이거나 매를 때리거나 그것은 자녀의 유익을 위함이다. 나는 네 하나님, 네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네 선을 위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하나님의 징계는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를 해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아버지가 자녀의 파멸을 추구한다면, 그에게서 나온 자녀가 그의 형상을 담고 있겠는가? 그의 모든 배려와 계획은 자녀를 위한 것이다. 그가 자녀 말고 누구에게 유업을 주겠는가? 하나님은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인자를 피조물에게 베푸신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사 9:6) 그분은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셨다. 우리가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영원까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아버지는 사는 동안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 자녀는 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 아버지 역할을 그만두는 일이 없으실 것이다. 당신이 신자라면 결코 죽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라면, 당신은 결코 파멸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선을 이룬다.
3)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친밀하고 달콤한 관계이다. 남편은 배우자의 선을 추구한다. 남편이 아내를 파멸시키려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엡 5:29)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는 혼인 관계가 있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전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분은 손바닥에 그들을 새기신다. (사 49:16) 그분은 마음의 인처럼 그들을 품으신다. (아 8:6) 그분의 그들의 속량물로 나라들을 주실 것이다 (사 43:3)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친근한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사랑으로 가득하신 남편이라면, 배우자의 선을 추구하실 것이다. 그분은 상처를 싸매시든지 아니하면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바꾸실 것이다.
4)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친구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나의 친구이다”(아 5:16)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친구는 자신의 절반이다. 그는 친구에게 선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힘쓴다. 그는 친구의 안녕을 자신의 안녕으로 여기고 증진시킨다.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위하여 감히 왕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삼상 19:4)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실 것이다. 거짓 친구가 있다. 그리스도는 친구에게 배반당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최고의 친구이시다.
그분은 신실한 친구이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그분은 사랑에 신실하시다. 그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셨다. 여기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있었다. 그분은 약속에 신실하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약속하신 것인데”(딛 1:2) 그분은 약속을 변경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깨뜨리실 수는 없다. 그분은 행하시는 일에서 신실하시다. 그분은 고통을 주실 때 신실하시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니 이다.”(시 119:75) 그분은 우리를 은처럼 체질하고 단련하고 계신다.(시 66:10)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친구이시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친구는 종종 위기 대 넘어진다. 여자가 꽃을 다루듯이 많은 사람은 친구를 다룬다. 꽃이 신선할 때 여자는 꽃을 품속에 두지만, 시들기 시작하면 내팽개친다. 혹은 여행자가 해시계를 대하는 것과 같다. 만일 해가 해시계에 비치면 여행자는 길에서 나와 시계를 본다. 그러나 해가 비치지 않으면 여행자는 그것을 지나치며 결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이 번영할 때라면, 친구들이 쳐다본다. 그러나 역경의 구름이 끼면 그들은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친구이시다. 그분은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죽음의 그늘에서 걸었지만, 곁에 친구가 계심을 알았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결코 자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그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하나님은 그런 친구이시므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 친구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친구는 없다.
5)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좀 더 가까운 관계를 함축한다.
즉 머리와 지체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합이 있다. 그는 “교회의 머리”라 불리신다. (엡 5:23) 머리가 몸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는가? 머리는 몸을 인도하며 몸과 공감하며 영혼의 샘이 되며 몸에 영향을 주고 위로를 공급한다. 머리의 모든 부분은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눈은 망루처럼 있어서 몸에 다가올 위험을 탐색하고 막기 위하여 보초를 선다. 혀는 맛보는 자이며 웅변가이다. 몸이 작은 우주라면 머리는 이 세계의 태양이다. 이 태양으로부터 이성의 빛이 나온다. 머리는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의 신비한 몸을 이룬다. 우리의 머리는 하늘에 계시며, 분명 그분은 몸이 상하게 하지 않으시고 몸의 안전을 도모하신다. 그리고 신비한 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협력하게 하신다.

2. 모든 것이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협력한다는 명제에 담긴

1)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면, 거기에 섭리가 있음을 배운다.
사물들은 저절로 선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과 쟁점을 처리하시는 위대한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신다
.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는 그의 섭리적 왕국을 뜻한다. 세상에 있는 것은 제2원인, 사람들의 계획, 별들과 행성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다.
섭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결정, 모든 것을 그 시대와 사건에 일어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사물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이루든, 하나님이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신다. 우리는 에스겔 1장에서 바퀴에 관하여 읽는다. 바퀴에 눈이 있고 바퀴가 움직인다. 바퀴는 전우주이며, 바퀴의 눈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바퀴의 움직임은 아래 이 땅의 모든 것을 돌아가게 하는 섭리의 손이다. 어떤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섭리의 결과이다.
2)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행복한 상황을 주목하라.
가장 좋은 것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을 이룬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시 112:4) 아무리 깜깜하고 구름 낀 하나님의 섭리라도 정직한 자에게 햇살을 비춘다. 참된 신자는 얼마나 복된 상황에 있는가! 그는 죽을 때 하나님께 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것이 그에게 선을 이룰 것이다. 고통도 그에게 유익이 된다. 불이 황금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가 밀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는 밀과 가라지를 분리시킬 뿐이다. 거머리가 몸에 무슨 해를 끼치는가? 거머리는 나쁜 피를 빨아먹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하여 막대기를 사용하실 뿐이다.
고통은 여러 번의 말씀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룬다. 고통은
“귀를 열어 교훈을 한다.”(욥 36:10) 하나님이 괴롭게 하실 때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는 것은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켜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선을 가져다주는가! 성도는 매 맞고 부서질 때 가장 달콤한 향기를 낸다. 고통의 뿌리는 쓰지만 열매는 달콤하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고난은 하늘로 가는 대로이다. 고통은 냉혹하고 힘들지만 최고의 길이다. 궁핍은 우리의 죄를 굶겨 죽인다. 질병은 은혜를 더욱 유익하게 만들 것이다.(고후 4:16) 책망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벧전 4:14) 때문에 받는다. 죽음은 눈물의 병을 막고 낙원의 문을 열 것이다. 신자의 죽는 날은 영광으로 올라가는 날이다. 그래서 성도는 재산 목록에 고통을 포함시킨다. (히 11:26)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이집트 왕의 호의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멸망했을 것이다. 나의 건강과 재산을 잃지 않았다면 나의 영혼을 잃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보라.
모든 것이 선을 이룰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신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더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신앙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진짜 현자의 돌이다. 신앙의 가장 시큼한 부분, 즉 고통스러운 부분을 택하라. 거기에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고난을 누그러뜨리신다. 그분은 설탕으로 쓴 쑥을 감미롭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얼마나 경건하게 하는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실패자가 된 사람은 없다. 이로써 당신에게 유익이 찾아올 것이다. 풍부한 선, 은혜의 달콤한 증류수, 숨겨둔 만나,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라. 그분의 이익을 도모하라.
4) 불의한 자의 비참한 처지를 주목하라.
경건한 자에게는 악한 것이 선을 이룬다. 악한 자에게는 선한 것이 해를 끼친다.
(1) 현세의 좋은 것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세네카가 말하듯이, 부와 번영이 유익이 되지 아니하고 올무가 된다. 미갈을 올무로 다윗에게 주었듯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한 자에게 올무로 주어졌다. (삼상 18:21) 독수리는 향수 냄새를 맡으면 병이 난다고 한다. 그처럼 불의한 자는 번영의 달콤한 향수 냄새를 맡고 병을 얻는다. 그들의 자비는 개에게 던진 독이 든 떡과 같다. 그들의 상은 사치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으나, 미끼에는 낚시 바늘이 있는 법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시 69:22) 그들의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의 진노의 소스가 뿌려진 이스라엘의 메추라기와 같다. (민 11:33) 교만과 허영은 번영의 쌍둥이 형제이다. “네가 살찌고”(신 32:15)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을 버렸다. 부는 거미줄과 같아 유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사의 알처럼 해롭다.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불의한 자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비참함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자석이 아니라 그들을 지옥 깊이 빠뜨리는 바위이다. (딤전 6:9) 그들의 맛있는 음식은 하만의 잔치와 같다. 그들의 거창한 잔치가 다 끝나면 청구서에는 죽음이 적힌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2) 영적으로 선한 일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그들은 천상의 복이라는 꽃에서 독을 빤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배는 그 바람에 밀려 포구에 이르고 다른 배는 바위에 부딪힌다. 사역의 숨결은 선한 자를 하늘에 이르게 하지만 속된 죄인은 지옥에 이르게 한다. 그 입에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향기가 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사 6:10). 선지자는 슬픈 메시지를 받아 장례식 설교를 전했다. 불의한 자는 설교를 듣고 더욱 나쁘게 된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암 5:10). 죄인은 죄를 지으면서 더욱 결연한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라도 그들은 자신이 계획한 바를 행하려 한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렘 44:16). 전한 말씀은 치유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사람이 설교를 듣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얼마나 두려운가!
기도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 15:8). 불의한 자는 매우 완고하다. 그는 기도를 아니 해도 범죄하고 기도를 해도 범죄 한다.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시 109:7).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나쁜 체액이 되고 몸에 병을 일으킨다고 하면, 서글픈 심판이다. 불의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유익을 끼쳐야 하는 기도인데도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죄를 대적하여 기도하고 기도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다. 그의 활동은 무신론으로 오염되고 위선으로 더럽혀진다. 하나님은 그 활동을 싫어하신다.
성찬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너희가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게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1,22). 어떤 신앙 고백자는 우상 잔치에 계속 참여하면서도 주의 상에 오곤 했다.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세속적인 사람들은 죄로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주의 상에 참여하러 나올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는 것이다. 죄인에게는 그 잔에 죽음이 있어서, 그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 (고전 11:29) 그래서 성찬은 참회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해를 끼친다. 빵조각을 먹은 후, 마귀가 들어온다.
그리스도께서 절망적인 죄인에게 해를 끼치신다. 그분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벧전 2:8)이시다. 그분은 인간 마음의 부패함을 통하여 그리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믿기보다 그분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태양은 순수하고 유쾌한 본성을 갖고 있지만 아픈 눈에는 해롭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흥함뿐만 아니라 패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 (눅 2:34) 죄인은 구세주에게 걸려 넘어지며 생명나무에서 사망을 딴다. 화학 기름이 어떤 환자는 회복시키지만 어떤 환자는 파멸사키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피도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죄가 된다. 여기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자의 비할 데 없는 비참함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며, 심지어 강심제를 먹고도 그들은 죽는다.
5) 여기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돌이켜 성도의 유익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화학품을 써서 불순물 찌꺼기에서 황금을 추출하실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이는 그 지혜의 놀라움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다. 주님은 요셉의 감옥을 승지의 한 계단으로 만드셨다. 요나가 구원받을 길이 없었지만, 물고기에게 삼키워서 구원받았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셨고(시 106:41)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수단이었다.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매였지만, 그를 맨 쇠사슬은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빌 1:12) 하나님은 궁핍을 통하여 부요케 하신다. 그분은 재산이 달아나게 하여 은혜가 늘어나게 하신다. 피조물이 우리로부터 멀어질 때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묘하게 일하신다. 그분은 혼란 가운데서 질서를, 부조화 가운데서 조화를 이끌어 내신다. 그분은 자주 부정한 자를 쓰셔서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욥 9:4). 그분은 사람의 분노에서 자신의 영광을 거두실 수 있다. (시 76:10) 불의한 자가 자신이 의도한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선을 행하게 된다.
종종 하나님은 희망이 거의 없을 때 도움을 주시며, 자기 백성의 생각에는 망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분은 대제사장의 악의와 유다의 배반을 사용하여 세상을 구속하신다. 경솔한 열정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는 일을 탓하기 쉽다. 마치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철학을 비난하거나 눈먼 사람이 풍경을 탓하는 것처럼 말이다
.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욥 11:12) 지각없는 동물은 섭리를 비방할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이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 길은 헤아리기보다 감탄해야 하는 것이다. 긍휼과 놀라움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가장 역행하는 시절이 그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는 그 지혜는 얼마나 엄청나고 무한한가!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외적인 시련과 당장 닥친 일에 실망할 이유가 지극히 적음을 배우라.
우리에게 선을 끼치는 것에 실망하다니 말이 되는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이나 초조함이라는 죄에 가장 잘 빠진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 비틀거리거나 초조 가운데 안달하기 쉽다. 사람들이 불만과 초조로 하나님을 거슬러 달아날 때, 이는 그들이 이 본문(롬 8:28) 을 믿지 않는 표시이다. 불만은 감사치 않는 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보다 긍휼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만은 불합리한 죄이다. 왜냐하면 고난이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만은 우리를 범죄케 하는 죄이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8). 안달하는 자는 악을 행하기 쉬울 것이다. 안달하는 요나는 범죄 하는 요나였다. (욘 4:9)
마귀는 열정과 불만의 숯에 바람을 보내며, 그 불로 몸을 데운다. 이 화난 독사를 우리 품에서 키우지 말자. 이 본문을 듣고 인내를 키우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에게 선을 이루는 것을 불평해야 되겠는가? 한 사람이 친구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는데 돈주머니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고 해도, 친구는 그렇게 해서 돈주머니를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지만, 이는 우리를 부요케 한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큰 영광을 이루는데 우리가 불평해야 하겠는가?
7) 여기서 성취된 성경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선을 행하시나”(시 73:1).
우리는 견디기 힘든 섭리를 보고, 주님이 그 백성에게 재를 뒤집어씌우시는 것을 보고, “(그들을) 쑥으로 취하게 하시는”(애 3:15)것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호되게 하신다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돌이켜 선이 되게 하는 그분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분은 죄를 없이하고 은혜를 일으키시니 선한 분이 아닌가? “우리가……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고난의 깊은 것은 우리를 정죄의 깊음에서 건지기 위함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옳으시다 하자. 우리의 외적인 형편이 점점 나빠질 때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도다”하고 말하자.
8) 성도가 어떤 이유로 감사의 활동에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 살펴보라.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하다. 그들은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별로 하지 않는다. 사도는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왜 그래야 하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의원이 쓴 약을 주어 괴롭게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감사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신다.
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셨을 때 감사했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때 감사할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거기서 선을 이루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양의 상질물인 수금을 손에 들고 있는 성도에 관하여 읽는다. (계 14:2) 우리는 눈물이 가득하고 입에 불평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손에 수금을 들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것은 성도에게만 있는 일이다. 모든 새가 봄에 노래할 수 있지만, 지독히 추운 겨울에 노래하는 새도 더러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잘살 때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참된 성도는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해가 뜰 때뿐만 아니라 해가 질 때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지독히 어려운 일에 떨어질 때도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으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9) 가장 나쁜 일이 신자에게 선을 이룬다면 가장 좋은 것, 즉 그리스도와 천국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하라.
이런 것들은 얼마나 많이 선을 이루겠는가! 만일 십자가에 그토록 많은 유익이 있다면 면류관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골고다에서 그렇게 귀한 포도송이가 자란다면, 가나안에서는 그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마라의 물에 단 것이 있다면, 낙원의 포도주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막대기 끝에 꿀이 있다면, 그 황금 홀 끝에는 어떠하겠는가! 고난의 떡이 그토록 맛있다면 만나는 어떠하겠는가! 천상의 음식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치고 때리심이 선을 이룬다면, 그 얼굴의 웃음은 어떠하겠는가! 시험과 고난이 즐거움을 갖고 있다면 영광은 어떠하겠는가! 악에서 그렇게 많은 선이 나온다면, 악이 없는 선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징계의 긍휼이 그렇게 위대하면 그분의 상급의 긍휼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
10)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일인지 생각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찬가를 부른다. 그러면 천사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셔서 우리를 천사보다 존귀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 천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 복의 창고에서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복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을 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안녕을 이루려고 애쓰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 세워졌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분은 그 완전에서 무한하시므로 우리에게 받아 그 완전을 늘리실 수 없다.

대답. 참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지만, 복음주의적 의미에서는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생각을 품게 할 때, 하나님은 이를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보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게 만들 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는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킬 수 있겠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최종의 목적으로 삼을 때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모든 지류가 중심부에서 만나듯이,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끝난다.
둘째, 우리는 은혜 가운데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킨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열매 없음은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는 백합처럼 아름답게 자라고 백향목처럼 크게 자라고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셋째, 우리는 행하는 모든 것의 칭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스웨덴 왕의 탁월하고 겸손한 연설이 그러했다. 그는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려 일을 행하기도 전에 물러나지 않을까 두렵다는 말을 했다. 누에가 공들여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은 명주실 아래 숨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을 때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고전 15:10)하고 말했다. 이 연설이 교만으로 가득 찬 것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어 은혜를 거저 주시는 분의 머리에 두었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콘스탄티누스는 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곤 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한 일 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고 유명하게 만들기 위하여 힘쓰자.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덕을 이루게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그분을 높이자. 본문에 언급된 특권을 생각하며 더욱 그리하자.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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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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